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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사회 · 인공지능과 인재

정답을 푸는 기계의 시대

인공지능이 진단·소송·회계 같은 전문직의 핵심 업무를 잠식하는 동시에, 학위·자격증·시험 점수라는 ‘선발 장치’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 검증된 데이터로 그 변화를 짚고, 한국 교육이 마주한 구조적 과제를 살핀다.

2026년 5월 30일 · 약 18분 분량

한 세대 동안 통하던 약속이 있었다. 좋은 시험 점수로 좋은 학교에 가고, 학위와 자격증을 손에 쥐면 안정된 직업과 소득이 따라온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그 약속의 토대를 양쪽에서 동시에 허물고 있다. 한쪽에서는 변호사·회계사·의사처럼 ‘라이선스로 보호받던’ 전문직의 핵심 업무를 빠르게 대신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을 걸러 내던 학위·시험 점수라는 장치 자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곳에 있다. 학위와 자격증, 시험 점수가 인증해 온 것은 결국 정해진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푸는 능력이다. 방대한 지식을 외워 두었다가 적절한 순간에 꺼내 쓰고, 표준화된 절차를 오류 없이 반복하는 힘이다. 그런데 바로 그 능력이야말로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사람을 줄 세우려고 만든 잣대와, 기계가 추월한 영역이 정확히 겹쳐 버린 것이다.

시험·학위가 인증하는 능력 암기 · 인출 표준 절차 적용 정답 도출 속도 인공지능이 잘하는 일 지식 검색·요약 패턴 인식 반복 추론 겹치는 영역 점점 커진다 남는 인간의 몫 — 무엇을 풀지 정하는 문제 정의 · 판단 · 책임 · 관계 · 창의
선발 장치가 ‘정답을 빠르게 푸는 능력’을 잴수록, 그 능력이 인공지능과 겹치는 영역도 함께 넓어진다. 자격증이 가리키던 희소 가치가 줄어드는 구조다.

이 글은 그 변화를 세 갈래로 따라간다. 첫째, 인공지능이 전문직의 ‘핵심’을 어디까지 잠식했는가. 둘째, 세계 채용 시장이 어떻게 학벌 대신 실력을 직접 검증하는 쪽으로 움직이는가. 셋째,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을 가르고 ‘안정된 라이선스’로 인재가 몰리는 한국이 왜 정반대 방향에 서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길러야 하는지 짚는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핵심 질문은 “시험을 없애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인재로 볼 것인가”다.

01인공지능이 전문직의 ‘핵심’을 파고든다

전문직이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아 온 근거는 ‘진입 장벽’이었다. 오랜 교육과 어려운 시험, 국가가 부여하는 면허가 그 장벽을 세웠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그 장벽 안쪽, 즉 전문가가 실제로 수행하던 인지 노동을 직접 대신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변화는 진단 영역에서 나타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이 인공지능 기반 의료기기를 추적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인허가된 기기는 2025년 말 기준 1,400개를 넘어섰고, 그중 약 76%인 1,100여 개가 영상의학(방사선영상 판독) 분야에 몰려 있다. 2025년 2월에는 갈비뼈 골절을 선별하는 기기가 거대 인공지능 모델을 토대로 한 첫 사례로 허가를 받았다. 영상에서 이상 부위를 짚어 주는 작업은 이미 기계가 일상적으로 보조하는 일이 됐다.

진단의 정확도를 직접 견준 연구도 나왔다. 2024년 보도된 한 비교 연구에서, 인공지능 단독의 진단 정확도가 약 90%로, 인공지능을 도구로 함께 쓴 의사(약 76%)나 전통적 자료에만 의존한 의사(약 74%)보다 높게 나왔다. 표본이 제한된 연구라 일반화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판독과 추론’이라는 의료의 한 축에서 기계가 사람을 따라잡고 있다는 신호로는 충분하다.

수술도 변하고 있다. 로봇 수술은 이미 상용화됐고, 이제는 인공지능이 그 로봇의 움직임을 보조하면서 한 번의 수술에 필요한 인력 자체가 줄고 있다. 신약 개발에서는 인공지능이 면역 반응을 일으킬 표적(신항원)을 예측해 환자마다 다른 맞춤형 백신을 설계하는 단계까지 왔다. 대표적으로 두 글로벌 제약사가 공동 개발한 개인 맞춤형 메신저 리보핵산(mRNA, messenger RNA) 암 백신은 면역항암제와 함께 투여했을 때 흑색종(피부암의 일종) 환자의 재발·사망 위험을 1차 임상에서 약 44%, 5년 추적에서 약 49% 낮췄다. 환자 종양의 돌연변이를 분석해 한 사람만을 위한 백신을 약 한 달 만에 만들어 내는 방식이며, 표적 예측에 인공지능이 쓰인다.

FDA 인공지능 의료기기 누적 인허가 (1995년 이후 누적, 2025년 말) 전체 1,451개 가운데 영상의학이 1,104개 영상의학 1,104개 (76%) 그 외 347개 2025년 4분기에만 72개가 추가로 허가됐고, 그중 55개가 영상의학 분야였다. 2025년 2월에는 거대 인공지능 모델 기반 기기가 처음으로 허가를 받았다.
인공지능 의료기기 인허가는 영상 판독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늘고 있다. 자료: 미국 식품의약국(FDA) 집계.

이런 흐름을 두고 일론 머스크는 2026년 초 한 팟캐스트에서 “의대에 가는 일이 곧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몇 년 안에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보다 정밀한 수술을 하고, 누구나 ‘현직 대통령이 받는 것보다 나은 의료’를 누리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거대 언어 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이 논문을 읽고 요약하는 일에서 이미 사람을 앞서는 만큼, 그 능력이 진단과 처방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논리다.

다만 이 주장은 과장의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한 미국 대학의 생명윤리학자는 복잡한 수술을 사람만큼 안전하게 해내려면 “여러 해”가 더 필요하다며 로봇이 곧 외과의를 대체한다는 단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영상 판독을 인공지능에만 전적으로 맡기는 데 동의한 응답자가 3%에 그쳤고, 81%는 사람과 인공지능의 결합을 선호했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서는 의대 지원자가 오히려 늘어, 2025~2026학년도 의대 등록생이 10만 명을 넘고 지원자는 전년 대비 5.3% 증가해 비(非)팬데믹 시기 기준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직업의 핵심이 흔들린다고 해서 그 직업이 곧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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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의 일을 둘로 쪼개 보면

한 전문직의 업무를 ‘정비 매뉴얼대로 부품을 교체하는 일’과 ‘무엇이 고장의 진짜 원인인지 판단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일’로 나눠 보자. 인공지능이 빠르게 대체하는 쪽은 전자, 즉 표준화된 지식을 정확히 적용하는 부분이다. 자격증 시험이 주로 검증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반면 모호한 상황에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 정하고, 환자·의뢰인과 신뢰를 쌓고, 틀렸을 때 책임을 지는 부분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직업이 사라지기보다, 직업 안에서 ‘기계가 잘하는 부분’과 ‘사람의 몫’이 빠르게 재배치되는 중이다.

02채용 시장이 ‘간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문직의 일이 바뀌는 사이, 사람을 뽑는 방식 자체가 흔들린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정부·기업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결정을 돕는 한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시가총액이 4천억 달러를 웃도는 이 회사는 2025년, 대학 졸업장 대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세 인재를 직접 뽑는 펠로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500명 넘는 지원자 가운데 22명이 선발돼 4개월간 월 5,400달러를 받으며 정규직 사원들과 함께 실제 문제를 풀었고, 성과를 낸 일부는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회사는 “빚도, 4년의 교양 강의도 건너뛰라”는 노골적인 구호를 내걸었고, 최고경영자는 “대학이 더는 인재를 길러 내는 믿을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공언했다. 2026년에는 두 번째 기수를 모집해, 이 실험을 일회성으로 끝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발상의 원조는 한 실리콘밸리 투자자가 2011년에 시작한 펠로십이다. 대학을 그만두거나 진학하지 않는 만 22세 이하 청년에게 창업 자금을 대 주는 프로그램으로, 지원금은 초기 10만 달러에서 현재 2년간 25만 달러로 늘었다. 지금까지 290여 명이 거쳐 갔고, 협업 디자인 도구·블록체인 플랫폼·자율주행 센서·인공지능 학습 데이터 기업 등 11개가 넘는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을 배출했다. 이들이 세운 회사의 누적 가치는 집계 기준에 따라 1천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학위라는 검증 장치를 건너뛰어도 충분한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인 셈이다.

이것은 일부 별난 회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글·아이비엠(IBM)·애플 같은 기술 기업은 물론 월마트·델타항공 등 전통 기업까지 상당수 직무에서 ‘4년제 학위 필수’ 조건을 떼어 냈다. 아이비엠은 미국 내 일자리의 약 절반에서 학위 요건을 없앴고, 미국에서는 16개 이상의 주가 공무원 채용에서 학위 요건을 폐지했다. 한 글로벌 컨설팅사의 분석에 따르면 직무 역량으로 뽑는 방식은 학력으로 뽑는 방식보다 업무 성과를 약 5배 더 잘 예측한다. 불필요한 학위 요건 탓에 일자리에서 배제된 ‘학위 없는 숙련 인력’이 미국에서만 1,500만 명을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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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는 ‘중고차 보증서’ 같은 신호였다

중고차를 살 때 차의 실제 상태를 일일이 뜯어 보기 어려우니, 우리는 ‘공식 보증서’ 같은 신호에 기대 값을 매긴다. 학위도 비슷했다. 지원자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어려우니,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능력의 대리 지표로 쓰였다. 그런데 실력을 ‘직접’ 검증하는 비용이 떨어지면 보증서의 값어치도 함께 떨어진다. 코딩 과제, 포트폴리오, 실무형 시험으로 지원자의 능력을 곧장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간판이라는 신호의 프리미엄이 깎이는 것이다.

다만 현실은 구호만큼 빠르지 않다. 한 유력 경영대학원과 노동시장 연구기관의 분석은 중요한 반전을 보여 준다. 학위 요건을 없앴다고 공언한 기업들에서조차, 실제로 학위 없는 사람으로 채워진 채용은 700건 중 1건에도 못 미쳤다는 것이다. 채용 담당자의 85%가 “역량 중심으로 뽑는다”고 답했지만, 실제 데이터로 보면 그 비율은 0.14%에 그쳤다. 공고에서 ‘학위 필수’라는 문구를 지우는 일과, 이력서를 받아 든 사람이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향은 분명하되, 관성은 여전히 강하다는 뜻이다.

03그런데 한국은 거꾸로 간다 — 코리아 딜레마

세계 채용 시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직접 보려 움직이는 사이, 한국의 최상위 인재는 정반대 방향으로 쏠린다. 더 안정적이고 더 ‘면허로 보호받는’ 직업, 곧 의사로 향한다. 이 쏠림은 통계로 또렷하다. 한 입시기관 분석에 따르면 2025학년도 정시에서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포기한 수험생이 235명에 달했고, 그 다수는 다른 대학 의약학 계열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됐다.

대기업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조차 의대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2024학년도 정시에서 주요 5개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 합격자 중 138명이 등록을 포기했는데, 이는 모집정원 77명의 약 1.8배(179.2%)에 해당한다. 합격하고도 의약학 계열이나 서울대 자연계열에 중복 합격해 그쪽을 택한 결과다. 학비 면제와 입사 보장이라는 파격적 혜택조차, ‘면허가 주는 안정성’이라는 유인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반도체 계약학과 정시: 모집정원 vs 등록포기 주요 5개 대학 합계 · 2024학년도 정시(일반전형) 기준 77명 모집정원 138명 등록포기 정원의 1.8배 같은 해 서울대 정시 합격 후 등록포기자는 235명(자연계열 178명)이었다. 자료: 입시기관 종로학원 분석.
입사가 보장된 학과조차 의약학 계열로의 이탈을 막지 못했다. 정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합격증을 손에 쥐고 떠났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라이선스 트랙이, 인공지능 자동화의 가장 또렷한 표적이 되고 있다는 역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역설이 겹친다. 수험생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몰려가는 의료 면허가, 앞서 본 것처럼 인공지능이 진단·판독·문헌 분석에서 가장 빠르게 잠식하는 영역과 정면으로 맞닿아 있다. 동시에 인공지능 반도체, 휴머노이드 로봇처럼 향후 수요가 폭발할 분야의 인재 풀은 얇아진다. 개인에게는 합리적 선택의 총합이, 사회 전체로는 ‘미래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인재가 빠져나가는’ 결과로 귀결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코리아 딜레마’의 한 단면이다.

왜 이런 쏠림이 멈추지 않을까. 핵심에는 한 번의 시험 점수로 최상위부터 차례로 학과 선택권을 행사하게 하는 선발 구조가 있다. 점수가 높을수록 ‘가장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먼저 고르게 되고, 그 끝에 의대가 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안전한 선택으로 더 쏠리는 인간의 본성과, 줄 세우기에 최적화된 제도가 맞물려 쏠림을 증폭한다.

04수능 30년: ‘사고력 평가’가 ‘줄 세우기 기계’가 되기까지

지금의 선발 구조를 떠받치는 축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수능은 1993년 처음 치러졌다. 단편적 교과 지식을 외워 ‘찍는 능력’을 키운다는 비판을 받던 옛 학력고사를 대신해, 미국의 대학입학자격시험(SAT, Scholastic Aptitude Test)을 본떠 대학에서 공부할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시행 초기만 해도 암기 위주 교육을 혁신할 새로운 평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수능은 약 13차례 개편을 거치면서도 ‘다섯 개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과 ‘상대평가로 등수를 매기는 줄 세우기’라는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학교 교육과 교육과정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지만, 정작 입시의 관문은 측정하기 쉬운 ‘정답률’에 머물렀다. 그 결과 사교육 접근성이 좋은 학생에게 유리하다는 지적이 통계로 거듭 확인됐고, 현행 통합형 체제에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평가’라는 비판이 이어진다. 정부는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을 확정했지만, 사회 변화에 걸맞은 인재를 길러 낼 평가로의 전환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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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밑에서만 열쇠를 찾는 함정

한밤중에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정작 열쇠를 떨어뜨린 어두운 골목이 아니라 ‘불빛이 환한 가로등 밑’에서만 열쇠를 찾는다는 우화가 있다. 찾기 쉬운 곳을 뒤지는 셈이다. 시험도 같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길러야 할 진짜 역량(문제를 정의하고, 협업하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힘)은 채점하기 어렵다. 반대로 정답이 하나뿐인 객관식은 채점이 쉽고 공정해 보인다. 그래서 ‘재기 쉬운 것’을 자꾸 재게 되고, 교육은 그 잣대에 자신을 맞춘다. 문제는, 그 ‘재기 쉬운 능력’이 바로 인공지능이 가장 먼저 추월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평가하느냐가 곧 무엇을 가르치느냐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시험이 정답률만 묻는 한, 교실은 정답을 빠르게 맞히는 훈련장이 되고 학생은 정해진 답을 향해 달린다. 그런데 그 훈련의 정점에 있는 능력이 이미 기계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면, 우리는 12년의 교육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05그렇다면 무엇을 길러야 하나 — 정답에서 문제로

방향을 가늠하려면 노동시장의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이 1,000여 개 기업을 조사해 펴낸 2025년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는, 2030년까지 기술·인구·경제 변화로 1억 7천만 개의 새 일자리가 생기고 9천200만 개가 사라져 순증 7천800만 개의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전체 일자리의 약 22%가 요동치는 셈이다. 직무에 필요한 핵심 역량의 39%가 2030년까지 바뀔 것으로 전망됐고, 기업의 63%는 ‘역량 격차’를 사업 전환의 가장 큰 장애물로 꼽았다.

2030년까지의 일자리 변화 전망 (전 세계) +1억 7천만 새로 생성 −9천200만 소멸 순증 7천800만 합계 전체 일자리의 약 22%가 변동. 자료: 세계경제포럼(WEF) ‘일자리의 미래 2025’.
일자리는 줄지 않는다. 다만 ‘무엇을 하는 일인가’가 대규모로 재배치된다. 사라지는 일과 생겨나는 일의 역량이 다르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떤 역량이 살아남을까. 같은 보고서가 꼽은, 중요도가 빠르게 오르는 역량은 인공지능·빅데이터 같은 기술 역량과 더불어 분석적 사고, 창의적 사고, 회복탄력성과 유연성, 호기심과 평생학습이다. 특히 분석적 사고는 기업 10곳 중 7곳이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역량’으로 지목했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풀어야 할 문제인지를 정의하고, 모호함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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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가 나와도, ‘무엇을 계산할지’는 사람이 정한다

전자계산기가 보급됐을 때 산수 교육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교육의 무게중심은 ‘빠른 암산’에서 ‘어떤 식을 세울 것인가’로 옮겨 갔다. 인공지능은 훨씬 강력한 계산기다. 잘 정의된 문제를 푸는 데는 압도적이지만, 무엇이 풀 만한 문제인지, 어떤 질문을 던질지, 어떤 답을 신뢰할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미래의 경쟁력은 ‘정답을 얼마나 빨리 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풀지를 얼마나 잘 정하느냐’로 이동한다.

이 전환을 먼저 받아들인 교육 현장은 ‘답을 외우는 곳’이 아니라 ‘직접 부딪혀 보는 곳’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92년 미국에서 28개 팀으로 출발한 청소년 로봇 경진대회는 2025년 시즌 35개국 9만 3천여 명이 참가하는 무대로 커졌다. 학생들은 정해진 답을 푸는 대신, 로봇의 몸체와 제어 알고리즘을 직접 설계·제작하고, 수없이 실패하며, 팀으로 협업해 전략을 짠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이 대회를 미래 인재의 발굴 창구로 주목하는 이유는, 졸업장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그 자체로 강력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대학 교육에서도 실험이 이어진다. 미국의 미네르바 대학(Minerva University)은 고정된 캠퍼스 없이 학생들이 4년간 서울을 포함한 세계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공부한다. 일방적 강의 대신 소규모 토론식 세미나로 수업이 이뤄지고, 각 도시에서 실제 과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가 교육의 중심이다. 시험 점수를 입학의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 합격률은 1% 안팎으로 까다롭다. 정해진 정답을 빨리 맞히는 능력보다, 모호한 현장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협업해 풀어내는 능력을 길러 내겠다는 설계다.

06골든타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오해는 피하자. 인공지능이 모든 직업을 곧 없앤다는 주장에는 과장이 섞여 있다. 영상 판독을 기계에만 맡기는 데 동의한 사람은 소수였고, 학위 요건을 없앤 기업조차 실제 채용에서는 옛 습관을 못 버렸으며, 미국에서는 의대 지원이 되레 늘었다. 변화는 선언보다 느리게,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핵심 메시지는 ‘직업이 사라진다’가 아니라, 직업의 핵심과 인재를 가리는 잣대가 동시에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마주한 질문도 그래서 “시험을 없앨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무엇을 인재로 볼 것인가”다. 직업의 핵심이 ‘정답 도출’에서 ‘문제 정의와 판단’으로 옮겨 간다면, 그 인재를 길러 내고 가려내는 교육·평가·채용의 신호도 함께 옮겨 가야 한다. 측정하기 쉬운 정답률만 계속 잰다면, 교실은 인공지능이 이미 추월한 능력을 향해 12년을 달리는 셈이 된다. 무엇을 평가할지 다시 정의하는 일이 곧 무엇을 가르칠지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고, 그 선택의 시간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