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스 문명의 황소 숭배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복까지, 작은 도시 국가들이 거대 제국과 맞서고 또 서로를 무너뜨린 긴 이야기
고대 그리스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신화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이 글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신화의 무대 위에서 실제로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를 따라간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에게해 주변의 작은 도시들은 거대한 제국에 맞섰고, 그 위기를 함께 넘긴 뒤에는 다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다. 승자도 패자도 결국 더 큰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보고서는 그 흥망의 흐름을, 전설과 사실을 구분해가며 정리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야기는 신화 · 전설 · 역사가 한데 뒤섞여 전해진다. 이 보고서에서는 신화나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큰 대목은 전설 상자(황금색)로, 고고학과 사료로 뒷받침되는 대목은 사실 상자(청록색)로 구분해 표시한다. 본문 자체도 "전해진다", "신화에 따르면"과 같은 표현으로 확실성의 정도를 드러낸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5천 년 전, 기원전 2800년경 크레타섬에서 시작된다. 에게해 남쪽의 이 섬에서 그리스 최초의 문명이 태어났는데, 이를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라 부른다. 크레타인들은 외부 침략을 거의 받지 않고 천 년 가까이 독자적인 문명을 가꾸었다. 바다에 접한 지리 덕분에 주변 해상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신화에 따르면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를 크레타로 데려갔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유럽(Europe)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 에우로페에서 비롯됐다. 미노스의 왕비는 황소를 사랑하게 되는 저주에 걸려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고, 미노스는 이 괴물을 크노소스 궁전의 미궁에 가두었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전설로만 여겨지던 크노소스 궁전은 20세기 초 발굴을 통해 실제로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정교한 유물과 프레스코 벽화가 미노스 문명의 높은 수준을 증언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발견은 이른바 '여왕의 방'이었다. 욕실과 욕조, 외부에서 물을 끌어오는 테라코타 관, 그리고 물로 오물을 흘려보내는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약 3,500년 전에 이미 현대식 위생 설비의 원형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크레타의 여러 유물에서 황소 숭배의 흔적이 발견되는 점도 신화 속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와 묘하게 겹친다.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 북쪽의 그리스 본토에 새로운 이주민이 나타났다. 동쪽 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인도유럽계 사람들로 추정된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험준한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하나의 통일 왕국을 세우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래서 미케네, 티린스, 필로스, 아테네 같은 여러 작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고, 그중 미케네가 가장 강성했기에 이 문명을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라 부른다.
처음에 미케네인은 훨씬 앞선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는 처지였다. 미노스인은 강력한 해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케네인은 미노스의 문물을 흡수하며 점차 강해졌고,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았으며 미노스인에게서 문자까지 도입했다. 비교적 평화로운 성향의 미노스인과 달리 미케네인은 전쟁과 용맹을 숭상하는 호전적 민족이었다.
기원전 1450년경, 힘을 기른 미케네는 다른 도시들과 손잡고 크레타를 침공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미케네인이 한동안 크레타를 군사적으로 점유했다는 점은 거의 확실시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찬란했던 미노스 문명은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미노스 문명 몰락의 원인으로 흔히 크레타 북쪽 테라(산토리니)섬의 거대한 화산 폭발이 거론된다. 다만 현대 연구는 이 폭발을 대략 기원전 1600년 무렵으로 본다. 즉 화산 폭발(약 기원전 1600년)은 미케네의 침공(약 기원전 1450년)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선 사건이다. 화산 폭발이 무역망과 농경을 흔들어 미노스를 약화시킨 뒤, 뒤이은 미케네의 침공이 결정타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미노스를 대체하고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케네 그리스. 이 시대를 무대로 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 일리아스다. 이 작품을 남긴 시인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소아시아 출신의 맹인이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기록이 워낙 적어 한 사람이었는지 여러 시인이었는지조차 논란이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최고의 서사시로 꼽히며, 문학을 넘어 정치 · 철학 등 서양 문명 전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다. 스파르타를 방문한 그는 왕 메넬라오스의 환대를 받았으나,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리스 최고의 미녀로 꼽히던 왕비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떠났다. 분노한 메넬라오스는 형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호소했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역에 동원령을 내려 대군을 조직했다. 일리아스는 이때 동원된 배가 1,186척이었다고 전한다. 한 척에 50~100명이 탔다면 대략 10만 명의 병사가 트로이로 향한 셈이다.
전쟁의 두 영웅은 그리스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헥토르였다. 일리아스의 절정은 두 사람의 결투다. 아킬레우스가 가장 아끼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헥토르가 죽이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결투를 청한다. 헥토르는 달아나지 않고 맞섰으나 결국 쓰러졌고, 아킬레우스는 그 시신을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며 모욕했다. 훗날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우스를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 애원하자, 마음이 풀린 아킬레우스가 시신을 내어준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전과(예컨대 헥토르가 10년간 그리스 병사 수만 명을 죽였다는 식의 서술)는 문학적 과장으로, 역사적 수치로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멸망 장면이나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를 담고 있지 않다. 목마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등 다른 전승에 나온다. 트로이 전쟁이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오랜 논쟁거리이며, 서사시의 세부는 수백 년에 걸쳐 구전되며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후대의 역사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스 최초의 본격 역사가로 꼽히는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신관들에게서 들은 전혀 다른 판본을 전한다. 그에 따르면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풍랑에 떠밀려 이집트에 상륙했다가 헬레네를 그곳에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가 트로이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트로이를 완전히 무너뜨린 뒤에야 진실을 알았고, 결국 이집트에서 아내를 되찾았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여자 한 명 때문에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며, 신관들의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판본보다 믿을 만하다고 덧붙였다.
같은 사건을 두고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가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상황은, 오늘날로 치면 한 사건에 대해 극적인 영화와 사실 위주의 다큐멘터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다. 역사가의 일은 어느 한쪽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두 판본을 견주며 더 그럴듯한 사실을 추려내는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레타를 굴복시키고 에게해의 패권을 거머쥔 미케네 문명에는 밝은 앞날이 보장된 듯했다. 그런데 기원전 1200년경, 모든 것이 갑자기 끝나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닥쳐 그때까지 멀쩡하던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른바 '청동기 시대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다. 이 사건으로 강성했던 히타이트 왕국과 레반트의 여러 도시가 사라졌다.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간신히 멸망을 면했지만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범위한 파괴와 방화가 일어났고 인구가 급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산지로 흩어졌다. 아테네를 제외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로써 미케네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갑작스러운 붕괴의 원인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어,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여러 가설이 경쟁한다.
| 가설 | 내용과 평가 |
|---|---|
| 도리아인 침입설 | 후대 그리스인은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이 파괴를 자행했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정설이었으나, 침략의 뚜렷한 증거가 없어 최근에는 비판받는다. |
| 도시 국가 간 내전설 |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트로이 전쟁 이후 그리스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도시 간 전쟁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견해다. |
| 바다 민족(Sea Peoples)설 | 최근 가장 주목받는 가설. 정체불명의 해상 세력이 지중해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집단의 연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 자연재해설 | 약탈만으로는 여러 문명의 동시 붕괴를 설명하기 어렵기에, 지진이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
원인이 무엇이었든, 이 사건을 겪은 그리스와 아시아는 약 300년에 걸친 긴 암흑시대에 들어갔다. 이 시기의 문자 기록이 거의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새로운 예술품이나 건축물은 보이지 않고 파괴의 흔적만 남았다.
그러나 이 시대가 완전한 정체기였던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로부터 철기가 전해지면서 더 강한 무기와 더 좋은 농기구가 만들어졌다. 농기구의 발전은 식량 증산으로, 다시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늘어난 인구는 그리스를 떠나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세웠는데, 특히 이오니아에 많은 도시가 들어섰다.
아시아에서 온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알파벳이었다. 페니키아 문자를 본떠 만든 그리스 알파벳은 이전 문자들보다 훨씬 쉽고 효율적이었다. 그리스인은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교육 · 학문 · 정치 · 철학의 발전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역사를 생동감 있게 기록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헤로도토스 같은 역사가의 등장 역시 알파벳의 덕을 본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경 이오니아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400년경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 이전 그리스인에게 역사란 신화와 인간사가 뒤섞인 이야기였다. 헤로도토스는 남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를 거부하고, 직접 현장을 찾아 실제로 있었던 사건만을 기록하려 했다. 그리스 · 이집트 · 페르시아 같은 문명국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흑해의 오지까지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저서 히스토리아이에 담았다.
그의 객관적 태도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게 했다. 물론 기록이 과장되거나 잘못 전해진 대목도 있어 "거짓의 아버지"라는 오명도 함께 얻었다. 흥미롭게도, 한때 거짓이라 여겨졌던 그의 기록 다수가 훗날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미라 제작 과정, 죽음을 다루는 풍습, 정반대로 보이는 생활 양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고, 페르시아인이 외국 풍습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거짓말과 빚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는 점 등도 전했다.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는 긴 암흑시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폴리스(polis)라 불리는 수많은 도시 국가를 세웠다. 폴리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뿐 아니라 그 주변의 농촌과 정착촌까지 아우르는 공동체였다. 도시마다 개성은 달랐지만 같은 언어를 공유한 덕분에 하나의 문화권을 이룰 수 있었다.
폴리스는 오늘날의 '국가'보다 훨씬 작은 단위였다. 한 도시와 그 주변 농촌을 합쳐 시민과 가족, 노예, 외국인까지 모두 더해도 수만 명 규모였다. 각자 다른 법과 정치 체제를 가졌으면서도, 같은 언어와 신을 공유해 느슨한 '문화적 동족' 의식을 지녔다. 평소에는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외적 앞에서는 손을 잡는, 일종의 도시 동맹체에 가까웠다.
그리스 고유의 문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올림픽 경기와 신탁이다. 첫 번째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열렸다고 알려졌다. 4년마다 펠로폰네소스 북서쪽 올림피아에서 열렸고, 본토뿐 아니라 지중해 곳곳의 식민지에서도 선수를 보냈다. 선수는 나체로 경기에 임했으며 남자만 참가할 수 있었다. 종목으로는 달리기,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레슬링이 있었고 나중에 4두 전차 경주가 더해져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되었다.
올림픽은 종교적 의미도 지녔기에, 경기가 열리는 동안 그리스의 모든 도시가 휴전을 선포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리스였지만 이 기간만큼은 서로 평화롭게 교류했고, 그러면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자라났다. 훗날 그리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이 빛을 발하게 된다. 올림픽은 약 1,200년간 명맥을 이어가다 서기 393년 로마 황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리스인은 종교적 믿음이 강해서, 중대한 결정을 앞두면 신탁소를 찾아 신의 뜻을 물었다. 가장 유명한 신탁소로는 델포이, 도도나, 그리고 리비아의 암몬 신탁소가 있었다. 신탁소마다 신탁을 내리는 고유한 방식이 있었다. 예컨대 델포이의 무녀들은 땅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를 마시고 환각 상태에서 예언했다고 전한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델포이에 "페르시아를 먼저 공격해도 되는가"를 물었다. 신탁은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대제국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답했다. 승리를 장담한 크로이소스는 공격에 나섰으나, 정작 무너진 대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그 자신의 리디아였다. 델포이는 이렇게 어느 쪽으로도 해석되는 모호한 신탁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래서 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시민뿐 아니라 고위 관료들까지 더 호의적인 신탁을 듣기 위해 많은 재물을 바쳤고, 그 덕에 신탁소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만큼 신탁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된다는 의심도 끊이지 않았다.
암흑시대가 끝난 뒤 두각을 나타낸 두 도시가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스파르타는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이 세운 도시로 알려졌다. 두 명의 왕이 함께 다스리는 독특한 이중 왕정을 가졌는데, 헤로도토스는 옛 왕비가 너무 닮은 쌍둥이를 낳아 누가 장자인지 알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기원전 1100년경 등장한 도리아인은 스파르타를 기점으로 펠로폰네소스 남부 라코니아를 정복했다. 스파르타인은 피지배층을 두 신분으로 나누었다. 같은 도리아인이 많았던 페리오이코이는 복종하는 한 어느 정도 자유와 권리를 누렸지만, 그 아래 헬로트(heilotes)는 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헬로트는 생산물의 절반을 바쳐야 했고, 스파르타인이 이유 없이 헬로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기원전 730년경 스파르타는 서쪽 메세니아까지 정복해 도시 국가로는 예외적으로 넓은 영토와 농경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정복된 메세니아에서 수만 명이 헬로트로 편입되면서, 헬로트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것이다. 한때 스파르타 시민과 페리오이코이, 헬로트의 비율이 대략 1 대 7 대 16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민 한 명이 헬로트 열여섯 명을 지배하는 구조는, 비유하자면 늘 발밑에 거대한 압력이 차오르는 가마솥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헬로트가 마음만 먹으면 수적으로 스파르타인을 압도할 수 있었다. 실제로 헬로트의 반란은 스파르타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스파르타가 시민 전체를 평생 군인으로 길러낸 까닭은, 바로 이 내부의 압력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위기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리쿠르고스다. 기원전 700년경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크레타와 이집트 등을 여행하며 여러 정치 제도와 계급 제도를 관찰한 뒤, 스파르타로 돌아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 개혁 분야 | 내용 |
|---|---|
| 원로원 구성 | 시민 중 28명의 원로를 뽑아 두 명의 왕과 함께 30인 원로원을 이루게 했다. 원로들은 한편으로 왕을 도와 민중을 누르고, 다른 한편으로 민중 편에서 왕의 독재를 막았다. 후에 민회는 5명의 감독관(에포로스)을 두어 원로원을 견제했다. |
| 토지 재분배 | 빈부 격차를 없애기 위해 시민의 토지를 모두 거둬들인 뒤 균등하게 다시 나누었다. |
| 화폐 개혁 |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크고 무거운 철 화폐만 쓰게 했다. 그 결과 훔칠 것이 없어 도둑이 사라졌다. |
| 아고게(교육) | 가장 큰 변화. 국가가 시민을 길러내는 혹독한 집단 교육 제도. |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왕정 · 과두정 · 민주정이 뒤섞인 복잡한 제도를 낳았다. 단점은 결정이 매우 느리다는 것이었다. 평등한 분배는 사치와 불평등을 없앴지만, 시민 전체의 생활 수준을 함께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있었다.
스파르타 교육은 가혹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검사관에게 보여, 건강하지 못하다 여겨지면 버려졌다. 남자아이는 일곱 살에 집단 합숙에 들어가 온갖 학대를 견뎌야 했다. 열두 살이 되면 옷 한 벌로 추위를 견디고 목욕은 1년에 한 번만 허락되었다. 늘 부족한 식사가 주어져,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훔쳐야 했다. 훔치는 것 자체는 묵인되었지만 들키면 '서툴다'는 이유로 혹독한 벌을 받았다. 어른이 된 뒤에도 15명 단위의 공동 식사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는데, 돼지 피로 만든 '검은 수프'는 끔찍하게 맛없기로 악명 높았다.
이런 병영 생활 덕분에 스파르타인은 그리스 최강의 전사로 거듭났고, 스파르타는 가공할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다만 개인의 다재다능함은 그리 길러지지 않았는지, 스파르타인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일은 의외로 드물었다고 한다.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시민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법을 고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델포이로 떠난 뒤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의 바람대로 그가 만든 법은 약 50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시민을 국가의 도구로만 여긴 그 법의 그늘 아래, 페리오이코이와 헬로트의 삶은 더없이 가혹했다.
스파르타가 군국주의의 길을 걸을 때, 동쪽 아티카의 아테네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기원전 632년 킬론이라는 젊은 귀족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외국 군대에 반감을 느낀 시민들이 그를 포위해 진압했다. 이 사건은 일반 시민이 얼마나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당시 아테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의 양극화였다. 농경지 대부분이 소수 부자에게 집중되어, 흉년이 들면 농민은 빚을 져야 했고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갔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 언제든 유혈 사태가 터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솔론이다. 그리스 일곱 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되어 위기를 타개할 비상대권을 받았다. 측근들이 왕이 되라 권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빚진 아테네인을 노예로 파는 것을 금지하고, 통화 가치를 조정해 빈민의 부채를 크게 덜어주었다.
가벼운 죄에도 사형을 내리던 드라콘 법을 살인죄만 남기고 모두 폐지해 시민의 숨통을 틔웠다.
출신이 아닌 소득에 따라 시민을 네 계급으로 나누었다. 부를 쌓을 동기를 주는 한편, 대부분의 법안을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의 승인을 받게 해 평민의 힘을 키웠다.
농사만으로는 부족한 아티카의 식량 문제를 풀기 위해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고, 시민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익히게 했다.
솔론은 빈민층이 요구한 전면적 토지 재분배는 시행하지 않았다. 저당 잡힌 농지만 풀어주는 선에서 멈춘 것이다. 처음에는 부자와 빈민 어느 쪽의 호응도 얻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의 정책이 합리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솔론의 법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의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조항이었다. 그는 가급적 많은 사람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중립은 미덕이 아니라 방관으로 여겼다.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제도로 강제한 셈으로, 훗날 아테네 민주정의 정신을 미리 보여주는 대목이다.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반 시민에게까지 참정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얼마 뒤 아테네에는 참주(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등장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식민지의 금광 · 은광을 개발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며 공공 토목 공사를 벌여 아테네를 발전시킨, 이른바 '좋은 참주'에 속했다. 이 시기 아테네 도기의 인기가 코린토스 도기를 앞질렀다.
그의 사후 정권은 아들 히피아스에게 넘어갔으나, 명문 알크메온 가문이 스파르타의 힘을 빌려 기원전 510년 참주정을 무너뜨렸다. 이어 권력을 잡은 클레이스테네스는 부족제를 재편하는 파격적 개혁을 단행했다. 지역과 혈연으로 갈라진 파벌을 흩어, 서로 다른 지역의 구역들을 묶어 새로운 공동체(부족)를 만든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비유하자면 서로 다투던 여러 지방의 사람들을 일부러 섞어 새 공동체로 묶은 것과 같다. 한국으로 치면 영남 · 호남 · 충청에서 떼어낸 지역들을 합쳐 하나의 새 단위를 만든 셈이다. 기존의 지역 · 혈연 대립이 희석되면서 시민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공익으로 향했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그는 또 시민 모두에게 호적을 부여해 스파르타를 압도하는 병력을 확보했고, 참주의 재등장을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오스트라키스모스)를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가 수많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 다투던 무렵, 동방에서 한 인물이 등장했다. 훗날 대왕이라 불릴 키루스(Cyrus)다. 변방 약소국 페르시아의 왕자였던 그는 종주국 메디아를 공격했고, 메디아 총사령관 하르파고스의 투항 덕에 손쉽게 메디아를 차지했다. 이어 소아시아의 강국 리디아까지 정복하면서, 페르시아는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이때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그리스 문명과 마주했다. 키루스는 리디아 정복 후, 뒤늦게 복종을 청해온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위협을 느낀 이오니아인은 그리스 최강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했으나, 스파르타는 군대를 보내는 대신 사절을 보내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공격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만 전했다. 이 무의미한 경고는 오히려 키루스를 자극했다. 그때까지 스파르타의 존재조차 몰랐던 그는, 이제 그리스 본토까지 마음에 두게 되었다.
키루스가 바빌로니아 정복을 위해 동쪽으로 떠난 사이, 그의 부하 하르파고스가 이오니아를 공격해 모든 그리스 도시를 굴복시켰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했고, 그의 사후 권력 다툼 끝에 다리우스(Darius)가 왕위에 올랐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 등 일곱 귀족은 가짜 왕을 제거한 뒤 페르시아를 어떤 체제로 다스릴지 논쟁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만민 평등을 내세운 민주정을, 다른 사람은 뛰어난 소수가 다스리는 과두정을, 다리우스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군주정을 주장했다. 투표 결과 군주정이 채택되었고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고대 그리스인이 일찍부터 정치 체제 자체를 비교하고 토론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기원전 499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오니아 전체를 끌어들이고 본토에도 도움을 청했다. 스파르타는 거절했지만, 아테네가 20척, 에레트리아가 5척의 배를 보냈다. 이오니아 연합군은 페르시아 총독이 있는 사르데스를 공격해 도시를 불태웠다. 그러나 이 화재가 페르시아의 분노를 샀고, 결국 반란은 6년 만에 진압되었다. 밀레토스는 폐허가 되었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다시 페르시아에 굴복했다.
문제는, 사르데스 방화에 아테네가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리우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식사 때마다 하인에게 "아테네인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게 했다고 전한다. 그리스 본토를 향한 페르시아의 침공이 예고된 것이다.
기원전 490년, 약 60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로 향했다. 목표는 이오니아 반란을 도운 에레트리아와 아테네였다. 페르시아군은 에레트리아를 단 6일 만에 함락한 뒤, 추방된 옛 참주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기병 활동에 유리한 마라톤 평야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전령 필리피데스를 스파르타로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틀 만에 약 200km를 달려 스파르타에 도착했지만, 스파르타는 종교 행사를 이유로 보름달이 뜰 때까지 군을 움직일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아테네는 1,000명의 병력을 보낸 플라타이아의 도움만 받은 채 홀로 페르시아를 맞아야 했다.
아테네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은 밀티아데스는, 스파르타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페르시아군이 중앙을 두텁게 한 데 맞서, 아테네군은 중앙을 얇게 하고 양 날개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중앙은 페르시아군에 밀렸지만, 이는 밀티아데스가 의도한 바였다. 양 날개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이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 중앙을 포위 공격한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6,400명, 아테네군은 192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페르시아 측 수치는 대체로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되지만, 아테네 측 192명은 선전을 위한 과소 집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편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졌다"는 전령 일화는 1차 사료인 헤로도토스에는 없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필리피데스는 어디까지나 스파르타로 원군을 청하러 달려간 전령이다. 마라톤~아테네 완주 이야기는 600년 뒤 로마 시대 작가의 글에서 처음 등장하므로, 후대에 더해진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배를 타고 아테네로 직행하려 했으나, 아테네군이 빠른 걸음으로 먼저 돌아와 방어 태세를 갖추자 결국 아시아로 물러났다. 뒤늦게 도착한 스파르타군은 마라톤의 시신을 둘러보고 아테네의 용기를 칭찬한 뒤 돌아갔다.
마라톤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그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전후 그는 사적인 원한으로 파로스섬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원정 중 입은 허벅지 부상이 악화되어 재판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신해 두 인물이 떠올랐는데, 외교로 페르시아와의 갈등을 피하려던 온건파 아리스티데스와, 군사력으로 문제를 풀려던 강경파 테미스토클레스다. 두 사람의 대립은 이후 아테네 정치의 큰 축이 된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Xerxes)는 약 5년간 전쟁을 준비한 끝에, 헤로도토스가 "전군이 다리를 건너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고 적을 만큼 거대한 군대를 일으켰다. 헤로도토스는 육해군 총병력을 231만여 명으로 기록했지만, 이는 명백한 과장으로 오늘날에는 약 20만~30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렇더라도 엄청난 규모였다.
위기 앞에서 그리스 도시들은 서로의 전쟁을 멈추고 코린토스에 모였다. 다만 아르고스와 크레타는 협조를 거절했고, 강력한 시라쿠사도 지휘권을 요구하다 협상이 결렬되었다. 결국 그리스는 큰 외부 지원 없이 페르시아를 막아야 했다.
그리스는 좁은 통로 테르모필레와 인근 해상 아르테미시온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테르모필레는 한쪽은 험준한 산, 다른 쪽은 바다로 막혀 가장 좁은 곳은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였다. 방어를 맡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결사대를 이끌었다. 좁은 지형 덕에 페르시아군의 수적 우세는 무력화되었고, 정예 '불사부대(Immortals)'마저 스파르타군을 뚫지 못했다.
누군가 "페르시아군의 화살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다"고 하자, 스파르타 전사는 오히려 "그럼 그늘에서 싸울 수 있어 좋겠군"이라 답했다고 한다. — 테르모필레의 일화로 전해지는 말
그러나 한 그리스인이 산속 샛길을 알려주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후방이 노출될 것을 안 레오니다스는 대부분의 병력을 돌려보내고, 자신과 300명의 스파르타 결사대, 그리고 자진해 남은 약 700명의 테스피아이 병사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페르시아군의 피해도 막대해 크세르크세스의 형제 두 명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해다오 — 우리가 그들의 말에 복종하여 여기 누워 있다고. — 테르모필레 전사자를 기리는 비문
테르모필레가 뚫리자 페르시아군은 남하해 아테네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로 된 벽을 의지하라"는 신탁을 '배'로 해석해, 시민 대부분을 살라미스 등으로 대피시키고 함대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일찍이 라우리온 은광의 수입으로 200척이 넘는 삼단노선을 건조해둔 터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좁은 살라미스 해협을 고집한 것은, 비유하자면 덩치 큰 상대를 좁은 골목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넓은 바다에서는 수가 많은 페르시아 함대가 압도적이지만, 좁은 해협에서는 함선 수의 우위가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많은 배가 서로 부딪히며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는 적의 강점(수)을 약점으로 바꾸는 지형을 골랐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진영에 거짓 정보를 흘려 "그리스 함대가 도망치려 한다"고 믿게 했다. 크세르크세스는 퇴로를 봉쇄하려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들여보냈고, 이로써 그리스가 원하던 전장이 만들어졌다.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선은 방향을 틀다 측면이 노출되며 충돌에 취약해졌다. 그리스 함선은 뱃머리로 들이받아 적선을 파괴하는 전법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높은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충격에 빠졌다. 이것이 해전사에 길이 남은 살라미스 해전이다.
페르시아 측에는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여성 지휘관 아르테미시아가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그녀가 모든 중간 지휘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의견을 냈다고 특별히 기록했다. 그녀는 살라미스에서 정면 해전을 피하자고 유일하게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인 헤로도토스가 그녀를 호의적으로 다룬 점이 눈에 띈다.
살라미스 패배 후 크세르크세스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장군 마르도니우스에게 불사부대를 포함한 약 30만 병력을 남겼다. 이듬해 기원전 479년, 그리스 연합군과 마르도니우스의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에서 맞붙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대로라면 페르시아 30만, 그리스 연합군 약 10만 8천이었다.
전투는 식수원을 둘러싼 신경전 끝에 벌어졌다. 페르시아군은 화살을 비처럼 쏘며 스파르타군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스파르타 지휘관 파우사니아스가 좋은 때를 기다려 공격에 나서자 전세가 뒤집혔다. 페르시아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훈련이 미숙해 전술에 약했고, 대부분 경무장이어서 중무장한 스파르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무너졌고, 좁은 곳에 갇힌 채 학살당해 거의 전멸했다. 이로써 그리스를 정복하려던 페르시아의 야욕은 완전히 꺾였다.
같은 시기 바다에서도 그리스 함대가 미칼레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페르시아에 복종하던 수많은 이오니아 도시가 그리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헤로도토스의 기록도 끝을 맺는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까지의 역사를 전했다면,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투키디데스다. 아테네 출신으로 전쟁에 직접 군을 지휘하기도 한 그는, 패전 후 20년간 추방되어 그 기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 그는 "직접 체험했거나 남에게 들은 것을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증인의 편향과 기억의 부정확성까지 경계한 그의 태도 덕분에, 그는 헤로도토스보다 한층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로 평가받는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영웅이 되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능력만큼 명예욕도 강해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도편추방을 당한 뒤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의심까지 받아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한때 맞서 싸웠던 페르시아 왕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다가 생을 마쳤다.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역시 페르시아풍 옷을 입고 내통을 꾀했다는 의심을 받아, 신전에 피신했다가 입구가 봉쇄되어 굶어 죽었다.
두 영웅이 몰락하는 사이, 동맹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스파르타에서 아테네로 넘어갔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이오니아 도시들과 에게해 섬들이 모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했다. 군자금을 보관하는 금고는 델로스섬에 두었고, 각 도시의 분담금은 정의로운 인물로 이름난 아리스티데스가 공평하게 부과했다. 이 델로스 동맹은 이후 수십 년간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게 된다.
델로스 동맹을 등에 업은 아테네는 빠르게 성장했다. 장군 키몬은 페르시아 세력을 유럽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동맹국이 군대 대신 분담금만 내도록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겉으로는 양보처럼 보였지만, 동맹국이 농사와 장사에 안주하는 동안 아테네는 시민을 전쟁과 훈련으로 단련시켰다. 분담금은 아테네를 더 부유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 델로스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속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대등한 동맹이 제국으로 바뀐 과정은, 처음에는 공동 방위를 위해 회비를 걷던 모임이 어느새 한 회원이 회비를 독차지하고 나머지를 부하처럼 부리는 조직으로 변질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동맹국들이 '돈만 내고 편하게 지내자'며 안주하는 사이, 군사력과 자금을 모두 쥔 아테네만 홀로 강해졌다. 편안함의 대가로 자율성을 내준 셈이다.
키몬과 에피알테스를 거쳐 권력을 잡은 인물이 페리클레스다. 명문 가문 출신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는 차분한 말투와 고상한 내용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정치가였다. 그는 정부의 돈을 시민을 위해 쓰기 시작했다. 축제 · 운동 · 연극을 열어 시민을 즐겁게 했고, 수많은 신전과 건물을 지어 아테네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도 이때 지어졌다.
문제는 자금의 출처였다. 페리클레스는 델로스에 보관되던 동맹의 공금을 아테네로 옮겨 건설 비용으로 썼다. 동맹국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막아주는 한, 공금을 어떻게 쓰든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맞받았다. 페리클레스의 통치 아래 아테네는 역사상 보기 드문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같은 시대에 활약했다.
물론 페리클레스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는 양 부모가 아테네 출신이어야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는데, 정작 자신이 이방인 여성 아스파시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추도사에서 남긴 말은 아테네 민주정의 이상을 압축한 명문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민주정치를 펼치며,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 행복은 자유에 있으며, 자유는 용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사로 전해지는 내용
그러나 영광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았다. 좁은 성 안에 인구가 몰린 탓에 빠르게 번진 이 역병(증상으로 보아 흔히 흑사병으로 추정된다)으로 아테네 주민의 약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직접 이 병을 앓고 살아남은 투키디데스가 증상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페리클레스 자신도 얼마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테네의 팽창을 경계한 스파르타와의 충돌은 결국 전면전으로 번졌다. 코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에 아테네가 개입하고, 아테네가 코린토스의 식민지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스파르타의 동맹국 테베가 아테네의 혈맹 플라타이아를 기습하면서, 기원전 431년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27년간 이어지며 그리스 전역을 깊은 혼란에 빠뜨렸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집중하면서, 강한 해군으로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바다를 통해 식량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던 아테네가 유리한 구도였다. 그러나 앞서 본 역병이 이 전략을 흔들었고,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아테네 정치는 선동가 클레온 같은 인물들의 손에 흔들렸다.
전쟁 전반기,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군 지휘관)는 펠로폰네소스 서쪽 필로스에 요새를 세워 스파르타의 등 뒤를 찔렀다. 인근 스팍테리아섬에 고립된 스파르타 정예병 약 120명을 생포한 사건은 스파르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 포로들은 귀중한 협상 카드가 되었다. 한편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힘보다 설득으로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아테네에서 떼어냈다. 교통 요충지 암피폴리스를 잃은 것은 아테네에 큰 타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도시의 방어를 책임졌던 인물이 바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였고, 그는 이 일로 20년간 추방되어 전쟁사를 집필하게 된다.
전쟁에 지친 양측은 잠시 평화협정(니키아스의 평화)을 맺었지만, 평화는 표면뿐이었다. 야심가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면서 다시 불씨가 살아났다. 페리클레스의 친척이자 빼어난 외모와 말솜씨를 지닌 그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멜로스의 대화'는 정치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대목이다. 중립을 지키려던 작은 섬 멜로스에 아테네가 항복을 요구하며 나눈 협상에서, 아테네 측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강자가 지배하고 약자는 따른다." 멜로스가 끝내 저항을 택하자, 아테네는 성인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팔았다. 강대국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 사례로 오늘날까지 인용된다.
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실책은 시칠리아 원정이었다. 시칠리아의 도시 세게스타가 도움을 청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시라쿠사를 정복하면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쥘 수 있다며 시민을 부추겼다. 신중한 니키아스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모험심에 들뜬 아테네는 기원전 415년 대함대를 파견했다.
원정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출항 직전 신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나 알키비아데스가 범인으로 몰렸고, 그는 소환 도중 탈출해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아테네의 약점을 속속들이 아는 그가 스파르타를 도우면서, 아테네는 안팎으로 무너졌다.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군은 스파르타가 보낸 길리포스에게 막혀 봉쇄에 실패했고, 결국 함대가 전멸하고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가 처형당했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은 전투 · 비전투 인원을 합쳐 약 4만 명을 잃거나 노예로 빼앗겼다. 생포된 병사들은 채석장에 갇혀 열악한 환경 속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국력을 통째로 쏟아부은 이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이후 아테네는 민주정과 과두정 사이를 오가며 내분에 시달렸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 페르시아 · 아테네 사이를 오가며 활약과 배신을 거듭했다. 한때 아테네로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부하의 실책으로 다시 추방되어 끝내 망명지에서 암살당했다.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아테네 함대를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격파했다. 함대를 모두 잃은 아테네는 더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404년 항복했다.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아테네를 무너뜨린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쥐었다. 코린토스와 테베는 아테네를 완전히 파괴하자고 주장했지만, 스파르타는 테베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를 살려두었다. 대신 성벽을 허물고 함선을 불태우는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했다.
스파르타의 새 왕 아게실라오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 소아시아에서 연승을 거뒀다. 이런 대담함의 배경에는, 앞서 키루스(페르시아 왕자)의 반란에 고용되었던 1만 그리스 용병의 활약이 있었다. 이들은 지휘부가 몰살된 절망적 상황에서도 크세노폰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한복판을 가로질러 흑해까지 살아 돌아왔다. 크세노폰이 남긴 기록 아나바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약점을 낱낱이 드러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크세노폰의 용병들이 적지 한복판을 헤매다 마침내 흑해를 발견하고 "바다다(Thalatta)!"를 외치며 서로 얼싸안은 장면은,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구원의 상징으로 오래 회자된다. 흑해 연안에는 그리스 식민지가 흩어져 있었으므로, 바다는 곧 '집으로 가는 길'을 뜻했다. 길을 잃은 자에게 익숙한 풍경이 다시 나타나는 안도의 순간을 압축한 일화다.
페르시아의 중재로 그리스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대왕의 화약), 이 조약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테베는 스파르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전투로 단련된 테베군은 어느새 스파르타에 필적하는 강군으로 성장했다.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의 명장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 그는 정예병을 오른쪽에 두는 전통을 깨고, 왼쪽 날개를 두텁게 한 뒤 그곳에 '신성부대(Sacred Band)'를 배치하는 혁신적 전술을 썼다. 이 부대는 150쌍의 연인으로 이루어져, 서로를 지키기 위해 유달리 용맹하게 싸웠다고 전한다. 그때까지 대규모 전투에서 더 적은 병력에게 한 번도 진 적 없던 스파르타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에 입힌 결정적 타격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메세니아의 독립이었다. 스파르타 영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메세니아는 헬로트의 노동으로 스파르타의 식량 대부분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시민이 군사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땅 덕분이었다. 그 경제 기반을 빼앗기자 스파르타는 다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력이 아니라 적의 '구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테베의 전성기도 짧았다.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테베가 다시 승리했지만,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고 만 것이다. 천재 한 사람에 기댄 패권은 그의 죽음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다시 패자로 올라설 힘이 없었던 그리스는, 한동안 힘의 공백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새로운 세력이 떠올랐다 — 마케도니아였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였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리스인이었지만, 언어와 생활 방식이 달라 남부 그리스인에게는 '반쯤 그리스인' 취급을 받았다. 비옥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지녔으나, 내부 분열과 강한 적국에 둘러싸여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 나라를 바꾼 인물이 필리포스 2세다. 젊은 시절 테베에서 인질로 지내며 당대 최강이던 테베의 군사 조직을 관찰한 그는, 기원전 359년 왕위에 오른 뒤 그 경험을 마케도니아에 적용했다.
필리포스가 만든 팔랑크스는 길이 약 6m에 이르는 긴 창 '사리사'로 무장했다. 빽빽이 늘어선 긴 창들은 마치 거대한 고슴도치의 가시 같아서,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찔렀다. 날아오는 화살조차 촘촘한 창에 걸려 튕겨 나갔다. 기존의 짧은 창과 큰 방패로는 이 '가시 벽'을 뚫을 방법이 없었다. 무기 하나의 길이를 바꾼 것이 전장의 규칙을 바꾼 셈이다.
필리포스는 군사력만이 아니라 외교 · 뇌물 · 정략결혼을 능란하게 활용하며 세력을 넓혔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 테베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의 실질적 1인자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는 그의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이끌고 테베의 신성부대를 무너뜨리는 큰 공을 세웠다. 필리포스는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해 그리스를 결집하고 페르시아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원정을 준비하던 중 측근에게 암살당했다.
스무 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에게서 그리스의 지배권과 대제국 건설의 토대를 물려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누구도 다루지 못하던 명마 부케팔로스가 사실 자기 그림자에 놀란 것임을 간파해 길들였고, 이를 본 필리포스는 "아들아, 마케도니아는 너에게 너무 좁다"고 했다고 전한다. 그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받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반란을 일으킨 테베를 본보기로 철저히 파괴한 뒤,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영토와 인구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대제국을 상대로, 그는 연이어 승리했다.
| 전투 · 사건 | 의미 |
|---|---|
| 그라니코스 (기원전 334) | 페르시아와의 첫 정면 대결.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선두에서 강을 건너 승리했다. |
| 이소스 (기원전 333) |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가 전장에서 도망쳤다. 그의 가족이 포로가 되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정중히 대우했다. |
| 티레 공방전 (기원전 332) | 난공불락의 섬 도시를 7개월 만에 함락. 해상 거점을 장악했다. |
| 이집트 (기원전 332~331) | 해방자로 환영받았고, 자기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
| 가우가멜라 (기원전 331) | 다리우스가 또다시 도망치며 페르시아는 사실상 끝났다. |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 수사 · 페르세폴리스를 차례로 점령하며 막대한 부를 손에 넣어, 마케도니아의 재정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다리우스 3세는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었고, 200년간 번영하던 페르시아 제국도 완전히 멸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자와 술을 멀리하고 재물에 욕심이 적었으며,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자존심이 매우 강한 약점도 있었다. 정복지의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려는 융화 정책은 그리스 장군들의 반발을 샀고, 술자리에서 격분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 클레이토스를 직접 창으로 찔러 죽이는 비극도 일어났다. 정복자의 영광과 인간적 결함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인도까지 진군했으나, 끝없는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 더는 나아가기를 거부하자 회군했다. 귀국길에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기원전 323년, 가장 친한 친구 헤파이스티온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이었다.
확실한 후계자가 없던 탓에, 그의 죽음 이후 마케도니아는 장군들 사이의 치열한 권력 다툼(디아도코이 전쟁)에 빠져들었다. 미노스 문명에서 시작해 알렉산드로스로 이어진, 천 년에 걸친 그리스 이야기의 한 장이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 긴 역사를 한 발 물러나 보면, 반복되는 리듬이 보인다. 작은 도시들이 거대한 외적(페르시아) 앞에서 잠시 하나가 되었다가, 위기가 지나자 곧바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아테네가 패권을 쥐면 스파르타가 견제하고, 스파르타가 이기면 테베가 도전하며, 테베가 떠오르면 다시 무너진다. 그리고 그 끝없는 내부 소모전의 틈을 비집고, 변방에서 자라난 마케도니아가 모두를 삼킨다.
그 과정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시도한 많은 것들 —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 사실을 검증하는 역사 서술, 좁은 지형을 활용한 전술, 무기와 제도의 혁신 — 이 함께 태어났다. 신화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덧 우리가 아는 '역사'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천 년의 그리스가 오늘까지 거듭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본문의 연대와 인물에 관한 서술은 여러 고전 사료에 바탕을 둔 통사적 정리이며, 신화 · 전설로 분류한 대목과 고고학 · 사료로 뒷받침되는 대목을 구분해 표기했다. 화산 폭발 시점, 마라톤 전투의 전사자 수와 전령 일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연대 등 주요 수치는 현대 학계의 일반적 견해에 맞추어 검토했다. 고대사 특성상 수치와 연대에는 학자 간 이견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