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현대사 / 깊이 읽기
하나의 좁은 땅을 둘러싼 종교와 민족의 충돌, 강대국이 남긴 모순된 약속, 그리고 대리전으로 번진 패권 경쟁. 오늘날 중동을 뒤덮은 세 갈래의 전쟁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한 그루의 나무다. 이 글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분쟁이 끝나지 않는 구조적 이유를 양측의 시선에서 차근차근 풀어낸다.
중동의 뉴스는 늘 복잡하게 들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는가 싶으면 이란이 등장하고, 시리아에서는 전혀 다른 세력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이 셋은 따로 노는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탄생, 그 주변 아랍 세계의 반발, 이슬람 종파 간의 경쟁,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을 이룬다. 한 곳에서 방아쇠가 당겨지면 다른 곳에서 총성이 울리는 구조다.
이 글은 세 개의 축을 차례로 따라간다. 먼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같은 땅을 두고 충돌하게 된 3천 년의 배경을 본다. 다음으로 아랍이 아닌 페르시아 국가 이란이 왜 이스라엘의 숙적이 되었는지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갈등이 가장 참혹하게 응축된 시리아 내전과 그 붕괴 이후를 짚는다. 그리고 영상이나 책이 끝난 지점 너머, 2026년 봄까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사실 확인을 거쳐 정리한다.
중동 분쟁의 큰 흐름.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며 100년 넘게 이어졌다.
오늘날의 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 민족의 끈질긴 기억을 들여다봐야 한다. 유대인의 역사다. 경전의 서술에 따르면 유대 민족의 조상은 신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고,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가 그곳에서 노예가 되었다가, 다시 탈출해 가나안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이 지역에는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고대 왕국이 세워졌고,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들어섰다.
그러나 왕국은 분열했고 주변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리다 무너졌다. 결정적 파국은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사이, 로마 제국에 맞선 반란이었다. 로마는 이를 가혹하게 진압했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이 흩어짐을 디아스포라라 부른다.
디아스포라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렇다. 한 가족이 큰 집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2천 년이 지나도록 자식 손주들이 같은 집 열쇠를 간직하며 모이면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기도를 드린 것이다. 보통은 몇 세대만 지나도 동화되어 사라지지만, 유대인은 박해 속에서도 종교와 정체성을 지켜냈다. 언젠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그 접착제였다. 바로 이 끈질긴 기억이 훗날 한 국가를 다시 세우는 동력이 된다.
유대인은 정착한 지역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동유럽에 자리 잡은 아슈케나짐(Ashkenazim),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세파르딤(Sephardim), 중동 토착의 미즈라힘(Mizrahim)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아슈케나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때 이 아슈케나짐이 사실은 고대 유대인의 후손이 아니라, 중세에 유대교로 개종한 중앙아시아의 한 왕국 후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현대 유대인의 다수가 그 땅과 혈연적 연고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후의 유전자 분석은 이 가설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아슈케나짐의 DNA는 다른 유대인 분파 및 중동 민족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고, 개종 왕국과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이 가설을 정치적 의도가 의심되는, 근거 약한 주장으로 본다.
유대인이 떠난 뒤 예루살렘은 더 복잡한 땅이 되었다.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 퍼지면서 이곳은 예수가 처형된 기독교의 성지가 되었고, 이슬람이 일어난 뒤에는 예언자가 승천했다고 믿는 자리에 사원이 세워져 이슬람의 3대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사원이 들어선 자리는 옛 유대 성전 터였다. 하나의 언덕이 세 종교의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된 것이다. 평화의 상징이어야 할 땅이 오히려 끝없는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거세지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기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시오니즘(Zionism)이라 부른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이름으로, 곧 약속의 땅 전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시오니스트 대회가 열리며 이 운동은 조직화되었다.
운동의 결과로 19세기 말부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다만 처음부터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고, 토지를 사들여 정착하는 수준이었다. 초기에는 그곳에 살던 아랍 주민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이 정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유럽 유대인 금융 자본가들의 재정 지원이었다.
분쟁의 직접적인 불씨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중 영국이 뿌렸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광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영국은 오스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같은 땅을 놓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세 개의 약속을 동시에 했다.
같은 땅을 세 당사자에게 동시에 약속한 모순. 이 어긋남이 분쟁의 법적, 정서적 출발점이 되었다.
첫째, 영국은 아랍 지도자에게 오스만과 함께 싸워주면 아랍 독립국 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했다(맥마흔-후세인 서한, 1915~1916년). 둘째, 같은 시기 유대인 측 대표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밸푸어 선언, 1917년). 셋째, 그러면서도 프랑스와는 오스만 영토를 어떻게 나눠 가질지 비밀 협정을 맺고 있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모순이 드러났다. 유대인들은 약속을 근거로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지만, 아랍인과 맺은 독립 약속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었다. 1차 대전 직후 10여 년간 유대인 인구는 두 배로 늘었고,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자 박해를 피한 유대인이 대거 이주하며 인구는 더욱 급증했다. 자본력을 갖춘 유대인들이 땅을 사들이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다. 양측의 충돌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유럽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자 국제 사회에는 유대인 국가 건설에 동조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미 팔레스타인에는 다수의 아랍 주민이 살고 있었다. 1947년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은 이 땅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는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문제는 인구와 땅의 비율이 어긋났다는 점이다. 당시 아랍 주민이 인구의 다수였는데도, 분할안은 전체 토지의 절반을 넘는 면적을 소수인 유대인 측에 배정했다. 팔레스타인 측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빼앗긴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 유대인 측은 합법적으로 사들인 땅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맞섰다. 양측의 주장은 처음부터 평행선이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 측은 아랍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고대 왕국이 무너지고 오랜 유랑을 거친 끝에, 같은 땅 위에 다시 세운 나라였다. 선포 다음 날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전쟁에 나서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신생 이스라엘은 초반에 고전했지만, 아랍 연합군의 결속력이 약한 틈을 타 전세를 뒤집고 승리했다.
이스라엘에게 1948년은 건국이었지만, 팔레스타인에게는 재난이었다. 약 75만 명이 고향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전쟁에서 이긴 이스라엘은 분할안으로 받기로 했던 면적보다 훨씬 넓은 땅을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측은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방당했다고 주장하고, 이스라엘 측은 전란 속에서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반박한다. 진실은 사례마다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이 좁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그리고 이집트와 레바논, 요르단 등지의 난민촌으로 몰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과 그 후손은 오늘날 수백만 명에 이르며, 돌아갈 권리를 둘러싼 난민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핵심 쟁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은 좁아지고 분절되었다. 이 영토 축소가 팔레스타인 측의 위기감을 키운 핵심 요인이다. 실제 지도가 아닌 면적 변화를 단순화한 개념도이며, 각 패널 위쪽이 서안 지구, 아래쪽 작은 조각이 가자 지구에 해당한다.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은 1973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특히 1967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관할하던 서안 지구, 이집트가 관할하던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등을 점령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주민 다수가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고, 점령과 정착촌 문제가 새로운 갈등의 축으로 떠올랐다.
나라를 잃은 팔레스타인은 스스로 무장 투쟁에 나섰다. 1950년대 말 야세르 아라파트 등이 파타(Fatah)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1964년에는 여러 정파를 아우르는 우산 조직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다. 파타는 곧 PLO 안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되었고, 아라파트는 1969년 PLO 의장에 올랐다. 흔히 둘을 혼동하지만, 파타는 PLO를 구성하는 핵심 정파이지 PLO 그 자체는 아니다.
초기 PLO는 납치와 시설 파괴 같은 강경한 방식을 썼으나, 점차 협상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의 봉기(1차 인티파다) 속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조직이 가자 지구에서 태어났다. 이슬람 저항 운동을 표방한 하마스(Hamas)다. 하마스는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분파로 출발했으며, 이스라엘과의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강경 노선을 내세웠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의도적으로 창설했다는 주장이 떠돌지만, 더 정확한 사실은 이렇다. 1980년대 이스라엘은 당시 최대 위협이던 세속 민족주의 세력 PLO를 견제하려고, 그에 맞서는 이슬람 사회 운동의 성장을 묵인하거나 방관했다. 직접 만들어 무기를 댄 것이 아니라, 경쟁자를 분열시키려고 눈감아 준 결과 하마스가 성장할 공간이 열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PLO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상대를 키운 전략적 오판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하마스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평화 협상을 앞당겼다. 거세지는 무력 도발을 막아야 했던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PLO 양쪽 모두에게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PLO 의장 아라파트가 마주 앉았고,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 핵심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두 지도자는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뒤로 미뤘다. 그 미뤄둔 짐이 결국 평화를 무너뜨렸다. 남은 장애물은 크게 네 가지였다.
1995년 라빈 총리가 평화에 반대하는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되고, 아라파트는 양보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배신자로 몰리면서, 오슬로의 동력은 빠르게 식었다. 양측 모두 상대의 존재를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 근본 한계였다.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거듭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있다. 미국은 군사, 경제, 외교 전반에서 이스라엘을 일관되게 뒷받침해 왔다. 그 이유는 흔히 떠도는 음모론적 설명, 즉 "소수 유대인이 미국을 장악했다"는 식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 표현은 오랜 반유대주의 상투구로, 근거가 약하고 책임 있는 분석에서는 쓰지 않는다. 실제 요인은 여러 겹으로 나뉜다.
요컨대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은 한 집단의 음모가 아니라, 전략, 표, 종교, 역사가 겹쳐 만든 구조적 결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다만 로비의 영향력이 지나치다는 비판은 미국 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는 현실의 쟁점이다.
중동 분쟁을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오해가 이란을 아랍 국가로 여기는 것이다.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아랍 국가는 아랍어를 쓰고 아랍 민족이 다수인 나라를 말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20여 개국이 여기 속한다. 이란은 다르다. 언어는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파르시)이고, 민족적으로는 아리안계에 가깝다. 종교는 같은 이슬람이지만 종파가 다르다.
이슬람의 두 큰 갈래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창시자 사후 "정당한 후계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시아파는 창시자의 혈통만을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고, 수니파는 자격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회사의 창업자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떠난 뒤, "핏줄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파와 "능력 있는 임원이면 된다"는 파로 회사가 갈라진 상황에 가깝다. 대다수 아랍 국가는 수니파지만, 이란과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다. 이 종파 차이가 이란을 아랍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한 요인이다.
흥미롭게도 이란과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79년 이전 이란은 친서방 왕정 체제였고, 여성이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사회가 비교적 세속적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이란은 이를 인정한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였고, 1970년대에는 이스라엘을 거치는 송유관으로 유럽에 석유를 수출하기까지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관계다.
모든 것을 바꾼 사건이 1979년 이란 혁명이다. 친서방 왕정이 무너지고,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위를 갖는 신정 체제의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다. 새 정권은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체제의 주적으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이란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종교적 반감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최대 후원자인 미국에 대한 적대, 그리고 중동 패권을 향한 지정학적 계산이 얽힌 결과였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랫동안 직접 충돌을 피해 왔다. 대신 이란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맞서는 무장 세력들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을 대리 세력, 곧 프록시(proxy)라 부른다. 서방은 이들 다수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다.
이른바 "저항의 축". 이란은 직접 나서는 대신 주변 무장 세력을 통해 이스라엘과 미국을 압박해 왔다.
대표적 프록시가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Hezbollah), 가자의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이다. 헤즈볼라는 무장 규모와 전력에서 하마스를 크게 앞서며, 자폭 전술의 원조 격으로 악명이 높다. 이란은 이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직접 군사 지원을 부인해 왔다. 이란의 전략은 자국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흔드는 것이다.
대리전은 두 거대한 회사가 직접 맞붙는 대신, 각자 후원하는 하청업체들끼리 싸우게 하는 구조와 비슷하다. 본사는 자금과 장비를 대주되 정작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는다. 분쟁이 커져도 "우리가 한 게 아니다"라고 발뺌할 여지가 생기고, 위험은 낮추면서 영향력은 넓힐 수 있다. 이란이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직접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곳곳에서 싸워온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에게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핵무기다. 이란은 자국 핵 프로그램이 에너지용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만약 핵무기를 갖게 되면 이스라엘로서는 이란의 어떤 행동도 제어할 수단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이란의 핵 시설을 겨냥한 비밀 공작과 과학자 암살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이란 나탄즈 핵 시설의 폭발 사고로 핵 개발이 상당 기간 지연된 것도 그런 사례로 거론된다. 참고로 이스라엘 자신도 핵을 보유한 것으로 널리 추정되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이란과 이스라엘은 "직접 전쟁만은 피한다"는 암묵의 금기를 지켜왔다. 그러나 2024년 봄, 이란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본토를 직접 겨냥해 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면서 그 금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직접 충돌이 어디까지 번졌는지는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2007년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경쟁 세력 파타를 몰아내면서, 팔레스타인은 둘로 쪼개졌다. 비교적 온건한 파타는 서안 지구를, 강경한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분열 상태가 굳어졌다. 이스라엘은 가자를 봉쇄하며 8미터가 넘는 장벽과 검문소로 주민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출입이 어려워 생계와 교육이 무너지고 생필품이 부족해진 가자는 사실상 거대한 봉쇄 구역이 되었다. 이 절망이 깊을수록 하마스의 지지 기반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2023년 10월 7일 아침, 하마스가 가자에서 이스라엘 본토로 전례 없는 대규모 기습을 감행했다. 지상 병력이 국경을 넘어 직접 침투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막에서 열리던 음악 축제가 습격당해 수백 명이 살해되었고, 인근 마을의 민간인들이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일부 주민은 인질로 끌려갔다. 이날 하루에만 약 1,2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으며, 약 250명이 가자로 납치되었다. 이는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라 민간인을 직접 겨냥한 학살이었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였다.
10월 7일의 기습은 단순한 보복전이 아니라, 하마스라는 조직 자체를 제거하겠다는 전면전의 방아쇠가 되었다.
이튿날 이스라엘은 전쟁을 선포하고 가자에 대규모 공습과 지상전을 개시했다. 이번 전쟁은 과거와 달랐다. 보복을 넘어 하마스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자를 봉쇄해 식량, 연료, 전기, 물 공급을 끊었고, 하마스의 지휘 본부와 지하 터널망이 밀집한 북부를 집중 공격했다. 그 결과 가자 북부는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고, 누적 사망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현지 보건당국 집계로는 6만 명을 넘어섰으며, 상당수가 여성과 어린이로 알려졌다. 다만 이 수치는 출처와 집계 방식에 따라 논란이 있다.
민간인 피해가 유독 큰 데는 가자의 지형과 하마스의 전술이 얽혀 있다. 이스라엘 측은 하마스가 무기와 전투원을 주택가, 병원, 학교에 숨기고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활용해 피해를 키웠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자 지하에 깔린 방대한 터널망이 민간 시설 아래에 있는 경우가 많아, 이를 파괴하려는 공격이 위쪽 건물 붕괴와 민간인 매몰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공습 전 문자와 전단으로 주민들에게 대피를 통보했다고 밝히지만, 반대편에서는 갈 곳 없는 봉쇄 구역에서 대피 자체가 불가능했고 공격이 과도했다고 반박한다. 양측 주장 모두 부분적 진실을 담고 있으며, 국제 사회의 평가도 갈린다.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을 두고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두 해석이 존재한다. 한쪽은 이스라엘이 안보를 명분으로 점령과 봉쇄를 확대해 왔고 강경 정책이 폭력의 악순환을 키웠다고 본다. 다른 한쪽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민간인 희생까지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하마스(와 그 배후)가 진짜 원인이라고 본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번 전쟁의 직접적 방아쇠는 10월 7일의 민간인 기습이었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대응이 길어질수록 가자 주민의 피해와 국제적 비난도 함께 커졌다는 점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강경 정책을 이끌어온 총리가 부패 혐의 재판과 낮은 지지율 속에서, 전쟁을 끌어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는 의심이 그것이다. 전시에는 선거를 치르기 어렵고 국민의 시선이 안보로 쏠리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이를 정치적 탄압이라며 강하게 부인한다.
한편 하마스 지도부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제 사회의 막대한 지원금 상당액을 가로채 지도부가 거액의 사적 재산을 축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주민들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동안 일부 지도자는 해외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는 것이다. 강경 세력과 강경 정부가 서로의 존재를 명분 삼아 권력을 유지하는, 일종의 적대적 공생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동의 모든 균열, 곧 종파, 민족, 독재, 강대국 개입, 극단주의가 한꺼번에 폭발한 무대가 시리아다. 2011년 시작된 내전은 약 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시리아라는 나라가 얼마나 복잡한 모자이크인지 알아야 한다.
시리아의 핵심 모순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 구조에 있다. 인구의 다수는 수니파인데, 권력은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가 쥐고 있었다. 작은 동아리 출신이 회사 전체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비밀경찰로 나머지 직원을 감시하는 회사를 떠올려 보라. 평소에는 굴러가지만, 한번 불만이 터지면 단순한 노사 갈등이 아니라 "우리 동아리 대 너희 동아리"의 사활을 건 싸움으로 번진다. 이 종파 구도가 시리아 내전을 그토록 잔혹하고 길게 만든 근본 배경이다.
1970년 권력을 잡은 알라위파 출신의 한 군인이 강력한 독재 체제를 세웠다. 그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철저히 억압했고, 1982년에는 한 도시의 봉기를 진압하며 수만 명의 민간인을 희생시켰다. 2000년 그가 죽자 둘째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영국에서 공부한 이 후계자는 처음에 온건하고 현대적이리라는 기대를 받았고, 실제로 경제 개혁으로 한동안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이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되고 비밀경찰의 감시가 이어진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물결, 이른바 아랍의 봄이 중동 전역으로 퍼졌다. 2011년 봄, 시리아의 한 도시에서 십대 청소년들이 학교 담벼락에 정권을 비난하는 낙서를 했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했다. 자녀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나왔고, 그 장례식에 수천 명이 몰리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작은 낙서 한 줄이 14년의 내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권은 부분적 개혁을 약속하다가 곧 강경 진압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무력 진압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평화 시위대는 점차 무장 반군으로 조직화되었다. 정부군에서 이탈한 군인과 민간인이 자유시리아군(FSA, Free Syrian Army)을 결성했다. 다만 FSA는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는 여러 파벌의 느슨한 연합이어서, 결정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의 복잡함은 적과 아군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어제의 협력자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국제 사회도 두 편으로 갈렸다. 정권을 지원한 쪽은 러시아와 이란이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항구에 둔 해군 기지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지키려 했고, 이란은 같은 시아파 계열인 정권을 지키는 동시에 레바논의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유지하려 했다. 반대로 미국과 서방,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는 반군을 지원했다. 특히 튀르키예는 국경 너머 쿠르드족의 독립 움직임을 가장 경계했다.
여기에 극단주의 세력까지 끼어들었다. 이라크 쪽에서 넘어온 지하디스트들이 알카에다(al-Qaeda) 계열의 알누스라, 그리고 더 잔혹한 IS(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를 이루며 독자적으로 세력을 넓혔다. 두 조직은 같은 뿌리였지만 목표가 달랐다. 알누스라는 시리아 정권 타도에 집중했고, IS는 중동 전역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 했다. 결국 둘은 서로 등을 돌리고 싸웠다. 한편 북동부의 쿠르드 무장 세력(YPG, People's Protection Units, 인민수비대)은 자치를 선언하고 독자 노선을 걸으며, 이 지역의 유전 대부분을 장악했다.
2013년 수도 인근에서 화학무기로 약 1,400명이 사망한 참극이 벌어졌다. 정권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으나 정부는 부인했고, 서방은 전쟁 범죄로 규탄했지만 직접 군사 개입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IS는 정부군, 반군, 쿠르드와 모두 싸우며 한때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14~2015년 쿠르드 도시 코바니 전투에서 미국의 공습과 쿠르드의 결사항전에 막혀 처음으로 결정적 패배를 당했고, 이후 내리막을 걸어 2019년경 거점을 모두 잃고 무너졌다.
2015년 한때 영토의 4분의 1만 남기고 몰렸던 정권은, 러시아와 이란의 본격 개입으로 기사회생했다. 러시아의 공습과 이란, 헤즈볼라의 지상 지원에 힘입어 정부군은 반격에 나섰고, 2016년 오랜 격전지였던 제2 도시를 탈환했다. 2020년에는 영토의 다수와 주요 도시를 모두 회복하며 사실상 승기를 잡은 듯 보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폐허였고 국민 절반 이상이 난민이었으며, 정권은 외부 후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 의존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고, 이란과 헤즈볼라도 경제 제재와 이스라엘 전선에 묶여 시리아에 집중할 여력을 잃었다. 후원이 빠지자 정권의 허약함이 드러났다. 보상도 받지 못해 사기가 바닥이던 정부군은, 2024년 11월 반군의 대표 세력 HTS(Hay'at Tahrir al-Sham, 샴 해방기구)가 공세에 나서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다. HTS는 알누스라가 다른 세력과 결합해 이름을 바꾼 조직으로, 사실상 같은 계보다.
14년을 버틴 독재 정권이, 후원자가 발을 빼자 단 12일 만에 붕괴했다.
제2 도시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며칠 뒤 주요 도시들이 줄줄이 넘어갔으며, 남부에서 등장한 또 다른 반군이 수도를 차지했다. 결국 2024년 12월, 50년 넘게 이어진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최고 권력자는 러시아로 달아났다. 한때 테러리스트로 지목되던 HTS의 지도자가 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서술이 멈추는 지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뒤로 빠르게, 그리고 위험하게 움직였다. 2026년 5월 현재의 상황을 사실 확인을 거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자 전쟁은 2025년 1월 첫 휴전과 인질, 수감자 교환으로 잠시 멈췄으나 그해 3월 다시 격화되었고, 여러 차례의 공세와 협상을 거쳤다. 2025년 10월 미국이 중재한 단계적 평화안에 따라 다시 휴전이 발효되었고, 생존 인질들이 풀려나고 사망 인질의 유해도 차례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휴전은 불완전하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의 절반가량을 통제하는 이른바 경계선이 그어졌고, 하마스가 나머지를 장악한 상태가 굳어지면서, 가자가 사실상 두 구역으로 영구 분단될 위험이 제기된다. 7개월이 지난 현재 "완전한 평화는 아니지만 상대적 안정"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한편, 무장 해제와 재건을 둘러싼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직접 충돌의 금기는 끝내 무너졌다. 2025년 6월,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미사일, 군 시설을 대대적으로 기습하면서 양국은 12일간 직접 전쟁을 벌였다. 이란은 수백 발의 탄도미사일로 응수했고, 미국까지 가세해 이란의 핵 시설을 직접 타격한 뒤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충돌의 서막이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부 자체를 겨냥한 합동 작전을 개시했고, 그 과정에서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란은 후계 절차에 따라 새 최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나, 지도부 다수가 한꺼번에 사라지며 심각한 권력 공백과 혼란에 빠졌다. 이 전쟁은 레바논 전선을 다시 불붙이고 걸프 해역의 원유 수송로를 교란하는 등 중동 전역과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었다. 영상이나 책이 묘사한 "직접 전쟁만은 피하는 두 숙적"이라는 구도는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은 이란과 이스라엘이 멀리 떨어져 있고 전면전의 실익이 없어 직접 충돌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2024년의 첫 직접 공격, 2025년의 12일 전쟁, 2026년의 지도부 제거 작전을 거치며 그 전제는 차례로 깨졌다. 중동을 읽을 때 과거의 안정 가정에 기대면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에는 옛 반군 지도자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약 5년의 전환기를 두고 헌법과 선거를 준비한다는 구상이다. 한때 테러 조직으로 지목되던 세력의 지도자가 이제 국제 무대에서 정상으로 인정받고, 관련 국제 제재도 일부 해제되었다. 러시아는 기지 유지를 조건으로 새 정부를 인정했고,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를 아랍 진영으로 되돌려 이란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다.
그러나 새 출발이 곧 평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권력이 새 지도부에 집중되었다는 우려, 소수 종파를 겨냥한 폭력, 쿠르드 자치 지역과의 통합 협상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독재는 무너졌지만, 다종파 국가를 하나로 묶는 과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세 갈래의 전쟁을 따라오며 분명해지는 것은, 이 분쟁이 어느 한 악인의 탐욕이나 한 번의 실수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땅을 향한 두 민족의 양립 불가능한 권리 주장, 강대국이 남긴 모순된 약속, 종파로 갈린 패권 경쟁, 그리고 그 위에서 자기 이익을 좇는 외부 세력들이 서로 맞물려 있다. 한 매듭을 풀려 하면 다른 매듭이 조여지는 구조다.
난민이 돌아갈 곳은 없고, 정착촌은 계속 늘고, 성지는 양보할 수 없으며, 강경 세력은 상대의 강경함을 자기 존재의 명분으로 삼는다. 시리아에서 보았듯 독재의 붕괴조차 새로운 혼란의 시작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평화는 선의 하나로 오지 않으며, 어느 쪽이 더 나쁜지를 가리는 것만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누구의 편을 들기 위함이 아니라, 뉴스 한 줄 뒤에 숨은 100년의 무게를 보여주는 데 있다. 다음번에 중동발 속보를 접할 때, 그것이 어떤 매듭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한 겹 더 깊이 읽어낼 수 있다면 이 긴 글의 역할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