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읽는다. 한 추정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 평균 10만 단어가량을 눈으로 지나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화면 위를 빠르게 훑는 읽기다. 알림과 알림 사이, 손가락이 다음 화면을 부르기 직전의 짧은 시선. 정보가 무한히 공급되는 시대에, 수백 년 전 죽은 사람이 남긴 두꺼운 책을 굳이 펼치는 일은 점점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이 글은 「교양인이라면 마땅히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런 당위는 대개 죄책감을 남길 뿐 사람을 움직이지 못한다. 대신 질문을 바꾼다. 고전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 시간의 검증이라는 필터, 뇌가 글을 처리하는 방식, 타인의 마음을 다루는 훈련,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 네 가지를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권위가 아니라 효과의 언어로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효과의 언어조차 넘어서는 가장 오래된 이유가 남는다.
I‘고전’이라는 말의 함정
먼저 함정 하나를 치워야 한다. ‘고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 박물관 유리장 안의 유물, 학교가 강요했던 숙제, 거실 책장에서 표지만 빛바래는 장식.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1900년의 한 강연에서 고전을 이렇게 비꼬았다. 모두가 읽었기를 바라지만 정작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라고. 절반은 농담이지만 절반은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는 고전을 ‘오래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으로 오해하고, 그 오해 때문에 펼치지 않는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는 이 오해를 정면으로 흔들었다. 1986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실린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그는 고전을 정의하는 열네 가지 방식을 늘어놓는데, 그중 몇 개는 지금도 곱씹을 가치가 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읽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다. 고전이란, 우리가 그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어서—심지어 그와 다투면서까지—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게 되는 책이다. 그리고 칼비노가 남긴 가장 유명한 한 문장이 있다.
고전이란, 자신이 할 말을 결코 다 끝내지 않는 책이다.—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고전을 규정하는 것은 ‘오래됨’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음’이다. 어떤 책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내놓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았다. 인과의 방향이 뒤집힌다. 고전은 시간의 결과가 아니라 시간을 견딘 원인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무엇이 그 시간을 견디게 했는가.
II시간이라는 필터: 살아남은 것의 힘
매년 전 세계에서 수백만 종의 책이 새로 출간된다. 그중 10년 뒤에도 누군가 펼치는 책은 일부에 불과하고, 한 세대를 넘겨 여전히 읽히는 책은 극히 적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은 이 가차 없는 망각의 체를 수십 번 통과하고도 살아남은 것들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경험칙이 있다. 통계학자이자 작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널리 알린 린디 효과(Lindy effect)다. 음식이나 사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과 달리, 책·사상·기술처럼 소멸하지 않는 것은 이미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앞으로 살아남을 시간도 길어진다는 것이다. 2,500년 동안 읽혀 온 책이라면, 그 책은 앞으로 한두 세대가 아니라 그만큼 더 오래 읽힐 가능성이 높다.
비유
사람과 책은 정반대의 시간을 산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남은 수명이 줄어든다. 반대로 한 번 살아남은 책은 나이가 들수록 남은 수명이 늘어난다. 어제 출간된 책은 내년이면 잊힐 수 있지만, 2,000년을 견딘 책은 다음 2,000년의 후보가 된다. 시간은 책에게 적이 아니라 추천서다.
그림 1. 시간의 필터. 동시대의 무수한 텍스트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대부분 잊히고, 회의와 재해석의 압력을 견딘 소수만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다만 이 필터를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완벽한 품질 검증기가 아니다. 어떤 텍스트는 내용의 깊이가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베껴 쓰던 제도와 권력, 또는 단순한 보존의 운 때문에 살아남았다. 반대로 묻혀 버린 걸작도 분명히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만 보고 ‘남은 것은 다 위대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생존 편향(survivorship bias)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주장은 「오래되었으니 옳다」가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의심과 재해석이라는 가혹한 압력을 견뎌냈으니, 적어도 진지하게 마주할 값어치는 입증되었다」가 정확하다. 고전은 정답의 보증서가 아니라, 검증을 통과한 진지한 후보다.
III깊이 읽기: 뇌가 하는 일
두 번째 이유는 책 바깥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읽기를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문자는 길어야 수천 년 전의 발명품이고, 시각과 언어와 사고를 담당하는 영역들이 진화로 만들어진 뒤 한참 지나서야 등장했다. 그래서 읽기는 본능이 아니라, 태어난 뒤 후천적으로 조립되는 회로다. 그리고 어떤 글을 읽느냐가 그 회로를 다르게 빚는다.
인지신경과학자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다시, 책으로(Reader, Come Home)』(2018)에서 이 점을 경고한다. 디지털 환경의 ‘훑어 읽기(skimming)’가 깊이 읽기를 떠받치는 회로—추론과 비판적 분석, 유추, 성찰, 그리고 그가 인지적 인내(cognitive patience)라 부른 능력—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연구는 화면으로 읽을 때 정보의 순서와 세부에 대한 기억이 종이로 읽을 때보다 나빠지는 경향을 보고했다. 화면 위에서 우리는 키워드를 사냥하고, 맥락을 대충 잡은 뒤 결론으로 건너뛰며, 필요할 때만 본문으로 돌아가 근거를 골라낸다. 짧은 정보를 처리하기에는 합리적인 전략이지만, 이 방식이 모든 글에 대한 습관으로 굳으면 깊이 읽기의 근육은 쇠퇴한다.
비유
깊이 읽기 회로는 근육과 같다. 가벼운 것만 들면 가벼운 힘만 붙는다. 짧고 단순한 텍스트만 소비하면 뇌는 짧고 단순한 처리에만 능숙해진다. 고전은 무게가 있는 텍스트다. 복잡한 문장 구조, 즉시 풀리지 않는 논증, 한 단락을 붙들고 되돌아가게 만드는 밀도—그 ‘저항’이야말로 깊이 읽기 회로를 단련시키는 부하다.
그림 2. 같은 텍스트, 두 가지 읽기. 훑어 읽기는 키워드 사이를 띄엄띄엄 도약하고, 깊이 읽기는 모든 문장을 가로지르며 되돌아가 의미를 엮는다.
여기서 울프의 처방은 ‘화면을 버리고 종이로 돌아가자’가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양손잡이 읽기 뇌(biliterate brain)다. 빠르게 훑어야 할 때와 깊이 잠겨야 할 때를 스스로 알고, 두 읽기 모드를 의식적으로 오가는 능력.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 가운데 깊이 읽기라는 한쪽 끝을 잃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도 사라지지 말아야 할 능력에 대한 보험이다.
IV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세 번째 이유는 공감과 관련된다. 서사를 읽는 일은 잠시 다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오해하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끊임없이 추론하며 읽는다. 심리학에서 타인의 믿음·의도·감정을 헤아리는 이 능력을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 부른다.
2013년, 키드(David Kidd)와 카스타노(Emanuele Castano)는 학술지 사이언스에 흥미로운 실험을 발표했다. 문학적 소설(literary fiction)의 짧은 지문을 읽은 직후, 사람의 눈빛 사진만 보고 감정을 맞히는 마음 이론 검사에서 피험자들의 성적이, 대중소설이나 논픽션을 읽은 경우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문학이 공감 능력을 키운다’는 오래된 직관에 실험적 근거가 붙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 정직할 필요가 있다. 이 ‘즉시 효과’ 주장은 이후 여러 차례의 사전등록 복제 연구에서 결과가 엇갈렸다. 어떤 연구는 재현에 실패했고, 어떤 연구는 부분적으로만 재현했다. 짧은 지문 하나를 읽었다고 곧바로 공감 점수가 오른다는 강한 주장은,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 편의 논문을 과대 해석하지 않는 것도 깊이 읽기의 일부다.
다만 더 견고해 보이는 연결이 따로 있다. 평생에 걸쳐 소설을 많이 읽어 온 사람일수록 마음 이론과 공감 측정치가 높다는 상관관계는 여러 연구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관찰된다(마(Raymond Mar) 등). 인과의 방향과 크기는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이 소설을 더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습관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다루는 경험’이 사회적 인지를 떠받친다는 방향성 자체는 무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전 문학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고전 속 인물은 선악이 또렷하고 행동이 예측되는 평면적 존재가 아니라, 모순되고 해석을 요구하는 존재다. 독자는 그 빈틈을 추론으로 메우며 읽을 수밖에 없다. 추론을 강제하는 텍스트일수록, 마음을 헤아리는 근육은 더 많이 동원된다.
비유
소설은 비행 시뮬레이터와 같다. 조종사는 시뮬레이터 안에서 실제로는 추락하지 않으면서 수백 번의 위기를 겪고, 그렇게 실제 비행을 준비한다. 독자는 책 안에서 실제로는 그 삶을 살지 않으면서 수백 명의 다른 삶을, 다른 시대와 다른 처지의 시선을 ‘안전하게’ 통과한다. 한 사람이 직접 겪을 수 있는 인생은 하나뿐이지만, 읽는 사람은 그 한 번의 생 안에서 수많은 타인의 관점을 미리 살아 본다.
V죽은 자들과의 대화
네 번째 이유는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고전을 읽는 것은 시간을 가로지른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교육자 로버트 허친스(Robert Hutchins)와 모티머 애들러(Mortimer Adler)는 이를 위대한 대화(the Great Conversation)라 불렀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저자들이 같은 근본 질문—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을 두고 서로에게 답하고 반박해 온 하나의 긴 대화 말이다. 한 권의 고전을 펼치는 것은 그 대화의 한가운데로 의자를 끌어다 앉는 것과 같다.
그림 3. 위대한 대화. 각 점은 한 시대의 저작이고, 곡선은 후대의 책이 앞선 책에 보내는 응답과 반박이다. 고전을 읽는 것은 이 대화에 뒤늦게 합류하는 일이다.
이 대화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대의 전제와 편견을 공기처럼 들이마신다.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비교할 대상이 곁에 없기 때문이다. 고전은 그 당연함을 낯설게 만든다. 다른 시대가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인 전제가 사실은 선택이었음을 일깨운다.
고전은 우리를 우리 시대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게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통찰을 풀어 옮김
그래서 고전 읽기의 핵심은 ‘동의’가 아니라 ‘마찰’이다. 다시 칼비노의 정의로 돌아가 보자. 고전은 우리가 그와 다투면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게 만드는 책이다. 고대 델포이 신탁이 내걸었고 소크라테스가 자기 화두로 삼은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은, 혼자만의 응시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정신과 부딪칠 때 비로소 나의 윤곽이 드러난다. 고전은 가장 강력한 마찰면을 제공한다. 우리는 호메로스에게 동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다툼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그를 읽는다.
VI그러나 — 정전은 우상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을 옹호하는 네 가지 이유다. 그러나 고전을 옹호하는 것과 어떤 ‘정전(canon)’을 신성시하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흐리면 고전 읽기는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된다. 그러니 가장 강력한 반론을 정직하게 들여놓아야 한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서구 정전(The Western Canon)』(1994)에서 미적 탁월함을 거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정전을 옹호했다. 그는 문학에 사회적 사명이나 이념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거부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비평가들을 원한의 학파(School of Resentment)라 일축하며, 셰익스피어를 중심에 둔 26인의 작가로 서구 문학의 축을 그렸다. 그에게 위대한 문학은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독을 제대로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그런 정전은 이른바 ‘죽은 백인 남성’에 치우쳐 여성과 비서구, 소수자의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배제해 왔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블룸이 내세운 미적 ‘보편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사실은 특정 문화·계층의 취향을 보편으로 둔갑시킨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이 ‘위대한가’를 정하는 권력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 논쟁에서 어느 한쪽으로 도망칠 필요는 없다. 몇 가지를 분별하면 균형이 잡힌다. 첫째, 정전은 닫힌 목록이 아니다. 블룸조차 정전은 결코 닫히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정전은 시대마다 다시 열리고 재편되며, 그 자체가 위대한 대화의 일부다. 둘째, ‘고전을 읽으라’는 권유는 특정한 스물여섯 명의 이름을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압력을 견딘 깊은 텍스트와 씨름하라는 권유이고, 그 텍스트에는 두보의 시와 『논어』,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 그리고 치누아 아체베나 토니 모리슨처럼 정전의 경계를 넓힌 작가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고전은 한 문명의 소유물이 아니다. 셋째, 블룸식의 ‘효용 거부’와 비판자들의 ‘효용·정의 중심’은 둘 다 절반의 진실이다. 고전은 그 자체로 미적 경험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형성하고 사회를 비추기도 한다. 양쪽을 모두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고전 읽기의 핵심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논쟁할 능력을 얻는 것이다. 정전을 의심하는 능력조차 고전을 충분히 읽어야 길러진다. 실제로 정전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열심히 읽은 사람들이었다. 고전은 자신을 의심할 무기까지 독자에게 건넨다.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VII그래서 어떻게 읽는가
이유가 섰다면 방법이 따라와야 한다. 고전은 읽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내놓는다. 몇 가지 실천적 원칙이 있다.
다시 읽기 위해 읽는다. 칼비노가 말했듯 고전의 본령은 재독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 독서는 낯선 지형을 익히는 일이고, 풍경은 대개 두 번째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 번에 다 가지려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천천히, 저항을 견디며 읽는다. 즉시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잠시 머무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훈련이다. 막히는 지점이야말로 깊이 읽기 회로가 단련되는 자리다. 속도는 미덕이 아니다.
책과 대화하며 읽는다. 애들러가 권한 대로 여백에 동의와 반박을 적고, 질문을 던지며 읽는다. 밑줄만 그은 책은 거의 남지 않지만, 말을 걸어 둔 책은 오래 남는다.
다리를 쓰되 강을 포기하지 않는다. 좋은 번역과 해설은 원문에 닿기 위한 다리다. 그러나 다리 위에만 머물러 요약본으로 원전을 대신하면, 정작 건너편 풍경은 보지 못한다. 해설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자기만의 정전을 만든다. 남이 정해 준 100권 목록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정의하게 만든 책들로 서가를 채운다. 권위는 시작점일 뿐, 도착점은 자신의 책장이다.
끝까지 읽되 자책하지 않는다. 칼비노는 우리를 위로한다. 아무리 폭넓게 읽어도 읽지 못한 근본 저작은 언제나 남는다고. 못 읽은 목록 앞의 죄책감은 독서의 가장 흔한 적이다. 평생의 목록을 노려보는 것보다, 오늘 한 권을 펼치는 편이 늘 낫다.
VIII효용을 넘어서
지금까지 든 네 가지 이유—시간의 검증, 깊이 읽기의 훈련, 공감, 자기 정의—는 모두 ‘효용’의 언어다. 고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를 묻는 말들이다. 이 언어는 유용하고, 또 대체로 옳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가장 오래된 이유는 효용의 바깥에 있다.
고전은 끝나지 않은 대화에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그 책들은 다음 독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건넬 것이다—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고전을 읽는 일은, 짧은 생을 사는 자가 오래 살아남은 정신들과 잠시 같은 방에 앉는 일이다. 그 방에 앉아 본 사람은 자기 시대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그 대화에 자기만의 한마디를 보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비노의 말로 돌아가자. 고전은 자신이 할 말을 결코 다 끝내지 않는 책이다. 그러니 그 책들을 읽는 우리에게도, 아직 읽기를 끝낼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