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리고니어 전국 컨퍼런스에서 데이비드 가너가 제시한 로마서 8장 강해를 따라, 신학이 오래도록 씨름해 온 '악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 살핀다. 핵심은 답이 아니라 물음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고난은 인간이 던지는 가장 오래된 물음 가운데 하나를 남긴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있다면, 어째서 무고한 이가 병들고 무너지며 까닭 없이 슬픔을 겪는가. 시편의 첫머리에서 다윗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고, 같은 외침은 훗날 십자가 위 예수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신학자 데이비드 가너는 2026년 리고니어 전국 컨퍼런스에서 바로 이 물음을 다시 꺼내며, 통상적인 답을 제시하는 대신 물음 자체의 방향을 틀어 버린다.
이 글은 그 강연을 따라가되, 거기에 깔린 신학적 배경을 함께 풀어 일반 독자가 논증의 골격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강연이 속한 전통은 개혁주의(改革主義) 신학, 그중에서도 성경 전체를 구속(救贖)의 역사로 읽는 '성경신학' 계열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가너의 답은 "악이 어디서 왔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악은 어디로 가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바꾸는 데 있다.
신학과 철학은 이 문제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 부른다. 그리스어로 '신(theos)'과 '정의(dike)'를 합친 말로, 악이 실재하는 세계 앞에서 신의 정당함을 변호한다는 뜻이다. 18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이 용어를 만든 이래, 신정론은 종종 다음과 같은 논리적 삼각형으로 요약되어 왔다.
세 명제가 모두 참이라면 모순처럼 보인다. 신이 전능하다면 악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신이 선하다면 막으려 할 것인데, 악은 여전히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철학사는 이 긴장을 풀기 위해 여러 길을 시도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악의 원인이라는 '자유의지 변론', 더 큰 선을 위해 악이 허용된다는 '영혼 형성 신정론', 혹은 신의 전능이나 선함 가운데 하나를 양보하는 길이 그것이다.
신정론을 법정 비유로 옮기면 이해하기 쉽다. 세상의 고통을 증거로 삼아 "신은 무죄인가"를 묻는 재판이 열린 셈이다. 변호인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셋이다. 피고가 그 일을 막을 힘이 없었다고 변호하거나(전능을 양보), 막을 마음이 없었다고 변호하거나(선함을 양보), 아니면 그 고통이 실은 더 큰 목적에 봉사한다고 변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너의 강연은 이 재판 자체의 구도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신은 피고석에 서 있지 않다.
가너가 인용하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관찰을 남겼다. 성경이 악의 기원에 관한 명쾌한 답을 주지 않은 것을 그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악이 왜 생겼는지를 완전히 안다고 여긴다면, 그 앎을 빌미로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은 종종 "그러니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결론으로 미끄러진다.
가너의 강연이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계몽주의 이후 신정론은 결정적으로 철학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고, 그 결과 논의의 무게중심이 "악이 어떻게 들어왔는가"라는 기원의 물음에 쏠렸다. 가너는 이 무게중심을 그 자체로 의심한다. 그가 보기에 신자에게 정말 중요한 물음은 악의 등장이 아니라 악의 지속이며, 입구가 아니라 출구이고, 기원이 아니라 결말이다.
이 전환을 그는 질병의 비유로 설명한다. 몸에 암이 생겼을 때 정작 절박한 물음은 "이 암이 어쩌다 생겼는가"가 아니라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기원을 완벽히 규명하는 일은 흥미로운 호기심일 수 있으나, 그 자체로는 환자에게 한 걸음의 치유도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죄와 고난과 악의 효과 앞에서 신자가 던질 실질적 물음은 그 출발점이 아니라 대응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가너가 쓰는 핵심 구분은 '사변'과 '계시'다. 사변은 인간 이성이 스스로 답을 추론해 보려는 시도이고, 계시는 신이 자기 입으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듣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사변은 봉인된 상자의 내용물을 바깥에서 추측하는 것이고, 계시는 상자를 만든 이가 직접 건넨 설명서를 펴 읽는 것이다. 가너의 강연은 추측의 상자를 내려놓고 설명서, 곧 성경 본문으로 곧장 들어간다.
물론 이 전환에는 분명한 전제가 깔려 있다. 성경이 신의 신뢰할 만한 계시라는 믿음, 그리고 그 계시가 고난의 기원을 해명하기보다 고난의 의미와 끝을 다룬다는 독법이다. 이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독자라면 가너의 전환을 곧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그 전제 위에서 논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그 자체로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가너가 펴는 본문은 로마서 8장 14절부터 17절까지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인도받는 이들이 곧 신의 자녀이며, 그들이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養子)의 영을 받아 신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결정적 조건이 등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또한 그와 함께 영광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17절 후반의 이 표현을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일종의 필요조건으로 읽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영광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가너의 표현을 빌리면, 영광에 이르는 다른 우회로는 없다.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끼어든 장애물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의 일부로 설계되어 있다는 독법이다.
이 패턴을 가너는 그리스도의 발자취에서 끌어온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광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이었다. 시험과 고난의 자리로 그를 인도한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점이 여기서 중요하다. 신자가 '맏형'인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곧 그가 걸은 고난-영광의 길을 똑같이 통과한다는 뜻이 된다. 이 길은 사고가 아니라 설계이며, 방치가 아니라 인도다.
20세기 초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토대를 놓은 게할더스 보스는 같은 논리를 더 날카롭게 벼렸다. 그의 요지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 고난에 동참하여 그의 죽음을 본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생명의 부활에 이르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과 고난의 동참은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한 묶음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강연은 가장 독특한 신학적 주장으로 나아간다. 가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리처드 개핀이 되살린 통찰을 인용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로 우리의 고난 한가운데서 우리를 만난다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은 고난이 끝난 뒤 보상처럼 주어지는 미래의 무엇이 아니라, 고난의 자리 그 안에서 지금 경험되는 현재의 실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는 개혁주의 핵심 교리가 있다.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참여한 자로 간주된다. 개핀의 표현을 빌리면, 신자는 그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이미 부활한 자다. 다만 그 부활의 능력이 가장 또렷하게 체험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고난의 어둠이라는 것이 이 신학의 역설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접목(接木)의 비유로 옮기면 또렷해진다. 다른 줄기에 접붙여진 가지는 더 이상 제 뿌리로 살지 않고 접붙은 나무의 수액으로 산다. 가지가 맺는 모든 열매는 그 나무의 생명에서 나온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자를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로 본다. 그렇다면 그 가지가 비바람을 견디는 힘도 제 안에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이 신자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가너의 위로는 바로 이 구조에서 나온다.
가너는 이 차이를 빵에 빗댄다. 어떤 해석은 신자가 누릴 영광을 '갓 구운 따뜻한 빵'에 비유하면서, 지금은 그 빵을 먹기는커녕 냄새조차 맡지 못한 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위치적 진리'로 축소하는 독법이다. 가너는 이 축소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신자는 바로 그 차갑고 어두운 자리에서 살아 있는 빵을 실제로 맛본다. 부활의 능력은 멀리 있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손에 잡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강연의 본론은 신자의 고난이 지닌 세 가지 성격으로 정리된다. 가너는 이를 영어 두문자 P 세 개로 묶었다. 목적이 있고(purposeful), 개별적이며(particular), 유익하다(profitable)는 것이다. 세 성격은 각각 고난을 보는 시선을 다른 각도에서 교정한다.
첫째 성격은 고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동의하기는 쉽다. 문제는 그것이 '내 옆 사람'의 고난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고난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가너는 미식축구(美式蹴球, American football)의 비유를 든다. 미식축구에서 공은 끊임없이 던져지고 운반되며, 적지 않게 떨어뜨려진다. 인간은 공을 놓친다. 그러나 신은 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신자가 지금 걷는 길은 우연히 떨어진 공이 아니라, 그의 유익을 위해 미리 닦인 노면이라는 것이다.
둘째 성격은 고난이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을 추상화하면 위험이 따른다. 모든 것을 일반 범주로 환원하여, 언약(言約)의 구체성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고유한 개별성이 있었다. 그는 성육신한 신의 아들로서, 유일한 중보자로서, 비길 데 없는 자로서 고난을 받았다. 그렇다고 신자의 고난이 그저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5장 7항을 인용한다. 신의 섭리가 모든 피조물에 미치되, 특별한 방식으로는 그의 교회를 돌본다는 조항이다. 그리스도에게 개별적이었던 것이 그의 자녀들에게서 추상으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가너는 개별성을 사사화(私事化)와 혼동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는 신과의 관계를 일대일의 사적 관계로만 그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난이 나에게 고유하다는 사실이, 그것을 홀로 감당하라는 처방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는 가족 안에, 곧 신앙 공동체 안에 놓여 서로의 짐을 나누도록 부름받는다.
셋째 성격은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이다. 고난은 신이 의도한 바를 실제로 빚어낸다. 여기서 가너는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유를 든다. 한밤중 악몽에 떨며 우는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침대에 앉아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하고, 성경을 읊고, 노래한다. 바로 그 순간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된다. 가너의 표현을 빌리면, 어둠이 없으면 빛이 그토록 밝을 수 없고, 한밤의 포옹이 없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알 길이 없다.
고난의 자리에서 신자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이 외침은 본래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장 깊은 굴욕을 앞둔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고, 바울은 같은 부르짖음을 신자의 혀에 얹는다. 가너의 결론은,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상함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한 팔과 부드러운 손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또렷이 만져진다.
북미에서 흔히 쓰는 "그것은 신이 하신 일(a God th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보통은 좋은 일이 풀렸을 때, 곧 "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셨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너는 이 어법을 뒤집는다. 그가 말하는 '신이 하신 일'의 핵심은 원하는 것을 얻은 순간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경험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가너는 신자가 고난 앞에서 빠지기 쉬운 다섯 가지 잘못된 해석을 차례로 경고한다. 각각은 앞서 살핀 세 성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태도다.
첫째는 무작위성의 유혹이다. "내 고난은 무의미한 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둘째는 패배주의의 유혹이다. "고난이 너무 커서 도무지 견딜 수 없으니 시도조차 않겠다"는 체념이다. 가너는 견디는 힘이 신자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온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셋째는 유기(遺棄)의 유혹이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절망으로, 다윗과 예수가 외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그 극한이다. 가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등을 돌린 것은 결국 우리에게 그의 미소를 돌리기 위함이었다고 응답한다.
넷째는 예외주의의 유혹이다. "내 고통만은 특별해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고립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없다고 말한다. 고통이 아무리 고유하게 느껴져도, 바로 그때 다른 이들과 그 고난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가너의 권면이다. 다섯째는 합리화의 유혹이다. 고난 가운데 "신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하며 다른 타협과 죄를 정당화하는 태도다.
강연은 마지막 비유로 닫힌다. 가너는 천장이 높은 계단을 떠올린다. 그는 아이들이 걸음마를 떼자마자 첫 계단에 세워 자기 품으로 뛰어내리게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손을 거두며 도약을 권했다. 단을 하나씩 올려 가다 어떤 아이는 열 번째 계단에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아래에서 받아 내는 아버지를 향해서다. 가너의 물음은 단순하다. 아이들은 왜 뛰어내렸는가.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강연의 마지막 한 문장은 처음의 물음을 정면으로 되받는다.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가너의 답은, 바로 신이 선하기 때문이라는 역설이다. 고난이 목적을 지니고, 개별적이며, 유익하다는 세 성격이 모두 신의 선한 설계라는 한 점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 답이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보편적 해법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가너의 논증은 성경을 신뢰할 만한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혁주의 교리를 전제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이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이 선하기에 고난이 있다"는 결론은 설득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으로 들릴 것이다. 실제로 같은 물음에 대해 다른 전통과 사상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는다. 자유의지 변론, 영혼 형성 신정론, 혹은 신의 정의가 인간 이성을 넘어선다는 신비주의적 응답, 그리고 종교적 전제를 아예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설명까지 폭이 넓다.
그럼에도 가너의 강연이 신정론 논의에 던지는 기여는 또렷하다. 그는 "악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풀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이 신자의 실존에는 거의 무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고난을 견디는 사람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논의를 옮긴다. 악의 입구를 따지는 사변이 영혼을 식게 한다면, 악의 출구를 향한 시선은 고난을 견딜 근거를 준다는 것이다. 신정론을 풀어야 할 논리 문제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길로 다시 그린다는 점에서, 이 강연은 익숙한 물음을 낯설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고난 앞에서 인간이 던지는 물음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물음을 어느 방향으로 세우는가에 따라 도달하는 곳이 달라진다는 점은, 신학의 안과 밖 모두에서 곱씹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