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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 신학 · 윤리

가짜로 전달된 진짜 은혜

인공지능이 작성하고 목사의 얼굴을 입힌 설교를, 회중이 실제 설교로 믿고 큰 은혜를 받았다면 — 그 은혜는 유효한가

2026년 6월 1일

한 예배당에서 설교가 흘러나온다. 단상 위 화면에는 늘 보던 담임목사의 얼굴이 있고, 목소리도 그의 것이다. 회중은 말씀에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흘리고, 오래 미뤄 둔 결심을 다잡는다. 그런데 그 설교문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작성한 것이고, 화면 속 목사는 합성된 영상이며, 정작 목사 본인은 그 자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중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렇게 받은 은혜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직관적으로 두 갈래의 답이 떠오른다. 한쪽은 “느낀 게 진짜면 진짜지, 출처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한다. 다른 쪽은 “속아서 받은 은혜가 어떻게 은혜냐”라고 반박한다. 두 답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바로 그 점이 이 물음의 함정이다. ‘은혜가 맞는가 틀린가’는 하나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세 개의 질문이 한 덩어리로 포개져 있다. 이 세 가닥을 풀어내지 않으면 어느 쪽 답도 절반만 맞는다.

01 — 질문을 다시 본다이미 벌어진 일,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이 상황은 사고실험이 아니다. 2023년 6월 9일,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의 성 바울 교회에서는 40분짜리 예배가 거의 전부 인공지능으로 진행되었다. 설교·기도·축도까지 대부분을 챗지피티(ChatGPT)가 만들었고, 단상 위 화면에 등장한 디지털 아바타들이 그것을 낭독했다. 빈 대학의 신학자 요나스 지머라인이 기획한 이 실험 예배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고, 그는 “예배의 약 98퍼센트가 기계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반응은 갈렸다. 흥미로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거북함을 느꼈다. 한 참석자는 “마음도 영혼도 없었다”고 했다. 아바타에는 감정도 몸짓도 없었고, 말은 빠르고 단조로웠다. 일부는 주기도문을 따라 외기를 거부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짚어야 한다. 퓌르트의 회중은 이것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느낀 ‘영혼 없음’은 바로 그 앎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글이 다루는 시나리오는 정확히 그 한 가지를 뒤집는다. 회중에게서 ‘앎’을 빼앗는 것이다. 퓌르트에서 빠져 있던 ‘인격의 현존’이라는 감각을, 딥페이크는 가짜로 복원해 회중에게 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로 따져야 할 새 변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기만(欺瞞)이다.

정리

퓌르트 사례 = 인공지능 설교 + 회중이 안다 → 많은 이가 “영혼이 없다”고 느낌.

이 글의 시나리오 = 인공지능 설교 + 딥페이크 + 회중이 모른다 → 회중이 큰 은혜를 받음.

둘의 유일한 차이는 ‘앎’이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기만이다. 따라서 핵심 쟁점은 인공지능 자체가 아니라, 기만이 은혜의 진위에 무엇을 하는가이다.

02 — 세 가닥으로 풀기하나의 질문에 답이 세 개인 이유

‘그 은혜가 맞는가’라는 물음 안에는, 서로 다른 학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답해 온 세 개의 질문이 들어 있다. 각각을 따로 세워 보면 답이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선다.

하나의 질문 그 은혜는 맞는가, 틀린가? 층위 A · 경험 그 느낌은 실재했는가? 실재한다 층위 B · 신학 하나님의 은혜인가? 조건부 가능 층위 C · 윤리 그 행위는 정당한가? 부당하다
같은 사건을 경험·신학·윤리의 세 층위에서 물으면 판정이 달라진다. 세 답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

이 글의 결론을 미리 한 줄로 겹쳐 두면 이렇다. 느낌으로서의 은혜는 실재했고, 하나님의 은혜로서도 실재할 수 있으나, 그것을 만들어 낸 행위는 부당하다. 셋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진짜 은혜와 진짜 잘못은 한 사건 안에 동시에 들어앉을 수 있다.

03 — 층위 A · 경험느낌은 실재했다 — 위약이 가르쳐 주는 것

먼저 가장 단순하고 가장 확실한 층위부터. 그 사람이 흘린 눈물, 가슴을 누른 위로, 다잡은 결심은 실재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경험은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든 일단 일어나면 실재한다. 원인이 ‘가짜’라고 해서 결과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에서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위약(僞藥, placebo) 효과다. 약효가 전혀 없는 설탕 알약을 먹은 환자가 실제로 통증이 줄고 증상이 나아진다. 원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결과는 측정 가능한 실재다.

비유 · 위약

설탕으로 만든 알약은 화학적으로 통증에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약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환자의 통증은 실제로 줄어든다. 줄어든 통증은 환상이 아니라 진짜다. 원인의 ‘무력함’이 결과의 ‘실재’를 지우지 못한다 — 이것이 위약이 가르쳐 주는 첫 번째 교훈이다.

그런데 위약 연구에는 이 시나리오와 정면으로 맞닿는 두 번째 사실이 있다. 흔히 위약은 ‘속여야’ 듣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의 테드 카프척 연구진은 환자에게 “이것은 약효 없는 설탕 알약입니다”라고 솔직히 밝히고 주었는데도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들의 증상이 유의하게 호전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른바 ‘오픈라벨 위약’이다. 카프척의 결론은 분명하다 — 의미 있는 위약 효과를 얻는 데 기만이나 은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은혜의 효과’가 위약처럼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 효과를 얻기 위해 회중을 속일 필요조차 없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기만은 효과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효과가 실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별개의 물음이다. 위약에도 한계가 있다. 위약은 통증·메스꺼움·피로처럼 ‘스스로 관찰하는’ 증상에는 듣지만,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거나 암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느 쪽인가. 마음의 위안이라는 주관적 사건인가, 아니면 그 너머의 무언가가 실제로 작동한 객관적 사건인가. 이 물음이 우리를 두 번째 층위로 데려간다.

04 — 층위 B · 신학은혜는 어디서 오는가 — 1600년 전에 끝난 논쟁

“출처가 잘못이면 은혜도 가짜”라는 직관은 강력하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직관의 한 판본을 이미 4세기에 정면으로 다뤘고, 결론을 내렸다. 도나투스 논쟁이다.

로마의 박해기에 일부 성직자는 신앙을 버리거나 당국에 협력했다. 박해가 끝난 뒤 이들이 교회로 돌아오자 물음이 터졌다. 신앙을 배신했던 사제가 베푼 세례와 성찬은 ‘유효한가’? 도나투스파는 단호히 아니라고 했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의 도덕적 자격에 달려 있으며, 자격을 잃은 자가 베푼 것은 빈 의식일 뿐이라는 것이다(후대 신학은 이를 ‘ex opere operantis’, 즉 ‘행하는 자에 따라’라 부른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반박했다. 그의 논지는 서방 기독교가 성례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성례는 사제의 사유물이 아니다. 사제가 세례를 베풀 때 실제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사제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성례의 효력은 집전자의 도덕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 후대 신학이 ‘ex opere operato(행해진 일 자체로)’로 정식화한 원리의 씨앗이 여기 있다. 만약 효력이 사제의 거룩함에 달려 있다면, 신자는 누구도 자기 세례가 유효한지 끝내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결정적 반론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은혜의 능력은 그것을 담아 나르는 인간 그릇의 자격에 달려 있지 않다. 성경 안에는 이 원리가 거듭 나타난다. 하나님은 발람의 나귀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고, 이방의 왕 고레스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 부르며 쓰셨으며, 형제들의 배신마저 “당신들은 악을 꾀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결말로 이끄셨다. 매개의 흠결이 하나님의 일을 가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유 · 금잔과 질그릇

같은 물이라도 금잔에 담기든 흠집 난 질그릇에 담기든, 갈증을 풀어 주는 것은 잔이 아니라 물이다. 은혜를 물에, 설교자를 잔에 빗대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이렇게 요약된다 — 갈증을 푸는 능력은 잔의 재질이 아니라 물에 있다. 사제가 흠 있는 질그릇이어도 그 물은 여전히 물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면, AI가 작성한 설교라 해도 그 안에 하나님에 관한 ‘참’이 담겨 있다면 — 그리고 인공지능은 인류가 축적한 성경과 신학 전통을 학습해 만들어졌으므로 그 참을 길어 올릴 수 있다 — 그 참은 누가 직접 받아썼든 여전히 참이다. 참된 말씀이 전해지고 마음이 그것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일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신학은 미리 닫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층위 B의 답은 ‘조건부 가능’이다.

그러나 도나투스 논쟁이 허락하지 않는 것

여기서 멈추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효화한 것은 ‘집전자의 부족한 자격’이지, ‘집전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기만’이나 ‘책임지는 인격의 부재’가 아니다. 자격 없는 사제도 어쨌든 실재하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있고,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며, 교회의 질서 안에서 정해진 형식과 의도로 집전한다. 딥페이크는 그 사람 자체를 위조하고 회중을 속인다. 더구나 ex opere operato조차 ‘열매 맺는 수용’을 위해서는 받는 이의 신앙과 올바른 형식·의도를 전제한다. 회중의 신앙은 진짜였다. 그러나 ‘목사를 사칭한 합성 영상’은 결코 올바른 형식도 의도도 아니다.

덧붙여, 이 시나리오의 ‘목사님’은 개신교 맥락으로 읽힌다. 개신교 — 특히 개혁주의 — 전통에서 설교의 능력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에게 있고, 설교자는 그 말씀의 전령(herald)이다. 결론은 같다.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다. 다만 개신교는 설교를 ‘인격적이고 책임 있는 증언’과 단단히 묶어 왔다. “당신들을 아는 내가, 당신들에게 이것을 선포한다”는 그 인격적 ‘나’를, 딥페이크는 위조한다.

05 — 층위 C · 윤리그 행위는 위작이다 — 미술이 가르쳐 주는 것

이제 세 번째 층위, 행위의 정당성으로 넘어간다. 여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거울이 미술의 위작(僞作) 논쟁이다.

20세기 중반, 한 판 메헤렌이라는 화가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조해 당대 최고의 감정가들을 속였다. 그가 위조한 ‘페르메이르’는 진품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비평가들로부터 거장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45년 그가 스스로 위작자임을 고백하자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핵심은 이것이다 — 위작을 마주한 사람들의 미적 감동은 진짜였다.

철학자 앨프리드 레싱은 “위작의 무엇이 잘못인가”라는 글에서, 위작의 잘못은 그 ‘미적 가치’에 있지 않다고 못 박았다. 잘 만든 위작의 미적 가치는 진품에 필적할 수 있다. 잘못은 다른 데 있다 — 독창성, 즉 ‘출처(provenance)’와 ‘기원에 관한 진실’이다. 위작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 그림의 가치가 무너지는 까닭은 캔버스가 갑자기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를 우리가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위작의 잘못은 역사적·전기적·법적·경제적 사실의 문제이지, 엄밀히 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도를 시나리오에 그대로 포갠다. AI가 쓰고 딥페이크로 입힌 설교는 ‘목사의 설교’에 대한 위작이다. 그 영적 경험은 미적 감동이 그러했듯 진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출처를 위조한다 — 이 목사, 이 사람의 수고, 이 기도, 이 양떼와의 관계라는 출처를. 위작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 경험의 ‘가치’는 재평가된다. 과거에 느낀 감동을 소급해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비유 · 위조지폐로 산 빵

위조지폐로 빵을 샀다고 하자. 그 빵은 진짜로 배를 채운다. 허기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가신다. 그렇다고 그 거래가 정당해지는가. 빵이 진짜라는 사실은 위조라는 잘못을 씻어 주지 못한다. 더구나 위조가 발각되면, 그 한 장이 화폐 체계 전체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 ‘결과가 진짜’라는 것과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은 끝까지 다른 문제다.

06 — 경험의 결그 은혜는 ‘믿음’으로 짜여 있었다 — 두 개의 축

지금까지는 ‘은혜’를 떼어 낼 수 있는 순수한 덩어리처럼 다뤘다. 그러나 경험은 그렇게 깔끔히 쪼개지지 않는다. 회중이 느낀 것은 ‘순수한 은혜 + 떼어 낼 수 있는 거짓 믿음’이 아니었다. 그가 느낀 것의 일부는, 바로 그 상상 속 목사를 향해 있었다 — “나를 아는 우리 목사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 부분은 허상을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경험을 두 개의 축으로 갈라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신자 실제 목사 (현존하지 않음) 수직 축 · 은혜 진리가 전해지고 마음이 받음 → 실재할 수 있다 딥페이크 · 허상 수평 축 · 신뢰 이 양치기가 나를 돌본다 → 위조·배신됨
같은 경험 안에 두 방향이 겹쳐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수직 축’은 끊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목사를 향한 ‘수평 축’은 딥페이크라는 허상에 가로채여 위조된다.

하나님을 향한 수직 축의 은혜 — 진리에 마음이 움직이고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일 — 은 끊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목사를 향한 수평 축의 신뢰 — 이 인격이 나를 알고 돌본다는 관계적 신뢰 — 는 가로채여 위조되었다. 수직이 진짜라고 해서 수평의 위조가 정당해지지 않으며, 수평이 위조되었다고 해서 수직이 자동으로 무효가 되지도 않는다. 둘은 한 경험 안에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계’ 사고실험이 도움이 된다. 원하는 어떤 경험이든 완벽하게 제공하는 기계가 있다고 하자. 평생 그 안에 들어가 살겠는가? 노직은 대부분의 사람이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경험하는 느낌’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기를 원한다. 딥페이크 설교는 목회적 돌봄의 ‘느낌’을 주되 그 ‘실재’를 주지 않는다. 회중이 원한 것이 실제 목회적 돌봄이었다면(수평 축), 그가 받은 것은 정교한 시뮬레이션이었다.

07 — 기만의 무게진짜 은혜라도, 기만은 그것을 오염시킨다

수직 축의 은혜가 진짜라고 인정하더라도, 세 가지 잘못은 그대로 남는다. 이것이 층위 C의 핵심이다.

첫째 — 자율성과 존엄의 침해

회중은 자기 영적 경험을 스스로 이해하고 맥락 짓고 동의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결과적으로 ‘좋았다’는 사실은 이 침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좋은 결과를 위해 상대를 속여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인격에 대한 침해다(칸트가 말한 ‘인간을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원칙이 여기 닿는다). 바티칸이 2025년 1월 발표한 인공지능 문서 Antiqua et Nova(‘옛것과 새것’)가 모든 평가의 최상위 기준으로 삼는 것도 바로 ‘훼손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다.

둘째 — 사기, 곧 신뢰의 도용

그 은혜가 ‘착지’한 데에는, 회중이 특정 목사에게 오랫동안 쌓아 온 신뢰가 담보로 쓰였다. 남의 신뢰-잔고를 동의 없이 인출하고,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위조해 쓴 것이다. 이는 정체성의 도용이다. 앞의 바티칸 문서는 이 점을 정면으로 짚는다 — 인공지능을 사람인 양 위장하는 일은 피해야 하며, 특히 그것을 기만적 목적으로 행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윤리 위반이라는 것이다. 같은 문서는 인공지능이 공적 삶의 ‘진실의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경고한다. 딥페이크 설교는 그 위기의 교과서적 사례다.

셋째 — 공동체 신뢰의 부식

종교 공동체는 신뢰 위에서 돌아간다. 목사와 회중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신탁(信託) 관계다. 단 한 번의 기만이 발각되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설교로 소급해 의심을 번지게 한다 — “그날 그 설교도 가짜였나? 작년 그 위로도?” 부식은 한 점에 그치지 않고 체계 전체로 퍼진다. 위조지폐 한 장이 화폐 전체의 신뢰를 흔드는 것과 같다.

핵심

여기서 앞의 두 실마리가 결정타가 된다. 카프척의 오픈라벨 위약이 보여 주듯, 기만은 효과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목사가 인공지능을 도구로 ‘투명하게’ 쓰고 자기 이름으로 전했어도, 참된 말씀과 받는 마음이 있었다면 은혜는 흐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만은 부당할 뿐 아니라 불필요했다. 정직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퓌르트가 남긴 교훈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회중이 인공지능임을 ‘알았을 때’ 많은 이가 “마음도 영혼도 없다”고 느꼈다. 이는 ‘인격의 현존’이라는 감각이 그 경험에서 실제로 큰 몫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딥페이크는 바로 그 ‘없던 현존’을 가짜로 지어내 채워 넣는다. 퓌르트의 사람들이 그리워한 그 ‘영혼’을, 딥페이크는 위조하는 것이다.

08 — 경계선진짜 쟁점은 ‘AI냐 사람이냐’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 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잘못의 핵심은 ‘기계가 썼다’가 아니다. 설교 준비에 인공지능을 쓰는 것과, 인공지능으로 위작을 만들어 회중을 속이는 것 사이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같은 도구라도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정당성이 갈린다.

정당성의 경계 도구·투명 비공개 저자 기만 딥페이크 ← 대체로 정당 부당 → 경계를 가르는 것은 ‘AI냐 사람이냐’가 아니라 ‘투명한가 · 책임지는 인격이 앞에 서 있는가’
인공지능이 끼어드는 지점이 경계가 아니다. 경계는 ‘투명성’과 ‘책임지는 인격의 현존’이 무너지는 지점에 그어진다.

네 단계를 짚어 보자. 목사가 인공지능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초안을 받되, 직접 대폭 고쳐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자기 이름으로 전한다. 이는 주석서나 검색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대체로 무방하다. 목사가 인공지능 초안을 거의 그대로 쓰되 본인이 전한다(비공개). 회색지대다. 그러나 적어도 ‘말하는 나’는 책임지는 인격으로 그 자리에 있다. 인공지능이 작성하고 실제 목사가 낭독하되, 회중은 저자가 누구인지 속는다. 저자에 관한 기만이 시작된다. 인공지능이 작성하고 딥페이크 영상이 전하며, 목사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다(이 글의 경우). 저자와 전달자 모두에 대한 기만에 정체성 도용까지 겹친다.

경계는 ①과 ④ 사이 어딘가,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지점이 아니라 ‘투명성’과 ‘책임지는 인격’이 무너지는 지점에 그어진다. 설교는 전통적으로 인격적 증언이다 — “당신들을 아는 내가, 당신들에게 이것을 선포한다.” 딥페이크는 그 ‘나’와 ‘당신들을 안다’를 동시에 위조한다.

비유 · 대필과 합성

정치인이 연설문 작가의 글을 자기 입으로, 자기 이름으로 전하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그러나 작가가 정치인의 얼굴을 합성해, 정치인 모르게 영상을 만들어 틀었다면 그것은 대필이 아니라 위조다. 차이는 ‘남이 대신 썼는가’에 있지 않다. ‘책임지는 인격이 앞에 서 있는가, 그리고 속였는가’에 있다.

09 — 종합그래서, 그 은혜는 맞는가 틀린가

이제 처음의 물음에 또렷이 답할 수 있다. 두루뭉술한 절충이 아니라, 층위별로 정확하게.

느낌으로서의 은혜는 — 실재했다. 눈물도 위로도 결심도 진짜였다. 하나님의 은혜로서는 — 참된 말씀이 전해지고 마음이 그것을 받았다면 실재할 수 있다. 하나님은 흠 있는, 심지어 기만적인 정황 속에서도 선을 이루실 수 있다. 다만 그 사실이 기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만들어 낸 행위는 — 부당했다. 기만이었고, 신뢰의 도용이었으며, 공동체 신뢰를 부식시켰다.

이 셋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둑맞은 바이올린으로도 아름다운 연주는 나온다. 그 아름다움은 진짜다. 그러나 도둑질은 여전히 도둑질이다. 진짜 은혜와 진짜 잘못은 한 사건 안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다. 은혜가 진짜라는 사실이 기만을 씻어 주지 못하고, 기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은혜를 소급해 지우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속은 채 은혜받은 그 신자에게는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당신의 눈물은 진짜였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셨다면, 만나신 것이다 — 하나님은 사기꾼 하나가 회선을 가로챈다고 끊길 만큼 연약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당신은 부당한 일을 당했다. 누군가 당신의 목자를 위조했고, 당신의 신뢰를 묻지도 않고 꺼내 썼다. 옳은 반응은 ‘하나님이 나에게 닿으실 수 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신앙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인격의 현존을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내게 두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가리키는 곳은 도구의 금지가 아니다. 오픈라벨 위약이 일러 주듯, 정직이 잃을 것은 없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투명하게 받되 사람이 자기 것으로 소화해 책임지고 전한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은, 속여야만 은혜받는 신앙보다 강하다. 고쳐야 할 것은 강단에서 도구를 치우는 일이 아니라, 강단에 ‘책임지는 사람의 얼굴’과 ‘진실’을 남겨 두는 일이다. 가짜로 전달된 은혜가 진짜일 수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아니라 경고다. 바로 그래서, 진짜를 가짜로 전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