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라는 외부의 적을 함께 물리친 두 강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서로를 겨눴다. 27년에 걸친 이 그리스 내전은 한 도시의 황금기를 끝장냈을 뿐 아니라, 부상하는 신흥 강국과 기존 패권국의 충돌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역사에 처음 새겼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는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영광은 채 반세기를 가지 못했다. 같은 그리스인끼리, 그것도 함께 페르시아를 물리친 두 맹주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이 전쟁을 기록한 아테네의 장군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그 원인을 신의 뜻이나 우연이 아니라 인간과 권력의 동학에서 찾았고, 그 결과 그의 기록은 2,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국제정치의 교과서로 읽힌다. 이 글은 그 전쟁의 흐름을 따라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성격이 정반대인 두 강국의 대결이었다. 아테네는 바다의 나라였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고, 델로스 동맹을 통해 에게해 전역의 교역로와 속국을 거느린 해양 상업 제국으로 성장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이었고, 시민들은 민회에서 직접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문화적으로 개방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정반대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륙의 농업 국가였고,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보유했다. 정치적으로는 두 명의 왕과 원로원, 감독관(에포로스)이 통치하는 과두정에 가까웠고, 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처럼 조직되어 있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변화와 팽창을 경계했다. 스파르타가 두려워한 것은 외부의 적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배하는 압도적 다수의 노예 계급이 언제 봉기할지 모른다는 내부의 불안이었다.
투키디데스는 이 두 나라의 기질 차이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아테네인은 진취적이고 모험을 즐기며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반면, 스파르타인은 신중하다 못해 굼뜨고 자기 영역을 벗어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과 기름 같은 두 나라가, 외부의 적 페르시아가 사라지자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낯선 나라 스파르타가 어떤 곳이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도 유난히 독특했다. 도리아인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라코니아 지방으로 내려와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인데, 정복자인 스파르타 시민의 수는 늘 피정복민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다. 이 인구 비대칭이 스파르타라는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스파르타 사회는 세 계급으로 나뉘었다. 최상층은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 전사로, 자신들을 '호모이오이(Homoioi)', 즉 '평등한 자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토지를 분배받되 노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전사로서의 삶에만 전념했다. 중간층은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즉 '주변에 사는 자들'로, 자유민이지만 정치적 권리가 없었고 상공업과 교역을 담당했다. 최하층은 '헤일로타이(Heilotai, 헬롯)'라 불리는 국가 소유 농노였다. 정복당한 원주민의 후예로, 토지에 묶여 농사를 짓고 그 소출의 절반을 스파르타 시민에게 바쳤다.
문제는 이 헤일로타이의 수가 스파르타 시민의 몇 배에서 십수 배에 달했다는 점이다.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농노 위에 올라탄 구조였으니, 스파르타 시민에게 헤일로타이의 반란은 늘 머리 위에 매달린 칼이었다. 스파르타가 그토록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면서도 좀처럼 국경 밖으로 원정을 나가려 하지 않은 근본 이유가 여기 있다. 군대가 멀리 나간 사이 헤일로타이가 봉기하면 나라가 통째로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Lykurgos)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스파르타의 제도는 이 불안을 군사화로 해결한 체계였다. 토지를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해 빈부 격차를 없앴고, 사치를 금지했으며, 화폐조차 운반과 축적이 불편하도록 무거운 쇠막대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시민은 사유재산 축적이나 상업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오직 전사로 사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고게(Agoge)'라 불린 교육 제도다. 스파르타 남자아이는 태어나면 장로들의 검사를 받아 허약하면 버려졌고, 살아남은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국가의 공동 교육 기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혹독한 신체 단련과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부러 적게 먹여 굶주리게 한 뒤 부족한 식량을 훔치도록 부추겼는데, 도둑질 자체는 권장하되 들키면 처벌했다. 도둑질이 아니라 들킨 것을 벌한 것이다. 들키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길러 정찰병으로 키우려는 의도였다.
스파르타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비군 막사였다고 보면 된다. 시민은 곧 직업 군인이고, 농사·상업 같은 '생계'는 전부 아래 계급(헤일로타이·페리오이코이)이 떠맡았다. 덕분에 스파르타 시민은 평생 전투 훈련만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리스 최강의 육군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강함은 다수의 농노를 억누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 늘 내부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성인이 된 스파르타 시민은 공동 식사(시시티아)에 의무적으로 참여해 같은 음식을 먹으며 전우애를 다졌다. 검은 죽이라 불린 거친 음식이 유명했는데, 한 외국인이 맛보고는 "스파르타인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평등하고 금욕적인 전사 공동체가 스파르타의 정체성이었다.
스파르타가 헤일로타이를 다스린 방식은 잔혹했다. '크립테이아(Krypteia)'라는 제도가 대표적이다. 우수한 청년 전사들을 선발해 단검만 들려 시골로 보내, 밤에 숨어 있다 눈에 띄거나 위험해 보이는 헤일로타이를 죽이게 한 것이다. 일종의 비밀경찰이자 공포 통치 수단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감독관들이 해마다 헤일로타이에게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해, 그들을 죽여도 종교적 오염(살인죄)이 되지 않게 했다고 한다. 다만 이 제도의 구체적 성격과 시기에 대해서는 사료가 후대의 것이고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현대 역사가들은 세부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이처럼 스파르타의 모든 제도는 '소수가 다수를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장치'였다. 강력했지만 경직되었고, 안정적이었지만 팽창할 수 없었다. 이 점을 기억해 두면, 왜 스파르타가 전쟁 내내 결정적 순간마다 머뭇거렸는지, 그리고 왜 페르시아의 돈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려 기원전 478년 결성된 것이 델로스 동맹이다. 에게해의 여러 도시국가가 전함이나 자금을 갹출해 공동 방어 체제를 꾸렸고, 공동 금고는 델로스섬의 아폴론 신전에 두었다. 맹주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아테네가 맡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맹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많은 가맹국이 직접 전함과 병력을 내는 대신 돈으로 분담금을 내기 시작했고, 그 돈으로 아테네가 함대를 건조하고 운영했다. 그 결과 군사력이 아테네에 집중되었다. 동맹에서 탈퇴하려는 도시가 나오면 아테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낙소스가 이탈하려 하자 포위해 굴복시켰고, 이는 동맹이 더 이상 자발적 연합이 아니라 강제적 지배 체제임을 드러냈다.
결정적 사건은 기원전 454년, 아테네가 델로스에 있던 공동 금고를 자국 아크로폴리스로 옮긴 것이다. 명목은 페르시아의 위협으로부터 금고를 안전하게 지킨다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동맹의 자금을 아테네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아테네는 이 돈의 일부를 자국 신전 건축과 도시 재건에 전용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이 동맹 자금으로 지어진 것이다. 동맹은 사실상 아테네 제국이 되었다.
이 시기 아테네를 이끈 인물이 천재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다. 알크마이온 가문의 후예인 그는 기원전 461년경부터 죽을 때까지 약 30년간 최고 장군직을 거듭 연임하며 사실상 아테네를 이끌었다. 그는 가난한 시민도 공직과 배심원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당을 지급해 민주정을 한층 심화시켰고, 동시에 델로스 동맹의 자금으로 아테네를 그리스 문화의 중심으로 키웠다. 파르테논을 비롯한 위대한 건축물이 이때 세워졌고,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스파르타의 경계를 샀다. 바다를 통해 거침없이 세력을 넓히는 아테네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위협으로 느꼈다. 특히 상업 경쟁국인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팽창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사실 두 진영은 이미 한 차례 충돌한 적이 있었다. 기원전 460년경부터 약 15년간 이어진 이른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때 아테네는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패했으나 곧이어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를 제압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결국 기원전 446년 양측은 '30년 평화조약'을 맺어 세력권을 인정하고 충돌을 멈췄다. 그러나 이 평화는 30년을 채우지 못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표면적 원인들(뒤에 살펴볼 코르키라 분쟁, 메가라 봉쇄령 등)을 나열한 뒤, 그 모든 것 아래 깔린 가장 근본적이고 진짜인 원인을 이렇게 짚었다. 바로 아테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스파르타가 느낀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은 훗날 국제정치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된다.
구조적 긴장이 쌓인 상태에서, 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몇 가지 분쟁이 잇따라 터졌다.
첫 번째는 코르키라(오늘날 코르푸)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코르키라는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였으나 본국과 사이가 나빴다. 발단은 코르키라가 세운 또 다른 식민도시 에피담노스의 내분이었다. 에피담노스에서 민주파와 귀족파가 다투자 한쪽이 모국 코르키라에 도움을 청했다 거절당하고, 결국 코린토스에 손을 내밀었다. 코린토스가 개입하자 코르키라가 반발하면서 코르키라와 코린토스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수세에 몰린 코르키라는 강력한 해군을 가진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했다. 코르키라의 함대 규모는 그리스에서 손꼽혔기에, 이것이 코린토스(스파르타 동맹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아테네는 원치 않았다. 아테네는 30년 평화조약을 깨지 않으려 직접 교전은 피하고 방어만 한다는 조건으로 함대를 보냈다. 그러나 기원전 433년 시보타 해전에서 결국 아테네 함선이 코린토스와 충돌하고 말았다. 코린토스는 격분했다.
두 번째 불씨는 포티다이아였다. 포티다이아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 가맹국이면서 동시에 코린토스의 식민도시라는 이중적 지위에 있었다. 코르키라 사건으로 코린토스와 관계가 험악해진 아테네는 포티다이아에 코린토스와의 연결을 끊으라고 압박했고, 이에 포티다이아가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가 포위했다. 코린토스는 의용군을 보내 포티다이아를 도왔다. 두 진영의 충돌이 점점 노골화된 것이다.
세 번째이자 가장 직접적인 도화선은 메가라 봉쇄령이었다. 아테네는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이웃 메가라(스파르타 동맹국)에 대해,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모든 항구와 시장에서 메가라 상인을 배제하는 경제 봉쇄 조치를 내렸다. 상업 국가 메가라에 이는 치명적이었다. 메가라는 코린토스와 함께 스파르타에 강력히 호소했다. 아테네가 평화조약을 위반하고 동맹국들을 핍박하니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린토스를 비롯한 동맹국들의 압박에 스파르타는 회의를 열었다. 격론 끝에 스파르타 민회는 아테네가 조약을 어겼다고 결의했다. 표면적으로는 메가라 봉쇄령과 코린토스의 호소가 이유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앞서 말한 구조적 두려움이 있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메가라 봉쇄령 철회와 동맹국들의 자치 보장을 요구했고, 사실상의 최후통첩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주라"고 선언했다.
긴장이 임계점에 다다른 기원전 431년 봄, 전쟁의 막을 올린 것은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에서 벌어진 기습이었다. 스파르타 동맹국 테베의 군대가 아테네 동맹국 플라타이아를 야밤에 기습 점령하려 한 것이다.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했으나 플라타이아 시민들이 반격해 테베군을 격파하고 포로를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두 진영은 돌이킬 수 없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30년 평화조약은 15년 만에 깨졌다.
전쟁이 시작되자 두 진영은 각자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피하는 정반대 전략을 세웠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했다. 스파르타 육군은 그리스 최강이라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티카의 농촌 주민을 모두 도시 안으로 불러들이고, 도시와 항구 피레우스를 잇는 긴 성벽 안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스파르타군이 아무리 농토를 짓밟아도 성안에서 버티면서, 막강한 해군으로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습격하고 제해권으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한다는 구상이었다. 시간은 자금과 해군이 우세한 아테네 편이라 본 것이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 2세는 그 반대였다. 매년 여름 아티카에 쳐들어가 농토와 올리브밭, 포도밭을 불태웠다. 아테네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성 밖으로 끌어내 육상 결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반을 그의 이름을 따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자기 농토가 불타는 것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페리클레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합리적이었으나, 누구도 예상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농촌 인구까지 전부 좁은 성벽 안으로 몰아넣자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졌고, 위생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 기원전 430년, 도시 안에 끔찍한 역병이 돌았다. 정확한 정체는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이 거론된다), 그 참상은 투키디데스가 직접 병에 걸렸다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히 기록했다.
역병은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추정된다. 시신이 거리에 쌓였고, 사회 질서와 종교적 규범이 무너졌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법과 도덕을 무시하고 향락에 빠졌다.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기원전 429년 이 역병으로 페리클레스 본인이 사망한 것이다. 그의 두 아들도 먼저 역병으로 잃은 뒤였다.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아테네 정치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는 권위와 식견으로 민회의 변덕을 제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를 두고, 명목은 민주정이지만 실질은 제1시민 한 사람의 통치였다고 평했다. 그가 사라지자, 시민의 인기에 영합해 극단적 주장을 펴는 선동 정치가, 이른바 '데마고고스(demagogos)'들이 정치를 좌우하기 시작했다. 신중함은 사라지고 즉흥과 강경이 그 자리를 채웠다.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 정치를 장악한 대표적 선동가가 가죽 무두질 공장 주인 출신의 클레온(Kleon)이었다. 그는 강경 일변도의 주전론자로, 동맹국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전쟁 확대를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 주는 사건들이 잇따랐다.
기원전 428년, 레스보스섬의 도시 미틸레네가 아테네 동맹에서 이탈하려다 진압되었다. 처리를 두고 민회가 열렸는데, 클레온은 본보기로 미틸레네 성인 남성 전원을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는 노예로 팔자고 주장해 가결시켰다. 처형 명령을 실은 배가 출항했다. 그런데 다음 날 시민들이 그 결정이 지나치게 잔인하다며 다시 민회를 열었고, 격론 끝에 결정을 번복해 주모자만 처벌하기로 했다. 두 번째 배가 첫 배를 미친 듯이 뒤쫓아, 학살 직전에 가까스로 명령을 취소시켰다. 민주정의 변덕이 어떻게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지 보여 준 장면이었다.
같은 시기, 전쟁의 첫 무대였던 플라타이아는 그만한 운이 없었다. 스파르타에 포위된 끝에 기원전 427년 항복했는데, 스파르타는 형식적 재판을 거쳐 항복한 플라타이아 시민 200여 명을 모두 처형하고 도시를 파괴했다. 동맹국 테베의 원한을 갚아 준 것이다.
전쟁의 흐름을 잠시 아테네 쪽으로 기울인 사건이 기원전 425년의 필로스·스팍테리아 전투다. 아테네 장군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후대의 동명 웅변가와는 다른 인물)가 펠로폰네소스 서해안 필로스에 요새를 쌓았다. 스파르타는 이를 위협으로 여겨 군대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스파르타 정예병 약 420명이 인근 스팍테리아섬에 고립되었다.
소수의 스파르타 정예 시민이 갇히자 스파르타는 크게 동요했다. 호모이오이의 수가 워낙 적어 한 명 한 명이 귀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휴전을 청하며 협상에 나섰으나, 클레온이 강경하게 나가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런데 정작 섬을 함락하지 못하고 시간이 길어지자 아테네 민회에서 클레온을 향한 비난이 일었다. 궁지에 몰린 클레온은 자신이 직접 가서 20일 안에 스파르타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오겠다고 호언했다. 일종의 정치적 도박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데모스테네스와 협력해 정말로 스팍테리아의 스파르타군을 항복시키고 약 290명을 포로로 잡아 아테네로 끌고 왔다. 그때까지 스파르타 전사는 항복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신화가 있었기에, 이 항복은 그리스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아테네는 이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스파르타가 다시 아티카를 침공하면 포로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덕분에 한동안 스파르타의 아티카 침공이 멈췄다.
그러나 전세는 다시 뒤집혔다. 기원전 424년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를 공격했다 델리온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이 전투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중장보병으로 참전해 용맹하게 후퇴를 엄호했다고 전한다). 같은 해, 스파르타의 명장 브라시다스(Brasidas)가 등장했다. 그는 소수 정예를 이끌고 멀리 북부 트라키아 지방으로 원정해, 아테네의 중요한 식민도시이자 은광·목재 공급지인 암피폴리스를 함락했다. 이는 아테네에 뼈아픈 손실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암피폴리스 상실의 책임을 지고 추방당한 아테네 장군이 바로 이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다. 그는 인근에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제때 도착하지 못해 도시를 잃었고, 그 책임으로 20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역설적으로 이 망명 덕분에 그는 양 진영을 두루 취재하며 전쟁사를 집필할 수 있었다.
기원전 422년,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양 진영의 강경파를 대표하던 두 사람이 모두 전사했다. 주전론을 이끌던 핵심 인물들이 사라지자, 양측에서 전쟁에 지친 평화 세력의 목소리가 커졌다.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온건파 지도자 니키아스(Nikias)와 스파르타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를 '니키아스 평화'라 한다. 명목상 50년간 평화를 유지하고, 점령지를 서로 반환하며, 포로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10년에 걸친 아르키다모스 전쟁이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평화는 불완전했다. 코린토스·테베·메가라 등 스파르타의 핵심 동맹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무시되었다며 조약 비준을 거부했고, 점령지 반환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명목상 평화일 뿐 긴장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어정쩡한 평화기에 한 인물이 아테네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였다.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 출신으로, 페리클레스의 피후견인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빼어난 외모와 화려한 언변, 넘치는 야심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변덕스럽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도덕적 절제가 부족한 위험한 천재였다. 그는 니키아스의 평화 노선에 반대하며 강경 팽창을 주장했고,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다시 악화시키는 외교 공작을 벌였다.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가 가담한 반스파르타 연합이 스파르타에 패하면서, 니키아스 평화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시칠리아 원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투키디데스가 특별히 공들여 기록한 한 장면을 짚고 가야 한다. 기원전 416년 멜로스섬에서 벌어진 일이다. 멜로스는 스파르타 계열의 작은 중립 도시국가로, 아테네 동맹에도 스파르타 동맹에도 가담하지 않으려 했다. 아테네는 함대를 보내 멜로스에 동맹 가입과 조공을 요구했다.
투키디데스는 이때 아테네 사절과 멜로스 지도자들이 나눈 협상을 대화체로 기록했는데, 이것이 국제정치 사상사에서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다. 멜로스인들이 정의와 중립의 권리를 호소하자, 아테네 사절은 냉정하게 답했다. 정의란 대등한 힘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나 따질 수 있는 문제이며, 현실에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당한다는 것이다.
멜로스의 대화는 국제관계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현실주의(realism)의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꼽힌다. 멜로스인들은 신의 도움이나 스파르타의 구원, 명예와 정의를 내세웠지만, 아테네는 그 모든 것을 환상이라 일축했다. 약 2,400년 전의 이 대화가 오늘날 국제정치학 강의 첫 시간에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는 것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 힘의 논리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멜로스는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테네는 멜로스를 함락한 뒤 성인 남성을 모두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를 노예로 팔았으며, 그 땅에 자국 이주민을 보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자유를 지킨 영웅이었던 아테네가, 이제는 약소국을 짓밟는 제국이 되어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이 잔혹한 장면을, 곧이어 벌어질 아테네의 오만한 시칠리아 원정과 그 파국 바로 앞에 배치했다. 아테네의 도덕적 타락이 그 자신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처럼.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거대한 도박에 나선다. 시칠리아 원정이다. 발단은 시칠리아의 도시 세게스타가 이웃 셀리누스(시라쿠사의 동맹)와 분쟁을 벌이다 아테네에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기회에 시칠리아 최강 도시이자 코린토스 계열인 시라쿠사를 정복하면, 그 풍부한 자원과 인력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체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신중한 니키아스는 강력히 반대했다. 본토 전쟁도 끝나지 않은 마당에 바다 건너 멀고 강한 도시를 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정을 막으려 일부러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자금이 필요하다고 부풀려 말했는데, 이것이 역효과를 냈다. 시민들이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그 정도 규모라면 반드시 이긴다며 더 열광한 것이다. 결국 민회는 대규모 원정을 가결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반대파인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 라마코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함대가 출항하기 직전, 아테네 곳곳에 세워진 헤르메스 신상들이 하룻밤 사이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성모독이자 불길한 징조였다. 알키비아데스가 평소 행실을 이유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출항 전에 재판받겠다고 했으나 정적들은 그가 떠난 뒤 궐석으로 기소했다. 원정 도중 소환 명령을 받은 알키비아데스는 처형을 피해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해 버렸다. 원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적군에게 아테네의 약점을 알려 주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두 가지 치명적인 조언을 했다. 첫째, 시라쿠사에 유능한 지휘관을 보내 도우라는 것. 둘째, 아티카의 데켈리아에 영구 요새를 세워 아테네를 상시 압박하라는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두 조언을 모두 따랐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아테네군은 초반에 시라쿠사를 포위하며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적극적 공격가 알키비아데스가 빠지고 신중한(혹은 우유부단한) 니키아스가 단독 지휘를 맡으면서 작전이 느려졌다. 결정적으로 스파르타가 보낸 명장 길리포스(Gylippos)가 시라쿠사에 도착해 방어를 진두지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시라쿠사는 반격에 나섰고, 아테네는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며 매달렸으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니키아스는 철수해야 할 시점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후퇴를 결심한 날 밤, 하필 월식이 일어났다. 미신을 믿던 니키아스는 점술가의 말에 따라 27일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이 치명적 지연 동안 시라쿠사 함대가 항구를 봉쇄해 아테네 함대를 가두었다. 항구 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궤멸했다. 바다로 탈출할 길이 막힌 아테네 육군은 내륙으로 도주했으나 추격당해 강가에서 학살당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약 200척의 함대와 수만 명의 병력이 통째로 사라졌다. 항복한 수천 명은 시라쿠사의 채석장에 갇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갔다. 두 지휘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이 원정을 그리스 역사상 최대의 군사 행동이자, 승자에게는 가장 빛나고 패자에게는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고 기록했다. 아테네 국력의 핵심이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시칠리아 참사 이후 전쟁의 마지막 국면을 '데켈리아 전쟁' 또는 '이오니아 전쟁'이라 부른다. 알키비아데스의 조언대로 스파르타는 아티카의 데켈리아에 영구 요새를 구축했다. 이제 스파르타군은 여름 한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아티카에 주둔하며 아테네를 압박했다. 농사는 불가능해졌고, 은광에서 일하던 노예 약 2만 명이 도망쳤으며, 아테네는 육로가 막혀 모든 보급을 바다에 의존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위기는 동맹의 이탈로 번졌다.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무너지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델로스 동맹의 속국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더 결정적인 것은 페르시아의 개입이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에 빼앗긴 이오니아 지역을 되찾을 기회로 보고, 스파르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함대 건조를 도왔다. 그토록 페르시아와 싸웠던 그리스인들이, 이제 같은 그리스인을 치기 위해 페르시아의 돈을 받는 형국이었다.
이 시기 알키비아데스의 행보는 변화무쌍했다. 스파르타에서도 추문을 일으켜(스파르타 왕비와의 추문이 전한다) 페르시아 총독 티사페르네스에게로 옮겨갔고, 다시 아테네 복귀를 노렸다. 기원전 411년 아테네에서는 전쟁 피로와 재정 위기 속에 과두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400인 정권'을 세웠다. 민주정이 잠시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사모스섬에 주둔하던 아테네 함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민주정을 고수했으며, 알키비아데스를 지휘관으로 맞아들였다. 결국 400인 정권은 몇 달 만에 붕괴하고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복귀한 알키비아데스는 한동안 아테네 함대를 이끌고 키지코스 해전 등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만회하는 듯했다. 기원전 407년 그는 영웅처럼 아테네에 귀환했다. 그러나 부하 장수가 노티온 해전에서 패하자 다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고, 이후 아테네 정치에서 영영 멀어졌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 함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이 승리가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낳았다. 전투 후 폭풍 때문에 바다에 빠진 자국 병사들을 구조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승리한 장군 여덟 명을 한꺼번에 재판에 부친 것이다. 한 사람씩 재판해야 한다는 절차를 무시하고 집단으로 유죄를 선고했고, 붙잡힌 여섯 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 단 한 명, 적법 절차를 어긴다며 끝까지 반대표를 던진 평의회 의장이 있었는데, 바로 철학자 소크라테스였다.) 승리한 유능한 지휘관들을 스스로 죽인 이 사건은, 선동에 휘둘린 민주정의 자기 파괴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전쟁의 마지막 장면은 기원전 405년 헬레스폰토스의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펼쳐졌다. 페르시아의 자금으로 강력한 함대를 갖춘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Lysandros)가, 방심한 아테네 함대를 해변에서 기습해 거의 통째로 나포했다. 아테네는 곡물 수입 생명줄인 흑해 항로를 완전히 잃었다. 함대도, 식량도, 자금도 바닥난 것이다.
리산드로스는 아테네로 진군해 항구 피레우스를 봉쇄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마침내 항복했다. 코린토스와 테베는 아테네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을 노예로 삼자고 주장했으나, 스파르타는 한때 페르시아에 함께 맞섰던 도시를 멸망시키는 데까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가혹한 항복 조건이 부과되었다. 도시와 항구를 잇는 긴 성벽을 허물고, 함대를 12척만 남기고 모두 넘기며, 해외 영토를 포기하고, 스파르타의 동맹국으로서 그 지휘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성벽은 피리 소리에 맞춰 헐렸고, 사람들은 그날을 그리스 자유의 시작이라 여겼다고 투키디데스의 후계자 크세노폰은 기록했다.
승전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과두 정권인 '30인 참주'를 세웠다. 이들은 8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정적과 부유한 시민 1,500여 명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공포 정치를 폈다. 그러나 망명한 민주파가 반격해 기원전 403년 30인 참주를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회복했다. 회복된 민주정은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다만 이 회복된 민주정이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신성모독과 청년 타락의 죄를 물어 사형을 선고한 것은 잘 알려진 역설이다.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 전체를 소진시켰다. 승자는 스파르타였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는 육군 강국이었을 뿐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제국을 운영할 역량도, 그럴 만한 시민 수도 부족했다. 게다가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돈에 의존한 대가로,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넘기는 굴욕적 처지가 되었다. 자유를 준다며 아테네 제국을 무너뜨린 스파르타가, 정작 같은 그리스인을 페르시아에 팔아넘긴 셈이다.
스파르타의 패권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그 억압적 지배에 그리스 도시들이 반발했고, 마침내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신흥 강국 테베가 사선 대형이라는 혁신적 전술로 무적이라 여겨지던 스파르타 육군을 격파했다. 스파르타 정예 시민이 대거 전사하면서, 소수의 시민에 의존하던 스파르타는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테베의 패권 역시 잠깐이었다. 끝없는 내전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두 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부상했다.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제압하고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으며, 그의 아들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어느 한 도시국가의 패배가 아니라, 폴리스라는 정치 체제 전체의 쇠퇴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서로를 소진시킨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다시는 예전의 활력을 되찾지 못했고, 패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다시 테베로, 끝내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이 전쟁을 기록한 투키디데스는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원인을 인간 본성과 권력의 작동 원리에서 찾았고, 그래서 자신의 기록이 한 시대의 이야기를 넘어 영원히 되풀이될 인간사의 교본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일시적 갈채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자산으로 쓴다고 밝혔다.
그가 짚은 전쟁의 근본 원인, 즉 부상하는 신흥 강국(아테네)에 대한 기존 패권국(스파르타)의 두려움이라는 통찰은 2,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강력한 분석 틀로 쓰인다.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은 2012년 한 기고문에서 이를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 이름 붙였고, 2017년 저서 『전쟁으로 향하는 운명(Destined for War)』에서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의 자리를 위협할 때, 그로 인한 구조적 긴장과 상호 불신이 양측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쟁으로 치닫는 경향을 가리킨다.
앨리슨은 지난 500년간 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에 도전한 사례를 16건 분석했는데, 그중 12건이 전쟁으로 귀결되었다고 보았다(이 사례 선정과 해석에는 학계의 비판도 있다). 그는 이 틀을 부상하는 중국과 기존 패권국 미국의 관계에 적용해 큰 주목을 받았다. 다만 그의 핵심 주장은 전쟁이 운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함정의 존재를 자각하고 신중하게 관리하면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400년 전 두 그리스 도시의 비극이, 오늘날 강대국 관계를 비추는 거울로 다시 읽히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교훈은 단순한 승패에 있지 않다. 외부의 적 앞에서 단결했던 두 강국이, 그 적이 사라지자 서로를 향한 두려움과 야심을 제어하지 못해 함께 몰락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때 자유와 민주정의 상징이었던 아테네가 제국의 오만에 빠져 멜로스를 학살하고, 무모한 원정에 국력을 쏟고, 선동에 휘둘려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 위대한 문명도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 안의 두려움과 오만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이 이야기는, 투키디데스의 바람대로 영원히 남을 자산이 되었다.
한 도시가 사람이 아닌 제도로 자신을 다스리는 실험에 도달했고(1편), 그 시민군이 거대한 외부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며 황금기의 토대를 닦았으며(2편), 그러나 그 영광에 도취한 제국이 같은 그리스인과의 내전으로 스스로를 소진시켰다(3편). 아테네의 흥망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으로 단련되며, 또 어떻게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로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