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 학습 · 시대
학습하는 기계 옆에서
변화의 체감 속도는 왜 점점 빨라지는가. 인공지능은 왜 도구가 아니라 학습하는 존재인가. 그 옆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의 전환을 가능한 한 차분하게 짚어 본다.
달리는 배경
핵심
변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인공지능 개발의 상당 부분을 이제 인공지능이 맡으면서, 발전이 스스로를 가속하는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붉은 여왕과 앨리스가 손을 잡고 전력으로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두 사람은 같은 나무 아래에 그대로 있다. 어리둥절한 앨리스에게 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면 네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고.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1871)
이 장면은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1973년 종 사이의 경쟁을 설명하며 끌어다 쓴 뒤로 붉은 여왕 가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포식자와 먹이, 기생체와 숙주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맞춰 진화한다. 한쪽이 빨라지면 다른 쪽도 빨라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둘의 상대적 거리는 그대로지만, 멈춘 쪽은 곧 잡아먹힌다. 경영학자들은 이 개념을 기업 경쟁에 옮겨 왔다. 한 회사가 새 기능을 내놓으면 경쟁사가 곧 따라잡고, 어제의 혁신은 오늘의 업계 표준이 된다. 가만히 있는 것은 후퇴와 같다.
지금 인공지능을 둘러싼 풍경이 바로 이 붉은 여왕의 나라를 닮았다. 다만 한 가지가 다르다. 배경이 움직이는 속도 자체가 계속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 분야를 좇는 사람들은 "1년이 1년 같다"고 말했다. 그러다 "6개월이 1년 같다"가 되고, 다시 "한 달이 1년 같다"가 되었다. 체감 단위가 점점 짧아진다.
왜 가속하는가
변화가 단순히 빠른 것과,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후자의 핵심에는 한 가지 구조적 사실이 있다. 이제 인공지능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일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이 거든다는 점이다. 앞 세대의 모델이 다음 세대 모델의 학습 데이터를 만들고, 코드를 짜고, 실험을 설계하고, 평가를 돕는다. 사람의 손을 거치는 단계가 줄어들수록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주기가 짧아진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이것을 가속적 수익의 법칙이라 불렀다. 기술의 진보는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라, 이전 성과가 다음 성과의 발판이 되어 점점 가팔라지는 곡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2005년 저서에서 기계가 인간 수준의 지능에 이르는 시점을 2029년쯤으로, 인간과 기계의 지능이 본격적으로 융합하는 특이점을 2045년으로 예측했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그 시점이 오히려 앞당겨질 수 있다고 본다.
공항 무빙워크 위에 가만히 서 있으면 발은 움직이지 않아도 몸은 앞으로 간다. 문제는, 이 무빙워크의 속도가 매분 빨라진다는 점이다.
그 위에서 제자리에 머무르려면 뒤로 걸어야 한다. 앞서 나가려면 달려야 한다. 멈춰 선 채 "나는 가만히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출발점에서 점점 멀어진다. 가속하는 환경에서는 정지가 곧 후퇴다.
기계는 어떻게 배우는가
핵심
오늘날 인공지능의 뿌리에는 인간의 학습 원리를 본뜬 방식이 있다. 자극에 반응하고, 보상으로 교정하며, 무엇보다 실패를 축적한다. 실패 데이터가 쌓인 만큼 능력은 커진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다루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을 더 똑똑한 검색창이나 자동화 도구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기술의 본질은 학습에 있다. 그리고 그 학습의 방식은 우리 자신이 배우는 방식을 닮았다.
심리학에는 오래된 모형이 있다. 어떤 자극이 들어오고, 거기에 행동으로 반응하고, 그 결과에 따라 보상이나 벌이 주어진다. 보상받은 행동은 강해지고 벌받은 행동은 약해진다. 이 단순한 회로를 컴퓨터에 옮긴 것이 강화학습이다.
벽돌 깨기에서 배운 것
강화학습의 위력을 세상에 각인시킨 유명한 실험이 있다. 2013년과 2015년, 한 인공지능 연구팀은 1970~80년대 고전 비디오게임 수십 종을 기계에게 시켰다. 규칙은 알려 주지 않았다. 기계가 받은 것은 오직 화면의 픽셀과 조작 버튼, 그리고 점수뿐이었다. 벽돌 깨기 게임에서 기계는 처음엔 공을 마구 놓쳤다. 수없이 실패했다. 그러나 매 시도의 결과가 신경망에 되먹임되었고, 어느 순간 패턴이 잡혔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충분히 학습한 기계는 사람도 잘 떠올리지 못하는 전략을 스스로 발견했다. 한쪽 벽돌을 집중적으로 뚫어 터널을 낸 다음, 공을 벽 뒤쪽으로 보내 위에서부터 무더기로 깨뜨리는 방식이었다. 같은 신경망 구조와 같은 설정으로, 이 기계는 시험한 49개 게임 가운데 43개에서 기존 방법을 앞질렀고, 절반 이상에서 숙련된 사람 수준을 넘어섰다. 게임마다 따로 손보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강화학습의 기본 고리.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아도, 행동의 결과를 되먹여 스스로 전략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실패다. 기계가 똑똑해진 비결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실패의 축적에 있었다. 잘못된 시도 하나하나가 버려지지 않고 신경망에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이 쌓여 어느 순간 패턴이 되었다. 실패한 데이터가 쌓인 만큼 능력이 자란 것이다. 같은 원리가 게임을 넘어 단백질 구조 예측, 신약 후보 탐색, 언어 이해로 확장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단순한 도구로만 대하는 태도는 그 정체를 놓친다. 옆에 앉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는 존재에 가깝다. 무언가를 시키는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상대다. 관점을 이렇게 바꾸는 순간, 사용법도 달라진다.
꺼내 쓰지 못한 능력
핵심
"인공지능은 이런 건 못 한다"는 말의 상당수는 사실과 다르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그 능력을 꺼내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용자의 수준이 결과물의 천장을 정한다.
최신 모델이 어떤 능력을 품고 있는지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조차 아직 다 모른다. 기대를 넘어선 능력이 모델 안에 잠겨 있고, 그 잠재력과 실제 활용 사이에는 큰 틈이 있다. 이 틈을 두고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능력 과잉이라는 표현을 쓴다. 가진 능력이 우리가 꺼내 쓰는 양을 한참 웃돈다는 뜻이다.
최고급 경주용 자동차를 한 대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운전할 줄 아는 곳이라곤 학교 주차장뿐이다. 차의 잠재력은 시속 300킬로미터를 넘지만, 주차장에서는 그 능력이 드러날 길이 없다.
차가 느린 것이 아니다. 트랙이 없을 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을 학교 주차장에서 몰고 있다. 차를 탓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트랙을 깔아 줄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천장은 질문하는 사람이 정한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성질이 있다. 묻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답하도록 길들여졌다는 점이다.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에, 초보가 물으면 초보의 언어로 답하고, 전문가가 물으면 전문가의 언어로 답한다. 다정한 성질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무서운 함의가 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수준이 곧 돌아오는 답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병에 관해 "이 증상에 뭘 먹으면 되느냐"고 막연히 물으면,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을 법한 일반적인 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그 분야의 최신 연구 논문 한 편을 찾아 첨부한 뒤 같은 질문을 던지면, 답의 결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용자가 높은 수준의 맥락을 깔아 주는 순간, 모델은 그 수준에 맞는 지식을 끌어내 응답한다. 똑같은 모델, 똑같은 구독료인데도 어떤 사람은 검색창 수준으로 쓰고, 어떤 사람은 전문가 자문 수준으로 쓴다. 그 차이는 모델이 아니라 사용자에게서 온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인공지능은 아직 거기까진 못 하더라"는 말을 다시 보게 된다. 그 말의 적지 않은 부분은 모델의 한계가 아니라 사용자의 한계를 가리킨다. 능력은 거기 있는데, 꺼내는 열쇠를 아직 못 찾은 것이다.
목표를 찍고, 되돌려보낸다
핵심
잠긴 능력을 꺼내는 열쇠는 두 가지다. 명확한 목표를 정의하는 능력과, 결과를 평가해 다시 돌려보내는 반복의 기술이다.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역량이다.
앞 장에서 강화학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았다. 흥미롭게도, 인공지능을 잘 다루는 방식은 그 학습 원리를 그대로 닮았다. 명확한 목표를 정하고, 결과를 평가하고, 부족하면 되먹여 다시 시도한다. 사람과 기계가 함께 이 고리를 돈다.
핵심 재료는 세 가지다. 첫째, 도달하려는 목표를 분명히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 목표를 담을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문서일 수도, 코드 한 묶음일 수도, 어떤 결과물의 초안일 수도 있다. 셋째, 그 위에 반복을 투입한다. 첫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부분이 약하다, 더 발전시켜라" 하고 돌려보낸다. 그러면 기계는 부족한 곳을 스스로 찾고, 자료를 뒤지고, 고쳐서 다시 내놓는다.
목표 → 생성 → 평가 → 되먹임의 반복. 보고서를 다섯 번 반려하는 깐깐한 결재자처럼, 기준을 들고 계속 돌려보내는 일이 곧 작업의 본질이 된다.
모르는 목표마저 맡기는 단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조차 인공지능에게 묻는다. "이 문제에서 좋은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먼저 탐색하게 하고, 거기서 더 나은 방향을 잡은 다음 작업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점검하는 능력, 곧 메타인지의 일부까지 기계에 맡기는 셈이다. 사람이 할 일은 그렇게 좁혀진 방향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를 가려내고, 필요한 조각만 자기 지식 체계에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일하는 방식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모든 것을 사람이 직접 처리하던 시대에서, 세상의 문제에 더 많은 연산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영역까지 탐색의 형태로 더듬어 가는 일이, 점점 일의 기본 문법이 되어 간다.
불평등을 지나 풍요로
핵심
기술의 큰 전환은 단기에는 불평등을 키우고 장기에는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인공지능도 그 궤적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사이의 진통은 실재한다.
이 전환이 개인의 학습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일과 경제의 구조를 함께 흔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본이 가장 먼저 눈을 뜬다는 것이다. 기술 자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같은 일을 더 적은 비용으로 해내는 길이 열렸다는 신호에는 빠르게 반응한다. 그 결과 우리가 알던 고용 구조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흔들린다. 취업은 더 어려워지고, 조직은 예전만큼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에는 비슷한 장면이 있다. 산업혁명기에 베틀을 돌리던 손은 증기기관에 자리를 내주었다. 익숙한 직업들이 사라졌고, 새 직업이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의 진통은 사람들에게 실재했다.
효율이 수요를 부른다 — 제번스의 역설
그러나 기술사에는 이 우울한 그림을 뒤집는 또 하나의 법칙이 있다. 1865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기묘한 현상을 관찰했다. 증기기관이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태우게 되자, 석탄 소비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폭증한 것이다. 효율이 오르면 가격이 내리고, 가격이 내리면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용도가 줄줄이 생겨나 결국 총수요가 늘어난다. 이것이 제번스의 역설이다.
같은 일이 인공지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진단이 최근 자주 들린다. 모델이 싸지고 쉬워질수록 쓰임새는 사그라들기는커녕 폭발한다는 것이다. 노동 통계에서도 단기적으로는 감원 신호가 두드러지지만, 장기적으로는 인공지능을 다루는 새로운 직무가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란히 제시된다. 문제는 언제나 시차다. 사라지는 일과 생겨나는 일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건너느냐가 관건이다.
기술 전환의 전형적 궤적. 초반의 격차는 가파르게 솟았다가 완만해지고, 사회 전체가 누리는 풍요는 길게 우상향한다. 개념을 단순화한 그림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기술의 발전은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해 왔다. 우리가 오늘 불평등을 아프게 느끼는 까닭은, 굶주림이나 의료 부재 같은 절대적 결핍이 아니라 나보다 잘 사는 사람과의 상대적 거리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두 세대 전이라면 생존을 위협했을 결핍의 상당 부분은 이미 크게 줄었다. 이른바 풍요의 시대를 낙관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설령 초월적 지능이 등장하더라도 그 접근 권한이 인류 전체로 퍼져 나갈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결과는 디스토피아보다 풍요 쪽에 가까우리라는 전망이다.
신인류라는 가설
전환의 또 다른 줄기는 인간 자신의 변화다. 지금 우리가 바깥 세계와 주고받는 통신은 느리다. 아무리 빠르게 말해도 초당 몇 단어, 타자도 그 언저리다. 이 좁은 통로를 넓히려는 시도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다. 한 신경기술 기업은 2024년 초 처음으로 사람의 뇌에 칩을 이식했고, 2025년 중반까지 마비 환자 등 여러 명에게 이식 범위를 넓히며 미국·캐나다·영국 등에서 임상을 이어 가고 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에 수많은 전극을 달아, 생각만으로 커서를 옮기고 게임을 하는 단계다.
커즈와일이 말한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 의료의 얼굴을 하고 조금씩 현실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안전성·윤리·접근성을 둘러싼 물음은 묵직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강화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구분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가설은 더 이상 공상만은 아니다.
러너가 되어라
핵심
전환기를 건너는 개인의 전략은 명확하다. 평생 학습자가 되고, 자기 분야에서 깊은 전문성 하나를 갖추며, 스스로 목표를 정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는 태도의 전환이다. 직함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지금은 모두가 다시 학생이 되어야 하는 때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미래이기에 떠도는 소문은 많고 확실한 길잡이는 적다. 그럴수록 직접 배우는 수밖에 없다.
박사 한 명만큼의 깊이
막연히 넓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영역에서 적어도 박사 수준의 전문성 하나는 갖추는 편이 좋다. 다행히, 그 깊이에 이르는 시간이 인공지능 덕분에 크게 압축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한 분야의 최신 연구를 따라잡는 데 몇 해가 걸렸을 일이, 좋은 길잡이와 함께라면 훨씬 짧아진다. 새 논문을 먼저 모델에 넣어 "어디부터 읽어야 하는지, 무엇을 건너뛰어도 되는지"를 안내받고, 자신이 모르는 부분만 집어 빠르게 메워 가는 식이다. 정보가 쏟아질수록, 사람을 대신해 그 흐름을 훑고 걸러 주는 보조자의 가치는 커진다.
왜 깊이가 필요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목표를 찍으려면, 그 분야에 관한 충분한 지식이 머릿속에 임계 질량 이상으로 쌓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이 없으면, 기계가 아무리 강력해도 무엇을 시켜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한다. 4장에서 본 "목표를 찍는 능력"은 결국 두꺼운 학습 위에서만 작동한다.
회사가 곧 개인이 되는 세상
두 번째는 일하는 단위에 관한 것이다. 수백, 수천 명이 모여야 회사라는 통념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두세 명, 때로는 한 명이 꾸리는 회사가 늘어난다. 한 사람이 인공지능과 결합해 상당한 매출을 올리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회사의 단위가 개인과 거의 같아지는 세상이,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성향은, 좁은 의미의 창업가 정신이라기보다 스스로 목표를 정의하고 일을 조직하는 사람의 태도다. 투자를 받고 회사를 키워 매각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조직이라는 시스템 바깥에서, 자기 의지로 무언가를 정의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 그런 의미에서라면 창작자와 사업가는 한 갈래다. 둘 다 주어진 답을 따르는 대신, 스스로 문제와 목표를 세운다.
옛날 어느 부유한 집 자제가 먼 여행을 떠날 때면, 곁에 당대 최고의 학자를 과외 선생으로 붙였다고 한다. 같은 길을 걸어도 그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배움의 깊이는 천양지차였다.
오늘날 그 과외 선생은 누구에게나 한 명씩 주어져 있다. 차이는 단 하나, 그를 검색 도구로만 쓰느냐, 진짜 선생으로 모시느냐다. 견습생의 자세로 묻는 사람과, 답만 베끼는 사람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혼돈에서 질서로
핵심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꺼내는 일이다. 인공지능은 본질적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기계이며, 그래서 이 기술의 쓸모는 곧 가치 창조와 맞닿아 있다.
여기까지 오면 더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도대체 가치란 무엇인가. 풍요의 시대가 온다 해도,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행위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본질을 분명히 아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복잡계 경제학의 한 고전은 이 질문에 인상적인 답을 내놓는다. 부의 창조란 결국 엔트로피를 줄여, 인간의 필요에 맞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자연스러운 방향은 무질서가 늘어나는 쪽이다. 닫힌 채로 두면 모든 것은 흩어지고 평평해진다. 그 흐름을 거슬러, 에너지를 들여 흩어진 것에서 쓸모 있는 형태를 빚어내는 일 — 그것이 가치의 창조다.
식물은 햇빛이라는 에너지를 들여,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흩어진 원소들을 영양분이라는 질서로 묶어 낸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꺼내는 가장 오래된 가치 창조다.
어질러진 책상을 정돈해 필요한 것을 빨리 찾을 수 있게 하는 일도, 규모는 작지만 같은 종류의 행위다. 흩어진 자료를 구조로, 막연한 물음을 또렷한 답으로 바꾸는 모든 작업이 이 범주에 든다.
이 정의가 인공지능과 만나면 한 가지가 또렷해진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무언가를 물을 때마다 혼돈을 질서로 바꿔 주는 기계라는 점이다. 흩어진 정보를 잘 정리해 더 쓸모 있고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는 일 — 거대한 정보 기업들이 내건 사명이자, 언어 모델이 매 순간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고전은 가치가 만들어지는 진화적 공식을 차별화하고, 선택하고, 증폭하라는 세 단어로 요약한다. 공교롭게도 이는 4장에서 본 작업의 고리와 닮았다. 여러 안을 펼치고, 그중 나은 것을 고르고, 그것을 키운다. 인공지능은 이 순환을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을 잘 쓴다는 것은, 단지 일을 빨리 처리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능력을 증폭한다는 뜻이다. 어디서 질서를 만들어 낼지를 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고, 그 선택이 곧 그 사람이 세상에 더하는 가치가 된다.
늦지 않았다
핵심
변화가 빨라 보일수록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 누구도 멀리 앞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잘 쓰는 사람들조차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출발해도 늦지 않다.
가속하는 시대의 풍경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면, 멀찍이 앞서 달리는 이들조차 출발선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공지능을 잘 쓴다"는 사람에게 언제부터 했냐고 물으면, 대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이 돌아온다. 이 분야에서는 모두가 어느 정도 초보다. 그래서 격차는 아직 좁힐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중요한 것은 출발의 빠르기보다 관점의 방향이다. 인공지능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나보다 여러 면에서 앞선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잘 다루는 일에 자신의 앞날이 걸려 있다고 보는 것. 이 관점의 차이가, 시작 시점의 며칠 차이보다 훨씬 크게 두 사람의 미래를 갈라 놓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은 인공지능이라는 특정 기술을 배우는 시대라기보다, 학습하는 능력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는 시대다. 옆에는 끊임없이 배우는 기계가 앉아 있다. 그것을 괴물로 볼 것인지 선생으로 볼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견습생의 자세로 묻기 시작한 사람에게, 이 시대는 생각보다 너그럽다.
멈추면 뒤로 가는 시대에, 가장 확실한 전진은 다시 배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