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 메소포타미아
고대 서아시아 2500년
수메르에서 페르시아까지
기원전 3500년경 진흙 위에 새겨진 첫 글자에서, 기원전 330년 불타버린 페르세폴리스까지. 문자와 법, 도시와 제국, 종교와 신화가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고 어떻게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는지를 한 흐름으로 정리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문명의 도구들, 즉 문자, 바퀴, 학교, 의회, 법전, 화폐 같은 것들은 대부분 약 5천 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준이 어찌나 높았던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문명이 통째로 등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갑작스러운 선물이 아니라, 가뭄과 홍수, 전쟁과 교역이라는 현실의 압력 속에서 사람들이 한 걸음씩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글은 그 출발점인 수메르에서 시작해, 그 유산이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를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풀어낸다. 등장하는 민족과 왕은 수십에 이르지만,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처음으로 모르는 타인과 협력하는 법을 배웠는가.
제1장수메르 — 위기가 만든 최초의 문명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를 일컫는다. 두 강이 상류에서 실어온 흙이 쌓여 만들어진 이 충적토는 농사에 더없이 비옥했고, 기원전 6천 년경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보리와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수메르인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기원은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착 이후 약 천 년이 흐른 기원전 5천 년경, 이곳에 마을 규모를 넘어선 최초의 도시 에리두가 생겨난다. 에리두 사람들은 농사와 목축에 그치지 않고 토기를 만들어 교역에 나섰고, 이를 필두로 수메르 곳곳에 도시 국가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우루크가 패권을 쥐었고, 기원전 4천 년경 우루크는 수메르의 중심 도시가 된다.
풍요가 아니라 위기에서 시작된 전성기
역설적이게도 수메르 문명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풍요가 아니라 치명적인 위기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천 년경, 메소포타미아의 기온이 급상승하고 강수량이 줄면서 두 강의 수위가 낮아졌다. 농사의 젖줄이던 습지와 개울이 말라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가장 큰 이유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미 농사와 정착의 길로 들어선 인류는 수렵채집 시절처럼 훌쩍 떠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찾아낸 답이 바로 관개 시설이었다. 처음에는 마을마다 작은 저수지를 팠지만 한계가 분명했고, 결국 여러 촌락이 연합해 대규모 운하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지 않는 인공 농업이 시작된 것이다. 수메르는 이렇게 협력을 통해 자연재해를 극복한 최초의 문명이 되었다.
⊹ 비유로 이해하기
대규모 운하를 만드는 일은 오늘날로 치면 거대한 댐과 상수도망을 건설하는 국가 사업과 같다. 수많은 인부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끌어온 물을 잡음 없이 골고루 나누려면 단순한 힘만으로는 안 된다. 설계하고, 일정을 짜고, 분쟁을 조정하는 '관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직접 땅을 파지 않아도 먹고사는 행정 엘리트, 즉 관료가 이때 처음 등장한다.
도시가 빨아들인 기술 혁신
체계화에 들어선 수메르 도시들은 인구 집중과 도시 특유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빠른 기술 발전을 이뤄낸다. 손으로 땅을 파던 사람들은 소가 끄는 쟁기로 손쉽게 밭을 갈았고, 늘어난 수확물을 옮기기 위해 바퀴 달린 짐수레가 등장했다. 먹고도 남는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이를 다른 도시와 물물교환했고, 더 멀리 더 많이 나르기 위해 돛을 발명해 범선으로 바닷길을 열었다. 모자란 나무와 광석을 들여왔으며, 특히 구리와 주석을 수입해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청동기 시대가 이렇게 열린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2500년경 사이, 수메르 지역의 80퍼센트 이상이 도시가 되었다. 여기서 도시란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아니다. 직업의 종류가 농민 하나에서 수백 가지로 갈라지고, 친족이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생존을 맡기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전쟁이라는 또 다른 가속기
도시 내부가 안정될수록 도시 바깥에는 긴장이 쌓였다. 청동으로 검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싸움을 위한 도구의 등장이다. 짐수레에 쓰이던 바퀴는 군사용 전차에 얹혔다. 도시 간 군비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 준비는 다시 기술 발전을 부추겼다. 너도나도 성벽을 쌓았고, 사람들은 피땀 흘려 일하는 것보다 남의 것을 빼앗는 편이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는 권력을 쥐고 세습 왕조의 왕이 되었으며, 작은 도시들이 큰 도시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전쟁 포로, 곧 노예 경제가 시작되었다.
제도와 기술은 정교해졌지만,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지배 계급의 통치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피지배 계급의 강제노동과 전쟁 동원,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소수가 다수를 다스릴 수 있었던 데에는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의 힘이 컸다.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저버리면 신의 벌을 받는다는 도덕의 강제력 — 이것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가상이 실제를 만들어낸 셈이다.
지구라트 — 하늘에 닿으려 한 흙벽돌
수메르 지역에는 나무와 금속이 모자란 대신 고운 점토가 넘쳐났다. 사람들은 이 흙을 1천 도가 넘는 가마에 구워 벽돌을 만들고, 평평한 토단 위에 벽돌을 쌓아 신전을 높게 올렸다. 홍수에도 끄떡없도록, 그리고 변하는 자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계단식 신전이 바로 지구라트다. '높은 봉우리'라는 뜻으로, 꼭대기에 사원을 올린 형태였다.
지구라트는 종교 시설인 동시에 행정의 중심이었다. 도시 전체의 식량 분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생산물은 명목상 신의 소유였기에, 강가 마을에서 추수한 곡식이 지구라트에 모였다가 신분에 따라 분배되었다. 신의 대리자인 왕이 모든 토지를 관리했고, 그 아래 신관과 군인이 지배층을, 평민과 노예가 피지배층을 이뤘다. 이 구조는 이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사회의 전형이 된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약 30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으며, 후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제2장문자의 탄생 — 영수증에서 서사시까지
인류 최초의 문자는 시나 기도가 아니라 수량을 기록하려는 실용적 필요에서 출발했다. 숫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자신이 거둔 곡물이나 가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진흙을 빚어 작은 표식을 만들었다. 이것을 '물표(토큰)'라고 부른다. 기원전 8천 년경부터 쓰인 물표는 모양에 따라 대상이 달랐다. 둥근 것은 곡식, 세모는 동물, 원반은 하루치 노동량을 의미하는 식이었다.
도시가 발전하며 거래 품목이 늘자 물표도 따라 늘었다. 처음 열두어 개에 불과했던 것이 우루크 시대에는 350종류에 달했다. 일대일 대응의 한계에 부딪힌 수메르인들은 점토판에 복잡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새기기 시작했고, 이것이 문자와 숫자로 발전한다. 특히 수메르 문명은 날카로운 갈대로 점토를 눌러 쐐기 모양 자국을 내는 '쐐기문자(설형문자)'를 발전시켰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름
기원전 2600년경의 한 점토판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한 농부가 신전에 보리를 맡기고 받은 일종의 영수증인데, 37개월에 걸쳐 보리 2,986자루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쿠심'이라는 회계 담당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상 최초로 기록에 남은 인간의 이름이, 다름 아닌 금융 거래 영수증에 적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업 거래, 토지 매매, 보수 지급 같은 경제 행위가 기록의 대부분이었다. 우루크에서 발견된 점토판이 주로 경제 활동이 이뤄지던 지구라트에서 나온 것도 그 증거다. 수메르에는 학교가 있었고 공식적인 문자 교육이 이루어졌다. 손글씨를 직업으로 삼는 '필경사'라는 전문직도 존재했다.
왜 문자가 결정적이었나
- 문자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기억 용량을 극복한 첫 번째 도구였다.
- 수만 명의 세금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가 보유한 자원과 미래의 기대 자원, 인구 증가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는 곧 도시 국가가 왕국, 나아가 제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되었음을 뜻한다.
- 동시에 이 가능성은 더 잦은 국가 간 전쟁을 불러왔다.
제3장바빌로니아 — 함무라비와 법의 시작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 북쪽에서 온 이방인 사르곤이 등장한다. 그는 셈어를 쓰는 아카드인으로, 키시 왕을 제거하고 남쪽으로 진군해 수메르 전역을 점령했다. 기원전 24세기경, 여러 도시 국가를 하나로 묶은 최초의 통일 국가 아카드 왕국이 이렇게 탄생한다. 사르곤은 기존 수메르 통치자들의 자리를 보장하고 종교를 그대로 수용하는 융화 정책을 폈지만, 공식 언어만은 수메르어가 아닌 아카드어로 바꾸었다. 이후 아카드어와 셈족의 영향은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의 바탕에 깔리게 된다.
아카드 왕국은 약 200년 만에 가뭄과 봉기, 그리고 자그로스 산맥에서 온 구티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한동안 약탈에 시달리던 수메르 지역은 우르의 우르남무 왕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우르남무는 사회 정의라는 관념을 처음으로 법에 담은 왕으로 유명하다.
현존 최고(最古)의 법전, 우르남무
우르남무 법전은 부패 관리를 단속하고 공정한 도량형을 관리하며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이 법전은 약 300년 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토대가 된다.
작은 마을 바빌론이 대국이 되기까지
기원전 20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세력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이 틈을 타 셈어를 쓰는 유목민 아모리인이 이주해와 기원전 1895년경 작은 마을을 이루는데, 그 이름이 바로 바빌론이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숨죽이며 명맥을 잇던 바빌론에 전환점이 온 것은 기원전 1792년, 열여덟 살의 함무라비가 즉위하면서다.
함무라비는 무작정 정복에 나서지 않았다. 즉위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이신, 라르사, 마리, 에슈눈나, 아시리아, 엘람이 각축하던 상황이었다. 그는 유연한 외교로 안정을 다지면서 오히려 내치에 집중했다. 방어용 성벽을 건설하고 관개 시설과 운하를 정비해 농업 생산력과 운송을 끌어올렸고, 조세 제도와 중앙집권 행정, 병역 제도를 마련해 '소프트웨어'를 장착했다. 그렇게 힘을 비축한 뒤, 라르사·마리·에슈눈나를 차례로 제압하고 아시리아를 굴복시키며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차지한다.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대국으로 팽창한 것이다. 이 나라를 수도의 이름을 따 바빌로니아라 부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법치의 출발인가 엄벌인가
함무라비는 넓은 영토의 모든 법적 분쟁을 왕이 직접 처리할 수 없었기에, 각지에 지방 법원을 세우고 사법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왕이 어디서나 직접 재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법전을 만들어 반포했다. 이것이 가장 유명한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이다. 법전은 서문과 282개 조항,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검은 돌기둥은 점토판에 적힌 법을 따로 새긴 전시용 기념비다. 돌기둥 상단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 샤마시에게서 막대와 밧줄을 건네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측량 도구인 막대와 밧줄은 '건설자로서의 왕'과 그 왕권을 상징한다. 고대에는 법과 정의가 태양신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태양은 늘 규칙적으로 떠올라 어둠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즉 이 법은 권력자의 자의가 아니라 신에게서 하사받은 것이라는 정당성을 암시한다.
서문은 이 법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해치지 못하게 하고, 고아와 과부에게 정의를 베푼다는 것이다. 무려 3,700여 년 전 고대 왕국의 법에서 이런 정의 관념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이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적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다만 이 보호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신분 질서 안에서의 약자였다.대표적 조항이 제196조 "자유인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뺀다", 제197조 "사람 뼈를 부러뜨린 자는 그 뼈도 부러뜨린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으로, 동해보복(同害報復), 곧 탈리오 법칙이라 부른다. 이를 지독한 엄벌주의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법치주의의 출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 비유로 이해하기
법이 없던 시절의 복수는 상한선이 없었다. 누군가 내 눈을 멀게 하면, 힘 있는 가문은 상대 가문을 몰살할 수도 있었다. 사적 분쟁이 부족 전쟁으로 번져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되곤 했다. '눈에는 눈'은 잔인해 보이지만, 사실은 딱 그만큼만 갚으라는 상한선이다. 폭력을 동반한 복수의 권한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국가가 독점하고, 보복의 양을 정량화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법치의 씨앗으로 평가된다.
다만 한계도 분명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정의관과 달리, 동해보복 원칙은 신분과 성별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다. 평민 여성의 목숨값이 은 30세겔이라면 노예 여성은 20세겔이었고, 노예에 대한 폭행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반면 노예가 죄를 지으면 가중 처벌을 받았다. 법전은 재판·절도·군대·상거래·채무·이혼·상해 등을 두루 다뤘는데, 특히 상거래 규정이 상세하다. 경제 구조가 혈족 중심에서 국가 규모로 커지자,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강제력 있는 계약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128조는 "혼인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아내가 아니다"라며 계약 문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4장신화 — 에누마 엘리시와 길가메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연에 인간을 넘어선 위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그 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예측 불가능한 홍수와 가뭄이 생존을 좌우했다. 이런 두려움이 자연숭배로 이어졌고, 특히 농사와 관련된 신들이 하나둘 생겨나 결국 수천에 이르는 다신교 체계가 잡혔다.
바빌로니아 신화는 수메르 신화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신들의 역할과 기능은 이어졌다. 다만 서사 구조와 소재는 훨씬 정교하고 다양해졌는데, 그 정점이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시와 홍수 신화를 품은 길가메시 서사시다.
에누마 엘리시 — 층간소음에서 시작된 우주
이야기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 원시 바다의 인격신 아프수와 티아마트로부터 시작한다. 둘의 결합으로 여러 세대의 신들이 태어났지만, 자손들이 워낙 시끄럽게 구는 통에 아프수는 도무지 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손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지만, 가장 지혜로운 신 에아가 이를 미리 알아채 마법으로 아프수를 잠재운 뒤 죽인다.
에아의 아들로 태어난 폭풍의 신 마르두크는 빠르게 성장해 다른 모든 신을 능가했다. 그가 폭풍으로 사방을 휘젓고 다니자 세상은 더욱 소란스러워졌고, 오래된 신들은 어머니 티아마트에게 항의한다. 뒤늦게 분노한 티아마트는 괴물 뱀들을 낳고 킹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복수에 나선다. 마르두크는 다른 신들로부터 최고신의 지위를 받는 조건으로 출전해, 일곱 개의 회오리바람을 티아마트의 입에 집어넣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뒤 화살로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티아마트의 시체를 반으로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들고, 킹구의 살과 피로 인간을 창조해 신들을 노동에서 해방시킨다.
⊹ 비유로 이해하기
에누마 엘리시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정치 선전문에 가깝다. 본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최고신은 니푸르의 수호신 엔릴이었다. 그런데 함무라비가 권력을 잡으면서, 바빌론의 비주류 신이던 마르두크가 신화 속에서 최고신으로 등극한다. 비주류 신이 기존 권위를 무너뜨리고 우주의 왕이 되는 줄거리는, 변방의 작은 마을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이 되었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신화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 죽음을 처음으로 두려워한 인간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우루크의 왕으로, 본래 폭정을 일삼는 인물이었다. 신들은 그에 대적할 야수 엔키두를 창조하지만, 신전 여사제와의 만남을 계기로 야성을 잃은 엔키두는 문명인이 되어 우루크로 향한다. 둘은 격렬히 맞붙지만 승부가 나지 않자 서로를 인정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두 영웅은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를 처치하고, 하늘의 황소까지 죽인다. 길가메시가 "이름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가치"라며 죽음을 가볍게 여기던 시절이다. 그러나 신들의 분노를 산 대가로 엔키두가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길가메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공포의 차원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밀을 안다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 떠난다. 세상 끝에서 만난 우트나피슈팀은 자신이 영생을 얻게 된 경위를 들려주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신들이 인간의 소란에 짜증을 내어 대홍수를 일으키기로 했으나, 한 사람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그가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모든 생물을 한 쌍씩 싣자, 6일간 홍수가 쏟아진 뒤 7일째 하늘이 맑아졌다. — 길가메시 서사시 제11 점토판의 대홍수 줄거리 요약
우트나피슈팀은 잠을 자지 않고 엿새 낮 이레 밤을 깨어 있으면 비결을 알려주겠다고 하지만, 지친 길가메시는 사흘도 못 채우고 잠들어버린다. 결국 그의 아내의 설득으로 길가메시는 바다 밑바닥에 자라는 영생의 풀을 얻는 법을 배운다. 천신만고 끝에 풀을 손에 넣지만, 우물가에서 잠든 사이 뱀이 그 풀을 물고 가버린다.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우루크에 돌아온다.
시인 릴케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 표현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정반대의 메시지도 품고 있다. 바닷가 여관 주인 시두리가 건넨 충고가 그것이다.
불멸은 신들이 가져갔고 인간에게는 죽음만 남았으니, 그저 배를 채우고 춤추며 즐기고, 가족을 돌보는 것이 상책이다. — 여관 주인 시두리가 건넨 충고의 취지 (카르페디엠의 가장 오래된 표현)
사랑·우정·죽음·모험이라는 이 보편적 주제는 훗날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의 모티프가 되었다.
제5장히타이트 — 철과 전차, 그리고 평화조약
철기 문명 하면 흔히 히타이트를 떠올린다. 교과서는 히타이트가 철제 무기를 앞세워 아나톨리아의 강대국이 되었다고 간단히 적는다. 그런데 최근의 고고학은 이 통념을 두 가지 점에서 수정한다.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 선주민이 발전시킨 제철 기술을 받아들여 비교적 넓게 상용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작 히타이트의 철기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철은 보존이 어렵고 후대인들이 녹여 재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히타이트가 철을 다뤘음을 아는 것은 점토판 기록 덕분이다.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3세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에게 강철 단검을 보내며 "너희도 이런 무기를 만들 수 있는가"라고 도발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당시 철은 은보다 40배, 금보다 다섯 배가량 비쌌다고 한다.
바람의 도시 하투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는 강가가 아니라 황량한 고원 지대에 자리 잡았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철이었다. 이 지역에 철광석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황야의 거센 바람이 불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을 제련하려면 산소를 공급할 풀무가 필요한데, 당시에는 풀무가 없어 자연 바람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히타이트는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풍우의 신 테슈브를 최고신으로 모셨다.
카데시 전투 — 역사상 처음 기록된 전투
전차 운용에 능했던 히타이트는 전차 바퀴축을 철로 제작하고 더 많은 병사를 태웠다. 그래서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 전차에 두 명이 탔다면, 히타이트 전차에는 마부와 궁수, 방어 병사까지 최대 세 명이 탈 수 있었다.
기원전 1274년, 두 강대국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시리아의 카데시에서 맞붙는다. 전투 양상이 처음으로 상세히 기록된 사건이다. 이집트 측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가 신처럼 각성해 혼자서 히타이트 군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이는 대대적인 내부 선전에 가깝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람세스 2세가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카데시 성이 이집트에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 전쟁 후에도 히타이트가 카데시를 포함한 속국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에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UN에 걸린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카데시 전투 이후에도 두 나라는 약 15년간 국지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메소포타미아에서 아시리아가 부상하며 시리아까지 압박해오자, 하투실리 3세는 서둘러 이집트에 화평을 제안한다. 기원전 1259년, 두 나라는 상호 불가침과 상호 원조를 규정한 평화조약에 서명한다. 대등한 두 강대국이 공조를 위해 맺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의 사본은 오늘날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에 걸려 있다.
법치국가 히타이트,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멸
히타이트는 동시대 다른 나라보다 선진적인 법을 두었다. 텔레피누 왕은 연좌제를 폐지해 "벌은 당사자 혼자 받아야지 가족이나 재산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함무라비 법이 정량적이지만 과도한 형벌로 유명했던 반면, 히타이트는 민법과 형법을 구분해 민사 사안은 처벌보다 배상으로 마무리했고, 형사에서도 고의와 과실을 구별했다. 여성의 법적 지위도 높아 이혼의 권리가 주어졌으며,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회의 '판쿠'가 존재해 나름의 권력 분립이 이뤄졌다.
그러나 히타이트는 약 500년을 이어오다 기원전 12세기 말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멸망 원인은 지금도 정설이 없다. 한때 '바다민족'의 침략이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하투샤에서 대규모 화재나 약탈의 흔적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으면서 이 설은 힘을 잃고 있다. 오히려 가뭄에 따른 식량 부족, 국제 교역망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 왕위 찬탈이 반복되던 내부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본다. 흥미롭게도 히타이트는 문자가 해독된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문명이다.
제6장페니키아 — 알파벳을 판 장사꾼들
역사는 대개 왕이나 정치인을 중심으로 기억되지만, 어떤 민족은 그들이 만든 제도나 발명품으로 기억된다. 알파벳과 갤리선을 남긴 '장사꾼의 나라' 페니키아가 그렇다.
기원전 3천 년경, 시리아와 아라비아를 떠돌던 셈족의 일부가 특이하게도 해안에 정착해 바다로 눈을 돌렸다. 이들이 훗날 그리스인들에게 '페니키아인'이라 불린 사람들이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지중해 동부 해안,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이스라엘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페니키아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비블로스·시돈·티레 같은 여러 도시 국가의 연맹체를 가리킨다. 참고로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은 파피루스를 팔던 도시 비블로스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히타이트가 멸망하며 이집트가 약화되자, 강대국 틈에 끼여 있던 페니키아에 기회가 찾아온다.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뒤 무주공산이 된 지중해는 사실상 페니키아의 세상이 되었다.
지중해를 집 앞마당처럼
페니키아가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자원이 있었다. 천연 항구가 많았고, 노와 돛을 결합한 갤리선을 만들 최고급 목재가 있었다. 바로 레바논 산맥에서 자라는 '백향목(레바논 삼나무)'이다. 백향목은 40미터까지 곧게 자라고 물에 잘 썩지 않으며 충격에도 강해 선박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나무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등장하고, 지금도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천연 항구와 백향목 선박, 뛰어난 항해술과 상업 감각으로 페니키아는 지중해 물류를 장악했다. 키프로스에서 구리를, 이집트에서 곡물과 파피루스를, 멜로스 섬에서 흑요석을 들여와 되팔았고, 소금과 올리브·포도를 중계 무역했다.
금보다 귀했던 자주색
페니키아의 특산품은 자주색 염료였다. '페니키아'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인들이 그들을 '자색의 사람'이라 부른 데서 왔다. 이 염료는 해안의 뿔고둥 내장에서 추출했는데, 1만 개의 뿔고둥에서 단 1그램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햇빛에도 물에도 변색되지 않고 오히려 색이 밝아져 금보다 귀하게 취급되었다.
⊹ 비유로 이해하기
이 자주색은 '티리안 퍼플'이라 불리며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왕과 귀족, 중세의 추기경이 이 색을 둘렀다. 추출에 막대한 시간과 기술이 드는 한정 생산품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아무나 살 수 없는 최고급 명품 라벨에 가깝다. 그 제조 비법은 비잔틴 제국으로 흘러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권력의 상징색이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레드 카펫'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특산품은 유리였다. 로마 작가 플리니우스는 페니키아인이 최초로 인공 유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모래 위에서 소다회와 모래가 우연히 반응해 투명한 물체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다만 실제 최초의 유리 제조는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페니키아의 공은 이를 널리 상용화한 데 있다.
알파벳 — 노동 계급이 만든 문자
페니키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알파벳이다. 무역으로 신용 거래를 하다 보니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한 이들은, 22개 자음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를 만들어 거래처에 보급했다. 이집트 상형문자나 수메르 쐐기문자가 수백·수천 개의 기호를 소수 엘리트가 독점했던 것과 달리, 알파벳은 스무 개 남짓의 기호만 알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열린 체계였다. 엄밀히 말하면 페니키아 문자는 모음을 적지 않고 자음만 표기하는 '아브자드'로, 모음까지 갖춘 '진정한 알파벳'은 이를 받아들인 그리스인이 모음을 더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흥미롭게도 알파벳의 뿌리 자체가 엘리트가 아닌 피지배 노동 계급의 손에서 나왔다. 가장 오래된 알파벳은 시나이반도에서 발견된 원시 시나이 문자로,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셈족 광부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된 노동 속에서 단 열두어 개의 기호로 말을 표현하는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문자가 레반트로 전파되자 페니키아인들이 그 실용성을 알아보고 더욱 추상화해 페니키아 알파벳을 완성했다. 이후 페니키아 알파벳은 모음이 더해진 그리스 알파벳으로, 다시 로마자로 변형되어 법·민주주의·문학·철학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한편 페니키아는 약 30곳의 거점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다. 티레가 본떠 만든 일종의 '프랜차이즈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훗날 로마와 자웅을 겨룰 만큼 성장한다. 또 스페인 남서부의 카디스(당시 가디르)는 최초의 서유럽 도시이자 훗날 콜럼버스 항해의 출발점이 된다.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인이 기원전 600년경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전설도 기록으로 남겼다.
제7장이스라엘 — 자연 밖의 신을 믿은 민족
가나안 땅에는 서부 셈족이 살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두 민족이 페니키아인과 히브리인이었다. 둘은 사는 지역도, 언어도, 외모도 비슷해 겉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종교다.
당시 서아시아 사람들이 자연의 힘을 신으로 숭배한 것과 달리, 이스라엘이 섬긴 신 야훼는 자연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신이었다. 자연 안에 깃든 신이 아니라, 자연 밖에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신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야훼에게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오직 야훼만 섬기고 그가 내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노력 자체가 곧 민족 정체성이 되었다. 이는 동시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다신교 사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페니키아와의 동맹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자리 잡은 히브리인들은 필리스틴(블레셋) 침입자들과 싸우면서 강력한 구심점의 필요를 느껴 부족 연합에서 중앙집권 왕정으로 전환한다. 초대 왕 사울에 이어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으며 전성기가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의 관계다. 다윗이 주변 경쟁 세력을 정리하자 페니키아는 뜻밖에 경쟁자가 사라지는 이익을 얻었고, 두 나라는 거대한 경쟁자가 되기는커녕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맺는다. 그 절정이 솔로몬 시기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할 때 페니키아의 티레가 백향목과 건축 장인, 뛰어난 선원을 보냈고, 그 대가로 대량의 밀과 올리브유를 받았다. 두 나라는 홍해의 구리 광산을 공동 개발하고 조선소를 함께 운영하며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그러나 페니키아 경제 벨트로 부유해진 솔로몬은 말년에 흔들린다. 지나친 사치로 재정이 휘청였고, 무역을 위해 주변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이방의 신들이 이스라엘로 흘러들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은 둘로 나뉜다. 북쪽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북이스라엘, 남쪽은 예루살렘의 유다 왕국이다. 단일 왕정 시대는 한 세기를 가지 못했다.
⊹ 비유로 이해하기
페니키아의 자극적인 다신교 의례와 이스라엘의 금욕적 율법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에게 페니키아의 풍요 의례는 '타락'의 상징이었다. 이는 마치 한 동네에 정반대 생활 윤리를 가진 두 공동체가 이웃해 살면서, 한쪽이 다른 쪽의 문화 유입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상황에 가깝다. 그럼에도 바알 신앙은 이스라엘 내부로 스며들었고, 구약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야훼를 잊고 우상숭배에 빠진 탓'으로 설명한다.
제8장아시리아 — 공포로 세운 최초의 제국
메소포타미아·레반트·이집트를 역사상 최초로 통일한 제국은 아시리아다. 정확히는 그 마지막 단계인 신아시리아 시기다. 신아시리아는 철제 무기와 기마병, 그리고 최초의 정규 상비군으로 빠르게 주변국을 점령하고, 점령지 주민을 잔혹하게 다룬 것으로 악명 높다.
아시리아인은 태양신 아슈르를 수호신으로 섬겨 도시를 아수르라 불렀다. 서아시아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계 무역으로 성장했으나, 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와 미타니 왕국의 속국을 거치며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침체를 벗어나 다시 정복에 나서면서 신아시리아 시기가 열린다.
잔혹함을 자랑한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때부터 아시리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국가'로 이미지가 굳는다. 그는 점령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본보기로 살가죽을 벗기거나 해골탑을 쌓는 등 온갖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자랑스럽게 기록과 부조로 남기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에 공포를 심으려는 의도였다. 왕궁 벽 부조에는 전쟁 승리 장면과 잔혹 행위가 새겨졌는데, 매년 속국들을 수도로 불러 충성 맹세를 받을 때 이 그림을 보여주며 "너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삼았다.
흥미롭게도 아시리아는 다른 도시는 모두 파괴해도 바빌론만큼은 보존하려 했다. 수메르 이래의 고등 문명과 종교·행정·법률이 전해지는 '세계의 중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아시리아는 이 도시로부터 문화를 공급받으며 성장했기에 차마 같은 취급을 할 수 없었다.
군사 개혁이 만든 제국
끝없는 침체기를 끊은 인물이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다. 군사 쿠데타로 즉위한 그는 대규모 군사 개혁을 단행해 아시리아를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바꿔놓았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군사 개혁
-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 곧 대규모 상비군을 편성하고 전투복과 철제 무기를 지급했다.
- 전차 대신 기병의 강점을 알아보고 대규모 기병 군단을 창설했다. 기병은 기동성에서 전차를 압도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 기병과 전차가 빠르게 움직이도록 도로망을 정비하고 역참을 신설해 통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 전투 부대와 지원(병참) 부대를 처음으로 구분하고, 공성 무기를 도입했다.
- 반란 여지가 있는 도시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대규모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3세기 동안 강제 이주된 인구가 4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개혁으로 아시리아의 영토는 순식간에 확장되어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서아시아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다만 서아시아에서 처음 등장한 이 규모의 제국이었기에, 참고할 선례 없이 그저 중앙집권에 집착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도서관을 세운 정복자, 그리고 멸망
아시리아 최전성기를 이끈 아슈르바니팔은 정복자이자 문화 군주였다. 그는 여러 언어를 공부하고 제국 전역에서 점토판을 수집해 니네베에 세계 최초로 장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도서관을 세웠다. 1850년 이 도서관이 발굴되면서 점토판 3만여 점이 쏟아져 나왔는데, 에누마 엘리시와 길가메시 서사시, 각종 사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깊이 알게 된 것은 상당 부분 이 도서관 덕분이다.
그러나 제국은 빠르게 무너졌다. 넓은 영토를 관리할 체계를 끝내 만들지 못했고, 군대의 잔혹함이 피정복지의 단결을 부르고, 그 단결이 반란으로, 반란 진압이 국력 소모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대규모 강제 이주는 본토 인구를 넘치게 만들었고, 생산력이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여기에 장기간의 가뭄이 겹쳤다. 결국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했고,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나는 호전적인 아시리아를 폐허로 만들었다. 아시리아는 오랫동안 모든 민족을 지배하고 주민들을 피 흘리게 했으나, 나는 그 멍에를 떨쳐버렸다. — 아시리아 정복 후 신바빌로니아 왕 나보폴라사르가 남긴 기록의 취지
다만 아시리아인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이란 북서부 등에 약 300만~400만 명의 아시리아인이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제9장신바빌로니아 — 바빌론의 마지막 영광
많은 이들이 '탐욕과 죄악의 도시'로 바빌론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상당 부분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바빌론은 우상숭배가 팽배하고 세속적 유혹으로 가득한 환락의 도시였고, 요한계시록은 바빌론을 '큰 음녀'로 표현했다. 인류 베스트셀러에 그렇게 박제되면서 바빌론은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실제 바빌론은 고대 서아시아의 중심 도시로서 오랫동안 지식과 예술, 고도의 사회 체계와 법률을 공급한 '문명의 배터리'였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바빌론 학자들의 자료를 참고했고, 헤로도토스는 직접 방문해 "바빌론을 능가하는 도시는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물론 유대인들의 묘사처럼 사치스럽고 방종한 면모도 있었다. 역사가 유구한 만큼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였던 셈이다.
천 년 만의 부활
고바빌로니아 멸망 후에도 바빌론은 중심 도시의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카시트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거쳐갔지만, 이들은 독자적 문화를 만들기보다 바빌로니아의 거버넌스와 종교, 법률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그렇게 천 년이 흐른 뒤, 칼데아인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마침내 신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아시리아를 멸망시킨다. 나보폴라사르가 독립을 선포했고,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함무라비와 더불어 바빌로니아 최고의 왕으로 평가받는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레반트를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고, 특히 건축과 선박에 쓰이는 최상급 레바논 삼나무를 독점했다. 그는 황폐해진 아시리아를 방치한 채 오직 수도 바빌론을 개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았다. 거대한 도시가 곧 자신의 권력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시리아가 점령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강제 이주시킨 것과 달리, 네부카드네자르는 포로들을 대규모 건설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이슈타르 문, 공중정원, 그리고 바벨탑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을 대표하는 세 건축물이 있다. 이슈타르 문, 공중정원, 그리고 바벨탑의 원형으로 알려진 에테메난키다.
이슈타르 문은 수호의 의미를 지닌 푸른색 벽돌로 지어졌다. 진흙 벽돌에 코발트를 더해 높은 온도로 구워, 마치 영롱한 청금석처럼 보이게 만든 당시 최첨단 세라믹 기술의 결정체다. 문을 지나는 길에는 마르두크를 상징하는 용, 아다드를 상징하는 황소,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사자가 장식되어 있어, 주민에게는 신들의 위엄을, 적에게는 공포를 주는 용도였다. 현재 이 문은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정원이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공중이라 해도 될 만큼' 높이 솟아 있다는 뜻이다. 계단식으로 올라간 테라스마다 메디아에서 가져온 나무와 꽃이 가득했고, 인공폭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고 한다. 향수병에 걸린 메디아 출신 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발견된 유적이 공중정원이 아니라 창고나 감옥일 것으로 보며, 실제 존재 여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에테메난키는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의 거대한 지구라트로, 성경 속 바벨탑의 원형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7,50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약 30층 빌딩 크기였다. 발견된 비문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말을 함으로써 무질서에 빠져 탑의 건축을 포기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바빌론이 당시 수메르어·아카드어·아람어를 쓰는 노동자들이 뒤섞인 '문명의 용광로'였음을 보여준다.
⊹ 비유로 이해하기
성경에서 탑을 높이 쌓는 것은 신에 대한 불손이자 오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인에게는 정반대였다. 신전을 최대한 높이 올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최고의 숭배 행위였다. 실제로 '바벨'은 히브리어로는 '혼돈'이지만, 아카드어로는 '바빌림', 곧 신의 문을 의미한다. 같은 건축물이 한쪽에서는 오만의 상징으로, 다른 쪽에서는 경건의 상징으로 정반대로 읽힌 셈이다.
마지막 왕, 그리고 페르시아의 입성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막대한 황금을 쏟아부어 바빌론을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았지만, 그의 사후 신바빌로니아는 급격히 빛을 잃는다.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 대신 달의 신 '신(Sin)'을 향한 신심이 깊어 사제 계급과 갈등했고, 아들에게 나라를 맡긴 채 아라비아 사막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민심이 곤두박질치는 사이,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으로 진격한다. 불만이 쌓인 주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었다는 기록과, 키루스가 강물을 빼내 침투했다는 기록이 함께 전한다. 어느 쪽이든 신바빌로니아는 한 세기를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제10장페르시아 — 관용으로 다스린 대제국
고대 페르시아 제국 하면 보통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기원전 550~330년)를 떠올린다. 최전성기에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친 영토를 다스렸다. 오늘날의 불가리아·튀르키예·시리아·이집트·이라크·이란·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등이 하나의 왕조 아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존속 기간은 200여 년에 불과했지만, 이 왕조가 남긴 여파는 엄청났다.
속국에서 시작한 자수성가
아케메네스 왕조를 대제국으로 키운 인물은 키루스 2세다. 그는 자그마한 파르스 지역에서 출발해 메디아·리디아·신바빌로니아·엘람 등 대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제국의 중심 영토를 마련했다. 메디아를 정복할 때는 외할아버지인 메디아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리디아 정복 때는 리디아 최강 기병에 맞서 낙타 부대를 앞세웠다. 말들이 낙타의 낯선 냄새에 놀라 도망친 틈에 궁병이 화살을 퍼부어 승리한 일화가 유명하다.
⊹ 비유로 이해하기
키루스의 성취가 특별한 이유는 정복 자체보다 통치 방식에 있다. 이전의 아시리아는 공포로 다스리다 끝없는 반란 진압에 국력을 소진했고, 신바빌로니아도 포로를 끌고 오는 공포 통치를 했다. 키루스는 정반대로 갔다. 피정복지의 자치를 최대한 허용하고 고유의 풍습과 신앙을 인정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키루스를 '운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으로 군주가 된 인물'로 꼽았다. 무력으로 제국을 만들었지만, 다스릴 때는 무력이 아니라 덕을 사용한 셈이다.
키루스는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뒤 바빌론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기원전 538년 모두 해방시키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도왔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유대계가 아닌 임금을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칭송했다.
키루스 원통 — '인권 선언'인가
키루스의 통치 이념은 1879년 발견된 '키루스 원통'에 새겨져 있다. 정복지의 신상을 각 신전으로 돌려보내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내용이 담겨, 흔히 '인류 최초의 인권 선언문'으로 불린다.
사트라프 — 제국을 묶은 행정 시스템
키루스의 진짜 업적은 관용을 이념에 그치지 않고 제도로 구현한 데 있다. 바로 사트라프 제도다. 제국 전역을 여러 행정 구역(사트라피)으로 나누고, 지방 총독(사트라프)을 파견하되 각 지역 고유의 종교와 관습을 깨뜨리지 못하게 한 제도다. 사트라프와 중앙정부 사이에는 효율적인 우편·도로 시스템이 갖춰져, 세금 납부와 군대 소집의 의무는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이 제도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셀레우코스·사산 왕조까지 흔적이 이어진다.
다리우스 1세 — 제도와 도로의 황제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 왕위는 우여곡절 끝에 다리우스 1세에게 넘어간다. 다리우스는 즉위 후 3년간 무려 19번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지만, 이를 모두 평정한 뒤 제국 내부를 정비하는 데 집중했다.
다리우스 1세의 제국 통합 3종 세트
- 행정 — 키루스의 사트라프 제도를 보완해, 총독에게 전권을 주지 않고 행정·사법·재무·군사를 분리했다. 여기에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관을 따로 파견해 총독을 감시했다.
- 도로 —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약 2,700킬로미터의 '왕의 길'을 깔았다. 걸어서 석 달 걸리던 거리를 말을 타고 일주일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어, 명령 전달과 군대 파견, 교역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 화폐 — 리디아의 화폐 문화를 받아들여 금화 다릭과 은화 시글로를 발행했다. 금화는 오직 왕만 발행할 수 있었다. 화폐 경제가 활발해지며 초기 형태의 은행도 등장했다.
다리우스는 공용 문서의 언어로 페르시아어가 아닌, 당시 서아시아의 국제어이던 아람어를 채택했다. 정복민에게 언어를 강요하지 않고 기존 언어를 그대로 쓰게 한 덕분에 제국 안에서 수많은 언어가 공존했다. 종교의 자유도 허락해 유대인·그리스·이집트 각자의 신앙과 신전 건설을 인정했으며, 금전 지원까지 했다.
조로아스터교 — 선과 악의 이원론
다리우스 자신은 신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이 종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고 전하며, 세상을 선과 빛의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본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바탕으로 한 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이원론적 일신교'라 부른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을 중시했다. 선과 악의 전장인 이 세상에서 인간은 매 순간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올바름(아샤)을 택하면 선한 신의 편에 선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 선한 자는 천상의 행복을, 악한 자는 지옥의 불길을 맞는다고 보았다. 이 윤리적 신앙 체계는 보편 도덕을 요구하기에,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을 제국 통합 이데올로기로 안성맞춤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사후 심판·천국과 지옥 같은 관념은 이후 등장하는 여러 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페르세폴리스와 그리스 전쟁
다리우스는 기원전 518년 파르스 지역에 의례용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의 폴리스'라는 뜻으로, 노예가 아니라 전문성에 따라 봉급을 받는 유급 노동자를 동원해 지었다. 아시리아·이집트·그리스 양식이 뒤섞인 이 도시는 정복지 문화를 흡수해 융합하는 페르시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리우스에게도 치명적 실패가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정벌, 곧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이오니아 지방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반란에서 비롯된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중장보병의 창의적 전술에 대패한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3차 침공에 나서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테네를 불태우지만, 살라미스 해전 패배로 결국 후퇴한다. 기원전 478년 그리스 정벌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이 전쟁의 여파로 페르시아는 에게해 제해권을 잃고 아테네가 강성해진다.
제국의 끝,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유산
크세르크세스 1세 사후 제국은 파벌 다툼과 왕위 찬탈의 연쇄에 빠진다. 그리고 기원전 334년, 그리스 전체를 통합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 영토에 등장한다.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는 이소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패하고 도망치다 부하에게 암살당했으며, 기원전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한다.
지나가는 이여, 나는 페르시아 제국을 세우고 아시아의 왕이 된 키루스다. 그러니 이 작은 무덤을 시기하지 말라. — 스트라본·아리아노스 등 그리스 사료가 전하는 키루스 무덤 비문의 취지
키루스를 롤모델로 삼았던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무덤 앞에 섰다는 일화가 전한다. 키루스가 남긴 통치의 밑그림 — 관용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걸맞은 제도 — 은 훗날 로마 제국에 차용되었고, 페르시아가 창조한 융합 문명은 중동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맺음말2500년을 관통한 하나의 질문
수메르에서 페르시아까지, 약 2,500년의 시간을 한 흐름으로 따라왔다. 등장한 민족과 왕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이 긴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협력하게 할 것인가.
수메르는 운하를 함께 파며 그 답을 처음 찾았고,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약속으로 이를 지탱했다. 바빌로니아는 법으로 복수의 상한선을 정했고, 페니키아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알파벳으로 신용을 기록했다. 아시리아는 공포로 묶으려다 무너졌고, 페르시아는 관용으로 묶어 200년을 버텼다. 협력의 방식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 모든 실험의 결과물 — 문자와 법, 화폐와 도로, 종교와 신화 — 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이 땅을 차지한 정복자들은 대부분 결과적으로 수메르 문명의 전파자가 되었다. 다양한 민족이 수메르인이 만들어놓은 문자·관료제·종교·법률·건축을 그대로 쓰면서, 그 생활 방식을 후대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메소포타미아가 만든 거버넌스와 종교, 신화는 혼란기를 건너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 문명으로 이어졌다. 진흙 위에 새긴 첫 글자가, 오늘 우리가 쓰는 알파벳과 법, 화폐와 도시의 가장 먼 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