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정책 · 전력 인프라
제12차 전기본으로 읽는, 향후 15년 한국 전력의 설계도. 전기는 어떻게 미리 계획되며, 이재명 정부의 첫 에너지 대계는 무엇을 바꾸려 하는가.
전기는 거의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는 그 순간, 어딘가의 발전기가 정확히 그만큼을 더 돌려야 한다. 만들어내는 양과 쓰는 양이 실시간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주파수가 흔들리고, 심하면 광역 정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전력 시스템은 '지금 충분한가'가 아니라 '10년 뒤, 15년 뒤에도 충분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미리 계산한다.
발전소 하나를 짓는 데에는 수년이 걸리고, 원자력발전소는 부지 선정부터 준공까지 통상 15년 안팎이 든다. 송전탑 한 줄을 세우는 데에도 인허가와 주민 협의를 포함하면 10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미래의 전기를 책임지려면 미래의 수요를 먼저 그려야 하고, 그 그림에 맞춰 무엇을 언제 짓기 시작할지 오늘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을 담는 국가의 공식 문서가 바로 전력수급기본계획이다.
2026년 들어 이 계획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후 처음으로 수립하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본격적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 조직이 바뀌어 계획을 만드는 부처가 달라졌고,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변수가 전력 수요 전망을 흔들고 있으며,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이 글은 전력수급기본계획이라는 제도 자체를 먼저 풀어낸 뒤, 제12차 계획이 무엇을 담으려 하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본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흔히 줄여서 '전기본'이라 부른다. 전기사업법 제25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15조에 근거를 둔 법정 계획으로, 정부가 2년마다 새로 수립하며 한 번 만들 때마다 향후 15년을 내다본다. 2년마다 갱신하되 시야는 15년이라는 구조가 핵심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므로 자주 손질하되, 발전소와 송전망은 오래 걸려 지어지므로 멀리 내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2년마다 다시 그리는 도시 마스터플랜. 도시계획은 30년 뒤 도로·주택·상하수도가 어디에 얼마나 필요할지를 미리 그린다. 전기본은 전력판 도시계획이다. 다른 점은 갱신 주기다. 도시계획이 비교적 드물게 바뀐다면, 전기본은 2년마다 새 판을 짠다. 기술과 수요가 워낙 빠르게 변해서, 한 번 그린 그림을 오래 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본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세 질문에 차례로 답하는 일이다. 먼저 미래에 전기를 얼마나 쓸지 전망하고(수요), 그 수요를 어떤 발전원의 조합으로 채울지 정하고(전원 믹스), 마지막으로 그 발전 설비와 전력망을 언제 어디에 얼마나 지을지 계획한다(설비·계통). 앞 단계의 답이 바뀌면 뒤 단계가 통째로 흔들리는, 순차적이면서도 서로 맞물린 구조다.
전기본을 읽을 때 가장 헷갈리는 대목이 수요 전망에 숫자가 두 개 나온다는 점이다. 하나는 기준수요, 다른 하나는 목표수요다. 기준수요는 별다른 절약 노력 없이 경제와 인구, 산업이 지금 추세대로 굴러갈 때 예상되는 전기 사용량이다. 목표수요는 거기서 효율 개선, 수요 반응, 에너지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 활용 같은 수요관리 수단으로 깎아낼 양을 뺀, 정부가 실제로 맞추겠다고 설정하는 수치다. 발전 설비를 얼마나 지을지는 이 목표수요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가계부의 '예상 지출'과 '목표 지출'. 지금처럼 살면 내년에 한 달 평균 300만 원을 쓸 것 같다 — 이것이 기준수요다. 그런데 외식과 구독 서비스를 줄여 30만 원을 아끼기로 결심하면, 270만 원이 목표수요가 된다. 적금 액수(지을 발전소 규모)는 이 270만 원을 기준으로 짠다. 다만 결심이 빗나가 절약이 안 되면 실제 지출은 다시 300만 원에 가까워진다. 수요관리 목표가 너무 야심차면 목표수요가 비현실적으로 낮아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 늘 논쟁거리인 이유다.
전기본은 정부가 단독으로 발표하는 문서가 아니라, 여러 단계의 검토와 의견 수렴을 거쳐 확정된다. 통상 전문가로 구성된 총괄위원회가 실무안을 만들어 공개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공청회를 열어 산업계·시민사회·지자체의 의견을 듣고,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한 뒤, 마지막으로 전력정책심의회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의견 수렴 과정에서 발전원 구성과 수요 전망 수치가 적지 않게 조정되곤 한다.
제12차 계획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 판인 제11차 전기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제12차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제11차를 계승하면서 그 위에 변화를 얹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제11차 전기본은 2024년부터 2038년까지를 대상으로 2025년 2월 21일 전력정책심의회에서 확정됐다. 신규 원전 규모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과 2024년 4월 총선 일정 등이 겹치면서 당초 예정보다 늦게 확정된 계획이었다.
제11차 전기본에서 처음으로 두드러진 변수가 바로 첨단산업과 데이터센터였다. 직전인 제10차 계획이 2036년 목표수요를 118기가와트(GW, Gigawatt)로 잡았는데, 불과 2년 뒤 제11차는 2038년 목표수요를 129.3GW로 끌어올렸다. AI·반도체·데이터센터가 만들어낼 전력 수요를 국가 계획에 본격 반영한 첫 사례였다.
발전원 구성에서 제11차의 방향은 '무탄소 발전 확대'였다. 여기서 무탄소 발전이란 원자력, 재생에너지, 그리고 청정수소·암모니아를 함께 묶은 개념이다. 이 비중을 2030년 약 53%에서 2038년 약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래 그림은 발전량 기준으로 본 2030년과 2038년의 전원 구성 변화다.
제11차는 이 그림을 위해 신규 대형 원전 2기(2.8GW)와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1기(0.7GW)를 2037~2038년 도입 목표로 담았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2038년까지 121.9GW 규모로 확충하기로 했다. 다만 이 계획은 확정 과정에서 충분한 공론화를 거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요구해 온 당시 야당(더불어민주당)과 환경단체는 신규 원전의 부지 선정 기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 사고 대응 같은 핵심 쟁점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갈등의 연장선에서 제12차 계획이 출발한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26년부터 2040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처음 수립하는 중장기 법정 에너지 계획이며, 2025년 11월 27일 전력정책심의회를 통해 공식 착수했다. 2026년 연내 확정을 목표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제11차의 큰 틀을 이어받되, 네 가지 지점에서 분명한 변화가 있다.
가장 구조적인 변화다. 전기본은 그동안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해 왔으나, 제12차는 처음으로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수립한다. 이 부처는 2025년 10월 1일 출범했다. 정부조직 개편으로 환경부가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정책 기능을 흡수해 확대 재편된 것으로, 기후 대응과 에너지 정책을 한 부처가 일관되게 관장하도록 한다는 취지다. 장관은 부총리를 겸해 범정부 탄소중립 과제를 총괄한다. 에너지 정책의 무게중심이 '산업'에서 '기후'로 옮겨갔다는 신호이며, 이는 발전원 구성의 방향성과도 직결된다.
이전 전기본들은 미래 수요를 하나의 숫자로 제시했다. 제12차는 기준 시나리오와 상향 시나리오 두 가지로 나눠 범위로 제시했다. AI가 유발하는 경제·사회 변화의 불확실성이 워낙 커서, 하나의 수치로 못 박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봄·가을처럼 전력을 적게 쓰는 시기(경부하기)의 최소 수요도 따로 전망해, 연중 예측의 정밀도를 높였다.
'내일 비 올 확률 60%'식 예보로의 전환. 예전 일기예보가 "내일 맑음"이라고 단정했다면, 요즘은 "강수 확률 60%"처럼 범위와 확률로 알려준다. 변수가 많을수록 단정보다 범위가 정직하기 때문이다. 제12차의 시나리오 전망도 같은 발상이다. 데이터센터가 얼마나 빨리 늘지, 전기차·히트펌프 보급이 얼마나 빠를지에 따라 수요가 크게 달라지므로, 하나의 숫자 대신 '여기서 저기 사이'라는 폭을 제시한 것이다.
제12차는 2035 NDC(National Determined Contribution,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에 기반해 설계된다. 한국은 2018년 배출량 대비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53~61% 줄이기로 했다. 전력 부문은 국가 전체 배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이 감축 목표가 발전원 구성을 강하게 제약한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핵심 목표로 설정된 배경이다.
제11차가 첨단산업 수요를 '처음' 반영했다면, 제12차는 이를 '본격적으로' 반영한다. AI 데이터센터 확충, 그리고 전기차·히트펌프 보급에 따른 전기화 수요가 별도 항목으로 떼어져 계산됐다. 그 결과가 아래 수요 전망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6년 4월 22일,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제12차 전기본 수립 총괄위원회는 공개 토론회에서 2040년 전력수요 전망 잠정안을 내놨다. 결과는 2040년 연중 최대 전력 수요(목표수요)가 기준 시나리오에서 131.8GW, 상향 시나리오에서 138.2GW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 전력이 약 100GW 수준이니, 15년 뒤에는 최대 1.4배로 늘어난다는 의미다. 절약 노력을 반영하지 않은 기준수요로 보면 149.9~156.8GW에 이른다.
주목할 대목은 추가수요의 내역이다. 25.2GW의 추가수요 중 가장 큰 몫은 전기화(17.2GW)다. 전기차와 히트펌프처럼 기존에 석유·가스를 쓰던 곳을 전기로 바꾸는 흐름이 수요를 끌어올리는 가장 강한 힘이라는 뜻이다.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은 각각 4.0GW로, 소비 전력량(연간 사용량)으로 보면 데이터센터가 11차 전망의 두 배 가까이로 늘었지만 최대 전력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돌아가는 특성 때문에 그 폭이 작게 잡혔다. 흥미롭게도 이번 목표수요(131.8GW)는 제11차(129.3GW)보다 소폭 높은 수준에 그쳤다. 경기 둔화 전망이 추가수요 증가분을 일부 상쇄했기 때문이다.
수요 전망 다음 단계인 전원 믹스의 구체적 수치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정부가 밝힌 큰 방향은 분명하다. 세 갈래다. 첫째, 신규 원전을 짓는다. 둘째, 재생에너지를 대폭 확대한다. 셋째, 석탄발전을 단계적으로 멈춘다.
가장 첨예했던 쟁점은 제11차에 담긴 신규 원전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으나,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26년 1월 26일 브리핑에서 제11차에 반영된 신규 원전 2기를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두 차례 정책 토론회와 두 곳의 여론조사를 거친 결과, 원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0%를 넘었고 신규 원전 추진에 찬성하는 응답도 60%를 웃돌았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동시에 정부는 2040년까지 석탄발전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2030년 100GW 조기 달성을 강조)와 원전으로 탄소중립에 다가간다는 구상을 내놨다. 원전은 기저전원으로 두되,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체 구성을 전환하는 그림이다.
발전원의 비율을 종이 위에 정하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제12차 전기본이 마주한 과제는 대체로 '얼마나 지을까'보다 '어떻게 작동시킬까'에 가깝다.
한국 전력의 가장 큰 구조적 난제는 만드는 곳과 쓰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는 일조와 바람 조건이 좋은 남부와 호남, 서해안에 몰려 들어서는데,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은 수도권이다. 둘을 잇는 송전망이 모자라면, 멀쩡히 돌아가는 발전기의 출력을 억지로 줄이는 '출력제어'가 발생한다. 햇빛도 바람도 충분한데 보낼 길이 없어 발전을 멈추는 셈이다. 과거 전기본 수립을 총괄한 전문가들조차 발전원 비율보다 이 계통 문제 해결이 먼저라고 입을 모을 정도다.
재생에너지는 햇빛과 바람에 따라 발전량이 출렁인다. 반대로 원전은 한번 가동하면 출력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어려운 경직성을 지닌다.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와 경직성이 큰 원전이 동시에 늘어나는 환경에서는,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울 유연한 수단이 필수다. 제12차는 에너지저장장치와 양수발전으로 남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모자랄 때 내보내고, 봄·가을 남는 전력은 요금 체계 조정과 수요 분산으로 흡수하며, 원전도 가능한 범위에서 유연 운전하도록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신규 원전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짓는 일은 별개다. 원전은 결정에서 준공까지 통상 15년 안팎이 걸린다. 제12차 확정이 2026년 말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2037~2038년 준공은 일정이 빠듯하다. 게다가 부지 선정이 막혀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신규 원전과 SMR 부지를 공모하려 했으나 유치 의향을 밝힌 지방자치단체가 없어 절차가 사실상 멈춰 있다. 계획에 담는 것과 땅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규 원전, 재생에너지, 송전망을 동시에 확충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그 비용은 결국 전기요금으로 흘러든다. 한국전력공사의 총부채는 200조 원을 넘어선 상태다. 2025년 들어 영업이익을 회복했지만 부채 감축 속도는 더디고, 2026년 1분기 전기요금은 동결됐다. 야심찬 계획과 요금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가, 제12차 전기본이 종이 위 설계도에 그치지 않으려면 풀어야 할 마지막 매듭이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향후 15년의 전기 수요를 전망하고, 그 수요를 어떤 발전원으로 채울지, 설비와 전력망을 언제 어디에 지을지를 정하는 국가의 법정 설계도다. 2년마다 갱신되며, 그 결과는 온실가스 배출량과 전기요금, 산업 경쟁력을 함께 좌우한다.
제12차 계획은 이재명 정부의 첫 에너지 대계로, 처음으로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수립한다는 점, 수요를 시나리오 범위로 제시한다는 점, 2035 NDC를 토대로 삼는다는 점,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를 본격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 2040년 최대 전력 수요는 목표수요 기준 131.8~138.2GW로, 현재의 약 1.4배다. 발전원의 방향은 신규 원전 유지, 재생에너지 대폭 확대, 2040년 석탄 중단으로 정리된다. 다만 전력망 보강, 간헐성 보완, 원전 부지 확보, 비용 부담이라는 네 과제가 그 실현을 좌우할 것이다. 구체적인 전원 믹스 수치는 실무안과 공청회를 거쳐 2026년 안에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이 계획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더 많이 쓰게 될 전기를, 더 깨끗한 방식으로, 그러나 흔들림 없이 공급하기 위한 15년짜리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종이가 아니라 송전탑과 발전소, 그리고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판가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