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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AI: 기술 주권은 어떻게 국가 안보 의제가 되었나

자국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의가 산업 정책에서 안보 의제로 옮겨가고 있다. 회의론과 전환점이 된 사건, 그리고 한국의 위치를 정리한다.


여러 국가가 자국이 직접 통제하는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AI)을 갖추는 데 큰 예산을 쏟고 있다. 이 흐름에는 늘 반론이 따라붙는다. 성능이 앞선 해외 모델을 도입하거나 공개된 모델을 가져다 쓰면 될 텐데, 비용과 시간을 들여 자국 모델을 따로 구축할 실익이 있느냐는 것이다. 평시의 회계장부만 보면 이 반론은 타당하다. 문제는 공급선이 끊기는 상황을 가정하는 순간 전제가 통째로 달라진다는 데 있다.

이 글은 핵심 개념인 소버린 AI(주권형 인공지능, Sovereign AI)가 무엇이며 왜 지금 주목받는지, 회의론의 논거와 그것을 흔든 구체적 사건, 그리고 한국이 서 있는 자리를 차례로 짚는다.

이해를 돕는 비유

에너지나 식량처럼, 외부에서 사 오는 편이 더 싸고 효율적인 자원이 있다. 평소에는 자급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공급국이 가격을 무기화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빗장을 거는 순간, 셈법은 효율에서 생존으로 바뀐다. 소버린 AI는 인공지능을 바로 이런 전략 물자의 반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소버린 AI란 무엇인가

'소버린(sovereign)'은 주권을 가졌다는 뜻이다. 소버린 AI는 한 국가가 자국의 판단으로 구축하고 운용하는 AI를 가리킨다. 출발점은 학습 데이터의 통제권이다. 모델은 학습한 자료의 관점을 그대로 흡수하므로, 다른 사회의 데이터로 훈련된 모델은 그 사회의 시선까지 함께 들여온다. 역사와 법, 사회 규범처럼 나라마다 답이 갈리는 영역에서 이 차이는 단순한 번역의 문제를 넘어선다.

가령 영토나 역사 귀속을 둘러싼 국가 간 분쟁에서는, 외국 자료로 학습한 모델이 학습 과정에 더 많이 반영된 쪽의 주장을 그대로 답으로 내놓을 수 있다. 자국의 제도와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모델을 직접 만들고 운영하겠다는 것이 소버린 AI의 첫 번째 동기다.

오늘날 소버린 AI의 범위는 데이터에 머물지 않는다. 모델을 학습하고 구동하는 연산 자원, 그 연산을 수용하는 데이터센터,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에너지까지, AI를 떠받치는 층위 전체가 통제의 대상으로 묶인다. 어느 한 층이라도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그 지점이 곧 약점이 된다.

소버린 AI가 다루는 다섯 개의 층 눈에 보이는 모델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아래 인프라 전체가 주권의 대상이 된다 AI 가치사슬 전체 1 데이터 자국어·법령·역사·문화 코퍼스 2 모델·알고리즘 가중치와 학습 과정을 자국이 통제 3 컴퓨팅 인프라 (GPU) 연산 자원, 수출 규제에 노출 4 데이터센터 데이터의 물리적 소재지 5 전력·에너지 AI를 떠받치는 최하부 기반
그래픽처리장치(GPU, Graphics Processing Unit)는 AI 연산을 도맡는 핵심 부품으로, 그 자체가 수출 규제와 공급망 통제의 대상이 된다.

회의론: 굳이 자국 모델을 만들 이유가 있나

관망하는 쪽의 논리는 두 갈래로 정리된다. 하나는 효율의 문제다. 선도국 모델과 자국 모델 사이에는 아직 성능 차이가 남아 있는데, 뒤처진 모델을 직접 운용하느니 앞선 모델을 들여오거나 제휴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안의 존재다. 무상으로 공개된 모델의 완성도가 이미 상용 서비스를 떠받칠 만큼 올라온 만큼, 그것을 토대로 개발하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공개형 모델과 유료 폐쇄형 모델 사이의 성능 격차는 남아 있되 빠르게 좁혀지고 있고, 서비스 구현에는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격차가 빠르게 준다"는 사실은 회의론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그 근거를 무너뜨리는 양날의 칼이다. 성능 차이가 자국 모델을 포기할 이유라면, 그 차이가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전망은 도리어 자국 모델에 투자할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최상위 모델 간 성능 격차는 빠르게 좁혀졌다 미국·중국 1위 모델의 주요 벤치마크 점수 차이 (퍼센트포인트), 2023년 말 → 2024년 말 35 17.5 0 MMLU 17.5 0.3 MMMU 13.5 8.1 MATH 24.3 1.6 HumanEval 31.6 3.7 2023년 말 2024년 말
주요 벤치마크에서 1위 모델 간 격차는 한 해 만에 두 자릿수 퍼센트포인트에서 한 자릿수 이하로 줄었다. 격차가 이 속도로 좁혀진다면, 성능을 이유로 한 회의론의 설득력도 그만큼 약해진다.

전환점이 된 사건: 동맹국을 향한 차단

소버린 AI를 둘러싼 여론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한 건의 사건이었다. 2024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는 가자 전쟁과 관련해 이스라엘 총리와 전 국방장관, 그리고 하마스 지휘관에게 전쟁범죄-반인도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이스라엘 측은 혐의를 부인했다). 미국은 강하게 반발했고, 2025년 2월 미국 대통령은 ICC를 겨냥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ICC 수석검사 개인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에 더해, 그를 재정적-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개인이나 기업까지 처벌하겠다는 경고가 담겼다.

그 직후 수석검사가 쓰던 마이크로소프트 이메일 계정의 접속이 막혔고, 그는 스위스의 한 이메일 서비스로 갈아탔다. 본국인 영국의 은행 계좌도 동결됐다. 사실관계에는 다툼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서비스를 중단한 적이 없으며 계정 분리였을 뿐, 결정은 ICC가 내린 것"이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방아쇠를 누가 당겼는지를 두고 책임 공방이 이어졌지만, 유럽이 받은 충격은 그 공방과 별개였다. 미국의 제재가 떨어진 순간 미국 기업의 서비스가 실제로 멎었고, 그 일이 적성국이 아니라 동맹의 영역에서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이었다.

"디지털 킬 스위치": 제재가 서비스를 멈추기까지 제재 결정 자국 정부 기업의 준수 의무 이메일·클라우드 서비스 차단 대상 기관 업무 차질 외국 기업의 서비스에 업무가 묶여 있을수록, 본국의 정책 한 줄이 곧 운영 중단으로 이어진다.
이해를 돕는 비유

외국 회사가 우리 집의 전기-수도 계량기 밸브를 쥐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평소에는 아무 일도 없다. 그러나 그 회사의 본국과 우리나라 사이가 틀어지면, 본국 정부의 명령 한 줄로 밸브가 잠길 수 있다. "디지털 킬 스위치(kill switch)"란 이 상황을 가리킨다. 핵심 업무를 외국 클라우드에 얹어 둔 기관일수록, 평시의 편리가 위기 시의 급소로 바뀐다.

문제는 유럽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기업들은 유럽 클라우드 인프라의 약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다(추정치는 조사마다 60-72퍼센트로 갈린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웹서비스(AWS, Amazon Web Services), 구글 같은 소수 미국 기업에 대륙 전체의 디지털 기반이 얹혀 있는 구조다.

유럽 클라우드 인프라, 미국 기업이 약 3분의 2 미국 하이퍼스케일러 약 66% 유럽·기타 약 34% 추정치는 조사 기관에 따라 60-72% 범위로 보고된다.

유럽의 대응: 기술 주권을 향한 투자

사건 이후 유럽은 즉시 움직였다. ICC는 업무 시스템 일부를 미국 서비스에서 독일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공개 소스 협업 도구로 옮겼다.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의 디지털 의존도를 긴급히 재점검했고, 정치권에서는 일정 비율 이상을 역내 클라우드로 채우자는 요구가 제기됐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차원의 판은 더 크다. 집행위원회는 2025년 2월 인공지능 투자 2,000억 유로 동원을 목표로 내걸고, 그중 200억 유로를 차세대 AI 칩 10만 개급을 갖춘 AI 기가팩토리(gigafactory) 네다섯 곳에 배정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100억 유로 규모의 AI 팩토리 13곳도 추진된다. 기업 차원에서도 프랑스의 대표 AI 기업이 스웨덴에 12억 유로 규모 데이터센터 투자를 발표하는 등, 정부와 민간이 동시에 자체 인프라 구축에 뛰어들고 있다.

다만 이 열기를 순수한 동기로만 읽는 것은 절반의 독해다. 유럽 정상들의 발표 자리에는 GPU를 공급하는 미국 반도체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국가마다 언어와 역사가 다르니 자국 AI가 필요하다"는 소버린 AI 서사 자체가, 그 모델을 만드는 데 필수인 GPU를 파는 쪽이 수년째 앞장서 퍼뜨려 온 메시지이기도 하다. 진짜 필요와, 하드웨어 판매에 유리한 마케팅이 겹쳐 있는 셈이다. 이 둘을 분별하는 일이 거품과 실체를 가르는 출발점이 된다.

좁아지는 문: 빅테크의 폐쇄화

회의론을 더 흔든 것은 "필요할 때 가져다 쓰면 된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두 흐름이 맞물린다.

첫째, AI에서 압도적 선두인 미국이 자국 기술을 한층 강하게 단속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24년 10월 미국은 첫 AI 국가안보각서(NSM, National Security Memorandum)를 통해 AI 주도권을 핵심 국가안보 사안으로 규정했다. 과거 핵 전략을 다루던 형식의 문건에 AI가 올랐다는 것은, 이 기술을 사실상 국가 전략 자산처럼 관리하겠다는 신호다. 동맹을 향해 이미 서비스 차단이라는 실력 행사를 보인 터라, 앞으로 배타성이 누그러질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던 공개 모델이라는 안전망마저 흔들린다. 공개형 모델의 대표 주자였던 한 거대 기술기업은 공개 노선에서 폐쇄형으로 무게를 옮겨 왔다. 검토 단계로 알려졌던 이 선회는 시간이 지나며 한층 분명해졌다. 공개 생태계가 영구적 공공재가 아니라 기업 전략에 따라 언제든 닫힐 수 있는 자원임이 드러난 것이다. 사 오기도 까다로워지고 빌려 쓰기도 불안해진다면, 직접 보유하는 선택지의 무게는 그만큼 커진다.

소버린 AI가 주는 실질적 가치

데이터 주권과 프라이버시

국민의 의료-금융 기록 같은 민감 정보를 외국 기업이 보관하고 처리하는 구조가 과연 타당한가. 어떤 나라로 데이터가 넘어가는 것은 경계하면서 다른 나라는 안전하다고 가정하는 판단도, 국가 간 배타성이 짙어질수록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국방 영역에서 AI 활용이 늘수록 자국 안보 데이터를 외부 모델에 노출하는 위험은 한층 직접적이다. 소버린 AI는 이런 민감 데이터를 자국 영역 안에서 처리하고 지킬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이점이 있다.

문화적 정합성과 포용적 AI

자국 데이터로 학습한 모델은 그 사회의 맥락을 더 충실히 반영한다. 외부에서 만든 범용 모델이 특정 지역의 규범을 다루는 정밀도와, 그 지역 안에서 만든 모델의 정밀도가 같기는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모델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여러 문화권의 모델이 공존하는 구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버린 AI는 "포용적 AI(inclusive AI)"로도 불린다.

이를 앞서 실천하는 사례도 있다. 한 아시아 국가는 서구 인구 위주로 축적된 의료 데이터의 편향을 보완하려고, 자국 연산 자원을 동원해 역내 인구의 유전적 특성을 분석하고 정밀의료에 적용하고 있다. 의료-바이오를 넘어 법률과 문화 영역까지 소버린 AI가 안착한다면, 서로 다른 문화가 기술에 스며들면서 공공 서비스와 핵심 산업의 혁신으로 이어질 여지가 생긴다.

핵심 정리

소버린 AI를 떠받치는 논거는 세 가지로 모인다. 첫째, 민감 데이터의 처리와 보호를 자국이 통제해야 한다는 안보-프라이버시 논리. 둘째, 자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정합성 논리. 셋째, 사 오거나 빌려 쓰던 길이 동시에 좁아지고 있다는 공급 안정성 논리다.

한국은 어디에 서 있나

지표만 놓고 보면 한국의 출발점은 나쁘지 않다. 한국은 미국, 중국과 함께 자체 대형(파운데이션) 모델을 보유한 소수 국가에 속한다. 국내에서는 대표 포털-검색 기업과 대형 전자 그룹이 자체 모델을 여러 종 내놓으며 개발을 이끌어 왔다. 다만 "세계 몇 위에 모델 몇 개"라는 식의 순위는 집계 기관과 기준에 따라 편차가 크므로, 절대적 서열로 받아들이기보다 한국이 자력으로 대형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소수 그룹에 든다는 점에 무게를 두는 편이 정확하다.

더 견고한 지표는 따로 있다. 최신 국제 비교에서 한국은 인구 대비 AI 특허 출원 밀도에서 세계 1위로 꼽힌다. 모델 수나 투자 규모로는 미-중에 크게 못 미치지만, 혁신의 밀도라는 축에서는 두 강대국 구도 사이에 끼어든 의미 있는 제3의 경쟁자로 평가받는다.

정책 의지도 드러난 바 있다. 정부는 출범 직후 민간에서 AI를 이끌던 전문가들을 핵심 공직에 발탁하며, 소버린 AI가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때 해외 빅테크와 손잡았던 통신사 등 기업들도 자체 모델 개발에 다시 힘을 싣고 해외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맺으며: 효율의 문제에서 안보의 문제로

소버린 AI가 만능 해법은 아니다. 기술적 자립에는 막대한 투자와 시간이 들고, 무엇보다 '주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현실의 가치사슬은 소수에 집중되어 있다. AI 연산을 도맡는 GPU는 특정 기업에, 그 칩을 만드는 공정은 사실상 한 곳의 파운드리에 의존한다. 모든 국가가 다섯 개 층을 전부 자국화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핵심 질문은 "전부 자급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까지 자국이 쥘 것인가"다. 평시의 효율만 보면 외국 서비스에 얹는 편이 늘 합리적이다. 그러나 동맹의 영역에서도 서비스가 멎을 수 있고, 사 오던 길과 빌려 쓰던 길이 동시에 좁아지는 광경을 목격한 이상, 민감 데이터의 처리와 핵심 인프라의 통제권을 어디에 둘지는 더 이상 비용 계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패권 경쟁과 유럽의 약진 사이에서, 한국이 어느 층을 직접 쥐고 어느 층은 협력에 맡길지 선별하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