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한 시골 마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던 목사가,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흐름을 통째로 바꿔놓은 사람이 되기까지. 칼 바르트의 인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정확히 겹쳐 있다.
1962년 4월 20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시간(Time)은 한 노년의 스위스 신학자를 표지에 실었다. 정치인이나 영화배우가 아니라 신학자가 시간의 표지를 차지한 일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 표지의 주인공이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였다.
그를 두고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평했다고 전해지며, 스코틀랜드 신학자 토머스 토런스(Thomas F. Torrance)는 그를 "근대가 알아본 보편 교회의 단 한 명의 진정한 박사"라 불렀다. 평가의 무게가 어떻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자신감 위에 세워졌던 유럽 개신교의 지적 풍경은, 바르트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그의 생애는 평탄하지 않았다. 시골 교회의 목사에서 출발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한가운데를 통과했고, 나치 정권에 충성서약을 거부한 대가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13권에 달하는 미완의 대작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Church Dogmatics)』을 평생 써내려갔으며, 가정 안에서는 풀리지 않는 갈등을 안고 살았다. 이 글은 그 생애의 줄거리를 따라간다.
칼 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Basel)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Fritz Barth, 1852-1912)는 신약학과 초대 교회사를 가르치는 신학 교수였고, 어머니 안나 카타리나 자르토리우스(Anna Katharina Sartorius, 1863-1938)는 보수적 개혁파 목사의 딸이었다. 칼은 다섯 남매 중 맏이였다. 두 동생인 페터 바르트(Peter Barth, 1888-1940)와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 1890-1965)는 각각 칼뱅 연구자와 철학자가 된다.
아버지가 베른(Bern)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르트는 베른에서 성장한다. 어린 칼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 골목대장 기질의 아이였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의 패싸움 한복판에 있었고, 열 살 무렵 처음 극장에 갔을 때는 정적이 흐르는 무대 앞에서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즐거워했다. 후일 강단에서 보여준 격정적 어조에는 이때의 기질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바르트는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보수적 노선과는 처음부터 결이 달랐다.
1904년 베른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바르트는 이후 베를린, 튀빙엔, 마르부르크 대학을 거치며 당대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밑에서 배웠다. 베를린에서는 교회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의 세미나에 참석했고, 마르부르크에서는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19세기 초 독일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사상에도 깊이 매료되었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정치적 좌파와 무관하다. 19세기 후반 독일 개신교 신학의 한 흐름을 가리키는 학술 용어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성경을 일반 역사 문헌처럼 비판적으로 읽는다. 둘째, 과학·철학이 던지는 질문들에 응답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재해석한다.
비유하자면, 옛 성을 허물지 않고 내부를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셈이다. 인간의 도덕적 진보와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고, 문화의 발전과 기독교 정신은 서로 잘 어울린다고 보았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자신감과 잘 맞물려 있었다.
1908년 11월, 바르트는 아버지에게 안수를 받아 스위스 개혁교회의 목사가 된다. 이듬해부터 제네바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신학교 책상에서 떠나 처음으로 회중을 마주한 시기였다.
1911년, 바르트는 스위스 아르가우(Aargau) 주의 작은 공업 마을 자펜빌(Safenwil)의 목사로 부임한다. 이듬해 그는 제네바 사역 시절 신앙수업에서 만났던 바이올리니스트 넬리 호프만(Nelly Hoffmann)과 1913년 3월 27일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딸 하나와 아들 넷이 태어난다.
자펜빌의 회중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였다. 바르트는 그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보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과 노동권 향상을 위해 강단에서 설교했고, 행정 당국과 자본가 측의 미움을 샀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곧 "자펜빌의 붉은 목사(Red Pastor)"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그의 깊은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카랑카랑하게 준비한 설교는 학교 수업 같았고, 회중의 관심은 미지근했다. 어느 날 그는 평생 교회에 나오지 않은 노인을 심방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목사님, 저는 늘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경찰과 엮인 적도 없습니다." 그는 깨달았다. 자기가 배운 자유주의 신학으로는, 교회 밖의 이 사람들에게 도무지 닿을 수가 없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검은 날"이 찾아왔다. 독일의 지식인 93인이 빌헬름 2세(Wilhelm II)의 전쟁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성명, 이른바 「93인 선언(Manifest der 93)」에 서명한 것이다. 그 명단에는 자신을 가르쳤던 하르낙과 헤르만의 이름도 있었다.
젊은 시절 흠모했던 스승들이 전쟁 광기에 손을 들어주는 모습 앞에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 전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인간 문화와 도덕적 진보를 신뢰하던 신학이, 정작 결정적 순간에 권력 옆에 줄을 섰다는 사실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이날, 1914년 8월의 어느 끔찍한 날에, 나의 신학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 칼 바르트, 후일의 회고
이웃 마을 목사이자 평생의 벗이 된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도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처음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다. 신은 누구인가.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문명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때, 신학은 무엇이라 응답해야 하는가.
1916년 여름, 바르트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주석하기 시작한다. 자펜빌 목사관의 책상에서 묵묵히 진행된 작업이었다. 첫 판 『로마서 강해(Der Römerbrief)』는 1918년 12월에 인쇄되어 1919년 출판일로 세상에 나왔다.
책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둘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고, 인간의 문화와 종교적 노력으로는 결코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다. 신을 알 수 있는 길은 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 사건 하나뿐이다.
이 메시지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공들여 쌓아 올린 '인간과 신의 친밀한 연속성'이라는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후일 자신이 이 책을 쓴 일을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어두운 교회 종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종을 매단 밧줄을 붙잡았더니, 그 바람에 마을 전체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 사람 같았다." ― 칼 바르트, 『로마서 강해』 회고담
예상치 못한 반향이 일었다. 학위 논문조차 없던 시골 목사가 쓴 주석서가, 독일어권 신학계에 파동을 일으켰다. 만족하지 못한 바르트는 1920년 가을부터 11개월에 걸쳐 책을 거의 처음부터 다시 썼다. 1922년에 나온 제2판은 사실상 새 책이었고, 영향은 한층 더 컸다.
『로마서 강해』 이후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의 신학을 사람들은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 혹은 '위기의 신학(theology of crisis)'이라 불렀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핵심은 이렇다.
인간이 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 말은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이 아는 사랑의 개념으로 신을 가둬버린다. 그래서 신학은 늘 한쪽에서 긍정하고, 반대쪽에서 부정해야 한다. 둘 사이의 긴장을 견디는 것 자체가 신학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망원경 초점을 맞추듯이,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디인가에서만 신학적 진술이 성립한다.
책 한 권의 힘은 컸다. 1921년, 박사 학위도 없던 자펜빌의 목사는 독일 괴팅엔(Göttingen) 대학교의 개혁신학 명예교수로 임용된다. 이후 그는 뮌스터(Münster, 1925-1930)와 본(Bonn, 1930-1935)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며 강의를 이어간다.
이 시기에 그는 점차 초기의 위기 신학적 어조를 가다듬어, 보다 체계적인 교의학(dogmatics,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학문) 작업으로 나아간다. 1927년 『기독교교의학(Christliche Dogmatik)』 1권을 출간했다가 곧 만족하지 못하고 폐기하고, 1931년 안셀무스(Anselmus) 연구를 거쳐, 1932년 마침내 『교회교의학』 제1권 1부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작업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1924년에는 그의 학문 인생과 가정사 모두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샤를로테 폰 키르쉬바움(Charlotte von Kirschbaum, 1899-1975), 흔히 "롤로(Lollo)"라 불린 여성이다. 이 관계는 글의 뒷부분에서 따로 다룬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 총리에 오른다. 나치 정권은 곧 독일 개신교를 정권의 이념에 종속시키려 했다. '독일적 기독교(Deutsche Christen)'를 자처하는 분파가 등장해 교회를 나치 이념으로 물들이려 했고, 십자가 옆에 갈고리 십자(swastika)를 나란히 걸어두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맞서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독일 부퍼탈-바르멘(Wuppertal-Barmen)에서 개신교(루터교·개혁교·연합교회) 대표들이 모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Confessing Church)' 총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문서가 「바르멘 신학 선언(Die 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바르트는 다른 대표들이 오후 휴식을 즐기는 동안 혼자 초안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최초 초안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한스 아스무센(Hans Asmussen)과 토마스 브라이트(Thomas Breit)도 작업에 참여했고, 루터교 신학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일부 조정이 가해졌다.
선언문의 첫 조항은 단호하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증언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듣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신의 유일한 말씀이다." ― 바르멘 선언 제1조 (1934)
다른 어떤 권력도, 어떤 자연도, 어떤 역사적 사건도 신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정권을 향한 정치적 비난이 한 글자도 들어가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거부였다. 신학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예다.
같은 해 가을, 바르트는 또 다른 전선에서 글을 쓴다. 동료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가 같은 해 봄에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이라는 글을 발표해, 인간이 창조 질서 속에서 신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 일정한 자리를 인정하자는 제안이었다.
바르트의 응답은 단 한 단어로 요약된다. 1934년 10월 발표한 글의 제목은 「아니오! ― 에밀 브루너에 대한 답변(Nein! Antwort an Emil Brunner)」이었다. 그는 자연 안에서 신을 알 수 있는 통로를 인정하는 순간, 결국 '피와 흙(blut und boden)'을 신의 계시로 떠받드는 나치 신학에 문을 열어주게 된다고 보았다. 신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의 자기 계시뿐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자연신학은 노을, 양심의 가책, 우주의 질서 같은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해 신의 존재나 속성을 추론하는 신학 전통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이 대표적이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학자들 사이의 점잖은 토론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4년의 독일은 평화롭지 않았다. 어떤 신학자들은 '독일 민족(Volk)'과 '아리아인 혈통' 같은 자연적 범주에서 신의 뜻을 읽으려 했다. 바르트의 눈에, 자연 안에서 신을 읽어내려는 시도와 민족에서 신의 뜻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결국 같은 뿌리였다. 인간의 처지·역사·문화 안에 신적 권위를 끌어들이려는 유혹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1935년, 본 대학 교수들에게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서약이 요구된다. 바르트는 "내가 개신교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 있게 따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는 한 서약할 수 없다고 답했다. 단서 없는 서약은 끝내 거부되었다. 그는 본 대학에서 해임된다.
스위스 시민권자였기에 추방으로 처리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운이었다. 같은 시기 그를 흠모하던 독일인 동료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끝내 1945년 4월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 수용소에서 처형된다.
스위스 바젤 대학교는 즉시 바르트를 조직신학 교수로 받아들였다. 그는 1935년부터 1962년 은퇴할 때까지 27년간 이 자리를 지킨다. 같은 도시, 같은 강의실에서 세계 곳곳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모여들었다.
바젤 시기의 핵심은 무엇보다 『교회교의학』 집필이다. 1932년에 시작해 1967년까지, 미완성으로 남기까지 그가 평생을 들여 써내려간 이 책은 결국 4부(권), 13책으로 묶였고, 한 권의 분량이 500-700쪽에 달했다.
한 명의 저자가 평생에 걸쳐 쓴 책치고는 인류사에 흔치 않은 분량이다. 인쇄된 페이지 수만 합치면 9천 쪽에 이른다. 같은 사람이 한 주제(기독교 교의)를 35년간 한 호흡으로 풀어낸 셈인데, 정작 결혼 양식이라든가 부활 신학 같은 부분은 채 쓰지 못한 채로 끝났다.
비유하자면, 노트르담 대성당을 한 명의 석공이 자기 손으로 짓겠다고 마음먹고 평생 망치질을 했다고 보면 비슷하다. 죽기 직전까지 끌을 놓지 않았는데도 첨탑은 끝내 미완성이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신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말씀하신 그 말씀에 응답하는 일이다. 출발점도 끝점도 인간 쪽이 아니라 신 쪽이다. 그래서 신학자가 할 일은 신을 설명하기보다, 신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정확히 자리 잡고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예정론(predestination)을 다룬 부분도 유명하다. 전통적 칼뱅주의는 신이 영원 전에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미리 정했다고 가르쳤다. 바르트는 이 교리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시 짠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하시는 신'인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며, 그 한 분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선택된다는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입장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으로 흐른다고 보았지만, 바르트 자신은 그 결론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 작업과 정치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창립 총회에서 주제 강연을 맡았고, 1954년 미국 에반스턴에서 열린 제2차 총회 준비에도 깊이 관여했다. 1959년에는 바젤 감옥의 재소자들을 위해 한 설교들을 모아 『포로된 이들에게 자유를(Deliverance to the Captives)』이라는 작은 책으로 묶었다. 이론신학의 거장이 매주 감옥에서 노숙자·범죄자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그의 신학이 끝내 책상 위 작업으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62년, 그는 76세에 은퇴한다. 같은 해 미국을 방문해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등에서 강연했고,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적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시간(Time) 표지에 실린 것도 이 해의 일이다. 1966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 직후 로마를 방문해, 가톨릭 신학자들과 만났다. 평생을 개신교 변호자로 살아온 사람의 만년에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바르트의 생애에는 어떤 신앙고백도 평이하게 덮을 수 없는 한 자리가 있다. 1929년부터 1968년까지 약 35년간, 그의 집에는 아내 넬리와, 비서이자 학문적 동반자였던 샤를로테 폰 키르쉬바움이 함께 살았다.
키르쉬바움을 처음 만난 것은 1924년이다. 이후 그녀는 바르트의 작업에 깊이 관여했고, 1929년 결국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다. 『교회교의학』 집필 과정에서 자료 정리와 토론, 일부 본문 작성에까지 관여한 학문적 협력자였다는 사실은 이후 연구를 통해 점점 분명해졌다. 바르트 자신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가족 모두에게 이 동거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넬리에게는 평생의 상처였고, 자녀들과 친구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바르트의 절친 투르나이젠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이 여러 차례 이 관계를 정리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자신도 죄책감과 갈등을 안고 살았다는 흔적이 사적인 편지들에 남아 있다. 키르쉬바움은 1960년대 들어 치매로 요양원에 머물게 되고, 1975년에 세상을 떠난다. 넬리는 그녀의 죽음 이후, 키르쉬바움의 무덤을 직접 돌보았다.
이 일을 두고 후대 연구자들의 평가는 갈린다. 어떤 이는 이를 위선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학문적 동반자 관계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사례라 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신의 절대 타자성을 그토록 강조했던 신학자도, 자기 삶의 모순 앞에서는 명료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살았다.
1968년 12월 9일 저녁, 바젤 브루더홀츠(Bruderholz) 거리의 자택에 있던 바르트는 평생의 벗 투르나이젠과 마지막으로 통화한다. 시대를 어둡게 보던 친구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보게, 그렇게 풀이 죽지 말게. 절대로!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베이징도 아니라네. 이 땅 위의 모든 일이 어디서 다스려지고 있는지 ― 저 위에서, 하늘에서 다스려지고 있다네." ― 칼 바르트, 사망 전날 밤의 전화 통화
다음 날 새벽 그는 잠든 채로 세상을 떠났다. 82세였다. 책상에는 다음 날 강연을 위해 쓰던 원고가 남아 있었고, 끝마치지 못한 마지막 문장이 종이 위에 멈춰 있었다. 평생 미완성이었던 『교회교의학』과 그 풍경이 닮아 있었다.
바르트의 신학을 흔히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 부른다. 본인은 이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종교개혁의 정통 교리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양쪽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고 신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자리로 신학을 끌고 간 일이었다.
그의 영향은 여러 갈래로 흘렀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를 사숙했고,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토머스 토런스(Thomas F. Torrance),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같은 신학자들이 그의 사유에서 출발하거나 그를 진지하게 비판하며 자기 길을 갔다. 한국 신학계에서도 김재준(金在俊)부터 시작해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바르트를 통과해 자기 신학을 세웠다.
그를 비판하는 흐름도 만만치 않다. 그리스도 중심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다른 종교의 진리를 인정할 여지를 없앤 것, 자연신학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창조 세계의 신학적 가치를 약화시킨 것,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너무 자주 '오직 신의 행위'로 답을 돌린 것 ― 모두 진지하게 다뤄지는 비판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가지는 부정하기 어렵다. 1914년 8월 이후, 그는 종교가 권력의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신학이 정권에 대해, 문화에 대해, 시대정신에 대해, 끝까지 '아니오'라고 말할 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 그것이 그가 자펜빌의 책상에서부터 바젤의 강의실까지 들고 다닌 한 가지 신념이었다.
이 글은 다음 자료들을 교차 확인해 작성하였다. Eberhard Busch, Karl Barth: His Life from Letters and Autobiographical Texts (Eerdmans, 1994); 프린스턴 신학교 바르트 연구소(Center for Barth Studies)의 공식 전기(barth.ptsem.edu/biography); 브리태니커 백과사전(Britannica) "Karl Barth" 항목; Christianity Today 및 Christian History Magazine의 칼 바르트 특집 기사; 바르멘 선언 본문(Theologische Erklärung von Barmen, 1934). 인용한 일화와 발언은 부쉬(Busch)의 전기에 수록된 자료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