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 · Western Classical Music
고대의 묘비에 새겨진 한 줄의 노래에서 출발해, 교회의 단선율과 인쇄술이 퍼뜨린 다성음악, 오페라와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시대를 거쳐, 형식의 균형과 개성의 폭발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이 어떤 길을 걸어 오늘날 우리가 '클래식'이라 부르는 모습이 되었는지 한 줄기로 따라간다.
인류가 언제부터 노래를 불렀는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음악은 오래된 인간의 행위다. 그러나 아주 먼 옛날의 음악이 실제로 어떤 소리였는지를 아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녹음이라는 수단이 없던 시절, 소리를 후대에 넘겨줄 유일한 통로는 악보뿐이었는데 그 악보 체계가 자리 잡기까지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탓에 옛 노래는 가사만 남거나 흔적조차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락까지 온전히 건너온 사례는 손에 꼽힌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세이킬로스의 비문'이다. 서기 1~2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 문자로 새긴 이 짧은 노래는, 세상을 떠난 이를 기리는 묘비명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고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율을 적은 기호가 함께 남은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그 가락을 그대로 되살릴 수 있다.
옛 시대의 악보는 오늘날의 녹음 파일과 같은 '저장 장치'였다. 저장 장치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연주도 그 순간이 지나면 영원히 사라진다. 고대와 중세의 수많은 노래가 잊힌 이유는, 곡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담아 둘 그릇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5세기부터 15세기까지를 보통 중세라 부른다. 교회의 권위가 사회 구석구석을 짓누르던 이 시대, 유럽 음악의 얼굴은 단연 '그레고리오 성가'였다. 물론 민중이 즐기던 세속의 노래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악보로 남지 못한 탓에 그 소리는 오늘날 들을 길이 없다. 그레고리오 성가만큼은 네우마(neume)라는 초기 기보법에 실린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성가는 화음도 반주도 없이 오직 하나의 선율만으로 흐르며, 미사를 집전하는 남성 성직자들의 목소리에 실렸다. 화려한 기교보다 예배의 경건함에 봉사하는 음악이었던 만큼, 오늘날의 귀에는 그 절제된 울림이 다소 밋밋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음악이 한층 다채로워진 것은 그 뒤로 기보법이 정교해지면서, 더 복잡한 짜임까지 악보에 담아낼 수 있게 된 다음의 일이다.
서양 음악이 종교 음악 특유의 엄숙한 단조로움을 벗고 예술적 표현을 넓히기 시작한 때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변화는, 여러 선율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다성음악(polyphony)의 본격적인 발전이다. 한 줄기 선율만 흐르던 음악에, 서로 다른 높낮이의 목소리들이 겹쳐지며 화음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더해졌다.
여기에 큰 변화를 더한 것이 인쇄술이었다. 악보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던 시절에는 음악이 퍼지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악보를 인쇄로 찍어 낼 수 있게 되면서 한 작곡가의 작품이 훨씬 먼 지역까지 닿게 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조스캥 데 프레, 존 던스터플, 토머스 탤리스 등이 있다.
단선율이 한 사람이 부르는 독창이라면, 다성음악은 여러 사람이 각자 다른 선율을 부르는데도 전체가 하나의 조화로 들리는 합창에 가깝다. 같은 가락을 다 함께 부르는 제창(齊唱)과는 다르다. 각자의 길이 다른데도 어긋나지 않고 어울리게 만드는 기술, 그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양 음악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르네상스가 저문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유럽 음악을 보통 바로크라 일컫는다. 이 시기에 노래와 연극을 한데 묶은 오페라가 무대를 사로잡았고, 새로운 악기와 규모를 키운 오케스트라가 더해지며 음악은 한결 화려해졌다. 작곡가들은 비로소 대목마다 어떤 악기로 연주할지를 악보에 직접 명시할 수 있게 되었고, 곡의 짜임도 한층 치밀해졌다.
바로크의 서막을 연 인물로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꼽을 수 있다. 1567년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모나에서 나고 자란 그는 1590년 무렵 만토바 궁정에 연주자로 합류했고, 1601년경 그곳의 음악을 총괄하는 궁정 악장 자리에 올랐다. 1607년 선보인 〈오르페오〉는 오페라라는 양식의 가능성을 뚜렷이 입증한 작품으로, 그는 오페라를 온전한 예술로 끌어올린 공로로 흔히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린다. 평생 열여덟 편 안팎의 오페라를 썼다고 전하나, 당시 무대 음악은 공연이 끝나면 따로 보존하지 않는 일이 많아 지금 완본으로 남은 것은 〈오르페오〉를 포함해 셋뿐이다.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어 걸출한 작곡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 바로크를 대표하는 세 거장으로는 흔히 바흐와 헨델, 비발디가 거론된다.
바흐는 여러 선율을 동시에 엮는 대위법과 화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칸타타와 협주곡 등 여러 장르의 틀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깊은 감정을 빈틈없는 구조 안에 담아낸 그의 음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를 논할 때 거의 언제나 첫머리에 오른다. 그가 나오기 전까지 음악의 중심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였으나, 바흐를 분기점으로 독일이 음악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바흐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십 명의 음악가를 낸 명문이었으며,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훗날 런던에서 어린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가 숨진 1750년은 통상 바로크 시대의 끝으로 여겨진다.
헨델은 바흐와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두 사람은 평생 마주친 적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알린 그는 1710년 하노버 궁정의 악장이 되었지만, 더 넓은 무대와 후한 보수를 좇아 이내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런데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하필 그의 옛 고용주였던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랐다. 허락도 없이 떠나온 처지가 난처했던 헨델은, 왕이 강에서 뱃놀이를 즐길 때 직접 쓴 〈수상 음악〉을 연주해 마음을 돌리려 했고 끝내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741년에는 단 24일 만에 대표작 〈메시아〉를 써냈고, 이듬해 더블린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 말년에는 백내장 수술이 어긋나 시력을 잃었는데, 그를 집도한 인물은 앞서 바흐마저 같은 운명에 빠뜨린 떠돌이 안과 시술자였다.
악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익힌 비발디는 어린 나이에 음악의 토대를 다졌지만, 사실 신부 서품을 받은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피에타 보육원에 몸담으며 그곳 아이들에게 자신이 쓴 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이 연주가 베네치아를 넘어 유럽 곳곳에 소문나면서 그의 이름도 함께 높아졌다. 평생 500곡 가까운 협주곡을 남겼고,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다. 이 무렵의 기악곡은 대개 이렇다 할 표제 없이 음의 짜임 자체를 듣는 절대음악이었다. 〈사계〉가 남달랐던 점은 비발디가 네 계절이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음악에 입혔다는 데 있다. 이처럼 제목과 이야기를 담아 듣는 이에게 특정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을 표제음악이라 한다. 〈사계〉는 그의 사후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들어 다시 빛을 보았고, 지금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명곡이 되었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차이는 추상화와 풍경화의 차이에 가깝다. 절대음악은 제목 없는 추상화처럼 음의 짜임 그 자체를 감상하게 하고, 표제음악은 '봄'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처럼 듣는 이의 머릿속에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비발디의 〈사계〉는 새소리와 천둥, 얼어붙은 겨울을 음으로 묘사한 표제음악의 이른 사례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시점을 경계로 바로크가 막을 내리고 고전주의 음악이 열린다. 오늘날 음악 전반을 두루 가리키는 '클래식'이라는 말도, 좁게 보면 바로 이 고전주의 시대를 가리키는 데서 비롯됐다. 고전주의 음악은 일정한 규범과 형식의 질서를 존중한다. 그래서 양식을 뒤엎는 파격보다는 안정감과 균형미가 두드러진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귀족의 후원과 공연 수입이 더해져 작곡가가 먹고살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춰진 덕분에, 음악가들이 창작에 한층 집중할 수 있었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이 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은 소년 시절 성가대원으로 음악을 익혔고, 목소리가 변한 뒤에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들어가 오랜 세월 궁정 음악가로 일했다. 그곳에서 100곡이 넘는 교향곡과 60곡이 넘는 현악 사중주를 써내며 두 장르의 틀을 다졌다. 1780년대 빈에서는 모차르트와 가까이 지내며 서로 자극을 주고받았고, 1792년에는 젊은 베토벤을 문하에 두었다. 다만 베토벤이 스승의 지도 방식을 못마땅해해 사제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모차르트나 베토벤만큼 극적인 삶을 살지 않아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지만, 하이든은 고전주의 음악의 형식적 뼈대를 세운 핵심 인물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모차르트일 만큼, 그는 음악사에 또렷한 자취를 남긴 천재였다. 세 살 무렵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어를 다루었고 다섯 살에는 작곡까지 손을 댔다. 일찍부터 아들의 비범함을 알아본 아버지 레오폴트는 어린 그를 데리고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 여행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모차르트는 신동으로 이름을 얻었다.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자신을 고용한 대주교와 부딪친 끝에 그는 음악의 도시 빈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를 비롯한 대표작이 쏟아져 나왔고 그의 명성도 절정에 올랐다. 다만 천성이 사교적이고 씀씀이가 헤펐던 탓에, 벌이가 적지 않을 때조차 빚에 쪼들리곤 했다고 전한다. 살림이 차츰 펴이던 1791년, 그는 서른다섯에 돌연 숨을 거두었다. 경쟁자 살리에리가 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오래 떠돌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어 한낱 풍문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렇듯 짧은 생에도 그는 600곡 안팎의 작품을 남겼다.
베토벤은 빈에서 하이든과 살리에리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처음에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다가 점차 작곡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그러나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귀가 점점 들리지 않는 시련이 닥쳤다. 소리를 다루는 작곡가에게 청력 상실은 치명적이었고, 그는 절망 끝에 유서와도 같은 글을 남길 정도로 무너졌다. 그럼에도 끝내 이 장애를 딛고 〈월광 소나타〉와 운명 교향곡(교향곡 5번)을 비롯한 수많은 걸작을 써냈다. 섬세함과 격렬함을 오가는 그의 음악은 인간 내면의 온갖 감정을 깊이 있게 길어 올리는데, 정작 그것을 쓴 사람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경이로움이 한층 커진다. 괴팍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성정으로도 유명했지만, 1827년 그가 눈을 감자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나와 그를 떠나보냈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을 지켜본 이들 가운데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가 있었다. 음악을 하던 아버지 곁에서 자라 일찍부터 여러 갈래의 음악을 접한 그는, 빈에서 살리에리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기질 탓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는 창작을 멈추지 않고 서른 해 남짓한 생애에 1,000곡에 육박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중 절반이 넘는 600곡가량이, 시에 가락을 붙인 가곡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마왕〉, 〈보리수〉, 〈아베 마리아〉가 있다. 유독 베토벤을 존경했던 그는, 베토벤이 사망한 지 겨우 1년 뒤인 1828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전주의 음악은 주로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을 무대로 펼쳐졌다. 한편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는 한동안 그 주도권을 내준 상태였는데, 1800년대 초 조아키노 로시니가 등장하면서 다시 오페라 강국의 자리를 되찾았다. 재능을 일찍 드러낸 로시니는 스물네 살에 선보인 〈세비야의 이발사〉로 유럽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고, 서른일곱에 〈윌리엄 텔〉을 발표한 직후 돌연 작곡에서 손을 뗐다. 이른 은퇴의 배경에는 시대의 변화가 있었다. 그전까지 작곡가는 입에 풀칠하려 쉼 없이 곡을 찍어 내야 하는 고된 직업이었으나, 악보 인쇄가 제도로 자리 잡으며 수입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큰 성공으로 여유가 생긴 로시니는 은퇴 뒤 맛난 음식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로 노년을 보냈다.
1810년대를 지나며 유럽에서는 고전주의가 저물고 낭만주의가 떠올랐다. 낭만주의 음악은 정해진 틀과 규범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움을 좇았다. 또한 곡의 양보다 한 곡 한 곡의 완성도를 더 귀하게 여겼다. 금세 흘려보낼 곡을 여럿 찍어 내기보다, 오래도록 기억될 한 작품을 남기는 데서 더 큰 가치를 찾은 것이다. 마침 이 시기에는 더 큰 소리를 내도록 악기가 개량되고 연주 기술도 발전하면서, 연주자 한 사람이 무대 전체를 끌고 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독주가 큰 사랑을 받았다.
그 정점에 선 바이올린 연주자가 니콜로 파가니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그의 기교는 당대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고, 그의 공연장은 늘 청중으로 메워졌다. 문제는 청중 상당수가 그 기교를 두고 그가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대가라고 진지하게 믿었다는 점이다. 병적으로 길고 마른 손가락 등 기이한 인상까지 겹치며 이런 소문은 더욱 힘을 얻었고, 1840년 그가 숨지자 한동안 매장지를 구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편 피아노 쪽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로베르트 슈만이다. 1810년에 태어난 그는 처음에는 법학도였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음악으로 방향을 틀었다. 슈만은 스승의 딸이자 일찌감치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클라라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작 자신은 손가락을 다쳐 연주자의 길을 접고 작곡에 전념했는데, 곡에 문학적 의미를 새겨 넣는 작업으로 잘 알려졌고 평론가로서 슈베르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제자로 들인 브람스와 아내 클라라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점점 무너졌고, 결국 1856년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클라라와 브람스가 실제로 어떤 사이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 시대 음악가들의 삶은 유난히 굴곡지고 비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드물게도, 부와 재능과 평온을 두루 누린 인물이 있다. 은행가 집안의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유대계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은 그는, 자신의 연주를 직접 들은 대문호 괴테로부터 모차르트에 견주는 찬사를 받았다.
다 자란 어른의 품위 있는 대화에 견줄 만하다면,
같은 나이의 모차르트가 들려준 연주는 어린아이의 옹알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멘델스존의 연주를 들은 괴테의 평으로 전하는 말
그의 작품 중 가장 친숙한 것은 아마 결혼 행진곡일 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에 붙인 이 곡은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로이센 왕자의 혼례에서 울려 퍼진 뒤로, 결혼식을 장식하는 대표 음악으로 굳어졌다. 예식에 쓰이는 또 다른 곡으로 바그너의 〈로엔그린〉 중 혼례 합창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멘델스존과 바그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페라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바그너 역시 베토벤의 음악에서 받은 충격을 작곡가의 길에 들어선 계기로 꼽았다. 재능은 비범했으나 사생활이 문란하고 빚이 산더미였던 탓에 그는 늘 채권자에게 쫓겨 다녔는데,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후원자로 나서면서 이 곤경에서 단번에 벗어났다. 왕의 아낌없는 지원에 힘입어 바그너는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완성했고, 왕은 그만을 위한 오페라 전용 극장(바이로이트 축제극장)까지 세워 주었다. 다만 동화 속 같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고 음악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루트비히 2세는 끝내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고, 1886년 정신이상 판정과 함께 폐위된 직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한편 독일 민족주의 성향으로도 알려진 바그너의 음악과 사상은, 후대에 이르러 정치적 맥락에서 거듭 소환되기도 했다.
이 시대 피아노 연주에서 가장 빛난 인물은 프란츠 리스트다. 181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유럽 곳곳을 돌며 가는 도시마다 청중을 열광시켰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까지 갖춰 젊은 시절 적잖은 염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작곡가로서도 〈사랑의 꿈(리베스트라움)〉 같은 명곡을 남겼다.
리스트와 곧잘 나란히 거론되는 인물이 쇼팽이다. 181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리스트와 거의 같은 세대였던 그는, 스무 살을 갓 넘긴 무렵 파리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리스트를 비롯한 음악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리스트의 연주력은 높이 사면서도 작곡 능력만큼은 자신이 앞선다고 보았다. 리스트의 소개로 만난 작가 조르주 상드와는 9년간 연인으로 지냈으며,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곡을 써냈다. 섬세한 정서와 다채로운 주법으로 쇼팽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영역을 크게 넓혔다.
오페라에서는 두 거장이 시대를 양분했다. 프랑스에서는 1875년 조르주 비제가 〈카르멘〉을 무대에 올렸다. 자유분방한 집시 여인 카르멘과 그에게 빠진 군인 돈 호세의 파국을 그린 이 작품은 첫 공연에서는 냉대를 받았지만, 지금은 오페라 사상 손꼽히는 걸작으로 대접받는다. 정작 비제 자신은 초연 직후 서른여섯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등졌다.
이 시대 대중의 사랑을 가장 폭넓게 받은 오페라 작곡가는 베르디일 것이다. 바그너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두 사람은 끝끝내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디는 1842년 〈나부코〉가 성공을 거둔 것을 발판으로 〈아이다〉, 〈라 트라비아타〉, 〈오텔로〉를 잇따라 내놓으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중 〈나부코〉 속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제2의 국가(國歌)나 다름없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1901년 그가 눈을 감자 이탈리아는 국장(國葬)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멀리 동쪽 러시아에서 나온 차이콥스키 덕분에, 한동안 변방으로 여겨지던 러시아 음악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선율을 빚는 재능이 남달라 한 번 귀에 익은 가락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발레 음악으로 이름이 높다. 흔히 그의 '3대 발레'로 묶이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이 대표적이며, 특히 〈호두까기 인형〉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무대를 채우는 단골 작품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가장 아끼던 비창 교향곡(교향곡 6번)을 초연하고 불과 아흐레 만에 숨졌다. 공식 사인은 콜레라로 기록되었지만 미심쩍은 대목이 적지 않아, 그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9세기 끝자락, 음악은 다시 한 번 결을 달리한다. 흔히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파리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는 굳어 있던 형식의 틀을 풀어 헤치고 한결 유연한 어법을 밀고 나갔다. 또렷한 윤곽선을 그리기보다 부드러운 음색과 흐릿한 색채를 겹쳐, 그의 음악은 마치 안개 너머 풍경처럼 몽롱한 인상을 남긴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과 〈바다〉, 〈야상곡〉이 그 대표작이다.
드뷔시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한 또 한 명의 프랑스 음악가가 에릭 사티다. 그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낯섦이 거의 없을 만큼 감각이 앞서 있어, 정작 당대에는 그 새로움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신비주의에 심취하고 기행을 일삼아 주변에서는 그를 별난 사람으로 여겼다. 그가 쓴 곡들은 무대 위에서 집중해 감상하는 음악이라기보다, 카페 한구석에 은은히 깔리는 분위기 음악에 가까웠다. 방 안의 가구처럼 그 자리에 있되 누구의 주의도 빼앗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는 이런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 이름 붙였다. 결국 사티는 살아생전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궁핍하게 지내다,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다.
이 밖에 19세기를 빛낸 이름으로는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구스타프 말러, 드보르자크, 푸치니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거치며 서양 음악은 20세기의 한층 자유롭고 실험적인 흐름으로 흘러들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한 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세의 단 하나의 선율에서 시작해 여러 목소리가 겹치고,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로 화려해졌다가, 형식의 균형을 거쳐 개성의 자유로 나아간 여정이다. 아래 시대 구분의 연도는 칼로 자르듯 나뉘지 않고 서로 겹치며 이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한 줄기로 정리하면 이렇다. 음악은 본래 사라지는 소리였고, 악보라는 그릇이 정교해진 만큼 더 복잡하고 풍부한 음악이 후대에 남을 수 있었다. 교회가 지킨 단 하나의 선율에서 출발해, 인쇄술이 퍼뜨린 다성음악과 오페라의 화려함을 거치며 음악의 본고장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독일·오스트리아로, 다시 러시아로 넓어졌다. 그리고 형식의 균형을 추구한 고전주의를 지나, 개인의 감정과 개성을 마음껏 펼친 낭만주의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클래식'의 풍경이 거의 완성되었다. 우리가 무심코 듣는 결혼식의 행진곡 한 소절에도, 이렇게 2000년에 걸쳐 쌓인 긴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