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1,500 MW가 사라진 그날

2026.05.06 · 3 min read · KO

2024년 7월 10일 저녁 7시. 미국 동부의 어느 230 kV 송전선에서 피뢰기 부품 하나가 고장 났다. 보호 시스템이 정상 작동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차단됐다. 송전 운영에서는 흔하디 흔한 사건이다. 매일 미국 어디선가 일어난다.

그런데 같은 지역, 정확히 같은 시각에, 1,500 MW의 전기 부하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한국 표준 원자력 발전소 한 기 반에 해당하는 양이다. 서울 강남구 전체가 쓰는 전력의 두 배쯤 된다. 송전망 운영자는 누구의 전기도 끊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1,500 MW를 가져갔다.

조사반이 데이터를 추적했다. 사라진 부하는 모두 데이터센터였다. 사고 지역은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곳이었고, 그 시설들이 일제히 그리드에서 자기 자신을 분리한 뒤 자체 배터리와 비상 발전기로 전환한 것이다. 송전 운영자는 자기들이 끊지 않은 부하가 사라진 풍경을 처음 마주했다.

데이터센터에는 무정전 전원공급장치(UPS)가 있다. 정전이 0.01초만 일어나도 서버가 죽기 때문에, 전압이 흔들리는 그 짧은 순간조차 그리드와 즉각 분리되도록 설계돼 있다. 한 시설로는 합리적인 보호 장치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수십 개 시설이 모이면, 이들은 동시에 같은 반응을 한다. 마치 같은 곡을 연주하는 합창단처럼.

부하가 한꺼번에 사라지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발전과 부하의 균형이 깨지면서 주파수가 올라가고, 송전선에 흐르는 전류가 줄면서 전압이 올라간다. 그날의 주파수는 60 Hz에서 60.047 Hz로, 전압은 7%까지 올라갔다. 발전기들이 자기 보호 동작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운영자들은 급히 무효전력 보상장치를 분리해 전압을 끌어내렸다. 사고는 1분 만에 진정됐다. 운 좋게 멈췄다.

미국 전력신뢰도공사 NERC가 추적한 결과, 같은 일이 텍사스에서는 훨씬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2023년 1월부터 2025년 9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스물여섯 번. 한 달에 한 번꼴이다. 한 번에 100 MW 넘는 부하가 일제히 사라졌다. 이번에는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암호화폐 채굴 시설이었다. 어느 사건에서는 사전 부하의 95%가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중국이 2021년 자국 내 채굴을 금지하자 채굴업자들이 대거 텍사스로 이주한 결과였다. 값싼 전기와 너른 땅이 그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문제가 떠올랐다. AI 학습용 데이터센터다. ChatGPT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을 학습할 때, 수만 개의 GPU가 동기화된 계산을 반복한다. 시설 전체 전력 소비가 1초에 한 번씩 100 MW 넘게 출렁인다. 일반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서는 보기 어려운, AI 학습 특유의 패턴이다. 우연히 그 리듬이 송전망의 자연 진동 주파수와 맞물리면, 그네에 박자 맞춰 발을 구르듯이 데이터센터 한 곳이 광역 송전망을 흔들 수 있다. 실제로 텍사스와 버지니아에서 관측됐다.

전력 엔지니어들이 100년 동안 의지해 온 가정이 있다. “발전기는 통제하지만, 부하는 그저 받아준다.” 발전소에는 엄격한 의무가 부과되고 부하는 자유로웠다. 가정집 에어컨이 송전망을 흔들 일은 없으니까.

NERC는 2026년 5월, 100년 만에 그 가정을 공식 폐기했다. 새 가이드라인은 일정 규모 이상 데이터센터에 발전소 수준의 책임을 부과한다. 정밀한 시설 모델 제출, 실시간 통신, 전압 외란을 견뎌낼 능력, 사이버 보안 통합. 부하가 더 이상 수동적 손님이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 권고는 향후 강제 표준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한국도 비슷한 풍경을 향해 가고 있다. 수도권에 데이터센터가 집중되고, AI 학습이 본격화되고, 송전 인프라는 따라가기 빠듯하다. 한국전력공사가 일부 신규 대형 부하 연계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 첫 번째 1,500 MW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 그것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전력망에는 오래된 표현이 있다. “전기는 가장 게으른 손님이다. 어디든 가장 짧은 길로 흐른다.” 100년 동안 손님이었던 부하가 이제 발언권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국 동부의 그날 저녁 7시에 시작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