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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서 연민으로 — 호메로스 《일리아스》

기원전 8세기, 한 시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노래한 것은 단순한 전쟁담이 아니라, 서구 문학 전체의 출발점이 된 불멸의 인간 드라마였다. 사랑과 증오, 분노와 슬픔, 복수와 연민, 영광과 절망 — 이 거대한 감정의 우주는 놀랍게도 단 하나의 감정, 한 영웅의 분노에서 빅뱅처럼 터져 나온다.


1.하나의 분노에서 시작된 우주

신은 영원하고 인간은 유한하다 — 그 차이가 영웅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 분노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트로이 전쟁 10년째, 그리스 연합군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최강의 전사 아킬레우스가 직접 얻은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아 간 것이다. 고작 여인 하나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리품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전사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아가멤논의 행위는 그리스 최강 전사의 명예를 전군 앞에서 공개적으로 짓밟은 것과 같았다.

비유

전리품을 빼앗긴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군인의 가슴에서 훈장을 떼어내 남에게 넘겨주는 일에 가깝다. 금전적 손실이 아니라 공개적인 모욕이다. 아킬레우스가 분노한 것은 가진 것을 잃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반응은 단호했다. 전투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분노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최강의 전사를 잃은 그리스군은 연전연패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이 모든 갈등을 지켜보는 또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다. 이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각기 편을 갈라 전쟁에 뛰어든다. 헤라와 아테나는 그리스 편을, 아폴론과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편을 들면서 신과 인간이 뒤엉킨 대혼란이 시작된다. 이렇게 전쟁터는 단순한 인간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와 유한한 존재가 한 무대에 서는 기묘한 장이 되었다.

여기에 《일리아스》의 핵심 구조가 있다. 신들은 불완전하지만 영원히 산다. 시간이 무한하니 자신의 결함에도 여유롭고 태평하다. 다툼조차 그들에게는 한낱 심심풀이다. 반면 인간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안고 산다. 바로 이 조건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감정들이 폭발한다. 명예를 향한 타오르는 갈망, 모욕당했을 때의 분노, 죽음 앞에서 느끼는 연민까지. 다시 오지 않을 짧은 순간들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뜨거운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영원하기에 여유로운 신들이 질투하고 다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한하기에 절박한 인간들이 영원한 명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다. 이렇게 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일리아스》는 다름 아닌 이 영웅들의 이야기다.

신 · 불멸(不滅) 인간 · 필멸(必滅) 끝나지 않는 시간 결함조차 가벼운 유희 다툼마저 심심풀이 한정된 시간 절박한 갈망과 명예 목숨을 건 단 한 번 영웅 (英雄) 신의 영원을 흉내 내어 명예를 좇는 유한한 인간
영원한 신과 유한한 인간이라는 이중 구조. 죽음이라는 한계가 인간을 절박하게 만들고, 그 절박함이 명예를 좇는 ‘영웅’을 빚어낸다.

28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 무시당하면 분노하며, 소중한 것을 잃으면 절망에 빠진다. 《일리아스》가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극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2.비극의 씨앗 — 결혼식과 황금 사과

한 시인은 며칠을 노래했지만, 그 분노의 뿌리는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일리아스》는 사실 트로이 전쟁 10년째 되는 해의 단 며칠만을 다룬다. 거대한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만 보여주는 셈이다. 당시 청중은 이미 구전을 통해 전쟁의 전체 맥락을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시인은 긴 설명 없이 곧장 감정의 절정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경을 따로 되짚어야 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왜 그토록 세상을 뒤흔들었는지 이해하려면, 이 모든 비극의 진짜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한 결혼식에서 시작되었다.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이다. 이 결혼에는 충격적인 뒷이야기가 있다. 원래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아름다운 테티스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그때 끔찍한 예언이 전해졌다. “테티스가 낳은 아들은 반드시 그 아버지보다 강한 존재가 되리라.” 아버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권좌에 오른 제우스에게는 오싹한 예언이었다. 두 신은 곧장 테티스를 포기하고 그녀를 인간과 결혼시키기로 한다. 아버지가 인간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아들이 태어나도 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선택된 남자가 펠레우스였고, 그는 훗날 그리스 최강 전사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된다.

온 우주의 신들이 모여든 성대한 결혼식. 그러나 단 하나, 초대받지 못한 존재가 있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다. 평화로운 자리에 분쟁의 씨앗을 뿌릴까 봐 의도적으로 제외된 것이다.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에리스는 황금 사과 하나를 만들어 그 위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귀를 새겨, 잔치가 절정에 달한 순간 신들 한복판으로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 세 여신이 저마다 그 사과의 주인이라며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이 다툼을 판정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전능한 제우스조차 손을 들었다. 헤라는 그의 아내요 아테나는 그의 딸이니, 어느 쪽을 택해도 집안이 발칵 뒤집힐 판이었다. 결국 제우스는 판정을 중립적인 제3자에게 떠넘긴다. 그렇게 선택된 이가 이데 산에서 양을 치던 한 미남 목동, 사실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다.

파리스가 왜 산골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어머니 헤카베가 임신 중에 횃불이 온 트로이를 태우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아이를 살려두면 트로이가 불바다가 되리라”는 해몽에 따라, 갓난 파리스는 이데 산에 버려졌다. 그러나 목동들이 그를 거두어 친자식처럼 키웠고, 파리스는 자신이 왕자인 줄도 모른 채 평화롭게 자랐다. 그런 그 앞에 세 여신이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자를 판정해 달라며 차례로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헤라 권력 — 아시아의 왕권 아테나 지혜와 승리 — 모든 전쟁의 승리 아프로디테 사랑 — 가장 아름다운 여인 파리스의 선택 헬레네를 향한 사랑 → 트로이 전쟁의 불씨
파리스의 심판. 권력(헤라)도 승리(아테나)도 아닌 사랑(아프로디테)을 택한 한 청년의 결정이, 결국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다.

파리스는 망설임 없이 아프로디테를 택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이 바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 —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라는 치명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아프로디테의 인도로 스파르타 궁전을 찾은 파리스가 헬레네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도, 왕비로서의 의무도, 조국에 대한 충성도 모두 잊었다. 강렬한 사랑에 사로잡힌 헬레네는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로 떠난다. 참혹한 전쟁을 부르는 신호탄이었다.

이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다.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미래를 보는 예언의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받은 능력이었다. 그녀가 아폴론의 청혼을 거절하자, 신은 능력을 빼앗는 대신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카산드라가 아무리 다가올 멸망을 외쳐도, 사람들은 헛소리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3.천 척의 함대 — 맹세가 부른 전쟁

신들 앞에서 한 약속이 그리스 전체를 전쟁으로 끌어냈다

왕비를 잃은 메넬라오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 혼자서는 트로이를 상대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형이 있었으니, 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 아가멤논이었다. 그런데 아가멤논이 그리스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힘 말고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헬레네의 결혼에 숨겨진 강력한 맹세다.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공주이던 시절,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 그리스 전역의 왕과 영웅이 모두 청혼했다. 자칫 구혼자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헬레네의 아버지 틴다레오스가 제안했다. “헬레네가 누구를 선택하든 모두 승복하고, 그 남편이 위험에 처하면 다 함께 힘을 합쳐 돕겠다고 맹세하라.” 구혼자들은 자신이 뽑힐 경우의 안전을 생각해 순순히 맹세했고, 최종적으로 메넬라오스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이제 아가멤논은 그 신성한 맹세를 이행할 때가 왔다며 전 그리스에 소집령을 내린다.

그러나 모든 왕이 순순히 나선 것은 아니다. 몇몇은 갖은 방법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첫 번째가 오디세우스다.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 갓 태어난 아들 텔레마코스와 행복한 그는 미친 척하기로 한다. 밭에 소금을 뿌리며 의미 없는 쟁기질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영리한 전령이 어린 텔레마코스를 쟁기 앞에 눕히자, 오디세우스는 본능적으로 쟁기를 멈췄다. 부성애가 그의 연기를 무너뜨린 것이다.

더 기막힌 사례는 그리스 최강 전사 아킬레우스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무서운 예언을 들었다. “아들이 트로이에 가면 불멸의 명성을 얻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잃으리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테티스는 아들을 처녀로 둔갑시켜 스키로스 섬 공주들 틈에 숨겼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참전해야 트로이를 함락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기에, 그리스 연합은 끝까지 그를 찾아 나섰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행상인으로 변장해 왕궁에 나타나, 여성용품 사이에 검과 방패를 슬쩍 섞어 놓았다. 번쩍이는 무기를 본 아킬레우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전사의 자세를 취하는 순간,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렇게 영웅들이 아울리스 항구로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맹세 때문에, 어떤 이는 병역 기피에 실패해서. 1천 척이 넘는 배가 바다를 뒤덮었다. 그런데 정작 출항할 바람이 불지 않았다. 신탁을 구한 아가멤논은 자신이 사냥 중에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사슴을 죽이고 거만한 말을 한 탓에 여신이 노했음을 알게 된다. 여신의 분노를 풀려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찢어졌지만 아가멤논은 결국 딸을 제물로 바쳐 바람을 얻는다. 그렇게 천 척의 배는 복수의 바다를 가르며 트로이로 향했고, 이후 10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 10년째의 며칠에서 막을 연다.


4.기억에서 문자로 — 서사시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 시인이 신에게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리아스》의 첫머리에서 놓치면 안 될 대목이 있다. 시인은 “내가 들려주겠다”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신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여기서 여신은 예술의 신 무사(뮤즈)다.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자매로, 시인은 이 여신들에게 절실하게 매달린다. 이 엄청난 이야기를 제대로 노래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왜 이렇게까지 신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그 답은 당시 그리스의 상황에 있다.

시인이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8세기는 인류사에서 다소 예외적인 시대였다. 그전 수백 년간 그리스에서 문자 사용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원래 미케네 문명 시절에는 ‘선형문자 B’라는 음절 문자가 있어, 궁전의 서기관들이 세금 대장부터 군사 기록까지 꼼꼼히 적었다. 그러나 이 문명이 기원전 12세기경 기후 변화와 내부 분열, 외부 민족의 이동 등 복합적 요인으로 붕괴하면서 궁전 체계가 무너졌고, 선형문자 B도 더 이상 전승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략 기원전 1200-800년경을 ‘암흑시대’라 부른다. 기록이 남지 않아 깜깜한, 마치 문명이 한 번 리셋된 듯한 시대였다.

이 시기에 중요한 이야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보존되었다. 사람의 기억이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으로 전하는 것. 그 가운데 그리스인이 결코 잊어선 안 될 이야기가 트로이 전쟁이었다. 기원전 13세기 또는 12세기에 실제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쟁은 그리스인의 자존심이자 하나의 정체성으로 그들을 묶어 주었다. ‘아오이도스’라 불린 전문 노래꾼들이 축제와 연회를 돌며 이 웅장한 서사를 펼쳤다. 이들이 없었다면 트로이 전쟁은 물론 그리스 신화 전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기원전 8세기 무렵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인이 페니키아인에게서 문자를 배워 와, 모음 몇 개를 더해 알파벳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문자가 부활한 이 순간이 바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결정적 시점이다. 수백 년간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가 마침내 문자로 고정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과연 호메로스라는 한 사람이 정말 존재했을까.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두 편의 서사시를 혼자서 창작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두고 학계는 200여 년간 논쟁했다. 한쪽 ‘분석론자’들은 여러 세대의 시인이 조금씩 보태어 만든 집단 작품이며 호메로스는 상징적 이름일 뿐이라 보았다. 반대편 ‘단일론자’들은 이만큼 완벽한 구조와 일관된 주제 의식이 합작품일 리 없으며, 한 시인이 기존의 구전 전승을 바탕으로 정리했으리라 보았다. 이 ‘호메로스 문제’는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단일론에 가깝거나 두 견해를 절충한 입장이 우세하다.

또 하나의 의문. 문자로 적히기 전, 어떻게 이 긴 서사시를 정확히 외워 공연했을까. 《일리아스》만 해도 약 1만 5천여 행에 달한다. 비밀은 두 가지 장치에 있었다. 첫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흐르는 운율 ‘헥사메터’다. 이 리듬감 자체가 기억을 돕는다. 둘째는 미리 만들어 둔 ‘정형구’다. ‘발 빠른 아킬레우스’, ‘투구를 흔드는 헥토르’,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같은 고정 표현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운율을 맞추기 위한 정교한 부품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우리가 읽는 24권의 구분은 호메로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들이 정리하며 붙인 편집상의 구획으로 본다. 그래서 각 권은 그리스 문자 첫 자(알파)부터 끝 자(오메가)까지 24개 글자에 차례로 대응된다.

비유

구전 시인은 수천 개의 정형구와 이야기 패턴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마치 재즈 연주자처럼 매번 즉흥적으로 변주했다. 정해진 코드와 리듬 위에서 그날의 분위기와 청중의 반응에 따라 디테일을 바꿔 가며 연주하듯, 같은 시인이 같은 이야기를 해도 매번 조금씩 달랐다. 덕분에 이야기의 뼈대는 보존되면서도 매번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리아스》에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어색함이 아니라, 이 즉흥 공연을 가능케 한 정밀한 기억 장치였던 셈이다.


5.역병과 분노 — 이야기의 시작

제1권: 두 차례의 거절이 신과 인간의 분노를 동시에 불러온다

드넓은 바다 위에 1천 척이 넘는 그리스 함선이 묶여 있다. 10년째다. 그런데 이 살벌한 전쟁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나타난다. 백발의 늙은 사제가 아폴론의 황금 홀을 들고 그리스 군영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무엇이 그를 적진으로 이끌었을까. 사랑하는 딸 때문이다. 크리세이스라는 처녀가 전리품으로 끌려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수발을 들고 있었고, 사제 크리세스는 금과 은으로 가득한 무거운 몸값을 들고 딸을 되찾으러 온 것이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늙은 사제를 험악하게 쫓아낸다. 절망에 찬 크리세스가 자신이 모시는 아폴론에게 복수를 빌자, 은 화살의 신은 그리스 군영을 향해 역병의 화살을 쏘아 댄다. 노새와 개에서 시작된 역병이 삽시간에 군영 전체를 덮쳤고, 아흐레 동안 시신을 태우는 장작이 끊이지 않았다. 열흘째,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소집한다. 예언자 칼카스는 보호를 약속받고서야 입을 연다. 모든 재앙의 원인은 아가멤논이며,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고 아폴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의 톱니가 맞물린다. 딸을 돌려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 아가멤논은 자신만 명예의 상을 잃을 수 없다며 보상을 요구한다. 아킬레우스가 탐욕스럽다고 받아치자, 아가멤논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그렇다면 네 것을 빼앗겠다. 브리세이스를 가져가겠어.” 아킬레우스는 9년간 눌러 온 불만이 폭발한다. 가장 뛰어난 전사인 자신이 늘 아가멤논 밑에서 복종하며 더 적은 보상을 받아 왔다는 울분이었다. 격분한 그가 칼자루로 손을 뻗는 순간, 헤라가 보낸 아테나가 그의 머리채를 잡아 만류한다. 칼이 아니라 말로만 꾸짖으라는 것. 아킬레우스는 이를 악물고, 언젠가 그리스군이 자신을 아쉬워할 날이 오리라 저주하며 전쟁에서 발을 뺀다.

막사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바닷가에서 어머니 테티스에게 부르짖는다. 단명할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명예라도 지켜져야 하는데, 그마저 아가멤논에게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격적인 부탁을 한다. 제우스에게 청해, 자신이 빠진 동안 트로이군이 그리스군을 쳐부수게 해 달라고. 그래야 모두가 최고 전사를 모욕한 어리석음을 깨달으리라는 것이다. 테티스는 올림포스로 올라가 제우스에게 간청하고, 제우스는 헤라와의 분란을 우려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한 인간의 분노가 신들의 세계까지 움직인 순간이다.


6.전장의 신과 인간

제2권-제8권: 한 인간이 여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한 영웅은 가족과 작별한다

제우스는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내 트로이를 함락할 때가 왔다고 속삭인다. 들뜬 아가멤논은 짐짓 병사들의 사기를 시험하려다 일이 꼬인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연설에 병사들이 환호하며 배로 달려간 것이다. 헤라가 보낸 아테나의 재촉을 받은 오디세우스가 황금 홀을 들고 나서서야 사태가 수습된다. 그는 9년의 세월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며, 칼카스의 예언대로 10년째에 트로이가 함락되리라는 희망으로 병사들을 다잡는다. 이어 그 유명한 ‘배들의 목록’이 펼쳐진다. 현대 독자에게는 다소 지루한 명단이지만, 당시 청중에게는 조상들이 바다 건너로 대규모 원정을 떠났다는 자부심을 일깨우는, 마치 자국 선수단이 호명되는 개회식 같은 대목이었다.

제3권에서는 양군이 맞붙기 직전, 표범 가죽을 걸친 파리스가 일대일 결투를 청한다. 10년간 복수를 꿈꾼 메넬라오스가 달려들자, 호기롭던 파리스는 새파랗게 질려 동료들 사이로 달아난다. 형 헥토르의 질책을 받고서야 파리스는 헬레네와 모든 보물을 걸고 메넬라오스와 단판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이긴 자가 모두 갖고, 나머지는 우정의 맹약을 맺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결투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거의 제압한 순간, 아프로디테가 안개로 그를 감싸 트로이 성 안 침실로 빼돌린 것이다.

제4권에서 신들은 전쟁을 끝낼지 이어 갈지를 두고 거래한다. 헤라의 뜻에 따라 아테나가 트로이의 명궁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화살을 쏘게 하고, 신성한 맹약은 깨진다. 이로써 본격적인 첫날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제5권, 디오메데스라는 전사가 등장해 그리스군의 우위를 이끈다. 한 전사가 신의 힘을 부여받아 전장을 휩쓰는 이 대목을 ‘수훈기(아리스테이아)’라 부른다.

비유

수훈기는 게임에서 한 캐릭터가 잠시 무적에 가까운 상태로 적진을 쓸어버리는 ‘원맨쇼’에 해당한다. 아킬레우스가 빠진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인은 디오메데스에게 잠시 주인공의 조명을 비춘다. 아테나의 가호를 받은 그는 적을 도륙할 뿐 아니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전쟁의 신 아레스의 복부까지 찔러 올림포스로 도망치게 만든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리아스》에서만 볼 수 있는 아찔한 장면이다.

제6권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신들이 잠시 물러난 전장에서 트로이의 헥토르가 성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아내 안드로마케와 마주한다. 어린 아들을 안고 선 부부 앞에서 안드로마케는 눈물로 호소한다. 그 용기가 당신을 죽일 것이며, 나와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고. 헥토르는 자신도 두렵지만, 물러선다면 트로이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고 답한다. 그는 언젠가 트로이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끌려가 울부짖을 아내의 고통이 가장 마음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두에 선다. 그러고는 아들을 안아 들고, 이 아이가 아비보다 훌륭한 전사가 되게 해 달라 기원한다. 피가 튀는 전투 틈에 새어 나오는, 작품에서 가장 인간적인 숨결의 장면이다.

헥토르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그리스어 개념이 필요하다.

개념

클레오스(kleos)는 ‘들리는 것’, 곧 ‘소문’에서 온 말로 ‘명성’을 뜻한다. 명성이 높으면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영원히 전해진다. 유한한 인간이 신의 속성인 불멸을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도스(aidos)는 ‘수치심’이다. 영웅의 행동은 명성을 좇는 동시에 수치를 피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헥토르가 물러서면 트로이 여인들 앞에 면목이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아이도스다.

문제는,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면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데 있다.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것. 가늘고 긴 삶이냐, 짧고 굵은 삶이냐 — 영웅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진다. 헥토르는 지금 가족을 뒤로하고 명예의 길로 걸어 나간다.

제7권에서는 헥토르와 그리스의 거인 아이아스가 대등하게 맞붙고, 날이 저물어 무승부로 끝난다. 그리고 제8권, 마침내 제우스가 테티스에게 한 약속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황금 저울을 꺼내 양쪽 운명을 달고, 그리스군 쪽이 죽음을 향해 기울게 만든다. 천둥과 번개로 신호를 보내자, 우세하던 그리스군이 헥토르의 활약 앞에 순식간에 밀려 마지막 보루인 함선 앞까지 몰린다. 한 영웅의 분노가 전쟁의 저울을 통째로 기울인 것이다.


7.거부당한 화해 — 두 운명의 선택

제9권: 산더미 같은 보상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위기에 몰린 아가멤논은 한밤중 회의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줄 어마어마한 보상 목록을 내놓는다. 세발솥과 황금, 말과 여인들, 심지어 자신의 딸과 번화한 도시들까지. 그러나 끝에 가서 그는 “아킬레우스도 굴복하는 게 좋을 것이며, 나는 더 위대한 왕이고 연장자”라며 본심을 드러낸다. 상황 때문에 굽힐 뿐 근본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사절단이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는다. 그들은 위기의 절박함을 강조하고, 헥토르의 기세로 경쟁심을 부추기며, 아버지 펠레우스의 당부까지 끌어온다. 그러나 모든 보상 목록을 듣고도 아킬레우스의 반응은 차갑다. 앞장서 싸우나 뒤에 남으나 똑같은 대우를 받았고, 사랑하던 여인마저 빼앗긴 마당에 이제 와 선물에 속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갈래 운명의 선택을 털어놓는다.

여신인 어머니가 일러 준 두 갈래 운명. 트로이에 남아 싸우면 짧은 생애 끝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명성을 얻고, 배를 돌려 고향으로 가면 오래 살되 그 이름은 끝내 잊힌다.

아킬레우스는 이 시점에서 후자를 택하겠다고, 즉 영웅이 아닌 보통의 긴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트로이의 모든 보물도 자기 목숨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사절단은 빈손으로 돌아가고, 그리스 진영에는 더 깊은 절망이 내려앉는다.


8.친구의 죽음

제11권-제18권: 분노의 방향이 바뀌는 거대한 전환점

그리스군이 함선까지 몰리고 핵심 전사들이 줄줄이 부상당하는 동안,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동료들의 참상을 목격한다.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출전을 간청하고, 끝내 한 가지 절충안을 얻어 낸다.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대신 나가는 것이다. 적이 아킬레우스로 착각해 물러나는 사이 그리스군이 숨을 고를 수 있으리라는 노장 네스토르의 계책이었다. 아킬레우스는 허락하되 단 하나의 조건을 단다. 적을 함선에서 몰아내는 데까지만 하고, 절대 깊이 추격하지 말라는 것.

아킬레우스의 빛나는 갑옷을 입고 나선 파트로클로스 앞에서 트로이군은 동요한다. 파트로클로스는 눈부신 활약으로 적을 몰아붙이고, 마침내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마저 쓰러뜨린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을 운명임을 안 제우스는 핏빛 비를 뿌려 애도할 뿐,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개입을 포기한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한 파트로클로스는 경고를 잊고 트로이 성벽까지 추격한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폴론이 그의 등을 내리쳐 무장을 풀어 버리자, 무방비가 된 그를 한 트로이 병사가 창으로 찌르고 헥토르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쓰러지는 파트로클로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자신을 죽인 것은 제우스와 아폴론이며 헥토르는 세 번째일 뿐이라고, 그리고 너 또한 아킬레우스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그렇게 아킬레우스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다. 비보를 들은 아킬레우스는 먼지 속에 드러누워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한다. 그 거대한 울음이 바닷속 어머니 테티스에게까지 닿는다.

이 순간 분노의 방향이 바뀐다. 아가멤논을 향하던 분노가 헥토르를 향한 복수심으로 갱신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기로,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도 곧 죽으리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한때 택했던 ‘길고 평범한 삶’을 스스로 버린 셈이다. 어머니 테티스는 더 이상 아들을 막지 못하고,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서 인간사의 온갖 장면이 새겨진 새 무장을 구해다 준다.


9.짐승이 된 영웅

제19권-제22권: 복수에 사로잡힌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 형식적으로 화해한다. 이때 아가멤논은 자신의 잘못을 신이 보낸 ‘미망’ 탓으로 돌린다. 이 대목은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본질을 보여 준다.

개념

미망(아테, Ate)은 정신적으로 눈먼 상태, 맹목에서 오는 판단 착오를 가리킨다. 성격적 결함이나 의도적 악행과 무관하게, 경쟁에 집착하는 영웅에게 신이 내리는 일종의 홀림으로 여겨졌다. 즉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실수다.

이는 후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하마르티아(hamartia)로 이어진다. ‘과녁에서 빗나감’이라는 뜻으로, 악행이 아니라 행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빚어지는 인지적 오류를 말한다. 영웅을 비극으로 이끄는 것은 악이 아니라 바로 이 빗나감이다.

새 무장을 갖춘 아킬레우스는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전장에 나선다. 그의 대학살이 시작되고, 스카만드로스 강물마저 시신으로 가득 찬다. 강의 신이 직접 솟구쳐 그를 덮치자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맞서는, 자연과 신이 뒤엉킨 격전이 벌어진다. 마침내 트로이군은 모두 성 안으로 퇴각하고, 성문 앞에는 단 한 사람, 헥토르만이 남는다.

성벽 위에서 늙은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어머니 헤카베가 들어오라 애원하지만, 헥토르는 꿈쩍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됐다는 수치심을 씻으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아킬레우스가 질주해 오자, 그토록 용맹하던 헥토르도 돌아서서 달아난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 공포는 가장 용감한 영웅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두 사람은 성벽을 따라 세 바퀴를 돈다.

네 번째에 이르러 제우스가 황금 저울을 들자, 헥토르의 운명이 죽음을 향해 기운다. 그를 돕던 아폴론이 떠나고, 아테나가 헥토르의 형제 데이포보스로 변신해 그를 속인다. 곁에 동생이 있다고 믿은 헥토르는 당당히 맞서지만, 창을 잃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신들이 자신을 버렸음을 깨달은 그는, 그래도 명예를 위해 칼을 빼 들고 달려든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가 입은 옛 갑옷 — 파트로클로스에게서 빼앗은 자신의 갑옷 — 의 빈틈을 알고 있었다. 쇄골과 목 사이의 작은 틈으로 창이 파고든다. 헥토르는 마지막 숨으로 시신을 돌려 달라 애원하지만, 짐승에 가까워진 아킬레우스는 거절하고 그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닌다. 트로이 도시 전체가 통곡에 잠긴다.


10.복수에서 연민으로 — 분노의 정화

그리스 진영으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시신 주위를 세 바퀴 돈다. 아직 짐승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곧 그는 아가멤논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내일 아침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릅시다. 시신이 눈앞에 없어야 병사들이 제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례가 끝난 뒤, 아킬레우스는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추모 경기를 연다. 전차 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활쏘기, 창던지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이 장면이 중요한 까닭은 따로 있다. 분노에 사로잡혀 적을 도륙하고 시신을 모독하던 그가, 이제는 경기를 주관하고 분쟁을 지혜롭게 조정하며 상을 공정하게 나눠 주는, 마치 좋은 왕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동료들과의 식사조차 거부하던 야생의 전사가 다시 인간 공동체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이제 마지막 24권. 다른 이들은 잠들었으나 아킬레우스만은 잠 못 이루며, 울컥할 때마다 헥토르를 전차에 매달고 무덤을 돈다. 보다 못한 신들이 회의를 열고, 제우스는 타협안을 낸다. 테티스를 통해 아킬레우스를 설득해 몸값을 받고 시신을 내주게 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제우스는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에게 전령을 보내, 직접 선물을 들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라 이른다.

프리아모스는 늙은 전령 한 명만 데리고, 제우스가 붙여 준 헤르메스의 인도를 받아 적진 한복판의 막사에 도착한다. 그는 다짜고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간청한다. “그대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해 주시오. 그분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실 텐데, 나는 이미 모든 아들을 잃었소.”

이 탄원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갑자기 울음이 북받친다. 노인의 손을 가만히 밀어 놓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프리아모스도 따라 운다. 한 사람은 죽은 아들 헥토르를 위해, 한 사람은 멀리 있는 늙은 아버지와 이미 떠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운다. 우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슬픔의 깊이는 같다. 충분히 울고 난 아킬레우스는 노인을 일으켜 자리에 앉히고, 적진을 홀로 뚫고 온 그 용기를 진심으로 칭송한다. 그리고 인생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기 마련이라며, 자신의 아버지 펠레우스의 처지를 빌려 노인을 위로한다. 어느새 두 원수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슬픔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일리아스》의 1권과 24권은 놀라울 만큼 닮은 구조를 이룬다. 첫머리에서는 늙은 사제 크리세스가 딸 크리세이스를 찾으러 적진에 왔고, 끝에서는 늙은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적진에 온다. 다만 결과는 정반대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청원을 냉정하게 내쳐 아폴론의 역병과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거대한 후폭풍을 불렀지만,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청원을 받아들이며 그 모든 분노의 사슬을 스스로 끊는다.

늙은 사제 크리세스 딸의 몸값 청원 아가멤논의 거절 역병과 분노 늙은 왕 프리아모스 아들의 시신 청원 아킬레우스의 수락 연민과 정화 제 1권 제 24권 거울처럼 마주 보는 처음과 끝
거울처럼 마주 보는 1권과 24권. 같은 청원이 한 번은 거절로 재앙을 부르고, 한 번은 수용으로 화해를 부른다. 작품 전체가 이 대칭 위에 놓여 있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끝까지 분노에 갇혀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일리아스》는 한 영웅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적대감이 인간애로, 증오가 이해로 승화되는 순간을 택했다. 빅뱅처럼 하나의 분노에서 터져 나온 수많은 감정이 마침내 연민이라는 거대한 감정으로 정화되는 것이다. 작품의 첫 단어가 ‘분노’였다면, 작품이 끝내 도달한 자리는 ‘연민’이었다.

감정의 강도 이야기의 흐름 → 모욕과 분노 침묵의 이탈 파트로클로스 의 죽음 광기와 학살 헥토르 처단 프리아모스 연민 전환점 정화
한 영웅의 마음이 지나온 길. 모욕에서 시작된 분노는 친구의 죽음을 지나 짐승의 광기에 이르렀다가, 적의 아버지를 마주한 자리에서 연민으로 가라앉는다.

프리아모스는 장례 기간만큼 전쟁을 멈추겠다는 아킬레우스의 약속을 안고 헥토르의 시신을 모셔 간다. 트로이는 아흐레 동안 장작을 모으고 열흘째 헥토르를 화장한다. 도시의 함락도, 그리스의 승리도, 목마의 계략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한 사람의 장례라는 조용한 장면으로 이 거대한 서사시를 닫는다. 작품의 마지막 행이 전하는 장면을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트로이 사람들은 말을 길들이던 영웅 헥토르의 장례를 마쳤다.


11.2800년을 관통한 유산

《일리아스》는 분노에서 시작해 연민으로 끝나는 한 인간의 성장기다. 전장의 승리만을 명예로 알던 전사가, 원수조차 연민으로 끌어안는 자리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더 큰 질문들을 던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거대한 질문에만 있지 않다. 그는 쓰러지는 모든 인물의 죽음을 하나하나 비춰 준다. 이름 없는 병사가 죽어도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며 고향에서 누가 그를 기다리는지를 일러 준다. 그래서 《일리아스》는 전쟁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극한에서만 빛나는 용기와 명예를 함께 그려 낸다. 전쟁을 찬양하지도, 단순히 비난하지도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일 뿐이다. 그 깊이 때문에 이 작품은 전쟁 이야기를 넘어 인간에 관한 한 권의 백과사전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일리아스》를 문학이 아니라 삶의 교과서로 여겼다. 일곱 살 아이가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가장 오래 배우는 것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였다. 읽고 쓰는 법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이고 훌륭한 삶은 어떤 것이며 죽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영웅들의 행적을 통해 몸으로 익혔다. 성인이 되어 민주 시민으로서 연설하고 논쟁할 때도, 그들은 호메로스의 구절을 절대적 권위로 인용했다.

비유

지중해와 에게해에 흩어진 1000개가 넘는 그리스 도시들은 제도도 방언도 제각각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같은 영웅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같은 가치를 좇았다. 마치 응원하는 팀도 사는 동네도 다른 사람들이, ‘같은 국가(國歌)를 부를 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나라 사람임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바로 그 공통의 노래였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호메로스가 그리스 전체를 가르쳤다는 견해를 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이야기로 묶인 공동체’는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를 움직였다.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침공했을 때, 평소 서로 다투던 도시들이 같은 조상과 같은 영웅을 모시는 한 민족으로 뭉쳐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살라미스 해전을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승리를 신들과 영웅들의 가호로 돌렸다고 전한다. 훗날 그리스 세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던 시절, 이소크라테스는 트로이 원정 때처럼 공통의 적을 향해 다시 하나가 되자고 호소했다. 모든 그리스가 화합해 페르시아로 향하자는 그의 구상은, 말하자면 현실판 두 번째 트로이 원정이었다.

그 꿈은 알렉산드로스를 통해 현실이 되었다. 그는 소년 시절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웠고, 스승이 직접 손본 《일리아스》 사본을 늘 곁에 두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이 사본을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두고 잠들며 전쟁 기술의 길잡이로 삼았다고 한다. 값진 함에 넣어 다녔다 하여 후대에 ‘함 속의 일리아스’로 불린 책이다.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도 트로이 유적지로 달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로마에 이르면,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통해 로마의 기원을 트로이 세계와 잇는다. 트로이 멸망 때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시조가 된다는 이 연결로, 호메로스의 세계관은 로마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후대의 문호들에게 호메로스는 거듭 돌아가야 할 원점이었다. 단테는 《신곡》 지옥편의 림보에서 호메로스를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루카누스를 거느린 ‘시인들의 군주’로 그렸고, 괴테는 평생 그를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여기에 《오디세이아》까지 더하면,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모험과 귀향, 복수와 용서라는 서양 문학의 핵심 주제들이 이미 이 두 작품 안에 다 들어 있다. 2800년 동안 서양 문학이 이 두 작품에서 영감을 길어 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까지 함께 본 이야기는 《일리아스》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떠 온 작은 조개껍데기 한 조각에 불과하다. 결국 요약이기 때문이다. 깊고 풍부한 맛을 온전히 느끼려면 직접 완역본을 펼쳐 보는 수밖에 없다. 그 여정에 이 글이 작은 길잡이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