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로 읽는 한 정복자의 생애
"그는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를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이 되어 10여 년 동안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북인도를 정복해 거대한 제국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수많은 학살과 파괴가 있었다. 중세 시인 단테는 그를 신곡의 '폭력의 지옥'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는 파괴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복지마다 융합 정책을 펴 거대한 세계를 그리스 문화라는 하나의 코드로 연결했고, 그의 사후 헬레니즘 문명이 태어났다. 이 또한 그가 '대왕'으로 불린 이유 중 하나다.
다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수성가형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이룬 많은 것은 아버지가 쌓아 올린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를 강국으로 만들어 그리스 전체를 제패하지 않았다면, 또 페르시아를 향한 동방 원정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한참 늦어졌거나 아예 없던 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를 제대로 알려면 그의 아버지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 마케도니아는 스스로를 제우스의 자손 마케돈의 후예라 여긴 사람들의 나라로, 그리스 동북부에 있었다. 이곳은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었다. 고지대는 척박한 산악지대였지만 양질의 목재가 자라 경제적 이점이 있었고, 저지대는 비옥한 땅과 지중해성 기후로 곡창지대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작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계절에 따라 고지대와 저지대를 오가며 살았다.
기원전 7세기 중엽, 피에리아 지역의 한 부족이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아르게아스 왕조를 세우고 아이가이를 수도로 삼았다. 이 왕조는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지닌 자신들만이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아테네에서는 솔론이 사회를 개혁해 민주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시민 중심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보기에, 마케도니아는 오래전에 졸업한 후진적 군주정을 벗어나지 못한 나라였다.
그리스 중심부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바르바로이(barbaroi)'라 불렀다. 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자', 즉 외국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다. 마치 어떤 언어를 모를 때 그 말이 "바-바-바" 하는 의미 없는 소리로 들리는 데서 나온 표현이라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의 '야만인(barbarian)'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마케도니아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멸칭이었다. 그들의 주요 뿌리는 인도유럽어족 계열인 도리아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인, 즉 '헬레네스'에 포함시키려 부단히 애썼다. 페르시아 전쟁 때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1세는 페르시아의 속국 처지였음에도 은밀히 그리스인을 도왔고, 이후 '그리스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아르고스 혈통이 인정되어 그리스인만 참가하는 올림픽 출전권까지 받았다.
그 뒤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에 빠져들었다. 격전지 중 하나가 마케도니아 인근 칼키디케 반도였다. 양질의 목재와 광석이 풍부한 곳이라 두 강국의 쟁탈전이 치열했다. 이때 마케도니아 왕들은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양쪽을 오가며 실리를 챙겼다. 협조한 쪽에는 빚을 안기고, 식민지를 빼앗긴 쪽은 마케도니아 목재에 의존하게 만들어 협상력을 키웠다.
특히 아르켈라오스 1세는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 참패해 함선을 대부분 잃었을 때 매우 저렴하게 목재를 공급해 아테네의 은인이 되었다. 그는 수도를 아이가이에서 펠라로 옮기고 그리스의 비극 작가, 음악가, 화가를 초청해 예술을 꽃피웠다. 마케도니아가 더 이상 '바르바로이'가 아니라는 듯이. 그러나 그 위세도 잠시, 아르켈라오스 1세가 사냥 도중 암살당하면서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 7년도 안 되어 다섯 명의 왕이 바뀌었고, 아민타스 3세가 나라를 수습한 뒤에야 혼란이 끝났다. 이 아민타스 3세의 막내아들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였다.
필리포스의 운명을 바꾼 것은 역설적으로 인질 생활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패권은 스파르타가 차지했지만, 스파르타는 그 힘을 무분별하게 휘둘렀다. 패전국에 친스파르타 과두정을 세우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를 보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불만을 품은 건 그리스만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또한 스파르타에 적대감을 키우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 스파르타는 승리하면 이오니아 지역을 넘겨주겠다는 조건으로 페르시아의 전쟁 자금을 받았으나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어겼다. 결국 이오니아를 두고 페르시아와 스파르타가 충돌했고, 페르시아는 코린토스·테베·아테네에 전쟁 비용을 대주며 스파르타를 뒤에서 쳤다. 이렇게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년~)이 벌어졌고, 8년이나 이어졌다. 전쟁의 실질적 승자는 뒤에서 돈 장난을 친 페르시아였다.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챙겼다.
한편 스파르타에 눌려 있던 테베에서 두 인물이 떠올랐다.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다. 이들은 스파르타가 강제 해산시킨 보이오티아 동맹을 복원하고 민주정을 되살렸다. 그리고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그리스 중장보병은 오른손에 창, 왼손에 방패를 들고 여러 줄로 늘어서 사각형 대형(팔랑크스)을 이루었다. 방패로 자신의 왼쪽 절반과 옆 사람의 오른쪽 절반을 가리다 보니, 맨 오른쪽 끝 병사의 오른쪽은 아무도 막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노련한 병사들이 우익에 배치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테베의 에파미논다스는 통념을 뒤집었다. 보통 정예를 두는 우익 대신, 좌익을 50열로 두텁게 쌓아 적의 최정예 우익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한 것이다. 대신 병력이 모자란 중앙과 우익은 얇게 배치하고 충돌을 일부러 늦췄다.
전투에서 테베군 좌익의 정예와 '신성부대'(동성 연인 150쌍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스파르타 우익을 들이받아 무너뜨렸고,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가 전사했다. 지휘관이 쓰러지자 스파르타군 전체가 무너졌다. 에파미논다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스파르타 본토로 진격해, 200여 년간 스파르타 경제를 떠받치던 메세니아의 노예(헤일로타이)들을 해방시켰다. 정예 병사와 경제력을 동시에 잃은 스파르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리스 패권은 테베로 넘어갔다.
바로 이 무렵, 테베는 마케도니아를 압박하며 보증으로 왕족 한 명을 인질로 데려갔다. 그가 15세의 필리포스였다. 약 3년간 테베에서 지낸 필리포스는 부유한 귀족의 집에 머물며 펠로피다스에게 정치를, 에파미논다스에게 군대의 편성과 전술, 지휘 체계를 가까이서 배웠다. 그는 외부인의 눈으로 그리스 정세를 살폈고, 오랜 전쟁으로 지친 그리스 폴리스들이 예전의 활기를 되찾기 어려우리라 보았다. 아마도 그는 이것을 마케도니아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기원전 359년, 형들이 잇따라 죽고 어린 조카의 섭정을 맡았던 필리포스는 결국 왕위를 차지해 23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나라의 처지는 좋지 않았다. 서쪽의 일리리아, 북쪽의 트라키아, 동쪽 칼키디케 반도의 도시국가들, 남쪽의 테살리아와 테베가 불안정한 마케도니아를 노리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즉위 후 가장 먼저 군대를 개혁했다. 첫 번째는 팔랑크스를 마케도니아 버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본래 팔랑크스를 이루는 중장보병은 갑옷·방패·창을 직접 살 재력이 있는 중산층의 몫이었으나, 마케도니아에는 그런 중산층이 부족했다. 그래서 필리포스가 고안한 것이 '사리사(sarissa)'라는 새 무기였다.
사리사는 길이 4~6미터에 이르는 긴 창이다. 기존 중장보병의 창(약 2미터)보다 두 배 넘게 길었다. 너무 무거워 한 손으로 다룰 수 없어, 겨드랑이에 끼고 양손으로 잡아 정면으로 내뻗었다. 방패는 직경 60센티미터의 작은 것을 왼팔과 어깨에 끈으로 고정했다. 비싼 갑옷 없이도, 긴 창을 빽빽이 세우면 적이 접근하기 전에 멀리서 찔러낼 수 있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막는 무기였던 셈이다.
다만 좁은 간격으로 빽빽이 서면 기동력과 측면 방어가 약해진다는 약점이 있었다. 필리포스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병을 늘렸다. 이 기병은 아군의 측면을 지키거나, 팔랑크스가 적과 맞붙는 동안 적의 측면과 후방을 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망치와 모루' 전술이다.
여기에 필리포스는 '히파스피스타이'라는 방패 부대를 창설했다. 험한 지형을 뚫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공대로, 중장보병보다 가볍고 경장보병보다 무거운 장비를 썼다. 은으로 도금한 방패를 써 '은방패 부대'로도 불렸다. 또 필리포스는 늘어난 재정으로 그리스 최초의 직업 군인 제도를 마련했다. 농부들 가운데 적합한 사람을 뽑아 급여를 주고, 평소에는 전술·무기·행군 훈련을 시켰다. 농사를 짓다 전쟁 때만 나서는 다른 그리스 군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조 인력을 줄이고 전투병이 직접 군장을 매고 이동하게 해 기동력도 높였다. 사리사는 컸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지 않아 빠른 행군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필리포스는 정예 기병 '헤타이로이(hetairoi)'를 늘렸다. '왕의 친구' 또는 '동지'라는 뜻의 이 귀족 기병은 왕 곁에서 함께 싸우며 중요한 명령을 수행했다. 이렇게 팔랑크스·기병·방패 부대·투석병·궁병·공성 전문 부대까지 갖춘 마케도니아 군대는 기존 그리스 군대보다 훨씬 복잡하고 유기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는 그리스 최강의 군대로 거듭났다.
군대를 정비한 필리포스는 주변 위협을 하나씩 제거했다. 뇌물과 무력을 적절히 섞어 일리리아를 격파했고, 기원전 357~356년에는 아테네에 저항하던 암피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는 그리스 북부의 패권을 잡았다는 의미였고, 무엇보다 인근 판가이온산의 거대한 금광을 확보했다는 뜻이었다. 풍부해진 재정으로 그는 그리스 귀족들에게 뇌물을 뿌려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기원전 356년, 포티다이아를 함락한 필리포스는 같은 날 세 가지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신뢰하는 장군 파르메니온이 일리리아인을 격파했다는 소식, 자신의 경주마가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소식, 그리고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의 왕족으로, 디오니소스 신비주의 의식에 빠져 뱀을 능숙하게 다뤘다고 전한다. 전승에 따르면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가 침대에 뱀을 두는 것을 보고는 이후 잠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메토네 공성 중 오른쪽 눈을 잃으면서도 그리스 북부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한편 그리스 중부에서는 델포이 신전을 둘러싼 '신성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키스가 델포이를 점령해 그리스 공동 자금을 착복하고 용병을 고용해 테베와 싸웠고, 여기에 여러 도시국가가 얽혀들었다. 테살리아의 라리사가 포키스에 맞서 혼인 동맹을 맺은 필리포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필리포스도 자연스럽게 신성 전쟁에 끼어들었다.
처음에 필리포스는 포키스의 투석기에 두 번이나 패해 물러났다. 이듬해 다시 내려온 그는 묘수를 썼다. 병사들에게 아폴론의 상징인 월계관을 씌워 내보낸 것이다. 델포이를 더럽힌 자들을 신의 이름으로 응징한다는 명분이었다. 성전(聖戰)의 주체가 된 듯한 느낌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사기는 치솟았고, 반대로 월계관을 쓴 적을 마주한 포키스군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듯한 두려움에 사기가 꺾였다. 필리포스는 승리해 테살리아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기원전 343년, 필리포스는 1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맡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펠라 인근 미에자에 학교를 세워 그를 가르쳤다.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또래와 어울려 철학과 정치를 배우고 호메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문학을 익혔으며 자연학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동방 원정에 학자들을 대동하고 희귀 동물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그 근거다.
이 무렵의 유명한 일화가 명마 부케팔로스를 길들인 이야기다. 누구도 올라타지 못하는 사나운 말을 두고 필리포스가 도로 돌려보내라 하자, 어린 알렉산드로스가 나섰다. 그는 고삐를 잡아 말의 머리를 태양 쪽으로 돌렸다. 말이 자기 그림자에 놀란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얌전해진 부케팔로스에 올라탄 아들을 보고,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가 이 아이에게는 너무 좁은 무대가 되겠다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부케팔로스는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말이 되어 전쟁터를 함께 누볐다.
필리포스는 트라키아 원정을 이어가다 헬레스폰토스 해협 인근 상업 도시 비잔티온과 페린토스를 공격했지만,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지원에 막혀 점령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의 곡물 수송선을 포획하면서 두 나라의 평화는 깨졌다. 한편 필리포스가 원정을 간 사이 16세의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았는데, 그는 페르시아 사절을 정중히 대접하면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인근 부족의 반란을 직접 진압해 점령한 도시를 '알렉산드리아'라 명명했다. 아들의 솜씨에 만족한 필리포스는 이때부터 원정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가 그리스 중부로 진군하자 위기를 느낀 두 강국 테베와 아테네가 손을 잡았다. 오랜 숙적이었던 두 나라가 동맹을 맺은 것은, 이대로 두면 그리스 전체가 자신들이 무시하던 '바르바로이'에게 먹히리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세력은 카이로네이아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의 자세한 전말은 기록이 부족해 단편적으로만 전한다. 동원된 병력은 양측 모두 3만~3만 5천 명 정도로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케도니아 진영에서는 우익을 필리포스가, 좌익을 18세의 알렉산드로스가 맡아 테베의 신성부대와 마주 보았다.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고 마케도니아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교착을 끝낸 것은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신성부대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한편 필리포스는 노련한 술책을 썼다. 전면전 중에 병사들을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뒤로 물린 것이다. 용병에만 의존해온 경험 부족의 아테네군은 자신들이 유리한 지형에서 벗어나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따라왔고, 마침내 마케도니아군이 고지대를 차지하고 아테네군의 전열이 흐트러진 순간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날 그리스 카이로네이아에는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사자상이 있다. 그 아래에서 255구의 시신이 발견되어, 학자들은 300명의 신성부대가 이곳에서 전멸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사자상이 세워진 것으로 본다. 동성 연인들로 이루어진 이 결사대는 이 전투 이후 더 이상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승리 후 필리포스의 처사는 뜻밖이었다. 점령군이 되기보다 '그리스에 영구적 평화를 선사한 지도자'로 남고 싶었던 그는, 아테네에 아무 대가 없이 전사자와 포로를 송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문화의 도시 아테네를 파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코린토스에서 범그리스 대표자 회의를 열어,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국가가 모인 새 동맹을 결성하고 만장일치로 맹주에 추대되었다.
맹주가 된 필리포스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범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해 페르시아로 원정을 가겠다는 것이다. 명분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해 신전들을 파괴한 데 대한 복수였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더 깊은 구상이 있었다. 아테네의 노년 연설가 이소크라테스가 보낸 서신이 그것이다.
그리스의 고질병은 빈곤과 빈부격차였다. 산지가 많아 농토가 부족한 그리스는 늘 식민지를 만들어 인구를 내보냈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난한 농민은 흉년에 부자에게 빚을 졌고, 갚지 못하면 땅을 잃고 노예나 빈민으로 전락했다. 격차가 벌어지면 공동체 화합이 무너지고,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선동가들이 나타나 갈등을 증폭시켰다. 심하면 정적을 제거하려 외국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그리스가 영구적 전쟁 상태에 놓인 이유였다.
이소크라테스의 해법은 '공동의 외부 적'을 만드는 것이었다. 외부의 적이 있어야 내부 갈등을 멈추고 도시국가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논리다. 그 적으로는 페르시아가 안성맞춤이었다. 풍요로운 소아시아를 점령해 가난한 계급을 이주시키면 빈곤 문제도 풀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필리포스는 이 구상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듯하다. 페르시아 원정은 무력으로 그리스를 지배하는 것보다 나은 길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기원전 337년, 그는 가장 아끼는 장군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전위 부대를 소아시아로 먼저 보냈다. 본대를 이끌고 합류할 계획이었다.
원정을 결정한 해, 45세의 필리포스는 클레오파트라라는 10대 귀족 여성과 결혼했다. 정치적 이득이 아닌 사랑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결혼 축하 연회에서 사달이 났다. 신부의 숙부 아탈로스가 두 사람 사이에 '적법한 상속자'가 나오게 해달라는 건배사를 던진 것이다. 올림피아스 같은 외국인의 피가 아닌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의 후계자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분노한 알렉산드로스가 잔을 던지며 싸움을 걸었고, 만취한 필리포스는 아들을 말리려다 고꾸라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진 아버지를 가리키며, 아시아로 건너가겠다는 사람이 의자 하나도 건너지 못한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데리고 에페이로스로 떠나버렸다.
화해 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는 딸 클레오파트라(알렉산드로스의 누이)를 에페이로스 왕과 혼인시키는 결혼식을 아이가이의 극장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그런데 이 결혼식에서 필리포스가 암살당했다. 범인은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청년 파우사니아스였다. 파우사니아스는 아탈로스에게 능욕당했지만 필리포스가 처벌하지 않자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그는 극장 무대로 나아가던 필리포스의 갈비뼈 사이를 찔러 죽이고 달아나다 붙잡혀 살해되었다.
고대 문헌은 암살의 직간접 배후로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를 지목하기도 한다. 특히 야망 있는 올림피아스에게 화살이 집중된다. 다만 직접적 증거는 없어 진실은 알 수 없다. 한편 1977년 마케도니아 베르기나(고대 아이가이)에서 발굴된 왕실 무덤군은 오랫동안 필리포스 2세의 유해 후보지로 주목받아 왔다. 다리 부상이나 눈 부상 같은 신체 흔적이 그가 전장에서 입은 상처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어느 무덤이 정확히 필리포스의 것인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은 학계의 미해결 논쟁이다. 전통적으로는 2호 무덤이 지목되었으나, 1호 무덤을 후보로 보는 연구와 이에 반박하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연구가 2020년대에도 엇갈려 발표되고 있다.
필리포스가 죽은 몇 시간 뒤, 행정을 담당하던 노련한 안티파트로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정식 왕으로 선포했다. 20세에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신중했던 아버지와 달리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즉위하자마자 페르시아에 파견되어 있던 아탈로스를 비롯한 경쟁자들과 사촌형 아민타스 4세를 신속히 숙청해 통치권을 확보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이고 싶었을 것이다. — 코린토스에서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만난 뒤, 알렉산드로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일화)
코린토스에서 그는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직접 찾아갔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왕에게, 일광욕 중이던 디오게네스가 햇빛을 가리지 말고 조금만 비켜달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동행들이 그를 비웃었으나 알렉산드로스만은 진지한 표정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것에 이끌렸던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남부 그리스가 순순히 복종한 것과 달리, 북쪽 민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는 본격적인 북벌에 나섰다. 이때부터 우리는 아리아노스의 기록을 통해 그가 어떻게 군사 작전을 펼쳤는지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트라키아의 한 고개에서 적은 수레를 굴려 마케도니아 대형을 무너뜨리려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는 간명했다. 수레가 굴러오면 가운데를 열어 그대로 흘려보내고, 공간이 없으면 최대한 밀집해 몸을 웅크린 뒤 방패를 겹쳐 그 위로 수레가 지나가게 하라는 것이었다. 훈련된 병사들은 이를 무리 없이 수행해 사상자 없이 언덕을 점령했다. 이어 그는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강 건너 게타이족을 야습으로 격파하자, 강 가운데 섬으로 피신했던 트리발리족 왕도 항복했다.
서쪽 일리리아 원정에서는 펠리움 요새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고지와 성벽 양쪽에서 협공당할 수 있는 데다 식량도 부족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색다른 퍼포먼스로 활로를 열었다. 밀집 보병을 정렬해 사리사를 일제히 들었다 내리치고, 행군 중 순식간에 방향과 대형을 바꾸는 절도 있는 훈련 시범을 보인 것이다.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업 군인들의 모습에 일리리아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 틈을 타 마케도니아군은 적진에 접근해 기습으로 적을 흩어버렸다. 이후 야간 기습으로 일리리아군에 결정타를 입혔다.
알렉산드로스가 북부를 평정하는 동안, 남부 그리스에서 그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이를 믿은 테베가 마케도니아 주둔군을 공격하며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일리리아 공성을 마친 알렉산드로스는 13일 만에 남하해 테베에 도착했다. 협상을 시도했으나 테베가 응하지 않았고, 부하 장교의 독단적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마케도니아군이 승기를 잡았고, 도시는 순식간에 학살 현장이 되었다. 약 6천 명의 테베인이 죽었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동맹국들에게 테베의 운명을 맡겼다. 그들은 테베가 과거 그리스를 배신했던 역사를 상기하며 도시를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대부분의 테베 시민이 노예로 팔려가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알렉산드로스는 시인 핀다로스의 집만은 보존하고 그 후손은 살려주었다고 한다. 테베의 함락 소식에 아테네가 다시 전쟁을 준비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반마케도니아 지도자 한 명만 넘기라 요구했고 그마저도 간청에 마음이 약해져 거두었다.
한 도시를 통째로 지울 만큼 잔인하고, 오래된 적 아테네를 용서할 만큼 관대한 — 그리스는 그에게 두려움과 경외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못다 한 페르시아 원정을 완성할 차례였다. 그의 군대는 필리포스가 정립한 편제를 따랐으되 규모가 더 크고 기병 비율이 높았다. 원정 당시 병력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 기병 6천여 명을 포함해 약 4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부사령관은 아버지의 심복이자 60대 노장 파르메니온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군대를 운용할 자금은 겨우 30일치였다. 원정이 실패하면 마케도니아는 파산할 처지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떠나기 전 축제를 성대히 열어 병사들을 먹이고 지휘관들에게 땅과 이권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다 나눠주면 정작 무엇을 가지려 하느냐는 부하의 물음에, 그가 남긴 답은 한 마디였다고 전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희망'이라고.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기고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했다. 아시아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땅에 창을 내리꽂으며, 그 땅을 창으로 차지한 자신의 것이라 선언했다고 한다. 그는 트로이 유적을 찾아, 평생의 롤모델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에 꽃을 놓고, 아킬레우스의 것이라 전해지는 갑옷과 자신의 갑옷을 바꾸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다리우스 3세는 다르다넬스 주변의 지방 총독('사트라프')들에게 방어를 맡겼다. 그리스 용병대장 멤논은 청야 전술을 제안했다. 곡물을 태우고 주민을 대피시켜 도시를 비워버리면, 보급이 끊긴 마케도니아군이 한 달도 못 버티고 물러나리라는 계산이었다. 30일치 보급만 가져온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치명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사트라프들은 자기 땅을 불태우길 거부하고 정면 대결을 택했다. 그들은 그라니코스 강에서 기다렸다.
강 건너편, 페르시아군은 기병을 최전선에, 그리스 용병 보병을 후방 고지에 배치했다. 유연하게 운용해야 할 기병을 앞에 둔 이례적 배치였다. 파르메니온은 새벽에 강을 건너자고 신중론을 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거부했다. 다르다넬스까지 건너온 자신이 이까짓 개울 앞에서 멈추는 것은 마케도니아 왕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즉각 공격을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하얗고 큰 깃털 투구에 화려한 망토를 휘날리며 우익에서 직접 돌격했다. 멀리서도 자신이 왕임을 알아보게 하는 차림이었다. 격전 중 그의 창이 부러지고, 다리우스의 사위 미트리다테스를 찌른 직후 페르시아 귀족이 휘두른 언월도에 투구를 맞았다. 또 다른 적이 측면에서 달려들어 그를 내리치려는 순간, 부하 클레이토스가 적의 팔을 잘라내 왕의 목숨을 구했다. 좌익 지휘관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페르시아군의 사기가 무너졌고, 마케도니아 기병과 보병이 강둑에 올라서면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달아났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후방에 남아 있던 그리스 용병들을 포위했다. '동포에게 창을 겨눈 죄'를 물어 포로 2천 명을 마케도니아로 보내 광산에서 노역시켰다. 그러면서도 부상병을 일일이 찾아 살피고 전사자를 매장했으며, 페르시아 귀족과 그리스 용병의 시신도 정중히 처리했다.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건 미친 도박이었고, 그 도박은 승리로 돌아왔다. 부하들은 전쟁 한복판을 누비는 왕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승리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행정 체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핵심 관직에 측근을 앉히는 전략을 폈다. 사르디스는 저항 없이 항복했고, 그리스 동포가 많은 이오니아의 에페소스에서는 주민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는 페르시아가 후원하던 과두정을 폐지하고 주민이 원하는 민주정을 승인했으며, 페르시아에 바치던 세금도 면제했다. 다만 보복 폭력은 강하게 금지해 질서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지지하는 정부라면 형태와 상관없이 용인하고 세금까지 면제하니, 점령지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밀레토스가 항복을 번복하자 신속히 포위해 함락했고, 지원하러 온 페르시아 함대는 항구 봉쇄에 막혀 물러났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중요한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함대 수와 유지 비용에서 열세인 해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페르시아 해군이 기항할 항구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해 해상 패권을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함대를 해산하고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다음 목표는 요새 도시 할리카르나소스였다. 그라니코스에서 도망친 멤논이 최고 지휘권을 받아 방어를 지휘했다.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멤논은 성을 버리고 철수하며 무기고에 불을 질렀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를 점령한 뒤 쫓겨났던 왕족 아다 여왕에게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또 갓 결혼한 병사들에게 겨울 휴가를 주어 부인과 시간을 보내게 하고, 복귀할 때 병력을 모집해 오게 했다. 이 결정으로 그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겨울에도 멈추지 않은 그는 군을 둘로 나눠 아나톨리아 내륙을 장악하며 프리기아의 고르디온에 도착했다. 이곳 제우스 신전에는, 이 수레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주인이 되리라는 전설이 깃든 매듭이 있었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한 매듭이었다.
전승은 두 가지로 갈린다. 매듭을 고정하던 나무 못을 뽑아 풀었다는 이야기와, 검을 뽑아 단숨에 잘라버렸다는 이야기다. 후자가 더 극적이다. 풀 수 없는 문제를 정공법이 아닌 발상의 전환으로 끊어버리는 행위 — 오디세우스의 꾀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결단으로 운명을 잘라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른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편 페르시아의 멤논이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 동맹을 위협하며 전장을 유럽으로 옮기려 했으나, 기원전 333년 여름 그가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페르시아의 서방 전략은 무너졌다. 결국 다리우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바빌론을 거점으로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했다. 한편 킬리키아에서 열병에 걸려 쓰러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밀고가 있었음에도 주치의 필리포스가 준비한 약을 단숨에 들이켜며 그 편지를 의사에게 내밀었다. 신뢰의 증명이었고, 그는 회복했다.
기원전 333년 11월, 다리우스는 막대한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 북부에 진을 쳤다. 알렉산드로스가 좁은 관문을 선점하려 남하하는 사이, 다리우스는 산맥을 우회해 북쪽으로 기습 이동, 알렉산드로스의 후방 이소스를 점령했다. 보급로가 끊기고 후방을 빼앗긴 충격적 상황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북진을 결단했다.
이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좁은 피나로스 강변 지형에서는 페르시아의 수적 우세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용병으로 중앙을 고정하고 좌우 측면에서 기병으로 포위하려는 고전적 전술을 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페르시아 좌익을 격파한 뒤, 사선으로 방향을 꺾어 다리우스의 본진을 향해 돌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다리우스는 전차를 돌려 달아났다. 지휘관의 도주는 곧 페르시아군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앞으로 편지를 보낼 때는 나를 대등한 상대가 아니라 아시아의 왕으로 적어라. 빼앗긴 것을 되찾고 싶다면 도망치지 말고 맞서라. — 영토와 가족 몸값을 제안한 다리우스에게 보낸 답신의 요지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진영에 남겨진 다리우스의 어머니·아내·자녀들을 발견하고, 다리우스가 살아 도망쳤으며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전했다. 직접 그들을 찾았을 때, 다리우스의 가족은 알렉산드로스보다 키가 큰 절친 헤파이스티온을 왕으로 착각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 역시 또 하나의 알렉산드로스이니 걱정 말라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헤파이스티온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벗이었다. 패주한 다리우스가 가족의 몸값과 영토를 제안하며 동맹을 청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위와 같은 취지로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칼끝은 이제 제국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이소스 승리 후 알렉산드로스는 곧장 제국 심장부로 향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해군이 여전히 건재해 그리스 본토와의 통신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로 가는 길의 페니키아 해안을 점령해 해상 패권을 무력화하기로 했다. 비블로스와 시돈은 순순히 항복했지만, 강력한 해군을 자랑하던 티레는 달랐다.
티레는 육지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바다 위의 섬 요새였다. 사방이 바다이고 성벽이 곧장 바다에 닿아 있었다. 240여 년 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13년을 포위하고도 함락하지 못한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신전 제사를 요청하자 티레는 중립을 표방하며 거절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특사를 성벽 위에서 처형해 바다로 던졌다.
바다 위 요새는 해상 공격이 어려웠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발상을 180도 뒤집었다.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해안의 정착지를 허물어 그 돌을 바다에 쏟아 제방(둑길)을 쌓기 시작했다. 티레인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조차 하지 못할 일을 벌인다며 비웃었지만, 제방이 점점 가까워지자 웃음이 사라졌다. 한 번 무너지면 더 넓고 단단하게 다시 쌓는 집요함 — 이것이 그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티레는 화공선으로 제방과 공성탑을 불태웠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공사를 더 넓고 단단하게 다시 시작했다. 그는 시돈·키프로스 등의 왕들에게 받은 배로 273척의 함대를 조직해 해상 봉쇄까지 더했다. 양측은 잠수부로 닻줄을 끊고 쇠사슬로 맞서는 등 창의력 싸움을 벌였다. 결국 7개월에 걸친 공방 끝에 남쪽 성벽의 취약점을 찾아내 돌파했다. 성이 함락되자 전투는 학살로 이어졌다. 약 8천 명이 죽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티레의 잔혹한 소문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대부분 저항 없이 통과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집트로 가는 길목의 가자만은 끝까지 버텼다. 가자는 수백 년간 흙이 쌓여 만들어진 인공 언덕(텔) 위의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언덕 주위를 메워 경사로를 쌓고 갱도를 파는 대규모 공성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화살에 어깨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회복 후 네 번째 돌입에서야 성을 함락했다.
가자를 넘자 이집트는 무혈로 항복했다. 페르시아 지배에 지친 이집트인들은 새 정복자를 환영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추대되었고, 지중해 연안에 새 도시 건설을 결심했다. 그리스식 설계, 그리스식 신전, 그리스식 이름의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그가 세운 수많은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지금까지 이름과 위상을 모두 유지하며 살아남은 곳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뿐이다.
그는 리비아 사막을 건너 시와 오아시스의 아문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스인들이 제우스와 동일시한 신 아문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어린 그에게 거듭 주입했다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신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다는 갈망으로 이어진 셈이다. 가장 나이 든 사제가 그를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신전 안에서 무엇을 물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남긴 말은 원하던 답을 들었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이소스 패배 1년여 후,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다시 병력을 모았다. 현대 연구자들은 그 규모를 대체로 5만~십수만 명 사이로 추정한다(고대 사료의 수십만~백만은 과장으로 본다). 이전 전투에서 잘 훈련된 보병을 많이 잃은 탓에 급조된 병력이 다수였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리우스는 정예 기병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 전차 약 200대와 인도산 전투 코끼리 약 15마리를 배치했다. 전투는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부근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벌어졌다.
다리우스는 이소스에서 좁은 지형에 갇혀 패한 교훈을 살려, 이번에는 넓고 평탄한 가우가멜라 평원을 전장으로 골랐다. 기병과 전차가 위력을 발휘하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특히 그는 바퀴축과 멍에 끝에 낫을 단 '낫 전차'에 기대를 걸고, 전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도록 미리 평원의 풀을 베고 땅을 다졌다. 전투 전날 밤 파르메니온이 야간 기습을 제안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도둑처럼 승리를 훔치지는 않겠다며 거절했다. 대낮의 정면 승부로 다리우스에게 핑계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핵심 전술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전열 전체를 비스듬히 우측으로 기울여 서서히 이동시켜 전선을 늘렸다. 이는 다리우스가 공들여 다져둔 전차 돌격로에서 벗어나는 효과도 있었다. 둘째, 양 측면을 뒤로 살짝 꺾어 배치해 적의 포위에 대비했다. 셋째, 중앙 팔랑크스를 앞뒤 이중으로 배열해 후방 돌파에도 견디게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다리우스의 낫 전차가 돌격했지만,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순간적으로 진영의 틈을 열어 전차를 그대로 통과시킨 뒤 후방의 경보병으로 전차병을 제압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의 우측 이동에 끌려나온 페르시아 좌익 기병이 격돌했고, 다리우스가 무리하게 병력을 운용하는 사이 페르시아 중앙과 좌익 사이에 틈이 생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예 기병을 쐐기 진형으로 재편해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정면 돌파했다. 다리우스는 이소스 때처럼 말을 돌려 달아났다.
다만 이날 전투는 위기도 컸다. 좌익의 파르메니온이 페르시아 기병의 맹공에 붕괴 직전까지 몰려 긴급 구원을 요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생포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좌익 지원으로 돌아섰다. 군 전체의 통제력을 잃으면 승리가 무의미해진다는 판단이었다. 사상자 수는 사료마다 편차가 크다. 고대 기록은 페르시아 전사자를 수십만으로 부풀리지만, 보수적 추정은 4만 명 안팎으로 본다. 마케도니아 측 손실은 아리아노스가 매우 적게 적었고 현대 연구자들은 대체로 사망·부상 합쳐 1천~1천5백 명 수준으로 추정한다. 어느 쪽이든 가우가멜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을 결정지은 전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으로 향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정신과 전통이 응축된 이 도시는 사절단을 보내 평화롭게 항복했다. 그는 바빌로니아인이 신성하게 여긴 지구라트의 복원을 명하고 신전 제의에 직접 참여했다. 또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우익을 지휘했던 마자에우스를 바빌론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패장에게 총독 자리를 준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 전쟁은 다리우스와 그 체제를 겨냥한 것이지 페르시아 백성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이어 행정 중심지 수사가 무혈로 항복하면서, 그는 5만 탈란트에 달하는 은과 귀중품을 손에 넣었다. 겨울이 오자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심장부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페르시아 관문에서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사트라프의 방어선에 막혀 일시 후퇴하는 위기를 겪었으나, 현지인에게서 우회로 정보를 얻어 야간에 산길로 후방을 기습해 돌파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적 수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이 도시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듯, 재물을 모두 옮기게 한 뒤 궁전을 불태웠다. 그 동기는 사료마다 다르게 그려진다.
| 전승 | 방화의 동기 |
|---|---|
| 아리아노스 | 아테네를 불태운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 파르메니온은 이미 왕의 재산이 된 궁전을 스스로 태울 이유가 없다며 만류했고, 아리아노스는 이번만큼은 파르메니온이 옳았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
| 플루타르코스 등 | 승전 연회에서 아테네 출신 여성 타이스가 술기운에 이 궁전을 태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가 아니냐고 부추기자, 충동적으로 횃불이 던져졌다는 이야기. |
복수의 상징성, 술자리의 충동, 정치적 계산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세폴리스의 파괴는 제국의 심장이 무너졌음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다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그 불길 속에서 함께 사라진 유물과 기록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에게는 복수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한 시대를 지운 일이 되어버렸다.
다리우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병력 모집에 실패해 9천 명 남짓만 데리고 도주하던 중, 박트리아 사트라프 베소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사실상 포로로 잡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빠른 병사들을 선발해 밤새 65킬로미터를 돌파하며 추격했다. 새벽에 적군의 후미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이미 늦었다. 베소스는 다리우스를 칼로 찌른 뒤 길가에 버려두고 달아난 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왕가에 돌려보내고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복수자'라 칭했다. 복수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베소스가 스스로를 '왕 중의 왕'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가 죽자, 그를 죽인 베소스를 쫓아 알렉산드로스는 더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군대 내부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이 사라져갈수록 내부의 긴장이 커진 것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한 도시에서, 필리포스 시대부터 군을 떠받쳐온 파르메니온 가문이 몰락했다. 발단은 사소했다. 한 병사의 반역 모의 정보를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가 두 차례나 묵살한 것이다. 마침내 사건이 왕에게 전해지자, 필로타스는 태만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평소 왕의 승리를 자신과 아버지의 공으로 돌리고 왕의 신격화를 비아냥거렸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필로타스는 군법 회의에서 반역을 자백한 뒤 처형되었다. 그 자백이 진심인지 고문의 결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곧이어 멀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던 아버지 파르메니온도 소명 기회조차 없이 제거되었다. 아들이 반역으로 처형된 마당에 군을 장악한 아버지를 살려두는 것은 위험이라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부자 모두의 성공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의미 없는 전쟁과 살인이 일상화되면서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알렉산드로스의 화려한 아시아식 복장과 페르시아 전통은 보수적인 옛 장군들에게 이질감 그 자체였다. 기원전 328년 마라칸다의 한 연회에서, 술에 취한 이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이 필리포스를 능가한다고 떠들자, 그라니코스에서 왕의 목숨을 구했던 노장 클레이토스가 격분했다. 그는 끝없는 원정과 아시아식 궁정 문화를 비판했고, 왕이 아버지를 잊고 스스로를 제우스의 아들이라며 높인다고 쏘아붙였다.
그라니코스에서 당신 목숨을 구한 게 누구였소. 당신이 자랑하는 그 업적도 결국 우리가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것 아니오. — 연회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변한 클레이토스 (전승에 따른 취지)
언쟁이 욕설로 번지자, 분노에 사로잡힌 알렉산드로스는 보초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를 찔러 죽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피 묻은 창을 자신에게 들이댔으나 주위가 막았다. 이후 사나흘간 그는 물도 입에 대지 않고 자책했다. 한 역사가는 이 사건을 오랜 전장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외상의 파열로 본다. 알렉산드로스는 머리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날의 폭발은 애써 붙잡고 있던 내면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여기에 그가 도입하려 한 '프로스키네시스'(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 페르시아 예법)가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그리스인들에게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오직 신에게만 하는 행위였기에, 많은 부하가 끝내 거부했고 의전은 흐지부지 폐지되었다. 왕실 시동들의 암살 시도까지 겹치며, '신이 되려는 자'에게 인간의 피곤함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베소스를 쫓아 중앙아시아에 들어선 알렉산드로스는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17일 만에 넘었다. 동상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얼어 죽은 말고기로 버틴 행군이었다. 베소스는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고, 자신이 다리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코와 귀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복수자이자 정통 계승자로 자신을 연출했다.
그러나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의 평정은 길고 잔혹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징발이 종교적 모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대규모 반란이 터졌고, 영리한 귀족 스피타메네스가 유목 전사들의 기동전으로 마케도니아군을 농락했다. 한 구원군 2천여 명이 매복에 걸려 전멸하는 충격적인 패배도 있었다. 결국 동맹 부족들이 등을 돌리면서 스피타메네스는 제거되었다. 이 무렵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록사네와 결혼했다. 첫눈에 반했다는 전승도 있지만, 불안정한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함께 작동한 결혼이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원정을 준비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인도'라 부른 곳은 지금의 파키스탄 동부와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강 유역으로, 그들에게는 세계의 끝자락에 걸친 막연한 땅이었다. 탁실라가 자발적으로 투항한 반면, 파우라바 왕국의 포로스 왕은 항복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히다스페스 강(오늘날 파키스탄의 젤룸 강) 건너편에 병력을 포진시켰다. 보병 약 2만~3만, 기병, 전차, 그리고 전투 코끼리 85~130마리였다.
강은 넓고 깊었고, 우기로 물이 불어 급류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코끼리가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말이 코끼리의 냄새만으로도 겁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기병이 강을 건너 적의 코끼리 부대 앞에 올라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하 지점을 찾는 동안, 밤마다 거짓 도하 기색과 함성으로 적을 지치게 만들어 경계를 늦추게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본진에서 약 27킬로미터 떨어진, 숲이 우거진 강굽이를 도하 지점으로 택했다. 밤을 틈타 보병 6천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은밀히 강을 건넜다. 포로스가 일부 병력을 보내 막으려 했으나 격파당했고, 결국 주력을 이끌고 정면 승부에 나섰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땅에서 인도 궁병의 화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고, 코끼리들은 조련사가 쓰러지자 제어력을 잃고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가우가멜라 때처럼 틈을 열어 코끼리를 빠져나가게 유도하기도 했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대가는 컸다. 무엇보다 그는 30년을 함께한 애마 부케팔로스를 잃었다.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본진 근처에 '부케팔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부상당한 채 끝까지 저항하다 생포된 포로스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왕에게 걸맞은 대접을 해달라고 짧게 답했다. 그 기개에 감탄한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고 더 넓은 영토까지 주었다.
히다스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더 동쪽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베아스강 앞에서 병사들이 멈춰 섰다. 끝없이 이어진 전투에 지친 그들은, 앞으로도 도시와 왕국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현지인의 말에 더 막막해졌다. 재물은 이미 넘쳤고, 영광과 명성보다 고향의 식탁과 가족이 그리웠다. 그들은 왕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파업에 들어갔다.
병사들을 대표한 코이노스는 왕에 대한 충성을 먼저 고백한 뒤, 이제는 모두가 지쳤고 고향이 그립다는 속내를 조용히 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마침 희생 제사에서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자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그 자리에 올림포스 신들에게 바치는 12개의 거대한 제단을 세우게 했다. 적어도 자신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은 남기겠다는 의지였다.
귀환길은 정복만큼이나 가혹했다. 그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일부는 안전한 내륙로로, 함대는 해로 탐사로, 자신은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하는 길로 보냈다. 물이 드문 사막에서 갈증에 지친 병사들이 샘에 도착해 물을 과하게 마시다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래 폭풍이 덮치자 군율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과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으며 앞장섰다.
나 혼자 마신다면 공평하지 않다. — 병사가 건넨 마지막 물 한 모금을 땅에 쏟으며, 알렉산드로스 (전승)
바빌론으로 돌아온 그는 수사에서 다리우스의 딸을 포함해 두 명의 아내를 맞이하고, 80명의 마케도니아 귀족을 페르시아 여성과 짝지은 대규모 단체 결혼을 감행했다.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이자, 이제 하나의 제국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강요였다. 또 오피스에서 나이 든 병사들을 큰 보상과 함께 귀향시키겠다고 발표했는데, 병사들은 이를 명예로운 퇴역이 아니라 '버려짐'으로 받아들여 분노했다. 갈등은 격해졌으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지휘권을 분배하고 아시아 병사로 새 부대를 편성하겠다고 선언하자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용서를 빌며 봉합되었다.
정복의 여정은 끝났지만, 그다음은 막막했다. 영토를 안정시키고 행정 기반을 다지는 일은 전장을 누벼온 그에게 낯설고 답답한 일이었다. 그는 어느새 다음 정복지로 아라비아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절친 헤파이스티온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년 시절부터 모든 순간을 함께한 벗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신화 속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또한 갑작스러운 열병에 휩싸였다. 상복부의 통증과 함께 몸이 빠르게 무너졌다. 그럼에도 그는 욕실에 누운 채 항해담을 듣고 원정을 논의하며 버텼지만, 며칠 뒤 말을 잃고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궁 안에서 서서히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서른셋, 재위 13년이 채 되지 않았다. 병의 원인은 말라리아·장티푸스·독살설까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죽기 직전 제국을 누구에게 넘길지 묻자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며칠 동안 말을 잃은 상태였고, 실제로는 어떤 유언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왕위는 공중에 떴고, 제국은 곧바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속주 통치권이 주요 장군들에게 분배되며 제국은 사실상 갈라졌고,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의 4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아서는 세상을 정복했지만, 죽음은 그의 세계를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훗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전기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의 절반을 손에 넣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정작 자신은 아직 이렇다 할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한니발 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먼저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바라본 대상은 달랐다. 그는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를 따라 살았고, 신화 속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경쟁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만이 겪는 병으로 쓰러졌고, 광대한 제국을 만든 뒤에도 결국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복이 남긴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다. 피와 폐허, 찬란함과 상처가 뒤섞인 채로 그는 무너진 제국의 자리에 전혀 다른 세계를 남겼다. 제국은 쪼개졌지만 시리아와 이집트, 소아시아는 천 년 가까이 그리스어 문화권에 머물렀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조각의 얼굴을 갖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는 그리스어로 '예수'가 되었고, 복음은 바로 그 언어를 타고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흩뿌린 언어와 문화는 오랜 시간을 거쳐 새로 태어나는 문명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지만 끝내 인간으로 죽었다. 그가 쫓은 것은 영광이었고, 남긴 것은 균열이었으며, 퍼뜨린 것은 하나의 문명이었다. 많은 것을 무너뜨렸고 또 많은 것을 세웠다. 정의롭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결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를 따르든 저항하든, 모두가 그의 이름을 통과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인간이 역사 전체를 비틀 수 있음을 보여준 존재였다. 돌아보면 그는 신화보다는 덜 위대했고, 인간 치고는 너무 크기도 했다.
이 글은 알렉산드로스의 생애를 통사 형태로 재구성한 정리다. 고대사 특성상 병력 규모·사상자 수·일부 일화는 사료(플루타르코스, 아리아노스, 디오도로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등)마다 차이가 크며, 본문의 수치와 연대는 현대 연구자들의 보수적 추정과 통설을 따랐다. 베르기나 왕실 무덤의 주인 식별처럼 학계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쟁점은 그 사실을 함께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