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줄기로 본 5천 년 세계사
역사는 세부에서 길을 잃기 쉽다. 먼저 전체의 골격을 잡아 두면, 흩어져 있던 사건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이 글은 문명의 탄생에서 오늘의 초강대국까지, 세계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시대별로 꿰어 정리한 것이다.
인류의 기록된 역사는 대략 5천 년에 이른다. 이 방대한 시간을 한 사건씩 따라가면 금세 지치고, 왜 그 일이 그때 일어났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은 순서를 뒤집어 본다. 잎과 가지를 보기 전에 줄기부터 본다는 뜻이다. 큰 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문명이 강가에서 태어나고, 도시가 제국으로 자라며, 제국은 비슷한 방식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다시 일어선다. 그 반복 위로 전염병과 항해, 화약과 인쇄술 같은 충격이 이따금 끼어들어 흐름의 방향을 바꾼다.
아래의 시대 구분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성격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어떤 시대는 수천 년이고 어떤 시대는 두 세기에 불과하지만, 흐름을 읽는 데에는 길이보다 결이 더 중요하다.
PART 1문명의 탄생: 강이 도시를 키우다
가장 오래된 문명은 기원전 40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를 가리킨다. 지금은 메마른 땅이지만 당시에는 강의 정기적인 범람이 흙을 비옥하게 만들었고, 그 풍요 위에서 수메르 문명이 일어섰다. 우루크를 비롯한 도시가 세워졌고, 바퀴와 벽돌,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 최초의 문자라 할 쐐기문자가 이곳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를 전후해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집트는 나일 강을 따라,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을 따라, 중국 문명은 황허를 따라 일어섰다. 이 넷을 흔히 4대 문명이라 부르지만, 이는 강을 낀 큰 농업 문명을 묶은 편의적 분류일 뿐, 인류 초기 문명이 이 넷뿐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초기 문명은 모두 큰 강을 끼고 태어났다. 강은 마치 거대한 천연 수도관이자 비료 공급원이었다. 해마다 범람한 강물은 상류의 양분을 실어 와 농경지에 깔아 주었고, 잉여 곡식이 생기자 모두가 농사만 짓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남는 손이 생기면서 신관, 장인, 군인, 관리 같은 분업이 가능해졌고, 분업이 곧 문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60년 무렵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세워졌다. 높이 약 146미터의 이 거대한 무덤은 이후 약 3,800년 동안 인간이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표면이 거칠지만, 완성 당시에는 매끄러운 흰색 석회암으로 덮여 햇빛에 빛났다.
기원전 1274년에는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남은 가장 오래된 전투 가운데 하나인 카데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서아시아 강국 히타이트가 시리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맞붙은 싸움이었는데, 양쪽 모두 자기편의 승리라고 기록을 남겼다. 결말이 분명치 않았던 이 충돌은 훗날 알려진 가장 오래된 국가 간 평화조약으로 이어졌다.
한 시대를 통째로 무너뜨린 붕괴
기원전 1200년 무렵,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에서 번성하던 문명들이 한 세대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거의 동시에 무너졌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과 서아시아의 히타이트가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집트와 아시리아도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원인은 지금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침입자 집단인 이른바 바다 민족의 공격, 잇따른 가뭄과 기근, 지진, 그리고 교역망 단절이 한꺼번에 겹친 복합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의 문명들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았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구리와 주석이 필요했는데, 주석은 멀리서 들여와야 하는 귀한 자원이었다. 교역으로 연결된 이 체계에서 한 곳의 톱니가 빠지자, 멀쩡하던 다른 톱니들까지 차례로 멈춰 섰다. 개별 문명이 약해서가 아니라, 연결망 자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함께 주저앉은 셈이다.
붕괴 이후의 공백을 새 민족들이 메웠다. 오늘날 레바논 일대에 자리잡은 페니키아인은 해상 교역으로 번성하며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훗날 로마와 맞붙는 카르타고였다. 페니키아인이 쓰던 문자는 그리스로 건너가 알파벳의 뿌리가 되었다. 한편 유일신을 믿었던 유대인은 가나안 땅에 자리잡아, 기원전 1000년 무렵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PART 2고전 고대: 사상과 제국이 함께 자라다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동양과 서양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직접 교류는 드물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인류사의 두 축을 빚어 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가 들어섰고, 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기원전 8세기 이후 수많은 제후국이 다투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500년 가까이 이어진 이 전란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가 등장해 유교와 도교 같은 동양 철학의 뿌리를 놓았다.
거의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그리고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활동했다. 멀리 떨어진 문명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근본적인 사유를 쏟아낸 이 시대를 가리켜 흔히 축의 시대라 부른다.
서아시아에서는 패권이 빠르게 손바뀜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군림하던 아시리아는 잔혹한 통치로 적을 양산한 끝에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에 무너졌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공중 정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시,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은 서아시아와 이집트를 아우르며 그때까지 인류가 본 가장 거대한 영역을 다스렸다.
거대 제국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은 마라톤과 살라미스에서 기적적으로 페르시아를 막아냈다. 고대 기록은 페르시아 병력을 수십만에서 수백만으로 적었지만, 이는 승리를 부풀리려는 과장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견해다.
균형은 곧 뒤집혔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세계를 장악했고, 그 왕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에 나서 불과 몇 해 만에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가 세운 대제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후 여러 갈래로 쪼개졌지만, 그리스 문화가 서아시아 깊숙이 퍼지는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같은 무렵 중국에서는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잇고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했으나, 가혹한 통치로 제국은 단명했고, 뒤이은 초한쟁패에서 유방이 승리해 약 400년을 이어갈 한나라를 세웠다.
PART 3제국의 두 축: 로마와 한
기원전 후 수백 년 동안 세계의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거대한 제국이 자리잡았다. 서쪽에는 로마가, 동쪽에는 한나라가 있었다. 두 제국은 직접 만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서고 비슷한 방식으로 무너졌다.
로마는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작은 도시로 출발했다. 한동안 왕이 다스렸지만, 폭정을 겪은 로마인은 기원전 6세기 말 왕을 쫓아내고 한 사람에게 권력이 쏠리지 않도록 설계한 공화정을 세웠다.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두 명 두어 서로 견제하게 했고, 임기를 1년으로 묶었다. 국정의 중심에는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있었고, 평민의 권익을 지키는 호민관에게는 강력한 거부권을 주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주인으로 올라서는 길목에는 카르타고가 있었다. 두 세력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포위 섬멸했다. 그러나 로마는 본토 결전을 피하고 거꾸로 카르타고 본거지를 공격하는 전략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기원전 202년 스키피오가 자마에서 한니발을 꺾었고, 기원전 146년에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같은 해 그리스까지 손에 넣으며 로마는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복의 그늘에서 로마 내부는 곪아갔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귀족은 부유해졌고 평민은 땅을 잃었다. 빈부 격차를 줄이려던 개혁이 거듭 좌절되자, 가난한 시민들은 국가보다 보상을 약속하는 군벌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카이사르가 그런 군벌이었다. 갈리아 정복으로 명성을 얻은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켰고,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압한 뒤 사실상의 독재 권력을 쥐었다. 그가 왕이 될 것을 우려한 이들에게 암살당한 뒤,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꺾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쳤고,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제정 초기 로마는 오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특히 기원후 96년부터 180년까지 다섯 명의 유능한 황제가 잇따른 시기에는 영토가 넓어지고 시민의 생활이 풍족해졌다.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동쪽의 한나라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오랜 분열을 끝낸 한은 북방의 흉노를 몰아내고 서역과 통하는 교역로를 열었다. 비단을 비롯한 중국 물품이 서쪽으로 흘러가고 서방의 물품이 들어오는 이 길이 뒷날 비단길로 불렸다. 수도 장안은 수십만이 북적이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제국이 넓은 땅을 오래 다스릴 수 있었던 비결은 영웅적 정복이 아니라 표준화였다. 잘 닦인 도로, 통일된 문자와 화폐, 명문화된 법,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관료제가 제국이라는 거대 기계의 부품이었다.
제국의 도로, 법, 화폐, 문자는 오늘날의 운영체제와 같았다. 서로 다른 지역과 민족이 같은 규격 위에서 움직이게 만든 공통 플랫폼인 셈이다. 일단 이 표준이 깔리면 새 영토를 편입하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 유럽이 오래도록 혼란에 빠진 까닭도, 모두가 의존하던 이 운영체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PART 4제국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거대한 제국도 영원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멀리 떨어진 제국들이 놀랄 만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쇠퇴는 유능한 황제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후 235년부터 약 50년 동안 무려 열여덟 명의 황제가 갈리는 군인황제시대에, 변방은 이민족과 페르시아의 침입에 시달렸고 경제와 민생은 무너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넷으로 나눠 다스리는 개혁으로 한숨을 돌렸고, 뒤이은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동방에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기원후 395년 제국은 동서로 영구히 갈라졌다. 결정타는 동쪽에서 왔다. 훈족에게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제국은 더 이상 이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 마침내 기원후 476년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로마의 건국자와 같은 로물루스였다.
동쪽의 한나라도 닮은 길을 걸었다. 황제의 권위가 약해지자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농단했고, 백성의 불만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이 비대해졌고, 유명무실해진 황실을 대신해 군벌들이 다투는 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삼국시대의 배경이다. 잠시 통일이 이뤄졌지만 곧 내전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다시 분열했다.
네 단계는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서로를 부른다. 오랜 전쟁과 무리한 토목, 지배층의 사치는 국고를 비운다. 재정이 쪼들리면 권력층은 한정된 몫을 두고 다투고, 계승 다툼과 파벌 싸움이 내부를 갈라놓는다. 분열은 변방 방어를 비우고, 그 틈으로 이민족이나 신흥 세력이 밀려든다. 외부 충격에 대응하느라 다시 재정이 바닥나며 악순환은 한 바퀴를 돈다. 한참 뒤의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잇따른 반란, 열강의 침략 속에 무너진 과정도 이 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개 단 하나의 적이 아니다. 재정, 계승, 군사, 외부 위협이라는 약한 고리들이 동시에 당겨질 때, 거대해 보이던 구조가 한꺼번에 풀린다.
PART 5유라시아를 뒤흔든 중세의 충격
고대 제국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힘이 솟았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했고, 그 사후 이슬람 세력은 놀라운 속도로 팽창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아울렀다.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후 스페인 지역은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의 영향 아래 놓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나라가 612년 100만이 넘는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참패하고 그 후유증으로 멸망했다. 뒤이은 당나라는 668년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무너뜨렸으나, 755년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은 훗날 세계의 전쟁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11세기 말에는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십자군을 일으켰다. 약 200년간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동방과의 접촉을 늘려 유럽의 시야를 넓히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몽골, 그리고 검은 죽음
13세기에는 초원에서 솟아난 힘이 유라시아 전체를 뒤흔들었다. 1206년 여러 부족을 통일한 칭기스칸의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러시아, 이슬람 세계를 차례로 굴복시키며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세웠다. 1241년에는 동유럽까지 진격해 폴란드와 헝가리 군을 격파했는데, 마침 본국에서 대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계 다툼을 위해 군을 돌렸다. 유럽이 정복을 면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우연 덕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더 큰 재앙은 군대가 아니라 병균이었다. 1347년 무렵 흑사병이 유럽에 상륙해 불과 몇 해 만에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를 앗아갔다. 같은 시기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넘게 이어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질병과 전쟁이 겹친 14세기는 유럽이 겪은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어둠 속에서 빛도 움텄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문화 운동으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거장을 낳았다. 한편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2천 년 가까이 이어진 로마의 마지막 후예인 동로마 제국이 마침내 사라졌다.
PART 6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다
15세기 말, 인류사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보다 앞서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닿았다는 증거도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신대륙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려,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었다. 1519년에는 마젤란의 함대가 출항해 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에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유럽보다 앞서 대양으로 나아간 것은 중국이었다.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는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까지 도달하는 대원정을 펼쳤다. 그러나 명나라는 곧 바다를 닫는 정책으로 돌아섰고, 거꾸로 후발 주자였던 유럽이 대양을 차지했다. 같은 기술을 손에 쥐고도 어디로 향했는가가 이후 수백 년의 판도를 갈랐다.
아메리카에 닿은 유럽인은 압도적 정복에 나섰다. 스페인은 우월한 화기를 앞세워 1521년 아스텍을, 1533년 잉카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원주민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무기가 아니라 천연두 같은 낯선 질병이었다. 면역이 없던 원주민 인구의 상당수가 전염병으로 사라졌다.
유럽 안에서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졌다. 한편 무적함대로 군림하던 스페인은 1588년 영국 해군에 패하면서 기울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영국이 이어받아 식민지 경쟁의 새 주역으로 떠올랐다.
PART 7변방에서 대륙으로: 러시아의 길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러시아는 어떻게 그 거대한 땅을 갖게 되었을까. 그 시작은 의외로 소박하다. 9세기경 동슬라브족이 흩어져 다투던 땅에 바랑인(바이킹 계열)의 일족 루스가 들어와 통치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882년 올레크가 남쪽의 키예프를 점령해 수도로 삼으면서 최초의 러시아 국가인 키예프 루스가 섰다. 988년 블라디미르가 비잔티움 제국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단순한 개종 이상의 선택이었다. 러시아가 아시아가 아닌 유럽 문명권에 스스로를 묶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성기를 누리던 키예프 루스는 내분으로 갈라졌고, 그 틈에 13세기 몽골이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함락되며 키예프 루스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러시아는 이후 약 2세기 반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른바 몽골의 멍에였다. 이 긴 예속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모스크바였다. 모스크바는 몽골에 철저히 협조하며 환심을 사는 동안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힘을 키웠다.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처음으로 몽골군을 꺾으며 불패의 신화에 금을 냈다.
- 882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 키예프 루스 성립
- 988블라디미르가 기독교 수용, 유럽 문명권에 합류
- 1240몽골의 키예프 함락, 약 2세기 반의 멍에 시작
- 1380쿨리코보 전투에서 몽골군 격파
- 1480이반 3세, 우그라 강 대치로 몽골의 멍에 종식
- 1547이반 4세, 정식으로 차르에 즉위
- 1582예르마크의 원정으로 시베리아 정복 개시
- 1639동진을 거듭한 끝에 태평양 연안 도달
1480년 모스크바의 이반 3세는 우그라 강을 사이에 둔 대치 끝에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영토를 단숨에 몇 배로 넓혔다. 그의 손자 이반 4세는 1547년 로마 황제를 뜻하는 차르라는 칭호를 처음 쓰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그는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해 동쪽으로 가는 길목을 열었고, 이를 기념해 모스크바에 성바실리 대성당을 세웠다.
러시아의 동진은 막힘없는 평원을 가로지르는 일과 같았다. 우랄산맥을 넘으면 시베리아는 이렇다 할 자연 장벽도, 맞설 만한 강력한 국가도 없는 광활한 빈터였다. 모피라는 값진 상품을 좇아 코사크 부대가 강을 따라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나아갔다. 저항이 약했기에 확장은 빨랐고, 17세기 한 세기 만에 영토가 두 배로 불어 마침내 태평양에 닿았다.
이반 4세 사후 러시아는 동란의 시기를 겪었지만, 1613년 로마노프 왕가가 들어서며 안정을 되찾았다. 이 왕가는 1917년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광활한 땅을 손에 넣은 러시아에 남은 과제는 후진성을 벗는 일이었고, 그 전환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어갔다.
PART 8식민지에서 초강대국으로: 미국의 길
미국은 불과 400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그 출발은 변변찮은 식민지였다. 스페인이 신대륙에 먼저 진출한 뒤, 후발 주자 영국은 여러 차례 실패 끝에 1607년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세웠다. 1620년에는 종교 박해를 피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닿았다. 이렇게 북부의 뉴잉글랜드와 남부의 농업 지대가 나뉘어 자랐고, 18세기 들어 열세 개의 식민지로 늘어났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남부 농장에는 흑인 노예가 비극적인 방식으로 끌려왔다.
프랑스와 벌인 식민지 전쟁에서 이긴 영국은 막대한 전쟁 빚을 식민지에 대한 과세로 메우려 했다. 더 이상 프랑스의 위협이 없어진 식민지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거쳐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했다. 1777년 사라토가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가 참전하면서 전세가 기울었고, 마침내 영국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어 1787년 헌법이 제정되며,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이 모습을 갖췄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실험이었다.
- 1607제임스타운 건설, 영국의 첫 영구 식민지
- 1776독립 선언
- 1803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영토가 두 배로
- 1846-1848멕시코 전쟁, 캘리포니아 등 서부 획득
- 1861-1865남북 전쟁, 노예제 폐지
- 1867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
- 1944브레턴우즈 회의, 달러가 기축통화로
- 1991소련 해체, 유일 초강대국으로
독립한 미국은 빠르게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영토를 단번에 두 배로 늘렸다. 유럽 전쟁에 몰두하던 나폴레옹이 관리하기 버거운 땅을 헐값에 넘긴 결과였다.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일대를 얻어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에 닿았고,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황무지로 여겨졌던 이 땅은 훗날 막대한 자원이 발견되며 가치가 뒤바뀌었다. 그러나 이 팽창의 이면에는 인디언 추방법과 강제 이주처럼 원주민에게 가해진 폭력이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안에서 터졌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1861년 남북 전쟁으로 폭발했다. 4년간 약 6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은 끝에 북부가 승리했고,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미국은 산업화라는 반전을 맞았다. 풍부한 자원과 밀려드는 이민자, 그리고 전국을 잇는 철도망이 맞물리며 미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미국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는 동안 미국 본토는 온전했고,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다. 1929년 대공황의 깊은 골을 지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중심이 되었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미국 달러가 유일한 기축통화로 채택되면서, 미국은 달러를 통해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힘까지 손에 넣었다.
기축통화란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 결제 언어와 같다. 모두가 달러로 거래하고 달러로 비축하게 되자, 달러를 찍어내는 나라는 다른 누구도 갖지 못한 지렛대를 쥐게 되었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이 통화의 힘이 전후 미국 패권의 보이지 않는 척추가 되었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양분되었다. 두 진영은 직접 맞붙는 대신 첩보전과 군비 경쟁, 그리고 대리전으로 겨뤘다. 1991년 소련이 갑작스럽게 해체되면서 냉전이 끝났고,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중국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고, 미국은 안팎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PART 9큰 줄기에서 읽히는 것들
5천 년을 한 줄기로 훑고 나면 몇 가지 결이 또렷해진다. 첫째, 흥망에는 패턴이 있다. 도시가 제국으로 자라고, 제국은 재정과 계승, 군사와 외부 충격이 맞물리며 비슷하게 무너진다. 로마와 한, 그리고 청이 그 닮은 길을 걸었다. 둘째, 한 사회를 멀리 끌고 가는 것은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라 표준과 제도다. 도로와 문자, 법과 화폐,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체계가 제국의 진짜 힘이었다.
그러나 셋째, 역사는 패턴만으로 짜이지 않는다. 흑사병이라는 병균 하나가 한 대륙의 인구 구조를 바꿨고, 멀리서 들려온 한 사람의 죽음이 몽골군을 유럽에서 돌려세웠다. 같은 항해 기술을 쥐고도 한쪽은 바다를 닫고 한쪽은 대양으로 나아가, 이후 수백 년의 판도가 갈렸다. 큰 줄기는 흐름의 방향을 일러주지만, 그 위에 끼어드는 우연이 종종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든다.
그래서 역사를 읽는 가장 실용적인 태도는 이런 것이다. 먼저 줄기를 잡아 흐름의 방향을 가늠하고, 그다음 세부로 들어가 그 흐름이 어디서 어떻게 굽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골격을 손에 쥔 채로 잎과 가지를 보면, 한때 막막하던 5천 년이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