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과학
감정·욕망·자아를 다루는 2,500년 된 마음의 관찰을,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검증과 함께 읽는다
불교는 흔히 향과 절, 윤회와 내세의 종교로 떠올려진다. 그러나 그 가장 오래된 가르침을 신앙의 언어를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떻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덜 수 있는가에 관한 정밀한 관찰이다. 그것은 믿어야 할 교리라기보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서 검증해 볼 수 있는 일종의 가설에 가깝다.
2,500여 년 전 북인도의 한 수행자는 우주의 기원이나 신의 존재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기를 거듭 거절했다. 전해지는 비유에 따르면, 그는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화살을 쏜 자의 신분과 활의 재질을 다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먼저 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살은 우리가 매일 겪는 마음의 괴로움이고, 그의 관심은 오직 그 괴로움을 다루는 실천적인 방법에 있었다.
이 글은 그 실천적 관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 몇 가지를 골라, 오늘날의 심리학과 뇌과학이 같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지와 나란히 놓는다. 종교적 진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분노·욕망·비교·자아에 관한 오래된 통찰이 현대의 실험실에서 어디까지 확인되었고, 또 어디서부터는 아직 불확실한지를 정직하게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에는 고(苦, dukkha)라는 한 단어가 있다. 흔히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옮기지만, 이 번역은 원래의 뜻을 절반쯤 놓친다. 학자들은 두카를 '불만족스러움', '어딘가 어긋나 있음'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격렬한 고통만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순간조차 스며 있는 미세한 불충분함, 무언가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그 느낌까지 포함한다.
왜 그럴까. 즐거운 일은 영원하지 않아 곧 끝나기에 아쉽고, 끝나고 나면 그리워서 괴롭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는 순간 빛이 바래고, 손에 넣지 못하면 결핍으로 남는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것에도 영구히 만족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첫 번째 통찰, 곧 삶에는 늘 약간의 어긋남이 따라붙는다는 진단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관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가르침을 의학에 비유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유능한 의사는 먼저 증상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찾고, 나을 수 있는지를 판단한 뒤, 처방을 내린다. 괴로움을 직시하는 것은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치료 가능한 상태로 다루기 위해서다.
두카라는 말의 어원에는 수레바퀴의 축이 구멍에 꼭 맞지 않아 덜컹거리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길이 아무리 평탄해도 축이 약간 어긋나 있으면 수레는 내내 미세하게 흔들린다. 우리 삶도 그렇다. 큰 불행이 없는 날에도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편치 않다면, 그것은 바깥의 길이 나빠서가 아니라 축이 어긋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긋남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르침은 그것을 갈애(渴愛, tanha), 곧 '목마름'이라 부른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는 안 되며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끝없이 졸라대는 마음의 갈증이다. 전통적으로는 감각적 쾌락을 향한 목마름,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목마름, 그리고 무언가를 없애고 싶다는 목마름의 세 가지로 나뉜다.
핵심은 욕망 자체가 악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먹고 자고 사랑하려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대상에 들러붙어, 그것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매달리는 집착이다. 집착은 만족을 모른다. 하나를 얻으면 곧 다음을 원하고, 그 추격에는 끝이 없다.
흥미롭게도 현대 심리학은 이 오래된 관찰을 거의 그대로 확인한다.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과 도널드 캠벨은 1971년, 사람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곧 거기에 적응해 본래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간다는 현상에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8년의 한 유명한 연구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과 사고로 크게 다쳐 몸이 마비된 사람들을 비교했다. 그 결과 당첨자들은 일반인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 않았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에서는 오히려 기쁨을 덜 느꼈다. 사고를 당한 이들도, 물론 더 힘들기는 했지만 흔히 예상하는 것만큼 불행에 짓눌려 있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적응해 갔던 것이다. 새 자극이 주는 기쁨은 빠르게 당연한 것이 되고, 마음은 다시 목말라한다.
러닝머신 위에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풍경이 바뀌지 않는다.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더 높은 자리를 손에 넣을 때마다 잠시 앞으로 나아간 듯하지만, 발판은 곧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진다. 문제를 푸는 길은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쳇바퀴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이 가르침은 모든 현상에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무상(無常, anicca),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둘째는 앞서 본 어긋남. 그리고 셋째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아(無我, anatta), 곧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다는 통찰이다.
우리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한가운데에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켜보는 단단한 자아의 핵이 있다고 직관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그 핵을 정작 찾아보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몸의 감각, 느낌, 인식, 의도, 의식의 흐름뿐이다. 전통적으로 이 다섯 가지를 묶어 오온(五蘊)이라 부른다. '나'란 이 흐르는 과정들의 묶음에 우리가 붙인 편리한 이름일 뿐, 그 아래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고정된 알맹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현대의 수행 스승은 이를 유리잔에 빗대어 말했다. 그는 아끼는 유리잔을 가리키며, 자신은 그것이 이미 깨져 있다고 여긴다고 했다. 언젠가 바람에 떨어지거나 팔꿈치에 부딪혀 깨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잔을 쓰는 매 순간이 온전히 누려지고, 막상 깨졌을 때도 '당연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 된다.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내려놓을 때, 변화는 비극이 아니라 사물의 본래 모습이 된다.
강은 늘 '같은 강'으로 불리지만, 그 안을 흐르는 물은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 촛불도 한자리에서 고요히 타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매 순간 다른 기체가 타오르며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나'라는 이름도 그와 같아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잇는 연속성은 있되 그 둘이 똑같은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이 마음의 과학이 가장 정밀하게 다루는 감정 가운데 하나가 분노다. 가장 오래된 시구 모음으로 꼽히는 한 경전은, 미움은 미움으로는 결코 멎지 않으며 오직 미워하지 않음으로만 멎는다고 말한다. 또한 거친 말로 남을 치면 그 말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경고한다.
분노가 끈질긴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달콤한 확신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 정당함의 쾌감 때문에 우리는 화를 쉽게 놓지 못하고 곱씹는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불에 장작을 더하는 셈이 된다.
가장 실용적인 통찰은 '두 번째 화살'의 비유다. 누구나 살다 보면 첫 번째 화살을 맞는다. 몸의 통증, 예기치 못한 상실, 타인의 무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대체로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쏜다. '왜 하필 나에게',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곱씹고 자책하고 분개하는 것이다. 첫 번째 화살의 통증은 어쩔 수 없지만, 괴로움의 대부분은 이 두 번째 화살에서 온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은 쏘지 않을 수 있다.
신경과학은 이 구조에 생물학적 설명을 더한다. 위협이나 모욕을 감지하면 뇌의 편도체(amygdala)가 거의 즉각적으로 경보를 울려 분노·공포 반응을 일으킨다. 이성적 판단을 맡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이 경보를 다스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그 짧은 틈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두 번째 화살을 멈출지 말지를 가른다.
누군가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면, 그 석탄이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자신의 손바닥이 먼저 탄다. 분노를 품는 일이 꼭 이와 같다. 미움의 대상이 어떤 해를 입기 전에, 그 불을 쥐고 있는 마음이 먼저 그을린다.
또 하나의 미묘한 괴로움은 자만(慢, mana), 곧 비교하는 마음에서 온다. 흔히 자만이라 하면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만을 떠올리지만, 이 가르침은 더 넓게 본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하다', '나는 저 사람과 같다'는 세 가지 판단이 모두 자만에 속한다. 셋 모두 '나'를 기준점으로 세워 끊임없이 저울질하기 때문이다.
이 저울질이 괴로운 이유는, 위를 보면 부러움과 열등감이, 아래를 보면 우월감과 불안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마음은 타인의 잣대에 매여 흔들린다. 비교를 멈추는 것은 경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남과의 거리로 재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같은 경전에는,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지혜로운 이는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칭찬과 비난은 모두 바람이다. 바람이 불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바람에 휘둘려 뿌리째 뽑힐지 아니면 그 자리에 서 있을지는 마음의 무게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의 통찰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열쇠가 알아차림(sati)이다. 오늘날 '마음챙김'으로도 옮겨지는 이 능력은,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그것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는 마음의 자리를 가리킨다.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가 '되어' 버리는 대신, '지금 분노가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한 걸음 떨어져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한 걸음의 거리가 곧 자극과 반응 사이의 틈이며, 두 번째 화살을 멈출 공간이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일어나고 머물다 사라지는 전 과정을 손님처럼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에 가깝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스크린 속 인물의 슬픔과 공포에 함께 울고 떨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것은 영화다'라는 사실을 안다. 알아차림이란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스크린 위의 장면처럼 바라보는 자리다. 화면 속으로 끌려 들어가 한 인물이 되어 버리는 대신, 객석에 앉아 그 장면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마음의 과학은 괴로움을 덜어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자리를 따뜻함으로 채우는 훈련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결이 다른 두 마음이 있다. 하나는 자애(慈, metta), 곧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능동적인 따뜻함이다. 다른 하나는 연민(悲, karuna), 곧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덜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근육처럼 길러지는 기술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훈련은 흔히 자기 자신을 향한 따뜻함에서 시작된다.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는 사람이 남에게 너그럽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비 수행은 대개 '내가 평안하기를'에서 출발해, 가까운 사람, 무관한 사람, 나아가 불편한 사람에게로 그 따뜻함의 원을 차츰 넓혀 간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통찰들은 실험실에서 얼마나 확인되었을까.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은 알아차림 훈련을 의료용으로 표준화한 MBSR(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완화,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이다. 여러 뇌영상 연구를 종합하면, 8주가량의 훈련 뒤 위협에 대한 편도체의 반응이 줄어들고, 편도체와 전전두엽 사이의 연결이 강해지면서 감정 조절 능력이 향상되는 경향이 관찰된다. 두 번째 화살을 멈추는 능력에 대응하는 변화라 할 만하다.
자애 명상(loving-kindness meditation)을 다룬 연구들에서도, 공감 및 정서 처리와 관련된 뇌 부위의 활동이 높아지고 긍정적 정서와 사회적 유대감이 증가한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임상에서는 우울·불안·만성 통증 환자의 증상 완화에 보조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과장은 금물이다. 명상이 뇌의 구조 자체, 예컨대 회백질의 밀도를 바꾼다는 초기의 화제성 주장들은, 이후 더 큰 표본과 엄격한 설계로 검증했을 때 결과가 일관되지 않았다. 많은 연구가 참가자 수가 적고 대조군 설계가 느슨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정리하면, 마음을 다루는 기능적 능력이 훈련으로 향상된다는 데에는 비교적 탄탄한 근거가 쌓였지만, 뇌의 물리적 구조가 극적으로 바뀐다는 강한 주장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직하다.
이 마음의 과학이 가리키는 자유는, 감정을 메마르게 지우거나 세상사에 무심해지는 차가운 초연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첫 번째 화살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되, 거기에 두 번째 화살을 보태지 않는 명료함이다. 변화를 거부하다 매번 부서지는 대신, 모든 것이 흐른다는 사실을 마주보는 데서 오는 가벼움이다.
괴로움의 많은 부분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더하는 두 번째 화살에서 온다.
2,500년 전의 관찰과 오늘의 뇌과학이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증명해서가 아니라, 둘 다 같은 대상, 곧 인간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믿을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 마음에서 한번 확인해 볼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