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전자 공학의 영역에 점·선의 언어가 들어오기 시작한 이유
전력망은 더 이상 발전소와 송전선이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다. 재생에너지가 들어오고, 개인이 전력을 사고팔며, 인공지능이 운영에 개입하고, 통신망이 전력 제어와 한 몸으로 엮이면서 시스템은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다. 이렇게 점점 더 다루기 어려워지는 대상에 대해, 최근 10여 년 동안 통계물리학과 네트워크 사이언스(Network Science) 쪽에서 발전한 도구들이 전력 시스템 연구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은 이 흐름을 비전공자도 따라올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복잡하다"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두 가지 다른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단순히 어지럽고 무질서한 상태고, 다른 하나는 규칙과 무질서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패턴은 있지만 단순화되지 않는 상태다. 학문에서 다루는 복잡계(complex system)는 정확히 두 번째 의미다.
세 종류의 그림을 떠올려 보자. 첫 번째는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격자 그림이다. 검은 수직·수평선과 빨강·파랑·노랑의 면. 매우 규칙적이라 한두 문장으로 "비슷한 그림"을 누군가에게 그리게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드리핑 페인팅이다. 무작위로 흩뿌려진 물감 자국. 이 역시 "물감을 무작위로 캔버스에 뿌려라"라는 한 문장이면 비슷한 분위기를 재현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 사이에 놓인 그림 — 좌우에 인물이 있고 가운데에 나무가 꼬불꼬불 솟아 있는, 규칙적이지도 무작위적이지도 않은 그림이다. 이 마지막 그림은 한 문장으로 압축하기가 어렵다.
복잡성은 "랜덤"과 "규칙"의 중간 지대다. 원숭이에게 키보드를 주고 무작위로 글자를 치게 하는 것도, 같은 글자만 반복해서 치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원숭이에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그대로 쓰게 하는 일은 다르다. 복잡한 시스템은 무질서한 잡음도 아니고 시계처럼 돌아가는 기계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무언가다. 이 "사이"에 정보의 핵심이 숨어 있다.
정보 이론의 언어로 말하면, 완전한 규칙성은 엔트로피(entropy)가 낮고 완전한 무작위성은 엔트로피가 높다. 복잡성이 주목받는 영역은 그 둘이 모두 낮은 압축률을 보이는 중간 지점이다. 생명 현상, 사회 시스템, 도시 교통, 인터넷의 구조, 뇌의 신경망,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전력망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네트워크 사이언스의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한 산책 문제였다. 1736년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당시 프로이센(Prussia)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있던 일곱 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 모든 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 그의 해법은 도시의 지리를 통째로 무시하고, 땅덩어리를 점으로, 다리를 점들 사이의 선으로 바꿔서 추상화한 데서 시작했다. 결론은 "불가능하다"였지만, 더 중요한 결과는 따로 있었다. 어떤 대상이든 점(노드, node)과 선(엣지, edge)의 관계로 환원해 분석할 수 있다는 발상, 즉 그래프 이론(graph theory)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프 이론은 한동안 순수 수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응용 학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1998년 던컨 와츠(Duncan Watts)와 스티븐 스트로가츠(Steven Strogatz)가 "좁은 세상(small-world)" 네트워크 개념을 발표하고, 1999년 알베르트라슬로 버러바시(Albert-László Barabási)와 레카 알베르트(Réka Albert)가 월드 와이드 웹(WWW, World Wide Web)의 연결 구조를 분석한 논문을 내놓으면서 흐름이 뒤집어졌다.
버러바시의 연구가 던진 충격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인터넷의 웹페이지들이 서로를 하이퍼링크로 가리키는 방식을, 수십만 개의 점과 그 사이의 선으로 표현하고 통계를 내보니, 연결선 수의 분포가 종 모양의 정규분포(Gaussian distribution)가 아니라 거듭제곱 분포(power law)를 따랐다. 대부분의 웹페이지는 링크가 거의 없지만, 극소수의 웹페이지는 수천 개의 링크를 받고 있었다. 같은 분포는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 항공 노선망, 학술 인용 네트워크 등 전혀 다른 분야의 시스템에서도 잇따라 발견되었다.
키와 부의 분포는 모양이 다르다. 사람의 키는 정규분포에 가깝다. 평균 170cm 근처에 대부분이 모여 있고, 200cm가 넘는 사람이나 140cm 이하인 사람은 매우 드물다. 반면 재산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평범한 자산을 가지고 있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수조 원을 보유한다. "평균 자산"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 수치가 어떤 대표성을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거듭제곱 분포가 정확히 그렇다. 평균과 분산이 수학적으로 발산하거나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전형적인 크기"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분포를 스케일 프리(scale-free)라고 부른다.
이 발견 이후 한동안은 다양한 시스템에서 스케일 프리 분포를 "사냥"하는 연구가 줄을 이었다. 도시 인구, 지진 규모, 산불 면적, 멸종 사건의 규모, 신경 발화 빈도까지. 이런 분포의 공통점은 평소에는 작은 사건이 자주 일어나지만, 평균에서 한참 떨어진 거대한 사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확률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자연 법칙급 보편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점·선의 추상화는 단순히 수학적 게임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 시스템을 압축해 다루는 실질적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도구는 결국 전력망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네트워크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단순한 추상화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점과 선만 알아도 시스템의 깊은 특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 두 가지를 보자.
웹페이지 수십억 개 중에서 어떤 페이지가 "더 중요한가"를 점·선 정보만으로 매기는 방법이 있다.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한 페이지가 다른 페이지들로부터 많은 링크를 받으면 중요할 가능성이 높고, 그중에서도 이미 중요한 페이지로부터 링크를 받으면 더 중요할 가능성이 높다. 각 페이지가 자신의 중요도 점수를 자기가 거는 링크 수로 나눠서 분배하고, 받은 점수를 다시 합산하는 계산을 반복하면 점수가 특정 값으로 수렴한다. 이 점수가 바로 페이지랭크(PageRank)다.
구글(Google)은 검색어가 들어오면 그 키워드를 포함한 웹페이지들을 페이지랭크 순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핵심은 페이지의 내용을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오직 누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의 연결 구조만으로 중요도를 산출했다는 점이다.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응용 분야에서 강력하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트위터(현 X) 사용자들의 팔로우 관계를 네트워크로 그려보면 흥미로운 구조가 드러난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를 팔로우하는 계정과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을 팔로우하는 계정은 거의 두 개의 다른 무리로 분리되어 있었다. 같은 플랫폼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사실상 두 개의 다른 공론장이 평행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언론인 계정들의 위치였다. 기자들이 누구를 팔로우하고 있는지를 네트워크에서 확인해 보니, 그들의 팔로우 대상은 압도적으로 클린턴 쪽 무리에 치우쳐 있었다. 결국 언론인들이 매일 들여다보는 트위터 타임라인은 클린턴 우세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것이 그대로 여론조사 해석과 보도에 반영되었다.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거의 모든 주요 언론이 충격을 받았던 데이터적 배경이 이 네트워크 그림 한 장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네트워크 분석은 "내가 보는 세계가 전체 세계의 어떤 부분만을 보여주는지"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막연한 인상으로 접근하던 영역을, 구조적 사실로 다시 보게 만드는 도구라는 의미다.
전력 시스템을 1년치 데이터로 시각화해 보면 한눈에 복잡계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로축에 365일을, 세로축에 24시간을 놓고 시간대별 전력 사용량을 색으로 표시하면, 줄무늬 같은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사람들이 깨어 있는 낮 시간대에는 사용량이 많고 밤에는 적다. 주중에는 높고 주말에는 낮다. 명확한 주기성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다른 층위들이 겹친다. 1년 내내 일정 출력을 내는 기저(baseload) 발전소가 있고, 피크 수요 때만 가동되는 첨두 발전소가 있다. 우기에만 발전하는 수력, 낮에만 발전하는 태양광, 바람에 따라 출력이 요동치는 풍력이 모두 동시에 같은 망에 연결되어 있다. 각 요소가 서로 다른 시간 스케일에서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며 상호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복잡계의 정의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탄소중립 정책으로 재생에너지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고, 분산 전원이 늘어나면서 개인이 전력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거래까지 허용되고 있다. 시스템 운영자가 모든 발전기를 중앙에서 통제하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다. 운영의 자유도는 점점 줄어들고, 통제해야 할 변수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예전 전력망이 오케스트라였다면, 지금의 전력망은 거리 축제에 가깝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한 명이 박자와 음정을 조율한다. 단원의 수도 정해져 있고 각자의 역할도 분명하다. 반면 거리 축제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노래하고 춤추고 끼어들고 빠진다. 무대를 떠나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합류하는 사람이 있다. 누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위에서 한꺼번에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축제는 굴러간다 — 어떤 패턴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시스템을 다루는 도구가 필요하다.
2003년 8월 14일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대정전은 이런 복잡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대표 사례다. 오하이오주에서 시작된 작은 송전선 사고가 보호 알고리즘의 연쇄 작동을 거치며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남동부로 확산되었고, 약 5천만 명이 전기를 잃었다. 이후 통제·감시 시스템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2025년 4월 이베리아 반도 대정전에서 보듯이 거대 정전(blackout)은 지금도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단일한 결함이나 단일한 운영자의 실수로 환원할 수 없는 — 복잡계 특유의 창발적(emergent) 현상이기 때문이다.
최근 전력 시스템 연구가 마주한 도전들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재생에너지 부입에 따른 60Hz(헤르츠) 주파수 유지의 어려움, 신규 송전선의 입지 선정과 보강 효과 예측,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을 활용한 운영 자동화, 연쇄 정전(cascading failure) 차단, 소비와 발전의 정밀 예측. 이 모든 문제에 점·선의 언어가 새롭게 적용되고 있다.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전력망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영역은 "어디가 약한가"를 따지는 토폴로지 분석이다. 송전선과 변전소를 그대로 점·선으로 옮긴 다음, 시나리오를 부여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관찰하는 방식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구 중 하나가 2010년 네이처(Nature)에 실린 부르디레프(Buldyrev) 등의 논문이다. 이 연구는 2003년 9월 이탈리아 대정전 사례를 다뤘다. 시칠리아를 제외한 거의 전국이 전기를 잃었고, 동시에 인터넷 통신망도 무너졌다.
이전까지의 네트워크 분석은 전력망 하나만, 또는 통신망 하나만을 독립적으로 다뤘다. 부르디레프 등은 두 망이 사실 한 몸이라고 봤다. 발전소가 만든 전기로 인터넷 노드가 작동한다. 인터넷 노드가 작동해야 발전기 사이의 제어 신호가 오간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무너지고, 그것이 다시 처음 쪽을 더 무너뜨린다. 이런 구조를 멀티레이어(multilayer) 또는 상호의존(interdependent)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발전소와 인터넷 게이트웨이를 의존선으로 묶어 두 층(layer)으로 된 네트워크를 만들고, 한 노드의 고장이 어떻게 양쪽 층을 오가며 확산되는지를 시뮬레이션했다. 이 모델은 실제 이탈리아 대정전의 진행 양상을 상당 부분 재현해 냈다. 이 연구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일 네트워크였다면 안정적이었을 시스템도 다른 망과 의존적으로 연결되는 순간 훨씬 작은 충격에서 붕괴할 수 있다는 점을 정량적으로 보여 줬기 때문이다.
전력망과 통신망을 따로 보호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망이 서로를 어떻게 끌어내리는지의 구조 자체가 새로운 분석 대상이다. 사이버보안 측면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2017년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모터(Adilson Motter) 그룹의 연구는 미국 전체 송전망을 대상으로 모든 송전선을 하나씩 일부러 끊어 보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한 송전선이 끊겨 정전이 시작된 지점을 1차 고장(primary failure)이라 하고, 우회 전류가 다른 송전선에 과부하를 일으켜 추가로 끊기는 사고를 2차 고장(secondary failure)이라 정의했다.
이때 활용한 네트워크 측도가 K-코어(K-core)다. 어떤 노드가 K-코어에 속한다는 말은, 주변 노드들을 차례로 가지치기해 나가도 끝까지 K개 이상의 연결을 유지하는 그룹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K-코어는 양파 껍질이다. 양파의 가장 바깥쪽은 연결이 약한 노드들의 층이고(K가 낮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노드들과 촘촘하게 얽힌 핵심층(K가 높음)이 된다. 네트워크에서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드들은 K가 1, 가장 중심부에 있는 노드들은 K가 5, 6, 그 이상이 된다.
분석 결과는 직관과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어긋났다. K가 낮은 변두리 노드들은 1차 고장을 자주 일으켰지만, 정작 큰 2차 피해를 입는 것은 K가 높은 중앙부 노드들이 아니라 다시 변두리 노드들이었다. K가 높은 중앙부 노드는 우회 경로가 풍부해 자기 자신은 견뎠다. 즉 "튼튼한 노드"와 "정전을 유발하는 노드", "정전 피해를 받는 노드"는 모두 다른 개념이며, 이를 분리해 보지 않으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답이 어긋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통찰이 사이언스급 논문이 되었다.
네트워크 위에서 캐스케이딩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면 어떤 사건은 작은 부분 정전으로 끝나고, 어떤 사건은 대륙 전체를 덮는 거대 정전이 된다. 이렇게 발생한 정전 규모들의 분포를 그려보면, 앞에서 본 거듭제곱 분포(power law)가 그대로 나타난다. 평균 정전 규모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 "100년에 한 번 올 정도의 대정전"이라는 표현 자체가 — 적어도 이 분포 위에서는 — 잘못된 직관이다.
지진과 산불도 같은 분포를 따른다. "37년 만에 일어날 지진이니까 곧 올 것"이라거나 "이만한 산불은 50년에 한 번 있는 일"이라는 식의 보도가 자주 등장하지만, 거듭제곱 분포에서는 "주기"라는 개념이 정의되지 않는다. 거대 정전, 거대 지진, 거대 산불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 — 그러나 결코 0이 아닌 확률로 — 일어난다는 것이 이 분포가 주는 교훈이다.
여기까지가 네트워크의 정적인(static) 구조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다음 단계는 동적(dynamic) 분석이다. 노드가 단순히 켜져 있거나 꺼져 있는 게 아니라, 시간에 따라 진동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을 다룬다.
교류(AC, Alternating Current) 전력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발전기가 같은 주파수로 — 한국·미국은 60Hz, 유럽·일본 동부는 50Hz로 — 동기화되어 도는 것이다. 한 발전기라도 동기에서 이탈하면 즉시 차단되어 시스템에서 분리된다. 이 동기화 현상을 기술하는 미분방정식이 전력공학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스윙 방정식(swing equation)이다.
흥미롭게도 1975년 통계물리학자 구라모토 요시키(蔵本由紀)가 전혀 다른 맥락 — 반딧불이의 동기 점멸, 박수의 동시화, 화학 반응의 진동 — 에서 제안한 구라모토 모델(Kuramoto model)을 한 차원 확장하면 스윙 방정식과 수학적으로 같은 형태가 된다. 양쪽 학계는 한동안 이 사실을 모른 채 평행하게 발전해 왔다. 두 모델의 형태가 같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구라모토 모델에 누적된 통계물리학의 분석 도구들이 전력망 안정성 연구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발전기는 메트로놈이다. 한 음악실에 수백 개의 메트로놈을 같은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켜면, 처음에는 박자가 제각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모두 같은 박자로 맞춰 흔들리기 시작한다. 받침대를 통해 미세하게 서로 힘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전력망의 발전기들도 똑같다. 송전선을 통해 서로의 위상(phase)을 끌어당기며 60Hz로 맞춰 돈다. 한 메트로놈이 흔들림을 멈추면 다른 메트로놈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2013년 멘크(Peter Menck) 등이 네이처 피직스(Nature Physics)에 발표한 베이슨 안정성(basin stability)은 이후 전력망 안정성 연구의 표준 도구가 되었다.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동기화된 안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을 임의의 방향과 크기로 흔들었을 때, 다시 안정 상태로 돌아오는가, 아니면 다른 상태로 빠져 버리는가? 이를 수많은 초기 조건에 대해 시뮬레이션해서 "돌아오는 비율"을 확률로 측정한다.
안정성은 골짜기의 깊이다. 공이 골짜기 바닥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살짝 밀어도 다시 바닥으로 굴러 내려오면 그 골짜기는 안정적이다. 골짜기가 깊고 가파를수록 더 큰 충격에도 돌아온다. 베이슨 안정성은 "이 공을 얼마나 밀어도 골짜기 안으로 돌아오는지"의 비율을 측정한다. 같은 시스템이라도 노드마다 골짜기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발전기는 작은 충격에도 동기에서 이탈하고 어떤 발전기는 큰 충격에도 살아남는다.
이 측도를 가지고 독일 전력망을 분석한 연구는, 망이 구조적으로 다섯 개의 클러스터(community)로 나뉘어 있다는 점과, 그 클러스터 사이를 잇는 소수의 송전선 근처에 위치한 노드들이 가장 취약하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 줬다. 클러스터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만큼, 다른 노드의 사고가 그쪽으로 몰려 전이되기 쉬웠다. 이렇게 구조적 위치와 동적 안정성의 상관관계를 정량화할 수 있다는 것이 네트워크 관점의 강점이다.
실제 전력망 데이터는 공개되지 않는다. 유럽·미국·일본·한국 모두 정확한 송전망 토폴로지는 보안상 비공개다. 통계적 분석에 필요한 표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 한계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합성 전력망(synthetic power grid) 생성 알고리즘이다. 실제 전력망의 통계적 특성(평균 연결도, 클러스터 계수, 차수 분포 등)을 모사하는 가상 네트워크를 만들어 그 위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증한다. 최근에는 SHK 모델(Schultz-Heitzig-Kurths model)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또 다른 흐름은 분산 제어 알고리즘 연구다. 모든 발전기가 다른 모든 발전기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고 반응하면 가장 안정적이겠지만, 그러려면 전체 노드 사이에 전(全)대(全) 통신망이 깔려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웃한 일부 노드들과만 통신하면서도 전체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알고리즘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 역시 네트워크 위에서 가상 시나리오를 돌리는 방식으로 검증된다.
1968년 독일 수학자 디트리히 브라에스(Dietrich Braess)는 교통망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고했다. 도로를 새로 추가하면 평균 통행 시간이 오히려 늘어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도로를 없애면 통행 시간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운전자들이 각자 최단 경로를 선택하는 합리적 행동을 하더라도, 그 선택의 집합이 시스템 전체로는 비효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 이를 브라에스 역설(Braess's paradox)이라 부른다.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예가 청계천 고가도로다. 2003년 서울시가 청계 고가도로를 철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가뜩이나 막히는 도심에서 도로를 없앤다는 것 자체가 직관에 반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고가도로가 사라지자 주변 교통량이 줄고, 차량들이 우회하면서 도심 전체의 흐름이 더 개선되었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도로(=네트워크의 선)를 줄였는데 기능(=교통 흐름)이 좋아진 사례다.
전력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느 송전선의 용량을 두 배로 늘렸더니 오히려 과부하가 심해지는 사례, 보강을 위해 새 송전선을 추가했더니 인접 송전선에 부담이 더 몰리는 사례가 실제로 보고된다. 직관에 반하지만 수학적으로는 이상하지 않다. 각 송전선의 전류 흐름은 전체 망의 임피던스(impedance) 분포가 결정하기 때문에, 한 선의 용량을 늘리면 그쪽으로 더 많은 전류가 흘러 들어와 인접부에 새로운 병목을 만들 수 있다.
2022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실린 논문은 회로를 실제로 만들어 브라에스 역설이 일어나는 조건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 같은 연구에서 독일 전력망의 향후 송전망 확충 계획에 이 분석을 적용해, 어떤 보강 사례가 역설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지를 예측해 보였다. 최근에는 교류망뿐 아니라 직류망(DC, Direct Current) 송전 구조에서도 브라에스 역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론적 분석이 추가되었다.
"송전선이 부족하니 더 깔자"는 직관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어디에 깔지를 결정하기 전에, 전체 네트워크의 흐름 구조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 분석 비용은 점차 떨어지고 있지만, 그 분석 없이 추진하는 보강 사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역이다.
전력 시스템은 60Hz(또는 50Hz)를 유지하려 하지만, 현실에서 주파수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통계적 분포에 대해 학계와 산업계는 오랫동안 한 가지 암묵적 가정을 공유해 왔다 — 정규분포(가우시안 분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표준편차만 알면 주파수 일탈의 확률을 추정할 수 있고, 99.7% 구간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해 왔다.
2018년 네이처 에너지(Nature Energy)에 실린 셰퍼(Benjamin Schäfer) 등의 논문은 이 가정을 뒤집었다. 북미·일본·유럽의 여러 동기 영역(synchronous area)에서 측정한 주파수 시계열을 분석한 결과, 분포는 정규분포가 아니라 q-가우시안(q-Gaussian) 분포 또는 레비 안정 분포(Lévy-stable distribution)에 가까웠다. 두 분포 모두 정규분포보다 꼬리(tail)가 훨씬 두꺼운, 즉 극단적인 변동이 정규분포가 예측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는 분포다.
두 종류의 바다가 있다. 한쪽 바다는 잔잔한 파도가 일정한 폭으로 계속 친다. 가끔 큰 파도가 와도 평균보다 한두 배 정도다. 다른 한쪽 바다도 평소엔 잔잔해 보이지만 가끔 평균의 10배, 50배짜리 거대 파도가 친다. 통계상 평균과 분산만 보면 두 바다는 거의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안전 설계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바다다. 정규분포로 가정한 전력망은 첫 번째 바다고, 실제 전력망은 두 번째 바다였던 셈이다.
이 발견은 단순한 통계적 호기심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 전반의 가정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모델링할 때 정규분포 노이즈를 더하는 방식의 시뮬레이션이 보편적이었는데, 그것이 시스템의 극단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연구는 또한 15분, 30분 단위의 전력 거래 주기에 맞춰 주파수가 출렁이는 패턴 — 시장 메커니즘이 직접 물리적 동역학에 영향을 주는 현상 — 도 정량화했다.
q-가우시안과 레비 분포는 꼬리에서 거듭제곱 분포로 수렴한다. 앞에서 본 산불·지진·정전과 같은 분포 가족이다. 따라서 전력망 주파수에서도 "예측 가능한 주기"는 없으며, "역사상 가장 큰 일탈"이 언제 일어날지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이 분포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가 들어오는 시대의 전력망을 다루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후 같은 연구진은 측정 장비를 다른 나라들에 배포해 더 많은 동기 영역의 주파수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 한국 전력망은 그중에서도 학술적으로 흥미로운 사례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북쪽은 북한과의 연계가 없어 사실상 거대한 섬과 같은 독립 망이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여러 나라가 얽혀 있어 한 나라의 통제가 다른 나라의 외란(disturbance)에 휘둘리는 망과 달리, 한국은 자기 시스템 안에서의 순수한 주파수 특성을 보기에 좋은 대상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주파수 분포는 60Hz를 정점으로 한 단봉이 아니라 그 양옆에 봉우리가 더 많은 쌍봉(bimodal) 패턴을 보인다는 관찰이 나오고 있다.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전력망에 적용되면 곧바로 직면하는 문제가 계산량이다. 한 노드의 동적 안정성을 베이슨 안정성으로 측정하려면 수많은 초기 조건에 대해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송전선을 한 가닥만 보강해도 전체 시스템의 안정성 지도가 바뀌므로, 시나리오마다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돌려야 한다.
여기서 머신러닝(ML, Machine Learning)이 들어온다. 네트워크에는 차수(degree), 매개 중심성(betweenness centrality), K-코어, 클러스터링 계수 등 수많은 구조적 측도가 있다. 이들 측도를 입력으로 받아 동적 안정성을 곧바로 출력하는 회귀 모델을 학습시키면, 시뮬레이션을 우회할 수 있다. 실제로 여러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이런 방식으로 동적 안정성을 높은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음이 보고되었다.
다만 일반적인 머신러닝의 약점도 그대로 따라온다. 데이터 포인트는 잘 맞추지만 그 사이의 진짜 함수(ground truth)는 빗나가는 과적합(overfitting) 문제, 그리고 예측이 한 번이라도 빗나가면 안 되는 전력 시스템 운영의 특성상 자유롭게 도입하기 어려운 신뢰성 문제 등이다.
이 문제를 푸는 한 방향이 물리정보 머신러닝(PIML, Physics-Informed Machine Learning)이다. 학습기에 데이터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데이터가 따라야 할 물리 법칙 — 미분방정식 — 을 손실 함수(loss function)에 함께 넣어 준다. 데이터 포인트만 맞추는 모델은 데이터 사이의 빈 공간에서 엉뚱한 곡선을 그릴 수 있지만, 물리 방정식을 위반하지 못하게 제약하면 데이터가 적어도 진짜 해(solution)에 가까운 곡선을 학습한다.
전력망의 동기화는 스윙 방정식이라는 명확한 물리 법칙을 따르므로 이 접근에 잘 맞는다. 스윙 방정식을 손실 함수에 포함시킨 모델은 단순 데이터 기반 모델보다 훨씬 적은 데이터로도 높은 예측 정확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학습된 모델은 다시 다양한 소비 패턴과 발전 패턴의 합성에도 활용된다.
네트워크 사이언스의 분석과 머신러닝의 속도를 결합하고, 거기에 전력공학 고유의 물리 모델을 제약 조건으로 추가하는 접근이 최근 흐름이다. 한 분야의 도구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학제 간 결합이 옵션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이 분야의 무게 중심이 어떻게 옮겨갔는지가 드러난다.
요약하면, 이 분야의 흐름은 "정적인 그림 → 동적인 시스템 → 데이터·학습"의 순서로 옮겨 왔다. 점·선의 구조에서 시작했지만, 그 위에서 일어나는 시간 변화를 다루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시간 변화를 실제 측정 데이터와 결합해 학습하는 단계로 와 있다.
한국 전력망은 네트워크 사이언스의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특이한 성질을 가진다.
첫째, 사실상 섬 형태의 독립 망이다. 삼면은 바다, 북쪽은 단절된 휴전선이다. 유럽처럼 인접국과 동기 운전이 얽혀 있지 않다. 이는 동기화·주파수 특성 연구에는 깨끗한 실험실 같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외부 백업이 전혀 없다는 약점이기도 하다.
둘째, 작은 국토에 노드가 빽빽하다. 미국이나 중국은 광활한 국토에 비해 노드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트리(tree)에 가까운 구조를 갖는다. 반면 한국은 좁은 면적에 변전소와 송전선이 그물(mesh)처럼 얽혀 있다. 분석 난이도가 높을 뿐 아니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우회 경로가 짧고 다양해 동시에 여러 곳에 영향이 가기 쉽다.
셋째, 교류망 내부에 직류 송전이 다수 박혀 있다. 일본은 50Hz 영역과 60Hz 영역이 따로 있고 그 사이를 고전압 직류 송전(HVDC, High Voltage Direct Current)으로 연결한다. 한국은 그것과 달리 단일 교류망 안에 다수의 직류 송전선이 내장되어 있는 구조를 향해 가고 있다. 이런 망을 네트워크 모델 위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 교류 동역학과 직류 동역학을 한 그래프 위에서 어떻게 함께 풀어야 하는지 — 는 국제적으로도 아직 열려 있는 연구 질문이다.
넷째, 토폴로지 자체는 스케일 프리가 아니지만 그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스케일 프리다. 변전소 한 곳에 송전선 1,000개가 붙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차수 분포는 거듭제곱을 따르기 어렵다. 한국 전력망은 와츠-스트로가츠 의미의 "좁은 세상(small-world)" 구조에 가깝다. 그런데 그 위에서 발생하는 정전 규모, 주파수 변동, 캐스케이딩의 규모는 거듭제곱 분포를 따른다. 구조와 동역학이 서로 다른 통계적 성질을 갖는다는 점이 이 분야의 특징적 흥미 지점이다.
국내에서 이런 연구를 확산시키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데이터 접근성이다. 칠레나 유럽 일부 국가는 송전망 토폴로지를 일정 수준에서 공개하지만, 한국의 경우 한국전력공사나 전력거래소가 보유한 망 데이터는 보안상 외부에 잘 제공되지 않는다. 연구자가 합성 망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는 학술적 한계일 뿐 아니라, 정책 결정 단계에서 객관적 분석에 기반한 의사 결정이 어려워진다는 더 넓은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빠르게 커지고 있는 영역이 전력망 사이버보안이다. 전력 시스템 자체는 이미 잘 모델링되어 있지만, 그 위에 통신 레이어를 한 층 더 얹어 보안 사고의 영향을 분석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통신 프로토콜을 일일이 시뮬레이션하는 정통적 접근(예: 정보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 보안 엔지니어링 방식)은 매우 무겁다.
네트워크 사이언스의 접근은 이와 다르다. 통신 노드의 세부 작동 대신, "어디와 어디가 통신하고 그 지연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의 구조적 관계에 집중한다. 차단기 동작이 통신 지연 또는 통신 에러로 지연됐다고 가정했을 때 시스템에 어떤 영향이 누적되는지를 동역학 시뮬레이션으로 추적한다. 이렇게 단순화된 통신 레이어를 전력 시뮬레이터에 결합하면, 보안 사고를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 문제로 환원해 분석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이버보안 사고의 상당수가 외부 인터넷 침투가 아니라 폐쇄망(closed network) 내부의 휴먼 에러, 협력사 데이터 유출, 관리 소홀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오랫동안 "폐쇄망이라 안전하다"고 여겨 왔던 운영기술(OT, Operational Technology) 영역이, 재생에너지·전기차·분산 전원의 증가와 함께 점차 개방망으로 옮겨가야 할 압력에 놓여 있다. 이때 어떤 통신 구조가 가장 안정적이고 안전한지를 미리 분석하는 것 — 이것이 사이버보안 영역에서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기여할 수 있는 자리다.
네트워크 사이언스의 도구가 풀려는 문제는 사실 전력공학이 풀어 온 문제와 같다. 노드 간 연결, 주파수 운영, 정전 확산 — 대상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왜 국내에서는 이 접근이 잘 확산되지 않았는가? 이론의 진입 장벽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기존 솔루션 대비 분명한 이득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 이 질문 자체가 분야의 미래를 가른다. 점·선의 언어가 전력공학자들과 어떤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정리하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다.
네트워크 사이언스는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그래프 이론을 뿌리로 두지만, 응용 분야와의 결합을 통해 분야 자체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물리·컴퓨터과학·사회학·생물학에 이어, 이제 전력공학이 새로운 결합 대상이 되었다.
이 결합은 이론적 매력 때문이라기보다 필요 때문이다. 전력망이 단순한 시대에는 잘 만들어진 미분방정식과 시뮬레이터로 충분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분산화되고 변동성이 커지고 통신과 얽히면서, 시스템 전체를 한 번에 풀려는 정통적 접근만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영역이 점점 늘어난다. 그 빈 자리에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거듭제곱 분포가, q-가우시안이, 베이슨 안정성이, 물리정보 머신러닝이 들어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도구가 모든 답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점·선의 추상화는 강력하지만 그 자체로 송전선의 임피던스를 알려주지 않는다. 머신러닝은 빠르지만 그 자체로 신뢰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통신 시뮬레이터는 정확하지만 그 자체로 시스템 전체를 보지는 못한다. 결국 각 도구가 잘 보는 부분을 그대로 살리면서, 서로의 빈 자리를 메우는 방식의 협업이 이 분야의 미래일 것이다.
전력망은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기계 중 하나다. 그리고 가장 복잡한 기계이기도 하다. 그 복잡성을 정면으로 다루기 위해 — 단순화하지 않고 그 복잡성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기 위해 —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들어와 있다. 이 흐름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점·선의 언어가 60Hz의 떨림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두 세계 모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