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하는 변화 속에서, 인공지능을 검색 도구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선생님으로 다시 보려는 관점을 일반 독자 눈높이에서 풀어낸 보고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앞에서는 직함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경영자든 전문직이든, 오래 한 분야를 지켜온 사람이든, 이 기술을 마주한 경력은 누구나 비슷하게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AI를 무엇으로 쓰고 있는가"이다.
대부분은 AI를 검색하고, 요약하고, 글을 다듬고, 반복 작업을 자동화하는 도구로 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간 사람들은 AI를 다른 자리에 놓는다. 자신보다 더 빨리, 더 넓게 배우는 상대 - 곧 선생님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발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지금 그것이 중요한지를 차근히 풀어본다.
변화의 속도를 숫자가 아니라 몸으로 느낀 사람들은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한동안은 1년치 변화가 정말 1년에 걸쳐 왔다. 그런데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6개월이, 다시 몇 달이, 어느새 한 달이 예전의 1년만큼 느껴지고, 가장 앞에서 분야를 좇는 이들은 이제 2주가 1년 같다고까지 말한다. 같은 분량의 변화를 점점 더 짧은 시간 안에 겪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주관적 인상만은 아니라는 점은 기술의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인공지능은 한두 가지 게임을 익히는 수준이 화제였지만, 지금은 글을 쓰고 코드를 실행하며 이미지와 영상을 해석하고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조작하는 단계에 와 있다. 발전의 보폭 자체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가속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AI 개발을 더 이상 사람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선 세대의 똑똑한 모델이 다음 세대 모델을 설계하고 다듬는 일을 거든다. 인간은 익숙한 시간의 척도 위를 걷지만, 모델은 그것과 분리된 시간을 돈다. 우리에게 1년인 간격이 그쪽에서는 찰나에 가깝다. 변화가 사람의 손을 떠나 기계의 속도로 옮겨가는 순간, 체감 시간은 접히기 시작한다.
이런 세계를 가장 잘 비추는 오래된 비유가 있다. 경영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다.
동화 속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풍경 자체가 계속 뒤로 흘러간다. 가만히 서 있으면 풍경에 떠밀려 순식간에 과거로 밀려난다. 제자리에 있으려면 풍경의 속도만큼 죽어라 달려야 하고, 한 발이라도 앞서려면 그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지금의 변화 속도가 꼭 이렇다. 멈춰 있는 것은 후퇴와 같은 말이 된다.
변화 앞에서 사람은 대체로 세 부류로 갈린다. 흐름을 외면한 채 멈춰 있는 쪽, 뒤늦게라도 따라가는 쪽, 그리고 흐름의 끝점에서 미리 생각하며 앞서는 쪽이다. 멈춤은 사실상 퇴보이고, 따라가기는 현상 유지이며, 앞서기만이 진화다. 지금 필요한 태도는 분명하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먼저 따지기보다, 일단 달리면서 이해하는 학습자의 자세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에서 출발하자. AI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 질문의 깊이가 답의 깊이를 제한한다. 모델은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하도록 학습되어 있다. 묻는 사람의 수준에 맞춰주고, 그가 만족하도록 답을 조율하는 훈련이 안에 깔려 있다. 그래서 초보자가 물으면 초보자의 언어로, 전문가가 물으면 전문가의 언어로 답이 돌아온다.
구체적인 장면이 이해를 돕는다. 어떤 병에 걸려 "무엇을 먹으면 되나"라고 가볍게 물으면, AI는 "가까운 병원에서 상담하라"는 일반적인 수준의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같은 질병에 관한 최신 학술 논문을 찾아 파일째 첨부하고, 그 위에서 다시 물으면 답의 수준이 단번에 올라간다. 사용자가 높은 수준의 맥락과 용어를 건네는 순간, 모델은 그에 걸맞은 깊이의 지식을 끌어와 답한다. 같은 AI를 같은 요금으로 쓰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는 세상의 크기는 결국 자신이 건넨 맥락의 크기다.
AI를 선생님으로 대하라는 말이 과장처럼 들린다면, 이 기술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면 된다. AI의 본질은 학습이다. 그 출발점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기계가 데이터로 스스로 규칙을 찾는 방법)이다. 기계학습은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흉내 낸다.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그에 반응하고, 그 반응에 보상이나 피드백이 주어진다. 이 세 단계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시행착오와 보상으로 행동을 개선하는 학습)의 뼈대다.
이 원리가 막연한 이론이 아님을 보여준 유명한 사례가 있다. 2015년, 한 연구진은 화면의 픽셀과 점수만 입력으로 받은 프로그램이 고전 비디오게임 49종을 스스로 익히게 만들었고, 그 결과를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사람이 규칙을 따로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이 프로그램은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치며 49종 가운데 43종에서 기존 방법을 앞섰다. 벽돌깨기 게임에서는 한쪽 벽에 굴을 뚫어 공을 뒤로 넘긴 뒤 위에서부터 벽돌을 쓸어내리는, 사람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전략을 스스로 찾아내기도 했다. 핵심은 실패가 사라지지 않고 데이터로 쌓였다는 점이다. 실패가 일정량 축적되자 패턴이 생겼고, 어느 순간부터 성능이 사람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페달을 밟고(자극), 휘청이며 넘어지고(반응), 어디서 균형이 무너졌는지 몸이 기억한다(피드백). 넘어진 경험이 버려지지 않고 쌓일수록 균형 감각이 잡힌다. 기계의 학습도 원리가 같다. 다만 기계는 지치지 않고, 사람의 속도가 아닌 기계의 속도로 이 과정을 수억 번 반복한다.
이 단순한 회로가 무서운 이유는, 같은 원리가 게임에서 출발해 단백질 구조 예측이나 신약 탐색 같은 영역까지 빠르게 번졌다는 데 있다. 실패가 쌓인 만큼 성능은 올라간다. 그렇게 보면 우리 곁에는 지금, 지치지 않고 배우는 기계가 앉아 있는 셈이다. 두려워하며 밀어낼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거꾸로 배워야 할 상대라는 것이 이 관점의 핵심이다.
현재의 모델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놀랍게도 그것을 만든 사람들조차 다 알지 못한다. 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수준을 이미 여러 번 넘었고, 아직 끌어내지 못한 능력이 안에 잠겨 있다. 이렇게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은 잉여 능력을 가리켜 능력의 과잉(Capability Overhang, 모델이 잠재적으로 가졌으나 아직 끌어내지 못한 능력)이라 부른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면, "AI는 이런 건 못 하잖아"라는 흔한 말이 다르게 들린다. 그 못함의 상당수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사용자가 그 능력을 끌어내지 못한 결과일 때가 많다.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자들이 종종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유다. 무언가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모델의 한계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한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어떻게 하면 그 잠긴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가.
잠긴 능력을 끌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한 구조를 가진다. 먼저 도달하고 싶은 목표를 분명하게 정의한다. 그 목표를 담을 그릇 - 한 편의 문서일 수도, 코드 묶음일 수도, 설계안일 수도 있다 - 을 정한다. 그다음 AI에게 시켜 첫 결과물을 받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부분이 부족하니 더 발전시켜라" 하고 되돌려 보낸다. 그러면 AI는 무엇이 어긋났는지 스스로 찾고, 필요하면 자료를 뒤져 보완한 결과를 다시 내놓는다. 이 루프를 충분히 돌리면 결과물은 위쪽으로 수렴한다.
노련한 편집자는 글의 모든 문장을 직접 쓰지 않는다. 초고를 받아 "도입이 약하다", "근거가 부족하다"고 방향만 짚어 돌려보낼 뿐이다. 그렇게 몇 차례 원고가 오가는 사이 글은 눈에 띄게 좋아진다. 무엇이 좋은 글인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면, 직접 쓰지 않고도 반려와 보완의 반복만으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AI를 다루는 일이 점점 이 편집자의 작업과 닮아간다. 다만 여기서 편집자는 곧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진짜 기술은 도구의 버튼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명확히 정의하는 힘이다. 더 멀리 간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판단 -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아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자신의 앎과 모름을 인식하는 능력)에 해당하는 영역 - 마저 AI에게 탐색시킨다. 모르던 목표까지 AI로 찾아내며, 더 나은 목표를 잡으면 작업 전체의 수준이 다시 올라간다.
관건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배울 수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왜 AI를 우월한 선생님으로 대하라는 말까지 나올까. 규모를 잠깐 들여다보면 감이 온다. 사람의 뇌에는 약 86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있고, 이들이 약 100조 개의 연결(시냅스)로 얽혀 있다. (흔히 "1천억 개 뉴런"이라고들 하지만, 최근의 정밀 측정은 약 860억 개로 본다.) 인상적인 숫자이되, 인간은 이 회로를 순수한 사고에만 쓰지 못한다. 무엇을 먹을지, 누가 나를 싫어하는지 같은 생존과 감정의 문제에 상당한 자원을 나눠 쓴다. 순수 이성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쓰는 사람은 드물다.
반면 AI 모델에는 그런 제약이 덜하다. 더 많은 데이터를 받고, 더 큰 연산력을 쓰며, 무엇보다 하나로 멈추지 않고 계속 커지고 복제된다. 단순히 산술만 따져도, 특정 영역에서는 이미 사람을 능가한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 격차를 한 저명한 AI 연구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고 지능이 아닌 채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면, 닭에게 물어보라." AI 분야의 토대를 닦고 그 위험을 공개적으로 경고해 온 한 연구자의 말이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종으로 살아왔기에, 자신보다 더 영리한 존재와 함께 사는 법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보기에 지능의 격차는, 우리가 닭이나 반려견을 대하는 거리만큼 벌어질 수 있다.
여기에 인간과 기계의 결합 가능성이 더해진다. 지금 사람이 바깥세상과 주고받는 통신은 말이나 타자처럼 느린 통로에 묶여 있다. 그런데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BCI · 뇌와 컴퓨터를 직접 잇는 기술)가 발전하면, 훨씬 넓은 대역으로 생각을 주고받게 된다. 이미 일부 실험에서는 사람이 생각만으로 화면의 커서를 움직인다. 이런 결합이 보편화되면, 전자공학과 생명공학이 만나 사실상 새로운 인류가 등장한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흐름의 끝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특이점(Singularity, 기술 발전이 인간의 통제·예측을 넘어서는 시점)이다. 한 영향력 있는 미래학자는 인간 수준의 AI가 약 2029년에, 인간과 기계가 융합하는 특이점이 약 2045년에 온다고 예측해 왔다. 더 이른 시점을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예측 연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변화가 사람의 직관보다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정도 격차라면 결국 소수만 살아남는 디스토피아가 오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기술사를 길게 보면 다른 그림도 가능하다. 기술의 발전은 단기적으로 불평등을 키우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해 온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 힘들어하는 것은 대개 "나보다 잘사는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지, 수십 년 전처럼 끼니를 거르거나 기본적인 의료를 받지 못하는 절대적 결핍은 많은 곳에서 줄어들었다.
이런 낙관의 바탕에는 풍요의 시대(Abundance, 핵심 자원과 서비스의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는 시대)라는 전망이 있다. 강력한 지능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에 접근할 권리는 비교적 널리 퍼질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고성능 AI를 한 달에 몇 만 원 수준에 쓸 수 있는 환경이 이미 열려 있다.
다만 단기 충격은 피하기 어렵다. 일자리의 대체가 그것이다. 산업혁명기에 베틀을 돌리던 직조공들이 증기기관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우리가 좋은 직업이라 여겨온 일들이 상당 부분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추정치도 이미 나와 있다. 한 대형 투자은행은 2023년, 생성형 AI가 전 세계에서 정규직 약 3억 개에 해당하는 업무를 자동화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 일자리의 약 3분의 2가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그 가운데 일부는 업무의 4분의 1가량이 자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은 2024년, 전 세계 일자리의 약 40퍼센트, 선진국에서는 약 60퍼센트가 영향권에 든다고 보면서 단기적으로는 불평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보고서들은 동시에,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려 새로운 일자리와 부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함께 짚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가치를 창조한다"는 말의 뜻을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가치 창조란 결국 혼돈에서 질서를 꺼내는 일이다. 햇빛과 공기 중의 물질을 묶어 양분으로 바꾸는 광합성도,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해 더 빨리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도, 흩어진 정보를 쓸모 있게 묶는 일도 모두 그 범주에 든다. 무질서(엔트로피)에서 질서를 꺼내는 모든 과정이 가치 창조다. AI 역시 우리가 무언가를 물을 때마다 혼돈을 질서로 바꿔 주는 기계다. 그렇다면 사람의 일은, 그 기계를 부려 더 큰 질서를 빚어내는 쪽으로 옮겨간다.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성향은 분명하다. 스스로 목표를 찍고 그 일을 조직화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넓은 의미의 사업가, 혹은 예술가적 태도라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사업가란 반드시 창업해 투자를 받고 회사를 키우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누군가 짜놓은 시스템 바깥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정의하고 목표를 세워 그쪽으로 밀고 나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회사의 단위도 작아지고 있다. 수백, 수천 명이 모인 조직만 회사인 시대가 저물고, 두세 명, 나아가 한 사람이 큰 매출을 내는 형태가 늘어난다. AI와 결합해 혼자서 하루에 상당한 매출을 만드는 사례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회사의 단위가 개인과 거의 같아지는 세계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비용 이야기를 짚어두자. 무료 모델만 써 본 사람과 유료 모델을 깊이 써 본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같은 유료 모델을 쓰더라도 잘 끌어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는 더 크다. 매달 적지 않은 통신 요금은 당연하게 내면서, 그보다 훨씬 강력한 도구의 구독료를 아까워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동시에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이 도구는 누구에게나 같은 수준의 지능을 내어주려 한다는 점에서, 격차를 벌리는 동시에 평평하게 만드는 양면을 가진다. 먼저, 그리고 잘 다루는 사람이 당분간 앞설 뿐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 AI를 잘 쓴다고 알려진 사람들조차, 본격적으로 파고든 기간을 따져보면 몇 달 남짓인 경우가 많다. 출발선의 격차가 아직 크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았다.
그러니 익숙한 직함과 경력은 잠시 옆에 두고, 배우는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 지금 필요한 것은 AI라는 기술을 어렵게 "익히는" 일이 아니다. AI를 선생님 삼아, 스스로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기꺼이 배우는 사람이 이 가속의 시대에서 가장 멀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