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동아시아 근대사
메이지 유신은 흔히 1868년에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사건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일본이 단숨에 근대 국가로 올라선 것이 아니다. 그 토대는 16세기 은광 개발에서 시작되었고, 닫힌 나라의 좁은 창문으로 흘러든 서양 지식이 그 위에 쌓였으며, 마지막으로 칼을 찬 무사들이 제 손으로 무사의 시대를 끝내면서 완성되었다. 300여 년에 걸친 이 긴 준비 과정과, 그 변곡점마다 등장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약한 시점은 메이지 유신보다 300년 앞선 16세기다. 출발점은 뜻밖에도 광물이었다. 1526년 무렵 오늘날 시마네현 일대에서 대규모 은광인 이와미 은산(石見銀山)이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분의 1을 캐낼 만큼 막대한 양의 은을 쏟아냈다. 신대륙의 포토시 은광과 더불어, 당시 지구상에서 은이 가장 많이 흘러나온 곳이 일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많은 은을 생산할 수 있었던 비밀은 한 가지 제련 기술에 있었다. 은광석에는 보통 납이 섞여 있는데, 이 둘을 분리해 순수한 은만 뽑아내는 기술을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잿더미를 이용한다 하여 회취법(灰吹法)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술이 처음 등장한 곳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3년(연산군 9년) 김감불과 김검동이라는 인물이 납으로 은을 불려내는 방법을 임금 앞에서 시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무쇠 화로에 매운 잿더미를 두르고, 은이 섞인 납 조각을 채운 뒤 위아래로 숯불을 피워 녹이면, 녹는점이 낮은 납이 먼저 산화되어 재에 스며들고 순은이 걸러진다는 것이다. 세계 은 정련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이 기술은 조선에서 싹을 틔웠다.
불순물이 섞인 원유를 끓여 휘발유·경유를 따로 뽑아내는 정유 공정을 떠올리면 된다. 끓는점(정확히는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원하는 물질만 골라내는 것이다. 연은분리법은 납과 은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 광석 덩어리에서 값나가는 순은만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16세기판 정제 기술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술을 발명한 조선은 이를 살리지 못했다. 16세기 초, 은이 사치 풍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조정이 전국의 은광 개발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 기술은 밀무역 상인 등을 통해 1530년대에 바다 건너 일본으로 전해졌고, 마침 납이 많이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발명은 조선이 했지만, 최대 수혜자는 일본이 된 셈이다.
은은 곧 일본의 운명을 바꾸었다. 당시 은은 명나라와 유럽이 모두 갈구하던 국제 통화였고, 일본은 이 은으로 명나라와 서양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들여올 수 있었다. 전국시대 전장의 판도를 뒤바꾼 조총을 사들인 것도, 임진왜란에 투입된 막대한 군자금을 감당한 것도 모두 은이 있어 가능했다.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미국 달러를 떠올리면 된다. 16세기의 은은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사실상의 기축통화였다. 은을 대량으로 손에 쥔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과 비슷했다. 일본은 그 위치를 차지하면서 국제 교역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단숨에 올라섰다.
1639년, 일본은 쇄국 정책을 택하며 외국과의 접촉을 강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문을 완전히 닫아건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포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에는 예외적으로 교역을 허락했다.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가 그 통로였다. 이 작은 섬 하나가 200년 넘게 일본이 바깥 세계와 연결된 유일한 공식 창구였다.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지식과 정보를 연구하는 학문을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의학·천문·지리·군사 기술에 이르기까지, 난학자들이 축적한 지식은 훗날 일본이 서양 문명을 비교적 빠르게 흡수하고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지적 토대가 되었다. 문을 닫은 채로도, 일본은 좁은 틈으로나마 세상의 변화를 꾸준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작은 환기창 하나만 뚫어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방 전체를 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 창으로 바깥 공기와 빛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데지마는 그 환기창이었고, 난학은 그 창으로 들어온 빛을 모아 연구한 학문이었다. 나라 전체가 쇄국 상태였음에도, 일본의 지식인 사회는 세계 정세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의 권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고, 이것이 도쿠가와 막부의 시작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 자리를 세습했다. 근거지가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였기에, 이 정권을 에도 막부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일본 특유의 이중 권력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목상 일본의 군주는 교토에 있는 천황(天皇)이었다. 그러나 천황은 상징적 권위만 지녔을 뿐 실권이 없었고, 실제 통치권은 모두 쇼군이 쥐고 있었다. 이름뿐인 천황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천황이 쇼군에게 통치를 위임한다는 형식이 막부 권력의 정당성을 떠받쳤기 때문이다.
오늘날 입헌군주국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과, 실제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총리의 관계와 닮았다. 천황은 권위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쇼군이 군대·재정·외교 등 실제 권력을 행사했다. 이 구도가 중요한 이유는, 훗날 막부에 저항하는 세력이 '천황을 받들자(尊王)'는 명분을 내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황이라는 더 높은 권위가 따로 존재했기에, 쇼군을 끌어내릴 논리적 명분도 마련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전국을 번(藩)이라 불리는 260여 개 지역으로 나누었고, 각 번은 다이묘(大名)라 불리는 영주가 다스렸다. 번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지닌 봉건 단위였으므로 언제든 반란의 위험이 있었지만, 막부는 다이묘의 처자식을 에도에 인질처럼 머물게 하고 영주에게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가게 하는 등(참근교대) 촘촘한 감시 체계로 이를 통제했다. 덕분에 실제 반란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강력한 통치 아래 일본은 약 250년간 풍요를 누렸다.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면서 인구는 약 1,000만 명에서 3,000만 명 안팎으로 불어났고, 도시와 상업, 문화가 함께 발전했다. 18세기 초 일본을 다녀온 조선의 사절은 밤길마저 등불이 끝없이 이어진 에도의 번화한 풍경에 황홀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의 에도 막부는, 나름대로 성공한 정권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자 서구 열강이 서서히 일본을 압박해 왔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홋카이도를 넘보았고, 남쪽에서는 신식 화기로 무장한 영국군이 청나라를 격파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증기선을 앞세운 서양 함대가 공격해 온다면, 아무리 막부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쇄국과 봉건 체제는 어느새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낡은 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853년 7월, 미국 동인도함대를 이끈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증기선을 포함한 함대를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거대한 증기선, 이른바 '흑선(黑船)'은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일본은 변변한 해군도, 대형 상선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막부가 다이묘들이 큰 배를 갖는 것을 막아온 탓이었다. 그 결과 수도 에도는 소수의 서양 함선만으로도 손쉽게 봉쇄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
페리는 막부에 국교 수립을 요구했다. 막부가 결정을 망설이자, 페리는 이듬해인 1854년 더 큰 함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결국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열었다. 200년 넘게 이어진 쇄국이 마침내 깨진 것이다. 곧이어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도 일본과 조약을 맺었고, 1858년에는 천황의 허락(칙허)도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까지 체결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막부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천황의 승인도 받지 않고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특히 큰 반발을 불렀다. 일본 사회는 외세를 몰아내자는 양이파(攘夷派)와 문호를 열어 교류하자는 개국파(開國派)로 갈라졌고, 여기에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새 정부를 세우자는 흐름이 결합하면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막부 말기, 이른바 '막말(幕末)'의 격변이 시작된 것이다.
이 격변의 한복판에서 행동에 나선 무리가 바로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인구의 약 7%를 차지했는데, 다이묘에게서 안정적인 봉급을 받기는 했으나 본래 전쟁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 무사 계급이었다. 그런데 수백 년간 평화가 이어지면서 출세의 길이 막혔고,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실질 봉급마저 줄어들었다. 불만이 쌓여가던 차에, 18세기 말부터 사무라이들 사이에 유학이 퍼지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유형의 무사가 등장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이 계층에서 나왔다.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쇼인은 열 살 무렵 이미 어른들 앞에서 강의를 했을 만큼 이름난 신동이었다. 본래 군사학을 공부했으나 차츰 서양 서적과 양학(洋學)에 빠져들었고, 19세 때 이미 서구 열강의 팽창을 날카롭게 내다보았다.
쇼인은 바깥세상을 직접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흑선이 나타나자 그는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미국 함선으로 다가가 도항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자수한 그는 고향 조슈번으로 호송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오히려 엄청난 독서에 매진했고, 죄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출옥 후 그가 운영한 사숙(私塾)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메이지 유신의 요람이 되었다. 훗날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이곳을 거쳤다.
쇼인의 사상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 있다. 그는 세계를 강대국이 약소국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무대로 보았고, 일본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해외로 팽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거론한 팽창의 대상에는 홋카이도 북방과 류큐(오키나와)는 물론, 조선과 만주,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을 다시 일본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그의 구상은,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논리와 정한론(征韓論)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당대 일본의 국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가까웠지만, 그가 지목한 거의 모든 지역에 일본은 머지않은 미래에 실제로 손을 뻗치게 된다.
다만 쇼인은 무모한 즉각적 양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먼저 쇄국을 버리고 무역으로 부를 쌓아 군함을 만들고 해군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부국강병이 먼저라는 것이었다. 이 현실 인식은 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노선과도 통한다.
1858년 막부의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가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이 일어났다. 에도로 압송된 쇼인은, 묻지도 않은 막부 고관 암살 계획까지 스스로 털어놓는 바람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1859년 10월 27일, 그는 형장에서 생을 마쳤다. 만 29세였다. 정작 자신의 사상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 일본의 방향을 결정짓게 된다.
요시다 쇼인이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은 것과 달리, 료마의 유년기는 평범했다. 그러나 격변의 순간마다 그가 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매사에 재미를 추구하던 독특한 성격 또한 그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다.
료마 역시 처음에는 서양 오랑캐를 칼로 베어 일본을 지키겠다는 양이론자였다.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막부의 가신이면서도 일찍이 미국을 다녀온 개국론자 가쓰 가이슈와의 만남이었다. 본래 그를 죽이러 찾아갔던 료마는, 가이슈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해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일본 정신만으로 서양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은 것이다. 그 뒤 료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자기 번을 떠나 낭인(浪人)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은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었다. 그러나 두 번은 교토를 둘러싼 정쟁 속에서 원수처럼 반목하고 있었다. 료마는 소모적인 내전 대신, 이 앙숙을 손잡게 해 함께 막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서양 무기를 구할 길이 막힌 조슈번을 위해, 사쓰마번의 명의를 빌려 증기선과 총포를 대신 사들여 넘겨주는 절묘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때 조슈 측 실무자가 24세의 젊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두 번을 직접 마주 앉히는 일은 험난했다. 감정의 골이 워낙 깊어 회담이 결렬 직전까지 갔지만, 료마는 두 번의 화해가 곧 일본 전체를 위한 일임을 역설하며 중재를 밀어붙였다. 1866년 1월, 마침내 사쓰마와 조슈가 은밀히 서로를 돕고 천황을 받들어 막부에 대항하자는 삿초 동맹(薩長同盟)이 성립했다. 일본 근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동맹이었다.
이듬해인 1867년, 교토로 가는 배 위에서 료마는 새 국가의 청사진을 여덟 항목으로 정리했다(선중팔책, 船中八策).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줄 것, 상하 양원의 의회를 설치하고 의원을 선출할 것, 새 헌법을 제정할 것, 해군을 확충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넓힐 것 등이었다. 의회와 헌법을 핵심에 둔 이 구상은 훗날 메이지 정부의 기본 강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구상의 전제는 막부의 해체였다. 료마는 무력 충돌 대신, 쇼군이 스스로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는 평화적 방안을 도사번을 통해 제안했다. 그리고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실제로 대정봉환을 선언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이 막부에서 천황에게 넘어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새 정부 구상에 한껏 부풀어 있던 료마는, 그러나 그 한 달 뒤인 1867년 11월 교토의 한 여관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만 31세. 불가능해 보이던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을 이끌어내 메이지 유신의 토대를 닦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새 시대의 도래를 보지 못한 채 떠났다.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사이고는 키 180cm에 몸무게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였으나 성격이 자상해 늘 사람이 따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한 '독서하는 사무라이'였다. 그와 함께 유신을 이끈 오쿠보 도시미치는 죽마고우였는데, 훗날 사이고를 죽음으로 내모는 인물 또한 바로 그 오쿠보였다.
대정봉환이 선언되었지만, 무력으로 막부를 끝장내려던 사쓰마·조슈에게는 오히려 명분이 사라진 셈이었다. 쇼군 요시노부가 스스로 막부를 해체한다 해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1868년 초 사쓰마·조슈·도사번을 주축으로 한 신정부군과 막부군이 교토 부근에서 충돌했다(보신 전쟁, 戊辰戰爭). 병력 수는 막부군이 앞섰지만, 조슈와의 전쟁을 거치며 잘 훈련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이 막부군을 압도했다. 천황이 막부군을 역적으로 규정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신정부 쪽으로 기울었다.
신정부군을 이끌고 에도까지 진격한 사이고는, 총공격을 앞두고 막부 측 총사령관 가쓰 가이슈와 협상에 나섰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 결과 쇼군 요시노부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군대를 무장 해제한다는 조건으로, 100만 인구의 에도는 전화(戰禍)를 면했다. 에도 무혈입성이었다. 요시노부는 이후 낚시와 바둑을 즐기며 1913년까지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내전을 마무리한 사쓰마·조슈의 사무라이들은 이제 메이지 유신 정부의 중추가 되어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에는 봉건제와 사무라이 계급의 기득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난제가 걸려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가 번을 없애고 빠르게 유럽식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려 한 반면, 사이고는 급격한 변화에 신중했다.
1871년, 정부는 마침내 번을 폐지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현(縣)을 전국에 설치하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했다. 봉건 질서를 해체한 결정적 조치였다. 그러나 이로써 각 번의 가신단이 해체되면서, 사무라이들은 생계 기반마저 잃고 말았다. 같은 시기 오쿠보·기도·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핵심 인사들은 서양 문명을 시찰하기 위해 약 1년 10개월간 미국과 유럽을 도는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 1871~1873)에 올랐고, 그 충격적인 견문은 귀국 후 근대화 정책을 한층 가속했다.
한편 일본에 남아 국정을 책임진 사이고 앞에 조선과의 외교 갈등이 닥쳤다. 메이지 정부가 보낸 국서에서 '천황'이라는 표현과 독자적 연호를 쓰자, 조선 조정이 이를 문제 삼아 국서를 거부한 것이다.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들끓었다. 사이고는 자신이 직접 사절로 조선에 가겠다고 나섰다. 곧장 전쟁을 벌이기보다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는 신중론으로도, 사실상 정한론자였다는 해석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급히 귀국해 '아직은 내치가 먼저'라며 반대하면서, 1873년 결국 조선 출병은 무산되었다. 정한론에서 밀려난 사이고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 가고시마로 낙향했다.
낙향한 사이고 주변으로, 폐번치현으로 설 자리를 잃은 사무라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학교(私學校)를 세워 이들을 가르쳤고, 가고시마는 점차 중앙정부의 통제가 닿지 않는 반(半)독립 지대처럼 변해갔다. 마침내 1877년, 사이고를 앞세운 사무라이들이 봉기했다(세이난 전쟁, 西南戰爭). 사이고 본인은 봉기를 주도했다기보다 주변에 떠밀린 측면이 컸다.
그러나 봉기를 미리 간파한 정부는 무기를 사전에 빼돌렸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앞에서 사무라이들은 패배를 거듭했다. 산속 동굴로 쫓긴 사이고는 1877년 9월, 결국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만 49세. 한 사상가는 그의 죽음을 두고 '최후의 사무라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8년, 친구 사이고를 죽음으로 내몬 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출근길에 사무라이들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신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았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메이지 유신의 가장 큰 역설은, 무사의 특권을 떠받치던 봉건 질서를 끝장낸 주역이 바로 무사들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사쓰마와 조슈의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세웠지만, 그렇게 세운 새 나라는 폐번치현과 징병제, 사민평등을 통해 사무라이라는 신분 자체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비극은 이 모순의 상징이었다. 그는 유신을 완성한 영웅이면서, 동시에 유신이 버린 옛 무사 계급의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안고 죽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사와도 여러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 일본의 도약을 떠받친 은 제련 기술은 본래 조선에서 발명된 것이었으나 조선은 이를 살리지 않았고, 비슷하게 19세기 후반 두 나라는 개국과 근대화라는 같은 과제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에서 정한론으로 이어진 일본의 팽창 논리는, 머지않아 한반도의 운명에 직접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16세기의 은광에서 시작해 데지마의 좁은 창, 250년 봉건 체제의 축적, 그리고 흑선이 불러온 충격과 네 인물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 메이지 유신은 한순간의 도약이 아니라, 길고 복잡한 준비와 우연과 선택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였다. 한 시대가 닫히고 다른 시대가 열리는 그 매듭마다, 결국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