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고대 그리스 · 정치사

아테네 민주정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왕이 사라진 자리에 귀족이 들어섰고, 귀족의 독점에 평민이 균열을 냈다. 드라콘의 성문법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행정 개혁까지, 약 200년에 걸쳐 한 도시가 사람이 아닌 제도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실험에 도달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차례
  1. 아테나가 도시의 수호신이 되기까지
  2.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이 들어서다
  3. 교역과 전쟁이 평민의 머리를 키우다
  4. 킬론의 쿠데타 — 민중이 자기 힘을 느끼다
  5. 드라콘의 법 — 피로 쓴 첫 성문법
  6. 솔론의 개혁 — 빚을 지우고 계급을 다시 짜다
  7. 페이시스트라토스 — 참주가 솔론을 완성하다
  8. 화폐의 도입과 추상적 사고의 탄생
  9. 클레이스테네스 — 혈연을 거주지로 바꾸다
  10. 민주정의 한계, 그리고 남긴 것
세 편 시리즈 중 1편 · 민주정의 형성 / 2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3편 펠로폰네소스 전쟁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는 약 2,500년 전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에서 처음 현실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어떤 사상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테네 민주정은 토지와 빚, 전쟁의 방식, 돈의 발명, 계급 간의 오랜 줄다리기가 얽혀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이 글은 그 형성 과정을 시간 순서로 따라간다.


01아테나가 도시의 수호신이 되기까지

이야기는 그리스 본토에서 에게해 쪽으로 뻗은 아티카(Attica) 반도에서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이 땅을, 전설에 따르면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뱀인 케크롭스(Kekrops)가 통일했다고 한다. 그는 360여 개의 씨족을 30개 혈족으로, 다시 그것을 네 개의 부족으로 묶어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의 주민들은 주로 이오니아(Ionia) 방언을 썼다.

새 왕국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두 신이 경쟁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전쟁·지혜의 여신 아테나였다. 둘은 시민들 앞에서 각자의 선물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포세이돈은 호수를,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약속했다. 그런데 바다의 신이 만든 호수는 너무 짜서 식수로 쓸 수 없었다. 시민들은 아테나를 선택했고, 이때부터 이 도시는 아테네(Athene)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아테네가 올리브와 포도로 유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시의 가장 높은 바위 지대는 처음에 초대 왕의 이름을 따 불리다가, 훗날 아크로폴리스(Akropoli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크로'는 가장 높은 곳, '폴리스'는 도시를 뜻한다. 그리스는 영토의 약 75퍼센트가 산지였던 탓에 거대한 제국이 들어서지 못하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점점이 세워졌다. 이 폴리스들은 저마다 높은 바위 지대에 신전을 세워 숭배했고, 전쟁이 나면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초기 아테네는 평범한 중소 국가였다. 미노아 문명기에는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로스에게 청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할 만큼 약소했고, 미케네 왕국이 트로이와 전쟁을 치를 때는 곁다리로 참여하는 정도였다. 다만 생명력만은 유난했다. 기원전 12세기 도리아인(Dorians)이 침입해 미케네 문명이 무너지고 그리스인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아테네만큼은 온전한 국가를 유지했다. 그 덕에 난민이 대거 유입되어 인구가 늘었고, 도리아인이 가져온 철기 기술로 농업 생산량도 늘었다.

02왕정이 무너지고 귀족이 들어서다

늘어난 부는 곧 문제를 낳았다. 부가 소수에게 쏠리면서 계급 간, 부족 간 갈등이 깊어졌고, 그 부가 왕이 아니라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흘러들었다. 케크롭스 이래 이어진 왕들은 이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왕정이 폐지되고, 여러 귀족이 나라를 다스리는 과두정(寡頭政)이 들어섰다.

당시 귀족 출신의 집정관을 아르콘(Archon)이라 불렀다. 초기 아르콘은 왕과 다름없는 1인 종신직이었으나, 여러 변화를 거쳐 기원전 683년 마침내 임기 1년의 아르콘 아홉 명 체제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종교·군사·재판 분야를 나누어 담당했다. 아르콘은 명예직이라 따로 보상이 없었고, 그래서 재력이 없는 평민은 넘볼 수조차 없는 자리였다.

아르콘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를 마친 아르콘은 은퇴 후 자동으로 이 원로 모임에 등록되었다. 아레오파고스는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사이의 작은 언덕을 가리킨다.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법정과 회의장이 이곳에 있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아르콘을 선출·감독하고 국가의 중대 사안을 결정했으며,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한마디로 귀족 정치의 심장이었다.

비유로 이해하기

초기 아테네의 권력 구조는 오늘날의 회사 이사회와 비슷하다. 아레오파고스는 종신 임원들로 구성된 상설 이사회이고, 아르콘은 1년짜리 전문경영인이다. 그런데 이사회 진입 조건이 '무보수로 1년을 일할 수 있는 재산'이었으니, 사실상 부자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 클럽이었던 셈이다.

03교역과 전쟁이 평민의 머리를 키우다

이 귀족 과두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출발점은 식민시(植民市) 확장이었다. 인구가 늘고 농기구가 발달했지만, 그리스에는 애초에 농지가 될 만한 땅 자체가 모자랐다. 한정된 농지의 식량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은 기원전 750년경부터 약 2세기 동안 소아시아·시칠리아·이탈리아 남부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식민 도시의 토지는 본토보다 비옥해 농업 생산량이 많았다. 아테네는 이들과 장거리 교역을 시작했다.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만들어 식민시에 수출하고 식량과 자원을 사 왔다. 이때 도기 산업도 함께 발달했다.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을 그리스 특제 항아리 암포라(Amphora)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교역과 상공업이 발달하자 사회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바뀌었고, 귀족이 아닌 평민 중에서도 부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적인 변화의 밑밥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평민의 목소리를 키운 결정적 계기는 전쟁이었다. 식민시 정책만으로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없던 폴리스들은 더 좋은 땅을 두고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예전에는 청동 갑옷과 비싼 말을 살 수 있는 귀족 중심으로 전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보병 중심, 머릿수와 전술 중심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도기를 대량 생산하던 기술력이 군수 산업으로 옮겨가, 무기와 갑옷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돈을 모은 상공업자와 중소 농민도 중무장을 하고 전쟁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업 군인이 없던 아테네에서는 농민이나 상인이 생업을 하다가도 언제든 전쟁에 동원될 수 있었다. 각 폴리스는 중무장 보병의 밀집 대형을 전술로 채택했다. 귀족과 평민이 섞여 같은 대형에서 싸우다 보니, 특출난 개인이 아니라 '전체 속의 개인'이 중요해졌다. 이 때문에 평민, 특히 재산을 갖춘 시민들 사이에서 '권리'라는 관념이 싹텄다. 똑같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는데 왜 귀족만 특혜를 누리는가 — 이것이 핵심이었다.

사실 아레오파고스 회의 아래에는 시민 총회인 민회(民會, Ekklesia)가 있었다. 농민과 상공업자 등 평민들이 여기 속했지만, 주로 귀족들이 정한 법을 통과시키는 거수기 역할만 했다. 거부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이 민회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04킬론의 쿠데타 — 민중이 자기 힘을 느끼다

여전히 아테네는 귀족정이었고, 귀족들은 정치 권력뿐 아니라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민중이 자신의 힘을 깨닫는 사건이 벌어진다. 킬론(Kylon)의 쿠데타였다.

킬론은 아테네 귀족 출신으로 올림픽 우승자였고, 아내는 이웃 메가라(Megara)의 공주였다. 그는 자신의 집안과 처가를 등에 업고 아테네의 참주(僭主), 즉 독재자가 되려는 꿈을 꿨다. 쿠데타를 위해 지지자를 끌어모으고, 결정적으로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은 평민들을 끌어들였다. 쿠데타를 일으키면 평민 지도자가 호응해 주기로 약속했다.

기원전 630년경, 킬론은 장인인 메가라 참주 테아게네스에게서 군대를 빌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순식간에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데 호응하기로 했던 평민 지도자가 배신했다. 오히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한 킬론을 내쫓아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다. 아테네 전 시민이 몰려와 킬론과 그의 군대를 포위했다.

포위가 길어지자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고, 킬론은 혼자 몰래 탈출해 버렸다. 리더를 잃은 병사들은 사형 외의 처벌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약속은 거짓이었다. 병사들이 항복하자 아테네인들은 그들을 몰살했다. 심지어 아테나 여신상 밑에서 살려 달라 비는 병사마저 죽였다.

이 진압을 총괄한 이는 수석 아르콘이자 최고 명문가 알크마이온(Alkmaionidai) 가문의 메가클레스였다. 그가 바로 신전 안으로 도망친 킬론 병사들을 죽이라 명령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명령이 화근이 되었다. 신전 안에서 피를 본 것은 아테나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아테네인들은 여신의 미움을 사 도시에 화가 닥칠까 두려워했고, 결국 메가클레스와 알크마이온 일가 모두를 '오염(미아스마)'이라는 이름의 형벌로 아테네에서 추방했다.

이 사건에서 평민들은 자신들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군대를 동원해 아테네를 차지하려던 독재자를 다수의 힘으로 물리쳤고, 절대 권력을 가진 듯 보였던 유력 가문이 추방당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 아테네 시민의 정치적 주체성은 분명히 달라졌다.

참고로 쫓겨난 알크마이온 가문은 나중에 복귀해 약 200년간 아테네 정치의 핵이 된다. 뒤에서 보겠지만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한 클레이스테네스가 이 가문 사람이었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외가도 알크마이온이었다.

빈민과 노예의 증가

킬론의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불안했다. 부유한 평민의 불만에 더해, 빈민과 노예 계급의 증가가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빈민은 주로 농민층에서 나왔다. 농민 중 소수는 자영농이었지만 대부분은 귀족에게서 농경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이었다. 문제는 토지 대여비가 매우 비쌌다는 점이다. 소작농은 한 해 소출의 6분의 1 이상을 귀족에게 지불해야 했고, 높은 소작료 탓에 가난한 농민은 굶는 일이 잦았다.

농지를 빌릴 수조차 없는 이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귀족에게 빌렸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가족과 본인이 노예가 되어야 했다. 반면 귀족들은 출신 덕분에 부유한 생활을 이어갔다. 경제·정치·사회적 불평등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05드라콘의 법 — 피로 쓴 첫 성문법

불만이 표면화된 사건이 성문법 요구였다. 당시 아테네의 법은 문서로 작성된 성문법이 아니라, 오랜 세월 관행과 관습이 굳어진 관습법이었다. 문제는 귀족들이 이 관습법조차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귀족 재판관들은 소송이 생기면 언제나 귀족 편을 들었고, 그 사람의 지위나 뇌물에 따라 독단적으로 법을 해석했다. 억울함이 쌓이자 민중은 명시적인 법을 제정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전은, 사실 귀족들도 성문법을 원했다는 점이다. 킬론의 쿠데타를 겪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평민 지도자가 끝까지 호응했다면 귀족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민의 불만이 너무 높은 것도 위험했고,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명시적인 법도 필요했다. 또 귀족과 귀족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면 오히려 자의적 법 해석 때문에 시비를 가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귀족도 성문법을 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원전 621년,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이 제정되었다. 담당자는 당시 사법 분야 아르콘(테스모테테스) 중 한 명인 드라콘(Drakon)이었다. 그는 구전되던 법률을 성문화했고, 이 법을 드라콘 법이라 불렀다. 법전이 만들어지자 기대대로 귀족의 자의적 의사 결정과 고무줄 판결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법이 적용된다는 합의가 명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매우 초보적이지만 법에 의한 통치, 즉 법치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 법은 관습법을 그대로 문자화한 것일 뿐, 귀족의 이익 보호가 우선이었다. 게다가 명시된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 연설가 데마데스는 드라콘 법을 두고 잉크가 아니라 피로 쓴 법이라고까지 했고, 오늘날에도 잔혹한 법이나 판결을 '드라콘식'이라 부른다. 웬만한 죄에 전부 사형을 때려 버리니, 없이 살아 죄를 지을 확률이 높은 평민들은 도둑이든 살인자든 모두 똑같이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사람들은 아예 중죄를 저질러 버려 치안이 더 나빠졌다.

이렇게 진보와 퇴보가 뒤섞인 가운데 평민의 불만은 더욱 높아졌고, 이 불만을 이용해 참주가 되려는 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아테네인들은 토지 부족을 해결하려 살라미스섬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같은 목적의 메가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했다. 자원 부족, 정치적 권리가 없는 부유한 평민의 불만, 빚으로 늘어나는 빈민과 노예, 사형을 남발하는 가혹한 법, 그 틈을 노리는 참주 지망생들 —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06솔론의 개혁 — 빚을 지우고 계급을 다시 짜다

이 난국을 해결할 인물로 지목된 이가 그리스 일곱 현인 중 한 명인 솔론(Solon)이었다. 솔론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고, 철학자 플라톤의 외가 쪽 조상이라고도 한다. 그는 시인이자 존경받는 지식인인 동시에 상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를 각인시킨 것은 살라미스 사건이었다.

솔론은 무기력에 빠진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메가라로부터 살라미스를 탈환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양국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스파르타의 중재로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는데, 솔론은 특유의 박식함, 즉 문헌학·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메가라 대표를 논리로 제압했다. 살라미스가 완전히 아테네 영토가 되기까지는 한참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솔론 덕분에 영유권 분쟁을 우위로 끌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기원전 594년, 솔론은 모든 계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조정자 겸 수석 아르콘으로 뽑혔다. 흥미롭게도 그가 받은 지지의 의미는 계층마다 달랐다. 귀족들은 솔론이 왕가의 후예이니 고귀한 피가 흘러 자기들 편을 들 거라 생각했고, 신흥 부유층은 같은 사업가로서 자신들을 헤아려 줄 거라 믿었으며, 빈민층은 그가 양심 있는 사람이라 공정하게 개혁할 거라 보았다. 이 동상이몽 위에서 솔론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모든 부채를 제로로 — 세이사크테이아

솔론이 가장 먼저 한 개혁은 사회의 모든 부채를 제로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거운 짐 덜어내기'라는 뜻의 세이사크테이아(Seisachtheia)였다.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 빚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의 관념에서 빚은 곧 죄였다. 경제적 몰락이 곧 도덕적 몰락이었고, 채권자는 빚을 갚지 못한 이의 인신을 구속할 수 있었으며, 이 죄는 가족에게 전이되고 상속될 수 있었다.

훗날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의 죄의식이나 양심이 본래 정신적·영적인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빚진 자와 빚 준 자 사이의 물질적 채무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독일어에서 '빚(Schuld)'과 '죄(Schuld)'가 같은 단어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솔론이 사회의 모든 부채를 제로로 돌렸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 만연한 죄를 총체적으로 사면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부채로 노예가 된 시민을 모조리 해방시켰고, 인신을 담보로 한 대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담보로 압류당한 농경지를 돌려주었으며, 해외로 팔려간 노예들을 다시 사들여 자유를 주었다.

비탄에 잠긴 귀족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격하게 반발할 수 없었다. 지금 빈민층의 상태가 언제 세상을 뒤집어엎어도 이상하지 않은 데다, 솔론이 먼저 자신의 채권을 전부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참주정이 들어서 권리 전체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그저 투덜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빈민층이 만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왕 개혁할 거면 스파르타처럼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를 해 귀족의 토지 독점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채를 탕감해도 구조가 그대로면 다시 빚더미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솔론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또 다른 종류의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3의 길 — 산업 구조를 바꾸다

대신 솔론은 아예 제3의 길로 갔다. 전반적인 산업 구조를 바꿔 버린 것이다. 아티카 반도의 고질적 문제, 즉 척박한 농토와 부족한 수자원으로는 어떻게 해도 모든 아테네인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내린 특단의 해결책이 부족한 곡물을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국내에서 생산된 곡물, 가령 밀과 보리의 해외 수출은 금지했다. 주식인 곡물은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고 아테네인끼리만 써서 식량 수급을 확보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수출할 것인가. 바로 아테네의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올리브와 포도였다. 솔론은 올리브유와 포도주 가공 산업을 육성해 수출을 장려했고, 이것을 팔아 흑해 주변 곡창지대에서 곡물을 수입해 왔다. 귀족들은 수익을 얻으려면 주요 작물을 올리브와 포도로 전환해야 했다.

'생존을 위한 농업'에서 '황금 작물'로의 전환은 여러 효과를 낳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배 노하우가 쌓여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둘러싼 도기·조선·해운·상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소작농이 아니라 기름 짜는 인부, 배와 기계를 만드는 기술공, 도공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솔론은 모든 시민이 자식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해, 누구나 국가 주도 산업에 기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이때부터 아테네는 농업 중심 폴리스에서 바다와 교역에 의존하는 폴리스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해양 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다.

금권정 — 재산에 따라 권리를 차등하다

경제 개혁 이후, 솔론은 경제에 정치를 갖다 붙였다. 경제 수준에 따라 정치 참여를 차등한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금권정(金權政, 티모크라티아)이라 배운 것이다. 솔론은 시민을 재산에 따라 네 계급으로 나눴다.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아직 동전이 없었기에, 곡물·포도주·올리브유를 얼마나 소유했느냐로 재산을 평가했다. 재산에 따라 정치적 권리와 군사적 의무를 차등 규정했다. '가장 명예로운 자들의 통치'라는 뜻인데, 여기서 명예는 곧 재산이었다.

솔론의 4계급 (재산 기준) 곡물 환산 연 수입에 따라 정치적 권리와 군사적 의무를 차등 500석급 기사급 농민급 노동자급 (테테스) 500석 이상 기병 · 국고관리 300~500석 기병 · 아르콘 가능 200~300석 중무장 보병 200석 이하 경무장·노꾼 민회·배심원 혈통이 아닌 경제력으로 정치 공간이 처음 모든 시민에게 열렸다 — 다만 시민은 성인 남성만을 가리켰다 — 소수 다수
솔론은 출생이 아니라 재산을 정치 참여의 기준으로 삼았다. 위계는 그대로지만, 기준이 바뀌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각 계급을 간단히 살펴보자. 가장 높은 계급은 '500석급'으로, 곡물 500석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포도주·올리브유를 보유한 사람이다. 이들은 아르콘과 국고 관리직을 맡을 수 있었고 기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다음은 '기사급'으로, 말을 보유하고 연 수입이 300~500석인 사람이다. 기병 복무에 필요한 무장을 스스로 갖춘 이들이라 기사급이라 불렸고, 아르콘이 될 자격을 지녔다. 세 번째는 '농민급'으로 주로 자영농이 속했으며, 중하급 공직에 오를 수 있었고 중무장 보병으로 복무했다.

마지막 최하위는 '노동자급(테테스, Thetes)'이다. 연 수입 200석 이하의 빈민으로, 노 젓는 일이나 중무장 보병을 보조하는 경무장 보병으로 복무했다. 공직을 맡을 수는 없었으나 민회와 민중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금권정은 정치적 권한과 군사적 의무의 기준을 출생에서 재산으로 바꿈으로써, 정치 공간을 처음으로 모든 시민에게 열었다. 물론 여기서의 시민은 성인 남성만을 가리켰지만, 혈통으로 닫힌 사회를 경제적 능력에 열린 사회로 바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다만 이는 명목상 기준일 뿐, 사실상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이 재산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었기에 실제 권력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민회의 강화와 민중 법정의 신설

더 큰 실질적 변화는 오히려 민회의 강화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아테네는 아르콘 아홉 명과 아레오파고스 회의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민회는 그저 거수기 역할만 했다. 솔론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민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했다. 최하위 노동자 계급인 테테스도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민회에서 전쟁 여부, 함대 파견, 공공 건축, 외국인 시민권 부여 등의 안건이 상정되면, 주로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연설하고 의견을 냈다. 시민들은 그 연설을 듣고 찬반을 다수결로 결정했으며, 중요한 의결은 무기명 투표로 했다. 이 민회는 점점 힘이 커져 추후 민주정의 핵심 통치 기구로 부상한다.

물론 민회가 안건까지 내는 것은 아니었다. 솔론은 안건을 내는 기구를 따로 만들었다. 앞서 아테네는 네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솔론은 네 부족에서 제비뽑기로 각각 100명씩 선출해 400인 평의회를 만들었다. 세 번째 농민급까지 참여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사전 심의를 거친 안건만 민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아르콘 선출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전처럼 아레오파고스 회의에서 아홉 명을 뽑던 것에서, 네 부족이 각각 후보를 내고 그중에서 아홉 명을 추첨으로 뽑도록 했다. 정치가 인맥과 혈연이라는 인간적 유대로 돌아가지 않게끔 고안한 장치였다.

민회 기능이 강화되고 400인 평의회가 생기면서 아레오파고스의 역할은 줄었다. 솔론은 모든 범죄를 사형으로 귀결시키는 드라콘 법을 폐지하고, 각 범죄의 경중을 성문법으로 세세하게 정했다. 또 범죄가 발생하면 시민 누구나 피해자를 대신해 범죄자를 고발할 수 있게 했다. 또 하나의 혁신은, 아레오파고스 결정에 이의가 있을 경우 항소할 수 있도록 민중 법정을 따로 만든 것이다. 이 민중 법정은 최초의 배심원 법정으로, 최하위 계급 테테스도 참여할 수 있었다. 솔론은 6,000명의 시민 명단을 작성한 후 그중에서 추첨으로 배심원을 뽑아 사건을 맡겼다. 이 민중 법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사건을 다루며 나중에는 아테네 최고 사법 기관으로 거듭난다.

10년의 여행, 그리고 참주의 등장

개혁을 마치자 사방에서 개정 요구와 해석 문의가 빗발쳤다. 솔론은 자신이 아테네에 있으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 여겨, 10년간의 시행 기간을 설정한 뒤 해외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아테네인들이 새 환경에 적응하길 바라면서. (이 여행에서 솔론은 이집트 사제들로부터 순식간에 바다로 가라앉은 도시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10년 후 돌아온 솔론의 눈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시민들이 계급과 파벌로 찢어져 서로 죽일 듯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독점적 권리를 평민에게 열어 준 솔론에게 화가 나 있었고, 빈민들은 결국 금권정이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에게 유리하다고 여겨 불만이었다. 솔론의 개혁은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 갈등을 발판으로 참주가 등장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토지 균등 분배와 시민 완전 평등을 이뤄낸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비교하며, 솔론은 제한적 권력만 가졌기에 급진 개혁이 아닌 온건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솔론은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채 개혁을 추진했으며, 한쪽 계급의 지지로 권력을 강화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층 간 화해를 목적으로 양쪽의 압력을 견디며 중도를 걸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사회 갈등이 격화되고 참주정이 들어섰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은 실패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가 민주정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밑걸음이 되었다.

07페이시스트라토스 — 참주가 솔론을 완성하다

솔론이 떠난 후 그가 조성한 환경에서 아테네인들은 비교적 잘 지냈다. 문제는 그 평온의 유통 기한이 짧았다는 점이다. 5년째가 되자 곪았던 부분들이 하나둘 터지더니, 급기야 아르콘조차 뽑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시 5년이 흘러 솔론이 돌아올 무렵 아테네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갈등은 세 정치 당파로 가시화되었다. 귀족으로 구성된 평지당, 상인 중심의 해안당,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산지당이었다. 각 당은 삶의 터전 이름을 따 해당 계층의 이익을 대표했다. 평지당의 지도자는 정통 귀족 리쿠르고스(아테네 인물, 스파르타의 입법자와 동명이인), 해안당을 이끄는 사람은 킬론 쿠데타 때 신성모독으로 쫓겨난 메가클레스의 아들이자 동명이인인 메가클레스였다. 산지당을 이끄는 이가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였다.

산지당은 가난 때문에, 또 순수 시민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외된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자신은 귀족이었지만 이 약자 계층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에 이미지 메이킹과 여론 선동의 달인으로 명성을 높였다. 결정적으로 기원전 565년 메가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입지를 굳혔다.

세 번 도전 끝의 참주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561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민회에 나갔다. 그리고 암살 위협을 받고 있으니 호위 사병을 거느리게 해 달라고 연설했다. 마침 여행에서 돌아온 솔론은 그의 거짓을 간파하고, 사병을 허용하면 아테네가 정치가 아닌 무력으로 움직이게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영향력은 이미 솔론을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사병 보유 안건은 통과되었다. 처음 50명이던 몽둥이 무장 병력은 어느새 400명으로 불었고, 결국 솔론의 말대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기원전 561년 무력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해 스스로 참주가 되었다.

그러나 곧 평지당과 해안당의 연합에 쫓겨났다. 두 세력은 공동 목표를 이루자마자 갈라져 싸웠고, 지친 메가클레스가 다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끌어들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하라 제안했다. 그렇게 복귀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메가클레스의 딸을 멀리하자 화가 난 메가클레스가 평지당과 다시 연합해 그를 압박했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두 아들 히피아스·히파르코스와 함께 에레트리아로 망명했다.

두 번이나 쫓겨난 그는 이번에는 찬찬히 힘을 모으기로 했다. 10년간 광산 사업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이웃 국가 테베·아르고스와 관계를 다졌다. 기원전 546년, 모든 준비를 끝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군대와 테베·아르고스 군대를 합쳐 마라톤 평야에 집결한 뒤 파죽지세로 아테네로 진격했다. 메가클레스가 부랴부랴 군대를 모집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를 완전히 장악했고, 이후 죽는 날까지 거의 20년간 아테네를 통치했다.

비유로 이해하기

'참주(僭主, tyrannos)'라는 말은 원래 리디아 왕국에서 왕을 뜻하는 일반 호칭이었다. 그리스에 막 들어왔을 때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자'라는 가치중립적 의미였다. 그러나 점차 폭력과 정치 공작, 선동으로 권력을 잡고 사익을 추구하는 '나쁜 왕'이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 영어 '타이런트(tyrant, 폭군)'의 어원이다. 이는 아테네인들이 민주정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수록 왕정 그 자체를 나쁘게 보았기 때문에 생긴 변화다.

솔론보다 더 솔론답게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법을 없애고 독재를 위한 법을 만들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철저하게 솔론의 정신을 추구했다. 심지어 솔론보다 과감한 정책을 폈는데, 귀족의 재산을 빈민에게 나눠 준 것이다. 다만 솔론과 달리 시스템이 아닌 무력으로 집행했기에 아테네를 떠나는 귀족이 많았다.

그는 농민들에게 필요한 씨앗과 농기구를 빌려 주었고, 지방 농부도 도시민과 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순회 법정을 설치해 법관이 직접 농촌으로 가서 분쟁을 해결하게 했다. 솔론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 국가 주도로 상공업과 무역을 육성했고, 아테네의 고품질 도기가 외국으로 팔려나갔으며 조선 기술이 향상되어 해군이 강력해졌다. 흑해 교역로를 장악해 곡물 수급을 원활히 했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 사업을 벌여 아름다운 신전과 공공 건물을 세웠다.

무엇보다 페이시스트라토스 통치기에 아테네는 문화적으로 풍성해졌다. 다른 도시국가의 시인·작가 등 예술가들을 초청했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공인된 판본을 출판해 정식 교육 과정으로 채택했다.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 규모를 확대했고, 지방의 작은 축제였던 디오니소스 축제를 국가 규모로 키웠다. 이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서양 최초의 연극과 그리스 비극이 탄생했다. 이러한 문화 사업은 아테네 시민들이 스스로 '아테네인'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하게 했고, 서사시와 비극을 통해 올바른 삶과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행동 지침이 제시되었다. 이는 훗날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내면적 토대가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난 솔론과 달리, 아들 히피아스·히파르코스에게 권력을 물려줌으로써 세습 참주정의 시작을 알렸다. 장남 히피아스는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동생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라는 청년에게 반해 끈질기게 구애하다 위협을 느낀 하르모디오스와 그 애인에게 기원전 514년 암살당하면서 폭정으로 치달았다. 히피아스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암살 공포로 반대자를 모두 숙청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히피아스는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고, 이 일촉즉발의 상황은 해외로 쫓겨나 있던 아테네 귀족들, 특히 명문가 알크마이온에게 호재였다. 그들은 그리스 최강국 스파르타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마침 과두정을 유지하던 스파르타는 그리스 곳곳에 참주정이 생기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참이었고, 알크마이온 가문이 델포이 신전을 매수해 거짓 신탁을 내리게 함으로써 스파르타군을 움직였다. 알크마이온-스파르타 연합은 아테네로 진군했고, 히피아스는 힘 한번 못 써보고 떠났다. 그렇게 기원전 508년경, 2대에 걸친 아테네 참주정이 무너졌다.

08화폐의 도입과 추상적 사고의 탄생

히피아스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테네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인물이다. 그의 폭정 때문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깊게 엮였다는 점이 하나이고(이는 훗날의 질긴 악연으로 이어진다), 추방된 후 페르시아에 정착해 페르시아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이 또 하나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번째 의미, 즉 그가 아테네의 주조 화폐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최초의 주조 화폐인 동전은 기원전 6세기 리디아 왕국에서 만들어졌다. 금은 합금으로 주조되어 '일렉트론'이라 불렸고, 교역을 통해 그리스 본토에 전해졌다. 이후 히피아스 대에 이르러 아테네의 자체 주조 은화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주조 화폐 이전에는 물물교환이나 은덩이로 교환해야 했다. 물물교환은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의 소유자가 마침 내 물건을 원할 때에야 성립했고, 은덩이는 교환할 때마다 무게를 달아야 하는 데다 순도가 제각각이라 측정 전문가가 필요했다. 반면 주조 화폐는 정부가 공식 인증한 교환 수단이었다. 동전에 가치를 증명하는 인장을 박아, 법에 따라 강제로 유통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순도를 잴 필요 없이 같은 인장이 찍힌 동전은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물론 이는 정부의 권위가 높고, 정부가 화폐로 장난치지 않을 거라는 신뢰, 그리고 화폐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반드시 처벌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아테네의 은화는 드라크마(Drachma)라 불렸다. 앞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얼굴이, 뒷면에는 그녀의 상징인 부엉이와 올리브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었다. 드라크마는 질 좋고 신용 좋은 화폐로 정평이 나 나중에는 지중해 연안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돈이라는 추상성

그런데 주조 화폐 도입의 더 근본적인 변화는 외부 조건이 아니라 아테네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났다. 바로 높은 수준의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도 아테네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통해 현상 이면의 추상성을 공유했다. 천둥 번개가 치면 제우스를, 파도가 치면 포세이돈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돈'이라는 추상성이 더해졌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몇 드라크마가 필요할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이 계산에는 나의 욕구뿐 아니라 타인의 욕구도 포함된다.

19세기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성질을 '교환가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가 보기에 화폐는 그 자체로는 어떤 욕구도 채워 주지 못하는, 즉 사용가치가 없는 사물이다. 동전 한 닢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바로 그 쓸모없음 덕분에 쌀 한 가마니와 소 한 마리처럼 전혀 다른 것들을 서로 견주고 맞바꾸게 하는 매개가 된다.

이 사용가치가 없다는 점 때문에 화폐는 교환의 매개로 쓰일 수 있고, 모든 것을 동질적인 실체로 환산해 버린다. 쌀을 수확하고 소를 키우기 위해 흘린 피땀, 그 개인적 의미는 지워지고 '가격'이라는 보편적 가치만 남는다. 이처럼 질이나 개인적 의미를 양으로 환원하는 추상성 덕분에, 화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화폐가 시간을 초월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치 저장 기능이다. 화폐는 가치를 저장할 수 있어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게 한다. 썩어 없어질 곡물보다 돈을 모으려는 이유다. 이러한 추상성은 계산 가능성으로, 나아가 금융의 발달로 이어졌다. 예컨대 선원과 선장이 목숨 걸고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해 올 때, 그 거대한 불확실성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투자자가 나눠 짐으로써 위험을 분산하게 한다. 더 많은 선박이 아테네를 오가고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한편 화폐와 금융은 비록 초기 단계였지만 아테네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불러왔다. 하나의 경제권 안에서 일대일 관계는 공간을 초월한 일대다 관계로 확장되었고, 개인은 이해관계가 얽힌 익명의 사람들과 복잡한 관계망 속에 놓였다. 구체적 누군가를 일일이 고려하기 힘든 상황에서 개인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개인주의). 또 어디에 투자할지, 살 상품의 미래 가치가 어떻게 될지 고민하면서 자연히 합리성이 길러졌다. 이 합리성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발돋움하는 또 하나의 밑걸음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아고라는 공적 토론 장소인 동시에 장터였고, 이곳에서 아테네인들은 사물과 의견을 객관화하고 측정하면서 올바른 기준을 세우려 했다. 민주주의는 정치 구조일 뿐 아니라 경제 구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09클레이스테네스 — 혈연을 거주지로 바꾸다

참주 히피아스를 내쫓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사고라스와 알크마이온 가문의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가 정권을 두고 싸우게 되었다. 이사고라스는 아테네를 활보하는 스파르타인들을 방치한 채 귀족의 이익만 보호하는 데 급급해 민중의 반감을 샀다. 반대로 클레이스테네스는 차별화된 공약으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파르타를 쫓아내는 동시에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클레이스테네스가 실권을 장악해 기원전 508년 수석 아르콘으로 집권했다. 일반적으로 이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 부족을 해체하고 열 부족을 만들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개혁은 부족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혈연을 기초로 한 네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부족은 귀족의 혈연적 특권을 강화하는 체계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 구조를 뿌리부터 바꾸고자 했다. 그는 네 부족을 해체하고, 거주지를 기준으로 사회를 재편했다.

해체 후 남은 최소 단위는 데모스(Demos)라 불리는 작은 공동체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약 100여 개의 데모스를 거주지 기준으로 해안·내륙·도시 세 지역으로 나눴다. 그리고 각 지역에 트리티스(Trittys)라 불리는 중간 행정 구역을 여러 개 설치했다. 그다음 해안·내륙·도시에서 트리티스를 하나씩 뽑아 셋을 한 단위로 묶어 부족을 새로 조립했다. 이렇게 하면 기존 혈연 중심의 네 부족이 거주지 중심의 열 개 행정 부족으로 재탄생한다. 전통 기득권이 끼리끼리 해 먹을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부족 재편 혈연 4부족을 해체하고, 세 지역을 섞어 거주지 기반 10부족을 새로 조립했다 해안 지역 내륙 지역 도시 지역 트리티스(중간 행정구역) 트리티스 트리티스 하나의 행정 부족 해안 + 내륙 + 도시 트리티스 각 1개씩 = 1부족 이렇게 10부족을 만들자, 혈연으로 끼리끼리 해 먹을 가능성이 대폭 줄었다
혈연으로 묶인 4부족을 해체하고, 서로 떨어진 세 지역의 조각을 섞어 10부족을 만들었다. 출신 가문이 같은 사람들이 한 부족에 뭉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500인 평의회와 도편추방제

행정 구역 개편에 성공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 시절의 400인 평의회도 다시 구성했다. 기존 400인 평의회는 네 혈연 부족 체계에서 세 번째 계층까지만 한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이 아닌 열 개 행정 부족에서 계층과 상관없이 각각 50명의 대표를 제비뽑기로 뽑았다. 이렇게 구성된 평의회를 500인 평의회라 한다. 의원 임기는 1년으로 최대 두 번까지만 뽑힐 수 있었고, 범죄 같은 결격 사유가 없는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 참여할 수 있었다. 평민들은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정무 예심 기구인 500인 평의회에서 제출된 안건은 최고 의결 기구인 민회로 넘어갔다. 민회는 안건을 의결하고 수정·거부할 권한을 지녔으며,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아테네에서 민중(데모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가 출범했다.

다만 최고 행정관 아르콘은 여전히 솔론의 계급 체계에서 상위 두 계급에서 선출되었고, 전통 귀족 가문이 항상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원전 487년에 가서야 아르콘을 추첨으로 뽑게 되는데, 이때부터 아르콘은 예전만큼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대신 정치 권력의 핵심은 장군회로 옮겨가게 된다. 장군회는 각 부족에서 선거로 뽑힌 군사 위원회로, 식견과 경험이 많은 이들이 맡았기에 몇 번이라도 연임할 수 있었다. (훗날 페리클레스는 이 최고 장군 직을 여러 번 연임한다.)

마지막으로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Ostracism)를 살펴보자. 클레이스테네스가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제도는, 참주라면 치를 떠는 아테네인들이 참주정의 등장을 방지하려 만든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1년에 한 번 민회에서 도편추방제를 실시할지 투표했다. 이때 선동을 방지하기 위해 연설은 하지 않았다. 안건이 가결되면, 시민들은 다음 회합 때 국가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도기 조각에 써냈다. 6,000표 이상을 받은 사람은 10년간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다. 추방자는 10년 후 돌아와 묶였던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편추방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참주 출현 예방보다 선동에 의한 정적 제거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을 당했다. 이후 기원전 417년 알키비아데스가 정적을 도편추방으로 제거하자, 아테네 시민들은 부작용을 깨닫고 제도를 폐지했다.

사실 이 제도를 클레이스테네스가 도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시행 시기를 근거로 추정할 뿐이다. 클레이스테네스라는 인물의 생애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그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이콘인 것만은 확실하다. 현대 그리스에서 1992년 민주주의 탄생 2,500주년을 기념했는데, 그 기준점이 바로 클레이스테네스가 아르콘으로 집권한 기원전 508년이었다.

10민주정의 한계, 그리고 남긴 것

드라콘의 법 이후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로 이어지는 약 200년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기틀이 다져졌다. 그러나 이 민주정이 만개하는 것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일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최하 계층인 테테스가 노꼬리로 참전해 승리의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시리즈 2편에서 다룬다.)

다만 짚어둘 한계가 있다. 아테네 민주정에서 '시민'은 성인 남성만을 가리켰다. 여성, 아이, 노예, 거류 외국인은 인민에 포함되지 않았다. 클레이스테네스에서 페리클레스 시대로 넘어가는 50년 동안 아테네 인구는 7만 5천에서 15만으로, 최대 20~30만 명까지 늘었지만, 성인 남성 시민은 약 2~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거류 외국인은 자유인이었으나 시민권이 없었고, 노예는 농업·광업·제조업·가사노동을 담당하며 사회의 생산을 떠받쳤다. 여성은 투표권은커녕 남성 보호자 없이는 집을 나설 수도 없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상당 부분 노예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스위스의 고전학자 앙드레 보나르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정을 갓 자라난 젖니에 빗댔다. 언젠가 빠지고 더 단단한 이로 다시 나야 하듯, 그 시대의 민주주의도 한 번은 무너지고 새로 태어나야 할 미완의 것이었다는 취지다.

그럼에도 이 편협하고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시대 한계를 고려하면 무의미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위계 없는 다수 시민이라는 이례적 정체성으로 정치체를 만든 실험은 그 이전에 없었고, 아테네는 이 정체로 전성기를 누리기까지 했다. 이 정치 실험은 인류의 자산이 되었다. 이후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길항하며 로마 공화정을 거쳐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을 통과한 뒤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이어졌다. 민회, 평의회, 시민법정, 추첨제, 공직 수당제, 아테네식 시민 교육은 오늘날에도 민주정의 원형으로 연구되며 정치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한눈에 보는 흐름

왕정 폐지(귀족 과두정·아르콘·아레오파고스) → 킬론의 쿠데타(민중이 힘을 자각) → 드라콘 법(첫 성문법, 그러나 가혹) → 솔론(부채 탕감·산업 전환·금권정·민회 강화) → 페이시스트라토스(참주이나 솔론 노선 계승·문화 융성·화폐) → 클레이스테네스(혈연→거주지 부족 개편·500인 평의회·데모크라티아) →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민주정 만개

다음 편에서는 이 민주정을 단련시킨 거대한 외부 충돌,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마라톤·테르모필레·살라미스·플라타이아)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