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청동기 문명사
크레타섬의 무역 왕국에서 시작해 미케네의 황금 가면, 트로이의 잿더미, 그리고 400년의 암흑을 거쳐 알파벳이 태어나기까지. 신화와 발굴, 유전자와 점토판이 교차하는 약 1,500년의 이야기를 한 편으로 정리한다.
지중해 동쪽, 소아시아와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가 삼각형을 이루는 한가운데에 크레타라는 길쭉한 섬이 있다. 이곳에서 유럽 최초의 고도 문명이 일어났고, 그 패권은 차례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로 넘어갔다가 한 차례 완전히 무너진다. 이 글은 그 흥망의 전 과정을, 신화가 가리키던 자리에서 고고학이 실제로 무엇을 파냈는지를 따라가며 살펴본다. 먼저 전체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두기 위해 주요 사건의 연대표부터 펼친다.
크레타는 농사만으로 자급하기 어려운 섬이었다. 그래서 크레타인들은 일찌감치 다른 길을 택했다. 배를 짓고 항해술을 길러, 물건을 직접 만들기보다 남의 물건을 사다 다른 곳에 파는 중개무역에 뛰어든 것이다. 지리적으로 소아시아와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으니, 중계상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무역이 자리를 잡자 섬의 살림이 눈에 띄게 펴졌다. 경제만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 문물이 유럽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었던 까닭에, 크레타는 자연스럽게 그 기술과 예술을 빨아들였다. 청동 가공 기술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고, 우아한 귀금속 술잔과 도자기를 빚었다. 수출 품목이 다양해지고 그들의 물건을 찾는 지역이 늘면서, 크레타는 하나의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문명의 격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문자였다. 크레타 고유의 문자를 오늘날 선형문자 A(Linear A)라고 부른다. 주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 문자인데다 점토판의 상태가 좋지 않고 남아 있는 자료도 적어, 아직까지 해독되지 못한 상태다. 다만 이 문자가 창고와 회계 기록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크레타인들이 생산과 무역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분배하며 문명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비유
선형문자 A는 자물쇠가 채워진 남의 일기장과 같다.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언가 중요한 기록임은 분명한데, 열쇠가 없어 내용을 읽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일기장이 '장부'로 쓰였다는 정황만 알 뿐, 정작 거기 적힌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크레타 문명에는 그리스 신화가 유난히 짙게 드리워 있다. 신화는 역사가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이 이 섬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신화에 따르면 신들의 왕 제우스 자신이 크레타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네 자식에게 쫓겨나리라'는 저주를 피하려 태어나는 아이를 족족 삼켰는데, 어머니 레아가 여섯째 아이 대신 돌덩이를 강보에 싸 먹이고는 진짜 아이를 크레타섬 이다산으로 빼돌렸다. 그 아이가 제우스였다. 장성한 제우스는 아버지에게 약을 먹여 형제들을 토해내게 하고, 그들과 함께 크로노스를 몰아내 신들의 왕이 되었다.
권좌에 오른 제우스는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에게 반해 흰 황소로 변신해 접근했다. 황소 등에 올라탄 공주를 그대로 태우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이 자란 크레타로 헤엄쳐 갔고, 둘 사이에서 미노스를 비롯한 세 아들이 태어났다. '유럽'(Europe)이라는 말이 이 에우로파(Europa)에게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유럽 최초의 문명이 그녀의 자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 아들 가운데 미노스는 왕위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는 증표로 흰 황소를 보내달라 청하며, 그 황소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포세이돈은 아름다운 흰 황소를 보내주었고 사람들은 미노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황소가 너무 아름다워 차마 바치지 못한 미노스는 늙고 병든 소를 대신 제물로 올리는 속임수를 썼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왕비가 그 흰 황소에게 욕정을 품게 만들었고, 그 결과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반인반수가 태어났다. 왕 미노스(Minos)와 황소(Tauros)의 이름이 합쳐진 미노타우로스다. 미노스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라비린토스)을 지어 이 괴물을 가두게 한다.
이 미궁의 전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다. 미궁이 실제로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전터를 발견한 사람은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다. 그는 아테네의 골동품 거리에서 고대 문자가 새겨진 작은 돌들을 살피다가, 그 출처가 대부분 크레타섬이라는 말을 듣고 섬으로 건너갔다. 섬을 샅샅이 뒤진 끝에 가장 큰 도시 이라클리온 인근, 올리브나무로 뒤덮인 케팔라 언덕이 그 돌들의 출처임을 확인하고는 언덕을 통째로 사들였다. 1900년 첫 삽을 뜨자 둘째 날부터 벽화가 나오고 곧 유물이 쏟아졌다. 에번스는 자신이 전설의 왕 미노스의 문명을 찾았다고 선언하며, 이 문명을 '미노스의 문명'이라는 뜻에서 미노아 문명이라 이름 붙였다.
발굴이 진행되자 유적은 1,000개가 넘는 방이 미로처럼 얽힌 거대한 궁전으로 드러났다. 미노타우로스가 갇혔다는 그 미궁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였다. 이 크노소스 궁전은 첫 궁전이 지진과 화재로 무너진 뒤 기원전 170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본다. 축구장 몇 개 크기의 부지에 직사각형 중앙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3-4층 건물이 들어섰고, 전성기에는 약 3만 명이 성 안팎에 모여 살며 섬 전체의 정치·경제·종교 중심지로 기능했다.
궁전으로 드는 '왕의 길'은 도기 조각과 자갈을 섞어 다진 일종의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로 꼽힌다. 북쪽 입구를 지나면 곧 왕좌의 방이 나온다. 이름과 달리 단출한 공간으로, 돌로 만든 의자 뒤에 머리는 독수리, 몸은 사자인 신성한 동물 그리핀 한 쌍이 그려져 있다. 바닥의 둥근 세면대는 정화 의식용으로 보이며, 학자들은 당시 왕이 통치자이자 제사장을 겸했으리라 추측한다.
옆 건물의 예배실에서는 양손에 뱀을 쥔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뱀은 재생을, 드러난 가슴은 풍요를 뜻한다. 미노아인들이 농업을 관장하는 여신을 섬겼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더 깊숙한 곳에는 창고가 있는데, '피토이'라 불리는 대형 항아리 400여 개가 들어찰 수 있는 공간으로 곡물·올리브유·포도주·콩 등 100톤가량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 창고에서 선형문자 A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크레타인들은 중앙에서 식량을 거두어 필요에 따라 재분배하는 회계 시스템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 궁전에는 양날 도끼가 걸린 방이 있다. 크레타인들은 양날 도끼를 가장 신성한 물건으로 여겼는데, 신에게 바칠 소를 잡을 때 이 도끼를 썼기 때문이다.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여사제의 지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여, 미노아 사회가 여사제 주도의 신정 사회 또는 모계 사회였을 수 있다는 가설도 제기된다. 황소 역시 신성시되어 궁전 곳곳을 장식했다. 곡예사가 달려오는 황소의 뿔을 잡고 등 위로 뛰어올랐다가 꼬리 쪽으로 착지하는 '황소 도약' 벽화는, 황소를 섬기는 종교 행사이자 오늘날의 투우 같은 인기 구경거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비의 방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세식 화장실이다. 욕조와 변기가 있고 바닥에는 흙을 구워 만든 테라코타 배수관이 깔려 있었다. 배수관은 한쪽 끝을 가늘게 만들어 다음 조각과 압력이 맞물리도록 설계되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수원에서 물을 끌어와 욕조에 공급했고, 용변 후 물주전자로 물을 흘려 오물을 밖으로 내보냈다. 상하수도를 갖춘 셈인데, 이는 고대 로마보다 천 년 이상 앞선 기술이었다.
남쪽 회랑에는 백합과 공작 깃털로 장식된 왕관을 쓴 날렵한 남성을 그린 벽화가 있다. 코너소스의 젊은 통치자, 제사장, 혹은 남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등 해석이 갈린다. 미노아 예술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사후세계를 강조하는 엄숙한 이집트 미술과 달리 밝고 명랑하며 역동적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황금기를 누리던 크노소스 궁전은 기원전 1450년경 화려한 막을 내린다. 멸망 원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화산이다. 크레타 북쪽 약 120km에 있는 산토리니섬(테라섬)에서 기원전 1600년경(연대 추정에는 이견이 있다) 거대한 화산 분화가 일어났다. 만 년 안에 손꼽히는 규모의 분화로, 큰 해일과 지진이 크레타를 강타하고 화산재가 하늘을 덮어 여러 해 흉년이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오늘날 관광지로 유명한 산토리니의 칼데라 절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의 재난이 남긴 지형이다. 참고로 이 화산섬을 두고, 플라톤이 저서에 적은 사라진 초고대 문명 '아틀란티스'의 모델이 미노아 문명의 번영과 갑작스러운 쇠락이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둘째는 정복이다. 자연재해로 이미 힘이 빠진 미노아 문명을, 그리스 본토에서 건너온 미케네인들이 침입해 무너뜨렸다는 설이다. 두 요인이 겹쳤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쨌든 해상무역의 패권과 에게해의 주도권은 이때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미케네 문명으로 넘어갔다. 크노소스 궁전은 미케네인의 것이 되었고, 미노아인들은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크레타의 신화 한 토막
크레타를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유명한 이야기가 이카로스 신화다. 미궁을 설계한 장인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섬에 갇히자,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꾀한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날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태양에 가까이 다가간 이카로스는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다. 무모한 욕심의 결말을 경고하는 이 이야기는, 크레타가 신화의 무대로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두 집단은 전혀 다른 민족으로 여겨졌다. 미케네인의 선형문자 B(Linear B)가 초기 그리스어를 적은 문자로 해독된 반면, 미노아인의 선형문자 A는 여전히 정체불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케네인은 흑해 북쪽 대초원의 인도유럽어 사용 민족이며, 이들이 남하해 토착 에게인을 정복하고 미케네 문명을 세웠다는 가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2017년 발표된 고대 DNA 분석은 다른 그림을 그린다. 미노아인과 미케네인의 유전자를 비교했더니, 양쪽 모두 유전자의 약 4분의 3이 지금의 터키 서부 아나톨리아에 살던 최초의 농경민에게서 유래했다. '전혀 다른 민족의 북방 침입'이라는 가설이 무색해진 셈이다. 다만 미케네인은 여기에 더해, 흑해 북쪽 초원·시베리아 계통의 유전자를 4-16%가량 추가로 지니고 있었다. 인도유럽어를 쓰던 이들이 이주하면서 그리스어를 들여왔으리라 추정하는 근거다.
정리하면, 두 집단은 동쪽(아나톨리아)의 조상을 크게 공유하되, 미케네인에게만 보이는 북쪽 조상을 통해 그리스어가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북방 계통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 조상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어가 에게해에 퍼져 있었으리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들은 '아카이아인'이라고도 불렸다. 처음에는 올리브·무화과·포도를 기르는 농경민이었으나, 본토는 석회질 바위가 많아 대규모 농사에 부적합했다. 척박한 땅은 결국 이들을 바다로 내몰았다. 늘어난 인구를 먹이려면 어디선가 곡식을 구해 와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에게해는 뱃사람에게 너그러웠다. 육지로 둘러싸여 파도가 높지 않고, 섬이 촘촘해 마음만 먹으면 100여 km 안에서 다시 뭍을 밟을 수 있었으며 날씨도 화창했다. 미케네인들은 특산품인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싣고 항로를 개척해, 이집트·메소포타미아·히타이트를 넘어 미지의 땅까지 나아갔다. 미케네산 도자기가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이탈리아에서까지 발견될 정도였다.
다만 이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기는 어렵다. 험준한 산과 바다로 갈린 지형 탓에 통일 왕국을 세우기 어려웠던 것이다. 미케네 문명이 존재감을 드러낸 기원전 1600년경에도 미케네·티린스·필로스·아테네 등 여러 소왕국이 각자의 체제를 꾸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대한 미케네 왕국의 이름을 문명권 전체에 붙인 것일 뿐, 실상은 느슨한 연대였다. 그렇게 성장한 미케네인들이 화산 재해로 약해진 미노아를 틈타 기원전 1450년경 크레타를 정복하고, 이후 약 200년간 강력한 황금기를 누렸다. 미노아인이 무역과 협상으로 해상 제국을 유지했다면, 미케네인은 무역과 더불어 전쟁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상인이자 전사, 때로는 해적이었다.
미케네인들이 아나톨리아 해안까지 진출하며 해상권을 둘러싼 충돌이 잦아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사시에 기록된 트로이 전쟁이다. 신화 속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데려가면서 시작된다. 그리스 연합군이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트로이로 쳐들어가 10여 년을 싸웠고, 영웅 아킬레우스의 활약과 트로이 목마로 마침내 성을 함락했다는 이야기다.
학자들은 이 전쟁이 실제 사건이었다면 그 동기는 미녀가 아니라 해상 패권이었으리라 본다. 단서는 청동기 시대라는 시대 배경에 있다. 청동을 만들려면 구리와 주석이 필요한데, 구리는 비교적 흔했지만 주석 광산은 주로 서유럽에 몰려 있었다. 유럽에서 캔 주석을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실어 나르면 큰돈이 되었고, 그 주요 길목이 바로 흑해로 통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이었다. 그런데 이 해협은 물살이 너무 세서 당시 기술로는 배가 통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상인들은 이 구간에서 배와 짐을 내려 육로로 옮겼고, 그 육로 길목에 트로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트로이는 자기 영토를 지나는 이들에게 통행세를 매겨 막대한 부를 쌓았다.
비유
트로이는 거대한 고속도로의 유일한 요금소와 같았다. 흑해를 오가는 모든 화물이 다르다넬스라는 좁은 길을 통과해야 했고, 그 길목을 트로이가 막고 서서 지나는 자마다 통행료를 받았다. 무역으로 먹고살던 미케네인에게 이 요금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고, 기회를 노리다 결국 요금소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다고 보는 것이 무역 분쟁설의 핵심이다.
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다만 서사시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삼았다면 기원전 1300-1250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방증도 있다.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에서 나온 외교 문서에는, 기원전 13세기경 '아히야와'라는 거대 세력이 자신들의 속국 '윌루사'를 침공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히타이트는 미케네인(아카이아인)을 아히야와라 불렀고, 윌루사는 트로이의 다른 이름 '일리오스'와 발음이 닮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제목 일리아스도 바로 '일리오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게다가 윌루사로 추정되는 위치가 오늘날 트로이로 여겨지는 발굴지와 일치한다. 이런 정황은 미케네인이 윌루사를 침공해 불태웠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물론, 거창한 명분 없이 미케네인의 단순한 해적질에 불과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트로이 이야기를 한 천재 시인의 상상으로만 여겼다. 그 가운데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은 인물이 19세기 독일의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 트로이의 튼튼한 성을 본 그는 '이런 성이라면 결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가난해 14세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사업 수완으로 42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목표 자금을 모으자 사업에서 손을 떼고 발굴에 나섰다.
실제 발굴의 토대를 놓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영국 외교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다. 그는 호메로스가 그리스군 야영지로 묘사한 터키 북서부 지역으로 부임해, 지형 연구를 토대로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가 있으리라 보고 일찌감치 언덕 일부를 사두었다. 다만 크림 전쟁과 자금 부족으로 발굴을 미루던 차에, 후원자를 찾던 캘버트에게 백만장자 슐리만이 합류한 것이다.
1871년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받은 슐리만은 인부 150명을 동원해 언덕을 공격적으로 파내려갔다. 1873년 마침내 튼튼한 성벽과 성문의 흔적을 찾았고, 깊숙한 곳에서 금속 세공품·왕관·구리 방패 등 보물 6,000여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확신하고, 가장 유명한 순금 머리장식을 아내에게 걸친 사진을 언론에 퍼뜨려 단숨에 국제적 유명인사가 되었다. 동료 캘버트의 공은 묻혔다.
학자들은 이 아마추어를 신뢰하지 않았다. 보물을 어디선가 사들였으리라 비아냥댔고, 무엇보다 그가 관심 없는 지층을 마구 파괴하며 바닥까지 내려가는 바람에 정작 트로이일 가능성이 있는 위층 유적을 망가뜨렸다고 비판했다. '미케네인도 못 무너뜨린 트로이 성벽을 슐리만이 무너뜨렸다'는 조소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그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만은 분명했다. 그전까지 고대 그리스에 대한 관심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 무렵에 머물러 있었으나, 슐리만은 그 관심을 기원전 12세기까지 끌어당겼다. 그의 발견 이후 사람들은 고전 그리스 이전에도 '에게 문명'이라는 고도 문명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슐리만과 후대 발굴자들은 한 언덕에서 시대가 다른 유적이 켜켜이 쌓인 아홉 개의 지층을 확인했다. 문제는 슐리만이 트로이라 확신한 '밑에서 두 번째 층'(트로이 II)이 약 기원전 2500년의 것으로, 미케네 시대보다 한참 앞선다는 점이었다. 그 시기에는 서사시가 그리는 규모의 전쟁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슐리만이 찾은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트로이 전쟁보다 천 년 이상 오래된, 전혀 다른 시대의 유물이었던 셈이다.
이후 논쟁은 6번 층과 7번 층 사이로 좁혀졌다. 슐리만의 동료 고고학자는 강한 성벽과 방어용 해자를 갖춘 6번 층이 후기 청동기(기원전 1250년경)에 해당해 서사시 속 트로이와 맞아떨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미국 고고학자 칼 블레겐은 6번 층이 외부 침입이 아니라 지진으로 무너진 흔적이라며, 새까맣게 탄 돌과 부러진 화살촉, 손상된 인골이 나온 7번 층 일부를 진짜 트로이로 지목했다. 그러나 7번 층은 기원전 118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미케네 문명 자체가 붕괴하던 때라 대규모 원정이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따른다. 결정적 증거가 부족한데다 슐리만이 지층을 훼손한 탓에,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정확히 어느 층인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 와중에 2018년에는 트로이 전쟁 포로들의 정착지로 전해지던 고대 도시 테네아의 흔적이 펠로폰네소스에서 발견되었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도시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 나온 줄 알 때쯤 새로운 단서가 튀어나오는 트로이 전쟁은, 어쩌면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일지 모른다.
트로이를 파낸 슐리만은 자연스럽게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도시 미케네로 눈을 돌렸다. 1876년 그가 도착했을 때 언덕에는 황금빛 도성 대신 성벽 일부와 '사자문'이라 불리는 성문 윗부분만 남아 있었다. 흙을 걷어내자 거대한 돌을 레고처럼 쌓아 올린 성벽 전체가 드러났다. 후대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한 돌을 인간이 옮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해, 외눈 거인 키클롭스가 쌓았다며 '키클롭스의 벽'이라 불렀다.
사자문은 미케네 전성기인 기원전 125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 양쪽 기둥과 그 위에 얹힌 상인방(린텔) 돌은 각각 하나의 큰 돌덩이로, 상인방만 20톤이 넘는다. 주목할 것은 상인방 바로 위의 삼각형 돌판이다. 이 삼각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무게가 상인방 한가운데를 짓누르지 않도록 양옆 기둥으로 흘려보내는 구조다. 이를 '무게 경감 삼각형'이라 한다. 그 삼각형 면에 새겨진 두 마리 사자가 성의 위엄을 드러낸다.
비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손바닥을 맞대 'ㅅ'(A)자 모양으로 버티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위에서 짐을 얹어도 힘이 두 팔을 타고 바닥으로 갈라져 내려가, 가운데가 받는 부담이 줄어든다. 미케네인은 가로로 걸친 돌 위를 이렇게 삼각형으로 비워, 무거운 돌문이 제 무게에 깨지지 않게 했다.
슐리만은 사자문 옆 '원형무덤 A'를 파내려가 기둥 없이 돌을 쌓아 올린 원형 구역 안에서 직사각형 무덤들을 발견했다. 남성·여성·어린이 모두 19구의 시신이 묻혀 있었고, 10kg이 넘는 황금 유물이 함께 나왔다. 미케네가 '황금이 풍부한 도시'였다는 호메로스의 묘사가 입증된 셈이다. 시신들은 금을 주렁주렁 걸치고 있었고, 특히 다섯 점의 황금 가면이 죽은 이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죽은 뒤에도 영웅의 모습을 간직하려는 이 데드마스크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슐리만은 그중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하나를 골라 '아가멤논의 가면'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트로이 전쟁기보다 한참 앞선 기원전 1610-1490년 사이의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 바깥의 '원형무덤 B'는 이보다 이른 기원전 1675-15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35구의 시신 가운데 31명이 남성이었고 대부분 외상 흔적이 있어, 전사 계급의 무덤으로 본다. 미케네 사회가 전사를 중심으로 굴러갔음을 말해주는 단서다. 단검에는 사냥 장면이, 묘비에는 전차를 탄 전투 장면이 새겨져 있다. 미케네식 전쟁은 소수의 엘리트 전사가 가벼운 이륜 전차를 타고 치렀던 것으로 보인다. 미케네권에서 두루 나오는 멧돼지 엄니 투구는 약 60마리분의 엄니가 들어간 것으로, 쓴 사람이 뛰어난 사냥꾼이자 전사임을 드러내는 표지였다. 아르골리스의 덴드라에서 나온 청동판 전신 갑옷은 기원전 1400년경의 것으로,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갑옷이다.
원형무덤이 만들어진 뒤, 기원전 1400-1200년 사이 전성기를 맞은 미케네인들은 더 크고 정교한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암벽을 둥글게 파 들어가 벌집 모양으로 쌓은 '톨로스' 무덤이다. 미케네 주변에 아홉 기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성에서 남서쪽으로 400-500m 떨어진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발굴해 보니 보물창고라기보다 여러 왕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었고, 워낙 눈에 띄는 위치라 이미 상당수 보물이 도굴된 상태였다.
구조를 따라가 보자. 입구에 닿으려면 '드로모스'라 불리는 길이 30-40m, 폭 6m가량의 의식용 통로를 걸어야 한다. 길 끝 출입문 위에는 120톤짜리 상인방이 놓여 있고, 여기에도 무게를 분산시키는 삼각형 구조가 들어가 있다. 문을 지나면 둥근 바닥이 나오고, 똑같은 크기로 자른 돌을 조금씩 안으로 들이밀며 33단을 쌓아 올려 꼭짓점에서 맞물리게 했다. 그 결과 천장이 한 점에서 만나는 벌집 모양이 된다. 진짜 둥근 돔은 아니지만 역깔때기 모양으로 하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무덤은 지름 약 14.5m, 높이 약 13m로 그리스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규모이며, 청동기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비유
책을 한 권씩 안쪽으로 조금 더 들이밀며 두 기둥처럼 마주 쌓아 올린다고 상상해 보자. 위로 갈수록 두 더미가 서로를 향해 기울어, 마침내 꼭대기에서 맞닿는다. 톨로스 무덤의 천장이 바로 이 원리다. 곡선으로 휜 진짜 돔(반구형 천장)은 천 년쯤 뒤 로마의 판테온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지만, 미케네인은 돌을 차곡차곡 들이쌓는 방식만으로 거대한 천장을 덮어냈다.
궁전 건축에서 미케네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메가론'이라는 양식이다. 메가론은 궁전 한가운데 자리한 큰 방으로, 정치·행정·군사·경제의 중심 기능을 맡았고 성채 전체가 이 방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구조는 직사각형을 셋으로 나눈 형태다. 기둥 둘이 지붕을 받친 현관(포치)을 지나, 전실(문간)을 거쳐야 비로소 중심 홀에 든다. 홀 한가운데에는 둥근 기둥 네 개가 지붕을 떠받치고 그 사이에 의식용 화로나 왕좌가 놓였다. 바닥은 타일로 포장하고 벽에는 벽화를 그렸다. 셋으로 나뉜 공간과 중앙을 강조하는 이 짜임새가 하나의 건축 단위로 자리잡았다.
200년간 번영하던 미케네 문명은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그리스 전역의 궁전이 거의 모두 불타 사라졌다. 원인을 두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기원전 1100년경 그리스 북부의 도리아인이 남하하며 여러 도시를 붕괴시켰다는 설로, 이들은 새 무기인 철기로 무장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도리아인의 침입'이라는 모델 자체는 후대의 전승에 기댄 부분이 커서 신중히 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바다 민족'이다. 기록에는 등장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무리로, 기원전 1200년 무렵부터 동지중해 문명권 곳곳을 휩쓸었다. 시리아의 항구도시 우가리트가 불타고, 이집트는 기원전 1177년경 람세스 3세 때 이들의 대규모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냈다. 당시 문서에는 정체불명의 적이 도시를 불태웠다는 기록과 구원을 청하는 글이 남아 있다. 바다 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여러 집단의 연합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정체와 기원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다만 오늘날 학계는 어느 한 원인으로 붕괴를 설명하지 않는다. 바다 민족의 침입 외에도, 나무 나이테와 퇴적물 분석으로 드러난 장기 가뭄과 그로 인한 기근, 잇따른 지진, 그리고 무엇보다 촘촘한 무역망 자체의 취약성이 함께 거론된다. 당시 동지중해는 청동의 원료부터 곡물까지 서로 주고받는 하나의 거대한 교역 체계로 묶여 있었기에, 한 고리가 끊기자 연결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각 문명이 고립되었다. 이 연쇄 붕괴로 히타이트 제국은 무너졌고 수도 하투샤는 기원전 1180년 무렵 함락되었으며, 이집트는 살아남았으나 이후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다. 여러 요인이 맞물린 이 사건을 흔히 '청동기 시대의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 부른다.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 동지중해는 유례없이 긴 암흑시대로 빠져들었다. 이 시기를 암흑이라 부르는 까닭은 단순하다. 기록이 남지 않아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감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문자나 건축, 예술 같은 문명 활동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약 300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이 시대의 끝자락을 엿볼 수 있게 되는데, 이전보다 훨씬 작은 단위의 정치체인 폴리스가 등장하는 시점이다.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폐허에서 어떻게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났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동력이 짐작된다. 철기와 알파벳이다.
이전 미노아·미케네는 청동기 문명이었다. 그런데 침략자들이 철기를 들여오면서 일종의 기술 혁명이 일어났다. 철기 제작 기술의 원천은 히타이트 제국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한 제국의 철저한 독점'으로 보는 것은 통념을 단순화한 면이 있다. 어쨌든 히타이트가 바다 민족에게 멸망하면서 그 기술이 바깥으로 퍼졌다는 서사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철의 결정적 장점은 따로 있었다. 철은 원료가 풍부하고 가공이 비교적 쉬워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귀하고 비싼 청동이 실용성보다 통치자의 독점적 권력을 상징하는 데 쓰였다면, 단단하고 흔한 철은 무기와 농기구 같은 실용적 도구로 두루 쓰였다. 그 결과 철기는 경제력을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에게 흩뜨리는 효과를 낳았다. 다수가 힘을 나눠 갖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적 기풍이 철기의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비유
청동이 한정판 명품이라면, 철은 대량 생산되는 생활용품이다. 명품은 소수만 가질 수 있어 가진 자의 권위를 떠받친다. 반대로 누구나 살 수 있는 생활용품이 보급되면, 그것이 주던 힘은 자연히 여러 사람에게 흩어진다. 청동에서 철로의 전환은 단순한 금속 교체가 아니라, 힘이 모이는 방식을 바꾼 사건이었다.
또 하나의 동력은 알파벳이다. 암흑시대를 거치며 미케네인이 쓰던 선형문자 B는 사라졌고, 다시 일어선 그리스인들은 그 대신 페니키아의 알파벳을 들여왔다. 이는 음절문자에서 음소문자로의 이동을 뜻한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동부에 도시국가를 세우고 바다를 무대로 교역하던 상인들로, 대제국은 아니었지만 알파벳과 갤리선이라는 두 가지를 역사에 남겼다. 곳곳을 누비며 장사하다 보니 현지인과 글자를 나눌 필요가 생겼고, 그렇게 알파벳을 퍼뜨렸다. 그 수혜자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인이다.
알파벳의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페니키아 문자의 조상으로 꼽히는 것이 이집트에서 발견된 초기 알파벳 문자로, 학계에서는 이를 '원시 시나이 문자'(Proto-Sinaitic) 또는 '초기 알파벳'(Early Alphabetic), '원시 가나안 문자'라 부른다. 대표 사례가 시나이반도의 세라비트 엘카딤 광산 유적과, 이집트 중부 사막길의 와디 엘홀 절벽에 새겨진 명문이다. 와디 엘홀의 명문은 크림색 석회암 절벽에 새겨져 있다. 이 글자를 만든 이들은 피라미드를 쌓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집트의 지배 아래 광산과 채석장에서 일하던 셈족 계통의 노동자들이었다. 기원전 19-18세기경,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적기 위해 이집트 상형문자의 일부를 빌려 소리 단위의 새 글자를 만든 것으로 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라틴 알파벳의 가장 먼 조상이며, 페니키아와 그리스를 거쳐 이어진다.
그 글자 체계가 독특했다. 하나의 기호가 사물의 '의미'를 가리키지도, '음절'을 가리키지도 않고, 오직 하나의 자음 소리, 곧 '음소'를 나타냈다. 핵심은 '머리글자 원리'(아크로포니)다. 어떤 사물의 그림을 가져와, 그 사물 이름의 첫소리만 떼어 글자로 삼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보자. 황소 머리를 본뜬 기호는 셈어로 황소를 뜻하는 '알레프'였다. 사람들은 이 글자를 '알레프'라 읽는 대신, 그 첫소리만 떼어 발음 기호로 썼다. 집을 본뜬 기호는 '베트'(집)였는데, 이 역시 '베트'라 읽지 않고 'ㅂ' 소리만 취했다. 이렇게 그림이 가리키던 의미는 버리고 첫소리만 남기는 방식으로, 음소문자 체계가 자리잡았다. 청동기 내내 크레타와 미케네에서 신성시되던 황소가, 마침내 알파벳의 첫 글자로 흔적을 남긴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자가 애초에 지배계급이 아니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문자였다는 사실이다. 수천 개의 복잡한 글자를 외워야 했던 표의문자·음절문자와 달리, 음소문자는 소리 단위 몇십 개만 익히면 누구나 읽고 쓸 수 있었다. 글자 수가 적고 배우기 쉬운, 말하자면 '경제적인' 문자였다.
다만 그리스인은 페니키아 문자를 그대로 쓰지 않았다. 페니키아 문자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음만으로도 문맥으로 읽어내는 셈어와 달리, 모음이 많은 그리스어에는 불편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페니키아 문자 가운데 그리스어에서 쓰지 않는 자음 글자를 모음으로 바꿔 썼다. 이렇게 자음 17개와 모음 7개, 모두 24자의 그리스 알파벳이 완성되었다. 자음과 모음을 모두 갖춘 음소문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글자는 다시 로마를 거치며 다듬어져, 오늘날 전 세계가 쓰는 26자의 알파벳이 되었다. '알파벳'(alphabet)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 알파(α)와 베타(β)에서 나왔다.
스물네 글자만 익히면 온갖 사물과 추상적 개념을 적을 수 있게 되자, 지식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훗날 아테네에서 독재자가 될 법한 인물의 이름을 도기 조각에 적어 추방하던 도편추방제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알파벳으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작품이 바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트로이의 잿더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그 잿더미를 노래한 서사시로 다시 태어나 문자의 역사 한가운데에 놓인 것이다.
이 글은 크레타의 무역 왕국에서 그리스 알파벳의 탄생까지, 약 1,500년에 걸친 에게 청동기 문명의 흥망을 한 편으로 엮은 것이다. 본문의 연대는 모두 추정치이며, 트로이 전쟁의 실재 여부나 미노아 사회의 성격 등 여러 쟁점은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