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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 · 송전 인프라

선로를 뜯지 않고 송전 용량을 키우는 기술

그리드 강화 기술(GETs, Grid-Enhancing Technologies)—전선은 그대로 둔 채, 같은 철탑 위에서 더 많은 전기를 흘려보내는 다섯 가지 방법

전기를 만드는 일과 전기를 보내는 일은 다르다. 발전소는 2~3년이면 짓지만, 그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선 한 구간을 새로 놓는 데에는 부지 확보와 주민 협의, 환경 평가를 합쳐 흔히 10년 안팎이 걸린다. 그사이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전력 수요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햇빛과 바람으로 만든 전기는 정작 송전선이 모자라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한다. 발전 설비는 늘어나는데 그 전기가 흐를 길이 막혀 있는 것, 이것이 오늘날 전력망이 마주한 가장 조용한 병목이다.

해법은 둘 중 하나로 보인다. 길을 새로 내거나, 있는 길을 더 잘 쓰거나. 새 길을 내는 데 10년이 걸린다면, 그 10년을 기다리는 동안 기존 선로에서 짜낼 수 있는 용량을 먼저 끌어내는 편이 합리적이다. 바로 이 발상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 그리드 강화 기술(GETs)이다. 핵심은 단순하다. 선로를 새로 건설하지 않고, 기존 송전선이 안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전기의 양을 늘린다.

핵심 메시지 GETs는 송전선 신설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새 선로가 완공되기까지의 시간을 벌어 주고, 이미 깔린 설비에서 숨어 있던 용량을 안전하게 끌어내는 기술이다.

01 — 출발점송전선의 ‘진짜’ 용량은 표시된 값보다 크다

송전선에 적힌 용량은 전선이 물리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아니라, 안전을 위해 미리 깎아 놓은 보수적인 약속값이다. 송전선의 용량을 제한하는 가장 흔한 요인은 전류가 흐를 때 발생하는 열이다. 전류가 많아질수록 도체는 뜨거워지고, 뜨거워진 금속은 늘어나 아래로 처진다(이를 이도, sag라 한다). 너무 처지면 나무나 지면, 도로와의 안전 거리가 무너지고, 장기적으로는 도체 자체가 약해진다. 그래서 송전선마다 ‘이 온도를 넘기지 말 것’이라는 열적 한계가 정해져 있다.

문제는 이 한계를 전류로 환산할 때 사용하는 가정이다. 전통적인 정적 정격(static rating)은 일 년 중 가장 가혹한 조건—한여름의 높은 기온, 거의 불지 않는 바람, 내리쬐는 햇볕—을 통째로 전제한다. 바람이 전선을 식혀 주는 효과를 사실상 0으로 놓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날씨는 대부분 그보다 너그럽다. 선선한 봄가을, 바람이 부는 밤이면 같은 전선이 같은 온도에서 훨씬 많은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다. 연구들은 정적 정격이 좋은 기상 조건에서조차 송전선 용량을 최대 30% 정도 덜 쓰게 만든다고 본다.

고속도로 제한속도 같은 것

송전선의 정적 정격은 ‘폭우가 쏟아지고 시야가 가장 나쁜 날’을 기준으로 정해 놓은 제한속도와 같다. 그런 날에는 안전하지만, 화창하고 길이 한산한 날에도 같은 속도를 강요하면 도로는 늘 제 성능 이하로만 굴러간다. 그리드 강화 기술은 도로를 넓히지 않고도 ‘오늘의 실제 노면 상태’에 맞춰 안전하게 더 빨리 달리게 해 주는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두 갈래의 전략이 나온다. 하나는 날씨와 운영 상황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이미 있는 여유를 끌어내는 방향(동적 송전용량, 조류제어, 토폴로지 최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전선이나 운전 전압 자체를 더 능력 있는 것으로 바꿔 한계 자체를 끌어올리는 방향(재도체화, 전압 승압)이다. 앞쪽은 빠르고 싸지만 얻는 폭이 날씨·구조에 좌우되고, 뒤쪽은 확실하게 용량을 키우지만 더 많은 공사와 비용을 요구한다.

02 — 지도 그리기GETs란 무엇이고, 어디까지를 가리키나

그리드 강화 기술은 하드웨어이거나 소프트웨어이거나, 또는 둘의 결합으로, 기존 송전선의 용량·효율·신뢰성을 신규 건설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높이는 기술로 정의된다. 다만 ‘무엇까지를 GETs로 부르느냐’는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다. 송전 기술 업계 단체인 WATT 연합(WATT Coalition)은 좁게 세 가지—동적 송전용량, 고급 조류제어, 토폴로지 최적화—를 든다. 미국 전력연구원(EPRI, Electric Power Research Institute)의 관련 이니셔티브는 여기에 고급 도체(재도체화)를 더해 네 가지를 핵심으로 꼽는다. 전압 승압처럼 더 큰 공사를 수반하는 방식은 보통 ‘기존 회랑(ROW, Right-of-Way) 용량 증대’라는 더 넓은 가족으로 묶인다.

이 글에서는 실무에서 함께 거론되는 다섯 가지를 모두 다루되, 그 성격이 ‘운영을 영리하게 바꾸는 쪽’에서 ‘설비를 바꾸는 쪽’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따라간다. 같은 목표—새 선로 없이 용량 확보—를 두고도, 비용과 속도와 확실성이 기술마다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용량 확보 (큼) 운영 변경 설비 교체 → 비용·공사 난이도 (높음) 좁은 정의의 GETs 토폴로지 최적화 동적 송전용량 고급 조류제어 재도체화 전압 승압 (신규 송전선)
다섯 가지의 위치. 왼쪽 아래일수록 빠르고 싸지만 얻는 용량이 작거나 날씨·구조에 좌우되고, 오른쪽 위로 갈수록 확실하고 크게 키우지만 공사와 비용이 늘어난다. 점선 안의 세 가지가 업계가 ‘GETs’로 좁게 부르는 기술이며, 재도체화·전압 승압은 더 넓은 회랑 용량 증대 가족에 속한다. 위치는 개념적 비교이며 절대값이 아니다.

03 — 첫 번째 기술동적 송전용량(DLR): 오늘의 날씨만큼 더 보낸다

동적 송전용량(DLR, Dynamic Line Rating)은 가장 직관적인 GETs다. 송전선 주변의 실제 조건—기온, 바람, 햇볕, 때로는 도체의 실제 온도나 처짐·장력—을 센서와 기상 자료로 읽어, 그 순간 안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전류 한계를 실시간으로 다시 계산한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전선이 잘 식는 날이면 한계가 올라가고, 무덥고 무풍한 날이면 한계가 내려간다. 전선을 한 가닥도 바꾸지 않고, ‘이 선로의 진짜 능력은 지금 얼마인가’를 계속 갱신하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 빨리 식는 국물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을 식힐 때, 가만히 두는 것보다 부채질을 하면 훨씬 빨리 식는다. 송전선도 마찬가지여서, 바람은 도체를 식히는 가장 강력한 자연 냉각기다. 정적 정격은 ‘부채질이 전혀 없는 최악의 날’만 가정해 놓은 값이고, 동적 송전용량은 ‘지금 실제로 부는 바람’을 계산에 넣는다. 바람이 식혀 주는 만큼, 같은 안전 온도에서 더 많은 전류를 보낼 여유가 생긴다.

한 단계 낮은 사촌으로 환경반영정격(AAR, Ambient-Adjusted Rating)이 있다. AAR은 기온과 햇볕의 예보값만 반영하고 바람의 냉각 효과는 빼는, 정적 정격보다는 정교하지만 완전한 DLR보다는 보수적인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 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가 2021년 12월 발효한 Order 881을 통해, 송전사업자가 최소한 이 환경반영정격을 적어도 매시간 갱신해 사용하도록 의무화했고, 그 이행 시한이 2025년 7월 12일이었다. 주의할 점은, 이 명령이 의무화한 것은 완전한 DLR이 아니라 그 입구에 해당하는 AAR이라는 사실이다. 바람까지 반영하는 본격적 DLR은 권장되되 강제되지는 않는다.

송전 용량 하루 24시간 → 0시 정오 24시 정적 정격 (고정) 동적 송전용량 (실시간) 추가로 쓸 수 있는 여유 용량 무덥고 바람 없는 한낮엔 여유가 줄어든다
정적 정격 대 동적 송전용량. 고정된 정적 정격(점선)은 한 해 내내 같은 값으로 묶여 있다. 동적 송전용량(실선)은 바람과 기온에 따라 출렁이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적 정격을 웃돈다. 그 차이(음영)가 선로를 새로 짓지 않고도 끌어낼 수 있는 여유 용량이다.

실제 도입 사례에서 나타난 이득의 폭은 결코 작지 않다. 영국 내셔널그리드(National Grid)의 기술 책임자는 자사 도입분에서 동적 송전용량이 정적 정격을 94~97%의 시간 동안 넘어섰고 평균 47%의 용량 증가를 보였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2024년 AES와 LineVision이 오하이오·인디애나에 걸쳐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단일 DLR을 설치해 평균 용량을 약 61% 끌어올렸고, 센서 설치는 2주, 실효적 신호 제공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 2025년 미네소타에서는 Great River Energy가 Heimdall Power와 함께 10개 선로·약 175마일(약 280km)에 적용해 첨두 시간 용량을 63% 높이고 5년간 약 320만 달러의 절감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47%
영국 내셔널그리드 도입분
평균 용량 증가
+61%
AES·LineVision(2024)
오하이오·인디애나 평균
~30%
정적 정격이 통상
덜 쓰게 만드는 폭

동적 송전용량의 매력은 비용과 속도에 있다. 무거운 토목 공사가 필요 없고, 센서와 소프트웨어를 얹는 데 수개월이면 충분하다. 다만 한계도 분명하다. 얻는 이득이 날씨에 묶여 있어, 정작 전력 수요가 몰리는 무덥고 바람 없는 한여름 오후에는 여유가 가장 적다. 또 송전선의 진짜 능력을 정확히 읽으려면 신뢰할 수 있는 기상 관측과, 그 값을 시장과 운영에 반영하는 제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04 — 두 번째 기술고급 조류제어(APFC): 막힌 선로의 짐을 한산한 선로로

전기는 운전자가 길을 고르는 자동차와 다르다. 두 지점을 잇는 송전선이 여럿이면, 전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물리 법칙에 따라 ‘저항이 가장 적은 길’로 더 많이 몰린다. 그래서 어떤 선로는 한계까지 차서 병목이 되는데, 바로 옆 선로는 절반도 안 차 한산하게 비어 있는 일이 흔하다. 망 전체로 보면 용량이 남는데도, 짐이 한쪽으로 쏠려 전체가 그 한 선로에 발목 잡히는 것이다.

고급 조류제어(APFC, Advanced Power Flow Control)는 이 쏠림을 능동적으로 바로잡는다. 핵심 장치는 송전선에 직렬로 삽입하는 전력전자 설비로, 그 선로가 ‘제시하는 저항’을 조금 키우거나 줄여 전류를 밀어내거나 끌어온다. 과부하 선로의 저항을 살짝 키우면, 흐름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한산한 옆 선로로 옮겨 간다. 이런 장치들을 통칭해 유연송전시스템(FACTS, Flexible AC Transmission Systems)이라 부르며, 최근에는 필요에 따라 여러 대를 모듈처럼 붙였다 떼는 분산형 제품이 보급되고 있다.

꽉 막힌 차선으로 유도하는 가변 표지판

나란한 두 차선 중 한쪽만 꽉 막히고 다른 쪽은 텅 비는 일이 있다. 도로 위 가변 표지판이 ‘이쪽은 잠시 통행 제한, 옆 차선 이용’ 신호를 켜면 차들이 빈 차선으로 옮겨 가 전체 흐름이 좋아진다. 고급 조류제어 장치는 송전선에 달린 그런 가변 표지판이다. 다만 ‘차’가 아니라 ‘전류’를 옆 선로로 떠미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적용 전 A B 과부하 110% 여유 40% 적용 후 A B 조류제어 85% 80%
부하의 재분배. 적용 전에는 위 선로가 한계를 넘고 아래 선로는 비어 있다. 조류제어 장치가 위 선로의 흐름 일부를 아래로 밀어내면, 두 선로가 고르게 차면서 같은 회랑에서 더 많은 전력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다.

현장 효과는 메가와트(MW) 단위로 잡힌다. 영국 내셔널그리드는 세 개 변전소에 48대의 분산형 조류제어 장치를 배치해 약 1.5기가와트(GW)의 신규 재생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약 10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호주에서는 같은 계열의 장치가 뉴사우스웨일스로 약 170MW를 추가로 보낼 수 있게 하면서 최대 2억 6,800만 달러의 순편익이 기대된다고 보고됐다. 핵심은, 발전소도 송전선도 새로 짓지 않고 ‘이미 있는 회랑의 활용도’만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05 — 세 번째 기술토폴로지 최적화: 망의 길을 다시 그린다

송전망은 수많은 선로가 그물처럼 얽힌 구조다. 그리고 그 그물에는 평소 닫혀 있거나 열려 있는 수많은 개폐기(스위치)가 박혀 있다. 토폴로지 최적화(Topology Optimization)는 이 스위치들을 선택적으로 여닫아, 전류가 흐르는 경로 자체를 재구성한다. 막힌 선로를 우회하도록 길을 바꿔 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송전망은 처음 설계된 뒤 조금씩 증설되며 자라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상황에는 최적이 아닌’ 경로 구성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시간 길 안내 앱

내비게이션 앱은 도로망 전체의 정체 정보를 읽어, 막힌 길을 피해 가장 빠른 우회로를 안내한다. 토폴로지 최적화는 송전망의 길 안내 앱이다. 어느 선로가 막혔는지, 어디에 여유가 있는지를 종합해 ‘이 스위치를 열고 저 스위치를 닫으면 흐름이 우회한다’를 찾아낸다. 도로를 새로 깔지 않고, 있는 길을 다르게 묶는 것만으로 정체가 풀린다.

적용 전 G 1 2 L 혼잡 경로 열린 스위치(미사용) 적용 후 (스위치 재구성) G 1 2 L 우회 경로 (여유 활용) G: 발전 측 · L: 부하 측 · 1·2: 중간 변전소
경로의 재구성. 적용 전에는 발전 측(G)에서 부하 측(L)으로 가는 전력이 혼잡한 윗길로 몰린다. 스위치를 여닫아 비어 있던 아랫길을 살리면 흐름이 우회하면서 병목이 풀린다. 선로를 새로 깔지 않고, 같은 그물을 다르게 묶는 것만으로 용량이 살아난다.

토폴로지 최적화의 가장 큰 강점은 거의 공짜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미 깔린 스위치를 여닫는 일이므로, 한 번의 재구성에 드는 물리적 비용은 수백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효과는 그에 비해 크다. 미국 중서부계통운영기구(MISO, Midcontinent Independent System Operator)는 토폴로지 최적화를 시범 적용해 2024년 한 해에만 약 2,400만 달러의 혼잡비용을 줄였고, 한 사업자는 단 한 번의 재구성으로 5,700만 달러가 넘는 혼잡비용 절감을 얻은 사례를 보고했다. 미국 남서부전력공동망(SPP, Southwest Power Pool)의 2022년 자료를 되짚은 한 분석에서는, 토폴로지 최적화를 충분히 적용했다면 송전 과부하를 98%까지 줄이고 그에 따른 혼잡비용을 85% 낮출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도입에 보통 6개월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이다.

물론 길을 바꾸는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스위치를 재구성하면 고장 한 건이 났을 때 망이 어떻게 견디는지(이른바 N-1 신뢰도)가 달라지므로, 모든 우회안은 안전 검토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토폴로지 최적화는 ‘소프트웨어가 후보를 찾고, 운영자가 신뢰도를 확인해 승인하는’ 절차와 함께 자리 잡아야 제 가치를 낸다.

06 — 네 번째 기술재도체화: 같은 철탑에 더 능력 있는 전선을 건다

앞선 세 기술이 ‘운영을 영리하게 바꾸는’ 쪽이었다면, 재도체화(reconductoring)는 ‘설비를 바꾸는’ 쪽의 첫 단계다. 기존 철탑과 회랑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걸린 전선만 더 능력 있는 신소재 도체로 교체한다. 전통적인 송전 도체는 흔히 강심 알루미늄 연선(ACSR, Aluminum Conductor Steel-Reinforced)이라 불리는데, 가운데에 강철 심을 두어 장력을 버티고 그 둘레를 알루미늄으로 감싸 전기를 흘린다. 강철 심은 튼튼하지만, 전기를 거의 나르지 못하면서 무겁고, 뜨거워지면 잘 늘어나 전선이 처진다.

고급 도체는 이 구조를 다시 짠다. 강철 심을 탄소섬유나 세라믹 복합재로 바꾸면 더 강하면서도 열에 덜 늘어나, 같은 처짐 한도 안에서 훨씬 높은 온도까지 운전할 수 있다. 동시에 둘레의 알루미늄을 완전 연질로 쓰거나 단면을 사다리꼴로 다듬어 같은 굵기 안에 더 많은 알루미늄을 채운다. 결과적으로 같은 직경의 전선이 약 두 배의 전류를 안전하게 흘려보낸다. 철탑도 회랑도 그대로 쓰면서 용량만 키우는 셈이다.

기존 도체 (강심 알루미늄) 강철 심 둥근 알루미늄 가닥 · 운전온도 낮음 고급 도체 (복합재 심) 복합재 심 알루미늄 단면 ↑ · 처짐 ↓ · 운전온도 ↑ 약 2배 용량 직경은 같게 — 기존 철탑·회랑 재사용
도체 단면의 차이. 왼쪽 기존 도체는 무거운 강철 심과 둥근 알루미늄 가닥으로 이뤄진다. 오른쪽 고급 도체는 가볍고 열에 덜 늘어나는 복합재 심에, 단면을 다듬어 더 많은 알루미늄을 채운다. 직경이 같아 기존 철탑을 그대로 쓰면서도 약 두 배의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다.

굵기는 그대로, 소재만 바꾼 호스

마당에 깔린 호스가 자주 막히고 약하다고 해서 굳이 더 굵은 호스로 갈아 끼우고 땅을 다시 팔 필요는 없다. 같은 굵기여도 더 높은 압력과 열을 견디고 안쪽이 매끈해 물이 잘 흐르는 신소재 호스로 바꾸면, 기존 배관 통로를 그대로 쓰면서 더 많은 물을 보낼 수 있다. 재도체화는 송전선에서 바로 그 ‘소재 교체’에 해당한다.

경제성의 핵심은 ‘무엇을 아끼느냐’에 있다. 고급 도체 자체는 단위 길이당 기존 도체보다 두세 배 비싸다. 그럼에도 재도체화 사업의 단위 길이당 총비용은 신규 건설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가장 비싸고 오래 걸리는 부분—새 부지 확보와 새 철탑 건설—을 통째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골드만공공정책대학원과 그리드 컨설팅 기관 GridLab이 2024년 발표한 연구(미국 국립과학원회보 게재)는 이 점을 정량으로 보여 준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 송전선의 약 98%가 50마일(약 80km) 미만으로 재도체화에 적합하며, 고급 도체로의 대규모 교체는 같은 회랑 안에서 송전 용량을 최대 두 배까지 늘릴 수 있다.

약 2배
같은 회랑에서
늘릴 수 있는 용량
98%
재도체화에 적합한
미국 송전선 비율(50마일 미만)
1,800억$
2050년까지 추정되는
계통 비용 절감

같은 연구는 신규 건설만 할 때보다 약 20% 더 쓰는 정도로 2035년까지 확보 가능한 송전 용량을 네 배 가까이 늘릴 수 있고, 이렇게 절약되는 계통 비용이 2050년까지 약 1,8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실제 적용 사례에서도 캘리포니아의 한 사업은 선로 용량을 40% 넘게, 텍사스의 한 사업은 거의 두 배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고됐다. 다만 재도체화는 전선 교체 작업 동안 일정 기간 선로를 멈춰야 하고, 길이가 긴 선로는 구간을 나눠 진행해야 하는 등, 운영상의 준비가 필요한 ‘공사’라는 점에서 동적 송전용량이나 토폴로지 최적화보다 무겁다.

07 — 다섯 번째 기술전압 승압: 같은 회랑, 더 높은 전압

회랑을 보존하면서 용량을 키우는 가장 무거운 방법은 운전 전압 자체를 끌어올리는 전압 승압(voltage uprating)이다. 송전선이 보낼 수 있는 전력은 대략 ‘전압 × 전류’에 비례하므로, 같은 전류라도 전압을 높이면 더 많은 전력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송전 전압이 154킬로볼트(kV), 345kV, 765kV로 단계가 나뉘어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낮은 전압 회랑을 한 단계 높은 전압으로 끌어올리면, 같은 길을 따라 훨씬 많은 전력을 보낼 수 있다.

같은 관, 더 높은 수압

수도관 하나로 더 많은 물을 보내고 싶을 때, 관을 굵히는 대신 수압을 높이는 방법이 있다. 다만 압력을 올리면 관의 이음매와 벽이 그 압력을 견뎌야 한다. 전압 승압도 똑같다. 전압을 높이면 더 많은 전력이 흐르지만, 전선을 잡아 주는 애자(절연 장치)와 주변 이격 거리, 변전소 설비가 모두 높아진 전압을 견디도록 보강돼야 한다.

그래서 전압 승압은 회랑 보존 가족 중에서도 가장 자본집약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쪽에 속한다. 애자 교체와 절연 거리 확보를 위해 전선 거는 높이를 올리거나 철탑을 보강해야 하고, 양쪽 변전소의 변압기와 차단기도 함께 바꿔야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선로를 새로 짓는 것’에 가장 가까운 선택지다. 따라서 전압 승압은 모든 곳에 두루 쓰기보다, 그 회랑의 전략적 가치가 큰 소수 구간에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빠르고 가벼운 운영형 GETs로 먼저 시간을 벌고, 그래도 부족할 때 비로소 검토하는 ‘마지막 카드’에 가깝다.


08 — 숫자로 보는 경제성왜 이렇게 빨리 회수되나

그리드 강화 기술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다. 막힌 송전선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돈이다. 값싼 발전기가 멀쩡히 돌 수 있는데도 송전선이 막혀 더 비싼 발전기를 대신 돌려야 할 때, 그 차액이 ‘혼잡비용’으로 소비자 요금에 얹힌다. 미국에서는 2024년 한 해 송전 혼잡비용이 120억 달러를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이, 선로를 새로 짓지 않고도 줄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같은 병목을 푸는 데 드는 비용은 선택한 방법에 따라 수십 배까지 벌어진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송전사업자 PPL Electric은 한 혼잡 구간을 두고 세 가지 방안을 비교했다. 동적 송전용량을 적용하면 100만 달러 미만, 재도체화는 약 2,000만 달러, 선로 재건설은 4,000만~6,000만 달러가 들 것으로 추산됐다. PPL은 동적 송전용량을 택해 100만 달러 미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용량을 10~30% 늘렸고, 약 6,400만 달러로 추정되는 혼잡비용 절감 효과를 얻었다.

같은 병목, 다른 해법의 비용 (PPL Electric 사례) 0 2천만$ 4천만$ 6천만$ 동적 송전용량 100만$ 미만 재도체화 약 2,000만$ 선로 재건설 4,000만~6,000만$
해법에 따른 비용 차이. 같은 혼잡 구간을 두고도 동적 송전용량은 100만 달러 미만, 재도체화는 약 2,000만 달러, 재건설은 4,000만~6,000만 달러가 든다. 운영형 GETs가 회수가 빠른 이유는 효과가 작아서가 아니라 들어가는 비용이 수십 분의 일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덕분에 그리드 강화 기술은 회수가 빠르다. WATT 연합과 컨설팅 기관 브래틀그룹(The Brattle Group)의 분석에 따르면, 신규 선로 완공 전 단계에서 GETs는 혼잡을 40% 이상 줄일 수 있고, 이는 2021년 혼잡비용 기준으로 미국 소비자에게 연간 50억 달러가 넘는 가치에 해당한다. GETs 설치비는 흔히 연간 혼잡비용의 5% 이하에 그쳐, 많은 경우 1년이 채 되기 전에 비용을 회수한다. 브래틀그룹이 미국 캔자스·오클라호마 계통을 모델링한 별도 연구에서는, GETs를 도입하면 재생에너지 수용량을 두 배로 늘리면서 투자비를 약 6개월 만에 회수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에너지부(DOE, Department of Energy)가 분석한 뉴욕주 사례에서는 동적 송전용량과 조류제어를 함께 적용했을 때 재생에너지 출력제어의 42%를 피할 수 있었다.

09 — 균형 잡기만능은 아니다: 한계와 흔한 오해

이쯤 되면 ‘그럼 왜 진작 다 적용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이 자연스럽다. 답은, 그리드 강화 기술이 강력하되 만능은 아니기 때문이다. EPRI의 전문가도 “은탄환(만능 해법)은 없으며, 여러 기술을 상호 보완적으로 함께 쓰는 것이 옳은 접근”이라고 짚는다. 몇 가지 한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10 — 우리 이야기한국 전력망에 주는 함의

이 주제는 미국만의 사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년 실무안)은 인공지능 확산으로 반도체·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23년 대비 2030년에 두 배 이상으로 늘 것으로 전망하면서, 송전 제약에 대응하는 단기 전략으로 기존 송전 인프라 활용의 극대화를, 장기 전략으로 저손실·대용량 직류(DC) 기술을 제시했다. 앞쪽의 ‘기존 인프라 활용 극대화’가 바로 그리드 강화 기술이 겨냥하는 지점과 정확히 겹친다.

국내 전력망의 구조적 고민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 발전이 몰리는 동해안·호남과 수요가 몰리는 수도권 사이의 지리적 불일치는 송전 회랑에 만성적 부담을 준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제주에서는 송전·계통 제약으로 인한 풍력 출력제어가 2021년 64회에서 2022년 104회로 늘며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새 송전 회랑을 확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현실에서, 이미 깔린 선로의 숨은 용량을 먼저 끌어내는 접근의 가치는 점점 커진다.

한국형 도입에서 짚어야 할 점. 동적 송전용량을 제대로 쓰려면 회랑별 풍속·기온을 신뢰성 있게 읽는 기상 관측과, 그 값을 계통 운영·정산에 반영하는 제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송전망을 단일 사업자가 운영하는 구조여서, 여러 사업자로 쪼개진 시장보다 조율된 일괄 도입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다. 동시에 앞서 짚은 ‘사업자 유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가 확산 속도를 좌우할 것이다.

11 — 맺으며시간을 사는 기술

전력망의 근본 제약은 종종 ‘만들 수 있는 전기’가 아니라 ‘보낼 수 있는 전기’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새로 내는 데에는 10년이 걸리지만, 있는 길에서 더 많은 전기를 안전하게 끌어내는 데에는 수개월이면 충분한 경우가 많다. 그리드 강화 기술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송전선 신설을 대신하는 마법이 아니라, 새 선로가 들어설 때까지의 시간을 벌고 그동안 멈춰 서 있던 발전과 수요를 잇는 다리다.

동적 송전용량은 오늘의 날씨만큼 더 보내고, 고급 조류제어는 짐을 한산한 선로로 옮기고, 토폴로지 최적화는 막힌 길을 우회시킨다. 재도체화는 같은 철탑에 더 능력 있는 전선을 걸고, 전압 승압은 같은 회랑에 더 높은 전압을 흘린다. 어느 하나가 모든 문제를 풀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다섯을 상황에 맞게 엮으면, 새 선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력망은 더 많은 전기를,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빨리 흘려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