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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 전쟁사

마라톤에서 플라타이아까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세계 인구의 상당수를 거느린 대제국과, 산지에 흩어진 작은 도시국가 연합이 충돌했다. 영토·인구·동원력 어느 면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그리스가 어떻게 두 차례의 침공을 막아냈는가. 마라톤·테르모필레·살라미스·플라타이아로 이어지는 약 반세기의 전쟁을 따라간다.

차례
  1. 두 문명 — 다민족 제국과 느슨한 연합
  2. 이오니아 반란 — 전쟁의 불씨
  3. 1차 침공의 좌절과 흙과 물의 요구
  4. 마라톤 —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다
  5. 두 군대 — 경무장 보병과 팔랑크스
  6. 테르모필레 — 좁은 길목의 300
  7. 살라미스 —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이다
  8. 플라타이아·미칼레 — 페르시아를 몰아내다
  9. 전쟁이 남긴 것
세 편 시리즈 중 2편 · 1편 민주정의 형성 / 2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3편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6세기, 서아시아를 재패한 페르시아와 발칸반도 남부에서 막 민주정을 확립하고 지중해로 뻗어 나가던 그리스. 두 팽창하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때 페르시아가 승리해 그리스를 제국에 편입했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알렉산드로스를 통해 퍼지고, 그 영향을 받은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고, 그 유럽 문명이 근대화·산업화를 이루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니 말이다. 작은 도시국가들이 대제국의 서진을 막아낸 것은 세계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기점이다.


01두 문명 — 다민족 제국과 느슨한 연합

오늘날 이란의 파르스 지방에서 자리 잡았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만든 것은 키루스 2세였다. 그는 메디아·리디아·신바빌로니아 등 당시 서아시아 강대국들을 차례로 쓰러뜨렸고,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주변에 더는 대적할 국가가 없게 되었다. 진정한 전성기는 세 번째 샤한샤(왕중왕) 다리우스 1세 때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영토를 넓혀 아프리카·아시아·유럽 세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고, 관용 정책을 기반으로 정치·경제·문화를 융성시켰다.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민족이 섞인 다민족 국가였다면, 그리스 연합은 제각기 다른 도시국가지만 같은 그리스어를 쓰고 같은 그리스 신을 믿으며 4년에 한 번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한다는 점에서 느슨한 민족 정체성을 공유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750년경부터 약 200년간 척박한 본토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 마케도니아·트라키아 해안, 아나톨리아 서해안으로 이주해 식민 도시를 운영했다.

이 중 아테네에 거주하던 이오니아 방언 사용자들이 아나톨리아 서해안에 비교적 큰 규모로 정착한 일대를 이오니아(Ionia) 지역이라 한다. 이오니아는 비옥한 토지와 교역 중심지로서 일찍부터 부를 축적했고, 오리엔트의 선진 문명과 지식이 모여들어 탈레스·헤로도토스·피타고라스·히포크라테스 등 그리스의 걸출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나 철학, 기하학도 대부분 이오니아에서 건너온 것이다.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고, 그리스어를 쓰지 않는 이민족을 '야만인'이라는 뜻의 바르바로이(Barbaroi)라 불렀다. 그래서 기원전 540년경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점령했을 때, 이 개성 강한 그리스인들을 다스리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총독(사트라프)을 직접 파견하는 대신, 친페르시아 그리스인을 참주로 임명해 간접 지배했다. 그러나 참주는 실력으로 정권을 잡은 본토 참주와 달리 낙하산이었기에, 이오니아인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무거운 공물 요구와 무역 상권을 페니키아 쪽으로 몰아주는 행태까지 더해져, 그리스계 식민 도시들은 언제 반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02이오니아 반란 — 전쟁의 불씨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의 중심 도시이자 한때 경제 대국 리디아와 경쟁할 만큼 상공업이 발달한 밀레토스에서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사단을 일으킨 인물은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였다. 낙하산이다 보니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이 야망 있는 참주는 낙소스섬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낙소스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어 민중이 귀족을 내쫓았고, 밀레토스로 망명한 낙소스 귀족들이 아리스타고라스를 꼬드긴 것이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사르디스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를 찾아가, 낙소스 원정을 지원하면 막대한 전리품을 안기겠다고 설득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다리우스 1세의 승인을 받아 200척의 함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공동 지휘관 체계에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화가 난 공동 지휘관이 원정 계획을 낙소스에 흘려 버렸다. 정보를 들은 낙소스인들이 버티기 작전에 들어가자, 아리스타고라스는 군자금이 떨어져 밀레토스로 철수하고 말았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그는 '이왕 망한 거 막나가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오니아 도시 전체를 선동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선동을 위해 스스로 참주 자리에서 내려와 밀레토스가 민주정이 되었음을 선포했고, 다른 도시의 참주들도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러잖아도 분기탱천해 있던 이오니아인들은 그의 선동에 자발적으로 넘어갔다.

아리스타고라스는 그리스 본토에 협조를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다른 국가들도 동기가 없어 외면했지만, 에레트리아와 아테네가 지원에 나섰다. 아테네가 나선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밀레토스 아테네인들이 이오니아인이라는 점에서 동포를 돕기로 한 것이고, 참주에서 민주정으로 전환할 때 쫓겨난 참주 히피아스가 페르시아로 망명했다는 점, 또 사르디스의 아르타페르네스가 굴욕적인 동맹 조건(흙과 물을 바치라는 복종 요구, 히피아스의 참주 복귀 등)을 내걸어 외교적 결례를 범했던 점이 작용했다.

기원전 498년 봄, 아테네는 삼단노선 20척, 에레트리아는 5척의 군사를 이오니아로 보냈다. 이들은 이오니아 주력 부대와 합류해 아나톨리아 중심 도시 사르디스로 진격해 아랫 도시를 함락하고 키벨레 사원을 불태웠다. 그러나 곧 출격한 페르시아 정예군에 패해 에페소스로 후퇴했고, 추격당해 소탕되었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는 총공격을 감행해 밀레토스를 초토화했다. 그리스 측은 아리스타고라스가 도망쳐 구심점을 잃은 데다, 마지막 라데 해전에서 페르시아가 막대한 금전으로 협박과 회유를 하는 통에 주요 섬들이 이탈하면서 결국 반란군이 패배했다. 그렇게 6년간의 이오니아 반란은 진압되었다.

031차 침공의 좌절과 흙과 물의 요구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번 반란이 제국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 이는 그리스 본토 국가들을 처리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492년 봄, 다리우스 1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원정군을 맡겨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먼저 정복한 뒤 남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아토스곶을 통과할 때 격렬한 폭풍을 만나 300척의 배가 난파되고 2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케도니아 정복 과정에서 트라키아인에게 많은 군사가 죽고 총지휘관 마르도니우스마저 부상을 당해, 페르시아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탈했던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다시 정복했고, 그리스와 이오니아인에게 페르시아가 엄청난 대군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셈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1년 그리스 본토 도시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예상대로 많은 폴리스가 응했는데, 이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종교와 관습을 인정해 주는 회유 정책이 먹힌 결과였다.

다만 두 폴리스만이 흙과 물 대신 제국의 사신을 처형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아테네는 복종할 경우 망명 중인 참주 히피아스의 복귀로 민주정이 파괴될 소지가 있어, 민주 개혁파 지도층과 자유를 누리던 민중 모두 복종을 반대했다. 스파르타 역시 페르시아에 무릎 꿇을 수 없어 사신을 우물 아래로 던져 버렸다. 이때부터 서로 치고받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를 공동의 적 삼아 연대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04마라톤 —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사신을 처형하자,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는 제2차 원정군을 파병했다. 메디아 출신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지휘를 맡았으며, 약 25,000명의 보병과 600척의 함대가 출진했다. 목표는 사르디스를 불태운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고, 되도록 많은 그리스 국가를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에게해를 가로질러 케클라데스 제도의 섬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나아갔고, 이오니아 반란 때 함선을 내준 에레트리아에 당도했다. 에레트리아는 단단한 성벽에 의지해 농성했지만 페르시아에 포섭당한 귀족들이 성문을 열어 주어 6일 만에 함락당했다. 페르시아군은 신전과 성역을 모조리 불태우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에레트리아를 파괴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정벌을 위해 해안을 따라 아티카 반도로 향했고, 아테네 북동쪽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 평야에 상륙했다. 마라톤 평원은 바다가 육지로 휘어드는 만입부가 형성되어 있고 해안선이 길고 완만해 대규모 함대 주둔에 용이했다. 아테네에서 쫓겨난 참주 히피아스가 페르시아군을 이곳으로 안내했다.

밀티아데스와 선제공격 결정

아테네는 첩보를 통해 에레트리아 함락과 페르시아군 이동 소식을 들었다. 군사위원회(장군회)에서는 선제공격할지, 적이 올 때까지 기다릴지를 두고 한동안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은 장군 중 한 명인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에레트리아가 농성하다 함락당한 것을 교훈 삼아, 나가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알았다.

밀티아데스는 헬레스폰토스 지역 도시 케르소네소스의 참주였다가 페르시아의 그리스 북부 장악 때 점령당해 쫓겨난 인물이다. 이오니아 반란을 돕다 진압되자 고향 아테네로 돌아왔는데, 가문이 대대로 참주를 지냈기에 참주 경력으로 기소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무죄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천만다행이었다. 얼마 안 가 페르시아가 쳐들어왔고, 페르시아에 정통한 밀티아데스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장군 중 한 명으로 선출했고, 사태가 사태인 만큼 나머지 장군들이 총지휘권을 밀티아데스에게 넘겼다.

밀티아데스는 무장 가능한 모든 시민에게 동원령을 내려 중무장 보병 중심으로 약 9,000명의 군대를 편성했다. 동맹 폴리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호응이 없었고, 아티카 북서쪽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만이 600명을 보냈다. 스파르타에 최종 지원을 요청했으나,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이라 보름달 이전에는 누구도 떠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스파르타군 2,000명은 마라톤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도착하게 된다.

30킬로그램 무장으로 달리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을 가운데로 유인해 양 측면에서 에워싸는 작전을 펼쳤다. 페르시아 주력이 중앙에 위치해 쉽게 가운데로 파고들 거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팔랑크스 배치를 바꿔 가운데 열을 줄이고 그만큼 넓게 펼쳤다. 중앙을 얇게 포진해 길이를 페르시아 전열만큼 늘린 것이다.

마라톤 — 밀티아데스의 양익 포위 중앙은 얇게 펴 일부러 밀리고, 강한 양 날개로 측면을 깨 적을 에워싼다 페르시아군 (주력 중앙 집중) 아테네 중앙 (얇음) 좌익(강) 우익(강) 중앙은 서서히 후퇴 양 날개가 측면을 깨고 포위 결과 페르시아 약 6,400명 전사 · 아테네 192명·플라타이아 11명 전사 병력수가 절대적이던 고대 전투에서 전술로 이긴 대표 사례
중앙을 얇게 펴 의도적으로 밀리는 동안, 강한 양 날개가 적의 측면을 깨고 포위했다. 핵심 전력인 페르시아 기병이 마라톤 평원에서 싸우지 않고 함선으로 아테네로 향하고 있었던 점도 승리 요인이었다.

그렇게 페르시아군 약 1만 5천(주력 외 정예병 1만은 배에 태워 아테네로 향하던 중이었다)과 아테네·플라타이아 연합군 9,600명이 맞붙었다. 생각보다 병력 차이가 크지 않았고, 아테네는 홈그라운드에서 강국 스파르타와 메가라 군을 이긴 지 오래되지 않아 사기가 최고조였다.

먼저 움직인 아테네군은 빠른 걸음으로 페르시아군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페르시아 궁병의 사거리를 알던 밀티아데스는 200여 미터 지점에서 진격을 외쳤다. 명령을 받은 아테네군은 호플론(방패)을 머리 위로 올리고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30여 킬로그램의 무장을 짊어지고 미친 듯이 뛰는 모습에 페르시아군은 놀랐다. 두 진영이 충돌하자, 밀티아데스의 예상대로 페르시아군은 대형의 중간으로 깊이 치고 들어왔다. 아테네 중앙군은 적군을 포위할 때까지 눈치 못 채게 서서히 물러나면서도 전멸하지 않아야 했다. 그들이 버티며 물러나는 동안 양쪽 날개가 페르시아 측면을 파괴했고, 결국 중앙을 에워쌌다.

대대적인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근접전에서 경무장 페르시아군은 중무장 아테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페르시아군 갑옷은 천과 가죽으로만 만들어졌고, 방패는 화살 정도만 겨우 막아내는 방어력이었던지라 그리스군의 긴 창에 무참히 뚫렸다. 무엇보다 아테네 호플리테스의 약점인 기병이 마라톤 평야에 없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몰린 페르시아군은 배를 향해 도주했으나 하필 습지 방향으로 달아나 다리가 묶였고, 아테네군은 손쉽게 그들을 거두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전사한 반면, 아테네군은 192명, 플라타이아군은 11명만 전사했다(아테네 측 수치는 선전을 위해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마라톤은 이후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긴 전투'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승전 소식을 알리려 전령이 30여 킬로미터를 달려 아테네로 갔으며 소식을 전한 후 탈진해 숨졌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기념해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마라톤 종목이 생겼다. (다만 이 전령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마라톤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은 곧장 아테네로 전력 질주해야 했다. 페르시아 정예병이 함선으로 아테네 본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무장을 한 채로 30여 킬로미터를 세 시간 만에 주파해 페르시아 함선보다 먼저 도착했다. 거의 줄어들지 않은 아테네군이 진영을 갖추고 기다리는 것을 본 페르시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다리우스 1세의 아테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병력 동원 수도 그렇고, 페르시아의 원정 실패가 제국에 치명적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자신감이 수직 상승한 것은 이후 상황에 비추어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사자 192명을 전쟁 영웅으로 기렸고, 스파르타 없이 적은 지원군만으로 대제국을 이겼다는 사실을 마음껏 선전했다. 20년 전 참주를 살해하고 세운 민주정에서 시민군이 탄생했고, 이들이 전쟁 승리의 주역이었다. 이후 중무장 보병으로 참여한 유산 시민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아테네 민주정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05두 군대 — 경무장 보병과 팔랑크스

본격적인 후반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군대의 성격을 짚어 보자. 페르시아는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강제 징병하는 체제라 여러 민족의 군인이 섞여 있었다. 고대 전투는 병력 숫자가 승패를 절대적으로 좌우했기에 양을 늘리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페르시아 보병 대부분은 비용이 많이 드는 중장 보병보다 단출한 경장 보병이 줄을 이었다. 방패와 갑옷은 나뭇가지·천·가죽으로 제작되었고, 짧은 창과 단검을 휴대했다. 순수 페르시아인들은 활과 투창을 쓰는 궁병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 궁병은 최대 유효 사거리가 상당해 서아시아에서 공포의 부대로 소문났다. 그중에서도 활과 투창을 부리는 궁기병은 기동력과 원거리 공격으로 적을 교란하는 데 능했다.

페르시아의 시그니처 부대는 영화로도 유명한 불사부대(이모탈)다. 뛰어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최정예로 황제 호위병이었다. 1만 명으로 구성된 친위대 중 한 명이라도 결원이 생기면 곧바로 충원해 늘 1만 명을 유지했기에 '불사자'라 불렸다. (다만 60세가 다 된 다리우스 1세가 직접 원정을 나가지 않았기에, 마라톤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페르시아군은 원거리에서 궁병이 피해와 혼란을 준 뒤 경장 보병이 돌격하고, 기병이 측면과 후방을 교란하며 결정적 승리를 이끄는 방식으로 싸웠다.

호플리테스와 팔랑크스

페르시아가 경무장 보병을 주력으로 동원했다면, 그리스의 핵심은 중무장 보병이었다. 이들이 휴대한 호플론(Hoplon)이라는 방패의 이름을 따 호플리테스(Hoplites)라 불렸다. 호플리테스는 값비싼 청동 제품으로 중무장해야 했기에 일정 수준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병사가 될 수 있었다. 두꺼운 린넨 천을 청동으로 보강한 흉갑(토락스), 정강이 보호용 청동판, 청동 헬멧, 단검, 그리고 지름 1미터·무게 약 7~8킬로그램의 원형 방패 호플론, 길이 2~2.75미터의 찌르기용 장창을 갖췄다. 완전 무장 시 무게가 무려 30킬로그램 안팎에 달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개인 무장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전투 대형, 팔랑크스(Phalanx)를 발전시켰다. 중무장 보병이 약 90센티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직사각형으로 늘어선 대형이다. 핵심은 방패 운용에 있다. 호플론을 왼손으로 드니, 방패로 자신의 왼쪽 절반과 옆 사람의 오른쪽 절반을 동시에 방어한다. 이렇게 쭉 방어하면 맨 우측 사람의 오른쪽은 아무도 막아 줄 수 없게 되어, 그곳에 가장 노련하고 강한 병사를 배치했다.

비유로 이해하기

팔랑크스는 '내 목숨이 옆 사람의 방패에 걸려 있는' 구조다. 럭비의 스크럼이나 로마군 거북 대형처럼, 개인기보다 전열 유지가 전부다. 먼저 대형이 깨지는 쪽이 진다. 그래서 무엇보다 동료에 대한 신뢰와 단합된 조직력이 필수였다. 병사와 장교가 한 덩어리로 같은 대형을 이루었기에, 팔랑크스는 평등과 권리 의식이 자라나는 민주주의의 토양이 되기도 했다. 다만 측면과 후방, 특히 방패를 들지 않은 우측이 기병이나 경보병의 투사 무기에 취약했다.

06테르모필레 — 좁은 길목의 300

마라톤 패배에 분노한 다리우스 1세는 더 철저한 전쟁을 준비하다 기원전 486년 사망했고, 원정 과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로 이어졌다.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전역에 사절을 보내 흙과 물을 요구했다. 천여 폴리스가 응했고, 단 30여 개 폴리스만이 거부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쳤다.

기원전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그리스로 진격했다. 동원 규모는 엄청났다. 고대 사료는 250만~400만이라는 숫자를 제시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6만에서 30만 사이로 추정한다. 정확한 수치는 합의되지 않았으나, 최소 6만을 잡아도 마라톤(2만 5천)의 두 배가 넘는다.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코린토스에 모여 대책 회의를 했다. 최종 전략은,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지상군을, 아테네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막되, 안 되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급 문제로 철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스파르타의 군사 행동을 금지하는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이었다. 그러나 국가 존망이 걸린 일이라 병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정예병, 1,000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민, 900명의 노예(헤일로타이)가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떠났고, 행군하며 동맹군을 모아 도착할 무렵 총 7,000명 이상이 모였다.

테르모필레는 완벽한 방어 지형이었다. 한쪽은 산, 한쪽은 바다로 막힌 폭 100미터·길이 3,200미터의 좁은 통로로, 대군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없었다. 발칸반도 남쪽으로 진군하려면 이 천혜의 요새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호플리테스의 약점인 측면 공격이 산과 바다로 봉쇄되어, 팔랑크스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장소였다. 페르시아 주력인 궁기병의 기동성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도착 5일째 공격을 명령했다. 먼저 5천 궁병에게 화살을 퍼붓게 했으나 그리스군의 중무장을 뚫지 못했다(스파르타인들은 화살 때문에 그늘이 생겨 오히려 좋다며 여유를 부릴 정도였다). 1만 명의 보병을 보냈지만 그리스군은 전방과 후방의 병사를 바꿔 가며 체력을 안배한 데다, 중무장 팔랑크스가 땅에 박혀 있어 경무장 페르시아군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둘째 날 크세르크세스는 최정예 불사부대를 투입했으나, 그들 역시 좀 더 잘 갖춰 입은 경무장 보병에 불과해 무참히 으스러질 뿐이었다.

그때 보상금을 노린 현지인 에피알테스가 나타나, 스파르타의 뒤를 칠 우회길을 알려 줬다. (에피알테스는 이후 그리스어로 '악몽'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고 반역자의 원형이 되었다.) 페르시아군 2만여 명이 우회길로 접어들어 레오니다스가 배치해 둔 현지 포키스 부대를 패싱한 채 그대로 진군했다. 소식을 들은 레오니다스는 회의를 열었고, 빠르게 철수하자는 의견과 끝까지 사수하자는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그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 많은 병사를 살려 보내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고, 스파르타 정예 300명과 연합군 1천 가량을 남겨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새벽이 되자 남은 병력은 처절한 싸움을 시작했다. 창이 부러지면 단검을 뽑고, 칼이 부러지면 돌을 주워 싸웠으며,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주먹과 이빨로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크세르크세스가 궁병대로 엄청난 화살비를 쏟아부어 그리스군은 전멸했다. (훗날 1939년 고고학 발굴에서 이 장소에서 상당한 양의 청동 화살촉이 발굴되었다.) 그리스군은 약 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훗날 테르모필레의 전몰자를 기리는 비문이 세워졌고, 시인 시모니데스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그 짧은 글귀는 지나는 나그네에게 스파르타인들이 자기 나라의 명령을 따라 이 자리에 잠들어 있음을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흔히 '법을 지켜'라고 옮겨지지만, 원문의 그리스어는 법보다 '명령' 또는 '약속한 말'에 가깝다. 어떤 수사도 없이 죽음의 사실과 그것을 택한 이유만을 담담히 적은 이 비문은, 서양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사 비문으로 남았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의 첫 패배로 기록되었지만, 이 자살 특공대의 무모해 보이는 행위는 그리스군에게 수적 열세에도 페르시아에 맞설 수 있다는 용기를, 페르시아군에게는 그리스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었다.

07살라미스 —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이다

테르모필레가 뚫리자 아르테미시온 해협의 그리스 연합 함대는 싸움이 무의미하다 판단해 살라미스로 퇴각했다. 남쪽으로 길이 뚫린 페르시아군은 도시들을 불태우며 아테네로 나아갔다. 그런데 도착한 아테네는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르테미시온에서 돌아온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는 시민들을 불러 모아, 곧 페르시아 대군이 몰려올 테니 아테네를 떠나야 하고 싸울 수 있는 시민은 배에 올라 바다에서 맞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마라톤에서 중장보병으로 페르시아를 박살냈던 기억에, 고향을 두고 어딜 가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계급 높은 시민들은 중장보병의 자부심이 강해 최하위 노꾼 신세가 되는 것을 꺼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종교까지 동원했다. 마침 아테네 신전에 살던 뱀이 사라지자, 그는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를 떠나 바다로 간 것이라 말하고 다녔다. 또 델포이 신탁을 받아 왔는데, "나무로 만든 성에만 의지하라"는 말을 함선(갤리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끝까지 요지부동인 사람들은 마라톤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나서서 움직였다. 그는 말의 굴레를 벗겨 아테나 신전에 바치고는, "이러한 비상사태에 기마병이냐 노잡이냐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두 바다로 나가 싸우자"고 외쳤다. 결국 전쟁에 참전할 성인 남성을 제외한 사람들은 인근 섬으로 대피했고, 그 상황에서 크세르크세스가 텅 빈 아테네에 진입해 전 지역을 불태웠다.

선택지를 하나로 줄이는 계략

테미스토클레스는 시민들을 겨우 설득해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국가들이 함대를 코린토스 지협으로 물려 지상전을 하자고 주장하는 난관이 남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싸우는 것은 아테네를 포기하는 일이었고, 전략적으로도 넓은 사로니코스만에서는 페르시아 해군의 수가 압도적이라 순식간에 끝날 수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큰 배가 진입하기 어려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유인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페르시아 측은 이 지역의 거센 물살과 강한 바람을 모르고 들어오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살라미스에서 싸우지 않으면 아테네 함선을 빼서 이탈리아로 가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연합 해군의 절반 이상이 아테네 함선이었기에 큰 압박이었다. 그래도 에우리비아데스가 망설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예 선택지를 하나로 줄이기로 했다.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는 자신의 시종을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내, "지금 그리스 연합군이 코린토스로 철수하려 한다, 양쪽에서 막아 공격하면 손쉽게 격파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의견이 달라 이탈하려 하니 당신들 편에 서겠다"고 전하게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함대를 움직였다. 카리아 왕국의 여왕 아르테미시아가 회전의 위험을 경고하며 만류했으나, 크세르크세스는 듣지 않았다. 테르모필레도 배신으로 승리했던 만큼 그리스인들을 배신과 분열의 족속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해군을 보내고, 이집트 함선 200여 척을 반대편으로 보내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전투를 한눈에 보려 아이갈레오 산에 올랐다.

살라미스 —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이기 넓은 바다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하고, 좁은 해협에서 기동력으로 승부 살라미스 섬 아티카 본토 좁은 해협 그리스 연합 함대 페르시아 함대(밀려 들어옴) 결과 페르시아 함선 200~300여 척 침몰·불능 · 그리스 약 40여 척 손실 좁은 곳에 갇힌 대함대가 자기들끼리 뒤엉켜 무너졌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거짓 정보로 크세르크세스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했다. 동시에 페르시아가 퇴로를 막아 버리는 바람에, 연합군은 배수진을 치고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작전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이로써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페르시아 함대가 퇴로를 막아 버렸기 때문에 연합군은 배수진을 치고 싸울 수밖에 없게 됐고, 가장 어려운 과제였던 크세르크세스를 해협으로 유인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윽고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다. 둘은 서로 간을 보며 오래 대치하다, 코린토스 배 40척 정도가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이 움직임을 연합군의 분열 신호나 퇴각으로 여겨 좁은 해협으로 들어와 버렸다. 연합군 함대는 겁에 질린 듯 슬금슬금 뒤로 빠졌는데, 사실 적군을 더 끌어들이고 강한 바람을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거센 물살이 일자 연합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건조된 아테네의 삼단 갤리는 페르시아 주력 페니키아 배보다 작았지만 더 무겁게 만들어졌다. 무게중심이 낮아 바람이나 조류의 영향을 적게 받았고, 좁은 지역을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는 애초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좁은 해협에서 싸울 것을 염두에 두고 배를 설계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준비 없이 들어온 페르시아 함선들은 자기들끼리 뒤엉켰다.

연합 함대는 청동을 입힌 충각으로 페르시아 배의 옆구리를 파괴해 침몰시켰고, 노를 부러뜨려 기동성을 무력화했으며, 침몰하지 않은 함선에는 중장 보병이 올라가 백병전을 펼쳤다. 함정에 빠졌음을 안 페르시아 함대가 빠져나가려 했으나, 뒤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니 서로 부딪혀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달았다. 페르시아 측 침몰·불능 함선은 200~300여 척, 그리스 측은 40여 척이었다. 무엇보다 주력 페니키아 함대가 거의 괴멸 상태였다. 높은 곳에서 이를 지켜본 크세르크세스는 후퇴를 명령했다. 본토 상황과 다가오는 겨울, 헬레스폰토스의 다리가 끊겨 유럽에 갇힐 우려까지 겹쳐 총퇴각을 결정한 것이다. 다만 사위 마르도니우스의 요청으로 자신의 호위 부대 이모탈과 정예 기병 등을 그리스에 남겨 마무리를 맡기고 떠났다.

08플라타이아·미칼레 — 페르시아를 몰아내다

마르도니우스는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났다. 그는 코린토스 공격보다 연합군의 내부 분열을 기다렸다. 그 일환으로 아테네에 강화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아테네를 점령했고 아테네인들은 또 살라미스로 대피했다. 아테네는 소극적인 스파르타에 "자꾸 이러면 페르시아와 강화하겠다"고 협박해 결국 스파르타의 출병을 이끌어냈다.

스파르타의 진군 소식에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 북서쪽 65킬로미터 떨어진 플라타이아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은 페르시아 편으로 돌아선 테베와 가까워 물자 공급이 수월했고, 평지라 페르시아의 강점인 기병을 운용하기 좋았다. 현대 학자들 추정으로 페르시아군 7만~12만, 그리스 연합군 약 3만~7만 5천이 대치했다. 연합군 총지휘관은 레오니다스의 조카인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키타이론산 기슭에 진을 쳤고, 평야로 나가지 않으려는 연합과 언덕으로 올라가지 않으려는 페르시아가 11일간 대치했다. 마르도니우스는 전쟁을 길게 끌어 연합의 붕괴를 기다리려 했으나, 생각보다 연합군의 소통이 어수선한 것을 보고 계획을 수정해 무질서한 군대로 돌격했다.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보니 페르시아도 얼떨결에 공격한 데다 상대가 고지대에 있어 자랑하던 기병대와 궁병대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스파르타 중무장 보병이 무시무시한 공격력으로 페르시아군을 압살했고, 총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사망했다. 리더를 잃은 페르시아군은 우왕좌왕하다 완전히 패배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땅을 다시 밟지 못한다.

플라타이아 전투와 비슷한 시기, 이오니아에서 미칼레 전투가 벌어졌다. 미칼레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를 그리스군이 공격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페르시아는 바다가 아닌 육지를 택했으나, 다시 한번 그리스 중무장 보병의 매운맛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스군은 승리 후 정박된 페르시아 배들을 모두 불살랐다.

이후 기원전 478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을 막기 위해 델로스섬에서 회의를 열어 델로스 동맹을 맺었다. 전함과 자금을 공동으로 모아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연합에서 빠져나갔기에 동맹의 맹주는 아테네가 맡았다. 30년 동안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 군대를 마케도니아·트라키아·에게해·이오니아에서 몰아냈다.

한편 살라미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한동안 인기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인기가 사그라들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반스파르타 운동을 하다 친스파르타 정치인 키몬의 선동으로 기원전 472년 도편추방을 당했다. 추방 중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반역죄가 씌워져 사형 선고를 받았고, 아이러니하게도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거두어져 페르시아의 관리로 살다 생을 마쳤다.

09전쟁이 남긴 것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연합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전쟁을 이끈 아테네가 급부상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철학·역사·문학·건축·미술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살라미스 해전에서 무산 계급인 테테스가 노꾼으로서 결정적 승리의 주역이 됨으로써 사회에서 발언력이 높아졌고, 이는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테네와 페르시아는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조약을 맺어 약 50년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전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천재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나타나 페르시아로부터 초토화된 도시를 재건하며 아테네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이때를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부른다.

왜 대제국이 작은 도시국가에 졌는가

마라톤은 페르시아가 적은 병력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얕본 데다, 핵심 전력인 기병대가 평원에서 싸우지 못했고, 밀티아데스의 양익 포위 전술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는 그리스가 좁은 길목·좁은 해협이라는 지형으로 페르시아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한 결과였다. 어느 전투든, 경무장 페르시아군은 근접전에서 중무장 그리스군의 장비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는 승리한 아테네가 제국으로 변모하고, 결국 스파르타와의 거대한 내전(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자멸하는 과정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