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 종교사
고백하는 신앙과 공언하는 신앙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마음은 거룩함인가, 아니면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인가. 자청한 순교의 역사를 따라, 증언(confess)과 과시(profess)가 갈라지는 지점을 짚는다.
01 — 한 섬에서의 죽음2018년, 다시 떠오른 오래된 물음
2018년 11월, 스물여섯 살의 한 미국인 선교사가 인도 벵골만의 외딴섬 북센티널섬(North Sentinel Island)에서 목숨을 잃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해 온 센티널족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인도 정부가 법으로 출입을 금지한 그 섬에 들어갔다. 현지 어부들에게 돈을 건네 해안경비대의 감시를 피해 카누로 섬에 접근했고, 주민들이 활을 겨누자 한 차례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 어린 주민이 쏜 화살은 그가 들고 있던 성경을 꿰뚫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섬에 들어갔고,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섬은 워낙 오래 고립되어 있어 외부인의 접근 자체가 치명적이었다. 면역력이 없는 고립 부족에게는 흔한 감기 바이러스 하나도 공동체 전체를 몰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다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은 외부 접촉 이후 질병과 혼혈, 이주를 거치며 한 세기 만에 수가 격감했다. 인도 정부가 출입을 금지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가 남긴 일기에는 그 섬을 “사탄의 지상 마지막 요새”로 여기는 확신과 함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적혀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입국을 도운 어부들은 실정법 위반자로 체포되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이 죽음을 두고 세계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한쪽은 그를 신앙의 영웅이자 순교자로 기렸다. 다른 한쪽은 무모하고 오만한, 신식민주의적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비판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외부인의 접근이 한 부족을 통째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를 도운 사람들이 범법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 내면의 동기를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앙의 경계를 넘어 오래된 물음 하나를 다시 불러냈다.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마음은 언제나 거룩한가. 깃발을 들고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행위와,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02 — 에코의 경고“진리를 위해 죽으려는 자를 경계하라”
이 의심은 새롭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의 1980년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늙은 수도사 탐정 윌리엄은 젊은 제자 아드소에게 경고한다. 진리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된 예언자들을 두려워하라고. 그런 자들은 대개 수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죽게 하며, 흔히 자기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 )하라”라는 빈칸을 채우라 하면, 대부분은 “존경”을 떠올릴 것이다. 에코가 고른 단어는 “경계하라”였다. 같은 소설에서 윌리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그리스도는 경건 그 자체에서,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인에게서 이단이 나오고, 선견자에게서 광인이 나오듯이.
이 경고가 겨누는 곳은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 자체가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문제는 그 가장 깊은 동기가 진리에 대한 증언인지, 아니면 자기 신앙의 위대함을 전시하려는 욕망인지다. 그리고 그 욕망이 한 개인을 넘어 지도자에게 깃들 때, 비극은 그 사람 혼자로 끝나지 않는다.
03 — 자청한 죽음들박해의 시대, 교회가 스스로 그은 선
흥미롭게도, 자발적 순교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경계는 기독교 바깥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그것도 박해가 가장 극심하던 초기 교회에서 나왔다.
2세기 중엽 서머나(오늘날 튀르키예 이즈미르)의 주교 폴리카르포스의 죽음을 기록한 「폴리카르포스 순교록」에는 퀸투스라는 인물이 짧게 등장한다. 프리기아 출신의 이 사람은 박해 소식이 들리자 스스로, 그리고 몇몇 사람까지 부추겨 함께 권력자 앞에 나아가 순교를 자청했다. 그러나 막상 원형경기장의 맹수를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신앙을 부인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전한 서머나 교회는 분명히 못 박는다. 스스로를 내어주는 자들을 우리는 칭송하지 않으며, 복음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퀸투스가 프리기아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2세기 후반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몬타누스파는 격렬한 예언과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알려진 운동이었다. 자청한 순교가 교회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주로 2~3세기의 일이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교사는 순교를 향해 스스로 달려드는 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이름만 공유할 뿐이라고까지 말했다.
초기 교회는 박해 아래 신앙을 지킨 이들을 두 부류로 불렀다. 끝내 죽임을 당한 이는 ‘순교자(martyr)’였고, 신앙을 끝까지 고백했으나 살아남은 이는 ‘고백자(confessor)’였다. 두 호칭 모두 깊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죽음 그 자체가 신앙의 척도였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어 confessor(고백자)라는 말 자체가, 바로 이 ‘신앙을 고백한 자’에서 나왔다.
같은 긴장은 북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남긴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2세기 말, 아시아 속주의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누스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자,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이 떼를 지어 그의 재판석 앞으로 몰려가 스스로 처형을 요구했다. 몇 사람을 처형한 뒤에도 외침이 그치지 않자, 총독은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 가련한 자들아, 그렇게 죽고 싶거든 절벽이나 밧줄이 있지 않느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일화를 그리스도인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과시하는 데 끌어다 썼지만, 동시에 그 장면은 죽음을 자청하는 무리가 외부인의 눈에 얼마나 이해 불가능하게 비쳤는지도 함께 전한다.
04 — 권력이 된 광기뮌스터: 왕은 살고 백성은 죽었다
이런 열망이 한 개인에게 머물 때는 안타까운 개인사로 그친다. 그러나 그것이 지도자의 권력과 결합하면, 그가 이끄는 수많은 사람이 ‘신앙’과 ‘희생’의 이름으로 함께 끌려 들어간다.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례는 16세기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다.
1534년, 종교개혁의 급진파였던 재세례파(Anabaptist)의 일부가 뮌스터시를 장악했다. 지도자 얀 판 레이던(Jan van Leiden)은 스스로를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선포하고 극단적 종말론을 퍼뜨렸다. 도시가 주교군에 포위되자, 그는 끝까지 저항하다 죽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가는 길이라며 추종자들에게 무모한 항전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화려한 옷을 두르고, 구약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도입해 열여섯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굶주리는 시민들 위에 군림했다. 사치 속의 그를 비판한 아내 한 사람은 그의 손에 처형당했다.
1535년 도시가 함락된 뒤 그는 처참하게 처형되었고, 그와 두 측근의 시신은 철창에 담겨 성 람베르티 교회 탑에 매달렸다. 그 철창은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다.
판 레이던이 마땅한 대가를 치렀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물음은 남는다. 한 사람의 과대망상에 선동되어 ‘순교’의 이름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추종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에코의 경고가 정확히 겨눈 지점이 여기다. 진리를 위해 죽으려는 자는 흔히 많은 이를 자기와 함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죽게 한다.
05 — 선교의 외피전하려는 진리에서, 순교하려는 나로
또 다른 사례는 13세기 프란치스코회에서 나온다. 1220년, 베라르도(Berard)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수사가 모로코로 건너가 공개적으로 이슬람과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난했다. 두 차례 추방당하고도 그들은 매번 돌아와 같은 도발을 반복했고, 분노한 통치자는 마침내 그들을 참수했다. 이들은 곧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가 지적하듯, 이들의 이야기를 보존한 기록들은 무슬림의 회심이라는 선교의 성과가 아니라 순교를 향한 열망 그 자체를 찬미했다.
정작 이 수도회의 창시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1219년 제5차 십자군 와중에 이집트의 술탄을 직접 찾아갔을 때 이슬람이나 무함마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롭고 겸손한 태도로 복음을 전하고 술탄을 위해 기도했다. 같은 수도회 안에서도, 평화로운 증언과 도발적 자기과시는 이렇게 갈렸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선교요 증언이었다. 그러나 회심이 아니라 순교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그 행위의 무게중심은 ‘전하려는 진리’에서 ‘순교자가 되려는 나’로 옮겨 간다.
06 — 언어가 가르는 두 신앙공언(profess)과 고백(confess)
그렇다면 거룩한 증언과 자기과시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흥미롭게도 그 경계는 두 라틴어 단어의 짜임 속에 이미 새겨져 있다.
라틴어 profiteri(공언하다)와 confiteri(고백하다)는 모두 ‘인정하다·말하다’를 뜻하는 같은 어근(fateri)에서 나왔다. 차이는 접두사에 있다. ‘프로(pro-)’는 ‘앞으로’를 뜻한다. 공언이란 묻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선언하고, 전시하고, 때로 도발하는 행위다. 반면 ‘콘(con-)’은 ‘함께·응하여’를 뜻한다. 고백이란 결정적인 물음 앞에서 비로소 진리를 인정하고 응답하는 행위다.
신약성경의 헬라어도 같은 결을 가진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예수가 “나를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자”라 할 때 쓰인 동사 호몰로게오(homologeo)는 ‘같은 말을 하다, 동의하다, 인정하다’를 뜻한다. 그것은 앞에 나서서 외치는 일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같은 편에 서는 일이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 앞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고백자’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공언은 내가 시작하는 선언이고, 고백은 상황이 불러낸 응답이다.
자기 용기를 증명하려고 일부러 강에 뛰어드는 사람과, 아이가 실제로 물에 빠졌을 때 뛰어드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 둘 다 물에 뛰어들지만, 앞사람은 보여주기 위해 위험을 만들어 내고 뒷사람은 진짜 필요에 응답한다. 공언과 고백의 차이가 이와 같다. 행위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전시인지 응답인지가 둘을 가른다.
07 — 물러섬이라는 용기아나코레오: 때를 기다린다는 것
만약 신앙이 곧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라면, 복음서 속 예수의 행적은 의외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거듭 ‘물러나는’ 장면을 그린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아나코레오(anachoreo)는 ‘뒤로 물러나다, 철수하다, 피하다’를 뜻하며, 마태복음에서만 여러 차례 반복된다.
헤롯이 아기들을 학살하려 하자 예수의 가족은 이집트로 물러났고,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에 예수는 물러났으며(마태복음 4장 12절), 자신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자 그 자리를 떠났다(마태복음 12장 15절, 14장 13절). 이것은 비겁이 아니라 때(時)에 대한 감각이었다. 예수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를 서두르지 않았고, 무의미한 충돌로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자들을 파송하며 내린 명령도 같은 결이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장 23절). 죽음을 자청하라가 아니라, 피하라는 것이다.
3세기 중엽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도 같은 태도를 가르쳤다. 순교를 코앞에 둔 시점에 쓴 편지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누구도 형제들을 위해 소동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고. 신앙은 붙잡혀 넘겨진 그 순간에 비로소 말하는 것이지, 미리 광장에 나가 깃발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자신도 총독이 돌아오기를 은밀한 곳에서 기다리며, 말해야 할 순간에 말하려 했다.
노련한 소방관은 무작정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다. 잘못된 순간에 뛰어들면 자신도, 구해야 할 사람도 함께 잃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로 가장 용감한 선택은 옳은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물러섬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을 위해 자신을 아끼는 절제일 수 있다.
08 — 한 글자의 차이불사르다(καυθήσομαι)와 자랑하다(καυχήσωμαι)
신약성경의 한 구절은 이 긴장을 글자 하나의 차이로 압축해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3장, 이른바 ‘사랑장’의 한 대목이다.
오랫동안 한국어 성경 다수는 이 구절을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로 옮겼다. 그런데 헬라어 사본들을 비교하면 묘한 문제가 드러난다. 성경은 인쇄술 이전, 손으로 베껴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사본마다 미세한 차이가 생겼다. 이를 견주어 원래 본문을 추정하는 작업을 본문비평이라 한다. 그런데 가장 오래되고 신뢰받는 사본들(파피루스 P46, 시나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은 여기서 ‘불사르다(카우테소마이, καυθήσομαι)’가 아니라 ‘자랑하다(카우케소마이, καυχήσωμαι)’로 읽는다. 두 단어는 사실상 글자 하나 차이다.
본문비평학자 브루스 메츠거를 비롯한 다수는, 원래 ‘자랑하다’였던 것이 화형이라는 순교가 흔해진 후대에 ‘불사르다’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래서 최근의 여러 번역은 이 구절을 “자랑하려고 내 몸을 내어 줄지라도”로 옮긴다.
이 한 글자의 차이가 가리키는 바는 묵직하다. 사랑이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몸을 희생할 수 있다. 그 희생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희생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자기과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내 몸을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의 최고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 자랑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통찰이 여기 담겨 있다.
09 — 오늘의 무대좋아요와 공유라는 새로운 면류관
맹수도 없고 총독도 없는 오늘, 이 물음은 사라졌는가. 오히려 자리를 옮겨 더 넓어졌다. 박해가 사라진 시대에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은 다른 무대를 찾아냈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품고 살아가는데, 지금의 환경은 그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즉시 구현하라고 재촉한다.
에스엔에스(SNS·Social Networking Service,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떠올려 보면 쉽다. 좋아요 개수, 공유 횟수, 댓글 수가 곧 그날의 성적표가 된다. 사람들은 그 숫자를 얻으려 안달하고, 숫자가 오르지 않으면 초조해한다. 고대의 순교 지망자가 군중 앞에서 죽음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했다면, 지금은 화면 너머의 군중을 향해 자기를 전시한다. 매체가 바뀌었을 뿐, 응시받고 싶은 마음의 구조는 같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골방에서 조용히 고백해야 할 신앙의 아름다움이 흐려지고, 그 자리에 타인 앞에서 자기 신앙을 전시하려는 충동이 들어선다. 신앙이라는 무대 위에서 뛰어난 주연 배우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오래전부터 ‘영적 나르시시즘(spiritual narcissism)’이라 불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더 큰 계획과 마땅한 때를 앞질러 달려 나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룩한 이름을 향한 욕망이 거칠고 더디고 때로는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추월해 버리는 것.
이 함정은 종교에만 있지 않다. 어떤 대의든 마찬가지다. 정의를 위한 것이든 진보를 위한 것이든, 사람을 위하는 일에서조차 ‘내가 그 일을 한다는 사실’이 일 자체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같은 전도가 일어난다. 그래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단순하다. 나는 무대 위에서 신앙을(혹은 신념을) 연기하는 배우인가, 아니면 부름에 응답해 증언하는 사람인가.
10 — 맺음만들어 낸 십자가와 주어진 십자가
오해를 막기 위해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글은 신념을 위한 희생을 비웃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목숨을 걸고 진리를 증언했고, 카르타고의 그 작가 역시 끝내 순교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고백을 회피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 앞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높은 용기다. 문제는 희생 자체가 아니라, 그 희생이 ‘불려 나온 것’인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에 있다.
두 신앙을 갈라 온 선이 바로 여기다. 한쪽은 자기 손으로 십자가를 제작해, 많은 사람이 보는 무대 위에 올린다. 다른 한쪽은 주어진 십자가를 진다. 한쪽은 묻지 않아도 앞으로 나와 깃발을 흔들고(공언), 다른 한쪽은 결정적 순간에 “나는 따른다”고 응답한다(고백). 두 신앙은 겉으로 똑같이 헌신처럼 보이지만, 한쪽의 중심에는 ‘나’가 있고 다른 한쪽의 중심에는 ‘나를 부른 것’이 있다.
신앙의 전시는 흔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의 고백은 드물다.
오늘 우리에게 흔한 것은 깃발이고, 드문 것은 응답이다. 자기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려고 애쓰는 일은 차고 넘치지만, 어쩔 수 없이 불려 나온 자리에서 조용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만들어 낸 십자가를 내려놓고, 주어진 십자가를 알아보는 것. 무대 위 배우에서 내려와 증인으로 서는 것. 진리를 위해 죽으려는 마음과 진리를 증언하려는 마음을 가르는 그 좁은 선 위에, 이 오래된 물음은 여전히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