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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진의 천하통일에서 한의 건국까지

서쪽 변방의 작은 씨족이 천하를 삼키고, 다시 그 천하가 두 사내의 손에서 한 왕조로 수렴되기까지 —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195년까지의 통사

초한지는 흔히 삼국지의 곁가지처럼 다뤄지지만, 이야기 구조만 놓고 보면 훨씬 단정하다. 진(秦)의 천하통일에서 시작해 한(漢)의 건국으로 끝나는 한 편의 완결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뚜렷한 장점과 그만큼 뚜렷한 약점을 동시에 지녔고, 그 결함이 곧 운명을 결정한다. 이 글은 한 변방 국가가 어떻게 제국이 되었고, 그 제국이 어떻게 15년 만에 무너졌으며, 건달과 명문가의 후예가 벌인 5년간의 쟁패가 어떻게 새로운 400년 왕조로 귀결되었는지를 사건의 흐름 그대로 따라간다.


제1장변방의 말지기에서 강대국으로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에 앞서, 두 사람이 뒤엎으려 한 거대한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 질서의 설계자는 진시황이고, 진시황을 이해하려면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 진(秦)이 어떻게 천하 최강이 되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국시대의 제후들은 대개 주(周) 왕실과 친척이거나 개국공신의 후예였다. 그러나 초창기 진은 작은 씨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씨족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9세기, 주 효왕(孝王) 때였다. 당시 씨족의 장로 비자(非子)는 말과 가축을 기르는 데 비범한 능력을 보여 효왕의 눈에 띄었고, 말을 잘 관리한 공로로 서쪽의 작은 영지와 영(嬴)씨 성을 받았다. 제국의 시조가 한낱 목축 담당자로 출발한 셈이다.

진이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였다. 서쪽 이민족 서융(西戎)의 침략으로 주 왕실이 쇠퇴해 도성을 동쪽 낙읍으로 옮길 때,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어느 제후도 천자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오직 진의 군주 양공(襄公)만이 천도 행렬을 무사히 호위했고, 그 공으로 처음 제후에 봉해졌다. 함께 받은 것은 서쪽의 광활한 영지였는데, 거기엔 "이미 그 땅을 차지한 서융을 직접 몰아내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사실상 부도수표였다. 상대는 주 왕실을 무너뜨릴 만큼 강한 서융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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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왕실이 진에게 준 영지는, 부도난 회사가 직원에게 월급 대신 "저쪽 건물 등기는 네 앞으로 해줄 테니, 거기 무단 점거 중인 사람들은 알아서 쫓아내라"고 한 것과 같다. 권리증서는 받았지만 실제 입주는 스스로 피 흘려 얻어야 했다. 진은 그 약속어음을 150년 뒤에야 현금으로 바꾼다.

실제로 양공은 서융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후 약 150년간 진은 보잘것없는 약소국으로 머물렀다. 반전은 10대 군주 목공(穆公) 때 찾아왔다. 목공은 노래 잘하는 진의 미녀 56명을 서융 왕에게 선물했다. 중원의 음악을 처음 접한 서융 왕이 매일 미녀와 음악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자, 진은 그 틈을 노려 공격해 단숨에 사방 1000리의 서융 영토를 차지했다. 부도수표가 마침내 현금으로 돌아온 것이다. 목공이 세상을 떠난 무렵 진은 변두리 국가에서 중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진에는 군주가 죽으면 신하를 산 채로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 목공이 죽자 무려 177명의 유능한 신하가 순장되었고, 나라를 이끌 수뇌부가 통째로 사라진 진은 그 후 거의 300년간 목공 시절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 시대의 비범한 성취가 어이없는 관습 하나로 단번에 휘발된 것이다.

제2장상앙의 법과 진의 부상

진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도약한 결정적 계기는 한 외부 인재의 등용이었다. 기원전 361년 군주가 된 효공(孝公)은 "진을 강하게 만들어 줄 자에게 높은 관직과 봉록을 주겠다"는 구현령(求賢令)을 발표했다. 위(衛)나라 출신의 상앙(商鞅)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첫 만남에서 효공은 그를 홀대했지만 상앙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방문해 결국 마음을 얻었다.

효공의 전폭적 지원 아래 상앙은 진을 강국으로 만들 수단으로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웠다. 그는 법에 예외가 없음을 각인시키기 위해 유명한 이벤트 하나를 기획한다. 도성 시장의 남쪽 문에 통나무를 세워 두고, 이것을 북쪽 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상금 10금을 주겠다고 공표했다. 아무도 헛소리로 여겨 나서지 않자 상금을 50금으로 올렸고, 그제야 한 사람이 통나무를 옮겼다. 상앙은 즉시 약속한 50금을 지급했다. 이 사건의 효력은 50금을 훨씬 넘어섰다. 법의 권위가 세워진 것이다. 이후 누구든 공을 세우면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사람들 마음에 깊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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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한 관리자가 "규정대로만 하면 반드시 보상한다"고 말해도 직원들은 보통 믿지 않는다. 상앙은 가장 사소하고 무해한 약속(통나무 옮기기)을 골라 그것을 100% 지킴으로써, "이 조직의 규칙은 진짜로 작동한다"는 신뢰를 단 한 번의 시연으로 심었다. 제도의 신뢰성은 큰 약속이 아니라 작은 약속의 이행에서 만들어진다는 통찰이다.

상앙은 엄격한 법을 통해 군사·정치·경제 전반을 개혁했고, 진은 단시간에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법이 귀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노예제까지 폐지되자 기득권의 불만이 쌓였다. 한번은 태자가 법을 어겼는데, 법에 예외를 둘 수 없다고 믿은 상앙은 태자의 두 스승에게 대신 벌을 내렸다. 한 스승은 얼굴에 먹물을 새기는 형벌을, 다른 스승은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8년 뒤 효공이 죽자, 모욕당한 스승 측은 기다렸다는 듯 상앙이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즉위한 태자는 상앙 체포령을 내렸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으로 각계각층의 미움을 산 상앙을 변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붙잡힌 그는 사지를 소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형벌 역시 상앙 자신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법으로 일어선 자가 자신이 만든 법으로 스러진 것이다.

상앙은 죽었지만 진은 그의 정책을 유지하며 국력을 계속 키웠다. 소양왕(昭襄王)이 즉위한 기원전 300년경, 진은 마침내 전국시대 최강대국으로 변모했다. 힘의 균형이 진 쪽으로 기운 것을 감지한 나머지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에 대항하는 합종(合縱)을 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기원전 890년경 비자, 말 관리 공로로 영씨 성과 영지 하사 기원전 770년 양공, 주 왕실 호위 공으로 제후에 봉해짐 — 진 탄생 기원전 621년경 목공 사망, 177명 순장으로 국력 300년 정체 기원전 361년~ 효공·상앙의 변법 — 법치로 급격히 강국화 기원전 300년경 소양왕 대, 전국시대 최강대국으로 부상
변방 씨족에서 최강대국까지 — 진의 흥기 약 600년

여섯 나라 중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은 조(趙)나라였다. 염파(廉頗)·조사(趙奢) 같은 명장과 수십만 병력을 보유한 조는 오랫동안 진의 동진을 막는 방파제였다. 그러나 진에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백기(白起)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백기는 활약한 30년 동안 100만 명 이상을 죽였다고 하는데, 당시 중국 남자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에서 조와 격돌한 백기는 항복한 45만 조나라 대군을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죽은 병사의 머리로 산을 쌓았다고 전한다. 이 한 번의 학살로 한때 강력했던 조나라 군대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진의 천하통일은 진시황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장거상 여불위의 투자

장평대전으로 조나라가 휘청이던 무렵, 조의 도읍 한단(邯鄲)에서 중국 역사를 뒤바꿀 인물이 등장한다.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다. 장사로 수천 금을 모은 부자였으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의 이익이 남습니까?" "열 배." "보석 장사는요?" "백 배." "그렇다면 왕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면 몇 배가 남습니까?" 아버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답했다. 정치적 성공은 장사와 비교할 수 없는 부와 권력을 약속했다.

문제는 여불위에게 정계의 연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이인(異人)이었다. 이인은 진 소양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아들로 왕족이었으나, 안국군의 20여 아들 중 중간 순위라 후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져 철저히 버림받은 처지였다. 장평대전 패배로 진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던 조나라에서, 이인은 처형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존재감이 너무 희박해 굳이 죽일 필요도 못 느끼는 인물이었다.

핵심 메시지

여불위가 이인에게서 본 것은 현재의 가치가 아니라 잠재 가치였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저평가 자산을 사들여, 그 가치를 직접 끌어올린 뒤 회수한다 — 그의 정치 투자는 본질적으로 거상의 사업 감각 그대로였다.

여불위의 계획은 단순했다. 안국군의 본처이자 총애받던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인이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면 자동으로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여불위는 재산의 절반을 이인에게 주어 명성을 쌓게 하고, 나머지로 화양부인의 측근을 구워삶아 알현에 성공한다. 그는 "이인이 부인을 하늘처럼 여기며 늘 그리워한다"고 전했고, 측근을 통해 "총애를 잃기 전에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라"고 설득했다. 공략은 적중했다. 화양부인이 눈물로 청하자 안국군은 이인을 양자로 들였고, 소모품에 불과했던 인질은 정식 후계자로 올라섰다.

이인이 양자가 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이인은 한 무희에게 반해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졸랐다. 하필 그녀는 여불위가 가장 아끼던 애첩 조희(趙姬)였고, 당시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설이 있다. 화가 났지만 이인과 틀어질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여불위는 결국 조희를 바쳤다. 조희는 얼마 뒤 아들을 낳아 영정(嬴政)이라 이름 지었다.

짚고 넘어가기

영정이 이인의 친자인지 여불위의 핏줄인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조희가 시집간 지 12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당시 임신 기간 계산에 두 달가량 오차가 있었다는 반론도 있어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다. 이런 출생의 모호함은 훗날 영정, 즉 진시황의 정통성 시비로 두고두고 따라붙는다.

기원전 257년 진의 대군이 다시 한단을 치자 조나라는 인질 이인을 죽이려 했다. 여불위는 황금 600금으로 관리를 매수해 이인을 탈출시켰지만, 아내 조희와 아들 영정은 한단에 남겨졌다. 이 때문에 영정은 유년기 대부분을 적국 조나라에서 보내야 했다.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76세로 죽고, 오래 태자로 있던 안국군이 즉위했다. 그러나 안국군은 즉위 단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이인이 진의 왕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장양왕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낙양에 식읍 10만 호를 하사했다. 한낱 장사꾼이 천하 최강 진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10년 전 여불위의 투자가 대박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양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즉위 3년 만에 중병으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영정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제4장진시황, 천하를 삼키다

13세에 즉위한 영정은 국정을 책임지기엔 너무 어렸다. 그는 아버지의 신임을 받던 여불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불위를 최고위직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사석에서 "작은아버지(仲父)"라 불렀으니,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여불위는 진의 실질적 일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불위에게 골칫거리가 생겼다. 옛 애인이자 이제 왕태후가 된 조희가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태후와 사통하는 것은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조희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던 여불위는 노애(嫪毐)라는 정력 좋은 사내를 환관으로 위장해 조희에게 바쳤다. 노애에게 빠진 조희 덕분에 여불위는 위험한 관계에서 벗어났지만,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희가 노애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조희는 가짜 점괘를 핑계로 거처를 옮겨 아들 영정의 눈을 피해 노애와 지냈고, 그 사이 노애는 여불위와 비견될 만큼의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영정이 22세 되던 기원전 238년 왕태후와 노애의 사통이 보고되었다. 다급해진 노애는 옥새를 위조해 병사를 모아 함양궁으로 쳐들어왔으나, 창평군(昌平君)이 이끄는 부대에 격파당했다. 사로잡힌 노애는 거열형을 당했고, 조희가 낳은 두 아들은 자루에 넣어져 맞아 죽었다. 조희는 왕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죽음만은 면해 궁에 유폐되었다.

노애를 소개한 여불위의 끝도 좋을 리 없었다. 영정은 그를 상국에서 파면하고 봉지 낙양으로 보냈다. 큰 공을 세웠던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거기서 그쳤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오히려 그의 명성이었다. 여불위가 실각했다는 소식에 여섯 나라 사신들이 그를 스카우트하려 끊임없이 찾아왔고, 이것이 영정의 심기를 건드렸다. 영정은 한때 "작은아버지"라 부르던 인물에게 야박한 편지를 보냈다. "그대에게 무슨 공이 있어 하남 땅을 받았소? 내가 왜 그대를 아버지라 불러야 하오? 당장 촉(蜀)으로 가시오." 편지를 읽은 여불위는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을 영정은 빠르게 메웠다. 창평군·왕전(王翦)·왕분(王賁)·이신(李信) 등 유능한 인재가 그를 보좌했고, 그중 가장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은 이사(李斯)였다.

비유로 보기 — 이사의 쥐 이야기

초나라 말단 관리이던 이사는 화장실의 쥐와 곳간의 쥐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변소의 쥐는 못 먹어 비쩍 말랐고 인기척에 겁먹어 달아났으나, 곳간의 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 사람이나 개를 봐도 놀라지 않았다. 같은 쥐인데 처지가 정반대였다. 이사는 "쥐나 사람이나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능력이 같아도 무대가 다르면 결과가 다르다 —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통찰이다. 그는 곧 사직하고 천하의 중심 진나라로 향했다.

이사는 영정에게 천하통일의 때가 왔음을 역설하며 두 갈래 전략을 제시했다. 하나는 강력한 군사력의 활용, 다른 하나는 돈을 아끼지 않고 여섯 나라의 군신 관계를 이간시키는 것이었다. 매수와 뇌물로 각국 중신을 진의 편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영정은 동의하고 통일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의 순서를 두고는 이견이 있었다. 이사는 가장 약한 한(韓)나라부터 치자고 했으나, 한나라 사신으로 온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진에 적대적인 조나라를 먼저 멸하라고 주장했다. 진에 협조적인 한을 먼저 치면 다른 나라들이 살아남기 위해 조와 동맹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나라 왕족이던 한비자에게는 조국 한을 구하려는 속내가 있었지만, 논리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영정은 한비자를 존경했으나, 이사와 요가(姚賈)가 "한나라 왕족인 한비자는 결코 진을 돕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모함했다. 결국 한비자는 옥에 갇혀 자살했다. 동문수학한 벗이 권력 다툼 속에서 옛 동료를 제거한 것이다.

한 韓 기원전 231 조 趙 기원전 228 위 魏 기원전 225 초 楚 기원전 223 연 燕 기원전 222 제 齊 기원전 221 진 秦 — 천하통일 기원전 221년
10년에 걸친 6국 병합 — 한·조·위·초·연·제 순으로 무너졌다

한비자가 사라진 뒤 진은 본격적으로 통일 전쟁에 나섰다. 기원전 231년 가장 약한 한나라를 손쉽게 멸했다. 다음은 숙적 조나라였다. 조에는 두 번이나 진의 대군을 격퇴한 명장 이목(李牧)이 있었으나, 진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어리석은 조왕이 이를 믿어 이목을 처형했다. 이목이 사라진 조는 더 이상 상대가 아니었다. 한단은 함락되었다.

조라는 방파제가 사라지자 그 뒤의 위(魏)나라도 안전할 수 없었다. 왕분은 위의 도성 대량(大梁)이 지대가 낮은 것을 확인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성을 잠기게 했다. 3개월을 버티던 위는 성벽이 무너지자 항복했다. 5년 사이 여섯 나라 중 셋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남쪽의 강국 초(楚), 부유한 제(齊), 북쪽의 연(燕)뿐이었다.

제5장형가의 비수와 통일의 완성

의외로 가장 약소국이던 연나라에서 가장 큰 위협이 나왔다. 연의 태자 단(丹)은 어릴 적 조나라에서 영정과 소꿉친구로 지낸 인연이 있었다. 훗날 진에 인질로 보내졌을 때 영정이 자신을 냉대하자 서운함을 품고 탈출해 연으로 돌아왔다. 통일 전쟁이 시작되자 단은 진의 장수 번어기(樊於期)를 숨겨주고 있었는데, 사로잡히면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자객을 구하기로 한다. 그렇게 등장한 인물이 형가(荊軻)다.

형가에게 단이 요구한 것은 영정을 칼로 협박해 빼앗긴 땅을 돌려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응하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었다. 형가는 영정의 경계를 풀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번어기의 목, 다른 하나는 연나라 요충지 독항(督亢)의 지도였다. 단이 번어기와의 정을 생각해 망설이자,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사정을 말했고 번어기는 "오늘에야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기 목을 내어 옛 군주에게 복수한 것이다.

형가는 번어기의 목이 든 함과 독항의 지도, 그 속에 감춘 비수를 들고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함양에 도착했다. 연이 독항 지도를 바친다는 것은 항복을 뜻했기에 함양궁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함께 온 진무양이 겁에 질려 온몸을 떨자, 형가는 "촌뜨기가 대왕의 위풍에 겁먹은 것"이라 둘러댔다. 지도를 펼치는 순간 비수가 드러났다. 형가는 영정의 옷소매를 잡고 비수를 휘둘렀으나 소매가 찢어지며 영정이 몸을 피했다.

영정은 차고 있던 칼을 뽑으려 했지만 칼이 너무 길고 형가가 쉴 새 없이 공격해 뽑을 공간이 없었다. 신하들은 어전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발만 굴렀다. 그 순간 어의(御醫) 하무저(夏無且)가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고, 형가가 피하려 멈춘 틈에 영정이 칼을 뽑았다. 한 번 뽑힌 장검 앞에서 짧은 비수는 무력했다. 영정은 형가의 다리를 찌르고, 쓰러진 형가가 던진 비수가 기둥에 막히자 달려들어 여덟 번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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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이토록 상세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 순간에 약주머니를 던진 어의 하무저의 지인들이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사관에게 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의 생생한 디테일은 종종 현장의 작은 목격자에게서 나온다. 만약 진무양이 겁먹지 않고 힘으로 영정을 눌렀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암살 미수에 격분한 영정은 연나라를 쳤다. 연왕은 영정의 비위를 맞추려 태자 단의 목을 바쳤으나 화는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연나라도 멸망했다. 이제 남은 것은 초나라와 제나라뿐이었다.

초나라 정벌의 규모를 두고 영정이 묻자, 노장 왕전은 "60만이 필요하다"고 했고 젊은 이신은 "20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영정은 왕전이 늙어 담력이 작아졌다 비웃으며 이신에게 20만을 주었다. 이신은 초반에 승승장구했으나 초의 명장 항연(項燕)에게 막혀 퇴각했다. 그제야 영정은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맡겼다.

출진에 앞서 왕전은 영정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면 좋은 땅과 집을 상으로 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부하가 이유를 묻자 왕전이 답했다. "대왕은 의심이 많은 분이다. 지금 전국에서 동원한 병사를 모두 내게 맡겼으니, 내가 상을 탐하지 않으면 도리어 반란을 의심할 것이다." 명장은 전장의 적뿐 아니라 군주의 의심까지 계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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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욕심을 일부러 드러내 "나는 야심이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 있다. 청렴이 오히려 의심을 부르고, 소소한 탐욕이 안심을 주는 역설이다. 왕전이 땅과 집을 조른 것은 탐욕이 아니라, 60만 대군을 쥔 장수가 군주에게 보내는 정교한 안전 보장이었다.

왕전은 요새를 짓고 병사들을 쉬게 하며 초나라 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먼저 지친 초나라 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체력을 비축한 진나라 군이 추격해 대승을 거뒀고, 초왕을 사로잡았다. 항연이 남은 병력으로 반격을 준비하며 새 왕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한때 진의 상국까지 올랐다 배신한 창평군이었다. 그러나 왕전은 이들마저 격파했고, 창평군은 죽고 항연은 자결했다. 800년 역사의 초나라가 멸망했다.

마지막 제나라에는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항복하면 500리 땅에 봉하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제왕은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그는 외딴 숲으로 보내져 모든 지원이 끊겼고, 먹을 것마저 떨어져 굶어 죽었다. 강태공과 제 환공의 나라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기원전 221년, 진은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제6장황제의 제도와 폭정

천하를 통일한 영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각국 군주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으니 왕이라는 호칭으로는 권위가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설의 삼황오제에서 글자를 따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새로 만들고, 자신을 첫 번째 황제, 곧 시황제(始皇帝)라 불렀다.

이어 통일된 중국을 어떻게 다스릴지 논의했다. 대부분의 신하는 황제의 아들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봉하자고 했으나, 이사는 반대했다. 과거 주나라가 제후를 봉했다가 중국이 여러 나라로 쪼개진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손을 들어,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각 군을 다시 현(縣)으로 쪼갠 뒤 중앙 정부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다. 봉건 대신 관료를 통한 중앙집권이었다.

비유로 보기 — 봉건제 vs 군현제

봉건제는 본사가 지역마다 독립 사장을 세워 알아서 운영하게 두는 프랜차이즈에 가깝다. 효율적이지만 지역 사장이 힘을 키우면 본사를 배신한다. 군현제는 본사가 직접 지점장을 파견해 언제든 교체하는 직영점 체제다. 통제는 강하지만 본사가 흔들리면 전체가 동시에 무너진다. 진은 직영 체제로 강력한 통일을 이뤘으나, 바로 그 구조 때문에 중앙이 무너지자 순식간에 붕괴한다.

다음 과제는 제도의 통일이었다. 지역마다 다른 문자와 화폐를 쓰던 탓에 교류에 문제가 많았다. 진시황은 문자와 화폐를 하나로 통일하고, 길이·부피·무게를 재는 단위인 도량형까지 통일했다. 이 표준화는 이후 중국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묶이는 토대가 되었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진은 빠르게 새로운 통치 체제를 완성해 갔다.

그러나 진시황은 폭군으로 더 유명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폭군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도교의 신선 사상에 빠지면서부터였다. 통일 후 그는 다섯 차례나 전국을 도는 순행에 나섰는데, 두 번째 순행에서 서복(徐福)이라는 방사(方士)를 만난다. 서복은 "선약(仙藥)을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며, 바다 위 삼신산의 신선에게 어린 남녀와 배를 보내면 선약을 구해 오겠다고 했다. 천하를 다 가졌어도 죽음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진시황은 즉시 수천 명의 남녀와 배를 내주었다. 서복은 떠난 뒤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초조해진 진시황은 다른 방사 노생(盧生)을 보내 선약을 구해 오게 했다. 노생은 선약 대신 미래를 예언하는 책 한 권을 가져왔는데, 거기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라고 적혀 있었다. 진시황이 떠올린 것은 북쪽의 흉노족이었다. 그는 대장 몽염(蒙恬)에게 30만 병력을 주어 흉노를 토벌하게 하고, 흉노의 남하를 막는 장성을 쌓으라 명했다. 이것이 만리장성이다.

짚고 넘어가기

"호(胡)가 진을 망하게 한다"는 예언에서 진시황은 흉노만 떠올렸으나, 정작 그의 아들 중 하나의 이름에도 '호(胡)'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막내아들 호해(胡亥)다. 진을 무너뜨린 것은 북방의 오랑캐가 아니라 바로 그 호해의 치세였다. 예언은 빗나간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가리키며 적중했다.

몽염은 흉노를 몰아낸 뒤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진·조·연이 쌓아둔 장성들을 연결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들어간 대규모 토목 사업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 민간에서 "아들을 낳으면 키우지 말고 딸을 낳으면 잘 먹여라, 장성 아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것을 보지 못하느냐"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진시황의 토목 사업은 이뿐이 아니었다. 거대한 궁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했고, 죽음을 대비해 지하 무덤 여산릉(驪山陵)을 건설했다. 기록에 따르면 무덤 속에 궁궐과 관리, 병마용, 보물을 채우고, 접근하는 자를 쏘는 기계 쇠뇌를 설치했으며,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산릉과 아방궁에만 70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고, 같은 시기 다른 공사까지 합치면 총 300만 명이 노역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 인구가 200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노동 가능한 남자의 절반가량이 공사에 끌려간 셈이다.

방사 노생은 진시황에게 신선 사상을 깊이 주입했다. "악귀를 피하려면 황제의 거처를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말에 진시황은 300여 궁전에 공중 통로를 만들어 누구도 그의 위치를 모르게 했다. 그러나 선약을 구하지 못한 노생은 변명거리가 떨어지자 도망쳤고, 도망 전 그가 후생(侯生)과 나눈 진시황 험담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세우길 좋아해 신하들이 감히 의견을 내지 못하며, 잘못을 지적하는 자가 없으니 나날이 교만해진다"는 내용이었다.

격분한 진시황은 함양의 유생 460명을 잡아들여 모두 산 채로 매장했다. 1년 전에는 이사의 조언으로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사상서를 불태운 적이 있었다.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른다.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는 우민화 정책이었으나, 이 일로 진시황은 폭군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계속되는 폭정과 가혹한 법으로 백성의 불만은 빠르게 쌓여 갔다. 폭발은 시간문제였고, 단지 누군가 먼저 나서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제7장불로장생과 사구의 음모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순행에 나섰다. 그 전에 세 가지 불길한 징조가 잇따랐다.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흉조로 여겨지던 천체현상이 나타났고, 떨어진 운석에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8년 전 강에 던졌던 벽옥(璧玉)을 한 남자가 가져와 "올해 시황제가 죽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돌려주고 사라졌다. 진시황은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순행 중 진시황은 9년 만에 나타난 서복을 다시 만났다. 물론 선약은 없었고, 서복은 "해신이 예물을 더 바쳐야 선약을 준다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진시황은 또다시 3000명의 어린 남녀와 장인들을 내주었고, 서복은 다시 항해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광활하고 비옥한 땅을 발견해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어디에 정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순행 길에서 진시황은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중병에 걸려 쓰러졌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환관 조고(趙高)를 불러 맏아들 부소(扶蘇)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했다. "몽염에게 군을 넘기고 함양으로 와 나를 안장하라"는 내용이었다. 부소는 분서갱유에 반대하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국경의 몽염에게 보내져 있었지만, 진시황은 여전히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중국 최초의 황제는 49세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하루에 30킬로그램의 공문서를 처리할 만큼 일에 몰두했던 그가 과로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핵심 메시지 — 사구(沙丘)의 모의

황제가 순행 중 죽자, 동행한 승상 이사는 반란을 우려해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시간에 맞춰 시신이 탄 수레에 식사를 올리고 공문을 처리하는 척했다. 7월 무더위에 시체 냄새가 진동하자, 절인 생선을 수레에 실어 냄새를 가렸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의 죽음이 한 수레의 썩은 생선 냄새 뒤에 감춰진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환관 조고였다. 그는 진시황이 태자를 정식으로 세우지 않았고 죽음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편지대로 부소가 황제가 되면, 부소와 가까운 몽염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과거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 했던 몽염의 동생 몽의(蒙毅)에 대한 원한이 있던 조고는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세우는 모험을 감행했다. 호해는 곧 동의했다.

다음 상대는 승상 이사였다. 처음엔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반대했으나, 조고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부소가 황제가 되면 반드시 몽염을 승상으로 삼을 것이고, 승상께서는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설득당한 이사는 황제의 조서를 위조해 호해를 태자로 세우고, 부소와 몽염에게는 "죄가 많으니 자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부소가 자결하려 하자 몽염은 말렸다. "거짓 조서가 아닌지 어찌 압니까? 다시 확인한 뒤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소는 "아버지께서 죽으라는데 어찌 다시 묻겠는가" 하며 곧바로 자결했다. 자살을 거부한 몽염은 옥에 갇혔다. 위조된 편지 한 통이 진의 정당한 후계자와 최고의 명장을 동시에 제거한 것이다.

부소가 죽자 호해는 함양에 입성해 두 번째 황제, 이세황제(二世皇帝)에 올랐다. 그러나 호해에게는 군주의 자질도 의욕도 없었다. 그는 모든 국정을 조고에게 맡긴 채 향락에 빠졌고, 자신을 말리던 충신 몽염·몽의 형제를 끝내 자결시켰다. 떳떳하지 못하게 황제가 된 탓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던 호해는, 조고의 조언에 따라 형제와 누이들까지 도륙했다. 황제의 아들 12명이 처형되고 공주 10명이 돌에 맞아 죽었다. 승상 이사조차 조고의 모함으로 허리를 베는 요참형(腰斬刑)을 당했다.

고사 — 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는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려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했다. 호해가 웃으며 "어찌 사슴을 말이라 하오?" 하고 신하들에게 묻자, 일부는 침묵했고 일부는 조고에게 아부해 "말"이라 답했으며, 정직하게 "사슴"이라 한 자들은 얼마 뒤 조고에게 처단되었다. 이후 모든 신하가 황제가 아닌 조고에게 충성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의 지록위마는, 권력자가 명백한 거짓을 강요해 충성을 시험하고 반대자를 솎아내는 행태를 가리키는 말로 남았다.

이사가 형장으로 끌려가며 아들에게 남긴 말은 한 시대의 권력자가 도달한 비참한 자리를 보여준다. "너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누런 개를 몰고 토끼 사냥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구나." 천하통일의 설계에 참여했던 인물의 마지막 소원이, 고향에서의 평범한 사냥이었다.

제8장진승·오광, 첫 불씨

호해가 향락에 빠지고 조고가 학살로 조정을 비우는 사이, 나라의 근간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기원전 209년 7월, 대택향(大澤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900명으로 시작된 이 봉기가 진의 멸망에 불을 댕긴 진승·오광의 난이다.

주도자 진승(陳勝)은 젊었을 때 남의 땅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동료들에게 "나중에 부귀해지면 서로 잊지 말자"고 하자 비웃음을 샀고,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 큰 야심을 품은 인물이었다.

국경 수비 임무를 맡아 900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던 진승과 오광(吳廣)은, 큰비로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진의 법은 엄격해 기한을 어긴 자는 모두 목이 잘렸다. 꼼짝없이 죽을 상황에서 진승이 말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큰 이름을 내야 한다. 왕과 제후가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이들은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며 봉기했고, 진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비유로 보기 — 가혹한 법의 역설

지각해도 사형, 반란해도 사형이라면, 합리적 인간은 차라리 반란을 택한다. 처벌이 무거울수록 안전하다고 느낄 것 같지만, 처벌의 수위가 모든 죄에 똑같이 극단적이면 사람들은 "기왕 죽을 바엔"이라며 더 큰 위반으로 옮겨 간다. 진의 가혹한 법은 질서를 지키려다 오히려 가장 큰 무질서, 곧 반란의 합리적 동기를 만들어 냈다.

진승과 오광은 비단에 "진승왕(陳勝王)"이라 써서 물고기 뱃속에 넣어 두고, 한밤중에 여우 소리로 "진승이 왕이 된다"는 말을 퍼뜨려 신비감을 조성했다. 무리를 모은 이들은 진현(陳縣)을 근거지로 삼아 순식간에 수만 병력으로 불어났고, 진승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당대의 현자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진승의 칭왕을 말렸다. "지금 왕이 되면 천하에 사사로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망한 여섯 나라의 후예를 찾아 다시 세우면 진의 적이 늘고 힘이 분산됩니다." 그러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던 진승은 조언을 무시하고 칭왕을 강행했고, 이는 그가 패망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혼자 진을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했기에, 제후들을 세워 힘을 합쳤어야 했던 것이다.

장초의 기세는 무서웠다. 부하 장수 주장(周章)이 수십만 대군으로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진의 멸망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다급해진 호해 앞에 세금을 담당하던 관원 장한(章邯)이 나섰다. 그는 여산릉에서 노역하던 죄수들을 사면해 무장시켜 맞서자고 했다. 한 번도 군을 지휘한 적 없는 문신이었으나, 장한은 적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급습해 대승을 거뒀다. 주장은 자살했고, 진승의 세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장한은 형양에 모인 장초 군을 다시 격파했다. 오광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진승은 마부 장가(莊賈)에게 죽임을 당했다. 진승이 칭왕한 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진승이 남긴 공백을 여러 세력이 빠르게 채워 갔다. 동쪽 옛 조나라 땅에서는 무신(武臣)이 무혈로 30개 성을 얻으며 스스로 조왕이 되었고, 제·연·위 땅에서도 옛 왕족과 호걸들이 각자 나라를 세웠다. 중국은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짚고 넘어가기 — 책략가 괴철의 무혈 평정

무신이 조나라 땅에서 30개 성을 싸우지 않고 얻은 데는 괴철(蒯徹)의 계책이 있었다. 그는 항복한 현령에게 자리를 보장하고 화려한 수레로 다른 지역을 돌게 함으로써, "항복하면 죽지 않고 부귀를 지킨다"는 본보기를 만들었다. 칼이 아니라 항복의 안전을 보장하는 신호 하나로 성들이 스스로 문을 열었다. 무력보다 예측 가능성이 더 강력한 무기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제9장항우와 유방의 등장

이제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무대에 오른다. 한 사람은 멸망한 초나라 명장의 후예 항우(項羽), 다른 한 사람은 시골의 건달 유방(劉邦)이었다.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 항연은 세 아들을 남겼고, 그중 막내 항량(項梁)은 살인을 저질러 어린 조카 항우를 데리고 회계군 오중(吳中)으로 도망쳤다. 항우는 항량의 형의 아들이었다. 오중에서 항량은 명장의 아들이라는 후광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그 보호 아래 항우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다.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키가 8척(약 185센티미터)에 세 발 달린 큰 솥을 들 만큼 힘이 장사였으며,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둘인 특이한 신체를 지녔다.

항량이 글공부와 검술을 가르치려 하자 항우는 곧 그만두며 말했다. "글은 이름만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은 한 사람만 상대할 뿐이니 배울 게 못 됩니다. 저는 만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항량이 병법을 가르치자 기뻐했으나, 이번에도 얼마 못 가 지루해하며 포기했다. 한번은 순행하는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 항우가 불쑥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빼앗아 대신하겠다." 깜짝 놀란 항량은 입단속을 시켰지만, 조카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확인했다.

한편 같은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 다른 반응을 보인 자가 또 있었다. 함양에서 노역하던 유방은 진시황을 보고 "대장부라면 응당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했다. 항우가 "빼앗겠다"고 했다면, 유방은 "부럽다"고 한 셈이다. 두 사람의 기질 차이가 이 한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초나라 패현(沛縣) 출신 유방은 콧대가 높고 멋진 수염을 가졌으며, 왼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 72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서는 그가 "넓은 도량을 지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적었지만, 실은 동네 건달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어 주변에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매일 주점에 들렀는데, 그가 오는 날엔 손님이 몰려 매상이 평소의 몇 배였다고 한다.

항우 項羽 출신 초나라 명장 항연의 후예 — 명문가 강점 압도적 무력, 전장의 직접 지휘 약점 잔혹함, 의심, 인재를 품지 못함 자세 "내가 저 자리를 빼앗겠다" 유방 劉邦 출신 패현의 건달 — 평민 강점 사람을 끄는 매력, 인재 등용 약점 오만함, 배은망덕, 직접 무력은 약함 자세 "대장부라면 응당 저래야 한다"
같은 황제의 행렬을 보고 한 사람은 빼앗겠다 했고, 한 사람은 부러워했다

유방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계기는 죄수 호송이었다. 패현의 죄수들을 여산릉까지 호송하던 중 죄수들이 대거 달아나자, 도착해도 죽은 목숨이던 유방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남은 죄수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때 열 명 정도가 그를 따랐다. 그날 밤 술에 취해 걷던 유방이 길을 막은 큰 뱀을 칼로 베자, 다음 날 그 자리에서 한 노파가 "적제(赤帝)의 아들이 백제(白帝)의 아들을 베었다"며 통곡했다는 전설이 퍼졌다. 진 제국을 상징하는 백제를 한을 상징하는 적제가 베었다는 이 신화는 유방을 천명을 받은 인물로 신비화했다.

진승의 봉기 소식이 패현에도 전해지자,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등 패현 관원들이 유방을 불러들였다. 성안에서 폭동이 일어나 현령이 죽자, 유방은 무혈입성해 새 현령으로 추대되었다. 비슷한 시기 남쪽 회계에서는 항량과 항우가 군수를 죽이고 8000명의 병사를 모아 봉기했다. 두 주인공이 마침내 각자의 깃발을 든 것이다.

핵심 메시지 — 두 책사의 등장

이 무렵 훗날 결정적 역할을 할 인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라 명문가 출신 장량(張良)은 멸망한 조국의 복수로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피 중, 다리 위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병법서를 받았다. 노인은 일부러 신발을 떨어뜨려 줍게 하고, 세 번이나 새벽 약속에 먼저 나와 장량의 인내를 시험한 뒤에야 책을 건넸다. "참을성과 겸손을 갖춘 자만이 큰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시험이었다. 한편 회음 출신의 가난한 청년 한신(韓信)은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해 빨래하던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고,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모욕(과하지욕)을 참아냈다. 천하의 명장이 될 그릇이 아직 무명의 밑바닥에 있었다.

제10장거록의 결전

봉기 후 항량은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70세의 노책사 범증(范增)이 합류해, 옛 초나라 백성의 마음을 모으려면 초 왕족의 후예를 다시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항량은 민간에서 양치기로 숨어 살던 왕족 미심(羋心)을 찾아내 초회왕(楚懷王)으로 세웠다. 과거 진에 속아 끌려가 죽은 옛 왕의 시호를 그대로 붙여, 초나라 백성의 오랜 원한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연승은 항량에게 독이 되었다. 적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그는 송의(宋義)의 경고를 무시했고, 정도(定陶)에서 장한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구심점을 잃은 초나라가 충격에 빠진 사이, 꼭두각시로 여겨지던 초회왕이 주도권을 쥐었다. 그는 가장 경계하던 항우를 견제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유방을 총애했다. 그리고 두 가지 운명을 가르는 명령을 내린다.

북쪽에서 장한이 조나라를 거록(鉅鹿)에서 포위하자, 초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항우를 그 부관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동시에 "먼저 관중(關中)을 평정하는 자를 그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하며, 관중 공격은 항우 대신 유방에게 맡겼다. 신하들이 "항우는 잔혹하니 덕망 있는 유방을 보내야 한다"고 진언한 결과였다.

핵심 메시지 — 운명을 가른 인사

이 인사 하나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항우는 가장 강한 진의 주력군과 정면으로 싸우는 험한 길로, 유방은 상대적으로 저항이 약한 관중으로 향하게 되었다. 항우는 군사적으로 더 큰 공을 세우지만, 정작 "관중왕"이라는 상징적 보상은 먼저 도착할 유방의 몫이 될 운명이었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자가 가장 큰 명분을 놓치는 구조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안양에 주둔한 송의는 46일이나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진과 조가 싸워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명분이었으나, 정작 자기 아들의 출세 연회를 성대히 여는 사이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다. 분노한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고 상장군 자리를 차지했다. 군권을 쥔 항우 앞에서 초회왕은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거록으로 향한 항우는 황하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리고, 병사마다 3일 치 식량만 갖게 했다. 돌아갈 길도 밥 지을 솥도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파부침주(破釜沈舟), 곧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비유로 보기 — 파부침주

퇴로를 스스로 끊는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지만, 인간 심리에는 강력하게 작동한다. "선택지가 없다"는 인식은 망설임을 제거하고 모든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집중시킨다. 항우는 병사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지를 물리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수적 열세를 정신력으로 메웠다. 다만 이 전술은 압도적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관만이 쓸 수 있다 — 병사들이 지휘관을 신뢰하지 않으면 사기 진작이 아니라 공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은 결사대가 되어 돌격했다. 항우는 진의 명장 왕리(王離, 왕전의 손자)와 아홉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거록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은 왕리의 기세에 눌려 감히 나서지 못하고 구경만 했는데, 초나라 병사 하나가 진나라 병사 열을 상대하는 일당십(一當十)의 활약을 보이자 모두 벌벌 떨었다고 한다. 항우는 최강 진나라 군을 정면 승부에서 격파하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15년 전 왕전에게 멸망당한 초나라가, 왕전의 손자에게 승리함으로써 복수한 것이다.

거록의 승리 후 항우가 제후 장수들을 접견하자, 겁에 질린 이들은 무릎으로 기다시피 했고 누구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항우는 초나라뿐 아니라 모든 반진 세력을 대표하는 상장군이 되었다. 한편 서쪽에서 항우와 대치하던 장한은, 무능한 진 조정과 권력을 독점한 조고에게 절망했다. 부하 사마흔(司馬欣)이 "이겨도 조고가 질투할 것이고 져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조나라의 진여까지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자, 장한은 마침내 항우에게 항복했다. 진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짚고 넘어가기 — 신안의 생매장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데리고 함양으로 향하던 항우는, 이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자 신안(新安)에서 20만 명을 모두 산 채로 묻어버렸다. 충분히 다른 선택이 가능했음에도 너무나 간단히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 결정은 두고두고 항우를 괴롭혔다. 20만 병력을 흡수할 기회를 스스로 버렸을 뿐 아니라, 대부분 관중 출신이던 그들을 학살함으로써 관중 백성의 원성을 샀다.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의 가장 큰 약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제11장먼저 관중에 든 자

항우가 거록에서 진의 주력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유방은 비교적 수월하게 서쪽으로 진격했다. 길에서 만난 노인 역이기(酈食其)를 책사로 얻었고, 항복한 자에게 너그럽게 대하자 많은 성주들이 앞다투어 문을 열었다. 무력으로 짓밟은 항우와 달리, 유방은 관용을 무기로 삼아 진군 속도를 높였다.

함곡관 정면 돌파가 막히자 장량은 우회로를 제안했다. 남양과 무관(武關)을 통해 험한 산맥을 넘는 길이었다. 유방은 항복하면 자리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으로 남양군수의 투항을 받아냈고, 이 소문이 퍼지자 진의 여러 성이 연이어 항복했다. 진의 마지막 저지선에서도 장량의 계책이 빛났다. 그는 산 위에 깃발을 잔뜩 세워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항복을 권유해 진나라 장수들의 마음을 흔든 뒤,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해 격파했다.

한편 함양에서는 마지막 막이 오르고 있었다. 적이 다가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호해가 조고를 문책하려 하자, 조고는 사위 염락(閻樂)을 보내 호해를 죽였다. 황제로 살게 해달라, 왕으로, 평민으로라도 살게 해달라는 호해의 애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황제가 아닌 왕으로 세웠으나, 자영은 함정을 파 조고를 죽였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진을 안에서 무너뜨린 조고의 최후였다.

자영은 남은 병력으로 유방을 막으려 했으나, 장량의 계책에 격파당했다. 기원전 207년 10월, 자영은 유방에게 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국 진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진을 멸망시킨 것은, 몇 년 전만 해도 한낱 건달이던 유방이었다.

핵심 메시지 — 약법삼장(約法三章)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호화로운 궁궐과 보물에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번쾌(樊噲)와 장량의 거듭된 만류로 궁을 떠나 패상(霸上)에 주둔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수를 둔다. 진의 가혹한 법을 모두 폐지하고, 살인·상해·절도만 처벌하는 단 세 조항만 남긴 것이다. 이것이 약법삼장이다. 가혹한 법에 시달리던 관중 백성들에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백성들이 식량과 술을 바치자 유방은 "백성의 양식을 축내고 싶지 않다"며 사양했고, 백성들은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못할까 걱정할 정도로 그를 따랐다. 민심을 무시한 항우와 정반대의 행보였다.

오직 소하만이 보물 대신 진나라 승상부의 지도와 호적, 행정 문서를 챙겼다. 각 지역의 지형·인구·재정이 기록된 이 자료는 훗날 유방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결정적 자산이 된다. 남들이 눈앞의 금은보화를 다툴 때, 소하는 천하를 운영할 데이터를 확보한 것이다.

비유로 보기 — 소하가 챙긴 것

점령군이 들이닥치면 대부분 금고를 턴다. 소하는 금고 대신 회사의 장부와 고객 명단, 시설 도면을 챙겼다. 당장의 현금은 한 번 쓰면 사라지지만, 데이터는 조직 전체를 운영할 수 있게 한다. 유방이 훗날 항우와의 장기전에서 끊임없이 정확한 물자와 병력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하가 이때 확보한 "천하의 명세서" 덕분이었다.

두 달 늦게 관중에 도착한 항우에게는 이미 관중왕이 될 명분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압도적인 군사력이 있었다. 당시 항우의 병력은 40만(100만으로 부풀림), 유방은 10만(20만으로 부풀림)이었다. 앞서 유방이 함곡관에 병사를 보내 항우의 진입을 막은 데다, 유방 휘하의 조무상(曹無傷)이 "유방이 관중왕에 올라 보물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밀고하자, 항우는 분노해 홍문(鴻門)에 진을 치고 유방을 칠 준비를 했다. 19대 1의 병력 차 앞에서 유방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제12장홍문의 잔치

초한지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펼쳐진다. 범증은 유방을 죽이라고 거듭 촉구했다. "유방이 관중에서 재물도 여색도 탐하지 않으니, 그 뜻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 그러나 항우는 결단하지 못했다.

유방을 구한 것은 뜻밖의 인연이었다.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은 과거 도피 중 장량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공격 계획을 듣고 밤새 말을 달려 장량에게 피신을 권하러 왔다. 장량은 유방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곧장 유방에게 이를 알렸다. 항우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한 유방은, 장량의 조언대로 항백을 극진히 대접하며 자식들의 혼인까지 약속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유방은 "함곡관을 지킨 것은 도적을 막기 위함이었지 배신할 뜻이 없었다"는 변명을 항백을 통해 전했고, 항백은 다음 날 직접 항우를 찾아와 사과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다음 날 유방은 100여 명만 데리고 홍문으로 향했다. 항우를 만난 유방이 "소인들의 이간질로 오해가 생겼다"며 몸을 낮추자, 항우는 모든 것을 조무상의 모함 탓으로 돌리며 술자리를 베풀었다. 결단의 순간을 놓친 것이다.

범증은 포기하지 않았다. 차고 있던 옥결(玉玦)을 거듭 들어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항우가 모른 체하자, 연회장 밖에서 항장(項莊)을 불러 칼춤을 추다 유방을 찌르라 했다. 항장이 칼춤을 시작하자, 낌새를 챈 항백이 끼어들어 함께 춤추며 유방을 몸으로 막았다. 항장무검(項莊舞劍), 곧 "항장이 칼춤을 추는 뜻은 따로 있다"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장량은 번쾌를 불렀다. 방패를 휘둘러 병졸을 제압하고 들어온 번쾌의 눈초리는 찢어질 듯했고 머리카락은 곤두서 있었다. 항우조차 위협을 느꼈다. 항우가 술과 돼지 다리를 내리자 번쾌는 단숨에 들이켜고 방패 위에서 고기를 베어 먹었다. 항우가 "더 마실 수 있느냐" 묻자 번쾌가 답했다.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겠습니까. 큰 공을 세운 사람을 도리어 죽이려 하니, 이는 망한 진나라가 하던 짓일 뿐입니다." 항우는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앉으라고만 했다.

비유로 보기 — 홍문연의 항우

항우는 유방을 제거할 모든 기회를 손에 쥐고도 매번 흘려보냈다. 자존심 강한 인물에게는, 비굴하게 사과하고 몸을 낮추는 상대를 칼로 베는 것이 오히려 명예롭지 못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강자의 관용처럼 보이지만, 실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단견이었다. 협상에서 압도적 우위에 선 쪽이, 상대의 굴종에 만족해 결정적 처리를 미루는 순간 우위는 사라진다. 범증이 옥결을 들 때마다 항우가 외면한 그 망설임이, 5년 뒤 자신의 패망으로 돌아온다.

유방은 변소에 가는 척하며 빠져나와, 번쾌의 재촉에 작별 인사도 없이 도망쳤다. 뒤에 남은 장량이 유방이 충분히 멀어진 뒤에야 선물을 바치며 "유방이 취해 먼저 떠났다"고 전하자, 범증은 장량이 건넨 옥두(玉斗)를 칼로 깨뜨리며 탄식했다. "어린아이와는 대사를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유방일 것이다." 군영으로 돌아온 유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밀고한 조무상을 죽이는 것이었다.

관중을 차지한 항우는 가장 항우다운 결정을 내렸다. 항복한 자영과 백성을 죽이고, 함양의 궁궐을 모두 불태운 것이다. 불은 석 달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 신하가 "관중은 천혜의 요새이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으라"고 권하자, 항우는 "부귀해진 뒤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누가 알아보겠는가" 하며 떠나려 했다. 신하가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 같다더니 과연 그렇다"고 비웃자, 항우는 그를 삶아 죽였다. 천하를 경영할 안목 대신 고향에서의 과시를 택한 것이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전국을 18명의 제후왕에게 분할하고 스스로 왕들의 우두머리인 서초패왕(西楚霸王)에 올랐다. 명목상의 황제 의제(義帝, 초회왕)는 먼 남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유방을 험준한 파촉(巴蜀)의 한왕(漢王)에 봉해, 항복한 진나라 장수 셋으로 하여금 그를 견제하게 했다. 다만 장량이 항백에게 뇌물을 써서 한중(漢中) 땅까지 유방에게 얻어준 것이, 훗날 유방이 관중으로 되돌아오는 통로가 된다. 한중으로 떠나며 유방은 장량의 조언대로 절벽길 잔도(棧道)를 불태워, 공격할 뜻이 없음을 항우에게 보였다.

서초패왕 항우 9개 군, 천하 분봉의 주재자 한왕 유방 파촉·한중에 유폐 의제(義帝) 명목상 황제, 남쪽으로 축출 견제 분봉 허수아비화
기원전 206년의 천하 분할 — 항우가 주재했으나 형평을 잃어 곧 반발을 부른다

제13장한신, 잠룡이 깨다

항우의 분봉은 처음부터 형평을 잃어 곳곳에서 반발을 샀다. 부하 장수가 왕이 되는 동안 정작 큰 공을 세운 전영(田榮)과 진여 같은 인물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전영은 스스로 제나라 왕에 올라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고, 항우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천하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파촉에 유폐된 유방도 불만에 가득 찼다. 험한 산에 갇힌 채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장수들이 줄지어 도망쳤다. 그러나 유방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한신이었다.

한신은 항우 밑에서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으나 중용되지 못하자 유방에게로 왔다. 그러나 유방도 그를 푸대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신은 다른 사람의 죄에 연루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는데, 함께 끌려온 13명의 목이 차례로 잘리고 자기 차례가 되자 외쳤다. "천하를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장사(壯士)를 죽이려 하십니까?" 형 집행관 하후영(夏侯嬰)이 이 말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풀어주고 유방에게 천거했으나, 유방은 농업 관리직을 줄 뿐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신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승상 소하였다. 한신과 대화해 본 소하는 즉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거듭 천거했으나 유방은 듣지 않았다. 결국 푸대접에 지친 한신이 도망치자, 소하는 유방에게 보고도 없이 직접 그를 쫓아 나섰다. 소하추한신(蕭何追韓信), 달밤에 한신을 쫓아간 이 일화는 인재를 알아본 자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도망친 장수는 어디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들뿐입니다. 그러나 한신은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입니다.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그 일을 함께 도모할 사람이 없습니다. 소하가 유방에게

소하가 이렇게까지 한신을 아끼자 유방도 궁금해졌다. 소하의 말에 따라 성대한 대장군 임명식을 열었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명의 한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자 군사들이 크게 놀랐다. 임명식 후 한신은 유방에게 항우와 자신을 비교하게 한 뒤, 항우의 약점을 정확히 짚었다.

항우가 분노하면 모두 두려워 복종하지만, 그는 현명한 장수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일 뿐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나,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줄 때는 인색해 인장을 만들어 놓고도 차마 주지 못하니, 이는 아녀자의 인자함입니다. 민심을 잃은 그의 강대함은 쉽게 약해질 것입니다. 한신이 유방에게
핵심 메시지 — 필부지용과 부인지인

한신의 항우 분석은 두 개의 고사성어로 압축된다. 필부지용(匹夫之勇)은 혼자 날뛰는 용맹일 뿐 인재를 부릴 줄 모르는 한계를, 부인지인(婦人之仁)은 평소엔 다정하나 정작 큰 보상에는 인색한 모순을 가리킨다. 항우는 강했지만, 강함을 조직의 힘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한신은 유방에게 "항우와 정반대로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 무용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고, 성을 공신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었다.

비로소 한신의 진가를 알아본 유방은 그를 앞세워 관중 공략에 나섰다. 한신은 불탄 잔도를 수리하는 척 적의 시선을 끌면서, 실제로는 서쪽으로 우회하는 다른 길로 진격해 진창(陳倉)에 기습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곧 "드러내 놓고 잔도를 고치면서 몰래 진창으로 건넌다"는 고사다 — 겉으로 한 가지를 보여주며 실제로는 다른 일을 도모하는 성동격서의 전형이다.

기습에 당황한 장한은 거듭 패해 자살했고, 다른 두 항복 장수도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은 순식간에 관중을 평정했다. 항우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공격하려 하자, 장량이 "유방은 약속된 관중왕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일 뿐, 더 큰 위협은 전영"이라는 거짓 편지를 보내 항우를 제나라로 돌렸다. 그 사이 유방은 마음껏 동쪽으로 진격할 시간을 벌었다. 한신의 군사적 천재성과 장량의 외교적 책략이 맞물려, 유폐되었던 유방이 다시 천하 경쟁의 한복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제14장팽성의 참패

관중을 평정한 유방은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항우가 장량의 계책에 속아 제나라를 치는 사이, 누구도 유방을 막지 못했다. 한나라·위나라·은나라가 차례로 항복했다. 이 무렵 유방은 또 한 명의 뛰어난 책사 진평(陳平)을 얻었다. 처세술과 모략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위나라와 항우를 거쳐 유방에게 온 그는, 배신을 거듭했다는 비난과 형수와 간통했다는 소문에 시달렸으나, 유방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중용했다.

항우가 의제를 살해한 것은 결정적 실책이었다. 그 덕분에 유방은 "역적 항우를 친다"는 명분을 얻었다. 낙양에 도착한 유방은 의제를 위해 통곡하며 장례를 치르고, 함께 항우를 몰아내자는 격문을 전국에 보냈다. 명분의 위력은 컸다. 여러 제후가 호응해, 유방은 56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로 향했다.

비유로 보기 — 명분의 힘

항우가 의제를 죽여 얻은 실리는 허수아비 하나를 치운 것뿐이었으나, 잃은 것은 천하의 명분이었다. 유방은 그 명분을 정확히 집어 들었다. 의제의 장례식은 슬픔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는 정당한 질서의 수호자이고 항우는 그 파괴자"라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물리적 힘이 약한 쪽이 명분을 선점하면, 흩어진 세력을 한 깃발 아래 모을 수 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항우가 자리를 비운 팽성(彭城)을 손쉽게 차지했다. 56만 대군을 거느린 데다 거의 모든 제후가 따르자 긴장이 풀린 유방은, 미인과 보물을 모아 놓고 날마다 성대한 술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 항우가 아니었다.

팽성 함락 소식을 들은 항우는 정예병 3만 명만 추려 무서운 속도로 남하했다. 새벽에 팽성에 도착한 항우는 곧바로 유방군을 향해 돌진했다. 일당십의 정예병에 맞선 유방군은 여러 제후의 병사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었다. 19대 1의 병력 차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투 시작 몇 시간 만에 유방군은 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지형을 잘 아는 항우가 퇴로를 막아, 강물에 빠져 죽은 자만 20만 명이었고 시체로 강물이 막혔다고 한다.

핵심 메시지 — 숫자보다 군대의 질

팽성 전투는 병력의 절대 숫자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56만 대군은 충성도 낮은 연합군이었고, 3만은 죽음을 함께할 정예였다. 거기에 기습의 속도와 지형의 이점, 그리고 항우라는 압도적 지휘관이 더해졌다. 조직의 힘은 머릿수가 아니라 응집력과 지휘의 질에서 나온다 — 항우는 이 진실을 전장에서 증명한, 군사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혼란 속에서 유방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도망치다 만난 아들과 딸을 수레에 태웠으나, 추격이 다가오자 더 빨리 달아나려고 자녀를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마부 하후영이 그때마다 다시 태웠고, 유방이 거듭 떨어뜨리자 "아무리 위급해도 자식을 버릴 수 없다"며 끝까지 보호했다. 유방의 아버지 태공과 아내 여치(呂雉)는 초나라 군에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다.

단 한 번의 패배로 유방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56만 대군은 사라지고, 제후들은 다시 항우에게 붙었다. 위표는 한나라를 배신했고, 진여는 관계를 끊었다. 오직 장이만이 의리를 지켰으나 그 역시 세력을 잃은 처지였다. 상심한 유방이 "함곡관 동쪽 땅을 떼어 줄 테니 누가 나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겠는가" 묻자, 장량이 답했다. "경포·팽월·한신, 이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경포(黥布)는 항우의 오른팔이었으나 제나라 정벌 때 협조하지 않아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다. 유방의 사신 수하(隨何)는 교묘한 화술로 경포를 설득해 항우에게서 등 돌리게 했다. 격분한 항우가 경포를 치는 사이, 유방은 재기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한편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군세를 회복했다. 여기에는 누구보다 소하의 공이 컸다. 관중에 남아 후방을 책임진 소하는 인력과 물자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한나라의 행정 체계를 세웠다. 그가 챙겨 둔 진나라의 지도와 호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제15장배수진과 북방 평정

유방이 형양에서 항우와 지루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한신은 별동대를 이끌고 북방을 차례로 평정해 나갔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이 가장 빛난 시기였다.

먼저 위나라였다. 위표가 임진(臨晉)에서 강을 건널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집중하자, 한신은 임진에서 강을 건너는 척 적을 묶어 두고 다른 곳에서 몰래 복병을 도하시켜 요충지를 기습했다. 위표가 황급히 군을 돌리자 협공으로 격파하고 위나라를 평정했다. 위장과 기습의 정석이었다.

이어 한신은 조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조나라 공략은 험난했다. 진여가 만만치 않은 데다, 수도 한단으로 가려면 매우 좁은 정형(井陘)의 협곡을 지나야 했다. 좁은 길에서 기습당하면 한신이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조나라의 책사 이좌거(李左車)는 진여에게 "후방의 군량 수송대를 끊고 요새에서 버티면 열흘 안에 한신의 목을 바칠 수 있다"고 조언했으나, 진여는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으면 비웃음을 산다"며 듣지 않았다. 한신은 정탐을 통해 조나라가 이좌거의 계책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기뻐했다.

한신의 병력은 조나라 군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대부분 새로 징집된 신병이었다. 그가 택한 것이 바로 병법의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이었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치면 퇴로가 막혀 스스로 죽을 자리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나라 군은 이를 비웃었다.

한신 본진 배수진 조나라 군 성·요새 매복 2천 기병 ① 본진 유인·후퇴 ② 조군 전군 출격 ③ 빈 성 점령
정형 전투 — 배수진으로 결사 항전을 유도하고, 빈 성을 매복 기병이 점령했다

한신은 따로 2000명의 기병에게 한나라 깃발을 들려 산속에 매복시키고, "본진이 도망치면 조나라 군이 성을 비우고 쫓아올 테니, 그 틈에 성으로 들어가 조나라 깃발을 뽑고 한나라 깃발을 꽂으라"고 지시했다. 날이 밝자 한신의 본진이 진격했다 후퇴하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조나라 군이 성안 병력까지 모두 동원해 추격했다. 한신의 본진은 강가의 배수진 병력과 합류했다. 퇴로가 막힌 한나라 군은 도망칠 곳이 없자 오히려 죽기로 싸웠다.

다 잡은 줄 알았던 한나라 군이 강력히 저항하자 조나라 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벽 위에는 수천 개의 한나라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매복 기병이 빈 성을 점령한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조나라 군은 혼란에 빠져 무너졌고, 한신은 진여를 죽이고 조왕을 사로잡았다.

전투 후 장수들이 병법의 금기인 배수진을 친 이유를 묻자, 한신이 답했다. "징집된 신병을 부리는 것은 저잣거리 사람을 데리고 싸우는 것과 같소. 그래서 사지에 두어 각자 살기 위해 싸우게 했소. 도망갈 길을 주었다면 모두 달아났을 것이오." 신병의 약점을 역이용해, 퇴로를 없애 결사항전을 끌어낸 것이다.

비유로 보기 — 파부침주와 배수진

항우의 파부침주와 한신의 배수진은 모두 "퇴로 차단"이라는 같은 심리를 쓴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항우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정예병을 결사대로 만들었고, 한신은 거기에 더해 매복이라는 두 번째 수를 숨겨 두었다. 한신의 배수진은 단순한 사기 진작이 아니라, "적이 모든 병력을 끌어내도록 유인하는 미끼"였다. 같은 도박처럼 보이지만, 한신은 도박의 결과까지 설계했다 — 무모함과 치밀함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한신은 사로잡은 이좌거를 정중히 대접하며 조언을 구했다. 이좌거는 "지친 병사로 연나라를 무리하게 치지 말고, 위세를 보여 항복을 받으라"고 조언했고, 한신이 이를 따르자 연나라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무력의 천재가 책략가의 지혜까지 받아들인 것이다. 한신은 위·대·조·연을 차례로 평정하며 거의 혼자 힘으로 북방 전체를 한나라의 것으로 만들었다.

짚고 넘어가기 — 유방의 견제

그런데 유방은 한창 싸우는 한신에게서 반복적으로 정예병을 빼앗아 형양으로 보내게 했다. 한신이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때마다 한신은 새로 병사를 징집해 훈련시켜야 했다. 천하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명장이 끊임없이 군권을 빼앗기는 이 구도는, 훗날 한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고하는 복선이었다.

제나라 공략에서는 또 다른 일화가 나온다. 유방의 사신 역이기가 세 치 혀로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내자, 한신은 진군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책사 괴철이 "조서가 내려오지 않았는데 어찌 멈추느냐, 유생 하나의 공이 대장군의 공보다 위에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부추기자, 한신은 방비 없던 제나라를 기습해 평정했다. 속았다고 여긴 제왕은 역이기를 삶아 죽였다. 항우가 구원군으로 보낸 명장 용저(龍且)의 20만 대군마저, 한신은 강물을 막았다 터뜨리는 수공(水攻)으로 격파했다. 항우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제16장사면초가와 해하

한신이 북방과 제나라를 평정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형양에서 항우와 맞선 유방은, 진평의 이간책으로 항우의 진영을 안에서 흔들었다. 유방이 황금 4만 근을 풀어 "항우의 부하 장수들이 유방과 연합해 항우를 멸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의심 많은 항우는 부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평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초나라 사신이 오자 진수성찬을 차렸다가, "범증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항우의 사신이었구나" 하며 일부러 초라한 밥상으로 바꿔 내놓았다. 사신의 보고를 들은 항우는 가장 충직한 책사 범증마저 의심했다. 실망한 범증은 사직하고 떠나다 등창이 나 죽었다. 경포에 이어 항우의 가장 뛰어난 책사까지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핵심 메시지 — 항우 몰락의 핵심

항우는 모든 전투에서 이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 핵심은 "사람을 품지 못함"이었다. 한신과 경포 같은 인재를 잃고, 범증 같은 충신마저 의심으로 내쫓았다. 반면 유방은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한신·소하·장량·진평·경포를 끌어모았다.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인재를 모으고 쓰는 능력의 차이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것이다. 진평의 이간책이 통한 것은 항우의 의심하는 성정이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형양이 함락될 위기에 몰리자 유방은 또 한 번 기지로 빠져나왔다. 진평이 여자 2000명에게 갑옷을 입혀 동문으로 내보내고 장군 기신(紀信)을 유방으로 위장시켜 항복하는 척하게 하자, 초나라 병사들이 구경하러 동문으로 몰린 사이 유방은 서문으로 탈출했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안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한 충신의 희생이 유방을 또 살린 것이다.

이후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동쪽에서는 팽월이 게릴라전으로 초나라의 보급로를 끊었다. 대부분의 식량을 후방에서 조달해야 하는 항우에게 이는 치명적이었다. 항우는 팽월을 치러 동쪽으로 갔다가 유방이 성고를 빼앗으면 다시 서쪽으로 달려오는 식으로, 사방에서 갉아먹히며 지쳐 갔다. 오창(敖倉)의 식량을 확보한 유방과 달리, 초나라 군은 군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조급해진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 태공을 도마 위에 세우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유방의 대답은 그의 성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대와 나는 의형제가 되기로 했으니, 내 아버지는 곧 그대의 아버지다. 기어이 삶겠다면 나에게도 국물 한 그릇을 나눠 달라." 항백이 만류해 태공은 죽음을 면했다. 항우가 일대일 결투를 제안하자 유방은 "나는 힘이 아니라 머리로 싸운다"며 거절하고, 도리어 항우의 열 가지 죄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약속을 어기고, 의제를 죽이고, 항복한 병사 20만을 생매장한 죄 등이었다. 항우는 반박하지 못하고 매복한 궁수로 유방의 가슴을 쏘았으나, 유방은 치명상을 숨기려 발가락을 어루만지며 연기했다.

마침내 항우는 한신마저 용저를 죽였다는 소식에 두려워졌다. 모든 전투를 이기고도 사방에서 포위된 항우는, 식량이 떨어지자 유방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홍구(鴻溝)를 경계로 서쪽은 한, 동쪽은 초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홍구 분계는 오늘날 장기판의 초(楚)·한(漢) 경계의 유래가 되었다. 유방의 부친과 아내가 돌아왔고, 항우는 동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지금 항우를 보내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화근을 남기는 것"이라며 추격을 촉구했다. 유방은 곧바로 항우를 쫓았다. 한신과 팽월에게 땅을 떼어 주어 합류시킨 뒤,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포위했다. 항우의 병력 10만에 맞서 한신의 선봉만 30만이었다.

한신은 직접 항우와 맞붙었다가 후퇴하는 척하며 양 날개로 좌우를 치는 학익진으로 초나라 군을 삼면에서 포위했다. 항우는 겨우 달아났으나 남은 군대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날 밤, 항우를 포위한 한나라 진영에서 사방으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항우는 탄식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 땅을 다 차지했는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사면초가(四面楚歌), 곧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 노래라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 완전히 고립되어 도움받을 데 없는 처지를 가리킨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때가 불리하니 추(騅)마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하랴,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 항우, 마지막 밤의 노래

패배를 직감한 항우는 애첩 우희(虞姬)와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비통한 노래를 불렀다. 다음 날 그는 800명과 함께 포위를 뚫었고, 추격을 피해 동성(東城)에 이르렀을 때 따르는 병사는 28명뿐이었다. 항우는 "8년 동안 70여 차례 싸워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오늘 곤경에 처한 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한 뒤, 혼자 백여 명을 죽이며 다시 포위를 돌파했다.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배를 대며 강을 건너 재기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항우는 웃으며 거절했다. "강동의 자제 8000명을 데리고 강을 건넜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설령 강동 부형이 나를 왕으로 삼아준들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도망을 포기한 항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혼자 수백 명을 죽이는 괴력을 보인 뒤, 옛 부하에게 자기 목의 현상금을 베풀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비유로 보기 —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다"

죽는 순간까지 항우는 "내가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했다. 이 말이 그의 본질이다. 그는 전술적으로는 무적이었으나, 패배의 원인을 자신의 사람 쓰는 방식이나 잔혹함에서 찾지 못했다. 실패를 외부(하늘)로 돌리는 한, 어떤 천재도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반면 유방은 자신이 한신·소하·장량만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들을 썼다. 자기 한계를 아는 평범함이, 자기 한계를 모르는 천재를 이긴 것이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마침내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뤘다. 그는 한때 숙적이던 항우를 위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고 눈물을 보였으며, 남은 항씨 일족을 벌하는 대신 열후에 봉하고 유씨 성을 하사했다. 그리고 같은 해, 다른 제후왕들이 바치는 존호를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 그가 세운 한(漢)나라는 이후 약 400년간 중국을 다스리게 된다.

제17장토사구팽, 공신의 최후

황제가 된 유방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항우를 이긴 비결을 묻자, 그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군량을 공급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늘 이기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호걸을 능히 부릴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유방, 즉위 후 잔치에서

유방은 자신이 개별 능력에서는 부하들만 못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 — 그것이 그의 진짜 재능이었다. 항우가 "필부지용"으로 혼자 싸웠다면, 유방은 천재들을 조율하는 지휘자였다.

그러나 평화는 공신들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누구보다 한신의 무서움을 잘 알던 유방은, 천하를 제패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기원전 201년,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순행을 가장해 마중 나온 한신을 사로잡았다. 결박당한 한신은 탄식했다.

교활한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고,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을 거두며, 적국을 깨뜨리면 모신(謀臣)이 죽는다 했더니, 천하가 평정되니 나도 삶기는구나. 한신
고사 —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토사구팽은 본래 월나라 책사 범려가 남긴 말로 전한다. 한신이 이를 자신의 처지에 빗대 인용한 뒤, 이 고사는 "필요할 때 쓰고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버리는" 권력의 비정함을 가리키는 대표적 표현으로 남았다. 한신은 군권을 빼앗긴 채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되었다.

강등된 뒤에도 한신은 위협적이었다. 한번은 유방이 "그대는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는가" 묻자 한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다다익선·多多益善)"라고 답했다. 유방이 "그렇게 잘났으면서 어찌 내게 붙잡혔는가" 묻자, 한신은 "폐하는 군사를 거느리는 재능 대신 장수를 거느리는 재능이 있으십니다"라고 답했다. 다다익선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 군사를 다루는 한신의 자부심과, 사람을 다루는 유방의 능력이 한 대화에 담겨 있다.

공신들의 최후는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기원전 197년 조나라 상국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 사건과 연루되어 한신·팽월·경포가 차례로 제거되었다. 한신은 진희와 내응했다는 혐의로 황후 여치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괴철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일개 아녀자에게 속았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일찍이 괴철은 한신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눠 독립하라 권했으나, 한신은 유방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해 거절했었다. 용병술은 천하제일이었으나 처세술은 엉망이었다는 평가가 따르는 이유다.

비유로 보기 — 능력과 처세는 다른 기술이다

한신은 전장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으나, 정치판에서는 번번이 당했다. 군대를 다루는 능력과 권력 관계를 다루는 능력은 전혀 다른 기술이다. 한신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수록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는 정치의 역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독립할 힘이 있을 때는 의리를 지켜 머물렀고, 의심받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가장 유능한 자가 가장 위험한 자가 되는 구조 안에서, 능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팽월은 누명을 쓰고 처형된 뒤 시신이 소금에 절여져 전국 제후에게 보내졌다. 반란하지 말라는 경고였으나, 이는 역효과를 냈다. 한신에 이어 팽월마저 죽자, 다음 차례가 자신임을 직감한 경포가 기원전 195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유방은 직접 군을 이끌고 경포를 격파했으나, 이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원래 왕으로 봉해졌던 공신들이 하나둘 제거되고, 그 자리에 유방의 일족과 아들들이 들어섰다. 유방은 죽음을 앞두고도 태자 교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본부인 여치의 아들 유영(劉盈) 대신, 총애하던 척희(戚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여치는 장량의 조언에 따라, 유방이 존경하던 네 은자(상산사호·商山四皓)를 태자 곁에 모셔 왔다. 태자가 천하의 현자들을 따르게 한 것을 본 유방은, "날개가 다 자란 새는 어찌할 수 없다"며 태자 교체를 단념했다.

기원전 195년, 한나라의 황제 유방이 세상을 떠났다. 통일 후 공신들에게 한 행동 때문에 그는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맨손으로 황제에까지 오른 그가 있었기에, 중국은 오랜 전란 끝에 평화를 되찾았다. 유방이 죽자 황제의 어머니가 된 여치가 실권을 쥐었다. 그는 척희에게 끔찍한 보복을 가하고, 친척을 요직에 앉혀 15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씨 천하도 결국 여치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살아남은 자 장량 — 봉지 사양·은퇴 소하 — 후방·행정으로 신임 유지 토사구팽된 자 한신 — 강등 후 처형 팽월 — 처형, 시신 효수 경포 — 반란 후 패사 장도·한왕 한신 등 — 차례로 제거 그 자리에 유방의 일족·아들들이 왕으로 봉해짐
천하 평정 후 — 무력을 쥔 이성(異姓) 공신은 제거되고, 유씨 종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제18장인물들, 그 빛과 그림자

초한지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등장인물 대부분이 뚜렷한 장점과 그만큼 뚜렷한 약점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그 결함이 곧 운명을 결정했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의 충돌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유방 — 매력으로 황제가 되다

건달에서 황제까지 오른 유방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을 끄는 매력과 인재를 알아보고 부리는 능력이었다. 자신이 한신·소하·장량만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썼다. 그러나 그는 오만했고 배은망덕했다. 위급할 때 자식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천하를 얻자 가장 먼저 공신들을 제거했다. 자신을 황제로 만든 한신을 끝내 의심하고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다.

항우 — 가장 강했으나 가장 외로웠던 자

전술적으로 항우는 무적이었다. 거록에서 최강 진나라 군을 격파했고, 팽성에서 3만으로 56만을 무너뜨렸으며, 죽기 직전까지 70여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잔인했고, 멀리 내다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품지 못했다. 항복한 20만을 생매장하고, 충신 범증마저 의심으로 내쫓았다. 죽는 순간까지 패배의 원인을 "하늘"에서 찾은 그는, 자신의 한계를 끝내 보지 못한 채 31세에 스러졌다.

한신 — 전장의 천재, 정치의 패자

가랑이 밑을 기던 무명에서 천하의 명장이 되어 위·조·연·제를 평정하고 해하에서 항우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전장에서 한 번도 진 적 없던 그는 정치판에서 번번이 당했다. 독립할 힘이 있을 때는 의리를 지켜 머물렀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수록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끝내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그의 최후는, 능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권력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소하·장량 — 살아남은 지혜

소하는 보물 대신 천하의 명세서를 챙겼고, 후방에서 묵묵히 행정과 보급을 책임져 유방의 신임을 잃지 않았다. 장량은 결정적 순간마다 계책을 내고도 봉지를 사양하고 물러날 때를 알았다. 무력을 쥐지 않았기에, 그리고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토사구팽을 면했다. 한신이 끝내 배우지 못한 처세의 지혜를, 이들은 알고 있었다.

전체를 꿰뚫는 한 줄

진은 가장 강한 법과 군대로 천하를 통일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15년 만에 무너졌다. 항우는 가장 강한 무력으로 모든 전투를 이겼으나, 사람을 품지 못해 패망했다. 유방은 가장 약했으나, 사람을 알아보고 모아 천하를 얻었다. 초한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하나다 — 힘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천하의 향방을 결정한다.

진의 천하통일에서 한의 건국까지, 그리고 그 한이 다시 공신들의 피 위에 안정을 찾기까지 — 이 길고 격렬한 이야기는 영웅 신화가 아니라 결함 있는 인간들의 충돌사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들의 빛과 그림자에서 사람과 권력에 관한 오래된 교훈을 읽는다.


본 보고서는 진의 흥기에서 한의 건국과 그 직후까지를 사건의 흐름에 따라 정리한 통사이다. 등장하는 일화와 고사성어, 인물 평가는 후대에 다양한 해석과 이설이 존재하며, 연대와 세부 사실에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