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종교 · 지정학
4천 년 전 한 사람의 결단에서 시작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같은 조상을 둔 세 종교는 어떻게 세 갈래 문명으로 뻗어 나갔으며, 왜 같은 도시 하나를 두고 멈추지 않는 갈등을 이어 가는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공통의 조상으로 여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는 약 24억 명, 이슬람 신자는 약 19억-20억 명, 유대교 신자는 약 1,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세 종교를 합치면 인류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이 세 믿음은 서로 다른 경전과 의례를 갖지만, 모두 약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한 유목민의 신앙에서 출발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고, 그래서 학계는 이 셋을 묶어 아브라함 계통 종교(Abrahamic religions)라 부른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가 어떻게 갈라졌고, 그 갈라짐이 어떻게 수천 년에 걸친 지정학적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결론을 앞당겨 말하면, 갈등의 본질은 흔히 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종교 분쟁'이 아니라 누가 약속의 진정한 상속자인가를 둘러싼,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가족사에 닿아 있다.
세 종교는 공통적으로 유일신을 믿지만 신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유대교는 야훼(엘로힘), 기독교는 하나님(성부·성자·성령), 이슬람은 알라로 부른다. 그러나 세 전통 모두 그 신이 아브라함에게 말을 건넨 바로 그 신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인류 문명이 처음 꽃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우르(Ur)라는 도시가 있었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세워진 이 도시는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을 자랑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보살펴 준다고 믿는 수많은 신을 거대한 신전에 모셨다. 풍요를 주는 신, 재앙을 막는 신, 가문을 지키는 신 등 헤아릴 수 없는 우상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그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서, 기존 질서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들은 것은 금으로 치장한 신전의 목소리가 아니라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정체불명의 명령이었다. 현대인에게는 단순한 이사처럼 들리지만, 당시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과 정체성을 모두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광야는 곧 죽음과 직결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다. 보이는 풍요를 버리고 보이지 않는 약속에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다. 사방이 뚫린 거친 땅에서 그가 기댈 곳은 오직 하늘뿐이었고, 절대자와의 소통만이 살길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유목의 조건이 새로운 신관을 빚어냈다.
땅의 신 vs 길의 신
농경민에게 신은 한곳에 머물며 수확을 책임지는 '지역 관리자'에 가깝다. 밭마다, 강마다 담당 신이 따로 있는 셈이다. 반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를 가든 따라오며 길을 안내하고 적에게서 지켜 주는 '단 한 명의 인도자'였다. 부서별 책임자가 가득한 조직이 아니라, 직접 계약서에 서명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한 명의 동행자. 유일신 신앙의 씨앗은 바로 이 척박한 길 위에서 움텄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만은 아니었다. 이미 원주민이 자리 잡고 있었고, 기근이 닥치면 이집트로 피난해야 할 만큼 고단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 시련 속에서 그는 신과 특별한 계약을 맺는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그 자손이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선언이었다. 이 계약은 훗날 유대인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여기게 만드는 선민(選民) 사상의 뿌리가 된다.
신은 큰 민족을 약속했지만, 현실의 아브라함은 막막했다. 아내 사라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고령이었고 세월은 무정하게 흘렀다. 조급해진 사라는 당시 관습에 따라 자신의 몸종이던 이집트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보냈고, 그렇게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그러나 얼마 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일어나 본처 사라가 둘째 이삭을 낳는다. 한 집안에 두 아들이 생기자 텐트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고,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내야 했다.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메마른 사막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이스마엘과 하갈을 구한 것은 신의 손길이었다. 신은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거친 광야의 주인이 되었다. 이삭이 가나안에 정착해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다면, 이스마엘은 아라비아반도로 퍼져 나가 아랍인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다른 어머니와 서로 다른 땅을 택한 이 이별이 수천 년 뒤 종교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두 형제를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한 사건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신의 시험을 받아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한 이야기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은 그 아들을 이삭으로 보고, 이삭을 약속의 적통이자 신앙의 정통으로 삼는다. 반면 이슬람의 관점은 정반대다. 무슬림은 제단에 오른 아들이 첫째 이스마엘이라고 믿으며, 그를 버려진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장 먼저 계승한 장자이자 메카의 성소 카바를 함께 세운 인물로 기린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뒤를 누가 잇느냐'는 물음은 단순한 족보 다툼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느 종교가 신의 진정한 대리인인가를 가리는 정통성의 문제이자, 곧 누가 약속의 땅의 주인인가라는 영토 주장으로 직결되었다. 로마 제국 시기 유대인들이 반란 끝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길을 걷는 동안,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주변 아랍 부족이었다. 이삭의 후손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그 땅의 새 주인이 되어 간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유대교'라는 체계로 굳어지는 데에는 또 한 번의 결정적 사건이 필요했다. 약 3천여 년 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그의 후손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나왔을 때다. 전승에 따르면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율법은 무질서한 광야에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사회적 법전이자 도덕적 기준이 되었다. 다른 민족이 왕의 명령에 복종할 때, 유대인은 신의 율법에 복종했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신의 법 아래 평등하다는 관념이 여기서 싹텄다.
선민 사상은 특권이 아니라 생존 전략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말은 우월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절박한 생존의 언어에 가까웠다. 강력한 군대도, 거대한 신상도 없는 소수 부족이 사방의 적 가운데서 버티려면 '우리를 택한 신이 우리를 지킨다'는 믿음이 필요했다. 자본도 인맥도 없는 작은 신생 기업이 단 하나의 계약서 하나를 붙들고 거대 기업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 믿음이 없으면 하루도 안심하고 잠들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에 예루살렘이라는 성소를 세우고 성전을 지었다. 솔로몬이 세운 첫 성전은 신이 지상에 머무는 유일한 거처로 여겨졌으나,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무너지고 민족은 포로로 끌려갔다. 훗날 재건된 두 번째 성전마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다.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남은 통곡의 벽은 바로 이 두 번째 성전을 둘러싸고 있던 서쪽 외벽의 일부다. 유대인에게 이 벽은 잃어버린 성전에 대한 그리움이자, 언젠가 올 메시아가 신의 나라를 재건하리라는 희망의 증거다.
이 엄격한 율법주의는 민족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외부와의 장벽을 만들었다. 유대교에서 신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었고, 구원의 약속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흐르는 자에게 국한되었다. 이 혈통과 율법이라는 단단한 껍질 덕분에 유대인은 수천 년의 유랑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폐쇄성이, 보편적 사랑을 외치며 갈라져 나올 다음 종교의 배경이 된다.
기원후 1세기 초, 유대 땅은 로마의 가혹한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다윗 왕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성전 제사장들은 로마 권력과 결탁해 민중을 외면했다. 본래 공동체를 지키는 장치였던 율법은 어느덧 복잡한 형식이 되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도 되는지, 부정한 음식의 기준이 무엇인지 같은 지엽적 논쟁이 신앙의 본질을 가리던 시기였다.
그러던 때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예수는 기존 종교 지도자들의 형식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신은 멀리 있는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존재라고 선포했다. 그는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던 이들과 함께 식사했고, 소외된 병자를 어루만졌다. 율법의 문자보다 그 밑바닥에 흐르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메시지는 유대교 주류에 충격을 안겼다. 특히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로 지칭하며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를 자처했을 때,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유대인에게 신은 감히 형상화할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존재였으나, 예수는 그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곁에 왔다고 선언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회원제 클럽의 문을 열다
유대교가 혈통이라는 '회원 자격'으로 운영되는 폐쇄적 클럽이었다면, 예수와 그를 따른 이들은 그 문턱 자체를 없애려 했다. 핵심은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였다. 출생 증명서가 아니라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클럽의 성격을 바꾼 것이다. 수천 년간 '우리만의 신'을 지켜 온 유대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혁이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핍박받던 노예와 여성과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예수는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발로 로마 총독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유대교 입장에서 그의 죽음은 율법을 어지럽힌 자의 최후였지만, 제자들에게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희생이자 새로운 계약의 완성이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며 유대 땅을 벗어나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 향했다.
이 확산의 결정적 전환점은 사도 바울이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그는 회심한 뒤, 신의 구원이 혈통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고 선포했다. 할례를 받거나 까다로운 식사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오직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이 보편성 덕분에 기독교는 무서운 속도로 교세를 확장했고, 기원후 313년 로마 제국은 마침내 기독교를 공인했다.
한 가지 차이가 형제를 원수로.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을 공유하면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느냐'는 단 하나의 차이가 두 집단을 갈라놓았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을 훼손하고 인간을 신격화한 이단이었고, 기독교에서 유대인은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었다. 이 신학적 대립은 훗날 유럽사에서 유대인이 겪을 수많은 차별의 불씨가 되었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서구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유대교의 경전(구약)을 바탕으로 하되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새 경전(신약)을 더함으로써,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계약을 완성한 진정한 계승자로 자부했다.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은 작은 땅을 넘어 유럽과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문명적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구를 장악하던 무렵, 사막 너머 아라비아에서는 또 다른 물결이 일고 있었다.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의 중심 메카는 동서를 잇는 거대한 무역 거점이자,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우상을 모시던 다신교의 성지였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성소 카바 안에는 무려 360여 개의 우상이 들어차 있었고, 부유한 상인들이 도시를 장악한 채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유일신을 향한 순수한 신앙은 재물의 연기 속에 가려져 있었다.
바로 이 혼돈의 시기에 한 사람이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무함마드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삼촌 밑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했고, 메카 근처 히라 동굴에서 삶과 죽음, 진정한 신의 존재를 명상하곤 했다. 그러던 약 610년경 어느 밤, 그는 "읽어라, 너를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음성을 듣는다. 무슬림은 이것을 아브라함이 들었고 모세와 예수가 받았던 그 계시의 연장선으로 본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임을 깨닫고, "오직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며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그의 가르침은 메카 상인들의 부당한 수익 구조를 위협했고, 박해는 극심해졌다. 결국 622년,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환영한 도시 야스리브(오늘날의 메디나)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건을 히즈라라 부르며, 이슬람력의 원년이자 이슬람이 종교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흩어진 아랍 부족들을 유일신 신앙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결집시켰다. 과거 부족 간 혈연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이제는 신앙 공동체 움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630년,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향 메카에 입성해 카바를 채우고 있던 수백 개의 우상을 모두 파괴했다. 아브라함이 세운 유일신 신앙의 원형을 회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63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아라비아반도는 수천 년의 다신교 전통을 버리고 빠르게 이슬람의 세계로 편입되고 있었다.
세 종교가 다투는 '최종 승인자'
세 종교는 같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신의 뜻을 누가 마지막으로 확정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같은 원본 문서를 두고 세 개의 편집팀이 각자 '우리 판본이 최종본'이라 주장하는 셈이다.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을, 기독교는 예수를,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최종 승인자로 본다. 무슬림에게 무함마드는 아브라함부터 이어진 예언의 마지막 마침표이며, 그 이전의 계시들이 인간에 의해 변질되었기에 이를 바로잡으러 보냄받은 최후의 예언자다.
이슬람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명확한 선을 긋는다. 무슬림은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닌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명으로 존경하지만, 그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신은 오직 한 분이며 인간이 신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 때문이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칼리프라 불리는 계승자들의 지도 아래 파죽지세로 뻗어 나갔다.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아 이슬람 제국은 동쪽으로 인도 접경, 서쪽으로 북아프리카를 거쳐 711년에는 이베리아반도(오늘날의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 거침없는 팽창의 한 동력은 의외로 관용이었다. 이슬람은 정복지 주민에게 개종을 강요하기보다, 세금을 내면 각자의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를 '책의 사람들'이라 부르며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고 신앙을 존중한 것이다. 종교 박해가 일상이던 중세에 이는 이례적인 태도였다.
8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황금기 동안 이슬람 문명은 과학, 철학, 의학, 예술에서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럽이 중세의 혼란에 갇혀 있을 때, 이슬람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훗날 유럽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문명적 번영 속에서도 세 종교 사이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양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장소, 예루살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지도에서 예루살렘은 그리 넓지 않은 작은 도시다. 그러나 이 땅만큼 많은 피와 눈물을 머금은 곳도 드물다. 세 종교가 수천 년간 이곳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루살렘이 거주지나 전략 요충지를 넘어, 각 종교가 믿는 신과의 접점이자 정체성을 증명하는 영적 심장이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을 두고 세 개의 서로 다른 서사가 충돌하는 구조가,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이곳을 갈등의 정점으로 몰아넣었다.
유대교에게 예루살렘은 약 3천 년 전 다윗 왕이 수도로 삼은 민족의 영원한 고향이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신이 지상에 머무는 유일한 거처였고, 성전이 두 번이나 무너지고 민족이 흩어진 뒤에도 유대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오늘날 통곡의 벽은 그 잃어버린 성전에 대한 그리움이자 회복의 희망이다.
기독교에게 예루살렘은 신앙의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장소다. 나사렛에서 온 청년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믿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은 고난의 길과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묘 교회는 기독교인에게 가장 거룩한 성지다.
이슬람 역시 예루살렘을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제3의 성지로 받든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어느 밤 천사의 인도로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했고, 그곳의 바위 위에서 하늘로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바위 사원의 황금빛 돔은 오늘날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그 바위에 있다.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그 바위는, 역설적으로 유대인이 성전의 지성소가 있었다고 믿는 바로 그 자리다. 하나의 돌을 두고 두 종교가 각자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위아래로 발을 딛고 서 있는 형국이다. 같은 성지가 유대인에게는 회복해야 할 과거의 영광이고, 기독교인에게는 구원의 성취이며, 무슬림에게는 예언자의 승천과 신의 권위가 서린 곳이다. 서로를 형제라 부르면서도 성소의 열쇠를 누가 쥐느냐를 두고 벌이는 소리 없는 전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도시의 돌담 사이를 흐른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한다는 성전(聖戰)을 선포했다. 당시 유럽은 봉건제의 혼란 속에 기사들의 무력이 넘쳐나던 시기였고, 교황의 부름은 그들에게 영적 구원과 세속적 영광을 동시에 약속했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에 수만 명이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새기고 동방으로 떠났다. 이것이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한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을 넘었을 때, 그곳은 지옥으로 변했다. 승리에 취한 군대는 성안의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의 신앙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호하며 공존해 온 이슬람 세계에, 이 학살은 지울 수 없는 원한을 남겼다.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던 전환점이었다.
약 한 세기 뒤인 1187년,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했다. 그는 과거 십자군의 학살과 대조적으로 기독교인의 안전한 퇴거를 보장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서로의 가슴에 새겨진 불신은 그 어떤 자비로도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져 있었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먼저 다쳤다. 십자군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역설적으로 두 종교 사이에 낀 유대인이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의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해 약탈하고 살상했다. "먼 이교도를 치러 가는데 가까운 불신자를 먼저 쳐야 한다"는 어그러진 논리였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 사이의 이 피의 전쟁은 가장 힘없는 쪽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이는 훗날 시온주의라는 민족 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배경 중 하나가 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이슬람의 기세는 유럽의 심장부까지 닿았다. 유럽에 이슬람은 극복해야 할 거대한 위협으로 각인되었고, 반대로 이슬람 세계는 훗날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겪으며 십자군의 기억을 저항의 명분으로 소환했다. 과거의 전쟁이 현대의 정서적 무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서구와 이슬람의 관계를 규정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얽힌 역사는 종교적 신념을 넘어 국가와 생존이라는 현실의 전쟁터로 옮겨 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게 된 영국은 유대인에게 그들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은 동시에 아랍인에게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워 준다면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나의 땅을 두고 두 민족에게 서로 다른 희망을 심어 준 이 모순적 약속이 중동 화약고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유럽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게 '우리만의 국가가 없으면 언제든 학살당할 수 있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1948년 마침내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다. 유대인에게는 2천 년 만의 독립이었으나, 그 땅을 지키며 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 추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약 70만 명을 넘는 아랍인이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이어진 수차례의 중동 전쟁은 한정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권의 싸움이었다. 특히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 전체를 장악했을 때, 유대인은 통곡의 벽 앞에서 수천 년 만의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지인 바위 사원을 이교도의 통제 아래 두게 된 무슬림에게 이 전쟁은 알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성전, 즉 지하드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신념이 국가의 이익과 결합하자 타협의 여지는 더욱 좁아졌다.
1990년대 초, 세계는 잠시 중동의 평화를 꿈꿨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측 지도자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 공존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5년, 성지를 양보하려 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한 극단주의자가 자국 총리를 암살했고, 팔레스타인의 강경파는 이슬람의 땅을 한 치도 내줄 수 없다며 폭력으로 맞섰다.
오늘날 갈등이 더욱 풀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종교 교리의 차이를 넘어 자원과 영토와 안보의 문제로 완전히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의 높은 장벽 안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은 자유를 억압하는 감옥의 간수처럼 보이고, 끊임없는 공격과 테러 위협 속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 세력일 뿐이다. 양측이 모두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며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다음 세대로 상속되고 있다.
'왜 그들은 지금도 싸우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유일신을 믿으며 같은 성지를 갈망하는 그들에게, 상대방은 자신의 신앙적 정당성을 비추는 가장 가까운 거울과 같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너무 닮았기에, 누가 진짜인가를 두고 더 격렬하게 다투는 것이다.
기술은 우주를 탐사하는 시대로 나아갔지만, 갈등의 최전선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정작 신념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들이다. 예루살렘 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과 학교에 가던 아이들이 정치적 계산과 종교적 명분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 종교 모두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를 보호하라'는 가르침은 포성 속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중동의 혼란을 흔히 '이해할 수 없는 종교 싸움'으로 치부하지만, 그 본질은 이토록 명확한 가족사와 혈통의 서사에 닿아 있음을 짚고 싶었다. 4천 년 전 한 유목민이 들었던 약속이 세 갈래로 갈라져 인류 절반의 신앙이 되었고, 그 갈래들이 단 한 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며 가장 길고 아픈 갈등의 막을 올렸다. 거울 속에서 괴물이 아니라 형제의 얼굴을 발견할 때, 비로소 그 오래된 비극은 멈출 단서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