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정리 · 문화심리학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말하는 창조의 정체 - 그것은 천재의 영역도, 무에서 유를 만드는 마법도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남다르게 다시 엮는 일, 곧 편집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시각적 사고와 언어적 사고, 바우하우스와 인공지능, 그리고 카드 한 장에서 시작되는 지식 관리까지를 하나의 줄기로 정리한다.
김정운은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다. 한동안 방송에서 입담 좋은 교수로 대중에게 친숙했지만, 50대에 접어들 무렵 교수직을 내려놓고 일본 교토의 미술대학으로 떠나 일본화를 배웠다. 2016년 귀국한 뒤로는 여수 앞바다의 한 섬에 작업실 미역창고(美力創考)를 차리고, 스스로를 화가이자 어부라 부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가 일부러 사람들과 떨어진 섬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에서는 인간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의 결혼식까지 챙겨야 하는 시간들이 자기 생산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고립을 외로움이 아니라 생산의 조건으로 본다. 특히 책처럼 깊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일은 스스로를 고립시킬 때 더 잘된다고 말한다.
이 보고서는 그가 자신의 책 에디톨로지와 창조적 시선에서 펼친 생각을 풀어놓은 한 강연을 따라간다. 강연은 자유분방하게 여러 갈래로 뻗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끝에는 의외로 손에 잡히는 실천 두 가지가 놓여 있다.
창조는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남다르게 다시 엮는 일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배울 수 있고, 그 출발점은 나만의 관점과 충분히 쌓인 데이터다.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도착지를 미리 보여두는 편이 길을 잃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강연 전체는 다음 세 문장으로 압축된다.
창조는 편집이다.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같은 정보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에서 나온다.
창조의 동력은 재미다. 남의 욕구가 아니라 내 관심을 좇아 몰입할 때 생각은 멀리 날아가고, 돈은 그 뒤를 따라오기도 한다.
창조의 재료는 데이터다. 카드에 생각을 정리하고 나만의 제목(메타언어)을 붙이는 습관이 편집의 재료를 쌓는다.
창조 이야기로 곧장 들어가기 전에, 김정운은 먼저 우리가 불행해지는 자리를 짚는다. 그 자리는 가치를 재는 방식에 있다.
돈은 그 자체가 가치가 아니라 가치를 주고받기 위한 교환의 수단일 뿐이다. 내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물건이나 땅이 내게 꼭 필요하다면, 시장가의 두 배를 주고 사도 손해가 아닐 수 있다. 객관적 시세로는 비싸게 산 셈이지만, 내가 그 위에서 만들어낼 가치가 그보다 크다면 그 거래는 나에게 옳다.
여기서 두 가지 가치가 갈린다. 어떤 것이 나에게 실제로 쓸모 있는 정도가 사용가치이고, 시장에서 다른 것과 바꿀 수 있는 정도가 교환가치다. 본질은 사용가치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용가치가 제각각이라 서로 견줄 수가 없으니, 비교를 위해 만들어낸 공통 잣대가 교환가치, 곧 돈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100억 원짜리 펜트하우스가 있다고 하자. 누군가에게는 그 전망 하나가 100억의 값을 한다. 그러나 전망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 같은 집의 사용가치는 몇천만 원에 그칠 수도 있다. 같은 집인데 값이 다른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는 하나여도 사용가치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불행은 내 사용가치를 남이 정한 교환가치로 재기 시작할 때 싹튼다.
김정운은 자신이 50대에 유명해지고 돈도 벌었지만 삶이 가짜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방송에 나가면 사람들은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그 요구에 맞추다 보니 자기 삶이 타인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고, 어느 순간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환가치를 더 많이 챙기는 일이 내 이야기, 내 삶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는 묻는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태도는 단순하다. 남의 호불호 대신 나의 호불호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 가치 평가의 기준을 바깥 대중이 아니라 나에게 두는 것. 이것이 뒤에 이어질 주체적 관점의 출발점이며, 그가 말하는 창조적 삶, 곧 타인과 다른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첫 단추다.
우리는 늘 창조적이 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정작 창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흔한 착각에 갇혀 있다고 김정운은 지적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력은 천재의 유전적 재능이라 여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창조적이 되라고 요구한다. 이미 정해진 것을 더 노력하라는 말은 모순이다. 언어학에는 이와 닮은 오랜 논쟁이 있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보아 그것을 언어 습득 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라 불렀다. 반면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아무리 타고나도 그 능력을 끌어내 주지 못하면 발현되지 않는다며, 그것을 받쳐 주는 언어 습득 지원 체계(Language Acquisition Support System)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김정운은 모든 것을 유전자로 환원하는 설명은 좋지 않다고 본다. 머리 나쁘게 태어난 사람은 어쩌란 말이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발점은 분명하다. 창조는 교육하고 학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가 처음 한 것이 아니다. 약 100년 전 독일에는 창조를 가르칠 수 있다고 선언한 학교가 있었다. 바로 바우하우스다. 이 학교는 뒤에서 다시 길게 다룬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런데 들어 본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머릿속에 떠올리겠는가. 생각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서가 된다. 영어로 표상은 re-presentation, 곧 한 번 본 것(present)을 머릿속에 다시(re-)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한 번 경험한 것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이라, 정말로 무에서 시작하는 창조는 신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창조란, 이미 존재하지만 너무 익숙해서 있는 줄도 모르던 것을 새롭게 느끼게 만드는 일이다. 없던 것을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이다.
앞의 두 착각을 걷어내면 김정운의 핵심 명제가 남는다.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편집이다. 그는 이 생각을 다듬어 편집학이라는 뜻의 에디톨로지(Editology)라는 단어까지 만들었다.
편집이 어떻게 창조가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우리의 앎은 세 단계로 쌓인다. 세상에는 무한한 자극이 쏟아진다. 우리는 그 가운데 중요한 것만 골라 정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정보와 정보 사이의 관계를 엮어 지식을 만든다. 핵심은 마지막 문장이다. 지식이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정보들 사이의 관계다.
그렇다면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같은 정보들 사이의 관계를 다르게 연결하면 된다. 바우하우스를 두고 모두가 건축 학교, 디자인 학교라고 해석할 때, 김정운은 이를 창조 학교로 다시 읽어낸다. 책에 담긴 재료는 이미 다른 곳에 존재하던 것들이지만, 창조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다시 분류하면 새로운 책이 된다. 이렇게 보면 창조적이 되는 일은 의외로 쉬워진다.
다만 편집에는 함정도 있다. 잘못 연결하면 세상을 읽는 틀 자체가 망가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 떨어진 폭탄의 위치를 지도에 찍어 보니 어떤 강과 공원 주변에만 정확히 떨어진 듯 보였다. 정부는 간첩이 신호를 보낸다며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간첩은 없었다. 우연히 흩어진 점들을 사람이 선으로 잘못 이어 패턴을 만들어낸 것뿐이었다. 정보의 연결을 잘못하면 없는 음모가 보이고, 세상의 해석 틀이 어긋난다.
편집의 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영화의 쿨레쇼프 효과다. 소련의 영화감독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는 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김이 나는 수프, 관에 누운 여인, 노는 아이 같은 서로 다른 장면과 번갈아 붙였다. 얼굴은 매번 똑같은 한 컷이었는데도 관객들은 배우가 각각 배고픔, 슬픔, 애정을 표현한다고 느꼈다. 앞뒤 장면 사이의 빈틈을 관객 스스로 메운 것이다. 똑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고, 편집이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는 말의 근거도 여기 있다.
창조적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려면 인간이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흔히 우리는 사고의 약 70퍼센트를 그림으로, 약 30퍼센트를 문장으로 한다고 말한다.
심리학은 이 둘을 시각적 사고와 언어적 사고로 나눈다. 멍하니 있을 때를 떠올려 보자. 머릿속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너무 빨리 날아다녀서 멍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시각적 사고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스스로를 붙잡는 순간 언어적 사고가 끼어든다. 시각적 사고는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것을 향해 날아가고, 언어적 사고는 그 흐름을 멈춰 세워 문제를 해결하고 논리로 다듬는다.
시각적 사고가 멀리 날아갈수록 창조의 가능성은 커진다. 보통 사람은 어느 선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억압해 생각을 되돌린다. 천재는 그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훨씬 멀리까지 간다. 그렇다면 천재와 또라이는 무엇이 다른가. 둘 다 멀리 간다. 차이는 돌아오는 길에 있다.
천재는 멀리까지 날아간 뒤, 자신이 거쳐 온 사고의 흐름을 언어적 사고로 다시 짚어 남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반면 그 경로를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또라이로 남는다. 그러니 창조적 사고는 시각적 사고가 마음껏 사고를 치는 과정에서 나오되, 언어적 사고가 그것을 붙들어 설명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시각적 사고를 활성화하려면 음악, 미술, 체육, 여행처럼 많이 보고 느끼는 경험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 공부는 거의 전부 언어적 사고로 짜여 있다. 그것만 열심히 하면 오히려 창조력이 제한될 수 있다. 시키는 대로 잘하고 사고를 치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가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해서라면, 언어적 사고에만 매달리는 교육은 그 목적과 어긋난다.
시각적 사고는 멀리 날아가 새로운 것을 향하고(창조), 언어적 사고는 그것을 멈춰 세워 다듬는다(문제 해결). 둘 다 필요하지만, 우리 교육은 언어적 사고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다.
언어적 사고를 한 걸음 더 파고들면 흥미로운 사실에 닿는다. 우리의 생각은 결국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다.
간단한 실험. 2 더하기 3은 즉시 5라고 답한다. 그런데 29 곱하기 8은 어떤가. 대부분 입속으로 무언가 중얼거린다. 말이란 본래 상대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때 상대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이것이 생각이다.
이 통찰을 정리한 사람이 러시아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Lev Vygotsky)다. 그는 생각을 내적 발화(inner speech), 즉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에게 거는 말이라고 보았다. 같은 현상을 두고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아이가 아직 미성숙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이라 해석했지만, 비고츠키는 다르게 보았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 가까운 사람들과 나눈 사회적 대화가 안으로 내면화되어 내적 발화, 곧 생각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이 내면화된 사회적 대화라면, 사람은 자라난 문화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각은 보편적이지 않고 문화에 종속된다.
유명한 예가 있다. 도끼, 망치, 나무, 톱 가운데 하나를 빼라고 하면,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개 나무를 뺀다. 나머지 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을 시베리아의 벌목공에게 던지면 그들은 망치를 뺀다. 다룰 나무가 없는 도구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게다가 나무를 다루는 데 망치는 없어도 된다. 도끼 등으로 치면 되니까. 누구의 답이 옳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아온 문화의 틀이 답을 결정한 것이다.
창조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인류 최초로 학교의 형태로 실험한 곳이 독일의 바우하우스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세운 이 학교는 흔히 건축 학교, 디자인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운은 이를 창조 학교로 다시 읽는다.
그로피우스가 대단한 점은 당대의 튀는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데 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파울 클레(Paul Klee)가 이곳에서 가르쳤다. 회화, 건축, 공예, 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이 이곳에서 펼쳐졌고, 그 실험에는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술의 경계를 넘어 여러 갈래를 하나로 묶는 시도, 곧 오늘날 우리가 융합이라 부르는 것이다. 종합예술이라는 개념 자체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가 무대 예술에서 먼저 썼고, 바우하우스는 이를 건축과 공예까지 더 넓게 확장했다.
바우하우스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미술의 거대한 전환이 있다. 그 전까지 그림의 임무는 대상을 사진처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등장하자 화가들은 위기에 몰렸다. 정확함으로는 카메라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화가들은 정확한 재현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나아갔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한 그림 안에 시점을 둘로 흩뜨렸다. 과일 바구니는 정면에서, 식탁 위 과일은 위에서 내려다본 듯 그린 것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야수파는 색을 해체해 얼굴에 파란색을 칠했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입체파는 형태를 해체했다. 그리고 칸딘스키가 추상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면서, 그림은 마침내 재현에서 편집으로 바뀌었다. 대상을 베끼는 일이 아니라 점, 선, 면, 색을 재구성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 정확함을 버리자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인상파 이전의 정밀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인상파 그림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웅성거림이 핵심이다. 그림이 빈틈을 남기자 관객이 그 빈틈을 적극적으로 메우며 그림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
이 빈틈 메우기를 설명하는 것이 게슈탈트 심리학이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을 묶어 보고(근접성), 비슷한 것을 함께 보며(유사성), 불완전한 것을 완성해서 본다(완결성). 위 그림에서 삼각형은 실제로 그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본다.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바로 이 능력을 끌어내, 관객을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해석자로 바꿔 놓았다. 일방적 계몽에서 상호작용으로의 전환, 김정운은 이것을 문화사의 거대한 변화로 본다.
바우하우스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감각의 교차 편집이라고 김정운은 말한다. 색깔을 듣고 소리를 보는 것, 이것이 디자인의 시작이며, 여기에 인간이 자아를 갖게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나라는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발달심리학자 대니얼 스턴(Daniel Stern)은 이를 정서 조율(affect attune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엄마와 아기가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기가 표정으로 기쁨을 드러내면, 엄마는 같은 기쁨을 목소리로 받아 준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아기는 표정, 엄마는 소리) 두 정서의 질감은 똑같다. 바로 이때 아기는 깨닫는다. 같은 감정인데 따로 느껴진다. 나와 엄마가 다른 존재구나. 표현 양식의 어긋남을 통해 자아가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다.
스턴은 모든 정서 표현에 생기 정서(vitality affects)의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강도, 타이밍과 리듬, 그리고 형태가 그것이다. 같은 즐거움이라도 강도와 리듬이 다르고, 그것이 표정으로 또는 목소리로 또는 몸짓으로 다르게 표현된다. 흥미롭게도 사람이 타인을 판단할 때는 말의 내용보다 이 비언어적 신호, 즉 말의 속도와 표정과 몸짓에 거의 전적으로 기댄다.
여기에 거울뉴런(mirror neuron)을 더하면 그림이 완성된다.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같은 부위의 뇌가 반응하도록 태어난다. 그래서 갓난아기도 며칠 만에 부모의 표정을 흉내 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똑같이 따라 하지 않고, 감정의 질감은 같되 표현 양식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이 어긋남, 곧 감각이 교차하는 경험을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
같은 음악을 한 사람은 콧노래로, 한 사람은 손가락 장단으로 표현한다고 하자. 둘이 느끼는 흥은 같지만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다. 이 어긋남을 알아채는 순간, 나는 너와 다른 존재임을 깨닫는다. 자아란 이렇게 같은 감정을 다른 양식으로 표현하는 교차의 틈에서 태어난다.
주관성이 각자 따로 존재하면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공유해야 한다. 이렇게 내 생각을 너와 나누는 능력을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선을 함께 둘 때 가능해진다. 같은 것을 보아야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같은 것을 보게 하는 이 능력을 공동 주의(joint attention)라 하는데, 사람은 자연스레 하지만 다른 영장류는 잘 하지 못한다.
김정운은 이 대목에서 오늘의 한국을 짚는다. 좌우가 나뉘어 다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같은 목표를 두고 방법이 갈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짜 위기는 서로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시선 공유가 무너져 상호주관성이 불가능해질 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김정운의 답은 주체적 관점을 가지라는 것이다. 관점을 뜻하는 perspective는 본래 원근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원근법은 3차원 공간을 2차원 화면에 줄이면서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다. 그 소실점이 기준이 되어 모든 사물을 비율에 맞게 배치한다. 철학적으로 보면 소실점은 모든 개인을 떠난 가상의 객관적 위치다. 그런데 김정운은 묻는다. 누가 그림을 정면에서만 보라고 했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어떤 그림은 정면에서 보면 한쪽 팔이 유난히 길고 식탁이 어색하게 튀어나와 보인다. 그런데 그림이 원래 걸려 있던 위치, 즉 오른쪽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로 보면 그 왜곡이 사라지고 소실점이 한 점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다 빈치는 그림이 걸릴 자리와 관객이 설 위치까지 계산해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이다. 다시 묻게 된다. 그림을 꼭 정면에서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남들이 보는 방식, 즉 대중의 시선을 의심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맥락을 의심할 때 나만의 주체적 관점이 생긴다. 나는 늘 맥락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이므로, 나를 바꾸려면 먼저 내 맥락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맥락이 답을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행복한지 묻고 이어서 지난달 데이트를 몇 번 했는지 물으면, 두 답 사이에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 그런데 질문 순서를 뒤집어 데이트 횟수를 먼저 묻고 행복을 물으면, 데이트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행복하다고 답한다. 같은 질문인데 순서만 바꿔도 답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남이 던지는 질문에 답만 했을 뿐, 질문의 순서를 바꿀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비슷한 원리가 게슈탈트의 전경과 배경 그림에도 있다. 술잔으로도 보이고 마주 본 두 얼굴로도 보이는 그림에서, 무엇을 전경으로 둘지는 내가 결정한다. 내가 사는 맥락 속에서 규정되는 내 삶의 틀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해하려 들 때, 비로소 주체적 관점이 유지된다.
주체적 관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열등감이다. 과대 포장된 권위에 주눅 들면 스스로 해석 내리기를 주저하게 되고, 그 자리에 열등감이 들어선다. 열등감은 자신을 파괴하고, 뒤집히면 타인을 향한 불필요한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데이터와 자료가 많으면 권위에 덜 주눅 들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나란히 놓고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창조의 동력은 무엇인가. 김정운은 단호하게 재미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재미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몰입과 같은 것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인간이 추구하는 재미의 본질을 몰입(flow)이라 불렀다. 무언가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상태다. 재미있어야 생각이 멀리 날아간다. 어린아이가 죄다 창조적인 이유도 늘 재미를 좇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빗자루를 주면 청소를 하지만, 아이에게 주면 그 위에 올라타 마녀처럼 날아간다. 빗자루의 맥락을 바꿔 버리는 것, 그것이 재미를 향한 창조다.
몰입은 실력과 도전(난이도)의 관계에서 나온다. 실력에 비해 도전이 너무 어려우면 불안해지고, 너무 쉬우면 지루해진다. 둘이 맞아떨어지는 자리에서 몰입이 일어난다.
그는 인간의 정서를 크게 셋으로 나눈다. 지루함, 불안함, 그리고 재미.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대개는 재미를 고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정서는 불안이었다. 주체적 관심도 없고 데이터도 없어 늘 불안했다는 것이다. 실력은 뛰어난데 도전이 시시하면 지루해지고, 실력은 부족한데 과제가 버거우면 불안해진다. 어느 쪽도 창조로 이어지지 않는다.
늘 똑같은 규칙의 고스톱은 금세 지루해진다. 그런데 화투패에 그려진 동물이 일정 수를 넘으면 점수를 더 주는 새 규칙을 만들면, 그동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팔광의 토끼(달 속 계수나무 토끼)가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다. 재미를 위해 규칙을 바꾸자 남이 못 보던 것을 보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창조란 별것이 아니라 이렇게 맥락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결론은 명료하다.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면 재미있고, 돈은 그 뒤를 따라온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못 보는데 어떻게 돈이 벌리겠는가. 설령 돈이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다른 세상을 보며 재미있게 살았으니까. 김정운이 강조하는 것은 돈이 생기면 해결될 문제라고 미루지 말고, 지금 생각하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돈이 생겨도 행복하지 않다.
창조의 역사를 더 크게 보면 두 번의 지식혁명이 보인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르(Joel Mokyr)는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오해를 낳는다고 본다. 핵심은 증기기관을 만든 사건이 아니라, 증기기관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지식혁명이라 부른다.
산업혁명 이전, 지식은 귀족의 것이었고 기술은 장인의 것이었다. 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었다. 그런데 이 둘이 합쳐지면서 유용한 지식(useful knowledge)이 태어났다. 이것이 1차 지식혁명이다. 김정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과학과 기술에 예술을 더하면 창조적 지식이 나온다. 이것이 2차 지식혁명이며, 그 시작점이 바로 바우하우스다.
이 흐름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잡스는 애플의 디엔에이가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기술이 예술 및 인문학과 결합할 때 가슴 뛰는 것이 나온다고 말했다. 바우하우스가 1920년대에 한 이야기를, 잡스가 21세기에 다시 한 셈이다. 실제로 잡스는 처음엔 소니(Sony) 같은 디자인을 추구했지만, 이내 From Sony to Bauhaus를 선언하며 바우하우스를 향했다. 모서리의 장식을 걷어낸 산세리프 서체,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그 흔적이다.
지식이 쌓이는 구조도 함께 바뀐다. 1차 지식혁명은 생물-인간-포유류처럼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위계적 분류(taxonomy)를 낳았다. 대학이 본부-단과대학-학과로 나뉘는 방식이다. 2차 지식혁명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표를 붙여 연결하는 네트워크적 분류(folksonomy)를 낳았다. 옛날에는 천재만 할 수 있던 생각이 날아가기를 이제 보통 사람도 한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대신,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관심을 따라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마우스의 클릭과 잡스가 더한 손가락 터치가 자유연상의 도구가 되어, 무의식의 흐름이 일상의 행위로 내려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창조의 이론이라면, 이제부터는 실천이다. 김정운이 독일 유학에서 배운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카드 사용법이다.
그는 책의 중요한 대목을 노트에 베껴 적었다. 반면 독일 친구들은 카드에 정리했다. 내용과 출처를 적는 것까지는 같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카드 위에 자기만의 제목을 붙였다. 그 제목은 저자의 말이 아니라, 내가 이 내용을 왜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나의 개념이었다. 생각에 대한 생각, 곧 메타언어를 붙인 것이다.
남의 글을 모아 두기만 하면 짜깁기다. 그러나 내가 붙인 메타언어, 곧 나만의 분류와 개념이 존재하면 편집이 된다. 그 메타언어가 곧 나의 이론이고, 그것이 창조다. 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이 인용 부호 없이 인용하는 법을 최고로 발전시키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카드 정리법은 독일어로 제텔카스텐(Zettelkasten), 곧 메모 상자라 불린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수만 장의 카드 상자로 방대한 저작을 쏟아낸 일화로 유명하다. 노트 필기와의 차이는 편집 가능성에 있다. 노트는 양이 많아도 순서를 바꿔 다시 엮기 어렵지만, 카드는 자유롭게 재배열되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시험은 노트 필기로도 잘 볼 수 있지만, 토론에서 네 생각을 말해 보라는 요구 앞에서는 카드를 쌓아 온 사람만이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이 편집의 역사는 책의 형태 변화와 닮았다. 정보가 적던 시절에는 두루마리로 충분했다. 정보가 많아지자 낱장을 묶어 펼쳐 보는 코덱스(codex)가 나왔다. 그러나 분절만으로는 부족하다. 색인과 목차, 곧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인덱스가 없으면 코덱스는 무의미하다. 색인이 있어야 원하는 항목을 찾아 세로로 다시 엮을 수 있다. 그래서 책의 목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는 안내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찾아 재편집하라는 도구다.
이 편집을 가능하게 하려면 데이터가 표준화되어야 한다. 표준화된 단위라야 잇고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가 음을 표준화해 화음을 가능하게 했듯, 표준화는 편집의 단위를 만들고 그 위에서 또 다른 차원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20세기 후반 이 흐름은 지식경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경영학자 노나카 이쿠지로(Nonaka Ikujiro)는 지식을 둘로 나눈다. 문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암묵지(tacit knowledge)다. 정작 중요한 것은 회의가 아니라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가는 암묵지라,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사무실을 놀이터처럼 꾸민다는 것이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은 결국 이 데이터 관리 기술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은 무엇을 하면 되는가. 김정운의 처방은 단순하다. 카드를 쓰되, 개인용 데이터베이스 도구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는 도구의 변천을 직접 따라왔다. 날아가는 생각을 붙잡는 단순한 1세대 도구에서, 지식을 체계화하고 검색하는 에버노트(Evernote)와 노션(Notion) 같은 2세대 도구로, 그리고 데이터를 넣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연결 고리까지 그려 주는 옵시디언(Obsidian)으로. 운전 중 떠오른 생각은 녹음해 두었다가 데이터베이스에 넣고, 그 위에 왜 이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는지 메타언어를 붙인다. 그렇게 하루 스무 개에서 서른 개의 메타언어를 만들면, 남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싫어도 하게 된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확히 아는가에서 갈린다. 그것은 남에게, 또는 나 자신에게 가르칠 때 분명해진다. 그러니 자기 관심사를 정리할 때 늘 내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 이것이 메타인지를 기르는 가장 단순한 출발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오늘의 인공지능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김정운은 거대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의 원리를 자기 언어로 풀어낸다. 그것은 언어의 공간화다.
거대언어모델은 벡터 기반 연산을 통한 패턴 인식이다. 단어들을 수치로 바꿔 거대한 다차원 공간의 한 위치에 놓는 것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벡터 공간은 3차원에 그치지만, 컴퓨터는 수천에서 수만 차원을 다룰 수 있다. 각 단어는 여러 차원의 좌표로 표현되고, 의미가 가까운 단어들은 공간에서도 가깝게 모인다.
김정운은 이것을 머릿속에서 그림을 다루는 시각적 사고의 기계 버전으로 본다. 인간이 그림으로 패턴을 잡아내는 일을, 더 빠르게 계산하는 도구가 그래픽처리장치(GPU, Graphics Processing Unit)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초기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이 논리로만 사고한다고 보고, 조건문을 수만 가지 입력해 결론을 끌어내려 했다. 이는 한 줄로 나아가는 언어적 사고에 가깝고, 순차 처리에 강한 중앙처리장치(CPU, Central Processing Unit)와 닮았다. 그러나 그래픽처리장치는 수많은 연산을 동시에 처리한다. 순차적 논리를 아무리 빨리 돌려도 동시 처리를 따라갈 수 없다. 불과 십수 년 전 이 전환이 일어나면서 인공지능 연구가 폭발했고, 그 핵심은 패턴 인식이 되었다.
요즘 인공지능은 이미지를 음성으로, 음성을 텍스트로 바꾸는 멀티모달(multimodal)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정운이 보기에 진짜 혁명은 앞서 자아 형성에서 말한 크로스모달리티, 곧 감각의 교차 편집이 이루어질 때 완성된다. 양식을 단순히 변환하는 것을 넘어, 색을 듣고 소리를 보는 차원의 통합 말이다.
인공지능이 검색과 요약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도 김정운은 종이책을 권한다. 이유는 일관된다. 책은 저자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종이책에는 침을 바를 수 있다. 사람은 귀한 것에 침을 바른다. 돈을 셀 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렇다. 더 중요한 것은 줄을 칠 수 있다는 점이다. 줄을 긋고 여백에 내 생각을 적는 행위가 바로 저자와의 상호작용이다. 책을 깨끗이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빈틈에 내 메타언어를 적어 넣을 때, 일방적 수용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일어난다.
그가 자신의 독서를 두고 독자가 더 머리 아프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책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저자와 부딪치라는 것.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지 지식을 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일방적이다. 종이책으로 상호작용을 훈련하고, 그렇게 길어 올린 생각을 데이터베이스에 정리해 끊임없이 쌓아 가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공부의 두 축이다.
깨끗하게 보존된 책은 박물관 유리 너머의 그림과 같다. 보기는 좋지만 나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줄 긋고 메모로 더럽혀진 책은 함께 산책하며 말을 주고받은 친구와 같다. 흔적이 곧 대화의 증거다.
긴 이야기를 김정운은 두 가지로 모은다. 창조적 능력은 주체적 관점과 축적된 데이터, 이 두 축 위에 선다.
위계적 지식의 세계에서는 내 주체적 관점이 어디에 속하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네트워크적 지식은 그물과 같다. 그물에서 매듭들이 겹치는 노드 하나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연결된 나머지가 따라온다. 새로운 세계를 앞서 창조하는 이 쾌감이 곧 주체적 관점을 밀어붙이는 힘이며, 그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편집의 재료가 많아야 떠오르는 생각이 다양해지고, 편집의 차원도 자꾸 달라진다. 김정운이 2만 권의 책을 두고도 잘난 척할 수 있는 것은 그 책들을 다 읽어서가 아니라,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관심이 생기면 곧장 찾아볼 수 있고, 좋은 책은 좋은 책을 끌고 나온다. 그래서 그는 책상 옆에 빈 책장을 두고, 지금 추구하는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그곳에 모아 둔다. 데이터를 축적하는 습관, 이것이 핵심이다. 새롭게 관심을 가진 생각은 의외로 빨리 사라지므로, 붙잡아 두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 나만의 메타언어를 갖자. 무언가를 정리할 때 저자의 말이 아니라 내가 왜 그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는지를 한 줄 제목으로 붙이는 것.
둘, 지식을 카드에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자. 흩어진 생각을 붙잡아 데이터베이스로 쌓고, 그 위에 메타언어를 얹는 것.
이 두 축이 맞물려 메타언어가 쌓이면, 결국 모든 화두는 하나로 모인다. 재미있는가. 남들이 못 보는 개념을 가지고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돈은 따라오면 다행이고 안 따라와도 그만이다. 지금까지 재미가 없었고 창조적이지 않았다면, 오늘 그가 권한 것 중 가장 실천하기 쉬운 하나라도 당장 시작해 보는 편이 낫다. 카드 한 장에 나만의 제목을 붙이는 일부터.
이 글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강연 내용을 주제별로 재구성해 정리한 보고서다. 본문의 학술 개념과 인물 정보는 공개된 자료로 확인했으며, 영상 전사 과정에서 잘못 옮겨진 일부 용어(예: 쿨레쇼프 효과)는 정확한 표기로 바로잡았다. 김정운의 견해는 그의 해석이며, 일부 주장은 학계의 정설과 강조점이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