Essay

정전 없는 세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키는 사람들

2026.03.28 · 3 min read · KO

지난 2025년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이 갑자기 암흑으로 뒤덮였다. 수천만 명이 순식간에 전기를 잃었고, 병원 응급실은 비상 발전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지하철은 멈추고 신호등은 꺼졌다. 원인이 규명되기까지 사람들은 불안과 혼란 속에서 긴 밤을 보냈다. 우리는 전기가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날 새삼 온몸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을 이토록 촘촘히 지탱하는 전력망은 과연 누가 지키고 있을까. 발전소가 전기를 만든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그 전기가 안정적으로 우리 집 콘센트까지 흘러오게 하는 ‘보조 서비스(Ancillary Services)‘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전기를 만드는 일만큼이나, 그것을 안전하게 흘려보내는 일도 고도의 기술과 치밀한 제도를 필요로 한다. 보조 서비스는 바로 이 두 번째 역할을 담당하는, 전력망의 숨은 주역이다.

전기는 만들어지는 순간 동시에 써야 하는 특이한 에너지다. 생산량과 소비량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치해야 하며, 어긋나는 순간 주파수가 흔들리고 최악의 경우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다. 보조 서비스는 이 균형을 실시간으로 유지하는 전력망의 보이지 않는 안전장치다. 주파수 제어, 전압 조정, 정전 이후 계통 복구까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지금껏 이 역할은 주로 대형 화력·수력 발전소가 맡아왔다. 발전소를 켜고 끄며 전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일, 그것이 보조 서비스의 오랜 모습이었다.

문제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석탄·가스 발전소는 묵직한 회전체가 내뿜는 관성 덕분에 주파수가 흔들려도 자연스럽게 버텨준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은 인버터를 통해 전력망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런 물리적 관성이 전혀 없다. 재생에너지 비율이 높아질수록 전력망은 조그만 충격에도 불안정해지기 쉬운 구조로 바뀐다. 이른바 ‘저관성 그리드’ 문제다. 한때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던 이 서비스가 탄소중립 시대에 전력망 운영의 핵심으로 부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단순히 발전원을 교체하는 것을 훨씬 넘어, 보조 서비스 체계 전반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반드시 함께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에 전 세계는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2011년부터 ‘DS3(Delivering a Secure, Sustainable Electricity System)‘라는 제도를 도입해 배터리와 풍력 발전기가 주파수 이상을 2초 안에 감지하고 대응하도록 했다. 덕분에 전체 전력의 75%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면서도 계통 안정성을 유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영국은 매일 경매를 통해 배터리와 전기차로부터 이 서비스를 구매하는 체계를 구축했고, 일본은 태양광·풍력 예측 오차를 전담하는 예비력 상품까지 따로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발전소의 전유물이었던 역할이 이제는 시장의 모든 참여자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

특히 눈여겨볼 기술이 있다. 주차된 전기차 배터리를 전력망 안정화에 직접 활용하는 ‘차량-계통 연계(V2G, Vehicle-to-Grid)’ 기술이다. 덴마크의 실증 사업에서는 전기차 한 대가 이 서비스에 참여해 연간 약 16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가정용 배터리, 스마트 냉장고, 심지어 공장 설비까지 전력망의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하는 시대가 이미 눈앞에 와 있다. 에너지를 소비하기만 하던 우리가 생산자이자 안전망의 든든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실증의 차원을 훌쩍 넘어, 에너지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고 있다.

보조 서비스의 혁신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제도와 시장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소비자와 기업 모두가 전력망을 지키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가 주력이 되는 미래 전력망에서, 보조 서비스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고 더 다양해져야 한다. 전기차, 배터리, 스마트 가전 모두가 전력망 안정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는 미래, 그 미래를 지금부터 차근히 준비하는 것이 우리 에너지 정책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