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Sermon Report · R.C. Sproul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R.C. 스프롤(R.C. Sproul, 1939–2017)이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 전국 콘퍼런스의 마지막 강연으로 던진 무거운 질문 — 천국의 행복은 지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양립할 수 있는가. 그가 내놓은 답은 위로가 아니라 정서의 재정렬에 관한 것이었다.

두 본문에서 시작한다

강연은 신약 두 본문 위에 세워진다. 첫째는 요한계시록 21장 1–8절이고, 둘째는 로마서 8장 22–30절이다. 두 본문은 각각 천국의 모습과 구원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강연의 모든 논의는 결국 이 두 본문의 만남에서 도출된다.

요한계시록 21장: 새 예루살렘과 불못

본문의 전반부는 자주 인용되는 위로의 구절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 새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단장하여 내려오며, 하나님이 친히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 죽음도, 애통도, 곡함도, 아픔도 다시 있지 않다.

그러나 같은 본문의 후반부에는 좀처럼 설교되지 않는 명단이 등장한다. "겁쟁이, 믿음이 없는 자, 가증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숭배자,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의 분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즉 둘째 사망이라고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스프롤이 지적하는 것은 단순하다 — 천국의 묘사와 지옥의 묘사는 같은 호흡 안에 놓여 있다.

로마서 8장: 구원의 황금 사슬

두 번째 본문은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로 불리는 구절이다.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다섯 개의 동사가 한 줄로 이어진다 — 미리 아심(foreknowledge), 예정(predestination), 부르심(calling), 칭의(jus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 신학에서는 이 다섯 마디를 '황금 사슬(golden chain)'이라 부른다. 스프롤이 강연의 후반부에서 이 사슬의 마지막 마디 — 영화 — 를 결정적으로 꺼내든다.

'학살'이라는 단어가 드러내는 비대칭

본문 해설 사이에 스프롤은 한 가지 역사적 사례로 우회한다.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서 영국군이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해 다섯 명을 사살한 사건 — 이른바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존 애덤스(John Adams),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까지 움직였다.

그런데 스프롤이 묻는다. 다섯 명이다. 다섯 명의 죽음을 우리는 '학살'이라 부른다. 그리고 같은 우리가 여리고 함락, 가나안 진멸, 노아 홍수, 고라 일당의 매몰, 웃사의 죽음, 나답과 아비후의 즉결 심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마주하면 — 거북해한다. 하나님은 너무 잔혹하시지 않은가, 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비유 박스

저울의 한쪽에 다섯 명의 시민이 있고, 다른 쪽에 수만 명의 가나안 주민이 있다. 인간의 도덕 직관은 다섯 명의 죽음에 격분하면서, 수만 명의 죽음에는 — 그것이 거룩하신 재판관의 손에 의한 것일 때 — 오히려 거북함을 느낀다. 두 사건을 비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도덕 감각의 비대칭을 보라는 것이 스프롤의 요지다. 우리는 인간의 손에 익숙하고, 거룩하신 분의 손에 낯설다.

그러나 이 비대칭의 핵심은 곧 본 강연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 우리는 인간에게 공감하고, 하나님께는 낯설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는 가정은 견딜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의 입증이라는 명제는 와닿지 않는다.

거스트너와의 두 일화

스프롤은 자신의 멘토였던 존 거스트너(John Gerstner, 1914–1996, 피츠버그 신학교 교회사 교수)와 관련된 두 가지 일화로 본격적인 논의를 연다. 두 일화 모두 스프롤이 거스트너에게 '짜증을 일으킨' 사건이다.

첫 번째 일화: "칼빈은 무덤에서 돌아눕지 않는다"

신학교 예배당에서 자유주의 색채의 설교를 들은 직후, 스프롤은 거스트너와 함께 그의 차 — 도서관으로 개조한 폭스바겐 버스 —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스트너는 키가 컸고 걸음이 빨라서, 스프롤은 잰걸음으로 따라가야 했다. 가벼운 농담조로 스프롤이 말했다.

스프롤: "와, 존 칼빈이 저 설교를 들었다면 무덤에서 돌아누웠을 겁니다."

거스트너는 걸음 중간에 앞발을 박고 멈춰 서서, 죽음의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거스트너: "젊은이, 지금 칼빈이 누리고 있는 지복(felicity)을 그 어떤 것도 흩뜨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네는 그 설교에 동요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기쁨에 들어간 종교개혁가에게는 그것이 결코 닿지 않네."

이 첫 번째 교훈은 명확하다. 천국에 들어간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도, 아픔도, 눈물도, 슬픔도 없다는 요한계시록의 약속이 진심이라는 것. 칼빈은 더 이상 지상의 거짓 설교 한 편에 동요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다.

두 번째 일화: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보고도 기뻐할 것이다"

장면은 강의실로 옮겨진다. 여덟 명 정도가 둘러앉은 세미나 중 한 학생이 정확히 이 강연의 제목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생: "거스트너 박사님,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천국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거스트너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거스트너: "자네가 천국에 가면 너무나 성화(sanctification)되어 있어서, 자네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보고도 —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그 안에서 실행되고 있음을 알고 — 그것을 기뻐할 수 있을 걸세."

질문한 학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옆에 있던 스프롤은 웃음을 터뜨렸다.

스프롤: "박사님, 죄송한데… 박사님이 방금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스프롤은 그 답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 내가 성화되어서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그것보다 우스꽝스러운 말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고, 결국 그가 이 강연을 통해 그 답을 자기 식으로 다시 풀어내게 된다.

황금 사슬의 마지막 마디 — 영화(glorification)

스프롤은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간다. 다섯 마디 사슬을 다시 펼친다.

  1. 미리 아심(foreknowledge) — 영원 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신다.
  2. 예정(predestination) — 미리 아신 자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로 정하신다.
  3. 부르심(calling) — 시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4. 칭의(justification) —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여 의롭다 선언하신다.
  5. 영화(glorification) — 마침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성하신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칭의를 "교회가 서고 무너지는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라 했고, 장 칼뱅(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3권 11장 1절에서 "종교가 회전하는 경첩(main hinge on which religion turns)"이라 했다. 두 표현 모두 칭의의 결정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스프롤은 묻는다 — 마지막으로 영화에 관한 설교를 들어본 것이 언제인가.

비유 박스 · 황금 사슬

황금 사슬을 다섯 마디로 그려보자. 신학 콘퍼런스와 설교강단은 보통 1번부터 4번 마디까지만 다룬다. 예정론으로 끝없이 논쟁하고, 칭의로 종교개혁의 정수를 가르친다. 그러나 마지막 마디 — 영화 — 는 좀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사슬에 비유하면, 우리는 사슬을 끌어당기긴 하는데 그 끝에 무엇이 매여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 스프롤의 지적은 단순하다. 사슬의 목적지를 빠뜨리면, 앞 네 마디의 의미도 결국 흐려진다.

영화란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영화는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가 마침내 완성되어 죄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신성(神性)으로 격상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우상숭배다. 영화는 죄 없는 인간으로의 완성, 즉 그리스도의 형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상태로의 진입이다.

우리가 모르는 세 가지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는 것을 천국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스프롤은 이 질문이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 우리가 셋을 모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holiness)이라는 속성에 대해 거의 외계적인 거리감을 갖고 있다. 우리 경험에는 거룩의 유비가 없다. 그래서 거룩의 절대성이 드러날 때 — 즉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을 짓밟는 죄에 직접 손을 대실 때 — 우리는 종종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북해한다. 거룩이 너무 낯설기 때문이다.

2.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죄가 너무 일상적이라, 우리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to err is human)"는 격언으로 죄의 끔찍함을 무뎌지게 한다. 죄 짓는 것이 인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해야 할 일종의 의무가 있다는 듯이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무게도 모르고, 그것을 만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3. 영화(glorification)가 무엇인지 모른다

천국을 떠올릴 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가. 새 몸, 사라지는 통증, 벗어버린 안경,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는 약.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대다. 그런데 스프롤이 묻는다 — 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재할 것은 무엇인가. 통증도, 죽음도, 눈물도 아니다. 죄(sin)다. 그리고 우리는 죄가 없는 장소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영화 이후의 자신을 상상하는 데 실패한다.

예수–바울–히틀러 연속체

이 지점에서 스프롤은 자신이 강의실에서 즐겨 쓰던 시연을 풀어낸다. 세 학생을 무대 위에 세운다. 한 명은 예수, 한 명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한 명은 사도 바울 — 스프롤이 "예수를 제외하면 지상을 걸은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 평한 인물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바울은 이 연속선 어디에 서야 하는가?"

예수 바울 히틀러

스프롤의 도식 — 바울이 평생 받은 모든 성화를 합쳐도, 그는 죄 없으신 예수보다 죄 가운데 있는 히틀러 쪽에 훨씬 가깝다.

강의실의 학생은 바울을 예수 쪽에 가까이 세우려 한다. 그러나 스프롤은 웃으며 바울을 히틀러 옆으로 끌어다 세운다. 그가 시각화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비유 박스 · 거룩의 간격

바울이 평생 받은 모든 성화의 진보를 다 합쳐도, 죄 없으신 예수와 미영화(未榮化)의 바울 사이의 간격은 압도적으로 크다. 그 간격에 비하면, 바울과 히틀러 사이의 차이는 비교적 작다. 다시 말해, "정말 거룩한 사람"과 "가장 사악한 사람"의 차이는,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신 분"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이 비유의 함의가 강연 전체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히틀러와 같은 편에 서 있다. 그래서 '괴물 같은 죄인'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공감이 작동한다. "포로 우사가 불쌍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가나안 사람들도 결국 사람 아닌가." 이 본능이 어디서 오는가 — 우리가 그들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우리에게 이방인처럼 낯설다.

결론 — 영화에서의 정서 재정렬

이제 거스트너의 두 번째 답이 다시 무대 위에 오른다. "자네가 천국에 가면 너무나 성화되어 있어서, 자네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기뻐할 수 있을 걸세."

젊은 스프롤이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그가 죄에 잠긴 상태에서 그 답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죄로 가득한 자아가 거룩의 입증보다 동족 죄인에 대한 공감을 우선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 그 우선순위가 뒤집힌다. 죄가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을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정서적 무게중심은 타락한 친족 쪽에서 하나님의 거룩의 입증 쪽으로 이동한다.

스프롤은 마지막에 정직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아직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R.C. Sproul, 강연 결말부

이 강연의 답은 따라서 위로조의 답이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천국에서는 그들도 어떻게든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지옥은 결국 없을 것이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 거스트너처럼 — "당신이 변할 것이다"라고 답한다. 지금 우리의 정서 구조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정서 자체를 재정렬한다. 지금은 견딜 수 없는 명제가, 그때는 견딜 수 있게 — 아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할 수 있게 — 된다.

이 강연이 던지는 도전의 본질은 정서적이다. 천국에서의 행복에 대한 질문은 결국 "지금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가장 견딜 수 없어 하는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거기에 비친 우리 자신의 정서적 우선순위 — 거룩보다 동족, 공의보다 친밀 — 가 바로 영화가 다루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 스프롤의 답이다.

덧붙임 — 이 강연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이 강연은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틀 안에서만 온전히 작동한다. 절대주권,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무류한 성경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 같은 전제들이 깔려 있다. 다른 전통에 있는 독자에게 이 강연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강한 진술들을 담고 있다 — 가장 도전적인 것은 두 번째 거스트너 일화의 결론, 즉 영화 이후의 신자가 사랑하던 자의 영원한 형벌을 보고도 하나님의 공의를 기뻐할 수 있다는 진술이다.

스프롤 본인도 이 명제가 직관에 반(反)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강연 중에 두 번 — 첫 번째 일화에서,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 — 자신이 처음에 이 답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가 결국 이 답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논리적 설득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가 어떤 정서적 풍경을 가질지를, 지금의 자신이 정확히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일종의 인식론적 겸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강연을 어떻게 받을지는 결국 영화 교리를 어떻게 받느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죄가 완전히 제거된 자아라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자아의 정서 풍경이 지금의 우리 정서와 연속적이라고 가정할 근거가 사라진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강연 전체가 무거운 도그마처럼 들릴 것이다.

R.C. Sproul, "Can We Enjoy Heaven Knowing of Loved Ones in Hell?" 강연 전사 기반 정리.

인용 검증: 칼빈 "종교가 회전하는 경첩" — 『기독교 강요』 3.11.1 확인. 루터 "교회가 서고 무너지는 조항" — 라틴어 정식 표현(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은 후대 루터파 정통주의(특히 발렌틴 뢰셔, Valentin Löscher)에서 정형화되었으나, 루터 자신의 칭의 강조와 정신적으로 일치하여 통례적으로 루터에게 귀속된다.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 사망자 수 5명 — 사건 당일 3명 즉사, 추후 부상 악화로 2명 추가 사망. 통상 5명으로 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