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진짜 나’는 없다 — 나다움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나답게 살라”는 말이 어디서나 들려온다. 그런데 정작 그 ‘진짜 나’를 끝내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견을 전제로 한 나다움은 어쩌면 우리를 가장 헷갈리게 만드는 환상일지 모른다.
서점의 자기계발서 매대에서, 광고 문구에서, 강연장에서 ‘나다움’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진짜 너를 찾아 떠나라. 이런 말들은 듣는 순간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렇게 찾으라는 ‘진짜 나’를 정말로 찾아낸 사람이 있기는 한가.
이 글의 출발점은 다소 도발적이다. 진짜 나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 역사상 누구도 ‘진짜 나’를 끝내 손에 쥔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진짜 나가 내 안 어딘가에 묻혀 있고, 잘 파헤치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는다. 이 기대 자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기대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어떤 삶이 가능해지는지를 차분히 따라가 보려 한다.
01‘진짜 나’는 어째서 발견되지 않는가
‘나다움’ 메시지의 상당수는 무한 긍정 위에 서 있다. 너는 흠 없이 완전한 존재이고, 그 본래의 모습을 그저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위로로는 훌륭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마주치는 것은 마냥 긍정할 수 있는 단단한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여러 한계와 먼저 부딪힌다.
우리는 생명체로서 질병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안고 산다. 사회적 존재로서 늘 어떤 규율 안에 묶여 있으며,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의식한다. 아무리 독립을 외쳐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기대어야 하고, 애초에 우리는 스스로 고른 적 없는 시대와 부모와 몸을 가진 채 이 세계에 던져졌다. 20세기 실존철학은 이 마지막 사태를 ‘내던져짐(피투성, 被投性)’이라 불렀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시작한 그 조건부터가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란 마냥 독자적으로 빛나며 앞으로만 나아가는 주체가 아니다. 흔한 나다움 메시지가 그리는 그림과, 자기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마주하는 실제는 이렇게 어긋난다.
이 어긋남을 직시하는 일이 비관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살펴봐야, 그다음부터 자기에게 맞는 삶을 설계해 나갈 수 있다. 환상의 자리에 무엇을 놓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02그렇다면 나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발견할 본질이 없다면, 나다운 삶이라는 말은 텅 빈 구호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 한국의 오래된 표현을 빌리면 각자에게는 ‘팔자’가 있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라기보다, 사람마다 출발선의 조건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감각에 가깝다. 같은 길이라도 누구에게는 잘 맞고 누구에게는 영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다운 삶이란 이렇게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사회 전체가 짜놓은 하나의 틀에 자신을 뻣뻣하게 끼워 맞추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잘 맞는 길을 어떻게든 찾아 계속 나아가려는 노력. 핵심은 이 노력에 끝이 없다는 데 있다. 자기에게 맞는 길은 보통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이고, 살다 보면 도중에 갈아탈 수도 있다. 어릴 적 책상에 앉아 있는 일은 죽어도 안 하겠다던 사람이 어느 날 읽고 쓰는 일이 자기에게 맞는다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의 직업이 어느 순간 통째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나다운 삶을 하나의 안정된 트랙 위를 곧게 달려가는 일로 상상하면 곧 어긋난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뜻밖에도 물리학의 한 장면이 또렷하게 비춰 준다.
03인생은 ‘삼체 문제’를 닮았다
중력을 가진 물체가 딱 두 개만 있을 때, 둘의 움직임은 아주 먼 미래까지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행성이 태양 둘레를 도는 궤도를 우리가 정밀하게 계산해 내는 것이 그 예다. 그런데 중력을 가진 물체가 세 개로 늘어나는 순간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충분히 긴 시간을 놓고 보면, 그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생겨나고 이동 경로가 갑자기 종잡을 수 없이 뒤틀린다. 물체가 넷, 다섯으로 늘면 변수는 더 커진다. 이것이 카오스 이론이 말하는 ‘삼체 문제’의 한 단면이다.
비유로 풀어 보면
인생을 당구대 위의 공이라고 해 보자. 공이 하나뿐이라면 어디로 굴러갈지 쉽게 안다. 그러나 공이 셋, 넷으로 늘고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면, 처음의 미세한 각도 차이가 몇 번의 충돌을 거쳐 전혀 다른 결과로 번진다. 우리 삶에는 가족, 일, 사회, 우연한 사건이라는 ‘다른 공’들이 늘 함께 굴러다닌다. 그래서 아무리 잘 짜둔 계획도 어느 시점에 예기치 못한 변수로 휘어 버린다.
여기서 끌어낼 결론은 ‘그러니 계획이 무의미하다’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삶이 언제든 뒤틀릴 수 있다면, 나다운 삶이란 한 번 정해 놓은 길을 고집하는 일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수를 살피며 다시 방향을 잡아 나가는 일이다. 흔들림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새로 고민할 줄 아는 태도가 나다움의 핵심에 가깝다.
04평범함이라는, 가장 어려운 나다움
오늘날 나다움은 어쩐 일인지 사업가나 창작자의 이미지와 자주 포개진다. 자기만의 브랜드를 세우고, 남들과 다른 길을 개척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삶이야말로 나다운 삶이라는 인상이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진로를 택하려는 사람은 ‘내가 나답게 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정말 많은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사는 일이 가장 나다운 삶이다. ‘평범하게 살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안정된 직장을 원하는 마음도, 무던한 일상을 지키려는 마음도 그 자체로 충분히 나다운 욕망이다. 나다움을 사업이나 창작 쪽으로만 자꾸 몰아가면, 정작 평범함을 향해 가는 사람만 이유 없이 자기를 의심하게 된다. 평범함은 나다움의 반대말이 아니다.
05좋은 직업을 좇는 일은 죄가 아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높은 연봉이나 좋은 직업을 추구하는 일은 전혀 나쁘지 않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런 삶은 꽤 괜찮은 삶을 높은 확률로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좇는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것‘만’을 좇을 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생긴다. 좋은 직업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태도와, 그것을 여러 고려 사항 가운데 하나로 충분히 존중하면서 동시에 옛것에서 배워 새것으로 나아가는 태도—옛 표현으로 온고지신—는 전혀 다르다. 같은 직장을 다녀도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다. 전통적으로 좋다고 여겨져 온 것들을 무작정 거부하지 않되, 그것에 통째로 삼켜지지도 않는 균형. 이 둘을 구별하는 일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06‘나’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젊다
흥미롭게도,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나’와 ‘자아’라는 개념은 철학사에서 그리 오래된 주제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타고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던 소수의 일이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진짜 나란 무엇인가’보다 ‘이 세계를 어떻게 가장 확실하게 설명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나를 가장 또렷하게 무대 중앙에 세운 인물은 17세기의 데카르트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명제가 그 장면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환상일 수 있다고까지 의심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곧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큼은 거짓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생각하는 나’를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모든 탐구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 전체가 ‘이성을 가진 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시선이 바뀐다. 가만히 보니 나라는 존재는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 삶에서 훨씬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야말로 나를 이루는 더 큰 부분일 수 있다는 관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논의는 또 한 걸음 나아가 ‘포스트휴먼’으로 향한다. 기계가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채우면서, 나의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물음이 새삼 무거워졌다.
비유로 풀어 보면
스마트폰을 떠올려 보자. 내 기억의 상당 부분이 그 안에 저장되어 있고, 하루 일과의 많은 몫이 그 화면 안에서 처리된다.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못해도 불편하지 않은 것은, 기억의 일부를 기계에 떼어 맡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나의 일부인가, 아닌가. 마음이 두개골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도구로까지 뻗어 나간다는 이 직관은, 오늘날 철학이 진지하게 다루는 물음 가운데 하나다.
07자아조차 하나의 허구일지 모른다
한 가지 가설을 더 따라가 보자. 과거의 사회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믿는 이야기—신화, 종교, 화폐, 국가 같은 것들—덕분에 큰 규모로 뭉칠 수 있었다. 인류가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게 된 비결이 이 공유된 ‘허구’에 있다는 관점은 오늘날 널리 논의된다. 흥미로운 변화는 그다음에 일어난다. 정보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들이 실은 만들어진 약속에 가깝다는 사실을 점점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만큼 ‘다 함께 하나로 뭉치기’보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 갔다.
이렇게 개인을 중심에 두는 사고가 강력하게 대두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 철학을 놓고 보면 중세 이후로도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데 매달렸지, 개인의 고유함을 떠받드는 일에는 큰 힘을 쏟지 않았다. 그 흐름을 강하게 비튼 인물로 흔히 19세기의 니체가 꼽힌다. 그는 종교와 도덕 같은 거대한 규율 체계가 오랫동안 인류를 길들여 왔다고 보았다. 절대적인 법칙이 있으니 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강하고 개성 있는 목소리를 억눌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실 그 체계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외쳤다. (개인의 고유함을 향한 씨앗은 그보다 앞선 사상가들에게서도 보이지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밀어붙인 분기점으로 니체가 자주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찔한 생각에 닿는다. 그렇게 떠받들어진 ‘개인성’조차도, 넓게 보면 일종의 허구일 수 있다. 우리가 지금처럼 자신을 ‘욕망을 추구하고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느끼는 것은 영원한 진리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느끼도록 학습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충분히 먼 미래, 기술과 사회가 크게 달라진 어느 시점에는 ‘나’라는 단위로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과학소설은 이런 미래를 그린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거대한 프로그램에 동시에 접속해, 한 인물의 느낌과 고통을 다 함께 공유한다. 지금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고, 내 꿈을 좇고, 내가 편안하면 좋다는 사적인 감각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소설 속에서는 느낌마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시에 흐르는 공통의 사건이 된다. 만약 그런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하나의 나’라는 단위는 점차 무의미해질 것이다.
08그래도, 우리에겐 세계를 해석할 자유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는 결국 기술에 끌려갈 뿐’이라는 체념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성급하다. 우리는 단순히 흐름에 떠밀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기 결정권을 늘 쥐고 있다. 무엇을 소중히 여길지,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고르는 일은 여전히 우리 몫이다.
방향은 거꾸로도 작동한다. 개인의 고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가 사람들 사이에 굳건히 자리 잡고 모두가 그것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기술 발전도 그 가치를 강화하는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어긋나는 기술은 부적합한 것으로 견제될 것이다. 결국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라는 작업은 지금까지도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하다. 미래가 우리를 만드는 만큼, 우리의 해석도 미래를 만든다.
나는 끝내 발견되는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불확실성 속에 열려 있는 존재다.
09맺으며 — 진짜 나를 찾지 마라
그러니 진짜 나를 찾으려 애쓰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그것을 끝내 찾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진짜 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자꾸 심어 주는 장치들이 사회 곳곳에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꼽는 시각도 있다. 각 개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더 나아가야만 자본이 돌고 발전이 일어나는 구조이니, 사회가 우리를 그런 방향으로 부추기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진짜 나를 찾으라’는 권유가 늘 순수한 호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새겨 둘 만하다.
최종적으로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완성된 나’ 같은 것은 어느 순간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마음을 두는 편이 낫다. 나는 영원한 불확실성 속에 열려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여유를 두고 탐구를 이어 가는 편이, 어딘가 묻혀 있을 정답을 캐내려 조바심 내는 것보다 훨씬 가뿐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 막막함을 혼자만 끙끙 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위로가 된다. 누구나 같은 불확실성 위에 서 있다.
이런 물음 앞에서 철학은 꽤 쓸모가 있다. 철학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생각이 아니라, 한 번쯤 진짜로 비판적으로 따져 봐야 비로소 보이는 무언가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의미 있는 이론으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답을 단번에 쥐여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생각의 방향을 한 번 틀어 보게 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다.
이 글은 ‘나다움’과 자아를 둘러싼 철학적 논의를 정리한 것으로, 특정 학설을 단정하기보다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카오스 이론과 삼체 문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 자아 개념의 역사적 변천 등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했으며, 자본주의와 개인성에 관한 진단은 하나의 비판적 관점으로 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