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해부
한 무명의 사범학교 졸업생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는가. 1893년부터 1949년까지, 신화와 사실 사이를 다시 걸어본다.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오간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라는 위상은 중국 안에서 여전히 절대적이다. 동시에 그의 통치 아래에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그 사망자 규모를 두고는 추정치가 크게 갈리지만, 가장 높게 잡은 한 평전은 7천만에서 8천만 명에 이른다고 본다. 다만 이 최대치는 대부분 1949년 이후 대약진운동 기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학계의 일반 추정과는 차이가 크다는 점을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 글이 다루는 시기는 그 이전, 곧 마오가 권력을 잡기까지의 56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이 오랫동안 두꺼운 신화에 덮여 있었다는 점이다. 자료 대부분을 한쪽이 관리해온 탓에, 공식 서사는 마오를 민중을 사랑하는 청렴한 혁명가로, 대장정을 불굴의 영웅담으로 그려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공개된 소련 측 비밀문서와 수백 건의 증언을 토대로 한 수정주의 연구들은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을 빼앗고, 모스크바의 비호를 발판 삼아 경쟁자를 제거하며 권좌에 오른 한 인물의 이야기다.
이 글의 큰 골격 - 출생과 성장, 중국공산당 창건, 국공합작, 대장정, 옌안 시기, 국공내전 - 은 사료로 뒷받침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의 일부 자극적인 주장들은 특정 수정주의 평전의 해석으로, 주류 역사학계가 근거 부족을 이유로 반박하거나 미확정으로 보는 대목이다. 본문에서는 그런 지점마다 어느 정도까지가 정설이고 어디서부터 다툼이 있는지를 함께 표시했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湖南省) 사오산(韶山)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오산은 호랑이가 어슬렁거릴 만큼 외진 산골이었고, 마오 집안은 그곳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다. 아버지 마오이창(毛貽昌)은 부지런하고 셈이 밝아 빠르게 재산을 모은 부농이었다. 덕분에 마오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여덟 살에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책에 빠져 지낸 것은 평생의 습관이 되었지만, 성정은 만만치 않았다. 고집이 세고 스승에게 자주 대들어, 다닌 서당마다 쫓겨났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특히 험했다. 아버지는 농사일과 장부 정리를 가르치려 했으나 마오는 일을 멀리했고, 매를 들어가며 엄하게 다잡으려 할수록 원망만 깊어졌다. 한번은 손님 앞에서 아버지가 그를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이라 흉보자, 마오는 욕을 퍼붓고 연못가로 달아나 뛰어들겠다고 협박했다. 아들을 잃을까 두려운 아버지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약점으로 파고들어 자신이 이겼다는 식으로, 그는 이 일을 훗날까지 곱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향한 반감은 노년까지 이어졌다.
반면 어머니와는 가까웠다. 성품이 온화해 한 번도 그를 혼낸 적이 없었다는 어머니를, 마오는 깊이 따랐다. 1908년 열네 살 때 아버지의 강요로 네 살 연상의 여인과 첫 결혼을 했지만, 마오는 그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고 함께 산 적도 없다고 훗날 밝혔다. 그 여인은 결혼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마오가 자란 20세기 초 중국은 무너지는 옛 질서와 밀려드는 새 질서가 충돌하던 격동기였다. 유럽 열강과 일본의 침략 앞에 청(淸)은 속수무책이었고, 근대화 운동 속에서 과거제가 폐지되며 후난성에만 100개가 넘는 신식 학교가 들어섰다. 마오 역시 신식 학교에 진학했고, 곧 성도 창사(長沙)로 옮겨가 처음으로 고향을 벗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신문을 읽고, 구시대의 상징이던 변발을 잘랐으며, 나폴레옹과 표트르 대제, 링컨의 전기를 탐독했다.
1911년 청이 무너지고, 1916년 권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죽자 각지에서 군벌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열렸다. 그 와중인 1913년, 열아홉의 마오는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것도 이 학교에서였다. 이 시기 그가 남긴 글들에는 훗날의 행보를 예고하는 차가운 자기중심성이 또렷하다. 한 철학서 논평에서 그는 이타심을 도덕의 근거로 보는 통념에 거리를 두며, 개인은 결국 자신을 위해 산다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드러냈다고 한다. 평온한 시대보다 충돌과 격변에 끌리는 기질도 함께 엿보인다. 다만 이런 청년기 메모들은 인용 맥락이 제한적이라, 후대의 마오를 설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단정하기보다는 그 성향의 한 단면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1918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마오는 수도 베이징으로 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작은 방에서 여럿이 부대끼며 지냈다. 견디지 못하고 창사로 돌아온 그는 초등학교 역사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왔지만, 마오는 고향으로 가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대신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192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도 끝내 찾지 않았다.
학생운동에 발을 들이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던 마오는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초기 지도자 천두슈(陳獨秀)를 만났다. 천두슈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당 창건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초기 중국공산당이 소련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자금과 지령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소련 측 문서로 충분히 뒷받침된다. 천두슈를 통해 마오는 창사에서 공산주의 서점을 열고 당원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으며 차츰 공산주의자가 되어갔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이념이라기보다 실리에 가까웠다. 온건한 혁명을 지지한 프랑스 유학파 친구가 러시아식 폭력 혁명은 윤리적으로 잘못됐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 마오는 온건론이 비현실적이라며 일축했다.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고, 마오도 초대받았다. 그는 여비로 200위안을 받았는데, 당시 2년치 연봉에 맞먹는 거액이었고 출처는 러시아였다. 당대회는 회의라기보다 소련 요원들이 지령을 전달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1921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중국공산당이 쓴 자금의 약 94퍼센트가 러시아에서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천두슈조차 남의 돈을 받으면 그들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며 우려했지만, 마오는 거리낌이 없었다.
마오가 후난성 당대표가 되자 소련은 매달 170위안을 지급했고, 그의 삶은 단번에 바뀌었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하인이 딸린 저택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대표로서 성과는 빈약했다. 당원 모집도 노동조합 조직도 시원찮았고, 처음 얼마간은 친구와 서점 직원, 가족이 유일한 당원이었다. 1922년 광부들의 요청으로 광산을 찾았다가 며칠 만에 떠나며 광부들에게 질려버렸다고 보고한 일화는, 그가 노동자를 도울 생각이 애초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성과가 없자 그는 1922년 제2차 당대회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전환점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1923년 소련은 이제 막 생긴 공산당에 거대 조직인 국민당(國民黨)에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쑨원(孫文)이 이끄는 국민당은 군벌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하려 했고, 그러려면 자금과 무기가 필요했다. 소련은 쑨원을 도우며 중국 내 영향력을 키우려 했고, 공산당은 더 큰 국민당을 안에서 감시하는 일종의 트로이 목마였다.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다.
대부분의 당원이 반발했지만 마오는 재빨리 국민당에 입당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당적을 바꿀 준비가 된 그의 발 빠른 행동은, 소련 요원의 눈에는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비쳤다. 그 신임 덕에 마오는 천두슈의 보좌관에 올랐다. 그러나 공산당보다 국민당 일에 열심인 데다 이념 이해가 얕다는 의심이 겹치며, 한 소련 요원의 요구로 결국 해임된다. 1925년 그는 별일 없이 고향 사오산으로 돌아가 여덟 달을 보냈다.
다시 기회가 온 것은 그해 쑨원이 병사하면서였다. 좌파로 통하던 왕징웨이(汪精衛)가 후계 다툼 끝에 국민당 주석이 되었는데, 마오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마오는 곧장 광저우로 가 인맥을 발판으로 요직을 차지했다. 자신을 버린 공산당보다, 사상 검증이 느슨한 국민당에서 출세를 노리는 모습이었다.
1926년 국민당의 북벌(北伐)로 후난성을 포함한 북부가 점령되자, 소련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에서 공산주의 농민운동이 시작됐다. 억눌렸던 농민들이 부자를 공격하면서 후난성 곳곳이 혼란에 빠졌다. 이때 마오는 32일간 후난 농촌을 시찰했고, 이 경험이 그를 바꿔놓았다. 농민들이 지주를 잔혹하게 응징하는 현장을 지켜보며 그는 강한 흥분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폭력을 제지하기는커녕 방조하거나 부추겼고, 그 와중에 희생자가 다소 생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정작 농민에게 땅을 나눠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질서의 붕괴와 폭력 그 자체였다.
이 잔혹 행위는 국민당 내부, 특히 가족이 피해를 본 장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마침 1927년 4월, 베이징 당국이 소련 공관을 급습해 모스크바가 중국 정부를 전복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문건을 압수해 공개했다. 더는 좌시할 수 없게 된 국민당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4월 12일 공산당 숙청 명령을 내렸다. 상하이에서 수백 명이 살해됐고, 마오를 포함한 193명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직업군인 장제스는 소련 방문 경험을 통해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모스크바의 방식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숨기고 때를 기다린 터였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깨졌고, 마오에게는 도주 외에 길이 없었다.
장제스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공산당에 스탈린(Stalin)은 새 지령을 내렸다. 군대를 조직하고 농민 봉기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가장 큰 부대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난창(南昌)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민당군에서 끌어낸 약 2만 병력이었다. 이 혼란기에 마오는 자신만의 셈법을 세웠다. 능력을 의심받고 직책에서 해임되기까지 했던 그에게, 입지를 다질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군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마오는 후난성 봉기를 일으키겠다며 군대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봉기가 아니라 군대의 탈취였다. 1927년 9월 부대가 창사를 공격하다 크게 패하자, 그는 일부러 당 본부의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패잔병을 불러모아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쥐었다. 약 1500명을 이끌고 남쪽 징강산(井岡山)으로 향했지만, 험한 길에 지친 병사들이 흩어져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600명에 불과했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징강산은 화적(火賊)의 고장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던 두목과 손을 잡아 기지를 세웠지만, 이후 마오 부대의 행적은 화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민을 약탈하고, 공개 처형식을 열어 지주를 죽였다. 무엇이 악덕 지주인지조차 모르는 농민들에게 그 뜻을 설명해줘야 할 정도였고, 식용유나 닭 몇 마리를 가진 것만으로 처형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오는 주민들에게 처형을 의무적으로 지켜보게 했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공포 - 화적조차 굴복시킨 그 공포가, 그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첫 번째 도구였다.
이 시기 마오의 처신을 두고, 수정주의 연구는 하나의 반복 패턴이 작동했다고 정리한다. 더 큰 부대와 합류한 뒤 협박과 공포로 그것을 흡수하고, 당의 견제를 받으면 모스크바의 비호로 살아남아 다시 더 큰 부대를 노리는 식이다. 그가 권좌에 이르는 동안 이 패턴이 거듭 되풀이됐다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첫 적용 대상은 주더(朱德)였다. 1928년 난창 반란의 패잔병 약 4천을 이끌고 징강산에 합류한 그에게, 마오는 곧바로 부대 흡수 작업에 들어갔다. 결국 마오는 당의 대리인 자격으로 주더-마오쩌둥군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허쯔전(賀子珍)을 세 번째 아내로 맞았다. 두 번째 아내 양카이후이(楊開慧)가 아직 있었지만, 마오는 이미 연락을 끊은 뒤였다.
1931년 11월, 공산당은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을 수도로 삼아 그들만의 국가인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다. 모스크바는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혔지만, 실권은 당서기 저우언라이와 군 총사령관 주더에게 있었다. 정교한 조직 편성에 능했던 저우언라이의 통치 방식은, 화적처럼 다스려온 마오에게 훗날의 통치 모델이 된다. 그러나 주민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자금을 마련하려 농민을 착취하고 악덕 지주 색출을 멈추지 않은 결과, 공산당이 다스린 5년간 장시성에서만 최대 50만 명, 전체 인구의 약 20퍼센트가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15년 뒤 그곳을 찾은 한 소련 장교는 장시성 전역에 남은 공산당원이 한 명도 없다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다만 이런 인구 감소 수치는 추정 편차가 큰 영역으로, 규모 자체는 신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931년, 장제스는 마침내 공산당 섬멸 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게릴라 전술과 소련의 첩보 지원에 힘입어 공산당은 초기 공세를 막아냈지만, 1931년 7월 장제스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자 상황이 급박해졌다. 공산당군의 열 배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마오에게 결정적인 행운이 찾아왔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이 터진 것이다. 만주를 다스리던 장쉐량(張學良)은 맞서 싸우지 말라는 무저항 명령을 내렸고, 일본은 만주 대부분을 손쉽게 장악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장제스는 군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섬멸 직전의 공산당을 살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이었다.
이후에도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공세를 이어갔다. 다섯 번째 공세에서 그는 2킬로미터를 전진할 때마다 요새를 쌓아 포위망을 서서히 좁히는 전술을 썼다. 패색이 짙어지자 공산당 지도부는 1934년 10월, 수도 루이진을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대장정(大長征)으로 알려진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대장정은 공식 서사에서 불굴의 영웅담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수정주의 연구가 제기한 핵심 의문은 이것이다. 마오가 물자가 풍부하고 안전한 쓰촨성(四川省)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왜 험지인 구이저우(貴州)와 윈난(雲南)으로 군을 돌려 4개월이나 행군을 늘렸는가. 이 해석에 따르면, 답은 군사적 필요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당시 쓰촨성에는 8만 대군을 거느린 실력자 장궈타오(張國燾)가 있었다. 마오는 지금 상태로 합류하면 당의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먼 길로 우회시켰다는 것이다. 그 무의미한 강행군에서 8만이던 병력은 1만으로 줄었고, 그 사이 마오는 측근 뤄푸(洛甫)를 당의 우두머리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권력 재편의 분수령이 된 회의가 1935년 1월의 쭌이회의(遵義會議)다.
쭌이회의를 계기로 마오의 당내 위상이 결정적으로 올라간 것은 정설이다. 그러나 대장정 전체가 마오의 권력욕이 빚은 사기극이며 우회가 순전히 개인적 계산이었다는 해석은, 한 수정주의 평전의 강한 주장이다. 주류 학계는 당시 국민당군의 실제 압박, 보급선 확보, 지도부 내 노선 갈등 같은 군사적·전략적 요인을 더 무겁게 본다. 같은 사건도 동기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대장정 초반, 공산당은 겹겹의 방어선을 거의 공격받지 않고 통과했다. 군벌을 매수한 구간도 있었지만, 국민당 정규군마저 강을 건너는 공산당을 지켜보기만 한 대목은 석연치 않다. 4차 방어선을 건너고 나서야 장제스는 공격을 지시했고, 그 결과 절반이 발이 묶여 병력이 반토막 났다. 그럼에도 장제스가 의도적으로 도주를 허용한 정황은 짙다.
그 이유로 두 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영토 야심이다. 당시 구이저우, 쓰촨, 윈난은 장제스에게 굴복하지 않은 독자 세력권이었다. 공산당을 이 지역으로 몰아넣으면, 위협을 느낀 군벌들이 장제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고, 그는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그 땅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구이저우는 이 시나리오대로 국민당 손에 들어왔다. 다른 하나는 더 사적인 동기다. 장제스의 외아들 장징궈(蔣經國)는 1925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가 스탈린에게 사실상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 공산당을 살려둠으로써 아들을 돌려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장징궈가 소련에 장기 체류하며 인질 처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제스가 그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또는 서부 영토를 차지하려고 공산당의 생존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해석은 정황 추론에 가깝다. 사료가 결정적이지 않아 학계에서도 단정하지 않는 영역이다.
한편 마오는 도주 중에도 권력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당 일인자 보구(博古)에게 불만을 품은 뤄푸, 왕자샹(王稼祥)과 손잡아 3인조를 이뤘고, 가마에 누워 책을 읽으며 이동하는 동안 일반 병사들은 죽음의 행군을 견뎌야 했다. 지도부에게 행군은 견딜 만한 선택이었지만 말단 병사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대장정이 끝날 무렵 당원 대부분은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무수히 스러졌다.
마오를 권력의 정점으로 떠받친 가장 유명한 무용담이 다두허(大渡河)의 루딩교(瀘定橋) 도하다. 공식 서사에 따르면, 건너편 적의 기관총 진지를 뚫고 결사대 스무 명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 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수정주의 연구는 이 장면이 조작에 가깝다고 반박한다. 당시 군 교신 기록상 국민당군은 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현지 주민들조차 그날의 격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위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전투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대장정을 상징하는 신화로 가공되어 강력한 선전 도구로 쓰였다는 점이다.
1935년 6월, 마오는 마침내 쓰촨성에서 장궈타오의 8만 대군과 합류했다.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장궈타오를 마오 못지않게 야심만만한 인물로 묘사했다. 두 세력이 만난 뒤에도 마오의 최우선 과제는 승리가 아니라 장궈타오의 무력화였다고 전한다. 그는 장궈타오의 주력을 악명 높은 늪지대로 몰아넣었고, 그곳에서 전염병이 돌며 병력이 크게 소모됐다. 그곳을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고 떠올린 생존자도 있었다. 결국 당이 둘로 갈라진 듯 보였지만, 이는 오히려 마오에게 기회였다. 더 큰 병력을 가진 장궈타오가 국민당의 집중 공격을 받는 동안, 마오의 부대는 거의 공격받지 않았다.
1935년 10월, 마오가 산시성(陝西省)의 공산당 기지에 도착하며 대장정이 끝났다. 1년에 걸쳐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한 8만 군대는 수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마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스크바와의 교신망 복구였고, 모스크바는 이때 처음으로 그를 공산당의 우두머리로 인정했다. 병력 대부분을 잃은 대가로 당의 통치권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장정은 공산당을 구한 행군이라기보다, 마오 개인을 위한 행군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참고로 산시성 기지의 실질적 지도자 중 한 명이던 시중쉰(習仲勛)은 훗날 중국 국가주석이 되는 시진핑(習近平)의 아버지다. 그는 기지 통치권을 마오에게 넘겼고, 또 다른 지도자 류즈단(劉志丹)은 이듬해 의문의 전사를 당했다.
1936년 산시성에 도착한 장궈타오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부하들은 흡수되거나 숙청됐고, 가족까지 괴롭힘을 당했다. 1938년 그는 공산당을 떠나 국민당으로 갔고, 훗날 캐나다로 망명해 1979년 토론토의 한 양로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산시성 구석에 가둬 천천히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1936년 12월, 봉쇄 임무를 맡은 장쉐량이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에 맞서 싸우자며,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러 온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이다.
마오는 장제스를 죽이면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며 처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판단은 달랐다. 장제스가 사라지면 중국이 내전에 빠지고 그 틈에 일본이 소련 국경까지 위협하리라 본 그는, 장제스를 죽이지 말고 복귀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이 장제스를 중국 단결의 유일한 인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제스는 공산당과 함께 일본에 맞서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이것이 제2차 국공합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괴멸 직전이던 공산당이었다. 장제스의 총구가 일본을 향하면서, 죽음의 문턱에 있던 공산당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신병을 모집할 시간을 벌었다. 게다가 공산당군은 국민당 정부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어 합법적 지원까지 받게 됐다.
그러나 마오가 장제스를 무너뜨릴 진짜 기반을 닦은 것은 총칼이 아니라 이미지였다. 1936년 옌안(延安)을 찾은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쓴 책은 마오를 소박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지도자로, 굶주림과 죽음으로 점철된 대장정을 위대한 영웅담으로 그렸다. 이 책은 해외는 물론 중국 안에서도 공산당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감명받은 수많은 청년이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부패한 국민당과 달리 청렴하고 평등하며 민중을 위한다는 인상이 강렬했다.
막상 옌안에 도착한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구호일 뿐, 고위 간부는 전용 식당에서 고기와 흰쌀밥을 먹고 일반 병사와 학생은 훨씬 적게 배급받는 노골적인 계급사회였다. 옷과 약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었다. 이탈은 탈영으로 간주돼 처형될 수 있었다. 작가 왕스웨이(王實味)는 간부는 풍족하게 먹는데 아픈 병사에게는 한 그릇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글로 비판했고, 청년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1942년 마오는 정풍운동(整風運動)이라는 대규모 사상 개조 캠페인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사상 교육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비판의 목소리를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 왕스웨이는 투옥됐다가 처형됐다. 마오는 사소한 증거만으로 수천 명을 체포해 옌안의 동굴 감옥에 가뒀다. 사람들은 과거에 무슨 말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낱낱이 기록한 자백서를 써야 했고, 그것을 토대로 서로를 고발해야 했다.
이 압박의 목적은 실제로 간첩을 잡는 데 있지 않았다. 핵심은 공포의 조성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고발자가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의견 교환조차 꺼리게 됐고, 결국 생각하는 행위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독립적 사고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2년간 이어진 이 공포정치 속에서 청년들은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변해갔다. 같은 시기, 마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소련 유학파 왕밍(王明)이 건강 악화로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가 복용하던 약에서 독성 물질이 검출됐고 그 배후에 마오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한 평전의 해석으로 확증되지 않은 영역이다. 유능하고 인망 높던 저우언라이마저 정풍의 파도 속에 공개 자아비판을 했고, 그 뒤로 평생 마오에게 절대복종했다.
1945년 4월, 마오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당의 모든 최고기관 주석으로 선출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옌안 일대에서 공산당이 대규모로 아편을 생산해 그 수익을 당 운영 자금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도덕과 평등을 내세운 조직이 뒤로는 마약 무역으로 정권을 지탱한 셈인데, 이 특수 무역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근거가 갖춰진 편이다. 그럼에도 옌안은 1954년 한 방문자가 극심한 빈곤과 열악함을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았다.
1945년 8월, 소련이 만주를 공격하자 일본 관동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일본은 항복했다. 14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끝났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즉각 철수하지 않고, 일본군이 남긴 막대한 무기와 장비 - 소총과 기관총은 물론 야포, 탄약, 탱크, 항공기까지 - 를 공산당에 넘겨주었다. 이는 국민당에 비해 열세이던 공산당군의 전력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만주는 중국 중공업의 약 70퍼센트가 집중된 전략 요충이었기에, 마오는 만주를 차지하면 승리가 보장된 것이라고 했다.
소련은 국민당군의 만주 진입을 지연시켜 공산당이 거점을 다질 시간을 벌어주었다. 일본에 협력했던 만주국 병력 약 20만이 공산당에 흡수되며, 만주로 파견된 6만의 공산당군은 30만으로 불어났다. 인접한 북한도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다만 소련과 북한이 제공했다는 무기의 구체적 수량은 자료에 따라 편차가 크므로, 규모를 단정하기보다 지원이 상당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편이 정확하다.
1946년 5월 소련군이 철수하자 국민당군이 만주로 진격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국민당군 앞에서 공산당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 몇 주 만에 하얼빈을 제외한 만주의 주요 도시가 국민당 손에 들어갔다. 국민당의 승리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오에게 도움이 왔다. 미국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장군을 특사로 파견했다. 마셜은 장제스 친인척의 광범위한 부패 때문에 이미 그에게 깊은 불신을 품고 있었다. 1946년 옌안을 방문한 마셜 앞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자신들을 평화주의자, 나아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으로 포장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정확히 아는 연기였다. 결국 마셜은 장제스를 압박해 정전을 이끌어냈다.
당시 공산당은 만주의 마지막 보루 하얼빈을 잃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만주 전체를 빼앗길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정전이 숨 돌릴 틈을 주었다. 약 4개월의 정전 동안 공산당은 대규모로 신병을 모집하고 부대를 재정비하며 전력을 끌어올렸다. 정전이 끝나고 국민당이 다시 마주한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상대였다. 이 정전은 공산당에 결정적 시간을 안겨준 셈이다.
공산당은 수십 년에 걸쳐 국민당 내부 깊숙이 첩보망을 구축해두었다. 참모, 측근 비서, 군수 장교, 심지어 일부 사령관까지 침투 대상이었다. 국민당이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면 그 내용이 시행 전에 공산당에 전달되곤 했다. 장제스는 내부에 적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부패를 뿌리 뽑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의심이 의심을 낳으며 국민당군 내부의 결속은 빠르게 무너졌다.
공산당이 국민당 안에 폭넓은 간첩망을 운영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특정 인물 - 예컨대 옌안 공방의 후쭝난(胡宗南) 장군이나 국민당 선전부의 사오리쯔, 중일전쟁을 촉발했다는 장즈중 같은 이들 - 이 공산당의 고정 간첩이었다는 개별 주장은 확증과 추정이 뒤섞여 있어,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 반면 후쭝난의 비서가 공산당 측 인물이었다는 사실처럼, 잘 입증된 사례도 따로 있다.
마오가 장제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무자비함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그 과정의 희생을 개의치 않았다. 정풍운동으로 내부 이탈 가능성을 제거하고 상호 감시 체제를 만들어, 국민당과 달리 마오의 조직에는 간첩이 침투하기 어려웠다. 이 무자비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1948년 창춘(長春) 포위전이다.
린뱌오(林彪)가 이끄는 공산당군은 약 50만 민간인이 사는 창춘을 완전히 봉쇄해, 그 안의 사람들을 굶겨 죽이는 전략을 택했다. 식량은 물론 어떤 물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굶주림에 탈출하려는 민간인마저 도시 안으로 다시 밀어넣었다. 민간인을 국민당군의 식량을 소진시키는 도구로 쓴 것이다. 5개월의 봉쇄 끝에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추정치는 자료에 따라 15만에서 30만 이상까지 갈린다). 결국 굶어 죽은 이들이 부자도 국민당원도 아닌 가난한 민간인 아니냐는 회의를 품은 병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창춘 함락으로 만주 전체가 공산당 손에 넘어갔다. 만주를 잃은 장제스는 본토에서도 주도권을 잃기 시작했다. 전쟁이 길어지며 국민당 정부 재정은 파탄 났고, 무분별한 화폐 발행으로 초인플레이션이 닥쳤다. 미국이 보낸 물자는 전선에 닿기 전에 중간 관료의 손에서 사라졌고, 보급이 끊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단 투항이 이어지며 병력과 무기가 통째로 공산당에 넘어갔다. 1949년, 승패는 사실상 결정됐다. 장제스는 마지막 전력과 국고, 수많은 문화재를 배에 싣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중국 대륙이 마오쩌둥의 손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56년의 여정을 한 줄로 줄이면, 외진 산골의 부농 아들이 무자비함과 외부의 비호를 발판 삼아 대륙의 주인이 된 이야기다. 다만 이 글에서 따라온 서사는 그 과정을 가장 냉혹하게 해석한 한 갈래의 시선이라는 점을 거듭 분명히 해둔다. 마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념 없는 권력 기계로 환원하는 관점은, 그 자체로 강한 해석이지 중립적 정설이 아니다. 군 흡수의 정황, 모스크바의 거듭된 비호, 옌안의 공포정치처럼 사료로 잘 뒷받침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대장정 사기극론이나 루딩교 조작설, 왕밍 독살설, 개별 간첩설처럼 근거를 더 따져야 하는 부분도 또렷이 갈린다.
그럼에도 신화를 걷어낸 자리에서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마오의 부상은 노선의 옳음이나 대중의 자발적 지지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결정적 길목마다 작동한 우연과 외부 변수 - 일본의 침공, 시안사건, 마셜의 정전, 소련의 무기 - 가 거듭 그를 살렸다는 점이다. 권력은 종종 가장 정교한 서사를 가진 자가 아니라, 서사를 가장 잘 통제한 자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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