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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 · 형이상학

조나단 에드워즈의 우주론

매 순간 무(無)로부터 다시 그려지는 세계 — 관념론, 기회원인론, 그리고 신의 영광이라는 한 폭의 그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흔히 “아메리카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불린다. 대중에게 그는 18세기 북아메리카를 뒤흔든 신앙 부흥 운동인 대각성(Great Awakening)의 설교자, 혹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의 저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가 십 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사사로이 채워 나간 노트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원자란 무엇인가, 공간은 실재하는가,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는 정말 우리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를 집요하게 따져 묻는 한 사변적 형이상학자가 있다.

이 글은 그 노트들과 후기 논문에 흩어져 있는 에드워즈의 우주론—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존립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그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 따라가 본다. 그것은 오늘의 물리학과는 매우 다른 그림이지만, 뉴턴의 새 과학을 정면으로 흡수한 위에서 빚어진, 놀랄 만큼 일관된 하나의 우주상(像)이다.

01 두 개의 주제: 절대 주권과 거룩함의 아름다움

에드워즈의 사유 전체는 두 개의 주제 위에 서 있다고 흔히 정리된다. 하나는 신의 절대 주권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거룩함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그의 우주론은 바로 이 두 주제를 형이상학의 언어로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물이다.

주권이라는 주제는 그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만일 신이 참으로 절대적인 주권자라면, 세계 안에서 무엇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요구가 그의 관념론과 기회원인론으로 이어진다. 신은 유일하게 참된 원인이며, 유일하게 참된 실체다. 한편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는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신은 무한히 아름다운 존재이고, 창조는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므로, 우주는 위에서 아래까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에드워즈에게 물리학과 신학은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천이었다. 원자의 단단함을 설명하는 일과 신의 거룩함을 묵상하는 일이 그에게는 같은 탐구의 두 끝이었다. 이 글에서 따라갈 그의 우주론은 그래서 단순한 ‘자연관’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해석이다.

02 뉴턴의 세기, 예일의 소년

에드워즈는 1703년 코네티컷의 이스트윈저에서,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목사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자라던 시기는 과학사에서 가장 격렬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와 『광학』(Opticks)이 세계를 새로 그리고 있었다. 천체와 지상의 물체가 같은 수학 법칙을 따르고, 우주는 정밀하게 맞물린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열세 살이던 1716년 예일(Yale)에 입학한 에드워즈는 뉴턴과 존 로크(John Locke)를 읽었다. 로크는 그의 인식론과 언어 이해, 마음의 분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의 형이상학은 로크보다 니콜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와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Cambridge Platonists)에게 더 많은 빚을 졌다. 즉 그는 영국 경험론의 도구를 손에 쥐었으되, 그 도구로 대륙의 합리주의적·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 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원자에 관하여」(Of Atoms), 「곤충에 관하여」(Of Insects), 「무지개에 관하여」(Of the Rainbow), 「세계의 아름다움」(Beauty of the World), 그리고 형이상학 노트인 「마음」(The Mind)과 「존재에 관하여」(Of Being)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적인 탐구였고, 상당수는 그가 죽고 한 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야 활자화되었다.

그의 자연 탐구가 어떤 정서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글이 1723년경에 쓴 이른바 ‘거미 편지’(Spider Letter)다. 스무 살 무렵의 그는 가을 들판에서 거미가 실을 뽑아 바람을 타고 공중을 떠가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작은 곤충의 비행에서 창조주의 지혜와 “흘러넘치는 선함”을 읽어 냈다. 새로운 과학이 자연을 차가운 기계로 환원하던 바로 그 시대에, 청년 에드워즈는 같은 자연을 보며 곧장 신을 향했다. 역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그를 “고분고분한 뉴턴주의자(docile Newtonian)”라 불렀지만, 곧 보게 되듯 그는 뉴턴보다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갔다.

비유

뉴턴은 그 시대에 정교한 ‘시계’를 하나 건넸다.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 시계의 태엽을 누가 계속 감는가? 이신론자(理神論者, Deist)들은 답했다. 아무도 감지 않는다, 한 번 만들어진 뒤로는 저 혼자 돌아간다. 에드워즈의 대답은 정반대 극단을 향한다. 태엽을 감는 손이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시계는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진다는 것이다.

03 물질이란 무엇인가 — 원자와 견고성

에드워즈의 우주론은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원자에 관하여」에서 그는 묻는다. 원자란 무엇인가? 원자의 본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음’, 곧 불가분성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자를 쪼개지지 않게 하는가? 쪼개려는 힘에 끝까지 저항하는 성질, 즉 견고성(solidity)이다.

여기서 그는 데카르트주의와 결별한다. 데카르트에게 물질의 본질은 ‘공간을 차지함’, 곧 연장(延長, extension)이었다. 에드워즈는 견고성을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능력(power of resistance)’으로 다시 정의한다. 그리고 묻는다. 실체란 본래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존립하면서 모든 성질을 ‘떠받치는(stand under)’ 무엇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물질의 견고성을 실제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무한한 능력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능력은 오직 신에게 있다. 따라서 물질을 끝까지 파고들면, 그 바닥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어떤 ‘재료(stuff)’가 아니라 신이 그 순간 행사하는 능력이다. 물질의 단단함이란 결국 신의 의지가 그 자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에 다름 아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뉴턴을 넘어선다. 뉴턴은 중력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자, 그것을 신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광학』의 물음들, 그리고 『원리』의 일반 주해). 그러나 물질 자체의 견고성은 여전히 물질 고유의 것으로 두었다. 에드워즈는 이 둘을 하나로 합친다. 원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뭉쳐 있는 까닭과 만물이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원인은, 그에게는 단 하나—신의 의지다. 사상사가 아비후 자카이(Avihu Zakai)의 표현을 빌리면, 에드워즈는 원자론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신의 주권적 활동 위에 세움으로써 “기독교화”했다.

단단한 물체 겉보기 사물 분해 색(色) 저항 = 견고성 둘 다 마음 의존 관념(idea) 마음 속 지각 떠받침 신의 의지·능력
에드워즈에게 물질은 끝까지 분석하면 색과 저항으로, 다시 마음 속 관념으로, 마지막에는 그것을 매 순간 떠받치는 신의 능력으로 ‘녹아내린다’.
비유

비디오 게임 속 물체를 떠올려 보자. 그 물체가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프로그램이 “두 물체는 같은 자리를 동시에 차지할 수 없다”는 규칙을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 어디에도 ‘딱딱한 재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던 프로그램을 끄면, 남는 단단함은 없다. 오직 그 단단함을 만들어 내던 규칙의 작동이 멈출 뿐이다.

에드워즈에게 그 ‘프로그램’은 신의 한결같은 의지이며, 물질의 단단함은 그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 모습 자체다.

04 공간과 신 — 무(無)를 생각할 수 없다는 논증

물질을 신의 능력으로 환원한 에드워즈는, 「존재에 관하여」에서 한층 대담한 논증을 펼친다. 그는 독자에게 ‘완전한 무(無)’를 한번 떠올려 보라고 권한다. 어디에도, 언제에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 말이다. 그러고는 단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마음을 아무리 늘여도 ‘완전한 없음’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없음을 떠올리려는 바로 그 시도가 이미 ‘어딘가’라는 무대를 몰래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코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무엇인가? 에드워즈의 대답은 공간이다. 모든 사물을 치워 버려도 공간은 남는다. 공간을 둘로 갈라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게’ 만들려 해도, 갈라진 두 부분 사이에는 여전히 공간이 있다. 공간은 우리가 결코 제거할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필연적이고 영원하며 무한하고 어디에나 있는 존재다. 그런데 필연적이고 무한한 존재란 곧 신이다. 여기서 그는 결정적인 동일시에 이른다. 공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텅 빈 그릇이 아니라, 신 자신의 무한함(immensity)에 속한 것—신의 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 발상은 당대 과학의 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뉴턴은 『광학』의 물음들에서 무한한 공간이 말하자면 신의 ‘감각기관(sensorium)’과 같아서, 그 안에서 신이 모든 사물을 직접 지각한다고 사변했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 헨리 모어(Henry More)는 공간을 신의 연장(延長)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에드워즈는 이 흐름을 받아들여 ‘공간은 곧 신적인 것’이라는 동일시로 밀고 나간다.

물론 이 논증은 그의 관념론과 미묘한 긴장을 빚는다. 만물이 마음 속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 ‘무한한 공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물음은 에드워즈 연구자들이 지금도 토론하는 지점이다. 그의 답의 방향은, 공간을 신적 마음의 무한한 ‘현존’과 결부시키는 쪽이다. 공간이 곧 신의 임재(臨在)가 미치는 범위인 셈이다.

비유

우리는 흔히 공간을 ‘세계라는 연극이 상연되는 텅 빈 무대’로 여긴다. 에드워즈는 이 구도를 뒤집는다. 무대는 비어 있지 않으며, 극작가와 별개로 존재하는 사물도 아니다. 그 무대 자체가 극작가의 끝없는 현존이다. 배우와 소품을 모두 치워도 무대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대가 곧 작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05 관념론 — 물질 우주는 마음 안에만 있다

이제 에드워즈 우주론에서 가장 과감한 한 수가 등장한다. 그는 잘라 말한다. “창조된 의식이든 창조되지 않은 의식이든, 의식 바깥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론은 이렇다. 물질로 된 우주는 오직 마음 안에만 존재하며, 모든 물체는 관념일 뿐이다. 철학사에서 이런 입장을 관념론(idealism)이라 부른다.

그의 논증(노트 「마음」 27번)은 앞 장의 논의를 잇는다. 물체에 대한 관념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결국 ‘색’과 ‘저항’으로 분해된다. 모양조차 색이나 저항의 경계선일 뿐이다. 그런데 색이 마음 안에만 있다는 것—색은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이라는 것—은 당시 “웬만한 철학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던 바였다. 저항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무엇에 저항하는 한 사례’로 보면 그것은 관념의 한 성질이고, ‘저항하는 능력’으로 보면 그것은 신이 정해 둔 한결같은 규칙이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의존한다. 색과 저항을 빼고 나면 ‘물체’라고 부를 무엇이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체는 감각 가능한 관념들의 묶음이며, 세계는 그의 말 그대로 “관념적인(ideal)”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에드워즈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관념론과 매우 닮은 결론에 이르렀으되, 버클리의 저작을 접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그곳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가 즐겨 든 사고실험이 그의 관념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우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물체들만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안에는 그것을 지각할 어떤 지성도 없다. 그렇다면 그 우주의 경이로운 운동과 장려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에도 없다—신의 의식 안이 아니라면. 세계의 존재란 결국 ‘지각됨’이며, 그 궁극의 지각자는 신이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세계는 헛것이다”라는 주장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세계는 신이 한결같이, 법칙에 따라 그것을 생각하고 있기에 실재한다. 여기서 관념론의 반대말은 ‘실재론’이 아니라 ‘자립성’이다. 에드워즈가 부정한 것은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물체가 신과 무관하게 스스로 존립한다는 생각이다.

비유

노래는 연주되거나 들리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악기를 멈추면 공기는 다시 고요해지고, ‘방금 그 음(音)’은 어딘가에 저장되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진다. 에드워즈는 물질 세계가 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연주하는 한 곡의 노래와 같다고 본다. 세계의 ‘실체’는 연주가 끝나도 남는 어떤 재료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연주 자체다.

06 기회원인론과 연속 창조

신이 유일하게 참된 원인이라는 생각을 철학에서는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 부른다. 에드워즈는 ‘참된 원인’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결과와 시간·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 둘째, 결과를 필연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셋째, 다른 것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충분해야 한다.

이른바 ‘이차 원인(second cause)’—불이 물을 데우고, 한 당구공이 다른 공을 때리는 일—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떨어져 있고, 지난 순간에 색이나 저항이 있었다 해서 다음 순간에도 그것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만일 이차 원인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면 신의 작용은 군더더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가 ‘원인’이라 부르는 것들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한결같은 “방법과 법칙”에 따라 결과를 일으키는 계기(occasion)일 뿐이다. 당구공이 부딪칠 때 다른 공을 움직이는 것은 그 공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규칙에 충실한 신이 그 계기에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우주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귀결이 나온다. 현재의 그 무엇도 다음 순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한 번 얻은 존재의 관성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오래전 한 번 창조되고 그 뒤로 저 혼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무로부터 다시 창조된다. 에드워즈는 우리의 상상력이 무디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그 경이로운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창조는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진행되는 현재의 실재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신론과 정면으로 갈라선다. 이신론자의 신은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놓고 물러난 시계공이다. 에드워즈의 신은 모든 톱니바퀴를 매 순간 붙들고 있는 존재이며, 그가 손을 떼면 단 한순간도 스스로 존립할 기계란 애초에 없다.

이 그림은 ‘시간에 따른 동일성’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도 끌고 들어온다. 세계가 매 순간 새로 창조된다면, ‘오늘 아침의 나무’와 ‘오늘 저녁의 나무’를 하나의 나무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신의 임의적 규정(arbitrary constitution)—연속된 창조들을 하나로 ‘여기겠다’는 신의 결정뿐이다. 바로 이 논리가 그의 원죄(原罪) 교리를 떠받치는 형이상학적 장치가 된다. 신은 아담과 그 후손을 상벌의 목적에서 ‘하나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의지 매 순간의 창조 낱낱의 프레임 = 매 순간 새로 창조된 세계 우리가 보는 연속된 세계
영화는 정지된 낱장의 빠른 연속이다. 어느 한 컷도 다음 컷의 ‘원인’이 아니며, 우리가 보는 매끄러운 운동은 영사기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기에 생기는 효과다. 에드워즈의 우주가 그런 영화라면, 신의 의지는 그 안을 흐르는 빛이다.
투사가 한순간 멈추면 세계는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없어진다. 일시정지된 세계란 없다. 신이 떠받치기를 멈춘 세계는 곧 무(無)다.

07 신은 ‘존재 일반’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한다. 신은 유일하게 참된 원인이자 유일하게 참된 실체이며, 물질적 마음적 현상의 바닥에 놓인 단 하나의 ‘존재’다. 에드워즈는 이를 가리켜 신은 ‘존재 일반(being in general)’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표현을 말브랑슈에게서 빌려 왔다. 신은 “모든 존재의 총합이며, 그가 없으면 어떤 존재도 없고, 만물이 그 안에 있고 그가 만물 안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신을 어떤 막연한 ‘존재의 힘’이나 추상적 보편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지성적·의지적 행위자—우리의 영혼과 같되 어떤 결함도 없는 하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알고 의지하는 인격적 존재이지, ‘생각 없이 작동하는 어떤 필연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존재의 정도(degree of being)’를 말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존재의 양은 그 존재가 지닌 능력·의식·활동의 크기에 비례한다. 대천사는 벌레나 벼룩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신은 의식과 능력에서 무한하고 활동에서 완전하므로 ‘순수 활동(pure act)’이다. 반면 피조물은 참된 능력을 결여하기에 신의 ‘그림자’ 혹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조차 없는 물체는 한층 더 희미한 그림자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인다. 신이 유일하게 참된 실체이자 원인이라면, 이것은 결국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 아닌가? 에드워즈 옹호자들의 표준적 대답은 ‘아니다’이다. 핵심은 그의 모델이 ‘전체와 부분’이나 ‘실체와 그 성질’의 관계가 아니라 행위자와 그가 일으킨 결과의 관계라는 데 있다. 세계는 신의 일부나 신의 속성이 아니라, 신의 창조적 의지가 매 순간 일으키는 ‘결과’로서 신과 관계 맺는다. 다만 비판자들은 이 구도가 여전히 범신론에 불편할 만큼 가깝다고 지적하며, 많은 연구자가 보다 안전한 명칭으로 ‘만유재신론(panentheism, 모든 것이 신 안에 있음)’을 제안한다.

이와 관련해 현대 에드워즈 연구에는 활발한 쟁점이 하나 있다. 이상현(Sang Hyun Lee)은 에드워즈가 신을 ‘자기를 전달하려는 성향(disposition to self-communication)’으로 파악했으며, 그래서 신은 창조를 통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의미로 ‘확장’되고 ‘더 커진다’는 역동적·생성적 신관을 읽어 냈다. 반면 올리버 크리스프(Oliver Crisp)와 스티븐 홈스(Stephen Holmes) 등은 이런 독해가 후대의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에드워즈에게 투사한 것이며, 어떤 ‘확장’이 있다면 그것은 신의 본질에서가 아니라 신을 아는 피조된 마음들 속에서의 확장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에드워즈 우주론을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08 창조의 목적 — 발산과 환류

그렇다면 신은 왜 창조했는가? 에드워즈는 사후 1765년에 출판된 논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End of Creation)에서 이 물음에 답한다. 신의 궁극 목적은 신 자신, 곧 그 자신의 영광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광’은 정적인 명예가 아니라 역동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신의 내적 충만이 밖으로 흘러나와 참되게 표현되는 일—발산(emanation)이다.

이 영광에는 결국 하나로 모이는 여러 국면이 있다. 신이 자신의 완전함을 행사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그 내적 영광을 피조된 지성에게 드러내는 것, 자신의 무한한 충만을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에 응답하여 피조물이 신을 알고 사랑하고 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국면들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태를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이라고 말한다.

결정적인 반전은 다음이다. 피조물의 행복은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의 영광의 일부다. 선의 본질이 그 자체를 위해 선을 나누어 주는 데 있으므로, “행복이 창조의 목적”이며, 그 행복은 신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그 일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신의 자기 추구와 신의 베풂은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겹친다.

에드워즈는 이 운동을 발산과 환류(emanation and remanation)의 그림으로 그린다. 신으로부터 영광이 창조 세계로 흘러나오고(발산), 피조물의 앎과 사랑이 다시 신을 향해 돌아 흐른다(환류). 마치 빛이 퍼져 나갔다가 되비치고, 샘에서 솟은 물이 흘러내렸다가 다시 근원으로 모이는 것처럼.

여기에는 에드워즈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강한 귀결이 따른다. 신의 본성이 ‘자신의 충만을 흘려보내려는 성향’이고 그 선함이 무엇에도 가로막힐 수 없다면, 신은 창조할 수밖에 없으며—나아가 ‘가장 적합하고 가장 좋은’ 이 세계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참된 우연성이나 신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느냐는 흔한 반론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자유란 ‘아무 제약 없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바를 행함’이며, 신은 바로 그것을 최고도로 행하기 때문이다.

내적 충만의 근원 발산 ↓ 영광 피조 세계 — 지성·마음들 환류 ↑ 앎과 사랑이 근원으로 되돌아 흐름
샘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넘치지 않는다. 넘치는 것은 그저 그 충만함이 하는 일이다. 신은 그렇게 창조하며, 세계는 흘러내린 물이고, 신을 향해 돌아가는 피조물의 사랑은 다시 근원으로 모이는 물이다.

09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우주

에드워즈에게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에 새겨진 것이다. 그가 즐겨 쓰는 말은 탁월함(excellency)이며, 그는 이것을 “존재가 존재에 동의함(the consent of being to being)”이라고 정의한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어울리고, 합치하고, 서로를 향해 ‘그렇다’고 응답하는 것—그것이 아름다움이다. 그 동의가 넓고 포괄적일수록 탁월함도 커지며, 가장 높은 동의는 ‘존재 일반’을 향한 사랑, 곧 선의(benevolence)다.

그는 아름다움을 두 층으로 나눈다. ‘일차적(참된) 아름다움’은 마음들 사이의 동의—진정한 선의, 거룩함, 사랑이다. ‘이차적 아름다움’은 꽃 한 송이, 건축물, 무지개, 한 곡의 음악에서 보는 대칭과 비례와 조화다. 이차적 아름다움은 일차적 아름다움의 실제적인 ‘이미지’다.

그리고 신은 “모든 아름다움의 토대이자 샘”이며, 무한히 아름답다. 창조 세계 곳곳에 흩어진 모든 아름다움은 그 무한한 광휘가 되비친 빛이다. 우주는 아름다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새로운 물리학이 드러낸 질서—운동의 비례, 법칙의 조화—는 에드워즈에게는 사물의 표면 위에서 반짝이는 신적 탁월함의 광택이었다.

10 자연은 신의 언어다

마지막 층이 남았다. 우주는 신이 만들었고 신의 아름다움으로 빛날 뿐 아니라, 신이 쓴 한 권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신적 사물의 이미지」(Images of Divine Things)와 「세계의 아름다움」 같은 글에서 에드워즈는 자연의 사물을 ‘예표(type)’ 혹은 ‘그림자(shadow)’로 읽는다. 예표란 눈에 보이는 표상이고, 그 ‘실체(antitype)’—진짜 알맹이—는 영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은 ‘의(義)의 태양’인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 누에, 무지개, 바뀌는 계절은 저마다 영적 의미를 품고 있다. 세계 전체가 자기 너머를 가리키는 기호의 체계인 셈이다. 에드워즈는 이 예표론을 선배 개신교 신학자들보다 훨씬 멀리 밀고 나갔다. 그들은 대개 예표를 구약의 인물·사건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경우로 한정했지만, 에드워즈는 신약도 예표적으로 읽었고—가장 대담하게는—자연 자체를 신의 언어로 읽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자연 숭배나 범신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요점은 ‘기호론적’이지 ‘범신론적’이지 않다. 자연은 신을 ‘의미한다’. 자연이 신‘인’ 것은 아니다. (이 자연 예표론이 후대 에머슨이나 소로의 초월주의를 예비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며, 결코 확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

결혼반지는 금이며 둥글다. 그 금속 성분과 세공을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반지의 ‘의미’—맹세, 결속—는 금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의미는 금에 담긴 것이 아니라 금에 ‘부여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연 세계가 신의 반지라고 본다. 물질로서(정확히는 관념으로서) 충분히 실재하되, 그것은 자기 아닌 무언가를 의미하라고 그 자리에 놓였다.

11 에드워즈 우주론의 자리

에드워즈는 사적인 노트와 단편 속에서, 서구 전통을 통틀어 가장 철저한 신학적 관념론 가운데 하나를 세웠다. 그의 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적이고, 무한한 마음의 의지에 의해 매 순간 떠받쳐지며, 아름다움으로 질서 지어지고, 하나의 언어처럼 읽힌다.

이 그림의 힘은 분명하다. 그것은 새로운 기계론적 과학에 자리를 내어 준다—법칙은 실재하며, 그것은 신이 일하는 한결같은 방법이다. 동시에 그것은 ‘기계가 저 혼자 돌아간다’는 이신론의 결론을 거부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물리학·형이상학·윤리학·미학을 단 하나의 원리—신의 주권적이고 자기를 전달하며 아름다운 존재—아래 통합한다.

물론 부담도 있다. 범신론 내지 만유재신론에 위태로울 만큼 가깝다는 점, 창조가 사실상 필연이 되어 보인다는 점(그렇다면 무엇이 우연으로 남는가?), 공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논증과 관념론 사이의 긴장, 그리고 기회원인론적·관념론적 우주가 실제 과학 연구의 진행 방식과 너무 멀다는 점이다. 그의 비판자들이—당대에도 오늘날에도—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 후일담도 짚어 둘 만하다. 에드워즈는 우주론을 잇는 학파를 남기지 못했다. 그의 형이상학 노트들은 그가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조각조각 출판되었고, 그의 공적 영향력은 자연철학이 아니라 신앙 부흥과 칼뱅주의 신학을 통해 흘렀다. 그러나 물질이 능력과 관념으로 녹아내리고, 세계가 끊임없이 떠받쳐지며, 우주가 근본에서 마음이자 의미라는 그의 비전은 후대 관념론의 여러 갈래와 공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물론에도, 멀찍이 물러난 시계공의 신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을 지금도 끌어당기는, 하나의 엄밀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에드워즈에게 우주는 자족적인 기계도, 차갑게 식어 가는 물질의 더미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한한 정신이 매 순간 다시 쓰고,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의미로 봉인한 한 편의 글이었다. 그리고 그 글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은, 신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