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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고전 읽기

시간의 늪을 건넌 책들 — 동서양 고전이 던지는 질문

2천 년, 3천 년 전에 쓰인 책이 왜 아직도 읽힐까. 어떤 책은 한 세대를 못 넘기고 잊히는데, 또 어떤 책은 천 년의 강을 건너 오늘의 책상에 놓인다. 고전이 무엇이고 왜 읽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동양과 서양의 원전을 가로지르며 정리한다. 그리고 전쟁, 인간과 동물, 인공지능이라는 지금의 화두를 고전이라는 거울에 비춰 본다.


01

고전이란 무엇인가 — 사용 가능한 골동품

고전(古典)은 글자 그대로 풀면 오래된 책이다. 그런데 뒷글자 전(典)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옛 책 이상의 결이 있다. 전(典)은 죽간을 엮은 책(冊)을 받침대 위에 올려 둔 모양에서 나온 글자로, 중요한 문서를 받들어 모신 형상이다. 전아(典雅)하다는 말이 우아하고 격조 있으며 세련되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래서다. 한자 문화권에서 고전은 처음부터 우러러보는 책, 격이 높은 책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서양에서 고전을 가리키는 말 클래식(classic)도 비슷한 자리에서 출발했다. 어원인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는 로마 시민을 재산에 따라 나눈 등급을 뜻했고, 그 가운데 최상위 등급(primae classis)에 속한 것을 클라시쿠스(classicus)라 불렀다. 2세기 로마의 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그의 모음집 『아티카의 밤(Noctes Atticae)』에서 일류 저술가를 클라시쿠스 스크립토르(classicus scriptor), 곧 하층민(proletarius) 저술가와 대비되는 일급 작가라는 뜻으로 처음 비유해 썼다. 우리가 아는 의미, 곧 그리스·로마의 걸작을 가리키는 더 클래식스(the classics)라는 용법은 18세기 무렵 영국과 프랑스에서 굳어졌다. 동서양 모두 고전이라는 단어 안에 품격과 권위, 선망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원만으로는 고전의 본질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선명한 표현이 있다. 고전은 사용 가능한 골동품이다.

비유 — 다시 못 만드는 그릇

주변에 100년을 견딘 그릇이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 다시 만들 수 없으니 함부로 쓰지 않고 모셔 둔다. 그런데 천 년, 2천 년을 견딘 책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매일 꺼내 읽고, 인용하고, 일상 속에서 써먹는다.

고전은 시간의 늪을 건너온 오래된 물건이면서도, 골동품처럼 박제되지 않고 지금도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골동품이다. 너무 일상 가까이 있어서 도리어 그 나이와 가치를 잊는다는 점이 고전의 역설이다.

그렇다면 고전이 되려면 반드시 천 년이 필요한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작품을 두고도 현대의 고전이라 부른다. 핵심은 흘러간 절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이 작품이 앞으로 시간의 늪을 건너갈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 확신을 주는 책이라면 백 년 남짓 된 것도 이미 고전의 자격을 갖춘다.

02

왜 어떤 책만 천 년을 살아남는가

유행은 끊임없이 바뀐다. 그런데도 어떤 책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 이유는 그 책들이 변하지 않는 것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이든 천 년 뒤든, 인류 사회가 존속하는 한 바뀌지 않을 사실이 있다. 사람은 모여서 산다는 것, 곧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도 이빨도, 두꺼운 가죽도 털도 없이 태어난다. 그럼에도 살아남는 것은 사유하는 능력 덕분이며, 부딪히며 조금이라도 덜 부딪히는 길과 지혜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 사정은 옛날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치 않는 통찰이 겹친다. 사람의 욕망은 크다. 모든 사람의 욕망을 다 합쳐 놓으면, 자연이 내놓는 산물보다 그 총합이 훨씬 크다. 자연은 그것을 다 채워 줄 수 없다. 부족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禮)의 기원을 설명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는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하는 데에 일정한 한도와 분별이 없으면 다툴 수밖에 없으니, 옛 성인이 그 다툼을 막고자 예라는 질서를 세웠다는 것이다. 욕망과 자원의 영원한 불균형,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약속. 이 또한 미래에도 바뀌지 않을 보편의 통찰이다.

욕망의 총합 자연의 산물 저울은 늘 욕망 쪽으로 기운다 — 그 간극에서 질서와 다툼이 함께 태어난다
사람의 욕망 총합은 자연이 내놓는 것보다 언제나 크다. 고전은 이 변하지 않는 불균형을 어떻게 다룰지 묻는다.

이런 통찰은 특정 시대, 특정 제도에만 통하는 지식이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살고 자연 속에 머무는 한 언제나 작동하는 보편의 통찰이다. 보편적이기에 시대를 건너고, 시대를 건너기에 고전이 된다.

03

왜 고전을 읽는가 — 질문하는 나를 만드는 일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두 갈래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대답은 뜻밖에도 굳이 안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주도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삶을 살겠다는 지향까지 함께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말

불경죄와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한 철학자가 법정에서 남긴 이 말의 핵심은, 자기 삶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일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고전을 읽으며 질문하는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질문이라는 과정을 생략하면, 내가 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휩쓸려, 혹은 미혹되어 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 일을 꼭 고전으로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질문하는 나를 만드는 작업은 영화로도, 드라마로도, 웹툰이나 웹소설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도구가 고전일 필요는 없다.

둘째 대답이 여기서 이어진다. 굳이 고전이 아니어도 좋으니 무엇이든 해 보라는 것. 안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는 예측할 수 있다. 지금의 현상을 담아낸 드라마나 영화나 웹툰을 즐기다 보면, 이런 일은 왜 또 생겼을까 하는 물음에 이르고, 그 물음을 끝까지 밀고 가면 결국 궁극의 지점에 닿는다. 현재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진지하게 애쓰는 한, 사람은 끝내 고전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비유 —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20세기 중반의 한 전범 재판에서 피고는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고, 법이 그랬을 뿐이며,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평범한 관료가 거대한 악에 가담하는 이 모습은 훗날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정리되었다.

주어진 명령과 규칙을 한 번도 자기 물음으로 되묻지 않을 때, 사람은 거대한 흐름의 부품이 된다. 고전을 읽는 일은 그 흐름 앞에서 멈춰 서서 정말 그러한가를 묻는 근육을 기르는 훈련이다.

04

고전을 읽을 때의 함정

고전을 떠받들다 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고전은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를 곧바로 풀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 책의 구절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뚝 떼어 내 현대에 그대로 집어넣으면 대개 먹히지 않는다. 인공지능(AI) 문제나 가상자산 문제에 답을 얻겠다고 옛 경전을 펼쳐 봐야 거기에 답은 적혀 있지 않다.

맥락을 떼어 낸 채 글자만 읽을 때 생기는 또 다른 함정은 시대의 한계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고전 가운데는 오늘의 감수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가부장제라는 한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s)』은 여성과 노예를 본성상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규정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그는 자유민 남성의 이성이 가장 권위 있게 작동한다고 보았고, 여성의 숙고 능력은 권위가 약하다고 적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전제로 쓰인 책이라는 맥락을 지운 채 글자만 보면, 그 책은 그저 이상한 책이 되어 버린다. 고전 미술과 문헌 곳곳에 오늘의 젠더 감수성으로는 불편한 장면이 남아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통치계급 중심이라는 한계

동양 고전도 마찬가지다. 옛 사상서들은 철저히 통치계급을 향해 쓰였다. 그 시절 책을 읽는 이는 주로 통치계층이었기에, 주요 독자층 자체가 평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논어』 태백(泰伯)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백성은 그것을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까닭을 일일이 알게 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문물을 익힌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동아시아는 본래 백성을 어리석게 두려 했던 우민(愚民)의 세계였다고 비판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인프라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만 읽기 어렵다. 학교가 곳곳에 있던 시대가 아니었고, 백성은 생업에 매여 있었다. 농번기에 학교에 다니느라 농사를 못 지으면 곧 굶고 죽는 일이었다.

그 맥락에서 다시 읽으면 이 구절은 다른 메시지로 다가온다. 지배 계층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백성을 가르치라는 것, 생업의 틈틈이 일정한 시간을 내어 백성을 교화하고 사람답게 살도록 이끄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것이다. 그 사고의 메커니즘과 함께 읽으면, 이 구절을 단순한 우민론으로 못 박기는 어려워진다. 실제로 이 한 문장은 끊어 읽기에 따라 뜻이 갈려 오래 논쟁되어 온 대목이기도 하다.

비유 — 유적지의 해설사

유적지를 혼자 둘러보면 무너진 돌무더기일 뿐이지만, 해설사가 그 시대를 곁에 세워 주면 같은 돌이 신전이 되고 시장이 된다. 고전도 그렇다.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읽어 주는 해설이 없으면, 고전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이상한 책으로 오해되기 쉽다. 맥락을 복원할 때 비로소 그 책은 현재의 물음에 시각과 통찰을 건넨다.

05

인생 매뉴얼로서의 고전

고전의 주요 독자가 통치자, 곧 리더였기에 고전에는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그런데 이 점이 도리어 오늘에 유용하다. 지금은 누구나 자기 삶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내 삶을 스스로 경영해야 하는 자기 주도의 시대에, 옛 리더의 덕목론은 다시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비유 — 인간 사용 설명서

전자 기기를 살 때 설명서를 끝까지 읽으면 그 기기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설명서가 있는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디에 한계가 있으며, 무엇을 잘못하면 고장 나는지를 알려 주는 설명서. 우리보다 먼저 치열하게 산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와 억울함과 성공을 깊이 숙고해 남긴 책이 고전이라면, 그것은 곧 내 삶을 잘 살아 내기 위한 인간 사용 설명서다.

동양에서는 이를 경세(經世), 곧 세상을 경영한다는 말로 담아냈다. 그 핵심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있다. 나를 닦는 수기(修己)와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을 함께 묶은 말이다. 그 뿌리는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공자가 군자를 두고 자기를 닦아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修己以安人)고 한 데에 닿아 있고, 『대학(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단계로 이어진다.

흔히 이 말을 순서로 읽는 오해가 있다. 먼저 나를 다 닦은 다음에야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수기와 치인은 순차적 단계가 아니라 서로를 되먹이는 관계로 읽는 편이 옳다. 수기의 완성이 곧 치인이며, 치인의 전제가 곧 수기다. 남을 다스리는 일이 결국 나를 다스리는 일의 일부이고, 나를 다스리는 일이 결과적으로 남을 다스리는 쪽으로 이어진다.

修己 나를 닦다 治人 남을 다스리다 수기의 완성이 치인 치인의 전제가 수기
수기와 치인은 한 방향의 계단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올리는 순환이다. 그래서 고전은 자기 주도적 삶의 발판이 된다.
06

전쟁 — 동서양 고전이 비추는 거울

사람은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저마다 옳음의 기준이 다르다. 그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충돌할 때 전쟁이 벌어진다. 동양 고전과 서양 고전이 오늘의 상황과 가장 맞닿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쟁이며, 양쪽 모두 전쟁을 다룬 서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양 — 반전의 묵가와 의로운 전쟁의 유가

묵자(墨子)와 그를 따른 묵가(墨家)는 공격을 위한 전쟁에 결단코 반대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이 바로 비공(非攻), 곧 침략 전쟁을 그르다고 본 사상이다. 이들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평민들의 무리였고,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국가 권력이 거기까지 닿지 못해 거대 폭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다만 자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수비만은 인정했고, 실제로 성을 지키는 수성(守城) 전투에서는 가히 달인급의 전투력을 갖추었다. 굳게 지켜 낸다는 뜻의 묵수(墨守)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지배 계층의 처지에서 보면 이 공동체는 눈엣가시였다. 전쟁이 나면 동원해야 하는데 이들은 공동체에 묶여 있어 동원도, 세금 징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층은 이 집단을 탄압했고, 집단은 그 탄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어에 능해졌다. 반전과 평화는 그저 이상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한편 주류였던 유가(儒家)는 필요한 전쟁은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의로울 의(義) 자를 써서 의전(義戰)이라 한다. 다만 맹자(孟子)는 진심(盡心)편에서 춘추 시대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春秋無義戰)고 선언했다. 의전이란 오늘날의 표현으로 옮기면 일종의 인도적 개입에 가깝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물리적 개입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맹자는 전쟁을 일으키는 자를 이렇게 꾸짖었다.

땅을 다투어 싸우면 죽은 사람이 들을 채우고, 성을 다투어 싸우면 죽은 사람이 성을 채운다. 이는 땅으로 하여금 사람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맹자』 이루(離婁) 상편의 취지를 옮긴 것

죽음의 형벌조차 모자라다는 말은, 그런 자는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라 부르기조차 어렵다는 뜻이다. 이 잣대를 지금에 대어 보면 한 가지가 또렷해진다. 어떤 충돌에서 강자가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조차 끝내 꺼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도 그 전쟁이 정의롭지 않음을 알고 있다는 신호다. 정말 인도적 개입이라면 그것은 상당한 명분이 되어 줄 텐데, 그 명분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본질을 드러낸다.

서양 — 전쟁에서 시작된 문명

서양 문명 전체에서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문헌 자체가 전쟁 이야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 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d)』는 트로이를 둘러싼 전쟁을 다룬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고 서로 죽이고 죽는 관계라는 것을 그린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늘한 통찰이 함께 있다. 죽인 자는 승자가 되지만, 그 승자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 이후의 책들을 보면 하나의 흐름이 이어진다. 전쟁의 참상을 직시하고, 그 참상을 이겨 낼 인류의 지혜가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것. 그 고민의 축적이 곧 고전이다.

07

축의 시대 —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시작한 때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인류사의 한 특별한 시기를 가리켜 축의 시대(독일어 Achsenzeit)라 불렀다. 대체로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 그 한가운데인 기원전 500년 무렵을 중심으로, 중국과 인도와 서아시아와 그리스에서 거의 동시에 인간의 사고가 신화적 단계에서 성찰적·윤리적 단계로 도약했다는 것이다. 훗날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2006년 저서 『축의 시대(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이 개념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며, 그 시대를 한마디로 자비의 탄생이라 요약했다.

흥미롭게도 이 변화의 공통 배경으로 지목되는 것은 폭력의 격증이다. 전에 없던 수준의 폭력 앞에서, 서로 다른 문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응답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공자(孔子)의 인(仁)으로, 인도에서는 부처의 자비로, 그리스에서는 비극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스 비극은 국가적 행사로 무대에 올랐고, 그 무대 위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승자가 승자로서 기쁨을 누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약자의 고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객석이 함께 마주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자리였다.

기원전 800년 기원전 200년 축의 시대 — 자비와 사랑의 윤리가 싹튼 시기 서사시·전쟁의 통찰 인(仁)·자비 그리스 비극 의(義)·예(禮)의 사상 이후 사랑의 윤리로 계승
야스퍼스가 잡은 기원전 800~200년 사이, 동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같은 윤리가 솟았다. 이 시기의 책들이 훗날 고전이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책들이 이후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의 윤리는 훗날 예수의 사랑을 비롯한 후대 전통으로도 이어진다. 암스트롱은 랍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축의 시대의 만개(滿開), 곧 그 정신이 수백 년 뒤에 다시 꽃핀 결과로 본다.

이 책들의 메시지를 가장 단순하게 줄이면 하나로 모인다. 이대로 가면 모두 파멸하니, 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갈 길을 찾자는 것. 그것이 곧 인간다운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강자가 약자를 짓밟으면서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꾸려 가고, 짓밟힌 자에 대한 배려도 관심도 없는 충돌이라면, 그것은 축의 시대의 현자들이 통곡할 일이다. 여전히 인간이 야만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08

인간과 동물의 차이

사실 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동물에게는 다소 모욕적인 말일 수 있다. 적어도 동물은 생존을 위해 생태계의 사슬 안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지만, 탐욕적이지는 않다. 일정한 배부름에 이르면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일은 결코 한가한 물음이 아니다.

동양 — 차이는 희소하다

유가의 두 큰 사상가 맹자와 순자는 같은 학파로 묶이면서도 사뭇 다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았고(성선설), 순자는 본성을 그대로 두면 다툼으로 흐른다고 보았다(성악설). 한 지붕 두 가족이라 할 만큼 다른 두 사람이지만, 둘 다 공통으로 짚은 것이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인식이다.

맹자는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서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희소하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고 말했다. 그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순자는 『순자』 왕제(王制)편에서 더 정연하게 위계를 세웠다. 물과 불은 기운(氣)은 있으나 생명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으며,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義)이 없는데, 사람은 기운과 생명과 지각을 갖추고 거기에 의로움까지 지녔으니 천하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이다. 의로움을 지녔다는 것은 곧 자기 절제력이 있다는 뜻이며, 탐욕을 누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비유 — 0.99와 1.00 사이

훗날 과학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가 아주 작은 비율만큼만 다르다고 보고했다. 거대한 차이가 아니라 미세한 차이가 인간과 동물을 갈랐다는 것이다.

맹자가 차이는 희소하다고 한 직관과, 현대 유전학의 보고가 묘하게 겹친다. 차이는 작지만 그 작은 차이 안에 자기 절제와 의로움이라는 가능성이 들어 있다.

서양 —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양 고전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인간과 동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도덕성을 거의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인간을 특별히 빚어진 존재로 보았다. 이성과 언어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며, 그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명 전반에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무서운 통찰이 따라붙는다. 이성과 그 고귀함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도리어 악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인간에게 절제력이 있기에, 욕망의 방향이 저마다 달라도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살 수 있다고 보았다. 동물의 욕망과 인간의 욕망이 다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누르기에 인간다워진다. 그러나 이를 통제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짐승보다 못해진다. 인간의 욕망이 짐승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악랄하기 때문이다. 짐승은 배부르면 멈추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그 위험이 있다.

09

인공지능 시대와 고전

오늘의 가장 큰 화두는 인공지능(AI)이다. AI가 발달하면서 사람이 머리 쓰는 능력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제 의식은 전혀 새롭지 않다. 플라톤은 기원전 약 370년에 쓴 대화편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문자라는 기술을 둘러싼 똑같은 우려를 신화의 형식으로 적어 두었다.

이야기 속에서 이집트의 신 테우트는 왕 타무스에게 문자를 발명품으로 바치며, 이것이 기억과 지혜를 키워 줄 약(그리스어 파르마콘)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타무스는 거꾸로 답한다. 문자는 사람들이 기억을 단련하지 않게 만들어 도리어 망각을 낳을 것이며, 안에서 스스로 떠올리는 대신 바깥의 흔적에 기대게 할 것이라고. 그래서 문자는 기억의 약이 아니라 상기의 약일 뿐이고, 사람에게 참된 앎이 아니라 지혜의 외양만 줄 것이라고. 파르마콘이라는 그리스 말이 약이자 독을 동시에 뜻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예측 자체는 맞았다. 기록할 수 있는 문자를 발명한 뒤로 사람은 중요한 정보를 세세히 외울 필요가 줄었다. 스마트폰이 나온 뒤 우리가 전화번호를 더 이상 외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타무스의 우려가 놓친 것이 하나 있다.

문자의 발명 기억의 부담을 던다 에너지의 재배치 논리·추상·개념화·상상력 새 문명 한 단계 더 발전 문자가 그랬듯 — 그렇다면 AI 다음 단계에서 인간의 뇌는? 인간 = 인간 + 기술
기억에 쓰던 에너지가 더 높은 사고로 옮겨 갔듯, AI가 대신해 줄 일 너머에서 인간의 뇌가 무엇을 할지가 열린 물음이다.

문자가 기억력을 덜어 준 대신, 인간은 기억에 쏟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논리적 사고와 통찰, 개념화와 추상화, 그리고 상상력이 그 이전보다 훨씬 발전했고, 그 힘으로 새로운 문명을 한 단계 더 밀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 일들마저 대신해 주는 AI가 나왔을 때, 인간의 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막연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문자의 시대가 그랬듯, 인간은 다른 영역의 지적 활동으로 그 능력을 넓혀 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도 비슷한 생각을 글로 남겼다. 그의 『기예론(技藝論)』은 이렇게 묻는다. 하늘은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발톱과 뿔과 단단한 발굽과 날카로운 이빨을 주어 스스로를 지키게 했는데, 어찌하여 사람만은 벌거숭이로 약하게 두었는가. 답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정교한 연구력이 있어 기예(技藝), 곧 기술을 익혀 제 힘으로 살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예는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정교해진다. 기술은 누적되고 향상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인간이 된 것은 기술 때문이며, 그 기술의 원천은 지능인 셈이다.

비유 — 인간이라 쓰고 인간 더하기 기술로 읽는다

여러 고전이 공통으로 비추는 그림은 이렇다. 인간에게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당연한 것, 곧 필수였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 더하기 기술로 읽어야 한다.

문자가 나오자 기록을 다루는 능력이 발전했듯, AI가 나오면 AI를 다루는 능력이 발전할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가 분석하고 상상하고 실현해 가야 할 몫이다.

고전은 결국 우리보다 먼저, 자기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록이다.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끌어안고 부딪히며 실패하고 억울해하고 또 성공한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깊이 숙고해 남긴 책. 그래서 고전은 내 삶의 통치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매뉴얼이 된다.

시간의 늪을 건너온 그 질문들은 박물관 유리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다. 전쟁과 욕망, 인간다움과 기술이라는 오늘의 화두를 향해, 그 질문들은 여전히 열린 채로 우리를 마주 보고 있다.

참고한 원전과 자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드로스』(테우트와 타무스 신화, 기원전 약 370년).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호메로스 『일리아스』. 『논어』 태백·헌문편. 『맹자』 이루·진심편. 『순자』 왕제·예론편. 묵자 『묵자』 비공편. 정약용 『기예론』(『여유당전서』 수록).

카를 야스퍼스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 축의 시대 개념).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The Great Transformation)』(2006). 고전(classic)의 어원에 관해서는 아울루스 겔리우스 『아티카의 밤』 19.8의 용례. 인용한 고전 구절은 모두 공공 영역(public domain)의 원전을 글쓴이가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