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망 인프라 · HVDC
호남에서 만든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바다 밑에 까는 1,070km짜리 직류 송전망이다. 기존 교류 송전 방식의 한계와 송전탑 갈등을 동시에 우회하려는 시도이자, 한국 전력망 건설 방식을 바꾸는 첫 대형 사례다. 사업의 구조와 2026년 현재 부딪힌 쟁점을 정리한다.
한국의 전력 문제는 점점 더 지리(地理)의 문제가 되고 있다. 전기를 많이 쓰는 곳과 많이 만드는 곳이 갈수록 멀어지기 때문이다.
전기를 쓰는 쪽은 수도권이다. 인구가 몰려 있고, 반도체 공장과 산업단지가 있으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연산을 처리하는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늘고 있다. 데이터센터 한 곳은 작은 도시만큼 전기를 먹는다.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구조적으로 계속 커지는 방향이다.
전기를 만드는 쪽은 점점 남서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묶은 호남권은 햇빛이 좋아 태양광에 유리하고, 서해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바람이 일정해 해상풍력의 최적지로 꼽힌다. 전남 신안 일대만 해도 해상풍력 잠재량이 수십 기가와트(GW, gigawatt·1GW는 대형 원자력발전소 1기에 해당하는 출력) 규모로 거론된다. 정부는 호남권 재생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전력망 용량을 2026년 약 21.3GW에서 2030년 약 46.1GW로 두 배 이상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문제는 그 사이를 잇는 길이다. 호남에서 생산될 재생에너지는 현지에서 소비할 수 있는 양을 한참 넘어선다. 남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는데, 지금의 송전망으로는 그만큼을 한 번에 실어 나르기 어렵다. 길이 막히면 발전기를 멈춰 세우는 출력 제한이 생긴다. 애써 지은 풍력·태양광 발전기가 바람과 햇빛이 충분한데도 전기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 목표를 동시에 흔드는 병목이다.
이 병목을 뚫기 위한 대형 사업이 서해안 HVDC 에너지 고속도로다.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추진하는 이 사업은, 호남에서 만든 재생에너지를 서해 바다 밑에 깐 직류(直流) 송전선로를 통해 곧장 수도권으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사업의 이름에 들어 있는 HVDC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High Voltage Direct Current)의 약자다. 핵심을 먼저 말하면, 발전소에서 나오는 교류(AC, Alternating Current·交流) 전기를 변환소에서 직류(DC, Direct Current)로 바꿔 송전한 다음, 도착지에서 다시 교류로 되돌려 공급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콘센트에서 쓰는 전기는 교류이므로, 송전 구간에서만 직류를 쓰고 양 끝에서 교류로 변환하는 셈이다.
왜 멀쩡한 교류를 직류로 바꿔 보낼까. 멀리 보낼수록 직류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교류는 송전 과정에서 전선 주변에 끊임없이 전자기장을 만들며 전력을 흘려보내는데, 거리가 길어지면 이 과정에서 새는 손실과 제어 부담이 커진다. 반면 직류는 같은 굵기의 선로로 더 많은 전력을, 더 적은 손실로, 더 먼 거리까지 보낼 수 있다. 특히 바다 밑 케이블에서는 교류 특유의 손실이 더 두드러져서, 장거리 해저 송전은 사실상 직류가 표준이다.
교류 송전을 굽이굽이 시골길로, 직류 송전을 고속도로로 생각하면 쉽다. 가까운 동네를 오갈 때는 시골길(교류)이 편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 신호와 교차로가 곳곳에 있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멀리, 한 번에 많은 물량을 보낼 때는 신호 없이 직진하는 고속도로(직류)가 훨씬 효율적이다. 다만 고속도로는 진입로(변환소)를 만드는 데 큰 공사비가 든다. 그래서 직류는 '짧은 거리'가 아니라 '멀고 굵은' 송전에서 비용을 뽑는 구조다. 호남에서 수도권까지 수백 km를 대용량으로 보내는 이번 사업이 직류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류 송전에도 세대 차이가 있다. 변환소에서 교류와 직류를 바꾸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전류형(LCC, Line-Commutated Converter)이다. 오래전부터 쓰여 온 방식으로, 한국이 1998년 해남~제주 구간에 처음 도입한 이래 제주 연계선과 건설 중인 일부 육상 노선이 이 방식을 쓴다. 대용량·장거리 송전에 안정적이고 효율이 높지만, 연결되는 교류 계통이 튼튼해야 제대로 작동한다. 출력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를 받아 안정적으로 내보내는 데는 약점이 있고, 송전선 중간에서 일부 전력을 빼내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어렵다.
다른 하나가 이번 사업이 채택한 전압형(VSC, Voltage-Source Converter)이다. 전력을 더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고, 약한 계통이나 변동성이 큰 풍력·태양광과의 연계에 유리하며, 계통이 흔들릴 때 안정화를 돕는다. 무엇보다 송전선 중간에서 육지로 전력을 분기(分岐)해 빼낼 수 있어, 한 줄의 직류 간선에서 여러 지역으로 갈래를 칠 수 있다. 재생에너지를 모아 여러 수요처로 나눠 보내야 하는 미래 전력망에 적합한 방식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번 사업은 "직류 송전"이라는 큰 틀 안에서도 한국이 본격적으로 처음 깔아 보는 대용량 전압형 송전망이라는 의미가 있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 점이 국내 산업계의 기술 국산화 경쟁과 직접 맞물린다.
서해안 HVDC 에너지 고속도로는 단일 송전선이 아니라 4개의 해저 직류 노선으로 구성된다. 각 노선은 525kV·2GW급으로, 모두 합치면 전체 길이 약 1,070km, 총 전송 용량 8GW에 이른다. 한전과 업계 추산으로 사업비는 약 12조 원 규모이며, 보도에 따라 11조~12조2000억 원으로 제시된다. 이 가운데 변환 설비 관련 비용만 5조 원 가까이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사업은 2030년부터 2038년까지 단계적으로 완공할 계획이다. 가장 먼저 뚫는 1단계는 전북 새만금과 경기 화성(서화성)을 잇는 220km 구간으로,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30년 준공을 목표로 한다. 이어 전남 해남~충남 당진 노선을 2036년까지, 해남~인천과 새만금~인천 노선을 2038년까지 준공하면 4개 노선이 모두 완성된다.
| 노선 | 구간 | 규격 | 준공 목표 |
|---|---|---|---|
| ① 1단계 | 새만금 → 서화성 | 약 220km · 525kV · 2GW | 2030년 |
| ② | 해남 → 당진 | 525kV · 2GW급 | 2036년 |
| ③ | 해남 → 인천 | 525kV · 2GW급 | 2038년 |
| ④ | 새만금 → 인천 | 525kV · 2GW급 | 2038년 |
| 합계 | 전체 약 1,070km · 총 8GW · 변환소 8곳 | 2030~2038 | |
525kV 직류 해저케이블 한 회선은 최대 2GW의 전력을 보낼 수 있다. 이는 대형 원자력발전소 약 2기가 동시에 내는 출력을 한 줄에 실어 나르는 규모다. 4개 노선 8GW는 원전 8기분 출력에 해당하는 전력을, 바다 밑을 통해 수도권과 충청권으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사업의 또 다른 특징은 송전선을 가공선(架空線, 철탑을 세워 공중에 거는 방식)이 아니라 해저케이블로 깐다는 점이다. 한전은 2026년 초 경제성·시공성·에너지 안보를 종합적으로 따져 노선을 해저로 최종 확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송전탑을 둘러싼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다.
땅 위에 송전탑을 세우는 사업은 거의 예외 없이 경과지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왔다. 경관 훼손, 재산 가치 하락, 전자파 우려 등이 얽혀 인허가가 수년씩 지연되곤 했다. 같은 에너지 고속도로 구상 안에서 내륙을 지나는 교류 송전망은 이미 충남 등지에서 송전탑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는 등 마찰을 빚고 있다.
대조적인 사례가 동해안~수도권 HVDC다. 동해안에는 원전과 화력발전이 밀집해 있어 그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망이 필요했는데, 이 노선은 주로 육상으로 건설되면서 주민 수용성 문제로 오랫동안 진통을 겪었다. 서해안 사업이 처음부터 해저를 택한 데에는 이런 학습 효과가 깔려 있다. 바다 밑으로 보내면 철탑이 보이지 않고, 가공선 특유의 전자파 논란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다만 바다라고 해서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서해안 HVDC는 단순히 전기를 보내는 인프라에 그치지 않는다. 정부와 산업계는 이 사업을 핵심 기자재를 국산화하고, 나아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본다. HVDC 설비를 만드는 글로벌 시장은 미국 GE버노바, 스위스·일본계 히타치에너지, 독일 지멘스에너지 등 이른바 '3강'이 주도해 왔다. 대용량 전압형 기술은 그동안 해외 의존도가 높아, 국산화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사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교류와 직류를 바꾸는 변환소, 바다 밑에 까는 해저케이블, 그리고 그 케이블을 실제로 깔아 내려가는 시공·포설이다. 각 단계마다 국내 기업들이 경쟁과 협력으로 뛰어들고 있다.
가장 기술 난도가 높고 경쟁이 치열한 부분이 변환소다. 핵심 부품은 교류와 직류를 실제로 바꾸는 밸브와 변환용 변압기다. 용량이 커질수록 전기적·열적 설계와 제어 기술이 까다로워지는데, 이번 사업이 요구하는 2GW급 전압형은 그동안 국내에서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효성중공업은 외부 도움 없이 독자 개발하는 길을 택했다. 2024년 국내 최초로 200메가와트(MW)급 전압형 HVDC 시스템을 개발해 한전 양주변전소에 공급한 경험이 출발점이다. 이 200MW급 변환기를 1GW급으로 키운 뒤 두 개를 묶어 2GW를 구현하고, 밸브 전압을 기존 120kV에서 525kV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회사는 경남 창원에 변압기 전용 공장을 짓고 있으며, 2027년까지 2GW급 설계·개발을 마치고 2029년 중반 제작, 2030년 시험을 거쳐 1단계 사업 일정에 맞춘다는 계획이다.
LS일렉트릭은 글로벌 3강 중 하나인 GE버노바와 손잡는 길을 택했다. 2025년 7월 양해각서(MOU, Memorandum of Understanding)를 맺고 전압형 변환 밸브 등 핵심 기자재의 국산화를 함께 추진한다. 이 회사는 과거 전류형 밸브와 무효전력 보상장치 밸브를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빠른 국산화를 노린다. HD현대일렉트릭은 또 다른 3강인 히타치에너지와 협력해 기술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고, 일진전기도 변환용 변압기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두 회사의 전략 차이는 외국어를 배우는 두 방식과 비슷하다. 효성은 사전을 끼고 처음부터 혼자 공부하는 독학파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고 초기 실수도 있을 수 있지만, 다 익히고 나면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이 자유롭게 쓰고 가르칠 수 있다.
LS는 원어민 과외 선생을 두고 배우는 쪽이다. 빠르게 실력을 끌어올리고 검증된 표현을 바로 쓸 수 있지만, 교재와 방법에 대한 권리 관계를 선생과 정리해야 한다. 어느 쪽이 사업에서 더 유리할지는 결국 일정 안에 믿을 만한 설비를 만들어 내느냐로 판가름 날 것이다.
해저케이블 쪽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평가다. LS전선은 국내 최대 규모의 HVDC 케이블 생산 능력을 갖춰 핵심 후보로 꼽히고, 대한전선도 공급망 안정화 선도사업자로 선정되며 경쟁에 가세했다. 525kV급 해저케이블 국산화는 상당 부분 진척돼 있어 공급 역량은 비교적 받쳐 준다는 분석이다. 다만 케이블을 실제로 깔아 내려가는 대형 전용 포설선 같은 특수 장비를 제때 확보하는 일은 별개의 과제로 남아 있다.
10조 원이 넘는 사업을 누가, 무슨 돈으로, 얼마나 빨리 짓느냐는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이 사업은 그 세 축 모두에서 기존 전력망 건설과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먼저 돈이다. 한전은 누적된 재무 부담을 안고 있어, 12조 원 규모 사업을 자체 재원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사업에는 전력망 프로젝트로는 처음으로 특수목적법인(SPC, Special Purpose Company) 방식이 적용된다. 사업만을 위한 별도 회사를 세워 투자와 위험을 나누는 구조다. 여기에 정부의 국민성장펀드 같은 정책 자금과 민간 프로젝트 파이낸싱(PF, Project Financing)을 함께 끌어들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공공 재원에만 기대던 송전망 건설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은 제도다. 전력망 건설이 늦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입지 선정과 보상, 주민 동의에 걸리는 시간이다. 이를 줄이기 위해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2025년 3월 제정돼 그해 9월 26일부터 시행됐다. 이 법은 국가가 핵심 전력망을 직접 계획하고, 인허가 절차를 한데 묶어 처리하며,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고, 보상에 특례를 두는 내용을 담았다. 토지 보상금을 최장 10년에 걸쳐 나눠 줄 수 있게 하고, 옥내변전소 주변 지역 지원을 넓히는 조항도 포함됐다. 정부는 99개 송전선로·변전소 사업을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지정해 이런 특례를 적용하고 있다.
마지막은 속도다. 대용량 HVDC 송전망은 해양조사부터 자재 수급, 생산, 시험, 운송, 포설까지 통상 9년 이상 걸린다. 한전은 1단계를 7년 안에, 즉 2030년까지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공정 혁신을 내세웠다. 첫째, 2년 이상 걸리던 기본설계 기간을 1년 미만으로 단축한다. 둘째, 원래는 계약 이후 케이블 제조사가 하던 해양조사를 한전이 미리 직접 수행해, 계약 즉시 케이블 생산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시작 시점을 앞당겨 실제 시공에 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2026년 들어 사업은 설계와 발주라는 실행 단계로 넘어왔다. 그만큼 청사진 속에 가려져 있던 현실적 난제들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업계와 전문가들이 짚는 쟁점은 크게 네 갈래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우려는 7년이라는 일정 그 자체다. 9년 걸리던 공사를 2년 단축한다는 것은, 설계·조달·생산·시공이 거의 동시에 굴러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 단계라도 지연되면 전체 일정이 밀린다. 게다가 단축의 핵심인 '한전 선제 해양조사 → 계약 즉시 생산' 방식은, 조사 결과와 실제 시공 조건이 어긋날 경우 오히려 재작업을 부를 위험도 안고 있다.
물량 문제도 있다. 대용량 해저케이블을 단기간에 대량으로 뽑아낼 국내 제조 설비의 여유, 그리고 그것을 깔아 내려갈 대형 포설선 같은 특수 장비를 적기에 확보하는 일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4개 노선을 잇따라 시공하려면 케이블 생산과 포설 능력이 병목 없이 받쳐 줘야 한다.
해저 노선은 송전탑 갈등을 피하지만, 대신 어업이라는 새로운 이해관계와 마주한다. 해저케이블이 지나는 경과지의 조업이 제한되면 수산업계의 생존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전은 어민 지원 확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보상 범위를 둘러싼 이견이 커지면 인허가 단계부터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땅 위의 송전탑 갈등이 바다 위의 어업권 갈등으로 형태만 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다.
변환소의 핵심인 2GW급 전압형 설비는 국내 기업들이 지금 막 만들어 내고 있는, 실제 운전 실적이 거의 없는 기술이다. 독자 개발이든 해외 협력이든, 약속한 일정 안에 신뢰할 수 있는 설비를 완성하고 시험까지 마쳐야 사업 전체가 굴러간다. 국산화에 성공하면 산업 생태계와 수출 발판이라는 큰 보상이 따르지만, 일정 안에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업의 가장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
전력망 전체 구상에는 해저 HVDC뿐 아니라 내륙을 지나는 교류 송전망도 포함되는데, 이 구간은 여전히 송전탑 반대에 직면해 있다. 충남 일부 지역에서는 호남~수도권 송전선로 건설에 반대하는 대책위가 꾸려졌다. 특별법으로 절차를 앞당길 수는 있어도 주민 반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공급 측의 변수도 있다. 이 송전망이 실어 나를 호남 재생에너지, 특히 해상풍력이 계획대로 들어서야 한다. 그런데 해상풍력 부지는 군의 작전 활동·무기체계와 겹칠 수 있어 국방부 동의가 필요하다. 재원 측에서는 SPC와 정책 자금, 민간 PF가 실제로 모일지가 관건이고, 에너지 정책이 보통 10년 단위로 이행되는 만큼 정권 교체에 따라 동력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요컨대 서해안 HVDC의 성패는 '기술이 되느냐'보다 '일정 안에, 갈등을 관리하며, 재원을 대면서 동시에 굴리느냐'에 달려 있다. 송전탑 갈등을 바다로 우회한 대신, 어업·제조 역량·국산화 검증·재원이라는 새로운 과제들을 한꺼번에 떠안은 구조다.
서해안 HVDC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의 첫 조각이다. 정부는 서해안을 넘어 남해안, 동해안까지 전력망을 연결해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를 따라 도는 U자형 전국 전력망을 2040년대까지 완성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송전망 사업으로 거론된다. 어느 지역에서 재생에너지를 만들든 전국으로 보낼 수 있는 기반을 깔고,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을 줄이겠다는 목표다.
이 구상은 두 흐름과 맞물려 있다. 하나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이다. 풍력·태양광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전기를 보낼 길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므로, 송전망은 재생에너지 전환의 전제 조건이다. 다른 하나는 AI와 데이터센터다. 전력을 많이 먹는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둘지는 결국 전력망이 결정한다. 전력망이 촘촘해지면 전기가 싸고 풍부한 지역에 데이터센터를 분산 배치할 수 있고, 이는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효과로도 이어진다.
에너지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와 지능형 전력망 기술도 함께 엮인다. 재생에너지는 바람과 햇빛에 따라 출력이 들쭉날쭉하므로, 남을 때 저장하고 모자랄 때 내보내는 ESS와, 전체를 실시간으로 조정하는 제어 기술이 있어야 전압형 HVDC 망이 제 역할을 한다.
서해안 HVDC 에너지 고속도로는 한국 전력망이 교류 중심에서 직류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공선 중심에서 해저로, 한전 단독 재원에서 특수목적법인 방식으로 옮겨 가는 전환점에 서 있다. 2030년 1단계 준공이 그 첫 시험대다. 호남의 바람이 실제로 수도권의 전기가 되어 흐르기까지, 기술과 일정과 사회적 합의라는 세 관문을 모두 통과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 몇 년간의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