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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 전력망 정책 · 약 14분

송전망은 왜 멈춰 서는가

송전선·변전소·HVDC 변환소를 둘러싼 주민 갈등과 수용성의 해부

발전소는 지어졌는데 전기가 흐르지 못한다. 동해안의 한 대형 석탄화력은 전력망이 받쳐 주지 못해 가동률이 10%대에 머물렀다. 발전 설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전기를 도시로 실어 나를 길이 막혀 있어서다. 그 길을 막아 세운 것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다. 이 글은 송전선과 변전소, 그리고 초고압직류송전(HVDC, High Voltage Direct Current) 변환소를 짓는 과정에서 반복되어 온 주민과의 마찰을 들여다보고, 왜 보상만으로는 갈등이 풀리지 않는지를 살핀다.

1무엇이 주민을 반대하게 만드는가

송전 설비를 둘러싼 반대는 흔히 "님비(NIMBY)"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그러나 현장을 들여다보면 반대의 동력은 서로 다른 네 갈래에서 나온다. 이 네 갈래는 따로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증폭한다.

① 재산권 침해 지가 하락 · 선하지 · 강제수용 ② 건강·환경 우려 전자파 · 소음 · 미관 ③ 절차적 정당성 일방적 추진 · 의견수렴 부재 ④ 편익–피해 불일치 전기는 도시가, 부담은 지역이 수용성 위기 → 사업 지연·중단
주민 수용성을 좌우하는 네 가지 축. 보상으로 풀 수 있는 것은 ①의 일부뿐이다.

첫째는 재산권이다. 송전선이 머리 위를 지나는 토지(선하지, 線下地)는 시세가 떨어지고, 철탑이 들어설 땅은 강제수용 대상이 된다. 토지의 가치 하락분이 제대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불만은 거의 모든 현장의 출발점이다.

둘째는 건강과 환경에 대한 우려다. 고압선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암을 유발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 변전소·변환소의 소음, 도시 경관의 훼손이 여기에 묶인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이 영역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과 사람들이 느끼는 위험 사이의 간격이 가장 큰 곳이다.

셋째는 절차적 정당성이다. 사업자가 입지를 먼저 정해 놓고 통보하듯 설명회를 여는 방식, 주민 의견을 형식적으로만 듣는 태도는 그 자체로 분노를 키운다. 밀양에서도 하남에서도 주민들이 공통으로 제기한 핵심은 "결정된 뒤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가장 근본적인 편익과 피해의 불일치다. 송전망으로 운반되는 전기는 대부분 수도권과 대도시가 쓰지만, 철탑과 변환소의 부담은 그 길목에 놓인 지역이 진다. 전기를 거의 쓰지 않는 마을이 송전선의 피해만 떠안는 구조에서, "왜 우리가"라는 물음은 정당하다.

비유로 이해하기

송전 설비는 고속도로·공항·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기피시설"의 한 종류다. 모두가 그 편익을 누리지만 누구도 자기 집 앞에 두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다만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소각장은 그 지역의 쓰레기를 처리하지만, 송전선은 흔히 다른 지역의 전기를 실어 나르기 위해 통과만 한다는 점이다. 받는 것 없이 길만 내어 주는 셈이어서, 단순한 "내 뒷마당 거부"를 넘어 형평성의 문제가 된다.

2세 개의 현장

한국에서 이 갈등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이어달리기였다. 갈등의 원형을 만든 밀양, 입지를 정하는 데만 13년이 걸린 동해안 HVDC,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첨예한 하남 변환소가 그 계보를 잇는다.

갈등의 원형 확충의 시대 2005.9 밀양 765kV 첫 반대집회 2008–13 궐기·충돌, 주민 2명 사망 2014.6 밀양 농성장 행정대집행 2014.7 송주법 시행 — 밀양 갈등의 산물 2024.8 하남시, 동서울 변환소 불허 2024.12 경기도 행정심판위, 한전 손 들어줌 2025.5 동해안–수도권 HVDC 전구간 마을합의 2025.9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시행 2026.1–5 정부 대체부지 검토 · 갈등 지속
송·변전 갈등의 연대표. 밀양의 상처에서 송주법이, 확충기의 정체에서 전력망 특별법이 나왔다.

밀양 — 갈등의 원형

경상남도 밀양의 분쟁은 신고리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내보내기 위한 765kV(킬로볼트) 초고압 송전선과 철탑이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시작됐다. 2005년 첫 반대집회 이후 약 8~9년에 걸쳐 충돌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주민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4년 6월 경찰 수천 명이 투입된 농성장 강제 철거로 물리적 충돌은 일단락됐지만, 마을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밀양이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은 보상 방식 그 자체에 있었다. 사업자가 마을 공동으로 지급하던 지원금의 일부를 개별 가구로 나눠 지급하는 방식을 도입하자, 합의에 응한 주민과 끝까지 반대한 주민 사이에 돈을 둘러싼 갈등이 번졌다. 보상이 위로가 아니라 분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100여 가구는 송전탑이 선 뒤에도 오랫동안 보상에 응하지 않았다.

동해안–수도권 HVDC — 13년이 걸린 길 찾기

동해안에 몰려 있는 대형 발전소의 전기를 수도권으로 끌어오기 위한 500kV HVDC 송전선로는 총길이가 280km에 이른다. 2015년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된 이 사업은 본래 2019년 준공을 목표로 했으나, 영월·정선·평창·횡성·홍천 등 선로가 지나는 여러 지역의 반대와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지연이 겹치며 입지를 정하는 데에만 13년이 흘렀다. 준공 시점은 2029년 이후로 밀려, 계획 대비 거의 10년이 늦어진 셈이 됐다.

다만 이 사업은 갈등이 풀리는 방향도 함께 보여 줬다. 정부가 송·변전 설비 주변지역의 지원 단가를 올리면서 반대하던 마을들과의 합의가 진전됐고, 2025년에는 송전선로가 지나는 전 구간 마을의 합의가 마무리됐다. 전기를 직접 쓰지 않는 지역이 국익을 위해 양보한 결과였지만, 그 양보를 끌어낸 것은 결국 강화된 보상과 지원이었다.

동서울변환소(하남) — 지금 가장 첨예한 현장

동해안 HVDC가 수도권에서 닿는 종착지가 경기 하남시의 동서울변전소다. 한국전력은 이곳의 기존 변전 설비를 건물 안으로 넣는 옥내화 공사와 함께, HVDC로 보내온 직류 전기를 교류로 바꾸는 변환소를 증설하려 한다. 문제는 이 부지가 수만 명이 사는 신도시 주거단지와 다수의 교육시설에 인접해 있다는 점이다.

2024년 8월 하남시는 전자파·소음·미관 문제와 주민 의견수렴 절차의 미비를 이유로 관련 인허가를 모두 불허했다. 한전이 제기한 행정심판에서 경기도 행정심판위원회는 같은 해 12월 하남시 처분이 부당하다며 한전의 손을 들어줬다. 법적 정당성은 확보됐지만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하남시는 변전소 옥내화 인허가는 처리하면서도 정작 변환소 증설 인허가는 주민 수용성 부족을 들어 미뤘다.

2025년 들어 한전은 변환소를 업무 공간과 주민 편의시설을 갖춘 복합사옥, 이른바 "에너지 허브"로 짓겠다는 안을 내놓았고, 하남시 경관심의는 주민 의견 반영을 조건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2026년 초 정부와 한전은 주민이 제안한 대체 부지들을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변환소 위치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지방선거 국면의 지역 현안으로까지 번지며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밀양이 "철탑이 지나가는 농촌"의 문제였다면, 하남은 "변환소가 들어서는 도심"의 문제다. 무대는 달라졌지만 갈등의 문법은 같다.

3전자파 — 과학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건강 우려의 한복판에는 늘 전자파가 있다. 이 주제는 사실과 불안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는 지점이어서, 양쪽 모두의 주장을 정확히 짚어 둘 필요가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 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는 2001년 송전선 등에서 나오는 극저주파(ELF, Extremely Low Frequency) 자기장을 발암성 분류 가운데 2B 등급, 곧 "발암 가능"으로 지정했다. 어린이 백혈병과의 약한 통계적 연관이 관찰됐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2B의 의미다. 이 등급은 인체 발암의 증거가 제한적이고 인과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경우에 부여된다. 같은 2B 목록에는 커피, 절임 채소 같은 일상적 항목도 들어 있다. 즉 "발암 가능 물질"이라는 말은 "암을 일으킨다"가 아니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는 신중한 유보에 가깝다.

비유로 이해하기

2B 등급은 법정에서의 "혐의 있음"과 "유죄"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 수사를 종결할 만큼 무혐의가 입증되지도 않았지만, 유죄를 선고할 만큼 증거가 충분하지도 않은 상태다. 그래서 "기준치 이내라 안전하다"는 말과 "안전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는 말은 같지 않다. 위험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안전의 증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간격이 불안의 토양이 된다.

그런데 HVDC 변환소를 둘러싼 전자파 논쟁에는 한 가지 자주 간과되는 기술적 사실이 있다. IARC의 2B 분류는 50~60Hz로 방향이 끊임없이 바뀌는 교류(AC) 자기장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반면 HVDC가 실어 나르는 것은 방향이 일정한 직류(DC)이고, 직류 선로가 만드는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정자기장(static field)이다. 이는 지구가 늘 띠고 있는 지자기장과 같은 성질의 장으로, 시변 자기장의 발암 연관 논의가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교류(AC) 송전선 직류(DC)·HVDC 선로 50/60Hz로 방향이 바뀌는 시변 자기장 시간에 따라 일정한 정자기장(static) IARC 2B(발암 가능) 분류의 대상 지구 자기장과 같은 성질의 장 단, 변환소에는 교류 설비·고조파·가청소음 등 별도 쟁점이 존재
교류와 직류 자기장의 차이. HVDC 선로 자체의 전자파 쟁점은 교류 송전선과 성질이 다르다.

그렇다고 변환소가 전자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변환소 내부에는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교류 설비가 함께 있고, 변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조파(harmonics)와 가청 소음, 미관 같은 별개의 쟁점이 존재한다. 실제 측정에서 한 변전소 울타리 앞 자기장은 전자레인지가 내뿜는 값의 수 % 수준에 그쳤다는 결과도 보고됐다. 핵심은 두 가지다. 직류 선로의 전자파를 교류 송전선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동시에 변환소의 소음·경관 문제는 전자파와 별도로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전자파 논쟁의 본질은 측정값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과학이 계산한 위험과 사람이 느끼는 위험 사이의 격차다. 내 집 위로 지나는 선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옆 변환소라는 조건은 같은 수치를 전혀 다른 무게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격차를 수치만으로 메우려는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해 왔다.

4제도는 어떻게 따라왔는가

갈등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제도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송전 설비 보상·지원 제도는 사실상 밀양의 상처 위에 세워졌다.

송주법(2014) — 밀양이 낳은 법

2014년 시행된 "송·변전설비 주변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줄여서 송주법은 그 전까지 법적 근거가 모호하던 송전선 주변 주민의 피해를 처음으로 제도화했다. 이 법은 크게 세 가지를 담았다. 선로가 머리 위를 지나는 토지에 대한 재산적 보상, 일정 범위 안의 마을에 대한 지원사업, 그리고 가장 가까운 주택 소유자가 집을 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주택매수청구권이다. 매수 대신 주거환경개선비용을 받는 길도 열렸는데, 그 금액은 대체로 1,200만~2,400만 원 범위에서 산정되도록 했다.

송전선로 주변지역 지원 범위 — 선로 바깥선 기준 거리 선로 바깥선 765kV 1,000m 500kV 800m 345kV 700m 재산적 보상지역 (765kV 지상선로: 양측 각 33m) 주변지역 지원사업 대상 범위
전압이 높을수록 지원 대상 범위가 넓다. 송주법은 거리를 기준으로 보상과 지원의 경계를 그었다.

지원과 보상의 범위는 전압에 따라 다르게 정해졌다. 송전선로 주변지역 지원 대상은 가장 바깥 전선으로부터 765kV는 1,000m, 500kV는 800m, 345kV는 700m 이내다. 변전소의 경우도 전압별로 사방 600~850m 범위가 지정된다. 가장 가까운 곳, 곧 765kV 지상 선로 양측 각 33m 이내는 재산적 보상의 대상이 된다. 거리로 피해를 재고 거리로 보상을 나눈 셈이다.

전력망 특별법(2025) — 속도를 위한 법

2025년 9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방향이 다르다. 송주법이 피해 보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법은 지연되는 전력망 건설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데 무게를 둔다. 국가가 기본계획과 실시계획을 세워 사업을 주도하고, 입지 선정과 인허가 절차에 특례를 둬 지자체 단계에서 막히는 시간을 줄이려는 것이 골자다. 동시에 주변지역 지원·보상의 특례와 공청회 요건도 함께 규정해, 절차를 빠르게 하는 만큼 주민과의 소통 장치를 제도 안에 끼워 넣으려 했다.

비유로 이해하기

두 법의 관계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액셀에 비유할 수 있다. 송주법이 피해를 살피며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라면, 전력망 특별법은 정체를 뚫기 위한 액셀이다. 문제는 두 페달을 동시에 세게 밟으면 차가 요동친다는 점이다. 국가가 속도를 낼 권한을 키울수록, 그 힘이 정당하게 쓰인다는 신뢰를 주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밀양에서 개별보상이 분열을 낳았듯, 잘못 설계된 가속은 더 큰 저항을 부른다.

5무엇이 실제로 통하는가

20년의 시행착오는 무엇이 갈등을 키우고 무엇이 풀어내는지에 대한 단서를 남겼다. 네 가지가 반복해서 확인된다.

지중화 — 기술이 여는 선택지

땅 위 철탑 대신 케이블을 땅속에 묻는 지중화는 경관 훼손과 선하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줄인다. 다만 교류 송전에서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지중화가 기술적으로 어려워진다. 여기서 HVDC의 강점이 부각된다. 직류 송전은 지중·해저로 길게 보낼 수 있는 한계 거리가 사실상 없어, 장거리 구간을 땅속이나 바다 밑으로 보내는 데 유리하다. 독일이 북부의 풍력 전기를 남부로 보내기 위해 추진하는 약 700km의 HVDC 사업은 거의 전 구간을 지중 케이블로 깔기로 했다. 약 100억 유로라는 막대한 비용과 농지·토양 영향이라는 새로운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가공선의 경관 갈등을 피하려는 선택이다. 지중화는 만능 해법이 아니라 비용을 주고 갈등을 더는 거래에 가깝다.

절차적 정의 — 언제, 어떻게 묻는가

밀양과 하남이 공통으로 보여 준 것은, 결정한 뒤에 통보하는 방식은 거의 반드시 저항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입지가 굳어지기 전 단계에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이 제안한 대체 부지를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검토할 때 대화의 여지가 생긴다. 하남에서 정부가 뒤늦게 대체 부지 검토에 나선 것도,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일단 제기되면 법적으로 정당한 사업조차 멈춰 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편익 공유 — 부담에 값을 매기다

동해안 HVDC의 전 구간 합의를 끌어낸 결정적 계기는 지원 단가의 상향이었다. 전기를 쓰지 않는 지역이 송전선의 부담만 지는 불일치를, 강화된 지원으로 일부나마 메운 것이다. 다만 밀양의 교훈처럼, 보상이 마을을 가르는 방식으로 설계되면 오히려 갈등을 키운다. 개인별 현금보다 마을 공동의 편익으로, 일회성보다 지속적인 형태로 설계될 때 보상은 제 기능을 한다.

신뢰 — 가장 비싼 자원

네 가지를 관통하는 것은 신뢰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어떤 보상으로도 단숨에 복원되지 않는다. 밀양에서 갈라진 마을이 끝내 회복되지 못했듯, 신뢰의 손상은 그 사업 하나로 끝나지 않고 다음 사업, 그다음 지역으로 비용을 전가한다. 전국에서 송전망이 동시에 막히는 오늘의 정체에는, 과거의 갈등이 남긴 불신의 누적이 깔려 있다.

6맺으며 — 속도와 정당성을 함께

전력망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인프라가 됐다. 재생에너지의 확대, 데이터센터를 비롯한 전력 수요의 폭증, 그리고 멀리 떨어진 발전과 소비를 잇는 과제가 모두 더 많은 송전선과 변환소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필요의 크기만큼, 길목에 놓인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일도 어려워졌다.

HVDC와 지중화 같은 기술은 갈등의 면적을 줄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술도 "왜 우리가"라는 형평성의 물음과 "결정된 뒤에 들었다"는 절차의 불만을 대신 풀어 주지는 못한다. 특별법으로 속도를 낼수록 절차적 정당성과 편익 공유, 그리고 소통은 더 중요해진다. 20년의 갈등이 남긴 가장 분명한 결론은, 송전망 건설이 공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신뢰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빠르게 짓는 것과 정당하게 짓는 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하나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