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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새로 깔지 않고 전력을 더 보내는 법

송전탑을 새로 세우지 않고도, 이미 깔려 있는 선로에서 전력을 30-50퍼센트 더 끌어내는 기술이 있다. 비싸고 느린 신규 건설 대신, 싸고 빠른 다리를 놓는 접근이다.

전력망 · 그리드 강화 기술  |  2026년 5월

전기를 더 쓰고 싶다는 요구는 어디에서나 폭발하고 있다. 전기차가 늘고, 공장이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인공지능을 돌리는 데이터센터가 전례 없는 속도로 전력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정작 이 전기를 실어 나를 도로, 곧 송전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는 2026년 전력 전망 보고서에서 전 세계적으로 2,500기가와트(GW)가 넘는 발전소·저장장치·대형 부하 프로젝트가 전력망에 접속하지 못한 채 대기열에 묶여 있다고 진단했다. 발전소를 다 지어 놓고도 송전선이 모자라 연결을 못 하는 상황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한 시대의 표현을 빌려 지금을 "전기의 시대"라 부르면서, 정작 그 시대의 병목은 발전이 아니라 전력망 그 자체라고 못 박았다.

01송전망이 병목이 되었다

새 송전선로를 까는 일은 원래 느리다. 노선을 정하고, 토지를 확보하고, 환경 영향을 평가하고, 주민 동의를 얻고, 철탑을 세우기까지 보통 5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이 걸린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부지와 갈등, 인허가의 문제다. 그사이 전력 수요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 결과가 혼잡 비용이다. 전기가 특정 구간에 몰려 선로가 한계에 닿으면, 계통 운영자는 값싼 발전기를 일부러 멈추고 그 자리에 더 비싼 발전기를 돌려 흐름을 우회시킨다. 이때 발생하는 추가 비용이 혼잡 관리 비용인데, IEA에 따르면 독일·영국·미국에서 이 비용은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에 세 배로 뛰었다.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멀쩡한 풍력·태양광이 선로 부족 탓에 출력을 강제로 줄이는 출력제어가 늘어난다. 한편에서는 깨끗한 전기를 버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비싼 전기를 더 때는 모순이 일상이 된 셈이다.

핵심

새 선로를 까는 데 수년이 걸리는 동안 수요는 폭증한다. 그래서 떠오른 발상은 단순하다. 새로 깔기 전에, 이미 깔린 선로를 더 알차게 쓰자는 것이다. 이 일을 해내는 도구 묶음을 그리드 강화 기술(GETs, Grid-Enhancing Technologies)이라 부른다.

02핵심 발상: 선로에는 숨은 여유가 있다

전력망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 가장 전기를 많이 쓰는 순간의 최악 조건을 버티도록 설계된다. 문제는 그런 순간이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에 선로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용량의 한참 아래에서 돌아간다. 곧, 이미 깔린 전선 안에는 평소에 쓰지 않는 여유 용량이 잠들어 있다.

전선이 실어 나를 수 있는 전력의 한계는 결국 전선이 얼마나 뜨거워지는가로 정해진다. 전류가 흐르면 전선은 더워지고, 너무 뜨거워지면 늘어져 처지거나 손상된다. 그런데 전선을 식히는 것은 바깥 환경이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으면 같은 전선이라도 훨씬 더 많은 전류를 안전하게 흘릴 수 있다. 기존 방식은 이 환경을 따지지 않고 일 년 내내 가장 불리한 조건(무더운 날, 바람 없는 날)을 가정해 보수적인 고정 용량을 매겨 둔다. 한 연구는 이 고정 용량 방식이 좋은 조건에서도 선로 능력을 최대 30퍼센트까지 낮춰 잡아 둔다고 분석했다.

비유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떠올려 보자. 기존의 고정 용량은 일 년 내내 한 가지 속도로 고정된 표지판과 같다. 폭우·폭설처럼 가장 위험한 날을 기준으로 낮게 박아 둔 숫자다. 그런데 화창하고 노면이 마른 날에도 그 낮은 속도를 강제하면 도로는 늘 한가하게 비어 있게 된다. 그리드 강화 기술은 날씨와 노면을 실시간으로 읽어 표시 속도를 바꾸는 가변형 전광판에 가깝다. 안전한 날에는 더 빠르게, 위험한 날에는 더 느리게. 도로(전선)를 새로 깔지 않고도 같은 도로에서 더 많은 차를 안전하게 흘려보내는 셈이다.

추운 날·바람 → 용량 ↑ 무더운 날 → 용량 ↓ 새로 쓸 수 있는 여유 고정 용량 한계(정적) 평소 실제 흐르는 전력 시간 · 기상 조건의 변화 송전 용량 동적 송전용량(실시간) 정적 송전용량(고정)
같은 전선이라도 날씨에 따라 안전하게 흘릴 수 있는 양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고정 용량(아래 점선)은 최악의 날을 기준으로 낮게 박아 두어, 평소 대부분의 시간에 칠해진 면적만큼의 여유를 그냥 버린다.

03네 가지 도구

그리드 강화 기술이라는 우산 아래에는 성격이 다른 도구가 모여 있다. 좁은 의미로는 선로를 그대로 둔 채 운영 방식만 바꾸는 소프트웨어·제어 기술 세 가지(동적 송전용량, 고급 조류제어, 토폴로지 최적화)를 가리킨다. 여기에 선로 자체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물리적 보강(재도체화, 전압 승압)을 함께 묶어 폭넓게 부르기도 한다. 공통점은 하나다. 새 노선과 새 부지 없이, 이미 있는 길에서 용량을 끌어낸다.

① 동적 송전용량 DLR · Dynamic Line Rating

전선 곳곳에 센서를 달아 기온·바람·일사량과 전선의 실제 온도·처짐을 실시간으로 잰 뒤, 지금 이 순간 안전하게 흘릴 수 있는 용량을 계산해 운영에 반영한다. 앞의 가변 전광판이 바로 이것이다. 미국 내셔널그리드(National Grid)의 실증에서는 동적 용량이 기존 고정 용량을 넘어서는 경우가 전체 시간의 94-97퍼센트에 달했고, 평균 용량 증가는 47퍼센트였다. 뉴욕전력공사(NYPA)의 일부 선로에서는 최대 60퍼센트까지 늘릴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 PPL 전력은 동적 송전용량을 도입해 정전 없이 1년 안에 용량을 늘렸는데, 같은 효과를 선로 재건설로 얻으려면 3-5년에 긴 정전까지 감수해야 했다.

② 고급 조류제어 APFC · Advanced Power Flow Control

전기는 물처럼 저항이 적은 길로 알아서 몰린다. 그래서 어떤 선로는 과부하인데 바로 옆 선로는 텅 비는 일이 흔하다. 고급 조류제어 장치는 전력의 흐름을 일부러 밀고 당겨, 붐비는 선로에서 한가한 선로로 전기를 재분배한다. 도로로 치면 길목마다 흐름을 조절하는 가변 신호와 진입 차단기 같은 역할이다. 콜롬비아는 송전선 사고로 끊긴 구간을 이 기술로 우회시켜 3년 반 동안 최소 7천만 달러를 아꼈다. 모듈형 조류제어 장치는 전 세계 63킬로볼트(kV)에서 230킬로볼트급 선로에 450대 넘게 설치돼 운영되고 있다.

③ 토폴로지 최적화 TO · Topology Optimization

전력망은 수많은 선로가 그물처럼 얽힌 망이다. 토폴로지 최적화는 망 전체를 컴퓨터로 모형화한 뒤, 특정 차단기를 열고 닫아 전력이 흐르는 경로 자체를 다시 짠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막힌 길을 피해 우회로를 안내하듯, 붐비는 선로의 짐을 한가한 경로로 넘긴다. 미국 PJM 계통에서는 이 기술로 혼잡 비용을 30-50퍼센트 줄일 수 있고, 이는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도매 전력비 절감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있다. MISO 계통의 한 사례에서는 경로 재구성 한 번으로 주당 100만 달러 넘게 아끼면서 풍력 출력제어를 86퍼센트 줄였고, 대규모 정전 사고 때는 9개월간 약 4천만 달러를 절감하며 해당 구간 송전량을 최대 56퍼센트까지 끌어올렸다.

④ 재도체화·전압 승압 Reconductoring · Voltage Uprating

앞의 세 가지가 운영의 묘수라면, 이쪽은 선로 자체를 손본다. 재도체화는 같은 철탑에 걸린 기존 전선을 더 가볍고 더 많은 전류를 견디는 고성능 도체로 교체하는 일이다. 새 부지 없이 기존 선로의 부지(ROW, Right-of-Way)를 그대로 쓰면서, 한 노선의 송전 능력을 최대 두 배까지 키울 수 있다. 전압 승압은 같은 선로에 더 높은 전압을 걸어 전송량을 늘리는 방식이다. 신규 노선 건설보다 인허가와 공사가 훨씬 빠르다는 점에서 같은 갈래로 묶이지만, 운영 방식만 바꾸는 좁은 의미의 그리드 강화 기술과 달리 실제 설비를 교체한다는 점에서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한눈에 정리

동적 송전용량은 "이 전선이 지금 얼마나 견디는지" 정확히 재고, 고급 조류제어는 "전기를 어느 길로 보낼지" 밀고 당기며, 토폴로지 최적화는 "망의 경로 자체를 어떻게 다시 짤지" 새로 그린다. 재도체화는 "도로 포장을 더 튼튼한 것으로 갈아엎는" 일이다. 앞의 셋은 소프트웨어와 센서로 빠르게, 마지막은 공사를 통해 더 크게 용량을 늘린다.

04숫자로 보는 효과

그리드 강화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한마디로 가성비다. 들이는 돈과 시간에 견줘 풀어내는 용량이 크다. 신규 송전선이 수년에서 십수 년 걸리는 동안, 동적 송전용량은 1년 안에 정전 없이 깔 수 있다. 실증 수치들이 그 차이를 보여 준다.

2,500 GW
전 세계 전력망 대기열에 묶인 발전·저장·대형부하 프로젝트
1,200-1,600 GW
기술·제도 개선으로 단기에 접속 가능해지는 용량(IEA 2026)
+47%
동적 송전용량의 평균 용량 증가(내셔널그리드 실증)
~30%
고정 용량 방식이 좋은 조건에서도 낮춰 잡는 선로 능력

IEA의 진단은 분명하다. 새 전력망 건설을 서두르는 일은 여전히 필수지만, 단기적으로는 이미 있는 망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접속 용량을 풀 수 있다. 동적 송전용량·고급 조류제어 같은 기술과 비차단형 접속 같은 제도 개선을 함께 쓰면, 대기열에 묶인 1,200-1,600기가와트를 가까운 시일 안에 연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새 발전소를 더 짓는 것만으로는 이 모순이 풀리지 않는다는 점도 보고서는 분명히 했다.

속도는 이 기술의 가장 큰 무기다. 같은 용량을 확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하면 차이가 한눈에 보인다.

024 681012년 동적 송전용량 1년 미만 조류제어·토폴로지 1-2년 재도체화(기존 부지) 1-3년 신규 송전선로 건설 5-10년+
같은 송전 용량을 확보하는 데 걸리는 대략적인 시간. 부지 확보와 인허가가 필요 없는 운영·제어 기술은 1년 안팎, 기존 부지를 쓰는 재도체화는 수년, 새 노선 건설은 5-10년 이상이 걸린다. 수치는 사례별로 달라질 수 있는 대략값이다.

05만능은 아니다

가성비가 좋다고 모든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다. 동적 송전용량은 선로의 한계가 열, 곧 전선이 얼마나 뜨거워지는가로 정해질 때만 효과가 있다. 만약 그 구간을 묶고 있는 진짜 병목이 변압기 용량이나 차단기, 혹은 전압 안정도라면, 전선의 온도 여유를 아무리 정확히 재도 풀리지 않는다. 도구마다 맞서는 물리적 제약이 다르다는 뜻이다.

제도와 시장의 벽도 있다. 그리드 강화 기술 산업은 아직 비교적 새로워서, 도입에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그로 인한 편익을 어떻게 값으로 매길지에 대한 표준 틀이 정립돼 있지 않다. 여기에 더해, 전통적으로 송배전 사업자의 수익은 설비 투자 규모에 연동되는 경우가 많아, 값싼 운영 개선보다 큰 신규 건설을 선호하는 유인이 구조적으로 깔려 있다는 지적도 오래됐다. 기술이 준비돼 있어도 도입이 더딘 이유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있다.

토폴로지 최적화는 따로 주의가 필요하다. 거대한 실제 전력망에서 차단기를 열고 닫는 경우의 수는 천문학적이라, 최적의 경로를 빠르게 찾아내는 계산이 만만치 않다. 계산을 단순화하면 빨라지지만,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신뢰도를 해칠 위험이 있다. 그래서 현재는 실시간 자동 운영보다 운영 계획 단계의 보조 도구로 신중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균형 잡기

그리드 강화 기술은 새 송전망을 대체하지 않는다.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새 노선이 완공되기까지의 수년을 메우는 다리이자, 신규 건설과 함께 쓸 때 더 큰 효과를 내는 짝이다. IEA도 "새 전력망 건설은 여전히 필수"라는 전제 위에서 이 기술들을 권한다. 가장 싼 1메가와트는 새로 짓는 1메가와트가 아니라, 이미 전선 안에 잠들어 있는 1메가와트라는 점이 핵심이다.

06한국의 자리

한국은 이 논의에서 결코 한가한 처지가 아니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빠르게 늘면서 특정 지역의 송전망이 포화에 가까워졌고, 한국전력공사(한전, KEPCO)는 2024년 들어 전국 다수의 변전소를 이른바 계통관리변전소로 지정해, 포화 구간에서는 신규 발전설비의 계통 접속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발전소를 다 지어 놓고도 송전망이 받아 주지 못해 접속을 기다리거나 출력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세계의 대기열 2,500기가와트와 같은 결의 문제로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새 송전선로를 까는 일이 특히 어렵다는 데 있다. 전력 수요와 재생에너지 확대로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 절실하지만, 신규 노선은 환경 문제와 지역 갈등에 부딪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정부가 송전망 확충을 국가 주도로 밀어붙이는 특별법을 추진하는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대형 부하까지 가세하면서, 한정된 전력망을 더 알차게 쓰는 문제의 무게는 더 커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동적 송전용량과 조류제어 같은 도구는 새 노선이 완공되기까지의 시간을 버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된다. 한전이 데이터센터를 겨냥해 초전도 기반 전력망처럼 또 다른 접근을 함께 모색하는 것도, 결국 부지를 늘리지 않고 같은 길에서 더 많은 전력을 보내려는 같은 고민의 다른 갈래다. 어느 쪽이든 출발점은 동일하다. 새 길을 깔기 전에, 이미 깔린 길을 끝까지 짜내는 것이다.


전선을 새로 깔지 않고 전력을 더 보낸다는 발상은 마법이 아니다. 평소 버려지던 여유를 정확히 재서 쓰고, 막힌 길을 피해 흐름을 돌리고, 낡은 전선을 더 좋은 것으로 가는 일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요는 폭증하는데 새 길은 더디 놓이는 시대에 가장 빠르고 싼 첫 수가 여기에 있다. 결국 전력망의 미래는 새 선로를 얼마나 잘 짓느냐만큼이나, 이미 있는 선로를 얼마나 똑똑하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참고 자료

International Energy Agency, Electricity 2026 — Grids 및 관련 보도자료 (2026) · iea.org/reports/electricity-2026/grids
U.S. Department of Energy, Office of Electricity, Grid-Enhancing Technologies Improve Existing Power Lines · energy.gov
WATT Coalition, What are GETs? / About Transmission Topology Optimization · watt-transmission.org
Bipartisan Policy Center, Unlocking the Potential of Grid Enhancing Technologies (2026)
IEEE Spectrum, Dynamic Line Rating: A Solution to Grid Congestion (2025) · CleanTechnica (2026)
GridLab/UC Berkeley, Reconductoring with Advanced Conductors (2024) · PNAS (2024)
The Brattle Group / Grid Strategies, Improving Transmission Operation with Advanced Technologies
전기신문, 한전, 계통여유지역으로 발전자원 분산 유도 (2024) · 뉴시스·전자신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