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 · 철학 · 정신
스탠퍼드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없다고 단언한다. 대담을 따라가며, 그 주장이 어디까지 과학이고 어디부터 도전인지, 그리고 그것이 처벌·책임·일상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짚는다.
카페에서 차와 커피 중 무엇을 마실지 고르는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식이 또렷하고,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바로 그 직관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선택의 순간은 책의 마지막 문단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그 사람이 어쩌다 차를 고르는 사람이 되었는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새폴스키와의 대담 전체를 따라가며 그의 논증을 정리한 보고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오래된 논쟁을 신경과학자의 언어로 재구성하되, 전공 지식 없이도 따라올 수 있도록 그가 쓴 비유들을 그대로 옮겨 설명한다. 다만 미리 밝혀둘 점이 있다. 이것은 학계의 합의가 아니라 한 과학자의 강한 입장이며, 직업 철학자 다수는 그와 정반대 편에 서 있다. 그 지형도 글 말미에 함께 짚는다.
스탠퍼드대학교 생물학·신경학·신경외과 교수이자 영장류학자다. 케냐에서 야생 개코원숭이 무리를 수십 년간 관찰했고, 스트레스와 뇌에 관한 연구로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 이른바 ‘천재 지원금’을 받았다.
대중 과학서 『행동(Behave)』(2017)으로 널리 알려졌고, 자유의지를 정면으로 다룬 『결정된 삶(Determined)』(2023)에서 자유의지는 신화라는 결론을 명시했다. 그는 이 결론이 자신을 더 호전적으로 보이게 만들까 봐 오랫동안 책 쓰기를 미뤘다고 말한다.
분류상 그는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보는 양립불가론자(incompatibilist)이며, 둘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다고 본다.
새폴스키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전에,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본다’고 느끼는 전형적인 장면부터 정의한다. 카페에 들어가 차와 커피 사이에서 고민하는 순간이다. 곧 결정을 내릴 것을 의식하고, “차 주세요”라고 말하면 차가 나오리라 확신하며, 무엇보다 강요받지 않았으니 커피를 골라도 됐다고 느낀다.
그는 이것이 단지 직관에 그치지 않고 제도의 토대라고 지적한다. 적어도 미국 형사사법 체계는 책임을 묻는 기준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이 세 조건이 충족되면 그 사람은 책임이 있고, 따라서 처벌할 수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것이 곧 자유의지의 내용이다. 새폴스키의 반론은 단순하다. 이 분석 어디에도 그 사람이 어쩌다 차를 고르는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책 한 권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마지막 문단만 읽고 평가했다고 해보자. 카페에서 방금 자유롭게 골랐다고 느끼는 그 감각은, 새폴스키가 보기에 딱 그 마지막 문단이다.
정작 흥미롭고 중요한 모든 것 — 어쩌다 그런 취향을 갖게 됐는지, 어쩌다 그 카페에 돈을 들고 들어올 수 있는 처지가 됐는지 — 은 그 앞의 수백 페이지에 적혀 있다. 선택의 순간만 들여다보는 것은 그 페이지들을 통째로 건너뛰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앞 페이지들’에는 무엇이 적혀 있는가. 새폴스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초 전 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아침 호르몬 수치가 어땠는지, 지난 수십 년의 자극과 트라우마, 어린 시절, 태아기, 유전자, 그리고 조상들이 만든 문화와 그 문화 속에서 길러진 방식까지. 이 조각들을 모두 합치면 남는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생물학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환경의 상호작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흔한 오해를 먼저 걷어내야 한다. 모든 것이 결정돼 있다는 말을,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바꿔봐야 소용없다는 운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새폴스키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한다.
모든 사건에는 그에 앞선 원인이 있다. 세계는 세포와 분자와 원자로 이뤄져 있고, 그 인과의 사슬에 빈틈이 없다.
미래가 이미 고정돼 있고, 빅뱅 1초 뒤의 입자 배치를 다 안다면 내일 입을 셔츠 색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
새폴스키가 예정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미래가 실제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선형 창발 시스템(emergent system)과 카오스(chaos)처럼, 원리상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세계에 내장돼 있다. 다만 핵심은 이것이다. 카오스가 무엇을 빚어내든, 그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그 순간까지 당신을 만들어 온 모든 것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 미래는 열려 있지만, 그 미래를 맞이하는 당신은 닫혀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같은 영화를 본다. 같은 팝콘을 먹고 체온도 같다. 잘 통제된 실험이다. 둘 다 영화에 의해 ‘바뀐 채’ 극장을 나선다.
한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영화였다며 당장 그 주제를 더 찾아보겠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형편없는 촬영은 처음이라며 환불을 받으러 가겠다고 한다.
왜 정반대 반응이 나왔는가. 극장에 들어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감정에 반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촬영 기법에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 분명히 바뀐다 — 단, 그 순간 ‘어떤 사람으로 판명났는가’의 함수로서 바뀐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은 우리가 고른 것이 아니다.
대담에서 가장 날카로운 반론이 여기서 나온다. 영향(influenced)과 결정(determined)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신경생물학을 들이밀며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면, 가장 흔한 응수가 돌아온다.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온갖 것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였을 뿐이라는 반론이다. 유전학을 보여줘도, 호르몬을 보여줘도, 문화를 보여줘도 마찬가지다. 각 학문은 흥미롭고 강력한 영향 요인을 드러낼 뿐, 자유의지의 부재 자체를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새폴스키는 이 반론에 정면으로 답한다. 모든 학문을 한자리에 모으면 두 가지 결정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첫째, 그것들은 사실 서로 다른 학문이 아니다. 유전자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의상 그 유전자가 다듬어진 수백만 년의 진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그 유전자가 프로그래밍된 태아기 아홉 달에 관심을 갖는 것이며, 오늘 아침 식탁에서 뇌의 어떤 유전자가 켜졌는지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로 떨어진 분과들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인과의 호(arc of causality)를 이룬다.
둘째, 그래서 입증의 책임이 뒤집힌다. 새폴스키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자기가 먼저 증명하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머리 주위를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없음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미 이 모든 분과가 어떻게 하나로 합쳐지는지 충분히 안다면, 이제 할 일은 그래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되묻는 것이라고 본다.
그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조각들이 어떻게 하나의 인과의 호를 이루는지, 그리고 그 호의 어디에 균열이 있어 ‘자유의지’를 비집어 넣을 수 있는지 직접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은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 해낼 수 있느냐는 물음이고,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심이 든다. 과학에서는 효과가 충분히 작으면 무시하지 않는가. 통계에서 p값(p-value)이 0.05를 넘으면 결과를 기각하듯이 말이다. 조상의 DNA처럼 너무 작은 영향은 효율을 위해 떼어내도 되지 않는가. 새폴스키는 그 ‘효율’을 자기 논리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효율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미 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데, 그 전제가 옳다고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살인죄로 법정에 섰다. 그는 열 살 때 끔찍한 교통사고로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이 손상됐다. 그날 전까지는 완전히 정상이던 아이가, 그 후로는 무엇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배심원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가”를 이해하기는 쉽다. 그 거대한 사고 때문이다. 이 원인은 강철로 만들어진 듯 분명하다.
또 다른 사람이 똑같은 죄로 섰다. 다만 그의 사연은 이렇다. 태아 7주차에 어머니의 혈류에서 독성 물질이 뇌로 흘러들었고, 생후 2주에 뇌에 영향을 주는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또 이런 일이, 또 저런 일이… 하나하나는 거미줄처럼 가늘다.
지적으로 어려운 지점은 이것이다. 그 거미줄 같은 원인 천 가닥을 모두 합치면, 결국 강철과 똑같이 단단한 설명이 된다. 같은 인과의 호일 뿐, 보기가 더 어려울 따름이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거대한 교통사고가 없다. 다만 까마득한 조상부터 2초 전까지 이어진 수천 가지 작은 일들이 있을 뿐이고, 그것을 한데 모으면 강철로 빚어진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도덕적 책임에 대한 무거운 질문이 따라온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새폴스키는 이 질문이 결국 고장 난 전자레인지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 된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면 누구도 비난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누구를 칭찬하거나 보상하는 것도, 무언가를 자신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는가. 답은 단순하다. 위험한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되, 도덕화하지 않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는 차가 있다. 위험하니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길가에 세워 두고 몰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매일 아침 큰 망치를 들고 나가, 영혼이 썩었고 못됐고 무정한 차라며 지붕을 내리치지는 않는다. 위험을 제약하되, 도덕을 논하지 않는다. 차에는 도덕도 윤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계, 전자레인지라는 말이냐는 반발이 나올 법하다. 새폴스키는 더 인간적인 예로 옮겨 간다.
다섯 살 아이가 콧물을 흘리며 재채기를 한다. 학교에 보내면 다른 아이들을 감염시킬 위험이 있으니 집에 두라고 한다. 위험을 제약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영혼에 사탄이 들어와서 재채기를 한다며 하루 종일 소리치지는 않는다. 필요한 최소한만 제약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항공기 조종사도 마찬가지다. 흔히 먹는 항히스타민은 졸음을 유발한다. 그래서 약을 먹은 조종사는 며칠간 비행할 수 없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가 악한가? 처벌받아 마땅한가? 아니다. 단지 메커니즘의 문제다.
새폴스키는 역사를 끌어온다. 한때 사람들은 끔찍한 날씨가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었다. 마녀가 자유의지로 주문을 걸었다고. 지금 우리는 날씨에 마녀가 관여하지 않음을 안다. 재채기가 도덕적 가치와 무관하듯 말이다. 어떤 현상을 사실은 생물학적 현상이었다고 새로 이해할 때마다, 사회는 무너지기는커녕 더 친절하고 인간적인 곳이 됐다.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사람을 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도소의 교화 기능은 어떻게 되는가. 범죄자를 재채기하는 아이처럼 그저 격리만 한다면, 풀려난 뒤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 않은가. 새폴스키는 이 지적을 매우 중요하게 받는다. 그가 말하는 ‘격리 모델’은 공중보건 의학에 가깝다.
핵심은 교정을 처벌의 맥락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네 영혼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대신, 목에 달린 단추 하나가 고장 났고 그것을 고치는 법을 알 것 같으며 고치고 나면 다시 나가도 된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조종사가 항히스타민에 졸리고, 아이의 재채기가 악이 아니며, 브레이크 없는 차에 사탄이 들지 않은 것과 같은, 메커니즘의 문제라는 것이다.
새폴스키는 미국에서 국선변호인(public defender)과 함께 일한다. 국선변호인은 가난한 피고를 변호하도록 정부가 비용을 대는 변호사다. 그가 맡은 것은 늘 살인 사건이었고, 피고는 하나같이 끔찍한 양육과 트라우마의 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태아였을 때 어머니가 음주했고, 어린 시절 학대받았고, 잘못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된 사람.
법정에서 그는 우리가 모두 생물학적 기계일 뿐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배심원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배심원을 다른 자리로 데려간다. 만약 당신이 그와 똑같은 태아였다면, 그가 세 살 때 받은 방식으로 벌받았다면, 당신의 뇌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지를 보여 준다. 그랬다면 자제력과 충동 조절이 필요한 어려운 결정의 순간마다 당신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고. 위협과 위협 아닌 것을 구별하기 힘든 뇌를 가졌다면, 당신도 그 사람을 죽였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이 이 일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았는지 솔직히 밝힌다. 이런 재판을 13번 했고, 13번 중 12번을 졌다. 한 번 이긴 것도 배심원이 제대로 듣지 않았던 덕분인 것 같다고 그는 덧붙인다. 잘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새폴스키의 논증을 받치는 것은 반복돼 온 역사적 패턴이다. 우리가 ‘의지의 문제’ 또는 ‘도덕의 문제’로 여기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메커니즘의 문제’로 밝혀져 왔다는 것이다.
약 60년 전, 조현병과 자폐는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질환임이 밝혀졌다. 약 30년 전에는 훨씬 미묘한 것이 드러났다. 글을 잘 못 배우는 아이를 보며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다고 단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사람들은 대뇌 피질의 미세 구조 변화 때문에 글자를 뒤바꿔 읽고 읽기를 몹시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냈다. 난독증(dyslexia)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두 가지가 바뀌었다. 그런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는 법을 배우게 됐고, 무엇보다 그런 아이를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으로 키우지 않게 됐다.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새폴스키는 이 경계가 계속 미묘해진다고 본다. 적어도 미국에서 비만은 여전히 자제력이 없다거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식의 낙인이 찍히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비만 역시 시상하부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지 짚을 수 있는 생물학적 질환이라고 말한다. 30년 뒤에는 비만에 대한 시선이 난독증·자폐·조현병처럼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확장하면, 인간 행동 전체가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그는 열네 살의 어느 밤,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말한다. 반세기 가까이 그 생각을 품어 왔고, 이후의 모든 과학은 왜 자유의지가 없는지 그 공학적 원리를 보여 줬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매일을 사는가. 그의 대답은 솔직하다.
대략 석 달에 한 번, 그것도 2분 남짓만 정말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운전 중 누가 끼어들면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진다. 누가 양말이 멋지다고 칭찬하면, 처음 몇 초간은 자신이 평균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곧 멈춰 선다. 이룬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말자고, 그 양말을 고른 것은 진짜 ‘나’가 아니라고 스스로 되뇐다. 그는 이것이 쉽지 않으며, 많은 노력과 자제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순간 —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무엇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느낄 때 — 를 위해 그 어려운 작업을 아껴 두라고 말한다.
가장 무거운 우려가 남는다. 모든 것이 환경과 유전자로 결정된다면, 나쁜 상황에 놓인 사람은 더 나아지려는 의지마저 잃지 않겠는가. 새폴스키는 이를 미국 문화의 흔한 약속과 대비한다. 충분히 간절히 바라면 누구나 대통령도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의 이면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네 탓이라는 책임 전가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다른 방식이다. 우선 네 안의 단추가 어쩌다 이렇게 작동하게 됐는지 함께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저 유전자 때문에, 저 증조부 때문에, 또는 그런 환경 때문에 단추가 이렇게 맞춰졌을 것이라고. 그러면 운 좋게도 그 사람은 자기 단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통찰할 능력을 얻는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다만 이제 그는 그 단추를 눌러 특정한 결과를 더 일어나게 만드는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기계라는 비유가 거슬리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로 변한다. 스스로 변하기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어떤 사람으로 판명났는가에 따라 환경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학적 기계와 다른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생물학적 기계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계라는 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단추가 어디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울 수 있고, 그 위에 재귀적(recursive)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보고 정말 놀라웠다며 그 주제를 더 읽어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책을 존중하고 세계를 넓히려는 단추를 누른 셈이다. 그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판명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판명나지 않았고, 그 위에 다음 변화를 쌓아 간다.
대담을 마치며 새폴스키가 독자에게 건네는 부탁은 한 가지다. 책을 읽든 일상을 살든, 무언가에 즉각적인 반응이 떠오를 때마다 한 번 더, 다섯 번 더, 열 번 더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누군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순간, 우리는 사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조차 반사적으로 판단을 내릴 때가 많아 스스로 실망한다고 털어놓는다. 자기도 인간이지만, 목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의 논증이 향하는 곳은 허무가 아니라, 미워함이 바이러스나 지진을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비논리적이라는 결론, 그리고 그로부터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새폴스키의 입장은 직업 철학자 사이에서 다수설이 아니다. 그가 대담에서 말했듯, 그의 책을 읽거나 서평을 쓴 철학자의 약 90퍼센트가 책을 싫어한다는 그의 체감은 과장이 아니다. 2020년 필페이퍼스(PhilPapers) 조사에서 전 세계 직업 철학자 약 2천 명의 자유의지 입장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은 “세계가 결정론적이어도 자유의지는 성립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결정론을 인정하면서도 자유의지의 여지를 남긴다. 약 62퍼센트가 여기에 선다. 반면 새폴스키처럼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쪽은 약 10퍼센트로, 그가 스스로 아주 작은 소수에 속한다고 표현한 것과 일치한다. 양립가능론자들은 새폴스키가 ‘자유’와 ‘책임’의 정의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잡았다고 비판한다. 즉 이 글이 옮긴 것은 한 과학자의 강력하고 일관된 한 입장이며, 그 반대편에는 두텁고 정교한 철학 전통이 버티고 있다.
그럼에도 새폴스키의 비유들 — 마지막 문단, 같은 영화 앞의 두 사람, 거미줄과 강철, 브레이크 없는 차, 단추의 위치 — 은 우리가 매일 내리는 판단의 근거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든 않든,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정말 아는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 본문은 로버트 새폴스키와의 영상 대담 기록을 정리·요약한 것이다. 13번의 재판 중 12번 패소, 열네 살에 내린 결론, 석 달에 2분 등의 진술은 대담 속 그의 자기 보고에 따른 것이다.
· 인물 정보 — 스탠퍼드대 생물학·신경학·신경외과 교수, 영장류학자, 맥아더 펠로. 저서 『행동(Behave)』(2017), 『결정된 삶(Determined)』(2023). ‘거북이가 끝까지 받치고 있다(Turtles All the Way Down)’는 『결정된 삶』 1장 제목이다.
· 철학자 분포 — 2020년 PhilPapers Survey(양립가능론 약 62%, 자유지상주의 약 13%, 자유의지 없음 약 10%, 응답 방식에 따라 수치는 다소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