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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계통 · 사고 분석

이베리아 대정전 해부

세계 최초의 과전압(overvoltage) 블랙아웃은 어떻게 21초 만에 5천만 명의 불을 껐나

2025년 4월 28일 · 스페인 · 포르투갈

2025년 4월 28일 월요일 정오, 스페인과 포르투갈 본토의 전력망이 약 21초 만에 사실상 전부 멈췄다. 현지 시각 12시 33분, 이베리아반도는 전력 공급이 완전히 사라진 이른바 “영(zero)” 상태로 떨어졌고, 약 31기가와트(GW)의 부하가 한꺼번에 끊겼다. 본토 거의 전 지역에서 약 10시간(일부 지역은 16시간 가까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다. 신호등이 멈추고 지하철에서 승객이 대피했으며, 통신망 트래픽은 평소의 17퍼센트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이 사건이 특별한 이유는 규모만이 아니다. 유럽에서 20여 년 만의 최대 정전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기록상 세계 최초로 과전압(overvoltage)이 직접 원인이 된 대규모 블랙아웃이라는 점이다. 전력망이 무너지는 통상의 시나리오 — 발전기가 갑자기 빠지면서 주파수가 급락하는 — 와 달리, 이날 이베리아의 붕괴는 전압이 빠르게 치솟으며 시작됐다. 이 글은 ENTSO-E(유럽 송전계통운영자 네트워크, European Network of Transmission System Operators for Electricity) 전문가 패널의 최종 보고서(2026년 3월)와 스페인 정부·송전계통운영자의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그날 무엇이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밑에 깔린 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 해부한다.

5천만+
정전 영향 인구(명)
31 GW
한순간에 끊긴 부하
~21초
연쇄 붕괴 소요 시간
~10시간
대부분 지역 정전 지속

1그날 정오의 전력망

12시 30분, 스페인 전력망에는 약 32GW의 전력이 공급되고 있었다. 국내 수요는 25GW였고, 나머지는 포르투갈로 2.6GW, 프랑스로 0.87GW, 모로코로 0.78GW를 수출하고, 약 3GW는 양수발전(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저장해 두는 발전)에 쓰였다. 공급의 절반 이상이 태양광이었고, 봄철 한낮의 풍부한 햇빛 탓에 도매 전기 가격은 잠시 마이너스로 내려가 있었다. 날씨도, 수요도, 재생에너지 발전량도 그 계절의 평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12:30 — 평범한 한낮의 수급 (약 32 GW) 공급 태양광 ≈ 17 GW (절반 이상) 원자력 ≈ 3.3 GW 기타(풍력·수력·가스 등) ≈ 11.7 GW 소비 · 수출 · 저장 국내 수요 25 GW 양수 저장 ≈ 3 GW 수출(PT·FR·MA) ≈ 4.3 GW 공급의 절반 이상이 태양광 · 도매가 일시 마이너스 · PT=포르투갈, FR=프랑스, MA=모로코
붕괴 직전의 수급. 발전량·수요 모두 평년 수준이었으나, 공급의 대부분이 인버터를 통한 태양광이었다는 점이 이날의 구조적 배경이다.

이 평범함 속에 한 가지 구조적 특징이 숨어 있었다. 공급의 대부분이 태양광·풍력처럼 인버터를 통해 전력을 내보내는 IBR(인버터 기반 자원, Inverter-Based Resource)이었고, 회전하는 거대한 발전기 — 화력·원자력·수력의 동기기(synchronous machine) — 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동기기들은 단순히 전기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전력망의 전압과 관성을 떠받치는 “닻” 역할을 한다. 그 닻이 평소보다 적게 내려져 있었다는 것이 이날의 출발점이다.

2개념 정리 — 전압과 무효전력

블랙아웃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개념이 필요하다. 유효전력(active power)과 무효전력(reactive power), 그리고 전압(voltage)이다.

유효전력은 실제로 일을 하는 전력이다. 전구를 켜고 모터를 돌리고 난방을 하는 것이 유효전력이며, 단위는 와트(W)다. 반면 무효전력은 일을 하지는 않지만, 교류(AC, Alternating Current) 전력망에서 전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하는 전력으로, 단위는 바(VAr)다.

비유 · 맥주잔의 거품

무효전력을 처음 접하면 “일을 하지 않는데 왜 필요한가” 싶다. 맥주를 잔에 따르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다. 잔을 채우는 맥주가 유효전력이라면, 그 위에 뜨는 거품이 무효전력이다. 거품은 마실 수 없지만, 거품 없이는 맥주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송전선이라는 “잔”의 용량은 맥주와 거품을 합한 부피로 정해지고, 거품(무효전력)이 너무 많아지면 정작 마실 맥주(유효전력)를 담을 자리가 줄어든다.

전압은 전력망의 “압력”이다. 수도관 속 물의 압력처럼, 전압이 너무 낮으면 전기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너무 높으면 기기와 절연이 손상된다. 핵심은 이것이다 — 전압은 무효전력의 수급 균형으로 결정된다. 무효전력이 남으면 전압이 오르고, 모자라면 전압이 내린다.

여기서 직관에 어긋나는 현상이 하나 등장한다. 송전선에 전류가 적게 흐를수록(즉, 가볍게 부하가 걸릴수록) 송전선 스스로가 무효전력을 만들어내 전압을 끌어올린다. 긴 고압 송전선은 거대한 축전기(capacitor)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페란티 효과(Ferranti effect)라 부른다. 한낮에 수요가 적고 재생에너지로 출력이 넘쳐 송전선들이 가볍게 걸려 있던 이날, 전력망은 이미 “전압이 오르기 쉬운” 상태였다.

전압 = 무효전력 수급의 시소 무효전력 잉여 무효전력 흡수 가벼운 송전선(페란티 효과) 동기기 · 분로리액터 전압 ↑ 잉여(생성)가 흡수를 넘어서면 전압이 위로 밀린다 — 이날 계통이 놓인 위치다.
무효전력을 “흡수”하는 동기기·리액터가 충분해야 전압이 눌린다. 흡수 능력이 부족하면 전압은 위로 치솟는다.

이 남는 무효전력을 흡수해 전압을 눌러주는 일은, 평소에 회전하는 동기기(발전기)와 분로리액터(shunt reactor) 같은 장치가 맡는다. 그런데 이날은 그 흡수 능력이 여러 이유로 부족했다.

330분 전의 경고 — 두 번의 진동

붕괴 30분 전부터 전력망은 이상 신호를 보냈다. 12시 03분부터 08분까지, 약 0.63헤르츠(Hz)의 진동이 나타났다. 이는 외부에서 계속 흔들어 만들어지는 “강제진동(forced oscillation)”으로, 스페인 내부에 국한된 인버터(컨버터) 기인 불안정으로 분석됐다. REE(스페인 송전계통운영자, Red Eléctrica de España)는 바다호스(Badajoz) 지방의 한 태양광 발전소(당시 약 250MW 출력)를 진원으로 지목했으나, ENTSO-E 전문가 패널은 그 원인을 끝내 확정하지 못했다. 진동의 진폭은 멀리 프랑스와 독일의 측정장치에까지 잡힐 만큼 컸다.

운영자는 이 진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했다 — 송전선을 추가로 병렬 연결해 망을 촘촘하게(meshing) 만들고, 프랑스로 향하는 수출 흐름을 줄였다. 12시 19분부터 22분까지는 두 번째 진동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약 0.21Hz의 “지역간 진동(inter-area oscillation)”으로,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유럽 대륙 계통에 대해 한 덩어리로 진동하는 모드였다. 운영자는 비슷한 조치로 이 진동도 가라앉혔고, 이후 진동은 사라져 계통은 겉보기에 안정돼 보였다.

문제는 진동을 잡기 위한 조치 자체가 전압을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송전선을 더 많이 병렬로 붙이면 페란티 효과로 무효전력 생성이 늘고, 프랑스 수출을 줄이면 송전선에 흐르는 전류가 더 적어져 선로는 한층 가볍게 걸린다. 둘 다 전압을 밀어 올리는 방향이다. 진동이라는 한 가지 위험을 끄는 대가로, 과전압이라는 또 다른 위험에 계통을 더 가까이 밀어 넣은 셈이었다.

비유 · 흔들리는 밧줄

팽팽한 밧줄이 진동할 때, 진동을 멈추는 한 가지 방법은 밧줄을 더 팽팽하게 당기는 것이다. 진동은 잦아들지만 장력은 위험 수위로 올라간다. 이날 운영자가 처한 상황이 그랬다. 진동을 다스리는 표준 절차가 전압이라는 “장력”을 높였고, 계통은 끊어지기 직전까지 팽팽해졌다.

421초의 연쇄 붕괴

12시 32분 57초, 첫 도미노가 쓰러졌다. 스페인 남부의 한 400/220킬로볼트(kV) 발전소 변압기가 과전압으로 차단됐다. 송전망 쪽 전압(418kV)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지만, 변압기 탭(tap, 전압비를 조정하는 장치)이 변화하는 전압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220kV 쪽 전압이 242kV까지 치솟았다. 송전망 계기에는 보이지 않는 “숨은 과전압”이 발전소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한 번의 차단으로 355메가와트(MW)의 발전과 함께, 165메가바(MVAr, 무효전력 단위, Mega Volt-Ampere reactive)에 이르는 무효전력 흡수 능력이 사라졌다.

여기서 자기강화 고리(self-reinforcing loop)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무효전력을 흡수하던 설비가 빠지자 전압은 더 올랐다. 발전이 줄면서 송전선의 전류는 더 작아졌고, 가벼워진 선로는 페란티 효과로 무효전력을 더 뿜어내 전압을 또 밀어 올렸다. 게다가 전압을 눌러줘야 할 발전소들(스페인 계통운영절차 P.O. 7.4, Procedimiento de Operación 7.4의 적용 대상) 가운데 상당수가 무효전력을 연속적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문턱(threshold)을 넘는 순간에야 계단식으로 반응했으며, 일부는 흡수는커녕 오히려 무효전력을 내보내 사태를 악화시켰다. 전압이 오를수록 더 많은 발전기가 과전압 보호장치에 걸려 차단됐고, 차단될수록 흡수 능력은 더 줄어 전압은 또 올랐다.

멈추지 않는 고리 — 과전압 연쇄 ① 발전기 과전압 차단 보호장치가 발전기를 떼어냄 ② 무효전력 흡수 ↓ 전압을 눌러줄 자원이 줄어듦 ③ 계통 전압 ↑↑ 페란티 효과로 더 가속 21초간 반복 → 약 2,000 MW 연쇄 탈락
전압 상승이 발전기 차단을 부르고, 차단이 다시 전압을 올리는 양의 되먹임. 그라나다에서 시작해 약 20초간 남부 전역으로 번졌다.

이 고리는 약 20초 동안 돌았다. 그라나다(Granada)에서 시작된 차단은 바다호스, 세고비아(Segovia), 우엘바(Huelva), 세비야(Sevilla), 카세레스(Cáceres) 등지로 번졌고, 약 2,000MW의 발전이 연쇄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무대가 바뀌었다. 발전이 대규모로 사라지자 이번에는 유효전력이 부족해져 주파수가 급락했다. 12시 33분 18초경 이베리아반도의 주파수가 48.0Hz 아래로 떨어지며 자동 부하차단(load shedding)이 작동했다. 12시 33분 21초, 프랑스와 스페인을 잇는 교류 연계선이 차단됐다. 12시 33분 24초, 이베리아반도와 유럽을 잇는 마지막 끈인 HVDC(고압직류송전, High Voltage Direct Current) 연계선마저 끊기면서 계통은 완전히 붕괴했다. 첫 변압기 차단부터 전계통 붕괴까지 채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붕괴의 27초 — 전압은 오르고, 주파수는 무너진다 12:32:57 12:33:18 12:33:24 전압(상승) 주파수(48Hz 미만으로 급락) 첫 변압기 차단 → 연쇄 시작 주파수 급락 · 부하차단 전계통 붕괴
먼저 전압이 치솟으며 발전기가 줄줄이 빠지고, 그 결과 발전이 부족해지자 비로소 주파수가 급락한다. 통상의 정전과 인과의 순서가 뒤집힌 사건이다.

스페인의 원자력발전소 7기 중 가동 중이던 4기(약 3.3GW)는 계통 전압을 잃자 설계대로 자동 긴급정지됐고, 나머지 3기는 마침 정기 정비 중이었다. 비상 발전기가 7기 모두의 냉각을 유지해 원자로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5왜 막지 못했나 — 구조적 원인

붕괴 자체는 21초의 사건이지만, 그 21초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이전에 누적된 구조적 약점이었다. 조사 보고서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압을 제어할 자원이 너무 적게 배치돼 있었다. 무효전력을 흡수하며 전압을 떠받칠 동기 발전기의 수가 이날 비정상적으로 적었다. 둘째, 그나마 전압 조정을 맡았어야 할 발전소들이 운영자의 지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고, 일부는 정반대로 무효전력을 공급했다. 셋째, 전압 제어 설비의 일부가 수동으로 조작돼 대응이 느렸다. 넷째, 발전기의 과전압 보호 설정이 기준과 어긋나 필요 이상으로 빨리 차단됐다. 수만 대의 소형 태양광 인버터가 계통의 실제 필요와 동떨어진 설정값에 따라 줄줄이 떨어져 나간 것이 대표적이다.

다섯째, 소형 분산형 발전(이른바 Type A 설비)에 고전압 통과운전 능력(HVRT, High-Voltage Ride-Through, 전압이 잠시 높아져도 버티며 계통에 남아 있는 능력) 요건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제도적 공백이 있었다. 여섯째, 변압기 탭이 전압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송전망 계기로는 보이지 않는 내부 과전압이 발생했고, 운영자는 무효전력 여유가 얼마나 남았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곱째, 이 모든 것을 떠받친 가장 큰 구조적 조건 — 이베리아반도가 유럽 대륙망과 가느다랗게 연결된 “전기적 섬(electrical island)”이라는 점이다.

전기적 섬 — 가늘게 연결된 반도 이베리아반도 스페인 ↔ 포르투갈 약 3 GW (긴밀히 결합) 프랑스 유럽 대륙망 ≈ 2.8 GW 모로코 ≈ 0.9 GW 유럽 대륙망 대비 연계율 약 2.8% — EU 권고치(2030년 15%)에 크게 미달
스페인이 프랑스와 주고받을 수 있는 용량은 약 2.8GW에 불과하다. 연결이 가늘다는 것은, 이웃의 도움을 끌어오지도 자신의 충격을 밖으로 흘려보내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스페인이 프랑스와 주고받을 수 있는 연계 용량은 약 2.8GW에 불과하다. 모로코와는 약 0.9GW, 포르투갈과는 약 3GW 수준이다.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유럽 대륙망 대비로 계산하면 연계율은 약 2.8퍼센트로,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이 2030년까지 달성하라고 권고한 15퍼센트에 크게 못 미친다. 2020년 기준 스페인은 대륙 유럽에서 연계율 10퍼센트에 못 미치는 유일한 나라였다.

비유 · 채찍 끝

잘 연결된 전력망은 충격을 여러 이웃이 나눠 흡수한다. 그러나 가늘게 연결된 섬에서는 충격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 그 안에서 증폭된다. 채찍을 휘두를 때 손잡이의 작은 움직임이 끝으로 갈수록 큰 진폭으로 커지는 것과 같다. 프랑스 연계선이 이베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순간, 반도는 완전한 섬이 됐고 충격은 안에서 끝까지 증폭됐다.

6재생에너지가 범인인가?

사건 직후 가장 뜨거웠던 논쟁은 “재생에너지가 정전을 일으켰는가”였다. 답은 양쪽 극단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먼저, “태양광·풍력이 너무 많아 정전이 났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날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은 직전 며칠 및 그 계절의 평년과 다르지 않았고, 수요 역시 평범했다. 재생에너지 과잉생산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가설은 데이터로 기각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는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반대편 주장도 정확하지 않다. 첫 강제진동은 인버터(컨버터) 기인 불안정으로 분석됐고, 과전압 연쇄에서 줄줄이 떨어져 나간 것은 다름 아닌 수만 대의 태양광 인버터였으며, 소형 분산형 발전의 통과운전 요건 공백은 실재했다.

정확한 진단은 이것이다 —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양이 아니라, 그 비중이 빠르게 커지는 속도를 제도와 운영이 따라잡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인버터 기반 자원이 늘수록 계통은 회전하는 동기기의 관성(inertia)과 무효전력 흡수 능력에 덜 기대게 된다. 관성이 줄면 충격에 더 빨리 흔들리고, 무효전력을 받쳐줄 동기기가 적으면 전압이 쉽게 출렁인다. 그런데 인버터의 보호 설정, 통과운전 요건, 무효전력 제어 의무 같은 계통 접속 규칙(grid code)은 이 변화의 속도를 미처 반영하지 못했다. 이베리아의 붕괴는 “재생에너지 대 화력”의 선악 구도가 아니라, 전력망의 물리적 한계와 제도·시장·정책이 어긋난 지점에서 일어난 사고다.

7복구 — 블랙스타트

붕괴는 21초였지만 복구에는 하루가 걸렸다. 완전히 죽은 전력망을 되살리려면 외부 전기 없이 스스로 시동을 거는 “블랙스타트(black start)” 능력을 갖춘 발전소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발전소는 가동을 시작하고 유지하는 데 전기가 필요하지만, 일부 수력발전소는 물의 위치에너지만으로 독립 시동이 가능하다.

스페인에서는 살라망카(Salamanca)의 알데아다빌라(Aldeadávila) 수력발전소가 이 자립 시동 능력으로 복구의 출발점이 됐다. 여기서 만든 전기로 다른 발전소와 변전소를 차례로 되살려 망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동시에 살아 있던 이웃들이 전기를 보내왔다 — 프랑스가 최대 2GW를, 모로코가 약 0.9GW를 공급했고, 독일은 프랑스로 전기를 보내 뒤를 받쳤다. 프랑스 연계선은 사고 직후 비교적 빠르게(12시 44분) 일부가 재연결됐고, 이는 아라곤·카탈루냐와 갈리시아·레온 지역을 먼저 살려 본 계통으로 전력을 다시 밀어 넣는 발판이 됐다.

포르투갈에서는 오후 4시 11분과 5시 26분에 블랙스타트 발전소들이 가동에 성공했다. 포르투갈 계통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00시 22분)에, 스페인 계통은 이튿날 새벽 4시경에 완전히 복구됐다. 5천만 명 규모의 전력망을 하룻밤 사이에 되살린 것은, 과거 다른 대정전들의 며칠에 걸친 순환 정전과 비교하면 빠른 편이었다. 다만 이후 며칠간 운영자는 관성과 전압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가스 터빈을 평소보다 많이 돌려야 했고, 이는 전기 비용을 끌어올렸다.

8여파와 조사

인명 피해도 있었다. 스페인 7명, 포르투갈 1명 등 최소 8명이 정전과 관련된 정황으로 숨졌다. 스페인에서는 갈리시아(Galicia)에서 발전기 배기가스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한 가족 3명이, 마드리드(Madrid)의 한 주택 화재로 1명이 사망했다. 포르투갈에서는 가정용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던 77세 환자가 배터리가 소진된 뒤 구급대가 제때 도착하지 못해 숨졌다. 스페인 경영자총연합(CEOE, 스페인 경영자단체)은 경제적 손실을 약 16억 유로로 추산했다. 렌페(Renfe, 스페인 철도공사)의 모든 열차가 멈춰 약 3만 5천 명이 철도·지하철에 갇혔다 구조됐고,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은 전력을 잃었다.

조사도 이어졌다. 스페인 정부는 2025년 6월 자체 조사 보고서를, ENTSO-E 전문가 패널은 같은 해 10월 사실관계 보고서에 이어 2026년 3월 20일 440쪽 분량의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49명으로 구성되고 사고와 무관한 두 송전계통운영자의 전문가가 의장을 맡은 이 패널은, 책임 소재를 가리는 대신 재발 방지를 위한 22개 권고를 네 가지 영역 — 전압·무효전력 제어, 진동 안정성, 차단(보호) 동작, 방어·복구 — 으로 묶어 제시했다. 권고의 핵심은 더 강화된 운영 관행, 계통 거동에 대한 실시간 감시 개선, 그리고 사업자 간 더 긴밀한 협력과 데이터 공유다.

조사가 강조한 또 하나의 사실은, 1MW 미만 소형 발전(주로 지붕형 태양광)의 실제 출력 데이터를 배전계통운영자가 갖고 있지 못했고 일부 발전사는 고장 기록이 없어 정보를 제공하지 못해, 조사 자체가 데이터 공백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지킬 수 없다.

9한국 전력망에 주는 함의

이베리아의 사고는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역시 태양광을 중심으로 인버터 기반 자원이 빠르게 늘고 있고, 호남과 제주처럼 특정 지역에 재생에너지가 몰리면서 전압·무효전력 관리와 낮은 관성이라는 같은 종류의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제주 계통은 본토와 HVDC로만 연결된 준(準)전기적 섬으로, 충격이 안에서 증폭되기 쉬운 구조라는 점에서 이베리아의 교훈과 직접 맞닿는다.

이베리아가 가리킨 처방은 멀리 있지 않다. 동기조상기(synchronous condenser)나 STATCOM(정지형 무효전력 보상장치, Static Synchronous Compensator) 같은 동적 무효전력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전압이 잠시 높아져도 발전기가 계통에 남도록 통과운전 요건과 보호 설정을 계통의 실제 필요에 맞춰 정렬하며, 그리드포밍(grid-forming) 인버터로 인버터 스스로 전압과 관성을 일정 부분 떠받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PMU(페이저 측정장치, Phasor Measurement Unit)와 WAMS(광역감시시스템, Wide-Area Monitoring System)로 진동과 무효전력 여유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감시 체계, 그리고 소형 분산형 발전까지 포함하는 데이터 확보가 출발점이다.

이베리아의 21초는, 국지적인 작은 사건이 어떻게 계통 전체의 문제가 되는지를 — 그리고 그것을 막을 기술은 이미 대부분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 동시에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