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균열
스무 살에 왕이 된 한 청년이 십여 년 만에 그리스와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서북부까지 정복해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주요 회전(會戰)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사후에는 그가 흩뿌린 그리스 언어와 문화가 헬레니즘이라는 새 문명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디딘 첫걸음은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길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서 시작해야 한다. 변방의 약소국을 그리스 최강국으로 바꾸고, 군대를 전혀 새로운 조직으로 개조하고, 페르시아 원정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필리포스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한참 늦어졌거나 아예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글에 담긴 일화와 어록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로마의 1차 사료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생애를 기록한 주요 사료로는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 전기』,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총서』, 그리고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기록 등이 있다. 다만 이 기록들은 모두 알렉산드로스 사후 수백 년 뒤에 쓰였고, 서로 어긋나거나 전설이 섞인 대목도 적지 않다. 따라서 아래에 소개하는 극적인 장면과 명구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에 다듬어진 전승으로 읽는 편이 안전하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동북부에 자리한 왕국이었다. 자신들을 제우스의 자손 마케돈의 후예라 여긴 사람들의 나라로, 영토는 양질의 목재가 나는 척박한 산악 고지대와 곡창을 이루는 비옥한 저지대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계절에 따라 두 지역을 오가며 살았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아르게아스 부족이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왕조를 세웠고,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지닌 자신들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남쪽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정이 싹트고 있었다. 이런 도시국가(폴리스)들의 눈에 군주정에 머무른 마케도니아는 후진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리스 중심부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바르바로이, 곧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야만인"이라 불렀다. 외국인을 얕잡아 부르는 멸칭이었다.
당시 그리스인에게 "바르바로이"는 단순히 외국인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표준어를 쓰지 않고 시골 사투리를 쓰는 촌사람, 도시의 세련된 정치 제도를 모르는 변방 사람이라는 무시가 담겨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지리적으로는 그리스권에 속했지만, "진짜 그리스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였던 셈이다.
마케도니아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멸칭이었다. 그들의 주요 뿌리는 그리스 본토인과 같은 인도유럽어족 계열이었고, 왕조는 자신들의 기원을 그리스 도시 아르고스에서 찾았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왕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리스인(헬레네스)에 포함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 알렉산드로스 1세가 그리스 편을 은밀히 도운 일이 대표적인데, 그 공으로 그는 "그리스의 친구"라는 칭호와 함께 그리스인만 참가할 수 있는 올림픽 출전권까지 얻었다.
마케도니아의 운명을 바꿀 인물 필리포스 2세는 이 왕국이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마케도니아는 사방의 위협에 시달리는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그리스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넘어가는 격동기였다. 테베에는 천재 전략가 에파미논다스가 있었다. 그는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술을 선보였다. 바로 사선대형(斜線隊形)이다.
당시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창과 방패를 들고 여러 줄로 늘어서 사각형 밀집대형(팔랑크스)을 이뤘다. 각자 방패로 자신의 왼쪽 절반과 옆 사람의 오른쪽 절반을 막다 보니, 대형의 맨 오른쪽 사람만은 오른쪽을 지켜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노련한 정예 병사를 우익에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에파미논다스는 이 관례를 정반대로 뒤집었다.
그는 평소 약하게 두던 좌익에 정예 부대를 50열로 두껍게 쌓고, 그만큼 중앙과 우익을 얇게 폈다. 그리고 두꺼운 좌익을 먼저 적의 정예 우익에 부딪치게 하고, 얇은 우익은 일부러 천천히 전진시켜 충돌을 지연시켰다. 전선 전체가 비스듬한 사선을 이루며 다가가는 형태였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스파르타 왕이 전사하고 정예 보병의 4분의 1이 죽었으며, 테베군의 사망자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레욱트라 이후 테베는 마케도니아 내정에 개입하면서, 그 보증으로 기원전 367년 어린 왕자 필리포스를 인질로 데려갔다. 15세 소년은 거의 3년을 테베에서 보냈다. 인질이라고는 했지만 비교적 안락한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그곳에서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라는 당대 최고의 정치가·전략가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필리포스는 정치란 무엇인가, 군대를 어떻게 편성하고 운용하는가, 새로운 전술이 어떻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가를 외부인의 눈으로 배웠다. 동시에 그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그리스 폴리스들의 쇠퇴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아마 그때부터 이것을 마케도니아의 기회로 보았을 것이다.
기원전 359년, 형들이 차례로 죽거나 전사한 끝에 필리포스는 23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위태로운 약소국이었다.
필리포스는 즉위 후 가장 먼저 군대를 개혁했다. 핵심은 그리스의 밀집대형을 마케도니아 버전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본래 팔랑크스를 이루는 중장보병은 갑옷·방패·창을 스스로 살 수 있는 중산층이 맡았는데, 마케도니아에는 그런 중산층이 부족했다. 그래서 필리포스가 고안한 것이 사리사라는 새로운 창이었다.
사리사는 길이가 4~6미터에 이르는 긴 창으로, 기존 창의 두 배가 넘었다. 너무 무거워 한 손으로는 다룰 수 없었기에 병사는 양손으로 잡고 정면을 향해 내뻗었고, 방패는 직경 6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것을 끈으로 어깨에 고정했다. 이렇게 좁은 간격으로 빽빽이 서면 갑옷이 없어도 적을 멀리서 막을 수 있었다. 여덟 줄 대형에서 앞쪽 다섯 줄은 창을 앞으로 겨누고, 뒤쪽 줄은 창을 위로 세워 날아오는 무기를 막았다.
사리사 밀집대형은 거대한 고슴도치를 떠올리면 된다. 정면에서 보면 수십 개의 창끝이 겹겹이 튀어나와 있어, 적은 창에 닿기도 전에 자기 창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막혀 버린다. 다만 이 고슴도치는 옆구리와 등이 약하다. 방향을 빠르게 틀거나 측면 공격을 받으면 무너지기 쉽다.
이 약점을 메우기 위해 필리포스는 기병을 늘렸다. 보병 밀집대형이 적을 정면에서 묶어 두는 동안, 기병이 적의 측면과 후방을 두들기는 방식이었다. 이를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 부른다. 팔랑크스가 모루처럼 적을 고정하면 기병이 망치처럼 내리치는 것이다. 필리포스 대에 시작된 이 전술은 알렉산드로스 대에 완성된다.
대장간에서 쇠를 다룰 때, 모루는 쇠를 받쳐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망치는 그 쇠를 내리쳐 모양을 만든다. 모루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망치도 받쳐 줄 모루가 없으면 헛친다. 보병이 적을 붙들어 두지 못하면 기병의 측면 타격도 효과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병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위력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 필리포스는 험지를 돌파하는 특공대 성격의 방패 부대(히파스피스타이)를 창설하고, 투석병·투창병·궁병과 공성 전문 부대까지 갖췄다. 그리스 어느 나라보다 복잡하고 유기적인 군대였다.
군대만 바꾼 것이 아니다. 암피폴리스를 점령하면서 확보한 거대한 금광 덕분에 재정이 넉넉해지자, 필리포스는 그리스 최초로 직업 군인 제도를 만들었다. 농부와 양치기 중에서 군인에 어울리는 사람을 뽑아 평시에도 급여를 주며 훈련시켰다. 전쟁 때만 동원되는 다른 그리스 군인과 달리, 마케도니아 병사는 일 년 내내 훈련받는 전문가였다. 보급 인력을 줄이고 병사가 직접 군장을 메고 행군하게 한 덕분에 기동력도 뛰어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왕과 함께 싸우는 귀족 정예 기병 헤타이로이("왕의 친구")의 수를 늘려 기병 전술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렇게 다듬은 군대로 필리포스는 주변 위협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리스 중부의 분쟁(신성 전쟁)에 개입해 영향력을 넓혀 갔다. 한때 바르바로이라 무시받던 변방의 나라가 델포이 신전을 관리하는 종교·정치 동맹의 맹주 자리에까지 올랐다. 필리포스의 나이 30대 중반의 일이었다.
기원전 356년, 필리포스가 그리스 북부 요충지를 함락하던 무렵 세 가지 좋은 소식이 한꺼번에 도착했다. 신뢰하는 장군이 적을 격파했고, 자신의 경주마가 올림픽에서 우승했으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디오니소스 밀교에 깊이 빠진 인물로 전해진다.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말을 거듭 주입했고, 이 신화적 정체성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에게 교육받았다. 기원전 343년, 필리포스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 13세가 된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미에자라는 마을의 학교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또래들과 함께 철학과 정치를 배우고 호메로스의 문학을 익혔으며 자연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훗날 동방 원정 때 학자들을 대동하고 희귀 동물 표본을 스승에게 보냈다는 일화는 이 교육의 흔적이다.
그가 어떤 청년으로 자랐는지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누구도 길들이지 못하는 사나운 명마 부케팔로스가 왕에게 왔다. 필리포스가 쓸모없다며 돌려보내려 하자, 어린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나섰다. 그는 말이 자기 그림자에 놀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삐를 잡아 말의 머리를 태양 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얌전해진 부케팔로스 위에 알렉산드로스가 능숙하게 올라탔다. 이 장면을 본 필리포스는 아들에게 마케도니아는 너무 좁을 테니 그에 걸맞은 더 큰 왕국을 찾으라며 흡족해했다고 전한다. 부케팔로스는 이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는 애마가 된다.
필리포스의 팽창을 가장 경계한 것은 아테네였다. 데모스테네스라는 걸출한 연설가가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본래 말을 더듬던 사람이었지만, 후견인에게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평생 연설 기술을 갈고닦아 당대 최고의 웅변가가 된 인물이다. 그의 거듭된 호소 끝에, 오랜 숙적이던 아테네와 테베가 마케도니아에 맞서 손을 잡았다.
기원전 338년 8월, 두 세력은 카이로네이아 평원에서 맞붙었다. 필리포스는 우익을, 18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좌익을 맡아 테베의 정예 신성부대와 마주했다. 필리포스는 묘수를 썼다. 전투 중 자기 병사들을 천천히 질서 있게 뒤로 물린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아테네 병사들은 이것이 함정인 줄 모르고 신나게 쫓아 내려왔고, 자신들이 유리한 고지대를 벗어나 전열이 흐트러진 순간 필리포스가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 사이 알렉산드로스는 신성부대를 무너뜨렸다.
전장에는 동성 커플 150쌍으로 이뤄졌다고 전하는 테베의 정예 신성부대가 끝까지 버티다 전멸했다. 오늘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돌사자상 아래에서 255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학자들은 이를 신성부대를 기리는 기념물로 본다. 그들은 퇴각을 거부하고 자리를 지키다 죽었기에, 패자였음에도 기념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성부대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승리한 필리포스는 점령자가 아니라 평화를 가져온 지도자로 남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의 학교"라 불릴 만큼 문화의 중심이던 아테네를 파괴하지 않고, 전사자와 포로를 대가 없이 돌려보냈다. 이듬해 그는 코린토스에서 범그리스 회의를 열어,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국가를 묶는 새 동맹을 결성하고 만장일치로 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해 신전을 파괴한 데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범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원정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당대 한 노(老)연설가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통합과 페르시아 원정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논리는 이랬다. 그리스의 고질병은 좁은 농토와 빈부격차였고, 이것이 끝없는 내전을 낳았다. 외부에 공동의 적을 두어야 그리스가 하나로 뭉칠 수 있고, 풍요로운 소아시아를 점령하면 가난한 인구를 이주시켜 빈곤 문제도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원정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그리스 내부의 만성적 갈등을 밖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처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정 직전인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는 딸의 결혼식이 열린 극장에서 한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범인은 개인적 원한을 품은 경호병이었고, 곧 붙잡혀 살해되었다. 고대 문헌들은 암살의 배후로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를 의심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 진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죽음으로 페르시아 원정이라는 거대한 과업이 스무 살 아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는 점이다.
필리포스는 변방의 야만국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중심에 올려놓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어쩌면 페르시아 원정의 과업이 그의 아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필리포스가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필리포스가 죽고 몇 시간 만에, 노련한 행정가 안티파트로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정식 왕으로 선포했다. 스무 살의 왕은 신중했던 아버지와 달리 결단에 망설임이 없었다. 즉위하자마자 잠재적 경쟁자들을 빠르게 숙청했다. 사촌형, 고지대 마케도니아의 왕자들, 그리고 페르시아에 파견되어 있던 유력 장군 아탈로스까지 제거해 통치권을 굳혔다.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남쪽 테살리아를 제압해 그곳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코린토스까지 내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다시 소집했다. 회의에서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아버지의 페르시아 원정 사업을 이어받을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코린토스에 머물 때, 수많은 명사가 그에게 인사하러 몰려들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 그대로 살면 행복하다고 주장하며 통 속에서 살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찾아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하자, 일광욕을 하던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조금 비켜 달라고만 답했다고 전한다. 돌아가는 길에 동행들이 그를 비웃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 진지하게 말했다. 극단적인 것에 끌렸던 그의 성향을 보여 주는 일화다.
남쪽이 정리되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앞서 북방을 안정시키기로 했다. 기원전 335년 봄, 그는 대군을 이끌고 트라키아로 진군했다. 한 고개에서 트라키아 부족은 언덕 위에서 수레를 굴려 내려 마케도니아 대형을 흩뜨린 뒤 공격할 작정이었다. 이를 간파한 알렉산드로스는 명령을 내렸다. 수레가 굴러오면 대형 가운데를 열어 통과시키고, 공간이 없으면 밀집한 채 몸을 웅크려 방패를 겹쳐 그 위로 수레가 지나가게 하라는 것이었다. 훈련된 병사들은 이를 무리 없이 수행했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언덕을 점령했다.
이어 그는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강 한가운데 섬으로 피신한 적을 직접 공격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발상을 바꿔 강 건너편 부족을 먼저 쳤다. 밤에 통나무배와 짐승 가죽으로 만든 부낭을 이용해 조용히 도강한 뒤, 곡식이 자란 밭에 몸을 숨기고 새벽에 적을 기습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대형을 본 적은 싸울 의지를 잃고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의 예측대로, 섬에 있던 부족장도 같은 운명을 직감하고 곧 항복했다.
서쪽 일리리아에서도 위기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펠리움이라는 요새 도시를 봉쇄하다가, 적의 대규모 구원군이 고지에 나타나면서 양쪽에서 협공당할 위험에 빠졌다.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정면 돌파나 무모한 후퇴 대신 색다른 방법을 택했다. 야만 부족들 앞에서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절도 있는 훈련을 시연한 것이다.
밀집대형을 120열 횡대로 정렬하고, 사리사를 일제히 들었다 내리치고, 행군 중 순식간에 방향과 대형을 바꾸는 모습을 보였다.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를 처음 본 일리리아인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틈에 마케도니아군이 적진에 다가가 함성을 지르며 창으로 방패를 두드리자, 일리리아인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며칠 뒤 알렉산드로스는 적이 방심한 야영지를 야습해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오늘날 군대의 제식 훈련이나 의장대 시범을 떠올리면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절도 있는 동작은 그 자체로, 우리는 이만큼 통제되고 훈련된 집단이라는 무언의 경고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를 벌이기 전에, 시각적 위압만으로 적의 사기를 꺾는 심리전을 구사한 것이다.
이 두 차례 원정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왕의 실력을 모든 면에서 입증했다. 군대를 정밀하게 다루는 능력, 위기에서의 임기응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북방에 머무는 동안, 남부 그리스에는 그가 죽었다는 가짜 소문이 퍼졌다. 이를 틈타 테베가 마케도니아 주둔군을 요새에 가두고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펠리움 공성을 마친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빠르게 내달려 13일 만에 테베에 도착했다. 반란 지도자들이 그가 아닐 것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그리스 내전을 원치 않았기에 협상을 요청했지만, 테베는 응하지 않았다. 결국 한 장교의 독단적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경험 많은 마케도니아군이 승기를 잡았다. 도시는 순식간에 학살 현장이 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동맹 도시들이 테베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맡기자, 그들은 테베의 오랜 적대 행적을 들어 도시 해체를 결의했다. 대부분의 시민이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알렉산드로스는 옛 시인 핀다로스의 집만은 보존하고 그 후손을 살려 주었다.
테베 함락 소식에 아테네가 떨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또다시 "그리스의 학교" 아테네를 파괴하지 않았다. 한 도시를 통째로 없앨 만큼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자신에게 적대하던 아테네를 용서할 만큼 관대한 면모를 동시에 보인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함께 갖게 되었고, 그는 아버지가 꿈꾸던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필리포스가 정립한 편제였지만 규모가 더 크고 기병 비율이 높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군대를 한 달 정도밖에 운용할 수 없을 만큼 재정이 빠듯했다. 원정이 실패하면 마케도니아는 곧장 파산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알렉산드로스는 출정 전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 군대를 배불리 먹이고 지휘관들에게 땅과 이권을 나눠 주었다. 그렇게 다 나눠 주면 정작 무엇을 남겨 두겠느냐고 한 측근이 묻자, 알렉산드로스는 희망을 남겨 둔다고 답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334년 봄, 그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기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아시아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해안에 창을 꽂으며, 이 땅을 신들로부터 창으로 쟁취한 자신의 것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무대로 믿어지던 곳을 찾아가, 자신이 평생의 롤모델로 삼은 영웅 아킬레우스의 무덤이라 여겨지는 곳에 꽃을 놓았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늘 지니고 다녔다.
두 세력의 충돌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0~4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라톤·살라미스·플라타이아에서 그리스가 압도적 전력차를 뒤집고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 낸 사건이다. 이후 페르시아는 직접 침공 대신 그리스 내전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이후 분쟁마다 돈으로 균형을 흔들었고, 기원전 38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사실상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균형을 페르시아가 조정하는 위치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이 길고 굴욕적인 관계를 끝내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는 갓 즉위한 스무 살짜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지역 총독(사트라프)들에게 방어를 맡겼다. 한 그리스 용병대장이 청야 전술, 곧 곡물을 불태우고 주민을 대피시켜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을 끊자는 현명한 제안을 했지만, 자기 영지를 황폐화하기 싫었던 총독들은 이를 거부하고 정면 대결을 택했다. 양군은 그라니코스 강에서 마주했다.
파르메니온은 강을 바로 건너지 말고 새벽에 도강하자고 신중하게 권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건너온 마당에 이 작은 강 앞에서 멈출 수 없다며 즉각 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흰 깃털 투구와 화려한 망토로 멀리서도 눈에 띄는 차림을 하고 선두에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전투 중 창이 부러지고, 페르시아 귀족의 언월도에 맞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그때 클레이토스라는 부하가 적의 팔을 잘라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 일은 뒤에 다시 등장한다.
지휘관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페르시아군은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에 남은 그리스 용병들에게는 동족을 상대로 페르시아 편에서 창을 든 죄를 물어, 포로로 잡아 노역에 처했다. 페르시아 원정의 첫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건 도박이었고, 그 도박은 승리로 돌아왔다. 부하들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전장 한복판을 누비는 왕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강력한 해군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대신, 그들이 기항할 해안 도시를 차례로 점령해 제해권을 무력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사르디스가 저항 없이 항복했고,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이오니아 도시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는 페르시아가 후원하던 과두정을 폐지하고 주민이 원하는 민주정을 승인했으며, 세금까지 면제해 점령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밀레토스와 할리카르나소스에서는 치열한 공성전을 치렀다.
프리기아의 고르디온에서는 유명한 전설과 마주했다. 신전에 매듭이 묶인 오래된 수레가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주인이 되리라"는 예언이 전해졌다. 매듭은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이야기가 전한다. 매듭을 고정한 나무못을 뽑아 풀었다는 설과, 검을 뽑아 단숨에 잘라 버렸다는 설이다. 후자가 더 극적이다. 꾀가 아니라 힘과 결단으로 운명을 잘라 버리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라니코스 패배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해상 전략은 위협적이었지만, 그 핵심이던 사령관 멤논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무너졌다. 결국 다리우스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33년 11월, 두 군대는 이소스 부근에서 마주쳤다.
전투는 시작부터 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이 남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다리우스는 산맥을 우회해 북쪽으로 기습 이동해 알렉산드로스의 후방 보급기지를 점령해 버렸다. 보급로가 끊기고 후방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알렉산드로스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바로 군을 돌려 북진했다. 그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보았다. 좁은 지형에 페르시아 대군이 갇혀 수적 우세를 살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병력이 많아도 전장의 폭이 좁으면 그 병력을 한꺼번에 펼칠 수 없다. 좁은 문 앞에 군중이 몰리면 앞줄 몇 사람만 싸우고 뒷사람은 밀려 있을 뿐인 것과 같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과 싸울 때, 일부러 좁은 지형을 골라 적의 수적 우세를 무력화하는 방법을 즐겨 썼다. 이소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전투는 양쪽 날개에서 누가 먼저 무너지느냐의 싸움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페르시아 좌익을 돌파했고, 그 기세로 사선을 그리며 다리우스의 본진을 향해 돌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다리우스는 전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황제가 도망치자 페르시아군 전체가 무너졌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진영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다리우스가 죽은 줄 알고 오열하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 자녀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고, 직접 찾아갔을 때 두 여인이 자신보다 키 큰 친구 헤파이스티온을 왕으로 착각하자 그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다름없으니 걱정 말라며 너그럽게 넘겼다. 헤파이스티온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패주한 다리우스는 가족의 몸값과 영토 할양, 정략결혼을 제안하며 화친을 청했다. 노장 파르메니온이 자신이 왕이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자기도 파르메니온이라면 그랬겠지만 자신은 알렉산드로스라며 거절했다고 전한다.
이소스 승리 후에도 알렉산드로스는 곧장 페르시아 심장부로 향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해상력이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해군의 거점인 페니키아 해안을 점령해 제해권을 끝장내기로 했다. 대부분의 도시가 항복했지만, 강력한 해군을 자랑하던 티레만은 끝까지 저항했다.
티레는 육지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바다 위의 섬 요새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성벽이 곧장 바다에 닿아 있어, 바다 자체가 성벽인 셈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발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바다를 육지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으면 보통은 배를 띄우거나 다리를 놓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강을 메워 길을 내는 쪽을 택했다. 섬을 공략할 수 없다면 섬을 섬이 아니게 만들면 된다는 발상이다. 그는 해안의 건물을 허물어 그 돌을 바다에 쏟아부어, 육지에서 섬까지 이어지는 둑(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병사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총동원되었다. 티레인들은 처음엔 비웃었지만 제방이 가까워지자 화공선과 성벽 위 화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제방이 불타 무너지자 알렉산드로스는 더 넓고 단단하게 다시 쌓았다. 동시에 그는 해군의 필요를 절감하고, 항복한 페니키아·키프로스 도시들로부터 270척이 넘는 함대를 끌어모아 티레를 바다에서도 포위했다.
전투는 창의력 싸움이 되었다. 티레는 잠수부를 보내 닻줄을 끊고 바다에 돌무더기를 깔아 마케도니아 선박의 접근을 막았다. 마케도니아군은 닻줄을 쇠사슬로 바꾸고 돌무더기를 끌어내 깊은 바다로 옮겼다. 결국 약 7개월의 공방 끝에 남쪽 성벽의 취약점을 뚫고 도시에 진입했다. 특사의 죽음과 오랜 고통에 분노한 병사들의 보복으로 도시는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이집트로 가는 길의 마지막 관문 가자도 끝까지 저항했다. 가자는 수백 년간 흙이 쌓여 만들어진 인공 언덕(텔)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언덕 주위를 흙으로 메워 공성탑을 끌어올릴 경사로를 쌓고, 성벽 아래에 갱도를 파 무너뜨렸다. 이 공성전에서 그는 화살에 어깨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한 뒤 네 번째 돌격에서 도시를 함락했다.
가자를 넘어선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진군했다. 이미 페르시아의 지배에 지쳐 있던 이집트는 그를 해방자로 맞았고, 총독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이집트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추대되었지만, 정작 축제는 철저히 그리스식으로 열었다.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끝까지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새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스식 설계, 그리스식 신전, 그리스식 이름의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그가 세운 수많은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지금까지 이름과 위상을 모두 유지하며 살아남은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뿐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군사 거점이 아니었다. 그리스식 도시를 정복지 곳곳에 심는 것은, 그리스 언어·제도·생활양식을 동방에 뿌리내리게 하는 장기적 통치 전략이었다. 이렇게 세워진 도시들은 훗날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섞이는 헬레니즘 문명의 거점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사막을 가로질러 시와 오아시스의 아문 신전을 찾았다. 그리스인이 자신들의 주신 제우스와 동일시한 신의 신전이었다. 정확한 길도 없는 사막을 건너 그곳에 다다른 그는, 신전의 사제로부터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인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한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그는 신탁의 권위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스스로 신의 아들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함을 그대로 둠으로써, 따르는 자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믿을 수 있었고 비판하는 자들은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신전에서 무엇을 물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듣고자 한 답을 들었다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이집트를 정리한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다리우스를 잡으러 나섰다. 다리우스는 이소스의 패배를 되새기며, 이번에는 자신의 강점인 기병과 전차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넓고 평탄한 평원을 골랐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가우가멜라였다. 그는 전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미리 풀을 베고 땅을 다졌으며, 바퀴축에 낫을 단 낫전차와 전투 코끼리까지 동원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응은 정교했다. 그는 전열 전체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배치한 뒤, 진영 전체를 서서히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하자 다리우스가 공들여 평탄하게 다듬어 둔 전차 돌격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동시에 양 날개를 뒤로 살짝 꺾어 배치해 적의 측면 포위에 대비했고, 중앙의 팔랑크스를 앞뒤 이중으로 배열해 후방 돌파에도 견디게 했다.
다리우스가 자신 있게 낫전차를 돌격시켰지만,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순간적으로 대형의 틈을 열어 전차를 그대로 통과시킨 뒤 후방의 경보병이 처리했다. 전차는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우측 이동에 페르시아 좌익 기병이 끌려 나오면서 적 중앙과 좌익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결정적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예 기병을 쐐기 대형으로 재편해 다리우스의 본진을 향해 정면 돌파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창끝이 다가오자 다리우스는 또다시 등을 돌려 달아났다.
황제의 도주는 중앙 방어선의 붕괴로 이어졌다. 다만 좌익을 맡은 파르메니온이 위기에 몰리자,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추격을 멈추고 좌익을 지원하는 결단을 내렸다. 황제를 생포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 것이지만, 군 전체의 통제를 잃으면 승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판단이었다. 이 전투로 아케메네스 제국은 사실상 무너졌다.
가우가멜라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접수했다. 바빌론과 수사는 저항 없이 항복했고, 그는 수사에서만 막대한 양의 은과 귀중품을 손에 넣었다. 주목할 점은 그가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우익을 지휘했던 적장 마자에우스를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 전쟁이 다리우스와 그 체제를 겨냥한 것이지 페르시아 백성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의 상징적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는 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의 보고를 비워 재물을 옮긴 뒤, 궁전에 불을 질렀다. 방화의 동기에 대해 사료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아테네를 불태운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였다는 설, 승전 연회에서 한 인물이 던진 도발에 충동적으로 응한 술자리의 결과였다는 설이 있다. 복수의 상징성과 술자리의 충동, 정치적 계산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제국을 향한 복수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한 시대를 지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 불길 속에서 함께 사라진 유물과 기록들이 아쉬울 따름이다.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는 여전히 도주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하인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사실상 포로로 잡았다. 알렉산드로스가 빠른 병사들을 선발해 밤새 추격했지만, 그가 발견했을 때 다리우스는 베소스의 칼에 찔려 수레에 버려진 채 죽어 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복수의 명분이던 다리우스가 죽음으로써, 복수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베소스가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알렉산드로스의 군대 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필리포스 시대부터 군을 떠받쳐 온 파르메니온 가문이었다. 그의 아들 필로타스가 왕에 대한 반역 모의 정보를 묵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처형되었고, 곧이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파르메니온도 소명 기회조차 없이 제거되었다. 아들이 반역 혐의로 처형된 마당에 군을 장악한 아버지를 살려 두는 것은 위험을 방치하는 일이라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두 왕의 성공에 지대한 공을 세운 노장은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베소스는 결국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다. 다리우스를 배신하고 황제를 참칭한 죄로, 그는 페르시아 전통의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다리우스의 복수자이자 정통 계승자로 연출하며 페르시아 귀족들 앞에서 새 지배자의 자리를 굳혔다.
다리우스와 베소스를 제거한 뒤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마라칸다)를 점령하고, 페르시아조차 제대로 손대지 못한 약사르테스 강(시르다리야) 유역까지 진출했다. 당대 그리스인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는 단순한 변방이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전사 문화와 교역 도시가 어우러진 복잡한 세계였고, 지역 엘리트들이 사실상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땅이었다. 처음엔 조용히 항복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거점 도시를 건설하고 눌러앉을 기색을 보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문화적 마찰과 물자 징발이 누적되었고, 마침내 스피타메네스라는 영리한 귀족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터졌다.
이전까지 현지인들의 태도는 누가 왕이 되든 같은 세금만 내면 된다는 식의 체념 섞인 현실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지나가는 정복자가 아니라 눌러앉을 정복자였다. 그리스식 도시를 짓고 현지 종교 풍습을 무시하며 물자를 징발하자, 단순한 지배자 교체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스피타메네스는 유목민의 기동전술로 마케도니아군을 농락했다. 한 차례는 2,000명 규모의 마케도니아 구원군이 매복에 걸려 거의 전멸하기도 했다. 정규군 중심의 마케도니아군에게 유목 전사들의 치고 빠지는 전술은 낯설고 치명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군을 여러 부대로 나눠 소그디아나 전역을 대대적으로 소탕했고, 결국 동맹 부족들이 등을 돌리면서 스피타메네스도 최후를 맞았다.
이 길고 의미 없어 보이는 전쟁 속에서 병사들은 지쳐 갔다. 정복은 오래전에 끝난 듯한데 전투는 끝없이 이어졌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걷고 있던 것은 영광의 행진이 아니라 지옥을 되풀이하는 순례였다.
긴장이 누적된 끝에, 한 연회에서 비극이 터졌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이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했다고 떠들고, 최근 패배한 장수들을 풍자하는 노래까지 부르자, 필리포스 시대의 노장 클레이토스가 분노했다. 그는 그라니코스 강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클레이토스는 끝없는 원정과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식 처신에 대한 불만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일찍이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자기가 왕의 목숨을 구했던 일을 들먹이며, 이제 와서 페르시아식 궁정 예법까지 따라야 하느냐고 따졌다. 격해진 언쟁 끝에 술에 취한 알렉산드로스는 곁에 있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제정신이 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며 자책했다. 한 고전 사학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개인 충돌이 아니라, 오랜 전장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에게 나타나는 외상후 스트레스의 파열로 본다. 알렉산드로스는 머리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날의 폭발은 그가 애써 붙잡고 있던 내면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왕만의 것이 아니라, 군대 전체에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 긴장이기도 했다.
균열을 더 깊게 만든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전통 고집이었다. 페르시아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며 존경을 표하는 프로스키네시스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에게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오직 신에게만 하는 행위였다. 페르시아인은 절하지 않는 그리스인을 무례하다 여겼고, 그리스인은 납작 엎드리는 페르시아인을 노예근성이라 비웃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두에게 이 의전을 도입하려 했지만, 몸에 밴 문화는 왕의 권위보다 강했다. 많은 그리스인 부하가 끝내 거부했고, 결국 의전은 흐지부지 폐지되었다. 여기에 더해 왕을 겨냥한 조직적 암살 시도(시동들의 음모)까지 벌어졌다.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의 숙청, 클레이토스의 죽음, 점점 짙어지는 동방식 복장과 의전이 쌓이고 쌓여 터져 나온 것이다. 신이 되려는 자에게 인간의 피곤함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거대한 다민족 제국을 다스리려면 페르시아의 통치 방식과 의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그 모습은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적의 방식을 택했다는 배신으로 비쳤다. 정복자에서 통치자로 변신하려는 시도가, 정작 그 정복을 가능케 한 사람들과의 사이를 벌려 놓은 것이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인도 원정을 준비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는 오늘날의 인도가 아니라 인더스강 유역(현재의 파키스탄 동부와 인도 북서부)을 가리킨다. 당대 그리스인에게 이곳은 세계의 끝자락에 걸친 막연한 땅이었고,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 같은 신화 속 영웅이 다녀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영웅들과 자신을 겹쳐 보며 나아갔다.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고 인더스강을 건넌 그는, 탁실라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인근의 강력한 군주 포로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히다스페스 강(젤룸 강)에서 맞섰다. 강은 넓고 깊었으며, 무엇보다 포로스에게는 전투 코끼리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말이 코끼리 냄새만으로도 겁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면 도강이 어려웠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만 작전을 폈다. 강변에 진을 치고 오래 버틸 듯한 자세를 보이며, 밤마다 거짓 도강 기색을 흘려 포로스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진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숲이 우거져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굽이진 지점에서 폭우를 틈타 은밀히 도강했다. 코끼리가 만든 혼란 속에서 마케도니아 기병의 숙련된 기동과 긴 창, 미끄러운 땅에서 제 위력을 못 낸 인도 궁병의 약점이 맞물려 알렉산드로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대가가 컸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세월 전장을 함께한 애마 부케팔로스를 잃었다.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그를 기려 본진 근처에 부케팔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한편 부상당한 채 끝까지 저항하다 생포된 포로스에게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왕에게는 왕답게 대하라고 짧게 답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기개에 감탄해 그의 왕위를 인정하고 더 넓은 영토까지 주었다.
히다스페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더 동쪽으로, 인도의 끝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너머에는 대양만이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말은 달랐다. 인도는 훨씬 더 넓고, 갠지스강 너머에는 더 크고 강한 나라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끝없는 전투에 지쳤고, 앞날은 더 막막했으며,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재물은 이미 넘치도록 가졌으니 더 많은 전리품도 동기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그리워한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향의 식탁과 가족이었다.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여전히 존경했기에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파업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마침 희생 제사에서 진군에 불길한 징조가 나오자, 그는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그 자리에 올림포스 신들에게 바치는 거대한 제단 12개를 세우게 했다. 자신들이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기념물로 남기겠다는 의지였다. 그가 군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가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왕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음을 보여 준다.
회군 길에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병자와 노장, 코끼리 같은 무거운 짐은 안전한 내륙로로 보냈고, 부하 네아르코스에게는 함대로 해안을 탐사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게드로시아 사막으로 진입했다.
이 사막 횡단은 원정 전체에서 가장 참혹한 시련이었다. 물은 드물었고 모래는 발을 끌어당겼다. 갈증에 지친 병사가 샘에서 물을 과하게 들이켜다 죽는 일도 벌어졌고, 모래폭풍에 군율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과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으며 앞장섰다. 병사들이 투구에 담긴 귀한 물을 그에게 가져오자, 그는 자기 혼자만 마시면 공평하지 않다며 그 물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땅에 쏟아 버렸다고 전한다.
물 한 모금을 거부한 행동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고통 속에서 자신도 병사들과 똑같이 목마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준 리더십의 연출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전투에서 항상 선두에 서고, 부상병을 일일이 찾아 위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따른 데에는 이런 행동이 쌓여 만든 신뢰가 있었다.
해안을 탐사하던 네아르코스의 함대도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렸지만, 1,600킬로미터가 넘는 항로 끝에 살아남았다. 사막을 건너온 알렉산드로스와 행방불명이던 네아르코스가 카르마니아 해안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을 때,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과 맞닥뜨렸던 끝에 다시 마주한 것이었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서 제국 통합을 위한 대담한 조치를 단행했다. 그는 다리우스의 딸을 비롯한 페르시아 왕족과 결혼했고, 헤파이스티온을 포함한 약 80명의 마케도니아 귀족을 페르시아 여성과 짝지어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열었다. 이는 연애가 아니라, 전쟁은 끝났으니 이제부터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이 하나의 제국으로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선언이자 강요였다.
왕이 맺어 준 수많은 부부 가운데, 끝까지 실제 부부로 남은 커플은 단 하나뿐이었다. 박트리아 귀족의 딸과 결혼한 셀레우코스였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셀레우코스 왕조를 잇게 되는데,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무너진 뒤 동방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후계 국가가 된다. 동서 혈통의 결합이 한 시대를 잇는 상징이 된 셈이다.
같은 해 알렉산드로스는 오피스에서, 나이 많거나 임무에 맞지 않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큰 보상을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반응은 분노였다. 병사들은 끝까지 함께하길 바랐기에, 이를 명예로운 퇴역이 아니라 유배처럼 받아들였다. 왕이 마케도니아가 아니라 아시아의 마음을 택한 것 아니냐는 불신이 폭발했다.
병사들이 집단으로 항의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선동자들을 처형한 뒤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에게 지휘권과 직위를 분배하고 아시아 병사들로 새 정예 부대를 편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케도니아인 없이도 제국을 운영할 수 있음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결국 병사들이 궁으로 몰려가 용서를 빌었고, 알렉산드로스는 마음을 풀고 화해의 잔치를 열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버리려 한 것이 아니라 보상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복의 여정은 끝났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다음을 막막해했다. 영토를 안정시키고 행정 기반을 다지는 일은 평생 전장을 누벼 온 그에게 낯설고 답답했다. 그는 어느새 다음 정복지를 그리고 있었다. 목표는 아라비아 반도였고, 그 너머로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유럽 전체를 꿈꿨다. 그의 정복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평생의 벗 헤파이스티온이 열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기원전 324년 가을). 소년 시절부터 전장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깊은 충격에 빠져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은 이 장면을 호메로스 서사시 속 아킬레우스와 그의 벗 파트로클로스에 겹쳐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또한 갑작스러운 열병에 휩싸였다. 바빌론에서 연회를 즐기던 중 통증이 밀려왔고, 몸은 빠르게 무너졌다. 그럼에도 그는 희생 제사를 올리고 아라비아 원정을 논의하며 왕의 일정을 멈추지 않았지만, 며칠 뒤 말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궁 안에서 서서히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기원전 323년, 향년 32세였다. 제위 기간은 채 13년이 되지 않았고, 사망일조차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 병의 원인도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말라리아·장티푸스·독살설 등).
죽기 직전 제국을 누구에게 넘길지 묻자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실제로는 분명한 유언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왕위는 공중에 떠 버렸고, 제국은 곧바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의 장군들(디아도코이, "후계자들")은 속주 통치권을 나눠 가진 뒤 각자의 패권을 위해 40년에 걸친 전쟁에 돌입했다.
살아서는 세상을 정복했지만, 죽음은 알렉산드로스의 세계를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의 절반을 손에 넣었는데 자신은 아직 내세울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한탄이었다. 한니발 역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을 꼽을 때 가장 먼저 알렉산드로스를 떠올렸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를 본보기로 삼았고, 어떤 이들은 경쟁자로 여겼다.
정작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바라본 대상은 달랐다. 그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따라 살았고, 신화 속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경쟁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만이 걸리는 병으로 쓰러졌고, 광대한 제국을 만든 뒤에도 말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복이 남긴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다. 피와 폐허, 찬란함과 상처가 뒤섞인 자리에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남겼다. 제국은 그의 사후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지만, 그가 흩뿌린 언어와 문화는 오랜 시간을 거쳐 하나의 문명, 곧 헬레니즘 문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리아와 이집트, 소아시아는 그 뒤로 천 년 가까이 그리스어 문화권에 머물렀다.
이 융합의 흔적은 뜻밖의 곳에서도 발견된다. 오늘날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일대의 간다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초기 불상은 그리스 조각의 이목구비와 옷주름을 닮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가 죽은 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가 지중해 동부의 공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히브리어 경전을 그리스어로 옮기기 시작했다(이른바 70인역 성경). 이때 히브리어 이름 예호슈아(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어에 없는 발음을 다듬고 남성 명사 어미를 붙여 이에수스(Iēsous)라는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 그리스어 이름이 라틴어 예수스(Iesus)를 거쳐 오늘날의 예수(Jesus)가 되었으니,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표기인 셈이다. 훗날의 복음(福音)은 바로 이 그리스어를 타고 지중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한 정복자가 무력으로 뚫어 놓은 언어의 길 위로, 수백 년 뒤 전혀 다른 메시지가 흘러간 것이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으나 끝내 인간으로 죽었다. 그가 좇은 것은 영광이었고, 남긴 것은 균열이었으며, 퍼뜨린 것은 하나의 문명이었다. 많은 것을 무너뜨렸고, 또 많은 것을 세웠다. 그를 정의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결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살아서는 스스로를 신화로 만들었고, 죽어서는 하나의 시대가 되었다. 그를 따르든 저항하든, 그 뒤의 모든 이들은 그의 이름을 한 번씩 통과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인간이 역사 전체를 비틀 수 있음을 보여 준 존재였다. 돌아보면 그는 신화보다는 덜 위대했고, 인간치고는 너무 컸다.
한 청년이 변방의 왕국에서 출발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세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가 지난 자리에는 잿더미가 된 도시와 새로 그어진 국경, 그리고 천 년을 이어 갈 언어가 함께 남았다. 신이 되려 했던 그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무너졌지만, 그가 건드린 세계는 끝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