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신학자가 한 세기 전 던진 단호한 "아니오(Nein!)"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를 흉내 내기 시작한 오늘에 와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 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의사 결정을 추천하고,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묻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기계가 인간을 닮을수록 인간의 정체성은 흐릿해진다.
이 질문은 기술 분야의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오래된 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20세기에 인간 이성과 인간 문화의 한계를 가장 깊이 파고든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에게 답을 청해 볼 만하다. 그가 196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챗봇과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싸웠던 주제는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AI 앞에서 마주한 문제와 닿아 있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개혁주의(Reformed) 신학자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을 사실상 다시 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은 미완성의 거대 저작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Church Dogmatics)』(1932-1967)이며, 30대 초반에 쓴 『로마서 강해(Der Römerbrief)』(1919, 1922)는 자유주의 신학에 폭탄을 떨어뜨린 책으로 불린다.
그가 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두 사건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1934년의 바르멘 선언(Theological Declaration of Barmen)이다. 나치 독일에서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이라 불린 친(親) 나치 교회 세력이 히틀러의 통치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려 할 때, 바르트는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모여 짧지만 단호한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핵심은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듣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한 말씀이라는 것. 어떤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어떤 시대정신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같은 해 동료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에게 보낸 짧은 글의 제목, "Nein!(아니오!)"이다. 브루너는 인간 본성 안에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인간이 자기 이성과 자기 경험으로 신에게 다가가려는 시도, 곧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결국 인간이 만든 우상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지도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그려도 영토가 되지는 않는다. 자연신학이 "우리의 지도가 곧 영토"라고 주장하는 시도라면, 바르트의 "Nein!"은 "그 지도는 당신이 만든 것이고, 영토는 당신이 만든 적이 없다"는 응답이다. AI가 사람의 언어와 사고를 정교하게 모사하더라도, 그 모사가 곧 인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오늘의 직관과 같은 구조다.
이 두 가지 사건, 즉 정치 권력의 신격화를 거부한 일과 인간 이성의 신격화를 거부한 일이 바르트의 평생 작업을 관통한다. 그리고 정확히 이 두 가지가 AI 시대에 다시 살아 돌아온 질문이다.
바르트의 가장 유명한 인간학적 주장은 이것이다. 사람이 무엇인지 알려면, "보편적 인간"을 분석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을 보아라. 그리고 그 인간을 보면 두 가지가 보인다. 관계성(relationality)과 취약성(vulnerability)이다.
창세기 1장 27절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바르트는 인간이 가진 어떤 능력 — 이성, 도덕성, 자유의지 — 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있는 관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로 해석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 앞에서, "나-너(I-Thou)"의 관계로 존재한다.
이 해석을 AI 시대에 가장 정밀하게 적용한 사람이 미국 신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인 노린 헤르츠펠트(Noreen Herzfeld)다. 그녀는 『지능의 인공물(The Artifice of Intelligence)』(2023)에서 바르트의 imago Dei 신학을 네 개의 명령으로 풀어낸다.
이 네 가지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다른 사람과 맺어야 할 관계의 형태다. 그리고 헤르츠펠트는 묻는다. 지금의 AI는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진짜로 할 수 있는가.
바르트가 오늘 살아 있다면 이렇게 정리할 가능성이 높다. AI는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하나님 앞에 마주 선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 형상은 나를 정확히 따라 한다. 손을 들면 손을 들고, 웃으면 웃는다. 그러나 거울 속 형상에게 "오늘 힘들었지" 하고 물으면, 거울은 같은 질문을 되돌려 줄 뿐이다. 그것은 마주 봄이 아니라 반사다. AI가 매우 정교한 거울이라면, 인간을 흉내 낸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바르트가 인간 이성에 대해 했던 "Nein!"은 지금 AI 담론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가 1934년에 거부했던 것은 단순히 자연 관찰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기 안에서 발견한 어떤 능력 — 이성, 도덕, 문화, 민족, 역사 — 을 신적인 것의 자리에 올려놓는 모든 시도였다.
그 시대의 일부 신학자들은 "독일 민족의 운명"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그것이 신학의 형태를 띤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신격화하면, 결과는 거의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짓밟는 정당화로 끝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오늘날 AI를 둘러싼 언어를 들어 보면 익숙한 울림이 있다. "초지능(superintelligence)",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 "디지털 신(digital god)", "전능한 인공지능". 일부 기술 낙관론자들은 인공일반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이 도래하면 죽음을 정복하고, 의식을 업로드하고, 인류를 새 단계로 진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인공초지능(Artificial Superintelligence, ASI) 이후의 세계는 종교의 종말론과 거의 같은 어휘로 묘사된다.
바르트라면 이 모든 것을 일관되게 평가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자연신학이며,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라고. 인간이 만든 도구를 인간을 구원할 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시도는, 그 도구가 돌 조각상이든 황금 송아지든 거대언어모델이든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기 영광의 우상을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 바르트의 자연신학 비판을 요약한 학계의 정리 [1]
중요한 점은 바르트가 기술이나 과학을 적대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가 거부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을 신적 권위로 격상시키는 사고방식이었다. 같은 논리로, 그가 AI 자체를 악마화할 이유는 없다. 다만 AI를 인류의 구원자로 부르거나, AI가 결정하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단호히 "Nein!"이라고 답할 것이다.
1930년대 자연신학이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 했다면, 2020년대의 자연신학은 "데이터와 알고리듬의 위대함"을 통해 인간을 완성시키려 한다. 어휘는 바뀌었지만, 인간이 만든 것을 인간 위에 올려놓는다는 구조는 같다.
바르멘 선언의 핵심 정신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어떤 정치 권력, 어떤 시대정신, 어떤 지도자도 인간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유일하고 전체주의적인 질서가 될 수 없다. 1934년 바르트가 거부한 것은 국가의 절대화였다. 국가가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치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그는 그것을 거짓 가르침이라 명명했다.
이 신학적 통찰은 21세기 AI 권력 비판으로 거의 그대로 옮겨진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듬 통치(algorithmic governance)라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 집중을 마주하고 있다. 신용 점수가 사람의 경제 활동 전반을 결정하고, 추천 알고리듬이 시민들이 무엇을 보고 듣는지를 결정하며, 얼굴 인식과 행동 예측이 공공 공간에서의 자유를 다시 정의한다.
여기서 바르트가 던질 질문은 신학적이지만 결과는 정치적이다. 한 가지 시스템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동시에 관리하고 평가하고 보상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어떤 단일한 질서도 인간 전체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바르멘의 명제는, AI 기반 전체 감시 사회에 대한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새로운 비판이 된다.
유의할 점은 바르트가 결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의 정당한 역할을 인정했다. 다만 국가가 자기 영역을 넘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려 할 때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같은 균형이 AI에 적용된다. AI는 의료, 행정, 산업에서 거대한 효용을 가져온다. 그러나 AI 시스템이 인간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자격을 부여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려 할 때, 그것은 자기 자리를 넘어서는 권력이 된다.
한 집에 자물쇠가 있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나 모든 방의 모든 자물쇠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고, 그 사람만이 누가 어느 방에 들어갈지 결정한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다. AI 권력이 위험해지는 지점은 알고리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모든 자물쇠를 한꺼번에 쥐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바르트의 인간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 곧 취약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한계 속에서 사는 존재이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 관점은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노화, 질병, 죽음을 해결해야 할 결함으로 보고, 기술 — 특히 AI와 생명공학 — 을 통해 이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의식 업로드, 디지털 영생, 인지 능력 강화는 그 대표적인 비전이다.
2024년 10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와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CCC)가 공동 주최한 "신학과 AI" 웨비나에서, WCC 중앙위원회 의장(moderator)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주교는 바르트를 직접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예수라는 한 인간성에서 출발해야 하며, 거기서 보이는 인간의 두 특징은 관계성과 취약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 자체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고통과 불완전함은 인간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상에 포함되어야 하는 본질이며, 그래야 AI는 인간을 완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 주는 수단으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 [2]
고통과 불완전함은 인간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AI는 고통을 덜어주는 수단이 되고,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WCC AI 신학 웨비나, 2024 [2]
이 관점은 종교를 가진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일반인의 삶에서도 의미는 종종 한계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어떤 만남도 절실하지 않다. 죽음을 모른다면 어떤 결정도 무게가 없다. 한계가 무의미한 세계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도 진지해질 수 없는 세계다.
바르트가 AI 시대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던질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유한성을 결함으로 보고 기술로 지우려는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인간을 사물에 가깝게 만든다. AI가 무엇을 하든,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한계를 가진 채로 다른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신학적이다. 그러면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바르트는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세 가지가 남는다고 본다.
이 명제는 종교적 색을 빼도 그대로 유효한 윤리 원칙이다. AI가 도구로 머무를 때 인간을 돕지만, 결정의 최종 주체로 격상될 때 인간을 대상으로 만든다. 채용, 대출, 의료 진단, 사법 판단에서 "AI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말이 인간 판단의 책임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임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는 원칙은, 바르트적 직관의 세속화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바르트는 시대마다 다른 외양으로 등장하는 절대화의 논리를 평생 의심했다. 오늘날 그 절대화의 가장 강력한 형태는 효율 그 자체다.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정확한 것이 곧 선이라는 가정. AI는 이 효율 척도를 거의 무한대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어떤 영역은 효율로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양로의 돌봄, 친구와의 대화, 아이를 키우는 시간, 슬픔에 함께 머무르는 자리. 이런 영역까지 효율의 잣대로 평가하는 순간, 인간 관계는 거래로 환원된다.
바르멘 선언의 가장 보편적인 교훈은 단순하다. 어떤 단일한 시스템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 정치도, 시장도, 알고리듬도 그렇다. 다원성을 지키는 일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시민적 지혜의 문제다. 사회 안에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여러 척도가 살아 있어야, 한 시스템의 오류가 사회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
바르트가 AI 시대에 남기는 가르침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인간 위에 올리지 마라. 신자에게는 그것이 우상숭배의 거부이며,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시민적 자기 보호의 원칙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바르트가 시대에 가장 충실했기 때문에 시대를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그가 1934년에 했던 일은 거창한 미래 예측이 아니었다. 자기 시대의 권력이 신적 권위로 격상되려 할 때, 그 순간에 "아니오"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 단순한 거부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가 만든 것을 신격화하려는 유혹이 형태만 바꿔 가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다. 그것이 인간을 풍요롭게 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신격화하려는 유혹, 그것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유혹, 그것을 통해 인간을 완성하려는 유혹은 이미 시작되었다. 바르트가 가르치려 할 것은 결국 단순하다. 도구는 도구의 자리에 두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를 지키고, 그 너머의 자리는 비워 두라는 것이다.
그가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는 신학자들의 몫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던진 질문은,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무게로 돌아온다. 우리가 만든 이 새 도구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