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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국제정치

중동은 왜 싸우는가

유대인 3천 년의 역사를 따라가면, 우리가 "원래부터 그랬다"고 믿었던 많은 것이 사실과 다르다. 유대인과 무슬림이 천 년을 싸워 왔다는 이미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종교 전쟁이라는 통념, 그리고 미국과 이란이 태생적 원수라는 인식까지. 이 글은 그 오해를 하나씩 풀어 본다.

2026년 5월 23일 · 약 25분 분량

중동 뉴스를 볼 때마다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이 좁은 땅에서는 끝없이 충돌이 일어나는가. 자살 폭탄, 미사일, 전면전이 수십 년째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 이곳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도록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유대인을 가장 오래, 가장 가혹하게 박해한 쪽은 이슬람이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 세계였고,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들인 쪽은 무슬림이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란은 한때 무슬림 국가 중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인정한 나라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갈등의 구도는 길어야 백 년 남짓이다. 그 백 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앞의 3천 년을 먼저 알아야 한다.

BC 922경 왕국 분열 BC 586 바빌론 유수 BC 539 키루스 해방 BC 63 로마 정복 AD 70 제2성전 파괴 AD 135 디아스포라 638 무슬림, 귀환 허용 1492 스페인 추방 1948 이스라엘 건국
유대인 3천 년의 큰 줄기. 시간 간격은 가독성을 위해 균등하게 배치했다. 진한 점은 글에서 자세히 다루는 전환점이다.

01유대인의 시작과 두 번의 멸망


이야기는 솔로몬 왕에서 시작한다. 그가 죽은 뒤 통일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갈라진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당시 정복자들은 정복한 땅의 주민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원래 살던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그렇게 끌려간 북쪽 사람들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무너진다. 이번에도 주민들이 끌려갔고, 끌려간 곳은 제국의 수도 바빌론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바빌론 유수다. 시편에는 이 시절의 노래가 남아 있다. "우리가 어찌 이방의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르랴." 낯선 땅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이 거기 담겨 있다.

02해방자는 페르시아였다


이 노예 같은 처지를 끝내 준 인물이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다. 성경에서는 흔히 고레스라고 옮긴 그 왕이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유대인을 해방했으며, 이듬해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자에게 길을 열어 주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도록 도왔다. 그렇게 재건된 것이 제2성전이다. 페르시아는 이 지역에 예후드라는 행정 구역을 두었는데, 이는 훗날 유다, 유대라는 이름의 뿌리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페르시아는 곧 오늘날의 이란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나라의 조상이, 2500여 년 전에는 유대인을 노예살이에서 풀어 준 해방자였다. 구약 성서가 이방인 왕을 메시아라고 부른 거의 유일한 사례가 바로 키루스다. 한 이슬람 연구자는 강연에서 이 아이러니를 이렇게 표현했다.

키루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너희를 풀어 주었는데, 지금 너희가 내 후손들을 때리고 있구나."
핵심 — 유대인의 첫 해방자는 페르시아, 즉 이란의 조상이었다. 오늘의 적대 관계는 결코 태초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다.

03로마의 정복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후로도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결정적 분기점은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유대 지방을 정복하면서 찾아온다. 식민지가 된 지 백 년이 조금 지난 서기 66년, 유대인은 첫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로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제2성전을 파괴한다. 이때 성벽 일부만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통곡의 벽이다. 본래 이름은 "서쪽 벽"이며, 통곡의 벽이라는 표현은 훗날 그 앞에서 기도하며 우는 유대인들을 보고 붙은 이름이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집단 자결로 생을 마감한 곳이 마사다 요새다. 73-74년경의 일로, 오늘날 이스라엘 건국 정신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성전이 사라지면서 유대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종교에서, 회당에 모이는 종교로 성격이 바뀐다. 흥미롭게도 이 회당의 형식은 훗날 그리스도교 교회의 모범이 되었다.

132년 유대인은 다시 한 번 봉기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려 도시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려 한 것이 도화선이었다. 그러나 이 봉기도 135년에 진압되고, 로마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한다. 이로써 유대인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는 이산, 곧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유대 전역에서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며, 다른 지역에는 여전히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04유대인을 다시 부른 것은 무슬림이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들어섰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그곳에 살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여겨 멀리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뀐 것은 638년이다. 이 해에 예루살렘은 아랍 무슬림의 손에 떨어진다.

당시 무슬림 지도자였던 칼리프 우마르는 도시에 들어와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왜 이 도시에 유대인이 없는가." 그는 예루살렘 같은 성스러운 도시에는 당연히 유대인이 살아야 한다고 보았고, 유대인을 다시 불러들였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살게 된 것이 무슬림의 지배 아래에서였다는 사실은 유대인 자신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핵심 — 유대인과 무슬림이 "원래부터 적"이었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무슬림은 유대인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박해받던 유대인을 받아 준 쪽이었다.

05세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유대교는 다른 둘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만 필요로 하며, 이슬람은 셋 모두를 끌어안는다.

이슬람 아담·모세·예수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를 인정 (무함마드는 마지막 예언자) 그리스도교 유대 전통(구약)을 품되, 예수를 메시아로 본다 유대교 히브리 성서, 자기 완결적
인정하는 예언자와 경전의 범위. 바깥으로 갈수록 더 많은 전통을 끌어안는다. 이슬람이 가장 포괄적인 구조다.

이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음식이다. 유대교와 이슬람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돼지고기가 대표적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내가 더러워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다르다. 신약 성서 마태복음 15장 11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음식이 아니라 말과 생각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이 한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비유 — "못 먹는 것"과 "안 먹는 것"

유대교·이슬람 신자에게 돼지고기는 못 먹는 것이다. 규율이 금한다. 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안 먹어도 되는 것일 뿐, 먹어도 부정해지지 않는다.

이 작은 차이가 삶 전체로 번진다. 그래서 유대인 입장에서는, 먹는 규율이 비슷한 무슬림과 함께 사는 편이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이슬람이 셋을 모두 끌어안는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이슬람의 논리에서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든 뒤,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예언자를 차례로 보냈다. 최초의 예언자는 아담이고, 모세도 예수도 모두 예언자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다. 즉 무함마드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아니라, 기존 예언자들의 끝에 선 사람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는 않되, 훌륭한 예언자로 존중한다. 예수나 모세를 욕하는 사람은 무슬림일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슬람은 다른 두 종교를 부정할 수 없는 구조를 처음부터 안고 있다.

그렇다면 무슬림은 왜 유대교·그리스도교의 경전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까. 이슬람의 설명이 흥미롭다.

◆ 비유 — 같은 원본, 다른 열람 모드

이슬람은 이렇게 본다. 천상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원본 파일이 하나 있고,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무슬림도 모두 그 파일을 내려받았다.

다만 무슬림은 "읽기 전용"으로 열어 원본 그대로 보았고, 앞선 두 종교는 "편집 모드"로 열어 넣고 빼고 고치는 사이에 차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셋의 뿌리는 같지만 경전의 내용이 갈라졌다고 설명한다.

06박해의 뿌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였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그토록 오랜 세월 박해받은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답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공인되고 퍼지면서, 유대인은 다수인 그리스도인 사회 안에서 이질적인 소수로 살아야 했다. 먹는 것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른 데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종교적 적개심까지 더해졌다.

경제적 요인도 컸다.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는 돈을 다루는 일, 특히 이자를 받는 일을 타락한 행위로 여겼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꺼리던 금융업이 자연스럽게 유대인에게 떠넘겨졌다. 백정이 천대받던 것처럼, 돈을 만지는 직업도 천하게 여겨졌고 그 일이 유대인 몫이 된 것이다. 그렇게 금융을 떠맡은 유대인은 부를 쌓았지만, 동시에 더 큰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 격리된 구역에 갇혀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아야 했고, 이 누적된 적개심은 결국 20세기 히틀러의 학살로 폭발한다.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의 결정적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는 데 있다.

07유대인과 무슬림의 의외의 공존


박해받던 유대인을 받아 준 쪽은 거듭 무슬림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중세 스페인이다.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711년부터 1492년까지, 유대인은 그곳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완전히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무슬림이 위에 있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보호받는 위치였다. 그러나 거꾸로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교 세계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1492년,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이 함락되며 이베리아 반도가 그리스도교 세력의 손에 넘어간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유대인 추방이었다.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때 쫓겨난 유대인을 받아 준 나라가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이었다. "이리로 오라"며 문을 연 것이다.

핵심 — 우리가 유대인과 무슬림의 관계를 늘 충돌로만 떠올리는 이유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의 팔레스타인 문제만 보기 때문이다. 그 이전 천 년의 역사는 오히려 공존에 가까웠다.

08시온주의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였다


유대인이 자기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 곧 시온주의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어났다. 결정적 계기는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이다. 독일 대사관으로 군사 기밀이 새어 나가자 프랑스는 범인을 색출했는데, 지목된 드레퓌스가 가진 유일한 "혐의"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뿐이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친 진보의 상징이었다. 그런 나라에서마저 유대인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이 깨달았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이다. 그는 프랑스처럼 진보적인 곳에서도 유대인이 이렇게 살 수 없다면 유럽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1896년 그는 "유대인 국가"라는 책을 썼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 시온주의자 회의를 조직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옛 지명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가장 흔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시온주의는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 헤르츨 자신부터 종교에 밝지 않았고, 당시 유대인이 쓰던 히브리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랍비들을 찾아가 함께 나라를 세우자고 설득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 당시 랍비들의 반대 논리

"지금 힘든 것은 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견디고 견디면 주님이 메시아를 보내 우리 나라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야지, 인간의 손으로 억지로 만들려 하면 더 큰 화를 부른다."

다시 말해, 시온주의는 신앙의 계시가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 운동이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충돌을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 전쟁으로 보는 시각은 출발부터 어긋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유대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09영국이 불을 지피다: 세 개의 모순된 약속


팔레스타인 문제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운 결정적 책임은 영국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 곳에 서로 모순되는 약속을 동시에 한다.

영국 1915-1917 프랑스 (사이크스-피코) 1916 · "중동을 둘이 나눠 갖자" 아랍 (맥마흔 서한) 1915-16 · "도와주면 아랍 독립 국가를 세워 주마" 유대인 (밸푸어 선언) 1917 · "팔레스타인에 민족의 고향을 세우게 해 주마"
같은 시기, 같은 영국이 세 상대에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약속을 했다. 이 모순이 100년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첫째, 영국은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을 맺어 중동을 나눠 갖기로 했다. 둘째, 오스만에 맞서 줄 아랍 세력이 필요해지자, 메카의 지배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맥마흔 서한을 통해 아랍 독립 국가를 약속했다. 다만 그 경계를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 두었다. 셋째, 1917년 11월 2일에는 밸푸어 외무장관 명의로 유대인 대표 격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편지를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여기서 영국의 교묘함이 드러난다. 밸푸어 선언의 문구는 "국가(state)"가 아니라 "민족의 고향(national home)"이었다. 나라를 세워 주겠다는 확약을 피하면서, 유대인의 협력은 끌어내려는 모호한 표현이었다.

이 삼중 약속은 뜻밖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세력이 옛 황실 문서고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맺은 비밀 협정들을 발견하고 이를 공개해 버린 것이다. 약속한 지 2주밖에 안 된 유대인도, 독립을 기대하던 아랍인도 모두 영국에 속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게 되었다.

10그 땅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두 번째 뿌리는 더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유대인이 나라를 세우려 한 그 땅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97년경,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살피러 사람을 보냈고, 돌아온 이가 남긴 말이 이 문제의 본질을 압축한다.

◆ 비유 — 신부는 이미 다른 이의 품에

"신부는 아름다우나, 이미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네."

그 땅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빈 땅이었다면 유대인이 가서 함께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곳에 자기들만의 단일한 나라를 세우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초기에 유대인의 정착을 자금으로 뒷받침한 것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유대인은 처음에는 아랍인에게서 땅을 사들이며 정착촌을 만들었다.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시세보다 높은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점점 늘고 그들이 단일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의도가 알려지자, 아랍인들은 더 이상 땅을 팔지 않기 시작했고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11러시아라는 변수


러시아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으로 가장 먼저 들어간 유대인 정착민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황제 암살에 유대인이 연루되었다는 사실과 다른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인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가게를 부수는 박해가 벌어졌다.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것이다.

가난과 차별 속에서 살던 러시아 유대인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상은 공산주의였다. 출신이나 신분이 아니라 계급만을 묻는 이념은, 정체성을 숨기고 평등을 꿈꾸던 이들에게 일종의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을 이끈 공산주의자 중에는 유대인이 적지 않았다. 오늘날 일부 진영에서 유대인을 공산주의와 결부시켜 비난하는 배경에도 이런 역사가 깔려 있다.

이 연결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이스라엘에는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가 상당수에 이른다. 그래서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적대 관계가 아니며, 양국 정상이 회담에서 이 대규모 러시아어권 인구를 외교적 고려 사항으로 언급할 정도다.

12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결정적 차이


왜 유대인은 끝내 나라를 세웠고, 팔레스타인은 그러지 못했을까. 흔히 다루지 않는 이야기지만 핵심에 가깝다. 차이는 무력이나 외세 이전에, 정체성과 결속의 강도에 있었다.

한 가지 구조적 약점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의 상당 부분이 그 땅에 사는 농민이 아니라, 시리아 등지에 사는 부재지주의 소유였다. 즉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땅은 빌려 부치는 소작지인 경우가 많았다. 자기 땅이라는 의식이 그만큼 옅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대시리아 민족주의"가 퍼져 있어, 팔레스타인을 시리아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독자적인 운동으로 결집하지 못하고 더 큰 흐름에 흡수되어 버린 이유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 반드시 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팔레스타인 쪽은 "이 땅이 내 나라"라는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약했다.결과의 차이는 여기서 갈렸다.

여기에 20세기 최악의 비극이 겹친다. 1930년대 아랍 민중 봉기로 영국이 친(親)시온주의 정책을 거두며 상황이 다소 누그러질 조짐을 보이던 바로 그때, 히틀러가 등장한다. 홀로코스트로 수백만 명이 학살되자, 유대 국가 건설의 명분과 국제적 동정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의 유력 가문 일부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셈법으로 히틀러 쪽에 섰던 사실은, 두고두고 약점으로 잡히게 된다.

131948, 마침내 건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국제연합(UN)에 넘긴다. UN은 현지 실사를 거쳐 1947년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을 나누는 분할안을 만들어 표결에 부쳤다. 유대인 측조차 통과를 자신하지 못했으나, 여러 나라 대표와 인맥을 동원한 막판 설득이 주효했다. 결과는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 분할안은 가결되었다. 반면 아랍은 표결 자체를 거부했고, 부결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부족했다.

이 결의를 바탕으로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벤구리온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다. 그날 아침 영국 국기가 내려갔고, 오후에 새 국가가 선포되었다. 선언 직후 미국이, 이어 소련이 승인했으며, 그날 저녁부터 곧바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가장 의외의 사실 하나.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 중 이스라엘을 처음 인정한 나라는 1949년의 튀르키예였고, 두 번째가 1950년 3월의 이란이었다. 다만 이란은 공식 발표 없이 사실상의 인정에 그쳤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발을 우려해, 외교 관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는 가깝게 지낸 것이다.

핵심 — 오늘날 이스라엘의 최대 적성국으로 꼽히는 이란이, 건국 직후에는 이스라엘을 인정한 두 번째 무슬림 국가였다. 팔레비 왕정 시기 두 나라는 석유와 안보를 주고받는 사실상의 우방이었다.

14이스라엘과 미국, 늘 가깝지는 않았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미국의 밀착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면 역사를 잘못 읽는다. 처음부터 둘이 끈끈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할 때조차 국무부 안에서는 아랍의 석유를 의식한 반대가 적지 않았다. 일부 대통령은 이스라엘 로비 단체나 핵 문제를 두고 상당히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상징적인 장면이 1945년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만나, 석유와 안보를 맞바꾸며 "아랍인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그가 두 달 뒤 사망하지 않았다면 중동의 지형은 달라졌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부유하고 강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어려움을 뚫고 기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지금처럼 단단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5미국과 이란, 악연의 두 장면


그렇다면 한때 우방이던 미국과 이란은 왜 원수가 되었을까. 두 나라의 적개심은 서로 다른 시점에, 거울처럼 마주 보며 생겼다.

1953 모사데그 정권 전복 미국·영국 정보기관이 주도한 쿠데타로 민선 총리를 축출 → 이란이 미국을 불신하게 된 시작 1979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외교관 52명을 444일간 억류 (이슬람 혁명 직후) → 미국이 이란을 적대시한 시작
두 나라의 원한은 다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란에게는 1953년이, 미국에게는 1979년이 출발점이다.

이란 석유는 1908년 영국이 처음 발견했고, 중동 최초의 상업 유전이었다. 오랫동안 영국이 그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1951년 민선 총리 모사데그는 석유를 국유화하며 정당한 몫을 요구했다. 영국은 미국을 끌어들였고, 1953년 미국 정보기관(CIA)과 영국 정보기관이 함께 모사데그를 끌어내리는 공작을 벌인다. 1차 시도는 실패했으나, 곧이어 두 무리의 시위대를 동원해 혼란을 조장하는 2차 공작으로 모사데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았고, 친미 성향의 팔레비 국왕이 복귀했다.

이후 이란은 강력한 친미 국가가 되었고, 1963년 백색 혁명을 통해 문맹 퇴치, 여성 참정,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술집과 디스코가 있고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던 시절이다. 그러나 문화적 자유와 달리 정치적 자유는 없었다. 국민 소득이 오르며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투표를 원했지만, 왕정은 이를 억눌렀다. 이것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결정적 이유다.

혁명 직후만 해도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회복 가능했다. 그러나 미국이 망명한 팔레비 국왕을 치료를 이유로 입국시키자, 이란의 젊은이들은 격분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1953년의 기억이 또렷했다. 미국이 또다시 왕을 앞세워 왕정 복고 공작을 꾸밀 것이라 본 것이다. 그 결과가 대사관 점거와 444일 인질극이었다. 1953년의 그림자가 1979년까지 드리워진 셈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왜 중요한가

이 갈등의 현대적 급소가 호르무즈 해협이다. 세계 해상 석유 교역의 약 4분의 1, 전 세계 석유 소비의 약 5분의 1이 이 좁은 길목을 지난다. 오만 쪽 바다는 수심이 얕아 대형 유조선이 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이란 쪽 항로로만 통과가 가능하다. 대체 수로도 마땅치 않고 송유관으로는 그 물동량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란이 쥔 가장 강력한 카드인 동시에, 이곳이 막히면 세계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이유다.

16맺으며: 종교 싸움이라는 착각


3천 년을 훑고 나면, 흔한 통념 몇 가지가 무너진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천 년을 싸워 온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무슬림은 박해받던 유대인을 거듭 받아 준 쪽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충돌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두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문제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기억할 만하다. 시온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헤르츨은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한 뒤 평생을 한 가지 목표에 바쳤다. 교황을 비롯한 종교·정치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흡수했고, 1897년 바젤에서 "나는 이곳에서 유대 국가를 세웠다"고 선언했다. 그가 살아서 그 나라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선언으로부터 약 50년 뒤인 1948년에 이스라엘은 실제로 세워졌다. 한 사람의 집념이 반세기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중동의 갈등은 단순한 국제 뉴스가 아니다. 그 뿌리를 따라가면 3천 년의 박해와 공존, 그리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켜켜이 쌓여 있다. 지금의 충돌을 "원래 그런 사람들"의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우리는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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