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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Reading  ·  Reformed Theology

세상의 끝과 목적

— 창조의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 —
R.C. Sproul 강연 정리설교문 해설

왜 이 세상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왜 끝나야 하는가. R.C. Sproul (스프로울, 1939–2017)이 리고니어 컨퍼런스(Ligonier Ministries Conference)에서 맡은 주제는 단순했지만, 그가 본문으로 택한 에베소서 4장은 깊었다. 이 글은 그의 강연 전체를 한국어 독자를 위해 재구성한 것이다. 세속주의(secularism)와 영원의 관점이 충돌하는 지점, 그리스도의 승천(ascension)이 우주론적 사건으로 읽히는 이유, 그리고 창조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단어가 “안식”인 이유를 차례대로 따라가 본다.

I. 본문이 던지는 거대한 질문Sproul이 “숨이 막혔다”고 고백한 한 절

Sproul은 자신이 시무하던 세인트앤드루스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수요 강해에서 에베소서 4장을 차근차근 풀어 가던 중 한 본문 앞에서 멈춰 섰다고 말한다. 흔한 본문이었지만, 그날따라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8–10절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특히 마지막 구절,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that He might fill all things)”에서 Sproul은 “목이 메었다(I choked)”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신 목적이 단지 보좌에 앉기 위함이 아니라 만물을 자기 자신으로 채우기 위함이라는 선언 앞에서, 그는 칼뱅(John Calvin)이 자주 인용한 격언 하나를 떠올린다.

Finitum non capax infinitum. — 유한은 무한을 담아낼 수 없다.

— 칼뱅이 즐겨 인용한 라틴어 명제
컵으로 바다를 담을 수 있는가

해변에 선 어린아이가 작은 양동이를 들고 바다 앞에 섰다고 해 보자. 양동이에 바닷물을 떠 담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양동이에 담을 수는 없다. 양동이가 작아서가 아니라, 바다가 무한히 크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도 마찬가지다. 신학적 진리의 일부는 길어 올릴 수 있지만, 무한자를 통째로 담아낼 수는 없다. Sproul이 그 본문 앞에서 “숨이 막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한계 인식이다.

II. 두 세계관의 충돌Mundus 와 Seculum — 라틴어 한 단어가 만든 문명의 분기

본격적인 강해에 앞서 Sproul은 자신이 놓인 시대를 진단한다.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두 권의 책은 미국 지성사에서 세속화(secularization)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그려 낸 책들이다.

S
Carl Sagan (칼 세이건, 1934–1996)
천문학자 · TV 시리즈 「Cosmos」(코스모스, 1980) 진행자
동명의 책 첫 페이지에 “우주(Cosmos)는 지금 있는 모든 것이며,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이며,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이라 적었다. 우주를 자기 안에서 완결된 닫힌 체계로 선포한 한 줄이다.
C
Harvey Cox (하비 콕스, 1929– )
하버드 신학자 · 「The Secular City」(세속도시, 1965)[1] 저자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City of God)」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만든 제목이다. Cox는 미국 문화에서 진행되어 온 흐름을 “형이상학적·종교적 원리의 지배로부터 문화가 해방되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Sproul이 Cox의 책에서 길어 올린 가장 결정적인 통찰은 어휘론적 분석이었다. 영어 단어 world로 한꺼번에 번역되는 라틴어가 사실은 두 단어로 갈라져 있다는 점이다.

mundus
Spatial — “여기 이곳”
공간적 의미의 세계. “이 장소, 이 우주, 저 위의 하늘 세계와 구분되는 여기”라는 뜻이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이단과 홀로 싸울 때 붙은 별명 Athanasius contra mundum(아타나시우스 대 세상)의 그 “세상”이다.
seculum
Temporal — “지금 이 시대”
시간적 의미의 세계. “이 시대, 지금 여기(hic et nunc, here and now), 영원과 구분되는 현재”라는 뜻이다. 영어 secular(세속의)와 century(세기)의 어원이 모두 이 단어다.

여기서 Sproul은 결정타를 날린다. 세속주의(secularism)는 단순히 “종교가 약해진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실재를 ‘지금’이라는 시간 단면 안에서만 해석하는 사상이다. 영원은 없다. 알파(α, 시작)도 없고 오메가(ω, 끝)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두 무(無) 사이에 끼인 현재라는 띠 한 줄이다.

두 개의 카메라

같은 풍경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는다고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을 찍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가 보는 사진에는 시간이 흐른 흔적이 없다. 다른 사람은 “시작과 끝을 함께 보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가 보는 사진에는 풍경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가 같이 새겨진다. 같은 들판을 보고도 두 사람이 끌어내는 의미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Sproul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진리는 후자의 카메라로 찍힌 사진이다. 라틴어로 sub specie aeternitatis, 곧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보는 시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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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알파 없는 우주의 곤경관성의 법칙으로 빅뱅을 묻다

강연의 가장 인상적인 일화는 Sproul이 Carl Sagan과 직접 나눈 대화다. 빅뱅(Big Bang) 우주론을 두고 Sagan이 “이제 과학은 빅뱅 이후 1나노초(nanosecond, 10억분의 1초)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자, Sproul은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영원 동안 하나의 점, 그 어떤 운동도 없는 무한히 작은 특이점(singularity) 속에 갇혀 있었다면, 도대체 왜 어느 목요일 오후 세 시에 그것이 폭발해 지금의 우주가 되었는가?

이어 Sproul은 뉴턴(Isaac Newton) 이래 모두가 배우는 관성의 법칙(law of inertia)을 들이댄다.

멈춘 골프공은 스스로 굴러가지 않는다

잔디 위에 놓인 골프공은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문다. 반대로, 한 번 굴러간 골프공은 마찰력이라는 외부 힘이 가해질 때까지 계속 굴러간다. 이것이 관성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영원토록 정지해 있던 특이점이 갑자기 폭발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힘이 있어야 한다. 그 외부 힘은 어디서 왔는가?

Sproul의 회상에 따르면, Sagan의 답은 단호하고도 의외였다. “거기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I don’t want to go there).” Sproul은 물었다. “어떻게 과학자가 진리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자기가 멈추고 싶은 지점에서 멈출 수 있는가?”[2]

— Sproul의 진단 —
세속주의는 알파를 거부하기 위해 오메가를 포기한 사상이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저 두 무(無) 사이에 떠 있는 먼지일 뿐이다.

여기서 Sproul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를 호명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첫 문장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라는 문제다”라고 썼다.[3] Sproul의 해석은 가차없다.

우리가 무에서 시작했고 무로 끝난다면, 우리는 그 사이에서도 무다. 카뮈는 이 결론을 정직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가 자살을 “남은 단 하나의 철학적 질문”이라고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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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알파와 오메가의 회복그리스도가 시작이자 끝이라는 선언

세속주의의 막다른 길 위에서 Sproul은 본문으로 돌아온다. 요한계시록(Revelation)의 그리스도가 자신을 부른 두 글자, “알파와 오메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시작과 끝을 가지며, 그 시작과 끝이 동일한 한 인격에게 묶여 있다는 신학적 선언이다.

왜 하필 알파와 오메가인가

알파(Α, α)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Ω, ω)는 마지막 글자다. 우리말로 옮기면 “나는 ‘ㄱ’이요 ‘ㅎ’이라”에 가깝다. 모든 문장이 자모 안에서만 쓰일 수 있듯이,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가 이 한 인격 안에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뜻이다. 알파를 빼면 첫 문장이 시작되지 않고, 오메가를 빼면 마지막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이제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자. 에베소서 4장의 인용은 시편 68편[4]의 메아리다. 다윗은 야훼(Yahweh)가 시온 산(Mount Zion)으로 등정하시며 패배한 적들을 사로잡아 끌고 오시는 장면을 노래했다.

시편 68편 18절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가시고 사람들에게서 또는 반역자들 중에서 예물을 받으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함이로다.

바울(Paul)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살짝 비튼 지점이 있다. 시편은 야훼가 적들에게서 예물(tribute)을 받으심을 노래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 예물을 다시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강조점을 옮긴다. Sproul은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 같은 그림의 다른 각도라고 본다.

개선장군의 행렬

고대 로마의 개선식(triumphus, triumph)을 떠올려 보자. 전쟁에서 이긴 장군은 사로잡은 적장과 적병들을 묶어 행렬 뒤에 세우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함께 끌고 도시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 전리품은 장군 한 사람의 사유물이 아니었다. 광장에 풀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스도의 승천(ascension)은 바로 이 개선식이다. 적은 사로잡혔고, 전리품은 백성에게 흩어진다. 그 전리품의 이름이 본문에서는 “선물(gifts to men)”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 뒤를 따라간 “포로들”은 누구인가? Sproul은 묻는다. 감람산(Mount of Olives)에서 그분이 영광의 구름에 싸여 올라가실 때, 제자들 눈에는 그분 혼자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이 “포로 된 자들을 사로잡아” 끌고 가셨다고 적는다.

나는 그 행렬 안에 누가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그 행렬 안에는 — 머리가 짓이겨진 한 마리 뱀이 — 이제 사로잡힌 자로서 그분 뒤를 따라갔다.

— Sproul의 해석 (창세기 3:15 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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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승천의 우주적 목적

이제 Sproul이 “목이 메었다”고 한 그 구절로 돌아간다. 그리스도는 왜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셨는가. 바울의 답은 한 줄이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that He might fill all things). Sproul은 이 충만(fullness)을 세 층위로 풀어낸다.

1) 존재(being)의 충만 — 편재성(omnipresence)

먼저, 신성(divinity)의 차원에서 그리스도는 성부, 성령과 함께 무한성(infinity)과 편재성(ubiquity)을 공유한다. 하늘과 땅 그 어느 한 점에도 하나님이 부재한 곳은 없다는 뜻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바다 속 물고기가 바다와 같지 않듯이

물고기는 바다 속에 있고, 바다 또한 물고기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는 바다가 아니며, 바다는 물고기가 아니다.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지만, 만물이 곧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만물을 곧 신이라고 부르는 사상이 범신론(pantheism, 汎神論)이다. Sproul은 이 경계를 “초조심해서(super carefully)”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대 우상숭배자들은 폭풍 자체를 폭풍의 신으로 섬겼고, 태양 자체를 태양신으로 섬겼다. 그러나 성경의 어법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은 폭풍 안에 계시지만 폭풍이 아니시며, 태양 안에 계시지만 태양이 아니시다.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creature)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이 곧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이 우주의 어떤 입자(particle) 하나도 예수가 임하지 않은 곳이 없다. 구름도, 꽃도, 동물도, 돌도, 건물도. 시편 기자가 노래한 대로,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며, 온 세상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Sproul은 여기서 다시 칼뱅을 끌어온다. 칼뱅에 따르면 우리는 거대한 극장(theatre)을 걸어 다니는 관객과 같다. 무대 곳곳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비추고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눈가리개를 매고 그 영광을 외면한다.[5]

눈가리개를 한 관객

웅장한 공연이 펼쳐지는 극장 안에서, 모든 좌석에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한 관객이 스스로 눈가리개를 매고 앉아 있다. 무대 위 빛도, 배우의 동작도 그에게는 닿지 않는다. 공연이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가 공연을 거부한 것이다. 노을과 그랜드 캐니언만이 영광의 “미니 초상화”인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이 그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그 한가운데를 눈가리개를 매고 걷는다.

2) 통치(authority)의 충만

두 번째 충만은 주권(sovereignty)이다. 그분은 단지 모든 바위와 나무 안에 임재하실 뿐 아니라, 모든 바위와 나무를 다스리신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모든 바위와 나무를 만드셨다. 창조는 삼위(三位)의 공동 사역이지만, 그 주된 행위자(principle actor)는 성자(Son)이시며, 만물은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에 의하여 지어졌다.

3) 목적(telos)의 충만 — “그를 위하여”

여기서 강연의 핵심 질문이 마침내 응답된다. 왜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세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너는 왜 존재하는가?

골로새서 1장 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본문이 누르는 단어는 두 개의 전치사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로 말미암아(διʼ αὐτοῦ, through Him)”와 “그를 위하여(εἰς αὐτόν, for Him)”다. 만물은 그분의 능력에 의해 지어졌을 뿐 아니라, 그분을 향해 지어졌다.

— 강연의 핵심 명제 —
이 세상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 레종 데트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분을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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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창조의 마지막 페이지여섯째 날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있다

강연 마지막에 Sproul은 책 한 권을 회상한다. 제목도 저자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 책이 던진 통찰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책의 저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었다. 우리는 흔히 창조의 절정(culmination)이 여섯째 날, 곧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 그것이 진짜 마지막 페이지인가?

히브리 수비학(numerology)에서 6은 궁극(ultimate)이 아니라 차극(penultimate, 次極)이라는 점이 단서다. 6이 세 번 반복된 666은 ‘불완전과 악의 극치’를 상징하는 숫자로 읽혀 왔다(요한계시록 13:18). 반면 7은 거룩한 수, 곧 완전과 안식의 수다.[6]

한 자릿수 더 남은 페이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기 전, 한 페이지가 더 남았다고 상상해 보자. 줄거리는 여섯째 장에서 절정에 이르지만,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음 장에 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도 그렇다. 인간 창조에서 멈춰 책을 덮으면 안 된다. 일곱째 날, 곧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까지 가야 비로소 창조의 목적이 드러난다.

창세기 2장 2–3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은 단지 일주일의 마지막 요일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이클이 매주 한 번씩 영원한 종착점을 가리키도록 새겨 넣은 시간의 화살표다. 매 주 끝에 우리는 안식일을 통해, 우리의 진짜 운명이 무엇인지 미리 맛본다. 그 운명의 이름은 안식이다.

창조의 목적은 안식일의 거룩함(Sabbath holiness)이다. 곧 그리스도의 충만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 Sproul이 인용한 익명의 저자, 그가 동의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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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닫는 문장알파와 오메가, 다시 한 번

강연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세속주의는 시작과 끝을 동시에 잃은 사상이었다. Sagan은 “외부 힘이 무엇인지 묻고 싶지 않다”고 했고, 카뮈는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자살뿐”이라고 했다. 두 답 사이에서, 성경은 전혀 다른 답을 내민다.

— 결론 —
그리스도가 창조의 알파(α)이시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오메가(ω)이시다.
너와 내가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분이다.

이것이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 존재론(ontology)의 진술이라는 점이 Sproul의 강연이 남기는 무게다.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For to live is Christ)”라는 빌립보서 1장 21절의 구절은 신자의 결심이 아니라, 그 신자 너머의 모든 피조물에 새겨진 존재 법칙이다.

강연을 일곱 줄로 다시 읽기

  1. 세속주의(secularism)는 영원을 거부한 사상이며, 그 끝은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사라진 무(無)의 공허다.
  2. 라틴어 mundusseculum의 구분이 보여 주듯, 같은 세상을 보는 두 시야가 있다. 공간만 보는 시야와, 영원 아래에서 보는 시야다.
  3. Sagan과의 대화에서 드러난 빅뱅 우주론의 빈자리는 “외부 힘”의 자리, 곧 창조주의 자리다.
  4. 그리스도의 승천은 단지 영광의 등극이 아니라, 사로잡힌 적들을 이끌고 백성에게 전리품을 흩는 우주적 개선식이다.
  5. 그분이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은 만물을 자기 자신으로 충만케 하시려는 데 있으며, 그 충만은 존재·통치·목적의 세 층위로 펼쳐진다.
  6. 골로새서 1장은 묻는다. 왜 너는 존재하는가? 만물이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하여 지어졌기 때문이다.
  7. 창세기의 마지막 페이지는 여섯째 날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있다. 창조의 목적은 일이 아니라 안식,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주석 및 사실 확인

  1. Harvey Cox의 The Secular City는 1965년 Macmillan(맥밀런)에서 출간되었다. Sproul이 강연에서 “Sagan의 선언보다 거의 20년 전”이라고 한 부분은 정확히는 약 15년 전(1965 vs 1980)으로, 강연자의 어림수 표현이다.
  2. Sagan과의 대화 일화는 Sproul이 여러 강연에서 반복해서 인용한 일화이며, 본 강연에서도 직접 회상의 형태로 전해진다. Sagan(1934–1996)의 사망 이전의 대화로 추정된다.
  3. Albert Camus, Le Mythe de Sisyphe(시지프 신화, 1942)의 첫 문장. 원문은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 c’est le suicide.”
  4. 시편 68편의 인용 방식과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이 사용한 어휘(예물을 “받음”→ “주심”)의 미묘한 차이는 신약학에서 오랫동안 토론되어 온 주제다. Sproul은 “모순이 아닌 강조점의 이동”으로 정리한다.
  5. 칼뱅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 비유는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권 5장과 14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6. Sproul은 강연에서 “6의 3제곱이 666이 된다”고 언급했으나, 산술적으로는 6³ = 216이며, 666은 6을 세 자리에 반복한 표기에 해당한다. 본 정리에서는 신학적 상징(불완전의 극치)의 의미만을 살려 옮겼다. 한편 강연에서 인용된 “익명의 저자”는 Sproul이 본인도 책 제목과 저자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한 부분으로, 본 글에서도 그대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