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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사 · 春秋時代

춘추시대로 가는 길
— 신화에서 다섯 패자까지

기원전 770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중국 대륙은 수백 개의 나라가 서로 죽고 죽이며 패권을 다투었다. 그 무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신화시대의 시조들로부터 하·은·주 세 왕조를 거쳐 춘추시대 다섯 패자가 흥망하기까지 한 편으로 정리한다.

춘추전국시대는 흔히 하나로 묶여 불리지만, 그 길이는 약 550년에 이른다. 같은 무대에서 벌어진 후대의 삼국시대보다도 수백 년이나 앞선 시기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학살과 패륜이 일상처럼 자행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혼란 속에서 수많은 영웅과 모략가가 등장했고, 오늘날까지 쓰이는 숱한 고사성어가 태어났다.

이 시대를 제대로 읽으려면 그 앞의 긴 서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신화 속 시조들이 부족을 통합하고, 하·은·주가 차례로 일어섰다가 무너지며, 마침내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과정이 곧 춘추시대를 잉태한 산고(産苦)였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간 흐름이 이 글이 다루는 범위다.

중국 고대 왕조·시대 흐름신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의 시간 순 흐름 중국 고대, 신화에서 춘추까지의 시간 흐름 신화시대 傳說 기원전 27세기경~ 기원전 2070~1600경 상·은 商·殷 기원전 1600~1046경 서주 西周 기원전 1046~771 춘추 春秋 기원전 770~476 전국 戰國 기원전 475~221 — 시간 흐름 (이 보고서는 신화시대부터 춘추시대 후기까지를 다룹니다) —
신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의 흐름. 이 글은 신화시대에서 춘추시대 후기까지를 다룬다. 연대는 통설을 따르며, 하·은·주 초기는 추정값이다.

1.신화의 시대 — 황제와 치우

신화의 안개를 조금 걷어내고 역사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어귀에는 세 인물이 서 있다. 농경의 신 신농(神農), 중화 문명의 시조로 불리는 황제(黃帝), 그리고 동방의 맹장 치우(蚩尤)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7세기 무렵으로 추정되지만, 전설과 사실이 뒤섞여 있어 그 속에서 역사의 윤곽을 더듬어야 한다.

신농은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로 묘사되며 염제(炎帝)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소머리였을 리는 없고, 소를 숭배하던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본다. 그는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산과 들을 다니며 온갖 풀을 직접 맛보아 약초와 독초를 가려냈다고 전한다. 여러 번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해독초를 찾아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다. 그 덕분에 신농의 부족은 한곳에 정착해 안정된 삶을 누렸다.

동쪽에서는 치우 부족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치우는 눈이 넷 달리고 머리가 구리처럼 단단했다는 괴물 같은 형상으로 전한다. 그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알려졌는데, 일부에서는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동이족은 동쪽의 여러 이민족을 폭넓게 아우르는 말이어서 특정 종족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고, 이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날의 하남성 일대에서 태어난 황제(이름은 헌원軒轅)는 여러 부족을 빠르게 통합하며 새 강자로 떠올랐다. 그는 판천(阪泉)에서 세 차례 싸운 끝에 쇠락한 신농의 군대를 꺾어 그 세력을 흡수했고, 이어 동쪽의 치우와 여러 차례 격돌했다. 거듭 고전하던 황제는 마지막 탁록(涿鹿) 전투에서 마침내 치우를 제압했다. 신농과 치우를 모두 물리치고 부족들을 아우른 황제는 기원전 2697년경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한다. 실존 여부에는 논란이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를 문명의 시조로 받든다.

2.요순의 선양과 하나라

황제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시절 가운데,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치세는 중국사에서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때로 꼽힌다.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요순시대'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풀지 못한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매년 범람하여 농지와 가옥을 휩쓰는 황하(黃河)였다.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治水)가 시대의 최대 과제였다.

요임금은 곤(鯀)에게 치수를 맡겼으나, 둑을 쌓는 방식으로는 범람을 막지 못했다. 뒤를 이은 순임금은 곤을 파면하고 그 아들 우(禹)에게 일을 맡겼다. 우는 둑을 쌓는 대신 물길을 터서 물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13년 동안 집에도 들르지 않고 치수에 매달렸고, 늘 진흙투성이였던 탓에 사람들이 곰이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내 황하의 범람을 잡은 우는 그 공으로 임금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하(夏)라 정했다.

기원전 2070년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나라는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였다. 약 500년을 이어가던 하나라는 차츰 힘을 잃었고, 마지막 임금 걸왕(桀王)이 사치와 폭정을 일삼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었다. 결국 그 틈을 타 세력을 키운 은(殷)나라가 걸왕을 몰아내고 하나라를 무너뜨렸다.

3.은나라와 갑골문, 그리고 주왕과 달기

은나라는 정식 명칭이 상(商)나라이지만 여기서는 익숙한 이름인 은나라로 부른다. 앞선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은나라도 오랫동안 전설 속의 왕조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1899년, 우연한 계기로 그 실재가 드러났다. 당시 '용골(龍骨)'이라 불리던 뼛조각이 약재로 팔렸는데, 한 학자가 약으로 갈아 먹기 직전 거기 새겨진 기이한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오랜 조사 끝에 그 글자는 은나라의 상형문자, 곧 갑골문(甲骨文)으로 밝혀졌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왕조가 실재했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용어 풀이 — 갑골문(甲骨文)이란

거북의 배딱지(甲)와 소의 어깨뼈(骨)에 새긴 글자다. 은나라 사람들은 전쟁·제사·날씨 같은 중대사를 앞두고 뼈를 불에 지져 갈라지는 금을 보고 길흉을 점쳤고, 그 내용을 뼈에 새겨 기록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형태의 한자이며, 은나라의 정치·종교를 들여다보는 1차 사료다.

은나라 수도 터에서는 갑골문과 함께 정교한 청동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강력한 청동기 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흔하게 발견된 것이 사람의 뼈였다. 은나라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犧)과, 누군가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이 성행했다. 한 무덤에서 수백 명분의 유골이 한꺼번에 나오기도 했다. 잦은 순장과 인신공양은 백성의 원한을 샀고, 이는 훗날 은나라가 무너지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은 흔히 폭군의 전형으로 그려지지만, 본래는 의외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총명하여 신하의 조언이 필요 없었고,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만큼 힘이 셌으며, 참전한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는 군사적 재능까지 갖췄다. 문제는 그 천성이 잔인하고 오만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자기보다 잘난 자를 용납하지 못해 신하를 함부로 처형했고, 막대한 세금을 거둬 호화로운 궁궐과 보물 창고를 지었다.

주왕의 폭정을 부추긴 인물이 절세미녀 달기(妲己)다. 두 사람은 죄지은 자를 잔인하게 처형하기를 즐겼는데, 그 대표가 포락지형(炮烙之刑)이었다. 기름 바른 구리 기둥을 맨발로 건너게 하고 아래에는 불을 지펴, 건너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모두 미끄러져 불 속으로 떨어졌다. 또한 연못을 술로 채우고 나뭇가지에 고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게 한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향락에 빠져 나랏일을 내팽개쳤다. 충신 비간(比干)이 간언하자, 달기는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다 하니 확인해 보고 싶다"고 부추겼고, 주왕은 정말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당대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이의 죽음에 민심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4.주나라의 건국 — 문왕·무왕과 강태공

주왕이 폭정을 이어가던 무렵, 서쪽 관중(關中) 일대에는 은나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주(周)나라가 있었다. 관중은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인 폐쇄적 분지여서 힘을 비축하기에 이상적인 땅이었고, 훗날 진(秦)나라와 한나라도 이곳을 거점으로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당시 주나라를 다스리던 서백(西伯) 창(昌)은 성품이 어질고 정사를 잘 펴, 백성과 주변 제후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창의 명성을 시기한 주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고, 풀어 주는 척하며 창의 큰아들을 죽여 국으로 끓인 뒤 아비에게 먹이는 잔혹한 시험까지 했다. 창은 그것이 아들의 살임을 알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마셨다. 조금이라도 내색하면 그것을 빌미로 죽임을 당해 복수의 기회마저 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창이 얻은 인재 가운데 으뜸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었다. 그는 노년에 이르도록 가난하게 살며 공부에만 몰두하다 아내에게 버림받기까지 한 인물이었으나, 사냥 나온 창이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하던 그를 알아보고 등용했다. 강태공이 미끼도 꿰지 않은 곧은 바늘을 드리우고 있었다는 데서 "그는 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은 것"이라는 말이 전한다. 강태공의 계책으로 창은 보물과 미녀를 주왕에게 바쳐 옥에서 풀려났고, 풀려나는 대가로 포락지형의 폐지를 얻어내 명성을 더욱 높였다.

비유로 보기 — 봉건제(封建制)란

주나라는 광활한 영토를 천자가 직접 다스릴 힘이 없었다. 그래서 왕족과 공신에게 땅을 떼어 주고 그곳을 대신 다스리게 했는데, 이를 봉건제라 한다.

오늘날로 치면 본사가 직접 운영하기 어려운 지역을 가맹점주에게 맡기는 프랜차이즈와 비슷하다. 본사(천자)는 상징적 권위를 갖고 가맹점주(제후)에게 충성과 조공을 받지만, 시간이 흘러 가맹점이 본사보다 커지면 통제가 무너진다. 춘추시대는 바로 그 통제가 무너진 시대였다.

창은 주왕을 벌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훗날 문왕文王으로 추존된다), 그 아들 발(發)이 뒤를 이으니 곧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강태공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켰고, 비간의 죽음으로 민심이 등을 돌린 시점에 은나라를 쳤다. 폭군 타도라는 명분 앞에 여러 제후와 부족이 무왕에게 모여들었고, 막상 목야(牧野)에서 맞붙자 노예로 급조된 은나라 군대는 오히려 주나라 편으로 돌아섰다. 은나라는 그렇게 무너졌다. 기원전 1046년경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트로이가 멸망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던 시기와 대략 겹친다. 주왕은 보물 창고에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었고, 달기도 처형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던 의인도 있었다.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는 "신하가 천자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군대 앞을 가로막았다. 은나라가 망하자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 한편 일등공신 강태공은 산둥반도의 넓은 땅을 받아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훗날 그를 버렸던 아내가 용서를 빌자, 강태공은 물 한 그릇을 땅에 쏟고는 "이 물을 도로 담으면 받아 주겠다"고 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의 유래다.

5.서주의 황혼 — 포사와 봉화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에 나섰다. 이를 빌미로 형제들이 은나라 유민과 손잡고 일으킨 '삼감(三監)의 난'을 진압한 뒤, 주공은 욕심내지 않고 성왕이 자라자 조용히 정권을 돌려주고 노(魯)나라로 돌아갔다. 본분을 지킨 그의 처신은 후대의 큰 모범이 되어, 훗날 공자도 주공을 깊이 존경했다. 성왕과 강왕(康王) 대의 안정기를 '성강지치(成康之治)'라 부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4대 소왕(昭王)은 초나라 정벌에 거듭 실패하고 끝내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는 변방의 제후국이 주나라를 이길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이후 서쪽에서는 견융(犬戎)이, 남쪽에서는 초나라가 주나라를 위협했고 제후들도 제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 결정적 추락은 두 여인의 시대에 찾아왔다. 먼저 여왕(厲王)이 가혹한 세금과 공포정치를 펴자 백성이 폭발했다. 기원전 841년,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뒤엎은 이 사건(국인폭동)을 계기로 여왕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흥미롭게도 중국사에서 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해부터다. 그 이전의 사건들은 연대가 불분명하거나 추정에 의존한다.

여왕의 뒤를 이은 선왕(宣王)은 한동안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나, 그 아들 유왕(幽王)은 또 한 명의 폭군이었다. 유왕은 포사(褒姒)라는 여인에게 빠져 정사를 내던졌다. 무슨 까닭인지 좀처럼 웃지 않던 포사가 비단 찢는 소리에 웃자, 유왕은 비단을 대량으로 사들여 찢게 했고 국고는 순식간에 비었다. 더 큰 사건은 봉화(烽火)였다.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를 재미 삼아 올리자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가 헛걸음한 모습에 포사가 웃었고, 유왕은 같은 장난을 거듭했다.

그러다 폐위된 왕후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견융을 끌어들여 진짜로 쳐들어왔을 때, 봉화를 본 제후들은 또 장난이려니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의 결말 그대로였다. 기원전 771년, 도성은 함락되고 유왕은 견융의 손에 죽었다. 서주(西周)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6.춘추시대의 개막

기원전 770년, 견융의 침략을 견디지 못한 주나라는 본래 도읍 호경(鎬京)을 버리고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했다. 전략적으로는 옳았으나 쫓기듯 도망친 모양새여서 위신은 회복되지 않았다. 천자가 질서를 세우고 제후국 간의 다툼을 중재하던 권위가 무너지자, 제후들은 저마다 패권을 다투는 무한 경쟁에 들어섰다. 본격적인 춘추시대의 시작이었다.

다만 초기에는 아직 주나라 왕실이 명목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나라도 주나라와 가까운 정(鄭)나라였다. 본격적인 패권 다툼을 이해하려면, 먼저 무대 위 주요 배우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려 두는 편이 좋다. 그런데 한국어로 읽을 때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용어 풀이 — 똑같이 '진'으로 읽는 세 나라

춘추시대에는 우리말로 모두 '진'이라 읽히는 강국이 셋 있었다. 한자가 다르니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 진(晉) — 황하 북쪽의 강국. 뒤에 나올 진 문공의 나라이며, 오랫동안 중원의 패자였다.
· 진(秦) — 서쪽 관중의 나라. 처음엔 변방이었으나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다.
· 진(陳) — 중원 남동쪽의 약소국. 강대국 사이에 끼어 생존을 걱정하던 나라다.

이 글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세 나라 모두 한자를 함께 적는다.

춘추시대 주요 제후국 배치 개략도 황하와 장강을 기준으로 진(晉) 진(秦) 초 제 등 주요 국가의 대략적 위치를 표시한 개략도. 춘추시대 주요 제후국 배치 (개략도) 황하(黃河) 장강(長江) 北 ↑ 진(秦) 진(晉) 진(陳) 강대국 (진·진·초·제) 천자국 (주) 중·소국 신흥국 (오·월)
춘추시대 주요 제후국의 대략적 위치. 실제 국경이 아니라 상대적 방위를 나타낸 개략도다. 황하와 장강(長江)을 기준으로, 서쪽의 진(秦), 북쪽의 진(晉), 동쪽의 제(齊), 남쪽의 초(楚)가 중앙의 주(周)를 둘러싸고 있다.

천도 직후의 혼란기에 가장 먼저 나선 나라가 정(鄭)나라다. 초대 군주 정 환공(鄭桓公)은 유왕을 지키다 전사할 만큼 주나라에 충성했지만, 정작 그 손자 정 장공(鄭莊公)은 주나라의 몰락을 앞당겼다. 어머니 무강(武姜)의 편애 속에 동생의 반란을 겪은 정 장공에게는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가 굴을 파서 샘이 솟는 곳을 황천으로 삼아 화해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효심은 그러했으나, 주나라에 대해서는 달랐다.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던 정 장공이 주나라 왕실의 땅에서 곡식을 멋대로 거둬 가자, 천자의 권위는 정면으로 무시당했다. 기원전 707년, 주 환왕(桓王)이 제후들을 동원해 정나라를 쳤으나 도리어 패했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기까지 했다. 정 장공은 천자를 죽이는 것이 다른 나라에 공격의 명분을 주는 자살 행위임을 알아 추격을 멈췄지만, 이 사건으로 천자의 위세는 다시 한번 추락했다. 정나라는 영토가 작고 사방이 트여 공격에 노출된 탓에 곧 평범한 나라로 내려앉았고, 진짜 패권은 더 큰 네 나라 — 진(晉)·진(秦)·초(楚)·제(齊) — 로 넘어가게 된다.

7.첫 번째 패자, 제 환공과 관중

가장 먼저 패권을 거머쥔 나라는 강태공의 후예가 다스리던 동쪽의 제(齊)나라였다. 제 양공(襄公)의 막장 통치와 잇단 내란으로 나라가 흔들리자, 망명해 있던 두 공자 소백(小白)과 규(糾)가 군주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누구든 먼저 도읍에 닿는 쪽이 군주가 되는 상황. 규의 책사 관중(管仲)은 길목을 지키다 소백을 활로 쏘아 맞혔고, 소백이 쓰러지자 일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고리에 박혔을 뿐이었고, 죽은 척한 소백이 먼저 도읍에 닿아 군주가 되니 그가 곧 제 환공(齊桓公)이다.

자신을 죽이려 한 관중을, 환공은 친구 포숙(鮑叔牙)의 천거를 받아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포숙은 "제나라만 다스리려면 저로 충분하나,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면 관중이 필요합니다"라고 진언했다. 두 사람의 변치 않는 우정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나왔다. 가난한 시절 관중이 이익을 더 챙겨도, 사업을 말아먹어도, 포숙은 늘 그를 변호하며 "때를 못 만났을 뿐"이라 했다. 관중은 훗날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라 탄식했다.

재상이 된 관중은 백성을 직종별로 모아 살게 하는 분업, 적정한 세금, 인재 등용을 통해 제나라를 단숨에 강국으로 키웠다. 그의 정책은 한마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먼저 경제를 일으키고 그 힘으로 강한 군대를 양성한다는 것. 힘을 얻은 제나라는 명분 없는 전쟁을 삼가고, 이긴 뒤에도 빼앗은 땅을 돌려주며 약속을 어기지 않아 오히려 여러 나라의 신임을 얻었다. 이민족이 위(衛)·연(燕)을 침략하자 군대를 보내 막았고, 남쪽에서 북상하는 초나라까지 견제하니, 중원의 보호자로 떠올랐다.

비유로 보기 — 천자와 패자는 무엇이 다른가

주나라 천자(天子)는 명목상 천하의 주인이지만 실권은 거의 없었다. 자리만 지키는 상징적 회장에 가깝다.

반면 패자(霸者)는 실제 힘으로 제후들을 거느리고 질서를 잡는 실세 1인자다. 다만 패자는 천자를 폐위하지 않고 "왕실을 받든다(尊王)"는 명분을 내세워, 형식상의 회장은 그대로 둔 채 실권을 행사했다. 천자를 직접 해치면 다른 나라에 공격의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균형이 춘추시대 전기를 지탱한 규칙이었다.

기원전 651년, 제 환공은 제후들을 규구(葵丘)에 불러 모아 회맹(會盟)을 열고 정식으로 패자에 올랐다. 그러나 성공이 교만을 낳았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잦은 회맹으로 제후들의 불만을 산 데다, 명재상 관중과 친구 포숙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환공 곁에는 세 간신만 남았다. 스스로 거세하면서까지 비위를 맞춘 수조, 제 아들을 요리해 바친 역아, 부모를 15년간 찾지 않은 개방이 그들이다. 관중은 죽으며 이 셋을 멀리하라 했으나 환공은 끝내 듣지 않았다. 환공이 병들어 죽자 간신들은 권력 다툼에 몰두했고, 그 시신은 무려 67일간 방치되어 구더기가 방 밖으로 기어 나왔다고 한다. 첫 번째 패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8.송양지인 — 명분만 좇은 송양공

제 환공이 죽자 패권은 잠시 공백이 되었다. 그 자리를 노린 이가 은나라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다. 그는 제나라의 내란을 수습한 일로 자신감을 얻어 패자가 되려 했으나, 국력이 4대 강국에 한참 못 미쳤다.

운명을 가른 것은 초나라와의 홍수(泓水) 전투(기원전 638년)였다.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신하가 "대형이 흐트러진 지금 쳐야 한다"고 권했으나, 송양공은 "적이 곤경에 처했을 때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며 적이 전열을 모두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결과는 참패였고 양공 자신도 큰 부상을 입은 끝에 얼마 뒤 죽었다. 이때부터 실속 없는 명분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인정(仁情)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 부르게 되었다.


9.19년의 방랑, 진 문공

송양공의 좌절로 패권의 공백을 메운 것은 황하 북쪽의 강국 진(晉)나라였다. 진 헌공(獻公)은 정복 활동에 능했다. 괵(虢)나라를 치려고 우(虞)나라에 길을 빌리면서, 우나라의 충신 궁지기(宮之奇)는 "괵나라는 우나라의 울타리이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脣亡齒寒)"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우나라 군주는 뇌물에 눈이 멀어 길을 빌려주었고, 진(晉)나라는 괵나라를 멸한 뒤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까지 삼켰다. '순망치한'과 '가도멸괵(假道滅虢)'의 유래다.

강성하던 진(晉)나라는 후계 다툼으로 흔들렸다. 헌공이 총애한 여희(驪姬)가 제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음모를 꾸미자, 모함에 몰린 태자 신생(申生)은 변명도 도망도 거부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겁에 질린 동생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각각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헌공이 죽은 뒤 이오가 먼저 귀국해 진 혜공(惠公)이 되었으나,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을 거듭했다.

한편 중이의 망명은 무려 19년에 이르렀다. 그는 적(狄)·제(齊)·조(曹)·송(宋)·정(鄭)·초(楚)를 떠돌며 굴욕과 환대를 번갈아 겪었다. 농민에게 밥 대신 흙을 받기도 했고, 제나라에서는 안락에 빠져 떠나기를 주저하다 아내와 가신들의 계략으로 떠밀려 나오기도 했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그를 환대하며 훗날의 보답을 물었고, 중이는 "두 나라가 전쟁하게 되면 제가 삼사(三舍)를 물러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삼사는 약 90리, 곧 군대가 사흘 동안 행군하는 거리다.

기회는 서쪽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후원하면서 찾아왔다. 기원전 636년, 진 목공의 군대를 등에 업은 중이는 마침내 귀국해 군주가 되니, 그가 제 환공에 이은 두 번째 패자 진 문공(晉文公)이다. 그는 19년간 자신을 따른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으나, 굶주릴 때 제 허벅지 살을 베어 바쳤던 개자추(介子推)를 깜빡 잊었다. 뒤늦게 산으로 들어간 개자추를 찾으려 산에 불을 질렀다가, 노모를 안고 타 죽은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 깊이 후회했다. 개자추가 죽은 날 불을 피우지 말라 한 데서 한식(寒食)이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진 문공의 패업을 결정지은 것은 기원전 632년의 성복(城濮) 대전이다. 초나라와 맞붙기 전, 진나라 군은 약속대로 삼사를 물러났다('퇴피삼사退避三舍'의 유래). 명분과 사기를 모두 얻은 진나라는 거짓 후퇴와 좌우 협공으로 초나라 연합군을 대파했다. 천자는 그를 제후의 우두머리(후백侯伯)로 인정했고, 문공은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열어 패자의 지위를 굳혔다. 다만 그는 이미 노인이어서, 귀국 9년 만인 기원전 628년 세상을 떠났다.

10.서쪽의 강자, 진 목공

중이를 군주로 세워 준 서쪽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은, 춘추의 패자를 꼽을 때 거의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우나라 출신으로 노예로 팔려 다니던 백리해(百里奚)를 일흔의 나이에 발탁해 대부로 삼았고, 백리해는 그 후 20여 년간 진 목공을 보좌하며 나라를 키웠다.

그러나 중원 진출의 야심은 한 차례 큰 대가를 치렀다. 기원전 627년, 진 목공은 백리해의 만류를 무릅쓰고 멀리 정나라를 치러 갔다가 정나라가 대비하고 있자 그 옆의 작은 활(滑)나라만 멸하고 돌아섰다. 이를 무도한 처사로 본 진(晉)나라는 좁은 효산(殽山) 협곡에 군을 매복시켜, 한 줄로 늘어선 진(秦)나라 군을 앞뒤에서 쳐 전멸시켰다. 목공의 과욕이 부른 참패였다.

하지만 진 목공은 패장 맹명시(孟明視)를 벌하는 대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위로했고, 몇 해 뒤 맹명시는 진(晉)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효산의 치욕을 씻었다. 이어 기원전 623년 서쪽 융족(西戎)을 평정해 여덟 나라를 멸하고 관중의 지배권을 굳혔으니, 효산의 패배를 만회하고도 남을 업적이었다. 기원전 621년 그가 죽을 때 무려 177명의 유능한 신하가 순장되었는데, 나라를 이끌 인재가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진(秦)나라의 상승세는 한동안 꺾이고 말았다.

11.남방의 패자, 초 장왕

남쪽의 초(楚)나라는 중원 제후들에게 '남방의 오랑캐'라 무시당했지만, 일찍부터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성왕(成王)과 목왕(穆王)을 거쳐 즉위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즉위 초 반란으로 한때 납치당하는 등 자리가 불안정했던 그는, 3년 동안 술과 향락에 빠진 척하며 충신과 간신을 가려냈다. 한 신하가 "언덕에 앉아 3년을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가 있다"는 수수께끼를 내자, 장왕은 "한번 날면 하늘을 찌르고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 답했다. 여기서 '일명경인(一鳴驚人)'이 나왔다. 과연 장왕은 간신 100여 명을 일거에 숙청하고, 미천한 출신의 손숙오(孫叔敖)를 재상으로 발탁해 개혁으로 국력을 키웠다.

"갓끈을 끊으시오." — 잔치 도중 촛불이 꺼진 사이 애첩을 희롱한 자가 있었으나, 장왕은 범인을 찾는 대신 모두에게 갓끈을 끊게 하여 그 죄를 덮었다. 훗날 그 신하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는다. 너그러움이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절영지연(絕纓之宴)'의 일화다.

국력을 다진 장왕은 융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나라 국경에서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대뜸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솥. 그 무게를 묻는 것('문정경중問鼎輕重')만으로도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야망의 표현이었다. 명문 가문이 일으킨 반란도 명궁 양유기(養由基)의 활솜씨로 진압했는데, 백 발을 쏘아 백 발을 맞힌다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이 여기서 나왔다.

장왕의 패업은 기원전 597년의 필(邲) 전투로 완성되었다. 초나라에 항복한 정나라를 구원하러 온 진(晉)나라 군이, 지휘부의 분열과 우유부단 속에 손숙오가 이끄는 초나라 군에 대패한 것이다. 황하를 건너려는 진나라 병사들이 먼저 탄 자들의 칼에 손이 잘려 나가 뱃전에 손가락이 가득했다는 처참한 광경 앞에서, 장왕은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30년 전 성복에서 당한 패배를 갚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겨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제 환공·진 문공에 이어, 초 장왕이 남방의 패자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이 시대가 남긴 말


12.두 강국의 장기전과 휴전

진(晉)과 초(楚)의 다툼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았다. 필 전투에서 한 방 얻어맞은 진나라는 동쪽에서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린다. 진나라의 권신 극극(郤克)이 사신으로 제(齊)나라에 갔을 때, 그는 다리를 절었다. 그 모습을 본 제 경공의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고, 모욕을 당한 극극은 복수를 맹세했다. 기원전 589년 제나라가 노(魯)나라를 치자 노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마침내 기회를 잡은 극극이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안(鞌) 땅의 전투에서 그는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 제나라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잦은 전쟁에 지친 것은 진나라도 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낀 정(鄭)·송(宋)·노(魯) 같은 약소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보다 못한 송나라의 화원(華元)이 두 강국을 오가며 중재에 나섰고, 기원전 579년 진과 초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4년 만에 정나라가 다시 초나라 편으로 돌아섰고, 기원전 575년 두 나라는 언릉(鄢陵)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언릉 전투에서 초나라 공왕(共王)은 진나라가 쏜 화살에 한쪽 눈을 잃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왕의 눈을 맞힌 적장은 초나라의 명궁 양유기(養由基)의 화살에 쓰러졌다. 승패가 갈린 결정적 계기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이튿날 전투를 의논하려고 사령관 자반(子反)을 불렀는데, 그가 술에 만취해 일어나지도 못했던 것이다. 눈까지 잃은 마당에 사령관마저 그 모양이니 더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공왕은 군을 물렸고, 자반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무렵 진나라의 한 신하 사섭(士燮)은 자국의 승리를 기뻐하기는커녕 빨리 죽기를 빌었다. 그가 남긴 말에서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라 안팎으로 근심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사섭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안의 근심'이었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군주의 힘이 약해진 반면, 극씨(郤氏)를 비롯해 난씨·사씨·한씨·조씨·위씨 같은 거대 가문들이 저마다 군대를 거느릴 만큼 비대해져 있었다. 춘추 초기에 제후들이 커져 주나라 천자를 압도했던 일이, 이번에는 한 나라 안에서 가문들이 군주를 압도하는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비유로 보기 — 약소국의 처지와 '대리전'

두 강국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줄어든 대신, 양국은 동맹국을 시켜 상대편 동맹국을 치게 했다. 직원을 직접 내보내는 대신 하청 업체끼리 싸움을 붙이는 구도였다. 정나라처럼 두 강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는, 어느 편에 붙어도 반대쪽에게 두들겨 맞았다. 진나라와 손잡으면 초나라가 쳐들어오고, 초나라와 손잡으면 진나라가 보복했다.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이 "두 큰 나라 사이에 던져져 백성이 농사조차 짓지 못한다"고 호소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사섭의 예언대로 진나라에는 큰 내란이 닥쳤다. 군주 여공(厲公)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극씨 가문을 다른 가문과 손잡고 몰살했고, 나라 안에서 가장 컸던 가문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여공 자신도 얼마 못 가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다행히 뒤를 이은 도공(悼公)이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여러 개혁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한편 양국 사이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정나라에는 자산이라는 외교의 천재가 있었다. 기원전 544년 정나라의 정경(正卿)이 된 그는,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았다.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두 나라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정나라의 운명이 한 사람의 역량에 통째로 매달려 있다는 점이 한계였다.

오랜 소모전 끝에 양국을 다시 화해시킨 것은 송나라의 대부 상술(向戌)이었다. 그는 각국 유력 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있었다. 진나라·초나라·제나라·서쪽 진(秦)나라를 차례로 설득했고, 작은 나라들도 뒤따랐다. 기원전 546년 송나라 도성에 각국 사절단이 모여 평화 협정을 맺었다. 후대는 이를 '병기를 거두었다'는 뜻에서 미병지맹(弭兵之盟)이라 불렀다. 이 협정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해, 진과 초는 그 뒤 약 40년간 큰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13.다음 무대 — 동남쪽에서 오는 그림자

강대국 사이의 휴전이 약소국에게 평화를 뜻하지는 않았다. 진과 초는 서로 맞싸우는 대신, 그 힘을 주변의 작은 나라를 삼키는 데 썼다. 그리고 다음 시대의 거대한 복수극이 시작되는 단서는, 뜻밖에도 한 여인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초나라의 대부 굴무(屈巫)는 절세미인으로 소문난 하희(夏姬)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 초 장왕과 사령관 자반이 하희를 차지하려 할 때마다 굴무는 이런저런 명분을 들어 만류했고, 결국 하희는 양로(襄老)라는 신하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필 전투에서 양로가 전사하자, 하희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정나라로 떠났다. 기회를 포착한 굴무는 사신 자격으로 정나라에 들렀다가, 하희를 데리고 초나라의 적국이던 진(晉)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배신한 것이다.

격분한 초나라는 굴무의 일족을 몰살하고 재산까지 빼앗았다. 복수할 길을 찾던 굴무는 동쪽의 신흥 세력 하나에 주목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나라, 오(吳)나라였다. 굴무는 오나라에 진법과 전술을 전수하며 초나라를 치도록 부추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나라는 초나라에 맞먹는 강국으로 성장했고, 그동안 서쪽의 두 진나라와 초·제가 이루던 세력 구도에 오나라가 새로운 한 축으로 끼어들게 된다.

초나라 내부도 어지러웠다. 기원전 541년경, 권력욕에 찬 공자 위(公子圍)가 병문안을 핑계로 침실에 들어가 어린 조카 왕의 목을 졸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영왕(靈王)이다. 영왕은 사치를 일삼고 약소국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동쪽의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멸망시켰고, 채나라 태자를 제사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초나라 안에서조차 반대가 나올 만큼 끔찍했다.

오만한 권력의 끝은 빨랐다. 기원전 529년 영왕이 오나라 원정을 떠난 사이, 옛 진·채 땅을 지키던 기질(棄疾)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초나라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서, 왕은 신하들에게마저 버림받고 홀로 산을 헤매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질이 그 자리를 차지하니 그가 초 평왕(平王)이다. 그리고 이 평왕의 치세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처절한 복수극의 막이 오른다. 한 신하가 아버지와 형을 잃고 적국으로 망명해, 끝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옛 군주의 무덤을 파헤치는 이야기 — 오자서(伍子胥)의 복수극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서는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가 무대를 채우고 또 비워 간 자리까지를 보았다.


14.마치며 — 다섯 패자란 누구인가

춘추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춘추오패(春秋五霸)'다. 패자(霸者)란 주나라 천자가 명목상 천하의 주인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실제로 제후들을 이끌고 질서를 세운 실질적 지배자를 가리킨다. 다만 다섯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문헌마다 다르다.

춘추오패 주요 인물이 보고서가 다루는 다섯 패자 후보 춘추오패 — 이 보고서가 다루는 다섯 패자 齊桓公 1 제 환공 齊(제) 명재상 관중을 등용해 제후를 규합, 춘추 첫 패자에 올랐다 (규구회맹) 宋襄公 2 송 양공 宋(송) 명분에 집착하다 초에 패해 패권이 좌절된 '송양지인'의 주인공 晉文公 3 진 문공 晉(진) 19년 망명 끝에 즉위, 성복대전에서 초를 꺾고 중원의 패자가 되다 秦穆公 4 진 목공 秦(진) 백리해를 얻고 서융을 평정해 관중을 장악, 서방의 강자로 도약 楚莊王 5 초 장왕 楚(초) 손숙오의 보좌로 국력을 키우고 필지전 승리로 남방의 패자가 되다 * 오패의 명단은 문헌마다 달라, 진 목공·송 양공 대신 오왕 합려·월왕 구천을 넣기도 한다.
이 글이 다룬 다섯 패자 후보. 제 환공과 진 문공은 거의 모든 명단에 들어가며, 진 목공과 초 장왕도 흔히 포함된다. 송 양공은 패업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명단에 끼곤 한다. 문헌에 따라 진 목공·송 양공 대신 뒷시대의 오왕 합려(闔閭)나 월왕 구천(句踐)을 넣기도 한다.

가장 확실한 두 사람은 제 환공과 진 문공이다. 제 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든 뒤, 이민족과 초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중원을 지켜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진 문공은 열아홉 해를 떠돌다 예순이 넘어 군주가 되었고, 성복(城濮)에서 초나라를 꺾어 두 번째 패자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명분'을 중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천자를 받들고 약소국을 함부로 멸하지 않는다는 명분이, 다른 제후들을 따르게 한 힘이었다.

서쪽의 진 목공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으로 변방의 진(秦)나라를 강국으로 키웠고, 효산(殽山)의 대패를 설욕하며 서융을 평정해 훗날 천하 통일의 토대를 놓았다. 남쪽의 초 장왕은 삼 년을 침묵하다 단숨에 간신을 쓸어내고, 필(邲) 전투에서 진나라를 꺾어 남방의 패자가 되었다. 반면 송 양공은 패자가 되려는 야심에 비해 실력이 따르지 못했고, 적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헛된 인정으로 패망해 '송양지인'이라는 조롱만 남겼다.

이들의 흥망을 관통하는 흐름은 분명하다.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강한 제후들이 힘과 명분을 함께 갖추어 메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다시 군주 아래의 거대 가문으로, 변방의 신흥 강국으로 흘러내려 갔다. 진나라가 여섯 가문의 다툼 끝에 셋으로 쪼개지고, 남쪽 끝의 오와 월이 중원을 뒤흔드는 다음 시대 — 더 격렬한 약육강식의 무대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