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 · 신학 · 인물
청교도의 마지막 거인이자 미국 지성사의 첫 거장. 부흥의 한복판에서 불을 지핀 설교자였고, 동시에 그 불꽃을 냉정하게 해부한 철학적 신학자였다. 그의 삶과 사상,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유산을 따라간다.
한 사람을 가리켜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적 신학자"라 부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18세기 식민지 뉴잉글랜드라는, 대학이라곤 갓 문을 연 곳밖에 없던 변방에서 그런 평가를 받아낸 인물이 있다. 대다수 사람은 그를 단 하나의 설교, 곧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로만 기억한다. 거미를 불 위에 매달 듯 인간을 지옥 위에 매달아 두는 무서운 하나님의 이미지로 말이다. 하지만 그 한 편의 설교는 그가 남긴 거대한 지적 유산의 입구에 불과하다.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의 불을 지핀 전도자였고, 동시에 그 부흥을 가장 냉정하게 분석한 심리학자였으며,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의 신학문(新學問)을 흡수해 칼뱅주의를 다시 써낸 형이상학자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코네티컷 이스트윈저에서 회중교회 목사 티모시 에드워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아래로 누이가 열 명, 형제는 자신뿐이었다. 부친은 그를 두고 "주께서 주신 선물"이라 불렀다. 집안은 4대에 걸친 청교도 목회자 가문이었고, 어린 에드워즈는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일찍 익혔다. 열세 살이 되던 1716년, 설립된 지 15년밖에 안 된 예일 대학에 입학했고 1720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신학이 아니라 자연 관찰에서 나온다. 십 대 시절 그는 "나는 거미(Of Insects)"라는 글과, 흔히 '거미 편지(The Spider Letter)'로 불리는 보고서를 썼다. 가을이면 들판의 거미들이 날개도 없이 나무에서 나무로, 때로는 멀리 떨어진 곳까지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현상을 관찰한 기록이었다. 그는 거미가 두 가닥의 거미줄을 뽑아내 바람과 상승기류를 타고 활공한다는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오늘날 동물학에서 '거미의 벌루닝(ballooning, 풍선 비행)'이라 부르는 행동을, 그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추론해 냈다.
이 작은 일화는 에드워즈라는 인물의 본질을 압축한다. 그는 평생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은 사람이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이었다.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던 회심 이전과 달리, 회심한 뒤의 그는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름과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거기서 신의 아름다움을 읽어 내려 했다. 거미를 관찰하던 그 집요한 눈은, 훗날 대각성 운동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해부하는 신학자의 눈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예일 졸업 후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교적 회심을 깊이 자각했다. 그는 이 내면의 여정을 훗날 「개인적 회고(Personal Narrative)」에 기록한다. 또한 1722~1723년 무렵에는 일흔 개에 이르는 「결심문(Resolutions)」을 작성했다. 시간을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을 것,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부끄럽지 않을 방식으로만 행동할 것, 매주 스스로를 점검할 것 같은 항목들이었다. 하루 열세 시간을 공부에 바친다는 그의 규율은 이 결심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자기 점검과 자기 계발의 기록은 훗날 벤저민 프랭클린의 '열세 가지 덕목'과 자주 비교된다.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청교도의 자기 규율이, 한 세대 뒤에는 세속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자기 계발 윤리로 모습을 바꾸어 흘러갔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그 분기점에 서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1727년 2월,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노샘프턴 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곳은 외할아버지인 당대의 거물 목사 솔로몬 스토더드(Solomon Stoddard)가 오래 사역하던 교회였고, 에드워즈는 그의 후계자로 부임했다. 같은 해 그는 열일곱 살의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한다. 사라는 예일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피어폰트의 딸이었다. 에드워즈는 그녀가 열세 살이던 때 이미 그 깊은 신앙심에 감탄하여 글을 남겼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11남매를 두었고, 사라는 에드워즈의 평생에 걸쳐 가정과 사역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1729년 스토더드가 세상을 떠나면서, 에드워즈는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를 홀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의 본격적인 무대가 열린 것이다.
1730년대와 1740년대, 식민지 아메리카와 영국을 휩쓴 거대한 종교 부흥의 물결이 있었다. 후대 역사가들이 '제1차 대각성(First Great Awakening)'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성과 자연법칙을 앞세운 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종교적 응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풍요에 길들어 신앙이 형식만 남았다고 본 이들의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1734년부터 1735년 사이, 그의 노샘프턴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평범한 설교에도 수백 명이 회심했고, 마을 전체가 종교적 열기에 휩싸였다. 이 부흥은 대각성의 전조로 여겨진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단순히 사람을 끌어모으는 전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부흥을 누구보다 면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연대기 작가'이자 '해석자'였다. 그가 부흥의 양상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신실한 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는 대서양 양안에서 널리 읽혔다.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 엔필드의 한 예배당에서 에드워즈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로 남을 한 편을 전했다. 본문은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때가 가까우니"였다. 그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거미나 벌레를 손가락으로 집어 불 위에 매달아 둔 모습에 비유했다. 사람이 매 순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그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손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지옥의 구덩이 위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거미나 혐오스러운 벌레를 불 위에 들고 있듯 당신을 들고 계십니다. … 당신이 어젯밤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것도, 잠에서 다시 깨어난 것도, 오직 그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1741) 중에서 — 옮긴이 번역
이 설교는 흔히 '지옥 불과 유황' 식의 공포 설교의 전형으로 인용된다. 실제로 청중 가운데 일부는 울부짖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의도는 사람을 공포에 빠뜨려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두려움이라는 도구를 쓴 것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라고 절박하게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설교의 마지막은 진노가 아니라 회개의 기회, 곧 자비로 향한다. 또한 그는 극적인 몸짓이나 격정적 웅변을 쓰지 않았다. 단조롭다 싶을 만큼 차분한 어조로, 정교한 성경 해석과 생생한 이미지에 설교의 힘을 실었다. 불은 설교자의 기교가 아니라 말씀 그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부흥에는 그늘이 있었다. 격렬한 감정의 분출, 기절, 환상, 떠들썩한 소동이 따라붙었고, 이를 두고 "이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인가, 아니면 한때의 흥분인가" 하는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옹호하면서도 그 과잉을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 고민이 무르익어 나온 첫 대작이 1746년의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이다.
그의 핵심 통찰은 이렇다. 참된 신앙은 마음 깊은 곳의 정서, 곧 '감정(affections)'을 동반한다. 메마른 지식만으로는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눈물·전율·황홀 같은 격한 감정 자체가 곧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거짓된 감정과 참된 감정은 겉으로는 똑같이 격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려내는가. 에드워즈는 그 답을 감정의 '세기'가 아니라 감정이 맺는 '열매', 곧 삶의 변화와 거룩함의 실천에서 찾았다.
에드워즈가 즐겨 든 비유가 있다. 누군가는 "꿀은 달다"는 사실을 책으로 배워 머리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직접 꿀을 혀에 대어 그 단맛을 '맛본다'. 두 사람 다 꿀이 달다는 것을 알지만, 앎의 종류가 전혀 다르다.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을 후자에 견주었다. 그것은 신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마음으로 직접 맛보는(sense of the heart)' 경험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한 가지를 덧붙인다. 진짜로 꿀을 맛본 사람은 행동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진짜 신앙적 감정은 반드시 삶의 변화로 증명된다. 흥분의 크기가 아니라 열매의 유무가 진위를 가른다.
에드워즈를 단지 부흥 설교자로만 보면 그의 절반을 놓친다. 그는 당대 유럽 철학의 최전선, 곧 존 로크의 경험론과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을 깊이 흡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학문'의 언어로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을 다시 정식화하려 했다. 그의 신학은 한 점으로 수렴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우주 만물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며, 인간의 구원도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흔한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예정론(predestination)에서 칼뱅주의를 '벗어난' 인물로 종종 잘못 소개된다. 사실은 정반대다. 그는 예정과 원죄, 은혜의 주권을 가장 치밀하게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 맞선 상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세워 이 교리들을 흔들려 한 '근대 신학자들(modern divines)'이었다.
1754년에 나온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는 많은 이가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어떻게 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에드워즈의 대답은 '자유'를 다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의지가 늘 '가장 강한 동기(motive)'를 따른다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지가 아무런 원인 없이 제멋대로 결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상태'다. 외부의 사슬에 묶이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고 따라서 책임이 있다. 비록 그 의지 자체는 그의 본성과 동기에 의해 결정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오늘날 철학에서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이라 부르는 입장을, 에드워즈는 신학의 언어로 정교하게 펼쳐 보였다.
나침반의 바늘은 어느 방향이든 가리킬 수 있게 자유롭게 매달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제나 가장 강한 자기력이 끄는 방향, 곧 북쪽을 향한다. 바늘은 누가 손으로 붙잡지 않는 한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의 결과는 이미 자기장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에드워즈가 본 인간의 의지가 꼭 이렇다. 외부의 강제가 없으니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그 선택은 마음속 가장 강한 끌림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원하는 것을 행할' 자연적 자유는 있으나,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스스로 마음을 돌릴 도덕적 능력은 없다고 보았다. 그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바로 은혜의 몫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가장 대담한 사색은 형이상학에서 펼쳐진다. 그는 '관념론(idealism)'과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에 도달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가 단단한 실체라 믿는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의 마음 안에 있는 관념이며, 매 순간 신의 의지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에서 우리가 보는 '인과(因果)'—당구공이 다른 공을 친다든가 하는—는 사물들 사이의 진짜 힘이 아니라, 신이 일관되게 그렇게 작동시키는 방식일 뿐이다. 참된 원인이자 참된 실체는 오직 신 하나뿐이라는 결론이다.
스크린 위의 영화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화면 속 인물이 움직이고 사건이 인과적으로 이어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한 장 한 장의 정지된 프레임이 매 순간 영사기에 의해 새로 비춰지는 것이다. 빛이 한순간만 꺼져도 화면의 세계는 통째로 사라진다. 에드워즈가 본 우주가 이와 비슷하다. 세계는 스스로 굴러가는 기계가 아니라, 신이 매 순간 새롭게 떠받치는 '연속 창조(continuous creation)'의 결과다. 우리가 인과라 부르는 매끄러운 흐름은, 신이 한결같이 세계를 비추어 주는 그 일관성 위에 성립한다. 신이 손을 떼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멈춘다.
이 사변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일랜드 철학자 조지 버클리의 관념론과 자주 비교된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를 읽고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에드워즈는 독자적으로 이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본다. 그에게 이 모든 형이상학은 사변을 위한 사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만이 유일한 실체요 유일한 원인"이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떠받치는 철학적 토대였다.
에드워즈 사상에는 종종 간과되는 한 줄기가 있다. '아름다움'과 '탁월함(excellency)'에 대한 사유다. 그에게 신은 단지 전능하고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리고 참된 덕(德)이란, 그 아름다운 신을 향한 사랑이며, 존재 전체에 대한 조화로운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의 마지막 저작 가운데 「참된 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은 이 주제를 다룬다. 두 글은 모두 그의 사후 1765년에 출간되었다. 공포의 설교자라는 통념과 달리, 그의 신학의 가장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미(美)에 대한 갈망이 자리한다.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에드워즈는 자기 교회에서 쫓겨났다. 발단은 성찬과 교회 회원 자격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 스토더드는 비교적 느슨한 기준을 두어, 회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찬을 허용했다. 에드워즈는 이를 뒤집어, 구원의 신앙을 자신의 종교 체험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만이 성찬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중은 반발했고, 1750년 그는 단 한 표 차이로 노샘프턴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북아메리카와 스코틀랜드 여러 교회에서 청빙이 왔으나, 그는 1751년 매사추세츠 변경의 스톡브리지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원주민(모히칸·모호크) 선교를 맡았고, 원주민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운영하며 두 곳의 까다로운 교회를 함께 돌보았다. 봉급은 보잘것없었고, 딸들이 부채에 그림을 그려 팔아 가계를 보탤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변방의 '망명' 시기는 역설적으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비옥한 지적 결실을 맺은 때였다. 사역의 부담에서 한발 물러난 그는 평생 벼려 온 사상을 대작으로 쏟아 냈다. 앞서 본 「의지의 자유」(1754)와 「원죄론(Original Sin)」(1758)이 이 시기의 산물이며, 사후 출간된 「참된 덕의 본질」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여기서 완성되었다. 변방으로 밀려난 신학자가 미국 사상사의 정점을 찍은 셈이다.
1757년 말, 그는 뉴저지 대학(College of New Jersey, 훗날의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청빙받는다. 공교롭게도 그 직전 총장이었던 에런 버 1세는 에드워즈의 사위였고, 그해 세상을 떠난 터였다. 에드워즈는 망설인 끝에 자리를 받아들였고, 1758년 2월 16일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몇 주를 넘기지 못했다. 당시 식민지에 천연두가 돌고 있었고, 에드워즈는 모범을 보이고자 당대로서는 실험적이던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았다. 접종 부위의 감염으로 고열이 이어졌고, 1758년 3월 22일 향년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과학적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이, 그 시대 최신 의학을 신뢰한 대가로 생을 마감한 것은 쓰라린 아이러니였다. 그는 프린스턴 묘지에 묻혔다. 아내 사라도 그해 10월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즈와 사라의 후손 중에는 미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적지 않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외손자 에런 버 2세(Aaron Burr Jr.)다. 그는 미국 제3대 부통령을 지냈고,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결투로 그를 죽인 사건으로 악명이 높다. 뮤지컬 「해밀턴」으로 다시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또 다른 외손자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예일 대학 총장을 지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1900년 교육자 A. E. 윈십(A. E. Winship)은 에드워즈의 후손 약 1,400명을 조사해, 그중에 대학 총장·교수·법조인·정치인이 대거 배출되었다고 정리했다. 이 연구는 오늘날까지 "한 신앙인의 삶이 후대에 미친 영향"의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 조사는 당시 유행하던, 한 가문을 '우수 혈통'과 '열등 혈통'으로 대비시키던 우생학적 연구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함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표본 선정의 편향, 그리고 성취를 유전 탓으로 돌리는 논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수치는 에드워즈의 '영향력에 대한 후대의 평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며, 인과를 단정하는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
에드워즈의 저작은 19세기 후반, 미국 종교가 칼뱅주의와 청교도 전통에서 멀어지면서 한동안 외면당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특히 1930년대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 속에서 신학자와 사상사가들이 그를 다시 발견했다. 프린스턴의 신학자 B. B. 워필드는 그를 두고 "식민지 아메리카의 지성사에서 진정한 위대함을 지닌 단 하나의 인물"이라 평했다.
오늘날 그의 위상은 두 갈래로 확고하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 철학사가 시작되는 지점에 놓이는 사상가로, 예일 대학은 그의 전집(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을 비판본으로 편찬하고 방대한 미발표 원고까지 디지털로 공개하는 대규모 학술 사업을 이어 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현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진영에서 가장 깊이 읽히는 신학자 가운데 하나다. R. C. 스프로울, 존 파이퍼를 비롯한 여러 현대 신학자가 그를 자신들의 지적·영적 뿌리로 꼽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 단어로 가두기는 어렵다. 그는 거미의 비행을 관찰하던 과학소년이자, 사람들을 회개로 몰아간 부흥 설교자였고, 종교적 감정의 진위를 해부한 심리학자였으며, 세계가 신의 마음속 관념이라 사유한 형이상학자였다. 청교도라는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었으되, 그가 던진 질문—자유와 결정, 감정과 진실, 인과와 실체,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 시대에 갇히지 않았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강렬한 이미지에 가려, 정작 그의 신학이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한 것이 신의 '아름다움'이었다는 사실은 오래 잊혔다. 그를 단 한 편의 설교로만 기억하는 것은, 거대한 지적 풍경의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는 일과 같다. 변방으로 밀려나서도 사상의 정점을 찍었고, 한때 잊혔다가 두 세기 뒤 다시 읽히는 이 인물의 생애 자체가, 어쩌면 그가 평생 탐구한 역설—연약함과 위대함, 결정과 자유의 공존—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한 편의 사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