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철학 · 종교

인간은 선보다 아름다움을 좇는다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불교가 해석한 악(惡), 그리고 아름다움이 어떻게 선을 이기는가

2026년 6월 1일읽는 데 약 16분

고대 그리스인은 ‘아름답고도 선한 사람’을 단 하나의 낱말로 불렀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os)와 선함을 뜻하는 아가토스(agathos)가 한 몸이라는 믿음이다. 그들에게 잘생긴 몸과 곧은 마음, 빼어난 형상과 옳은 행실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같은 탁월함이 겉과 속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아름다움은 곧 선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 믿음에는 처음부터 금이 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는 한 도시를 통째로 불태웠고, 정작 그리스 최고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들창코에 배불뚝이, 누구나 인정하는 추남이었다. 아름다움이 파멸을 부르고 추함이 지혜를 품을 수 있다면, 아름다움과 선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다. 둘은 갈라설 수 있다. 그리고 갈라선 순간, 인간의 마음 앞에는 오래된 물음이 놓인다. 아름다움과 선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마음은 어느 쪽을 따라가는가.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그 답을 내놓는다. 아름다움은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며, 거기서 신과 악마가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고. 더 섬뜩한 말은 그다음이다. 대다수 인간에게 아름다움은 소돔 안에 있다는 것 — 타락과 파멸 속에서도 인간은 기어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이끌린다는 고백이다.

아름다움은 신비로운 동시에 무서운 것이다. 거기서 신과 악마가 싸우며, 그 전쟁터는 인간의 마음이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중 드미트리의 독백을 옮김

“인간은 선보다 아름다움을 좇는다”는 도발적인 명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명제를 가늠하려면 먼저 그 짝이 되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대체 악(惡)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우리를 끌어내린다면, 그 ‘끌어내림’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글은 서양 철학, 기독교, 동양 유가(儒家), 그리고 불교 네 갈래가 악을 어떻게 풀이했는지 따라간다. 놀랍게도 출발점이 전혀 다른 이 네 전통은 한 결론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공통의 결론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왜 그토록 위험한지를 설명해 준다.

제1장아름다움과 선이 하나였던 시절

아름다움과 선이 갈라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려면, 먼저 둘이 본래 붙어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서양 사상의 첫머리에서 그 둘은 떨어져 있지 않았다. 플라톤과 그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진리(眞)·선(善)·아름다움(美)은 서로를 비추는 세 거울이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플라톤의 삼위(Platonic triad)’ 또는 ‘소크라테스적 삼위일체’라 불렀다. 참된 것은 선하고, 선한 것은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결국 참되다 — 이 셋은 각기 다른 봉우리가 아니라, 같은 산을 세 방향에서 본 모습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이 생각이 가장 아름답게 그려진다. 여사제 디오티마는 사랑(에로스)이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몸에 끌리지만, 이윽고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아름다운 마음과 제도와 학문으로 시선이 넓어지고,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 —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다다른다. 그 꼭대기에서 아름다움은 곧 선(善)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은 인간을 선으로 끌어올리는 첫 번째 계단이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더 높은 것으로 향하는 영혼의 본능이었다.

비유 — 하나의 흰빛

맑은 흰빛 한 줄기를 떠올려 보자. 그 자체로는 한 가지 빛이지만, 프리즘을 지나는 순간 빨강·초록·파랑으로 갈라진다. 고대인에게 진리·선·아름다움은 갈라지기 전의 그 흰빛이었다. 우리 눈에는 세 가지 색으로 보이지만, 본디 한 줄기에서 나온 한 빛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빛이 일단 갈라진 뒤에 생긴다. 세 줄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갈 때, 인간의 마음은 어느 빛을 따라 걸을 것인가. 이 물음이 이 글 전체를 관통한다.

본래 하나인 빛 善 = 美 = 眞 프리즘 진리 아름다움
진·선·미는 본래 한 줄기 빛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칼로카가티아는 아름다움·선·진리를 하나로 묶었다. 프리즘을 지나 세 색으로 갈리듯, 이 셋이 갈라진 뒤 인간의 마음이 어느 갈래를 따르는지가 모든 물음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사다리는 무너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추한 외모로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다고 여겨졌고, 이는 ‘아름다운 겉모습이 곧 선한 속’이라는 등식을 안에서부터 뒤흔들었다. 반대로 헬레네의 아름다움은 트로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아름다움이 영혼을 위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다면, 디오티마의 사다리는 위로도 아래로도 통하는 양방향 계단이 된다. 같은 아름다움이 어떤 이는 신으로, 어떤 이는 소돔으로 데려간다. 그렇다면 아래로 끌어내리는 그 힘, 곧 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2장서양 철학 — 악은 ‘없음’인가 ‘뒤집힘’인가

서양 철학사에서 악을 다룬 가장 영향력 있는 대답은, 악에서 실체를 빼앗는 것이었다. 4세기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뜻밖의 답을 내놓는다. 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나 힘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선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결여로서의 악(privatio boni, 선의 결핍)이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빈틈이 없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었고, 신이 만든 것은 모두 선하다. 그런데 악이 선이 아니라면, 악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이 모든 존재를 만들었는데 악은 만들지 않았다면, 악은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는 결론이 따라온다. 악은 선에 기생할 뿐 홀로 서지 못한다. 빛이 닿지 않은 자리가 어둠이듯, 선이 빠져나간 자리가 곧 악이다.

비유 — 어둠과 추위

어둠은 ‘검은 빛’이라는 별도의 물질이 아니다. 그저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추위 또한 ‘차가운 입자’가 따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열이 빠져나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둠을 퍼 나르거나 추위를 병에 담을 수는 없다. 그것들은 무언가의 ‘없음’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도 꼭 그러하다. 질병은 건강의 부재이고, 악덕은 미덕의 부재다. 병이 나으면 그 병은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진다.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악은 선이라는 천에 난 구멍이지, 그 자체로 짜인 또 하나의 천이 아니다.

있음 · being 결여
악은 선이라는 ‘있음’에 뚫린 구멍이다. 질병이 건강의 부재이고 어둠이 빛의 부재이듯, 악은 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이 없는 것’이다. 악은 선에 기생할 뿐 홀로 서지 못한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결여로서의 악(privatio boni)

이 발상은 천 년을 건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진다. 그는 존재(있음)와 선이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선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완전한 악이란 완전한 무(無),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순수한 악은 존재할 수 없다. 악마조차 ‘존재한다’는 한에서는 최소한의 선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여기서 나온다.

칸트 — 악은 새로운 힘이 아니라 순서를 뒤집는 것

18세기에 이마누엘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에서 신을 끌어들이지 않는, 서양 최초의 ‘세속적 악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한 근본악(根本惡, radikales Böse)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성향이지, 인간을 사로잡는 외부의 악마적 힘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행동할 때 언제나 두 가지 동기 중 하나를 따른다. 도덕법칙, 아니면 자기애(自己愛)다. 그런데 인간의 악은 도덕법칙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도덕법칙과 자기애의 순서를 뒤집는 데 있다.

즉 우리는 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선을 두 번째 자리에 놓는다.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내 이익을 먼저’ 하는 그 미세한 순서 바꿈이 악의 핵심이다. 악을 악이라서 택하는 존재 — 오직 악만을 위해 악을 행하는 자 — 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뿐이며, 칸트는 그런 ‘악마적 악’을 인간에게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악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올바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 곧 일종의 ‘뒤집힘(顚倒)’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없음’이 칸트에 와서 ‘뒤집힘’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악에서 고유한 실체를 빼앗는 발상은 그대로다.

아렌트 — 악은 괴물성이 아니라 생각 없음에서 온다

20세기에 한나 아렌트는 악의 무실체성에 가장 충격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보낸 행정 책임자에게서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관리’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인이 아니었다. 서류를 처리하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스스로는 그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 믿는 성실한 관료였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아렌트의 진단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악을 가능케 한 것은 거대한 이념이나 사악한 신념이 아니라 생각의 부재였다.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했다’.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는 사유의 능력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악은 무언가 강렬한 것의 ‘있음’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사유의 ‘없음’으로 나타난다. 평범한 사람도,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거대한 악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니체 — ‘악’이라는 범주 자체를 의심하라

같은 서양 전통 안에서도 프리드리히 니체는 정반대 방향으로 칼을 들이댄다. 그는 『선악의 저편』(1886)에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적 구성물이라고 본다. 그가 보기에 ‘악’이라는 딱지는 강자의 활력과 자긍심을 두려워한 약자들이 그것을 깎아내리기 위해 붙인 이름 — 이른바 ‘노예 도덕’의 산물이다. 니체의 결론은 ‘악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악이라는 범주를 의심하라’에 가깝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악에서 고정된 실체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아렌트까지,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은 한 가지를 집요하게 거부한다. 악에 그 자체의 두 발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악은 결여이거나(아우구스티누스), 순서의 뒤집힘이거나(칸트), 생각의 비어 있음이거나(아렌트), 아예 의심받아야 할 이름표(니체)다. 악은 언제나 무언가에 ‘딸려 오는’ 파생물이지, 스스로 빛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이 결론은 곧이어 보게 될 동양의 두 전통에서도 거의 그대로 되풀이된다.

제3장기독교 —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타락

기독교는 철학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악을 마주한다. 그 출발점은 하나의 곤혹스러운 물음, 곧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다. 신이 완전히 선하고 또 전능하다면, 세상의 악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신이 선하다면 악을 없애고 싶을 것이고, 전능하다면 없앨 수 있을 텐데, 악은 여전히 세상에 가득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기독교 신학의 오랜 숙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자유의지’였다. 신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었고, 악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 자유의지를 잘못 쓰면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가 악을 ‘질서가 어긋난 사랑(disordered love)’으로 본 데 있다. 인간은 본디 가장 높은 선(신)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데, 더 낮은 것 — 돈, 권력, 쾌락, 자기 자신 — 을 그보다 더 사랑할 때 사랑의 순서가 뒤틀린다. 악은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더 작은 것을 더 크게 사랑하는 ‘방향이 틀어진 사랑’이다. 칸트가 말한 ‘순서의 뒤집힘’의 신학적 원형이 여기에 이미 있다.

주목할 것은 악이 세상에 들어온 ‘방식’이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타락으로 이끈 것은 흉측하거나 역겨운 무엇이 아니었다. 금지된 열매는 ‘먹음직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된다. 인류 최초의 유혹은 추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통해, 혐오가 아니라 매력을 통해 작동했다. 악은 처음부터 끔찍한 얼굴이 아니라, 탐스럽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악은 추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음직한 모습으로 온다.

이 통찰이 가장 극적으로 응축된 것이 루시퍼의 형상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악의 기원으로 지목되는 타락 천사 루시퍼는, 본래 천사들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그 이름부터가 ‘빛을 나르는 자(光明者)’를 뜻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가 ‘신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에 떨어졌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상상력 속에서 악의 시작은 가장 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악은 아름다움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제 자신에게로 휘어 들어갈 때 태어난다.

비유 — 위조지폐

위조지폐가 시장에서 통용되려면 진짜 돈을 닮아야 한다. 누구도 한눈에 가짜인 줄 알아보는 종잇조각은 받지 않는다. 위조의 힘은 ‘진짜처럼 보이는 것’에서 나온다.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기에, 진짜의 모습을 빌려야만 사람을 속일 수 있다.

악도 그러하다. 악은 그 자체로는 사람을 끌 매력이 없다. 그래서 선과 아름다움의 모습을 모방함으로써만 우리를 부른다. 성경이 사탄을 두고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악은 언제나 위조된 아름다움이다.

그렇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아름다움이라는 전쟁터’는 단순한 시적 과장이 아니다. 같은 빛이 마돈나의 성스러움이 되기도 하고 소돔의 타락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움 자체가 선과 악 모두를 담는 그릇이기에, 아름다움은 신과 악마가 다투는 한복판이 된다. 인간이 아름다움에 이끌릴 때, 그는 위로 오르는 사다리를 밟고 있는지 아래로 떨어지는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다. 둘의 입구가 똑같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제4장동양 유가(儒家) —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동아시아 사상은 악을 우주적 실체로 다루기보다, ‘인간의 본성(性)’에서 출발하는 물음으로 던졌다. 전국시대의 두 거장,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경)와 순자(荀子, 기원전 310~238년경)는 같은 유가 안에서도 정반대의 출발점을 택했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아니면 본래 악한가. 이것이 동양철학사에서 가장 오래 논쟁된 물음, 성선설(性善說) 대 성악설(性惡說)이다.

맹자 — 사람에게는 선의 싹이 있다

맹자는 인간이 날 때부터 선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사단(四端), 곧 ‘네 가지 싹’이 그것이다.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 — 이 네 가지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덕으로 자라날 씨앗이다. 맹자의 유명한 예로, 누구든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을 보면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가슴이 철렁한다. 이 즉각적인 마음의 떨림이 바로 선이 본래부터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맹자에게 악은 본성에 깃든 무엇이 아니라, 본성의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상태다. 나쁜 환경과 그릇된 양육이 선한 싹을 짓밟고 시들게 할 때 악이 생긴다. 그러니 사람이 악해졌다 해서 본성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싹이 자라지 못하게 만든 환경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도 악은 ‘있음’이 아니라 선의 ‘덜 자람’, 곧 일종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없음’과 멀지 않다.

순자 — 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순자는 정반대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욕망을 따르는 존재이며, 그대로 두면 다툼과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렇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가. 순자의 답은 명쾌하다. 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 인위적 노력을 (僞)라 불렀다 —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빚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성인(聖人)이 만든 예(禮)와 배움을 통해, 인간은 거친 본성을 깎고 다듬어 비로소 선해진다.

순자가 남긴 한 통찰은 이 글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는다. 그는 인간이 ‘선해지려 애쓴다’는 사실 자체가 본성이 선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추한 사람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유함을 바라며, 좁은 사람이 넓음을 동경하듯 — 무릇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밖에서 구한다. 우리가 그토록 선을 갈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 안에 본래 충분치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조차 ‘결핍’에서 나온다는 이 통찰은, 인간이 왜 끊임없이 무언가를 좇는 존재인지를 날카롭게 짚는다.

출발점은 정반대였지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의외로 가깝다. 맹자에게도 순자에게도 악은 우주를 떠도는 악마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자라지 못한 본성이거나(맹자) 다듬어지지 않은 본성이다(순자). 그리고 해법 또한 같다. 악령을 쫓아내는 의식이 아니라, 수양(修養)과 교화(敎化) —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일이다. 악은 물리쳐야 할 외부의 적이 아니라, 가꾸지 못한 내면의 정원이었다.

도가(道家) — 선과 악은 함께 생겨난 한 쌍

한편 도가는 더 근본적인 자리에서 선악의 구분 자체를 문제 삼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추함이 생겨나고, 모두가 선을 선으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악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세우는 순간 그 그림자로 다른 하나가 함께 태어나는 한 쌍이라는 것이다. 도(道)는 이런 인위적 구분 이전의 자리,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의 자리에 있다. ‘악이 무엇이다’를 정의하기보다 ‘선악이라는 잣대 자체’를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도가는 니체보다 이천 년 앞서 비슷한 의심에 도달한 셈이다.

제5장불교 — 악은 없고, 어리석음만 있다

악에서 실체를 빼앗는 흐름이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곳이 불교다. 엄밀히 말하면 불교에는 ‘선 대(對) 악’이라는 형이상학적 대립 구도가 거의 없다. 불교가 나누는 것은 선(善)과 악(惡)이 아니라, (善, kusala·이로움)과 불선(不善, akusala)이다. 여기서 ‘아쿠살라(akusala)’의 본뜻은 ‘악함’이 아니라 ‘서투름·미숙함’이다. 해로운 행위는 신이 정한 법을 어긴 ‘죄’라기보다, 실상을 모르고 저지른 ‘서툰 동작’에 가깝다. 마치 솜씨 없는 목수가 제 손을 내려치듯, 어리석음이 빚어낸 헛디딤이 곧 해악이다.

그렇다면 그 헛디딤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불교는 모든 해로운 마음을 세 뿌리로 환원한다. 바로 삼독(三毒)이다. 탐(貪, 탐욕·집착), 진(瞋, 성냄·미움), 치(癡, 어리석음)가 그 셋이다. 전통적으로 각각 수탉·뱀·돼지로 그려져, 윤회의 수레바퀴 한가운데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돈다. 그리고 이 셋 가운데 가장 깊은 뿌리는 치(癡), 곧 무명(無明, 산스크리트어 avidya·실상을 보지 못함)이다. 탐욕과 분노조차 결국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자라난다. 우리가 저지르는 악은, 무언가 사악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지혜가 ‘없어서’ 생기는 결과다.

癡 (치) 無明 · 어리석음 [ 돼지 ] 貪 (탐) 탐욕 · 집착 [ 수탉 ] 瞋 (진) 성냄 · 미움 [ 뱀 ] 뿌리 뿌리
삼독(三毒)과 그 뿌리인 무명(無明). 모든 해로운 마음은 탐(貪)·진(瞋)·치(癡) 셋으로 환원되고, 그 가장 깊은 뿌리는 실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불교는 이를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 akusala·미숙함)’이라 부른다.
비유 — 밧줄과 뱀

해 질 무렵 어둑한 길에 밧줄 하나가 떨어져 있다. 지나던 사람이 그것을 뱀으로 착각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 곁의 사람을 떠밀어 넘어뜨린다. 그러나 거기에 뱀은 없었다. 있었던 것은 밧줄 하나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뿐이다.

불교가 악을 보는 방식이 꼭 이러하다. 실상(밧줄)을 못 본 무명이 공포(진)와 회피(탐)를 낳고, 그렇게 일어난 행동이 남을 해친다. 악은 따로 ‘있는’ 무엇이 아니라, 못 봄에서 흘러나온 결과다. 그러니 처방도 분명하다. 악마를 쫓는 것이 아니라, 등불을 밝혀 밧줄이 밧줄임을 보는 것 — 곧 지혜(般若)다.

여기에 업(業, 카르마)과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더해진다. 삼독에서 비롯된 행위는 그 자체로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를 거두는 데는 바깥에서 벌을 내리는 심판자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악은 스스로 굴러가는 어리석음의 연쇄이고, 그 사슬을 끊는 길은 깨달음, 곧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다. 불교의 한 가르침이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근본 문제는 악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이 나쁘게 굴수록, 그는 더 사악한 것이 아니라 더 무지한 것이다.

제6장종합 — 악은 아름다움의 가면을 쓴다

네 갈래의 전통을 따라온 끝에, 출발점이 그토록 달랐음에도 모두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느 전통도 악에 ‘고유한 실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서양 철학에서 악은 결여이자 순서의 뒤집힘이며 생각의 비어 있음이었다. 기독교에서 악은 신이 만든 또 하나의 힘이 아니라 타락한 선, 방향이 틀어진 사랑이었다. 유가에서 악은 자라지 못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본성이었고, 불교에서 악은 실상을 보지 못하는 무명의 그림자였다.

서양 철학 결여 · 전도(顚倒) 기독교 타락한 선 · 틀어진 사랑 유가 (儒) 본성의 일탈 · 방치 불교 (佛) 무명(無明) · 불선 악은 실체가 없다 결여 · 왜곡 · 파생일 뿐 — 모두 ‘선의 그림자’ 그래서 제 얼굴이 없다 악은 美의 얼굴을 빌려 우리를 부른다
네 전통은 ‘악에는 고유한 실체가 없다’는 한 결론으로 수렴한다. 그리고 바로 그 결론이 다음 명제로 이어진다. 제 얼굴이 없는 악은, 아름다움의 얼굴을 빌려야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이 공통의 결론은 사변적인 합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장 하나의 결정적인 함의로 이어진다. 만약 악에 제 얼굴이 없다면, 악은 결코 ‘악으로서’ 우리를 유혹할 수 없다. 추함을 추함으로 내미는 것에, ‘나는 선의 결여요’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존재에 누가 마음을 빼앗기겠는가. 그 자체로는 텅 비어 있기에, 악은 반드시 무언가의 얼굴을 빌려야 한다. 그리고 악이 빌리는 얼굴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이 글이 따라온 모든 장면이 그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뱀이 내민 열매는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떨어진 천사 루시퍼는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헬레네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도스토옙스키의 드미트리는 대다수 인간이 소돔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고백했다. 악은 한 번도 추한 모습으로 정면에서 다가온 적이 없다. 늘 가장 아름다운 입구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보다 아름다움을 좇는다”는 도발은 옳지만, 그 뜻은 처음 들릴 때와 다르다. 이 말은 인간이 악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 그런 선택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악은 선택할 만한 무엇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좇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움이다. 다만 그 아름다움이 선에서 떨어져 나온 탓에, 아름다움을 좇는 그 발걸음이 곧 선에서 멀어지는 발걸음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악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모습을 한 아름다움을 택한다.

그렇다면 왜 아름다움은 그 순간 선을 이기는가. 아름다움은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며 말이 필요 없다. 그것은 판단보다 먼저 우리를 친다. 한눈에 보는 속도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반면 선은 흔히 멈춤을 요구한다 — 아렌트가 말한 ‘생각’, 곧 잠시 멈춰 따져 보고,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는 사유의 시간을. 아름다움이 보는 속도로 유혹하는 동안, 선은 생각하는 속도로 설득해야 한다. 그 둘 사이의 시차(時差) 안에서 마음은 이미 움직여 버린다. 그 시차야말로 신과 악마가 다투는 전쟁터다.

아름다움은 보는 속도로 유혹하고, 선은 생각하는 속도로 설득한다. 그 시차 안에서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통의 결론은 아름다움이 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플라톤의 사다리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선으로 오르는 첫 계단이라고 가르쳤다. 칼로카가티아는 아름다움과 선을 한 호흡 안에 담았다. 네 전통이 한목소리로 경고하는 것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부러진 사다리 — 선에서 끊겨 나와 오직 자기 자신만을 가리키는 아름다움이다. 그 끊김이야말로, 열매가 그저 ‘먹음직스러운’ 것이 될 수 있고, 천사가 빛나면서도 추락할 수 있으며, 마음이 소돔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조용한 조건이다.

한 줄기였던 흰빛은 이미 갈라졌다. 진리·선·아름다움은 더 이상 한 단어로 불리지 않는다. 네 전통이 남긴 물음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기를 멈출 것인가가 아니라 — 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아름다움이, 한때 자신과 한 몸이었던 선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그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위로 오르는 첫 계단이다. 그 기억이 끊긴 자리에서, 아름다움은 가장 빛나는 추락의 입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