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 통사
청동기 시대 지중해의 작은 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떻게 도시국가, 대제국, 봉건 영지, 종교 분열, 시민혁명, 산업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쳐 오늘날의 유럽으로 이어졌는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한다.
서양 문명의 뿌리는 흔히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크리스트교 세 갈래로 이야기된다. 이 보고서는 그 세 줄기가 어떻게 얽히며 약 5천 년에 걸쳐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짜였는지를 따라간다. 전공 지식이 없어도 읽히도록 핵심 개념마다 비유 상자를 두었고,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도식을 함께 실었다.
이야기는 지중해 동부, 에게해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에게해 한복판의 크레타섬에서는 강력한 왕권과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청동기 문명이 번영했다. 이 크레타 문명은 계단과 통로가 워낙 많아 미궁으로 불린 크노소스 궁전,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도기와 정교한 금은 세공품을 남겼다.
기원전 14세기에는 그리스 본토에서 남하한 미케네인이 에게해를 장악하며 미케네 문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문명은 철기를 다루던 도리스인의 침입을 받아 무너졌다.
그리스 본토는 산지가 많아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자연히 해안가의 좁은 평야를 중심으로 여러 부락으로 흩어져 살았고,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방어를 위해 높은 언덕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이것이 도시 국가, 곧 폴리스로 발전한다. 폴리스 중심에는 적이 쳐들어왔을 때 최후의 방어 거점이자 종교 활동의 무대이기도 했던 아크로폴리스가 있었고, 그 아래에 광장인 아고라가 펼쳐졌다.
그리스인은 정치적으로는 제각각 독립된 폴리스로 갈라져 있었지만,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강한 동족 의식을 공유했다. 4년마다 열린 올림피아 제전은 운동 경기와 연설, 제우스 신에 대한 제사를 통해 그 결속을 다지는 자리였다.
폴리스는 오늘날로 치면 살림과 행정을 독자적으로 꾸리는 작은 자치 도시에 가깝다. 도시마다 살림은 따로 차리지만, 같은 언어와 종교라는 거대한 동호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는 셈이다. 올림피아 제전은 그 동호회의 정기 총회였다.
대표적인 두 폴리스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아테네는 초기에 귀족이 경제와 군사, 정치 실권을 모두 쥐고 있었으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해진 평민들이 자기 돈으로 무장한 중장 보병이 되어 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차지하는 몫이 커지자 평민의 정치적 발언권도 강해졌고, 귀족과의 대립이 깊어졌다.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은 재산 정도에 따라 정치적 권리를 나누는 개혁(금권정)으로 양측을 조정하려 했으나 갈등은 이어졌다. 혼란 속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 같은 참주가 민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기원전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가 등장해 실권을 잡고 본격적인 개혁에 나섰다. 그는 혈연 중심으로 짜여 있던 부족제를 거주지 중심으로 개편했고, 그 위에 500인 평의회를 두었으며, 도편 추방제를 도입해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편 추방제는 누군가가 참주, 곧 독재자가 될 위험이 보이면 그 위험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투표하고, 일정 표를 넘기면 10년간 국외로 내보내는 제도였다. 권력자가 선을 넘기 전에 미리 꺼내 드는 예방용 경고 카드인 셈이다. 다만 뒷날에는 정적을 제거하는 정치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테네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최고 입법 기구인 민회에는 성인 남성 시민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고, 수당 제도 덕분에 가난한 시민도 정치에 참여했으며, 추첨으로 관직과 배심원을 맡았다. 다만 이 직접 민주정은 어디까지나 성인 남성 시민에게 한정된 것이어서 여성과 외국인,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정반대였다. 스파르타는 다른 집단을 정복하고 세운 폴리스였는데, 정복당한 원주민 대부분은 토지를 경작하는 예속 농민(헤일로타이)이 되었고, 반자유민(페리오이코이)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다. 인구의 소수에 불과한 시민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해야 했기에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다. 남성 시민은 어릴 때부터 공동 기숙과 공동 식사를 하며 엄격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기원전 6세기 말 서아시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지중해로 세력을 뻗자 그리스 세계와 충돌했다. 지중해의 패권이 걸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단결해 거대 제국을 물리쳤다. 승리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강력한 해상 제국으로 올라섰고,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민주정치와 고전 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자유로운 시민 생활을 토대로 한 그리스 문화는 합리적이면서도 인간 중심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가 그 출발점이고, 그리스인은 자신들의 신마저 인간과 같은 모습에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상상했다.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진리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했고, 뒤이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철학과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역사 서술에서는 헤로도토스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다룬 역사를,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룬 역사를 남겨 역사학의 토대를 세웠다.
연극도 크게 유행했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은 최초의 석조 극장으로 약 1만 7천 명을 수용했다. 당시 연극 공연은 신에게 바치는 제사로 여겨졌고,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풀어 주는 사회적 기능도 했다. 합창단이 노래하던 공간인 오케스트라라는 말은 오늘날 관현악단을 가리키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으며, 오늘날 흔히 보는 노천극장의 형태도 고대 그리스 극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조화와 균형의 미를 강조한 건축과 조각도 풍성했는데, 아테나 여신을 위해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 그 정점이다.
찬란한 문화의 이면에서 그리스 세계는 분열로 향했다. 아테네의 세력이 커지자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대립했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다. 스파르타가 승리했으나 그 패권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리스는 내분과 혼란에 빠진 끝에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한다.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359년 즉위한 필리포스 2세 때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막강한 기병대와 긴 창으로 무장한 중장 보병을 길러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그리스 도시들을 굴복시킨 뒤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다 암살당했다. 왕위를 이은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에 나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를 해방하고 나일강 삼각주에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이어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했으며,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들이 더 이상의 전진을 거부하자 회군했고, 아라비아와 카르타고 원정을 계획하던 중 기원전 323년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동서 교역로가 열렸고,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걸친 세계 제국이 형성되며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정복지의 제도와 관습을 존중하고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워 그리스인을 이주시켰으며,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결혼을 장려해 두 세계를 하나로 융합하려 했다.
헬레니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약 300년(기원전 323-30년)에 걸친 문화로,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문화가 뒤섞여 형성되었다. 좁은 폴리스의 울타리를 벗어나 넓고 개방된 세계에서 자라난 만큼 개인적이고 세계 시민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철학에서는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 삶을 추구한 스토아 학파와 마음의 평정을 추구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발전했고,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같은 자연과학도 크게 진전했다. 예술은 인간의 육체와 감정을 사실적이고 관능적으로 표현했는데, 밀로의 비너스상과 라오콘 군상, 니케상이 대표작이다. 이 미술 양식은 동서 교통로를 따라 북인도로 전해져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하나의 거대한 교역로가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를 한 줄로 꿰면서 문물이 마구 섞인 시기였다. 여러 출신의 사람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처럼, 학문과 예술과 종교가 국경을 넘어 뒤섞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대판 세계화의 첫 물결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라틴인은 이탈리아반도 테베레강 하류에 도시 국가 로마를 세웠다. 왕정으로 출발한 로마는 기원전 6세기 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공화정의 뼈대는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행정 수반인 집정관, 그리고 시민들의 민회였다.
아테네에서 그랬듯 로마에서도 정복 전쟁에 평민이 대거 참여하면서 그들의 군사적 비중이 커졌고, 자연히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 투쟁은 점진적 타협으로 풀렸다. 평민을 대변하는 호민관 직과 민회가 설치되고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었으며, 리키니우스법으로 두 집정관 중 한 자리는 평민에서 뽑게 되었고, 호르텐시우스법으로 평민회의 결의가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평민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
로마는 안정 속에서 대외 팽창을 거듭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뒤,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해 서지중해를 차지했고, 이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정복하며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팽창은 사회 내부를 흔들었다. 유력자들은 오랜 전쟁으로 방치된 농지를 독차지하고 노예 노동을 이용해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한 반면, 자영농은 토지를 잃고 빈민으로 전락했다.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농지법과 빈민에게 싼값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곡물법으로 개혁을 시도했지만 귀족의 반대에 막혔다. 이후 로마는 권력 투쟁과 내전,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 반란까지 겹쳐 큰 혼란에 빠진다.
정복으로 흘러든 값싼 노예 노동이 거대 농장으로 쏠리자, 자기 땅을 부치던 자영농은 대형 농장에 밀려나는 영세 자영업자 신세가 되었다. 나라의 허리를 지탱하던 중간층이 무너진 것이 공화정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다.
혼란 속에서 군인 정치가들이 삼두 정치로 권력을 나눠 쥐었다. 갈리아를 정복하며 제1차 삼두 정치를 주도한 카이사르는 여러 개혁을 펼쳤으나, 그가 왕이 되어 전제 정치를 펼칠 것을 두려워한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제2차 삼두 정치를 이끈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로마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쳤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제일 시민(프린켑스)이라 낮춰 부르고 공화정을 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군 지휘권과 주요 관직을 차지해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사실상의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200년간 유능한 황제들이 이어지며 제국 영토가 최대에 이른 번영기를 누렸으니, 이를 팍스 로마나라 부른다.
로마인은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법률과 건축, 토목, 도시 설계 같은 실용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법률이다. 도시 국가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12표법은 로마 시민을 위한 시민법으로 발전했고, 제국의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넓어졌다. 로마법은 훗날 비잔티움 제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집대성되어 세계 각국 법체계의 바탕이 되었다.
법이 시민법에서 만민법으로 넓어진 과정은, 회원만 쓰던 규칙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표준으로 끌어올린 일에 비할 수 있다. 제국이 커질수록 규칙도 더 보편적인 형태로 업데이트된 셈이다.
로마는 정복지마다 계획도시를 세우고 도시들을 잇는 도로망을 깔았으며, 원형 경기장과 개선문, 공중목욕탕을 짓고 상수도 시설을 갖추었다. 문학에서는 라틴 문학이, 철학에서는 헬레니즘에서 이어진 스토아 철학이 발전했다. 역사에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 유명했고, 과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을 주장해 중세 내내 공인된 학설로 자리 잡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 지방에서는 구세주(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이때 등장한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민족과 신분을 초월한 보편적 사랑과 평등을 설교했다.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늘자 위협을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가르침은 제자들을 통해 제국 전역에 퍼져 각지에 교회가 세워졌고 신약 성서가 정리되었다.
본래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는 여러 종교를 차별 없이 받아들였지만, 유일신을 믿는 크리스트교도가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박해를 시작했다. 박해가 거세질수록 교세는 오히려 단단해졌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삼위일체에 기초한 교리를 확립했다. 뒤이어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세계 종교로 발돋움한다.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와 보편적 유일신 신앙이라는 두 전통을 함께 품으면서, 로마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더불어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3세기에 접어들자 정치가 흔들렸다. 군대가 정치에 개입해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가 펼쳐졌고, 속주와 변경에서는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졌다. 정복 전쟁이 끝나면서 토지와 노예, 전리품의 공급이 끊겨 경제도 어려움에 빠졌다. 도시와 상공업이 쇠퇴해 중산층 자유민이 몰락했고, 농촌에서는 소작농을 뜻하는 콜로나투스가 확산되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전제 군주제로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화폐와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한편 제국을 다시 하나로 합치고 수도를 옮겼는데, 새 수도는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다. 그러나 이런 개혁으로도 제국의 해체를 막지는 못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갈라졌고,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 476년 게르만 출신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게르만족은 본래 유럽 북부에서 농경과 목축, 수렵을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인구가 늘어 농지를 찾아 남하한 이들은 로마 제국에 들어와 용병이나 소작농이 되었다. 그러던 중 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훈족이 유럽으로 밀려들자, 압박을 받은 서고트족이 로마 영토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탄 삼아 수많은 게르만족이 대이동에 나서며 서로마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게르만이 세운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오랫동안 번영한 것은 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유역에 본거지를 두고 가까운 갈리아 지방에 정착해 현지 적응이 수월했고, 5세기 말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계 주민과의 문화적 마찰도 피할 수 있었다.
클로비스 사후 왕권이 약해지자, 재상에 해당하는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쳐들어온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 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피핀은 메로베우스 왕조의 허수아비 왕을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는 교황에게 "왕이라는 칭호만 가진 자와 왕의 실권을 모두 행사하는 자 가운데 누가 왕관을 쓰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시달리며 자신을 지켜 줄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교황은 실력 있는 자가 왕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피핀은 망설임 없이 왕을 몰아내고 카롤루스 왕조를 열었으며, 그 답례로 랑고바르드를 공격해 빼앗은 땅을 교황에게 바쳤으니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옛 서로마 영토를 상당 부분 되찾고 정복지에 선교사를 보내 크리스트교를 보급했으며, 궁정 학교를 세우고 고전을 연구하게 해 이른바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화와 크리스트교가 융합한 중세 서유럽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던 교황은 800년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왕위를 이은 루트비히 1세는 신앙심은 깊었으나 정치에는 큰 뜻이 없었다. 그가 죽은 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갈라졌고, 이 세 나라가 각각 오늘날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의 시초가 되었다. 분열 이후 9세기 무렵부터는 노르만족이 비옥한 땅을 찾아 남하해 노르망디 공국을 비롯한 나라를 세웠고, 본거지였던 스칸디나비아에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가 들어섰다. 여기에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까지 겹치며 유럽의 혼란은 깊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봉건제가 자리 잡았다. 지방 세력가들은 성을 쌓고 무력을 갖춰 전사 계급이 되었고, 지역민을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예속 농민으로 삼는 대신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그 결과 지방 세력가와 농민 사이에 주종 관계가 퍼지고 장원에 기초한 지방 분권이 가속화되었다. 주종 관계는 국왕과 제후, 하급 기사를 여러 겹으로 잇는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었다.
주종 관계는 일방적인 상하 명령이 아니라 쌍무적 계약이었다. 윗사람은 땅(봉토)과 보호를 주고 아랫사람은 충성과 군역으로 갚되, 어느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계약은 효력을 잃었다. 조건이 충족되어야 유지되고 위반 시 해지되는 계약직 고용 관계에 가깝다.
다만 주종 관계가 세습되고 봉신의 지배권이 영구적으로 굳어지면서, 봉신은 봉토 안에서 왕의 간섭 없이 재판권과 징세권을 행사했다. 그 결과 지방 분권이 촉진되고 왕권은 약해졌다. 주군이 내려 준 봉토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장원으로 이루어졌고, 봉신은 그 영주로서 장원을 다스렸다. 장원의 토지는 영주 직영지와 농노 보유지, 공유지로 나뉘었고, 경작지는 삼포제 방식으로 관리되었다.
삼포제는 경작지를 봄에 씨를 뿌리는 춘경지, 가을에 뿌리는 추경지, 그리고 한 해 쉬는 휴경지 셋으로 나누고 해마다 순서를 바꿔 가며 농사짓는 방식이다. 땅을 돌아가며 한 구획씩 쉬게 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운동선수를 번갈아 쉬게 하며 체력을 관리하는 것과 닮았다.
장원에 속한 농민은 대개 농노였다. 농노는 고대 노예와 달리 혼인과 농지 보유의 권리가 있었고 관습에 따라 어느 정도 보호받았으나, 영주의 허락 없이는 장원을 떠날 수 없는 부자유한 신분이었다. 농민은 토지 사용의 대가로 영주의 직영지를 일주일에 2-3일씩 경작하고 현물을 공납했으며, 인두세와 사망세, 혼인세 등을 바치고 영주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중세 유럽을 떠받친 또 하나의 축은 교회였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며 크리스트교 세계에는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만 남았다. 분열의 결정적 계기는 726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가 내린 성상 파괴령이었다. 게르만족 포교에 성상이 필요했던 로마 교회가 이를 거부하면서 동서 교회의 대립이 깊어졌고, 결국 1054년 크리스트교 세계는 교황 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황제 중심의 그리스 정교회로 갈라섰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서유럽에서 교세를 넓혀 유럽인의 정신세계와 일상을 지배했다. 교황은 대관식을 통해 국왕의 통치에 신적 권위를 부여했고, 성직자와 영주, 농노로 짜인 신분 질서를 신의 뜻으로 정당화했다. 교회는 신도가 기증한 토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봉건 세력이 되었으며, 내부에는 교황 아래 대주교와 주교, 교구 사제로 이어지는 서열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면서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어, 성직자가 국왕이나 제후의 봉신이 되고 성직자 임명권을 세속 권력이 차지했으며 성직 매매 같은 부패가 나타났다.
이에 10세기 초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를 정화하려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 직속이어서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청빈과 순명, 정결을 강조한 베네딕트 회칙을 엄격히 지키며 개혁을 이끌었다. 11세기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군주의 성직자 서임을 금지하는 훈령(1075년)을 내놓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를 무시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제후와 주교의 지지를 잃은 황제는 1077년 카노사로 교황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서임권을 둘러싼 다툼은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이 우위를 차지하며 일단락되었고, 교황권은 13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13세기 사람들은 교황권과 왕권의 관계를 "교황은 해, 왕은 달"에 빗댔다. 달이 스스로 빛나지 못하고 햇빛을 받아 빛나듯, 세속 군주의 권위도 교회로부터 나온다는 뜻이었다. 권위의 위계를 천체에 빗댄 표현인 셈이다.
중세 문화는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신학이 우위를 점했다. 초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철학이 발전했으나, 십자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전해지며 스콜라 철학이 유행했다. 이를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학문은 처음에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다 12세기경 볼로냐와 파리에서 대학이 세워지며 새 단계로 들어섰다. 대학은 교수와 학생의 조합에서 출발한 일종의 교육 길드로, 일곱 가지 교양 교과와 법학, 의학, 신학 같은 전공을 두었으며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볼로냐 대학은 법학으로 이름났다. 오늘날 대학의 교육 과정과 학위 제도 상당수가 이 중세의 틀에서 유래했다. 문학에서는 기사의 모험과 사랑을 다룬 기사 문학(롤랑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이 유행했고, 건축에서는 11세기 원형 아치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12세기부터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 양식이 번성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은 후대 학자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로마의 전통을 이어 약 천 년의 역사를 더 이어 갔다. 이슬람 세력에 맞서 크리스트교 세계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했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에 자리해 동서 교통과 상공업,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전성기 수도의 인구는 약 100만 명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어 배후의 위협을 없앤 뒤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반도를 통합하며 한때 지중해의 상당 부분을 다시 손에 넣었다. 또한 로마법을 정리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그리스 정교의 성당으로 완공된 이 건축물은 훗날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모스크로 바뀌었으며, 성당 곁의 네 개 첨탑(미너렛)은 그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정교를 바탕으로 그리스-로마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융합해 독자적 문화를 일구었다.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쓰였고, 그리스 고전이 꾸준히 수집·연구되어 고대의 사상과 학문이 보존되었다. 이 성과는 뒷날 서유럽에 전해져 르네상스를 자극했다. 웅장한 돔과 화려한 모자이크 벽화를 특징으로 하는 비잔티움 양식도 발전했다. 비잔티움 문화는 슬라브족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흑해를 통해 비잔티움과 교류한 키예프 공국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를 시행했다. 전국을 여러 군관구로 나눠 황제가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행정·사법권을 맡기고, 군역에 종사하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자영농을 육성하고 국방력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방 유력자의 대토지 사유화가 심해지면서 둔전병제가 무너지고 황제권도 약화되었다. 11세기에는 셀주크 튀르크에 영토를 빼앗기고 성지 예루살렘마저 잃자 서유럽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것이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후 거듭 쇠퇴한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했다.
11세기 무렵 서유럽은 안정 속에서 경제가 발전했다. 삼포제가 퍼지고 말과 무거운 쟁기가 농사에 쓰이며 생산성이 오르자 인구가 늘었고, 농지가 부족해진 사람들은 엘베강 동쪽으로 진출했으며 이베리아반도의 크리스트교 국가들은 이슬람 세력에 맞선 재정복 운동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러던 중 비잔티움 제국이 셀주크 튀르크에 영토와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기자,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회복을 호소하며, 전쟁에 참여하면 그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종교적 열정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이끌린 제후와 기사, 상인, 농민이 호응하면서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출발했다. 유럽인들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자리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다시 결집해 예루살렘을 위협하자 1147년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지만 이슬람 군대에 패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 이슬람 세계에 살라딘이 등장했다. 그는 1171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뒤,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러자 유럽은 1189년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직접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가 원정 도중 강물에 빠져 숨지고 필리프 2세는 회군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협상해, 크리스트교도의 자유로운 성지 순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원정을 마쳤다. 이후에도 1270년 무렵까지 십자군이 다섯 차례 더 파견되었으나, 본래 목적인 성지 회복은 이루지 못한 채 가는 곳마다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 결국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제1차 원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고,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 아래 남았다.
전쟁의 결과는 유럽을 크게 바꾸었다. 거듭된 실패로 교황권은 쇠퇴했고, 오랜 전쟁으로 제후와 기사 계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왕권이 강해졌다. 동시에 지중해를 통한 동방과의 교역과 문화 접촉이 활발해져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비잔티움과 이슬람 문화가 서유럽 문화를 자극했다.
도시는 시장에 상인과 수공업자가 모여들며 커졌고,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자 더욱 성장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지중해 연안 도시는 동방 무역으로, 피렌체와 밀라노는 금융업과 직물업으로 번창했으며, 함부르크와 뤼베크 등 북독일 도시들은 한자 동맹을 맺어 북해와 발트해 무역을 주도했다. 경제력을 키운 시민들은 영주에게서 자치권을 얻었고,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길드를 만들어 생산과 교역을 했다.
길드는 상인과 수공업자가 만든 동업 조합으로, 노동 시간과 생산 기술, 상품 가격을 규정으로 정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물렸다. 가격과 품질, 영업 조건을 함께 정해 회원을 보호하는 오늘날의 동업자 단체이자 자격 관리 기구를 합쳐 놓은 셈이다.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고 화폐 경제가 퍼지자 영주는 농민에게 부역 대신 현물이나 화폐로 지대를 받게 되었고, 농민은 부역에서 풀려났다. 곡물 가격이 오르고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농민의 경제적 지위도 올라갔다. 결정적 계기는 1347년 무렵부터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 적게 잡아도 2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추정이 일반적이며, 연구에 따라 절반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인구가 급감해 노동력이 귀해지자 농민의 처우가 개선되었고, 농노 신분에서 풀려나는 사람이 늘고 자영농이 증가하면서 장원은 점차 해체되었다. 다만 수입이 줄어든 일부 영주가 도리어 직영지를 늘리고 화폐 지대를 부역으로 되돌리며 농민을 억압하자,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과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 같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십자군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흔들리는 가운데,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성직자 과세 문제를 두고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대립하다 결국 굴복했다. 이후 교황청이 한동안 남프랑스 아비뇽에 머문 사건을 아비뇽 유수라 한다.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뒤에는 아비뇽에서도 따로 교황이 선출되어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교회 대분열이 이어졌고, 이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단일 교황을 세우며 수습되었다.
교황권이 약해지고 영주의 힘이 빠지자 유럽 각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왕은 사법권과 과세권을 넓히고 상비군과 관료를 길러 중앙 집권 체제를 다졌으며, 봉건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던 도시 상공업자들이 이를 지원하고 신분제 의회에 참여했다. 화약의 도입으로 무력이 약해진 기사들은 점차 왕의 신하로 흡수되었다.
영국은 노르만 왕조의 정복 이후 비교적 강한 왕권을 가졌으나 13세기 들어 귀족의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존 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나빠진 재정을 메우려 무거운 세금을 매기자 귀족이 반발해, 귀족의 권리를 인정한 대헌장을 왕에게 승인하게 했다. 이후 성직자와 귀족, 각 주와 도시 대표가 참여하는 모범 의회가 소집되고 14세기에는 양원제 의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 말 필리프 2세가 제후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했다. 강해진 두 나라는 서유럽의 패권을 두고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이 백년전쟁이다. 발단은 양모 산업으로 유명한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와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죽고 사촌 동생 필리프 6세가 즉위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샤를 4세의 외조카임을 들어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1337년 필리프 6세가 프랑스 안의 영국 영지를 빼앗고 플랑드르를 공격하면서 길고 긴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흑사병과 농민 봉기 탓에 교착에 빠졌다. 1429년 영국군이 프랑스 중앙의 오를레앙을 공격해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17세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을 구했다. 덕분에 샤를 왕자는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나, 잔 다르크는 1430년 적군에 넘겨져 이듬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당했다. 그럼에도 승기를 잡은 프랑스는 1453년 칼레를 제외한 대륙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며 전쟁에서 승리했고, 왕을 중심으로 귀족이 결집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 사이에 장미 전쟁이 벌어졌다. 오랜 내전으로 귀족 세력이 약해진 끝에 랭커스터 가의 헨리 7세가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열고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열로 남았다. 독일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제후 세력에 눌려 명목상의 통치자에 그쳤고, 13세기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를 거친 뒤 14세기에는 일곱 명의 유력 제후가 황제를 뽑는 황금 문서가 만들어져 분열이 굳어졌다. 이탈리아 역시 교황령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도시 국가, 나폴리 왕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재정복 운동을 통해 성장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왕가 간 혼인으로 합쳐져 에스파냐 왕국을 이루었고, 1492년 이슬람 세력 최후의 거점 그라나다를 함락하며 통일을 완성했다. 한편 12세기에 카스티야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 통일 국가로 성장해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섰다.
르네상스는 재생, 부활을 뜻하는 말로, 14세기에서 16세기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를 수집하고 연구한 문예 부흥 운동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는 고전 문화의 전통이 짙었고,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며 학자들이 피신해 오자 고전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게다가 십자군 이래 지중해 무역과 제조업으로 부를 쌓은 북부 도시의 부유한 상인과 군주들이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문예를 후원했다.
이 시기에는 인간의 본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려는 인문주의가 발전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며 교회의 전통적 교리에서 벗어나 인간을 개성적 존재로 보았고,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페트라르카는 고전을 발굴·연구하며 서정시를 남겼고,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교회의 타락과 인간의 위선, 욕망을 풍자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강력한 군주가 필요함을 주장하며 정치를 종교와 윤리에서 분리해, 근대 정치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분야는 미술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은 균형 잡힌 인체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성당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6세기 들어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교회의 권위와 봉건적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알프스 이북에서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와 지배층을 비판하며 초기 크리스트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이 흐름은 뒷날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몰락하는 봉건 기사를 풍자했고,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남겼다.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려는 르네상스 정신은 과학기술 발달의 바탕이 되었으며, 특히 중국에서 전해진 화약과 나침반이 유럽에서 개량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화약은 봉건 기사의 몰락을 앞당겼고, 나침반은 원거리 항해를 가능케 했다.
구텐베르크가 개량한 활판 인쇄술은 그 시대의 인터넷과 같았다. 손으로 베끼던 책을 빠르고 싸게 찍어 내자 새로운 지식과 사상이 순식간에 번졌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동시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중세 내내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14세기 이후 알프스 이북에서 성직자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며 영향력이 흔들렸다. 결정적 도화선은 면벌부였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 증축 비용을 마련하려 면벌부를 팔자, 성직자 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교황을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달려 있으며 신앙생활의 핵심은 성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면벌부는 기부금을 받고 받아야 할 벌을 사면해 준다고 증명하는 문서였다. 거대한 성당 공사 비용을 대려 죄의 면제를 상품처럼 팔았던 셈인데, 바로 이 모금 방식이 거센 반발을 부르며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루터의 주장은 인쇄술 덕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교회 권력에서 벗어나려던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다. 황제와의 오랜 투쟁 끝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파 교회가 공식 인정되고 제후에게 신앙 선택권이 주어졌다. 스위스에서는 칼뱅이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펼치며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여겼는데, 이는 당시 자본주의 확산과 맞물려 신흥 상공업자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로 퍼졌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수장법으로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해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엘리자베스 1세가 1559년 통일법으로 영국 국교회를 출범시켰다.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의 의식과 신교의 교리가 섞인 성격을 띠었다. 위기를 느낀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교황의 권위와 교리를 재확인하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했으며, 로욜라가 세운 예수회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크리스트교가 구교와 신교로 갈라지자 유럽 곳곳에서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 끝에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신교도의 권리를 일부 보장했다. 특히 독일에서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신교를 탄압하자 신교 제후국들이 맞서며 시작되었으나,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신교 지원)와 에스파냐(구교 지원)가 가담하는 국제전으로 번졌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나, 제후들이 신앙을 선택할 권리를 얻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 전쟁은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시민 계급과 신교도의 성장을 촉진해 근대 자본주의와 시민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유럽인에게 이슬람 세계 너머의 아시아는 동경의 대상이자 부유한 땅이었다. 향신료와 비단을 향한 갈망에 더해, 아시아에 크리스트교 왕국이 있다는 전설과 13세기 후반 마르코 폴로가 남긴 동방견문록이 호기심을 부추겼다. 그러나 13세기까지는 이슬람과 이탈리아 상인이 무역을 독점해 새 항로를 열기 어려웠고, 당시 선박으로는 원양 항해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리학과 천문학, 조선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먼바다 항해가 가능해졌다. 대서양 연안에 자리해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돼 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새 항로 개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항해 왕자로 불린 포르투갈의 엔히크는 서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했고, 그 지원으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1488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닿았다. 이어 바스쿠 다 가마는 1498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해 인도 항로를 열었다. 한편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1492년 인도로 가려다 아메리카 대륙의 서인도 제도에 닿았다. 그는 자신이 인도에 도착한 줄 알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뒤이어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곳이 인도가 아님을 밝혀냈고, 그의 이름을 따 이 땅을 아메리카라 부르게 되었다.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의 일행은 16세기에 대서양과 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3년 만에 에스파냐로 돌아와(마젤란 본인은 필리핀에서 사망)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를 이루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유럽인이 닿기 전 아메리카에는 독자적 문명이 있었다. 멕시코만 연안의 마야 문명은 피라미드형 신전을 세우고 천문학과 영(0), 이진법을 사용했다. 멕시코 고원의 아스테카 문명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수십만 명이 살 만큼 번성했고 그림 문자와 태양신 신전을 남겼다. 안데스 고원의 잉카 문명은 계단식 밭과 관개 시설로 농업을 일구고 수도 쿠스코와 산정의 마추픽추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은 앞선 무기를 갖춘 에스파냐의 코르테스와 피사로에게 정복당했다.
신항로 개척으로 유럽의 교역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확대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가혹한 노동과 유럽에서 들어온 천연두, 홍역 같은 전염병으로 급감하자, 유럽인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끌어와 농장에 투입했다. 그 결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삼각 무역이 성립했다.
가격 혁명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 대량으로 유럽에 흘러들며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치솟은 현상이다. 통화량이 갑자기 불어나 돈의 값이 떨어진 인플레이션과 같다. 토지 수입에 의존하던 봉건 지주는 타격을 입은 반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흥 계층은 큰 이익을 보았다.
세계적으로 교역이 활성화된 상업 혁명과 함께 자본주의 제도도 발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아시아로 진출했는데, 동인도 회사는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기업 형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금융과 보험 제도가 발전하면서 원거리 교역에 어음이 쓰여 현금을 지참할 필요가 줄고 위험도 낮아졌다. 이렇게 확보된 이윤과 시장은 훗날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 곧 절대왕정이 나타났다. 봉건 귀족은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누렸지만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약해져 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절대왕정은 중세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민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이자, 약해지던 봉건 귀족과 성장하던 시민 세력 사이의 균형 위에 선 체제였다. 군주는 왕권신수설로 권력을 정당화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운영했으며, 귀족의 간섭을 피하려 시민층에서 관리를 등용하고 막대한 운영비를 대고자 조세 제도를 정비했다. 상공업 시민을 보호하고 그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시민 계층은 더욱 성장했다.
절대왕정은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금과 은을 국부의 원천으로 보아 이를 확보하는 데 힘쓰다가, 점차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무역 차액주의로 발전했다. 이를 위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관세 장벽을 높이며 식민지 획득에 나섰다.
중상주의는 나라의 부를 곳간에 쌓인 금은의 양으로 보고, 수출은 늘리고 수입은 막아 그 곳간을 채우려 한 정책이다. 무역을 두 나라가 함께 이득을 보는 거래가 아니라, 한쪽이 벌면 다른 쪽이 잃는 점수 따먹기로 본 셈이다.
16세기 에스파냐는 재정복 운동을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루며 유럽 최초의 절대왕정을 세웠다. 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귀금속을 바탕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했으며 포르투갈을 병합했다. 그러나 가톨릭 강요 정책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불렀고 무적함대마저 영국에 패하면서 점차 쇠퇴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종교개혁과 해군 육성으로 기틀을 닦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동인도 회사를 세워 아시아로 진출했다. 이 무렵 모직물 산업이 발달해 양모 수요가 늘자 농경지를 양 목장으로 바꾸는 1차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 일자리를 잃은 농민이 도시로 몰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종교 분쟁을 수습한 앙리 4세 때 기초가 놓이고 루이 14세 때 절정에 이르렀다. "짐이 곧 국가"라며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태양왕을 자처한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권위를 과시하고 콜베르를 등용해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상공업에 종사하던 많은 신교도가 떠나면서 산업이 위축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상공업과 도시 발달이 늦어 시민 계급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 봉건 귀족이 농노제를 유지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다. 그래서 동유럽의 절대왕정은 서유럽보다 한 세기쯤 늦게 성립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슐레지엔을 차지했고, 계몽사상에 심취해 스스로를 국가 제일의 공복이라 부르며 산업을 장려하고 종교적 관용 정책을 폈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도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했으나 보수적 귀족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받아들여 내정 개혁과 군비 확장을 추진하고, 발트해로 진출해 페테르부르크를 새 수도로 삼았다.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며 영토를 넓혔다. 다만 동유럽은 영주권과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어 산업화와 근대 시민 사회로의 발전이 늦어졌다. 한편 군주들은 예술의 힘을 빌려 권위를 과시했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바로크 양식)과 독일의 상수시 궁전(로코코 양식)이 대표적이다.
같은 시기 유럽의 과학은 빠르게 발전했다. 중세 말까지 쌓인 지식과 르네상스로 새롭게 조명된 고대 그리스 학문, 동방의 기술이 어우러진 데다 망원경과 현미경 같은 기구가 발명되었다. 베이컨은 실험과 관찰에서 출발해 일반 결론을 끌어내는 귀납법을, 데카르트는 큰 전제에서 개별 사실을 끌어내는 연역법을 제시하며 근대적 연구 방법론을 세웠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천동설에 의문을 품고 지동설을 주장했고,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을 타원 궤도로 도는 것을 밝혀 이를 보완했으며, 갈릴레이는 망원경 관측으로 지동설을 옹호했다. 이 성과를 종합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우주의 운동을 보편적 수학 공식으로 설명하고 기계론적 우주관을 확립했다(프린키피아). 의학에서는 베살리우스가 인체 해부학의 토대를 놓고, 하비가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발견했으며,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했다. 17세기를 전후한 이 과학의 발전과 세계관의 변화를 과학혁명이라 하며, 이는 합리적 사고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낳아 뒷날 계몽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적 사고는 정치권력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도 쓰였다. 17세기에는 인간 사회에도 보편타당한 원리가 있다는 자연법 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계약설이 등장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년)에서 정치권력이 없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계약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보았으며 사회 유지를 위해 강력한 절대 군주를 옹호했다. 반면 로크는 시민정부론(1690년)에서 인간이 생명과 자유, 재산이라는 자연권을 가지며, 이를 지키려 세운 정부가 자연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국민이 저항하고 정부를 갈아 치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세기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낡은 관습과 미신을 타파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사상이 퍼졌다. 계몽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고 절대왕정을 비판해 시민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볼테르는 관용과 신앙·언론의 자유를 강조했고, 몽테스키외는 영국 제도를 본떠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을 이상적 체제로 제시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주권이 인민 전체에게 있다는 인민주권론과 일반의지에 따른 국가 운영을 주장해 각국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당대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전서를 펴냈고, 경제학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웠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부가 간섭을 줄이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면 개인이 각자 이익을 좇는 과정에서 시장 전체가 효율적으로 굴러간다는 생각이다. 누가 위에서 지시하지 않아도 수많은 거래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는, 일종의 자율 조절 장치에 빗댄 표현이다.
이런 사상은 먼저 영국에서 현실의 변화로 이어졌다. 토지를 잃지 않은 지주 젠트리와 도시 시민, 특히 청교도들이 의회에서 강한 세력을 이루어 왕실의 부패를 비판했다.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와 그 아들 찰스 1세가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와 청교도 박해로 갈등을 빚자, 의회는 1628년 권리 청원을 제출해 승인받았다. 찰스 1세가 이를 어기고 의회를 탄압하자 내전이 벌어졌고,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왕당파를 누르고 찰스 1세를 처형한 뒤 1649년 공화정을 세웠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호국경에 오른 크롬웰은 항해법을 제정해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네덜란드를 견제했으나, 엄격한 독재 정치로 불만을 샀다. 그의 사후 왕정복고로 즉위한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우대하고 전제 정치를 추구하자, 의회는 심사법과 인신 보호법으로 맞섰고 이때부터 왕을 지지하는 토리당과 의회를 존중하는 휘그당이 대립했다. 의회는 끝내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그의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했는데, 큰 유혈 없이 이루어진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한다. 두 왕이 의회가 제정한 권리 장전을 승인하면서 "왕은 의회 속에 있다"는 전통이 서고 입헌 군주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후 1707년 앤 여왕 때 스코틀랜드를 병합해 대영제국이 성립했고,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가 국정에 소극적이자 의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내각 책임제가 시작되어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자리 잡았다.
대서양 건너 북아메리카에서는 17세기부터 이주한 영국인들이 동부 해안에 13개 식민지를 세우고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다. 영국이 7년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식민지에 인지세 등 세금을 매겼고,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며 저항해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이어졌다.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의 충돌로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 대표들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천부 인권과 국민주권, 저항권을 바탕으로 한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담겼다. 식민지 군대는 프랑스, 에스파냐의 도움으로 승리해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받았고, 헌법을 정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해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헌법은 국가 권력을 입법·사법·행정으로 나누어 견제하게 했으며, 이로써 연방주의와 삼권 분립에 바탕을 둔 미합중국이 탄생해 유럽, 특히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 체제를 구제도(앙시앵 레짐)라 부른다. 소수의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많은 토지와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면세 특권을 누린 반면, 제3신분인 평민은 막대한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정치적 권리에서 제한받았다. 상공업과 전문직으로 부를 쌓은 시민 계급은 계몽사상과 미국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 모순을 비판했다. 1789년 루이 16세가 재정난을 풀려고 삼부회를 소집하자 표결 방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 대립이 일었고, 제3신분 대표들은 따로 국민 의회를 구성해 헌법 제정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했다. 왕이 국민 의회를 탄압하자 1789년 파리 시민들은 절대왕정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국민 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재산권 보호를 담은 인권 선언을 발표했다.
혁명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루이 16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뒤, 의회는 1791년 입헌 군주제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혁명의 확산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위협하자 혁명 전쟁이 일어났고,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에 시달린 파리 민중이 왕궁을 습격해 왕권을 정지시켰다. 뒤이어 들어선 국민 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급진파 자코뱅의 주도로 루이 16세를 처형했다. 온건파 지롱드와 급진파 자코뱅의 갈등 속에서, 위기에 몰린 자코뱅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해 공안 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로 반혁명 세력을 처형하는 공포 정치를 폈다. 공포 정치가 불만을 사면서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실각해 처형되었고, 그 뒤 다섯 명의 총재가 통치하는 총재 정부가 들어섰으나 무능과 혼란에 시달렸다. 그 틈에 전쟁에서 거듭 승리해 주목받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세워 권력을 잡으면서, 사실상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 신분제를 타파하고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을 내걸어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혁명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은행 설립과 국민 교육 제도 도입 같은 개혁을 추진하고,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한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한 뒤 황제에 올랐다. 그는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한 뒤 내린 대륙 봉쇄령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를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려던 모스크바 원정마저 추위와 굶주림으로 실패하자 전세가 기울어,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다시 권좌에 올랐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며 완전히 몰락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을 통해 자유주의와 함께 민족주의를 유럽 곳곳에 퍼뜨렸고, 프랑스의 지배에 맞선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민족의 단결을 외치는 흐름이 자라났다.
신항로 개척 뒤 상업 혁명과 인구 증가로 유럽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옷감 수요가 늘자 종래의 길드 체제로는 이를 채우기 어려웠고, 상인 자본가는 길드의 제약을 피해 농촌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농민에게 원료와 도구, 임금을 주고 집에서 물건을 만들게 하는 선대제, 그리고 일꾼을 한 작업장에 모아 분업으로 생산하는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했다. 다만 이 단계는 여전히 사람 손에 의존했고 사회는 농업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산업혁명은 기계가 발명되고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해 일어난 산업상의 대변혁으로,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시민혁명을 거쳐 정치가 안정되었고 모직물 공업으로 자본과 기술이 쌓여 있었으며, 도로와 운하로 발달한 국내 시장, 철과 석탄 같은 풍부한 지하자원, 일찍 확보한 해외 식민지 시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2차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이 도시로 몰려 노동력을 공급했다. 면직물 생산을 기계화하려는 노력 속에 실을 뽑는 방적기와 옷감을 짜는 방직기가 발명되었고,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 기관이 새로운 동력원으로 쓰이면서 면직물 생산이 크게 늘었다. 이로써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과 공장제 수공업은 물러나고, 기계를 중심으로 다수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 한곳에서 관리하는 공장제 기계 공업이 발전했다.
선대제, 매뉴팩처, 공장제 기계 공업의 차이는 빵을 만드는 방식에 빗댈 수 있다. 선대제는 밀가루를 집집마다 나눠 주고 각자 집에서 반죽해 오게 하는 방식이고, 매뉴팩처는 사람들을 한 부엌에 모아 누구는 반죽, 누구는 굽기로 나눠 손으로 만드는 방식이며, 공장제 기계 공업은 그 부엌에 반죽 기계와 오븐 컨베이어를 들여 사람이 기계를 돌리며 한꺼번에 대량으로 찍어 내는 방식이다. 동력원이 사람 손에서 기계로 옮겨 간 것이 결정적 차이다.
증기 기관이 동력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석탄 채굴이 늘고 석탄과 제철 산업이 함께 발전했다. 대량 생산된 원료와 제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교통도 바뀌었다.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 기관차를 개발한 뒤 각지에 철도가 깔렸고 증기선 운항도 실용화되었다. 통신에서는 미국의 모스가 유선 전신을, 벨이 전화를,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무선 전신을 발명했다. 이러한 교통과 통신의 혁명으로 시장이 넓어지고 세계 교역량이 크게 늘었다. 산업화는 처음 영국에서, 이어 19세기에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곳곳으로 퍼졌고, 19세기 후반에는 정부가 주도한 독일과 풍부한 자원을 갖춘 미국이 중화학 공업을 앞세워 강력한 공업국으로 떠올랐다.
산업혁명은 농업 사회를 산업 사회로 바꾸었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 생활은 풍요로워졌고,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가 형성되며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평민 출신의 중간 계급은 산업 자본가나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고 정치에 참여하며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삶은 비참했다. 비위생적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장시간 일했고 여성과 아동까지 일터로 내몰렸다. 1832년 영국 의회가 꾸린 새들러 위원회(의장 마이클 새들러(Michael Sadler))는 방직 공장의 아동 노동 실태를 조사했는데, 다섯 살 무렵부터 하루 열두 시간이 넘게 일하다 매를 맞고 기계에 몸이 상한 아이들의 증언이 잇따라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급속한 도시화로 주택과 상하수도가 부족해 전염병과 범죄가 퍼졌는데, 그 고통은 가난한 노동자 거주지에서 특히 심했다.
노동자들은 처음 자신들의 고통이 기계 탓이라 여겨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이후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근로 조건 개선과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을 펼쳤고, 19세기 중엽 이후 노동자의 대표로 인정받게 되었다. 정부와 기업도 타협점을 찾기 시작해, 영국에서는 1833년 공장법이 제정되어 아동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공장 감독관 제도를 두는 등 노동 환경을 규제했다. 한편 이러한 격차 속에서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생시몽과 영국의 오언은 경쟁 대신 협동과 이상적 공동체를 강조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계급 투쟁을 거쳐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가 온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 몰락 뒤 유럽의 군주들은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빈에 모여, 영토와 지배권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정통성의 원칙에 합의했다(빈 체제). 이 보수적 질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눌렀으나, 자유와 독립을 향한 흐름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리스는 1829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볼리바르와 산마르틴의 활약으로 여러 나라가 독립했으며, 미국은 먼로 선언으로 아메리카와 유럽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했다. 프랑스에서는 전제 정치를 편 샤를 10세에 맞서 1830년 7월 혁명이, 소수 부유층이 권력을 독점하자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났다. 특히 2월 혁명의 여파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하면서 빈 체제는 무너졌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1859년 오스트리아와 통일 전쟁을 벌여 중북부를 병합하고, 가리발디가 점령한 남부를 사르데냐 왕국에 바치면서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독일에서는 1834년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 동맹으로 통일의 싹이 텄고, 재상 비스마르크가 "철과 피"를 내건 군비 확장 정책으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해 1871년 독일 제국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노예제와 무역 정책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가 대립하다, 노예제 확대에 반대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가 분리를 선언하며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링컨은 전쟁 중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우월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북부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미국은 1869년 대륙 횡단 철도 부설과 대규모 이민으로 산업화를 가속해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떠올랐다.
19세기 후반, 산업화로 자본주의를 키운 서양 열강은 값싼 원료와 노동력, 새로운 시장과 자본 투자처를 찾아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제국주의는 우수한 인종이 살아남는다는 사회진화론과 미개한 지역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이는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로 이어져 비유럽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아프리카 분할을 주도한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을 잇는 종단 정책을,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이르는 횡단 정책을 펴다 파쇼다에서 충돌했으나, 영국이 이집트를 프랑스가 모로코를 갖기로 합의하며 일단락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빼고 아프리카 거의 전역이 분할되었다.
영국은 카이로, 케이프타운, 인도의 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맞서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잇는 3B 정책으로 발칸과 서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려 해 영국과 러시아를 자극했다. 아시아에서도 영국이 인도를 근거지로 동남아시아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열강의 충돌이 깊어지면서 동맹이 갈렸다. 독일은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고, 비스마르크 퇴진 뒤 독일이 공격적 정책을 펴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삼국 협상을 맺어 맞섰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발칸 반도에서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민족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이 "유럽의 화약고"가 곧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1914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이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고,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국가들이 잇따라 끼어들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빠르게 진격했으나 마른 전투에서 저지되었고, 서부 전선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교착 상태로 장기화되었다.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다, 독일이 중립국 선박까지 공격하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고 멕시코에 비밀 동맹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 사건이 드러나자 1917년 연합국으로 참전해 전세를 기울게 했다. 한편 러시아는 국내 혁명으로 1918년 독일과 단독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빠졌으나, 같은 해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나 황제 빌헬름 2세가 망명하고 제국이 무너졌다. 혁명으로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이 항복을 선언하며 1918년 전쟁은 끝났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1905년 평화 시위대에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이 번진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물자 부족 속에서 1917년 노동자들이 평의회(소비에트)를 결성하고 황제를 끌어내려 임시 정부를 세웠다(3월 혁명). 임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하자, 망명에서 돌아온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길 것을 주장하며 11월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레닌은 토지와 산업을 국유화했으나 내전과 경제 혼란이 일자 시장 경제 요소를 일부 들인 신경제 정책(NEP)을 폈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세웠다. 그 뒤를 이은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해 소련을 공업국으로 키웠으나, 가혹한 집단 노동과 비판 금지로 독재 체제를 굳혔다.
1919년 전승국들은 파리 강화 회의를 열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 비밀 외교 금지 등을 담은 평화 원칙 14개조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독일과 맺은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빼앗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넘기게 했으며 군비를 대폭 줄이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렸는데, 전승국의 이익과 보복적 성격이 강해 뒷날 독일 국민의 불만을 키웠다. 1920년에는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으나, 정작 이를 제창한 미국이 빠지고 군사적 제재 수단이 없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해 참정권이 확대되고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수 물자를 팔아 세계 최대 채권국이 된 미국은 1920년대에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생산은 늘었으나 임금 생활자의 소득이 따라가지 못해 재고가 쌓였고, 1929년 10월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무너지는 대공황이 닥쳤다. 미국 경제에 의존하던 유럽 등 세계 각국으로 위기가 번지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학자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뉴딜 정책을 폈다.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를 가진 나라들은 본국과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안으로는 관세를 낮추고 밖으로는 높이는 블록 경제로 대응했다.
블록 경제는 큰 가족들이 각자 담장을 높이 쌓고 집안 식구끼리만 물건을 싸게 주고받되, 담장 밖 사람에게는 비싼 값을 매기는 것과 같다. 집안끼리는 거래가 늘지만 담장이 높아질수록 동네 전체의 장사는 줄어든다. 식민지를 거느린 나라는 이렇게 위기를 견뎠지만, 담장 안에 넣을 식민지가 없던 나라들은 밖으로 뻗어 나갈 길을 무력에서 찾았다.
산업 기반이 약하고 넓은 식민지가 없던 이탈리아, 독일, 일본은 대외 팽창에 나섰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국가와 민족이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파시스트당을 세워 1922년 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잡고 일당 독재를 구축한 뒤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독일에서는 대공황으로 위기가 깊어지자 히틀러의 나치당이 극단적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워 1932년 제1당이 되었고, 히틀러는 1933년 총통에 올라 전체주의 체제를 세웠다. 일본은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국제 연맹을 탈퇴한 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난징 학살을 자행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추축국 동맹을 맺으며 침략을 본격화했다.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점령한 뒤, 1939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기습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은 프랑스를 함락하고 비시 정부를 세웠으나, 드골은 영국에 망명 정부를 세워 항전(레지스탕스)을 이어 갔고 처칠이 이끄는 영국은 독일 공군의 공습을 막아 냈다. 독일은 1941년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으며, 같은 해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이 참전했다. 이로써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이 맞섰다. 연합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뒤집었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파리를 되찾았다.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했고,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자 일본도 항복하며 전쟁은 끝났다.
연합국은 대서양 헌장과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을 통해 전후 처리를 논의했으며,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키기로 결의하고 포츠담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전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고,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전범 재판이 열려 평화와 인도주의에 반한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1945년 10월,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한 국제 연합(UN)이 창설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이 본격적으로 맞섰다. 동유럽에 공산 정부가 들어서고 그리스, 터키 등으로 공산 세력이 번지자,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해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자 했다. 이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경제를 재건하려는 마셜 계획을 내놓고, 집단 방위를 위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1949년 결성했다. 이에 맞서 소련은 공산당 정보 교환 기구인 코민포름과 경제 협력 기구인 코메콘, 그리고 1955년 군사 동맹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만들었다. 이로써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자리 잡았다.
냉전의 대결은 곳곳에서 실제 전쟁으로 번졌다. 1948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 뒤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졌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한반도에서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유엔군과 중국군이 개입하며 국제전으로 번졌고, 베트남에서는 남북으로 갈린 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가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군비 경쟁도 치열해,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핵무기 개발로 맞섰다.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 하자 미국이 해상을 봉쇄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벌어졌으나, 소련이 미사일을 철거하기로 하며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직통 연락망(핫라인)이 놓이고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맺어졌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잇따라 독립했다. 인도는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하며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갈라졌고, 1960년에는 아프리카에서만 17개국이 독립해 그해를 "아프리카의 해"라 부른다. 이들 신생국 다수는 두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택했다. 1954년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언라이가 영토와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평등, 평화 공존을 담은 평화 5원칙에 합의했고,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이를 채택했다. 1961년에는 제1차 비동맹 회의가 열렸다. 이렇게 묶인 제3세계는 뒷날 냉전 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긴장 완화의 흐름이 나타났다. 스탈린 사후 소련 수상이 된 흐루쇼프는 미국을 방문하는 등 대화를 시도했고, 미국은 1969년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 스스로 맡으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뒤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중국, 소련과 차례로 소통하며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을 맺었다. 유럽에서도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으로 동독 및 동유럽과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정작 냉전을 끝낸 결정적 변화는 소련 내부에서 나왔다. 과도한 군비 경쟁으로 경제가 침체되자, 1985년 고르바초프는 정치-경제 전반의 개혁을 뜻하는 페레스트로이카와 정보 공개를 뜻하는 글라스노스트를 내세워 민주화와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하고,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을 선언했다. 그는 냉전 종식의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동유럽을 흔들었다. 1989년 폴란드에서는 자유 총선거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해 공산 정권이 무너졌고, 헝가리는 평화적으로 체제를 바꾸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하벨이 이끈 비폭력 민주화 운동인 벨벳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이 무너졌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처형되었고, 같은 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독일이 통일되었고, 1991년 소련 내 여러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소련은 공식 해체되었다. 동유럽 각국은 탈냉전과 함께 분출한 민족주의로 새로운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도 여러 나라로 해체되었다.
냉전이 저물면서 세계는 새로운 지역 통합으로 나아갔다. 유럽은 1958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를 조직한 데 이어, 공동의 외교-안보 정책과 단일 화폐를 논의한 끝에 1993년 유럽 연합(EU)을 정식 출범시켰다. 아시아에서는 1967년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이, 1989년에는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가 결성되었다. 1992년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북미 자유무역 협정(NAFTA)을 맺자,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2003년 아세안 자유무역 지대를 만들어 대응했다. 지중해의 작은 문명에서 출발한 유럽의 역사는, 이렇게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 세계와 하나로 엮이는 자리에 이르렀다.
에게해의 청동기 문명에서 유럽 연합까지, 5천 년의 흐름을 관통하는 줄기는 결국 세 가지 뿌리의 갈등과 결합이었다.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헬레니즘 문화, 법과 제도로 거대한 통합을 이룬 로마, 그리고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묶은 크리스트교가 그것이다. 이 세 뿌리는 때로 충돌하고 때로 융합하면서, 분열과 통합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폴리스의 분립과 헬레니즘의 통합, 로마의 통일과 그 해체, 봉건적 분권과 국민국가의 형성, 두 차례 세계대전의 분열과 전후의 통합이 모두 같은 리듬을 그린다. 유럽의 역사를 한 편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갈라지면서도 다시 하나로 모이려는 힘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