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옥스퍼드 강연에서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이 있는가?” 교도소 감방 업그레이드부터 멸종위기종 사냥 경매까지, 그는 시장이 어디에 속하고 어디엔 속하지 않는지를 청중과 함께 따져 나간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정의(Justice)’ 강의로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자다. 이 강연은 그가 젊은 시절 유학했던 옥스퍼드로 돌아와 행한 것으로,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핵심 논지를 청중과의 토론으로 풀어낸 자리였다.
강연은 가벼운 회고로 시작한다. 샌델은 거의 40년 전 옥스퍼드 발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에 도착했을 때 학장이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의 환영사를 떠올린다. 힐은 자신이 젊은 튜터였던 시절, 한 상류층 학생이 학기말에 5파운드를 ‘팁’으로 남기고 떠났던 일을 회고하며, 시대가 달라졌으니 이제 튜터에게 팁을 주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샌델은 짓궂은 질문을 끄집어낸다. 왜 안 되는가. 가르침에 돈을 매기는 일의 무엇이 잘못인가.
흥미롭게도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여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스미스는 교수에게 고정 봉급을 주는 방식이 나태를 부른다고 보았고, 차라리 강의가 끌어모은 수강생 수에 따라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고정 봉급이 낳은 게으름의 가장 분명한 사례로 지목한 곳이 바로 옥스퍼드대학교였다는 점은, 강연 장소를 생각하면 더없이 짓궂은 인용이다. 이 도입은 곧장 강연의 본 질문으로 이어진다.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질문, 아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는가.
지난 수십 년간 일어난 ‘조용한 혁명’
샌델은 지난 30~40년 사이 세계가 조용한 혁명을 겪었다고 진단한다. 오늘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드는 사례들은 가볍게 들리지만 의도는 분명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버라에서는 수감자가 돈을 더 내면 표준 감방보다 나은 감방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런던의 관람차 런던아이(London Eye)는 한때 푸른 조명을 켰지만, 코카콜라가 명명권과 브랜딩 권리를 사들이면서 붉은 조명으로 바뀌고 객실마다 로고가 붙었다. 더 무거운 영역에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미군 병력보다 많은 수의 민간 군사계약자가 있던 시기가 있었다. 전쟁을 민간에 외주 줄지를 두고 공개 토론을 거친 적은 없는데도,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샌델은 강연 전체를 떠받치는 구분 하나를 제시한다. 시장경제(market economy)와 시장사회(market society)는 다르다. 시장경제는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 유용하고 효율적인 ‘도구’다. 반면 시장사회는 거의 모든 것이 매물이 되는 ‘삶의 방식’이다. 시장적 사고와 가치가 가정과 인간관계, 건강, 교육, 언론, 정치, 법, 시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상태를 말한다. 샌델의 물음은 우리가 시장경제를 넘어 시장사회로 미끄러져 온 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걱정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다.
시장은 망치 같은 도구다. 못을 박을 때 망치는 더없이 훌륭하다. 문제는 손에 망치를 들면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시장경제가 시장사회로 번지는 일은, 망치가 좋다는 이유로 나사도 그림도 사람의 손도 전부 망치로 두드리려 드는 상황과 같다. 도구가 나쁜 게 아니라, 도구가 닿아선 안 될 곳까지 닿는 것이 문제다.
우정, 사과, 그리고 ‘산 것임이 알려지면’ 사라지는 가치
그래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적어도 몇 가지는 남아 있지 않을까. 샌델은 우정을 예로 든다. 친구가 부족해 평범한 방법으로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 돈으로 친구를 사들이려 한다고 해 보자. 곧 깨닫게 되는 것은, 고용된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친구를 사들이는 데 쓴 바로 그 돈이, 우리가 우정에서 구하려던 가치 자체를 녹여 없앤다.
그렇다면 우정의 ‘표현’에 해당하는 사회적 관행들은 어떨까. 샌델은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국의 한 대행 회사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 돈을 내고 대신 사과해 줄 사람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대신해 사과합니다”가 그 회사의 구호다. 다른 하나는 결혼식 축사다. 오늘날에는 온라인에서 신랑신부의 정보를 입력하고 원하는 분위기(웃긴 축사인지, 눈물 나는 축사인지)를 고르면, 며칠 안에 약 149달러에 맞춤 축사를 받아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엄밀히 말하면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샌델은 간단한 시험을 제안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식에서 좌중을 울린 감동적인 축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149달러를 주고 산 것이었다면 그 축사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빛이 바랜다. 더 결정적인 시험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축사를 샀다면, 낭독하기 직전에 “이건 인터넷에서 산 겁니다”라고 밝히겠는가. 대개는 밝히지 않는다. 산 것임을 숨기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가, 돈으로 사는 순간 의미가 손상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증거다.
핵심 메시지 — 우정의 표현은 돈으로 ‘구매’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매매된 것임이 드러나는 순간 의미가 변질되고 가치가 훼손된다. 어떤 재화는 돈이 닿으면 성질 자체가 바뀐다.
신장 매매 논쟁이 드러낸 ‘자유’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
이 통찰은 더 첨예한 사례로 이어진다. 신장을 비롯한 인체 장기의 자유로운 매매를 허용해야 하는가. 매년 수천 명이 이식 대기 명단에서 신장을 기다리다 사망한다. 적지 않은 경제학자는 이타적 기증만으로는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니 시장을 열어 사고팔게 하면 공급이 늘고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를 도덕적으로 거부한다. 강연장 청중도 다수가 반대했다. 샌델은 그 반대의 이유를 하나씩 끌어냈다.
첫 번째 줄기는 불평등과 강압에 관한 것이다. 한 청중(애나)은 장기를 파는 쪽은 대개 가난해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는 쪽은 그들에게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그 약점을 이용한다. 자유로운 합의처럼 보이는 거래가 실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청중은 접근의 불평등을 덧붙였다. 신장이 비싸지면 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으로 갈리는데, 이는 돈이 있으면 치료받고 없으면 못 받는 의료 불평등과 같다는 것이다. 또 다른 청중은 영리 동기가 부실한 장기와 안전을 소홀히 한 수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두 번째 줄기는 결이 다르다. 한 청중(신시아)은, 설령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반론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부분으로 떼어 팔 수 있는 부품의 집합이 아니며, 몸과 성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엄과 신성함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는 성매매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기에 날카로운 반박이 나온다. 한 청중(몬테)은, 우리는 일을 하며 늘 자신을 상품화한다고 지적했다. 두뇌와 지성을 써서 돈을 버는 노동도 결국 자신을 수단으로 쓰는 일인데, 신장이나 성을 파는 것이 두뇌를 파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샌델은 이 도전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는 동기의 문제로 답을 좁힌다. 오직 돈만을 위해 과학자가 되거나 음악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타락하는 구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그 일을 한다면, 노동은 인간의 존엄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연의 개념적 핵심이 여기서 드러난다. 시장을 거부하는 논변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가 있다.
불평등·강압 논변은 자유에 관한 물음이다. 거래가 자유로워 보여도 배경의 불평등이 한쪽을 떠밀면 그 합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반면 부패 논변은 가치에 관한 물음이다. 어떤 재화나 인간의 능력을 한낱 사물로 다루는 것이 그 재화를 대하는 올바른 방식을 훼손하는가를 묻는다. 두 논변이 갈라지는 결정적 지점은 이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을 모두 없애 누구도 가난 때문에 떠밀리지 않게 만들어도, 부패 논변은 여전히 남는다.
검은코뿔소 사냥 경매와, 아이에게 책값을 주는 일
샌델은 이 부패 논변을 인간의 몸에서 떼어내 전혀 다른 사례로 시험한다. 첫째는 멸종위기종 보전이다. 검은코뿔소는 밀렵으로 개체 수가 약 5,000마리 수준까지 줄었다. 나미비아 정부는 이례적인 시장형 모금 방식을 택했다. 정부가 발급한 사냥 허가권을 경매에 부친 것이다. 2014년 댈러스 사파리 클럽이 진행한 이 경매에서 텍사스의 트로피 사냥꾼 코리 놀턴이 35만 달러에 검은코뿔소 한 마리를 쏠 권리를 낙찰받았다. 사냥 대상은 번식기를 지나 다른 개체에게 위협이 되는 늙고 사나운 수컷 한 마리로 한정되었고, 경매 수익은 나머지 코뿔소를 지키는 보전·반밀렵 활동에 쓰였다. 이것이 보전 자금을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거부감이 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청중(로즈)은 메시지의 문제를 짚었다. 코뿔소를 보호하려는 활동이 정작 “코뿔소 한 마리를 죽여도 좋다”는 허가를 내주는 셈이며, 경매라는 시장 메커니즘 자체가 그런 표현적 의미를 띤다는 것이다. 코뿔소 사냥을 명예이자 사치재로 격상시키는 도덕적 비용이 거기에 있다. 다른 청중(조시)은 더 도발적인 비유를 들었다. 이미 사형이 확정된 수감자의 처형권을 경매에 부친다고 해 보자. 어차피 처형은 집행되고 돈은 좋은 데 쓰인다 해도, 처형할 권리를 팔아 돈을 버는 일은 거북하다. 동물에게도 같은 거부감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편도 있었다. 한 청중(폴)은 원칙적 공리주의의 입장을 끝까지 밀고 갔다. 가장 많은 코뿔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하는 길이라면 경매는 정당하며, 같은 논리라면 좋은 결과를 낳는 처형권 경매조차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샌델은 그 일관성에 감탄하면서도, 대다수가 느끼는 거부감의 정체를 부패 논변에서 찾는다. 시장이 어떤 재화를 다루는 방식이, 그 재화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부식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사례는 한결 일상적이다. 여러 학교가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책을 읽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미국 뉴욕, 시카고, 워싱턴 등에서는 성적에 돈을 거는 실험을 했다. A 학점에 50달러, B 학점에 35달러 식이다. 텍사스 댈러스에서는 여덟 살 아이가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2달러를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한 청중(조시)은 이것이 ‘잘못된 것’을 유인한다고 보았다. 보상은 측정 가능한 것, 즉 ‘읽은 책의 권수’에 붙는다. 그래서 아이는 내용을 음미하기보다 책을 빨리 해치우게 되고, 정작 길러야 할 배움의 즐거움과 사고력은 밀려난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청중(제러마이아)은 마중물 논리로 맞섰다. 돈으로 일단 책을 펼치게 만들면, 그중 누군가는 책에 빠져들어 더는 돈이 필요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려면 첫 책이 정말 좋은 책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핵심 메시지 — 흥미롭게도 이 논쟁의 양쪽은 모두 부패 논변을 전제한다. 돈으로 끌어낸 독서는 ‘낮은 동기’이고 배움 자체를 위한 독서는 ‘높은 동기’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다툼은 돈이 높은 동기를 영영 밀어내는지, 아니면 잠시 끌어들였다가 사라질지에 있을 뿐이다.
스위스 핵폐기물과 이스라엘 모금이 보여 준 역설
지금까지의 사례 대부분은 사고 실험이었다. 그러나 현실에도 돈이 활동의 의미를 바꾸어 버린 사례가 있다. 두 가지가 특히 유명하다.
첫째는 스위스 사례다. 한 마을이 핵폐기물 처분장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법에 따라 주민 동의를 물어야 했는데, 보상에 관한 언급 없이 “선정되면 수용에 찬성하겠는가”라고 묻자 위험에도 불구하고 51%가 찬성했다. 그런데 “연간 보상금을 지급한다면 찬성하겠는가”라고 다시 묻자 찬성률은 25%로 반토막이 났다. 더 많은 돈을 제안하면 더 많은 사람이 응한다는 표준 가격 이론의 예측과 정반대다. 위험에 대한 추정치는 보상 제안 전후로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돈을 준다니 더 위험한 모양’이라는 해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 청중(로버트)은 그 까닭을 이렇게 풀었다. 보상이 없을 때 주민들은 시민적 의무의 관점에서 답했다. 나라에 에너지가 필요하고 폐기물은 어딘가 가야 하니, 공동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끼어드는 순간 질문의 성격이 바뀐다. 시민적 물음이 금전적 거래로 변하고,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돈으로 ‘파는’ 것으로 받아들여 거부했다. 마음을 바꾼 이들은 “뇌물처럼 느껴졌다”고 답했다.
벌금(fine)과 가격(price)은 다르다. 가격은 합의된 교환의 대가이고, 벌금은 위반에 대한 처벌이자 도덕적 비난의 표지다. 보상금이 ‘가격’처럼 느껴지는 순간, 위험을 떠안는 일은 공동체를 위한 시민적 결단에서 돈을 받고 하는 거래로 바뀐다. 의무감이 사라진 자리에 ‘뇌물’이라는 거부감이 들어선다. 돈은 액수만 더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의미 자체를 갈아 끼운다.
둘째는 이스라엘 사례다. 매년 고등학생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자선 모금을 한다. 한 해 경제학자들이 학생 180명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 실험했다. 첫째 집단은 모금의 의의를 짧게 듣고 그대로 나갔고, 둘째 집단은 같은 설명에 더해 모금액의 1%를, 셋째 집단은 10%를 받기로 했다. 결과는 무보수 집단이 가장 많이 모았다(1인당 약 239 NIS). 보수를 받은 집단 중에서는 10%(약 219)가 1%(약 154)보다 많이 모았으니, 줄 거면 충분히 주라는 가격 이론은 그 범위에서만 맞았다. 그러나 어떤 보상도 무보수 집단을 넘지 못했다. 돈이 들어오자 시민 교육의 일부였던 모금이 한낱 ‘일’로 바뀌었고, 모금의 명분을 위해 뛰던 내재적 동기가 밀려난 것이다.
경제학에 관하여, 그리고 정치에 관하여
샌델은 이 모든 논의에서 두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는 경제학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경제학은 흔히 인간 행동과 사회적 선택을 다루는 가치중립적 과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돈과 시장이 어떤 사회적 관행의 의미를 바꾸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비시장 규범을 밀어낸다면, 언제 시장을 쓰고 언제 쓰지 않을지를 규범적 질문 없이 정할 수는 없다. 어떤 규범이 밀려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신경 써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은 한 가지 단서를 단다. 토스터나 평면 텔레비전 같은 물질재라면 시장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지 않는다. 선물로 받든 사서 쓰든 작동은 똑같다. 그러나 시장이 사회적·시민적 삶에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는 경제학이 가치중립적 과학으로서 독립된 분과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그러했듯 도덕·정치철학의 한 분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둘째는 정치와 공론에 관한 것이다. 시장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적 담론은 더 큰 윤리적 의미를 잃고 공허해졌다. 세계 곳곳에서 시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데, 샌델이 보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정치적 담론은 누구도 고무하지 못하는 좁은 관리·기술 관료적 언어이거나, 서로를 향해 고함만 지르는 당파적 다툼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정작 가치를 둘러싼 큰 윤리적 물음, 재화와 사회적 관행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물음은 빠져 있다.
왜 우리는 이런 물음을 피하는가. 샌델은 깊은 이유 하나를 든다. 시장은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신성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인간의 존엄과 몸과 성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두고 우리는 의견이 갈린다. 의견이 갈리니 그 도덕적 불일치를 정치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고, 그 회피의 통로로 시장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매력은 거짓이다. 도덕 판단을 시장에 외주 주는 습관은 공론장에 도덕적 공백을 남기고, 그 공백이 다시 정치에 대한 환멸을 키운다.
핵심 메시지 — 시장을 제자리에 두려면, 서로 다른 도덕적·영적 견해를 회피가 아니라 대면으로 다루는 ‘상호 존중의 정치’가 필요하다.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견해를 비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샌델의 강연은 단정적인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청중에게 거듭 던진 것은 결론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시장은 어디에 속하고 어디엔 속하지 않는가. 의료와 교육, 환경과 돌봄에 시장 논리를 넓혀 가는 모든 사회에 그 물음은 그대로 적용된다. 강연은 도덕 판단을 시장에 떠넘기던 습관을 거두고, 무엇을 사고팔 수 있으며 무엇은 그래선 안 되는지를 공적으로 따져 보자는 초대이자 도전으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