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 종교사
기독교 이단의 역사
정통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세기 영지주의에서 4세기 아리우스 논쟁, 중세의 카타리파와 종교재판, 16세기 종교개혁, 그리고 20세기 학계의 재해석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약 2천 년에 걸쳐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이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을 둘러싼 깊은 사상의 역사인 동시에,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들어가며‘이단’이라는 말
오늘날 ‘이단’은 곧장 단죄의 어감을 띤다. 그러나 이 말의 뿌리는 중립적이었다. 이단의 어원인 그리스어 ‘하이레시스(hairesis)’는 본래 ‘선택’ 또는 ‘선택의 결과로 묶인 무리’를 뜻했다. 고대 세계에서 이 단어는 어떤 철학 학파나 의학 학파에 속한다는 정도의 가치중립적 표현이었다. 스토아학파에 속하든 에피쿠로스학파에 속하든, 그것은 각자가 ‘선택’한 사상의 집이었을 뿐, 옳고 그름의 낙인은 아니었다.
이 말이 부정적 의미로 굳어진 것은 초기 기독교 문헌 속에서였다. 신약성서에서도 이 단어는 이미 ‘분파’나 ‘당파’를 가리키며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경계의 뉘앙스를 담기 시작했다. 2세기 후반,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Irenaeus)가 『이단 반박(Against Heresies)』을 저술하면서 ‘하이레시스’는 비로소 ‘그릇된 가르침’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이단’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잘못된 믿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단에 관한 정보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단죄한 반대자들의 기록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패배한 쪽의 문헌은 불태워지거나 잊혔고, 승리한 쪽의 묘사만 남았다. 그러므로 이단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어진 거울을 통해 사라진 목소리를 추정하는 일에 가깝다.
이단을 이해하려면 비슷해 보이는 몇 가지 개념과 구분해 두어야 한다. 아래 그림은 이 글 전체에서 반복될 네 가지 경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이 따라가려는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정통과 이단은 시간 순서대로 ‘먼저 옳은 것이 있고 나중에 그것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오랜 논쟁의 과정에서 서로를 규정하며 함께 빚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도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또렷이 정의해야 했다. 정경(正經, 성서의 목록)과 신경(信經, 신앙고백문), 그리고 교회의 권위 구조 자체가 이단과의 다툼 속에서 단단해졌다.
언어학에는 “언어란 군대와 해군을 가진 방언이다”라는 유명한 농담이 있다. 표준어와 사투리를 가르는 것은 어떤 객관적 우열이 아니라, 어느 쪽이 국가의 힘을 등에 업었느냐는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관계도 이와 닮은 데가 있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교리 논쟁은 더 이상 신학교의 토론에 머물지 않고 황제의 권력과 얽혔다. 어떤 의미에서 정통이란, 결국 ‘이긴 이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정통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 정통으로 ‘공인’되는 과정에는 사상만이 아니라 권력이 깊이 개입했다는 뜻이다.
1부 · 1–3세기초대교회의 도전: 정체성의 형성
예수의 죽음 이후 첫 두 세기 동안, ‘기독교’는 아직 하나의 또렷한 교리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경쟁하는 여러 해석의 묶음에 가까웠다. 누가 예수였는가, 그는 신이었는가 인간이었는가, 구약의 창조주는 그가 ‘아버지’라 부른 신과 같은 존재인가 — 이런 근본 물음들에 대해 공동체마다 다른 대답이 떠돌았다. 초기의 ‘이단’들은 바로 이 대답들 가운데 결국 주류에서 밀려난 것들이었다.
영지주의(Gnosticism): 물질이라는 감옥
2세기에 지중해 세계, 특히 이집트를 중심으로 번진 가장 강력한 흐름이 영지주의다. 영지주의는 단일한 종파라기보다, 유대교의 묵시 사상과 플라톤 철학, 여러 신비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뒤섞인 사상의 가족에 가까웠다. 그 공통된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물질 세계는 본래 악하거나 결함이 있으며, 참된 신의 직접 창조물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urge)’라 불리는 열등한 창조신의 작품이라는 것. 둘째, 구원은 믿음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노시스(gnosis)’, 곧 자신의 참된 기원에 관한 비밀스러운 ‘앎’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인간의 본질은 물질의 몸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영적 불꽃이었다. 구원이란 이 불꽃이 자신이 본래 신적인 충만의 세계(플레로마, Pleroma)에서 왔음을 ‘기억’해 내고 물질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발렌티누스(Valentinus)나 바실리데스(Basilides) 같은 교사들은 정교한 우주론을 펼쳤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잘못 만들어진 그릇’의 비유로 떠올릴 수 있다. 어떤 미숙하거나 악의적인 도공이 일그러진 항아리를 빚었는데, 그 안에 우연히 진짜 보석 가루가 갇혔다고 해 보자. 항아리(물질의 몸)는 깨뜨려 마땅한 결함품이고, 가치 있는 것은 그 안의 보석 가루(영혼)뿐이다. 구원이란 보석을 항아리에서 꺼내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일이며, 그 열쇠는 항아리의 진짜 정체에 관한 ‘비밀 지식’이다.
정통 진영이 영지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단지 우주론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물질을 악으로 보는 관점은 창조의 선함,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 그리고 몸의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뼈대를 통째로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만 아는 비밀 지식’이라는 발상은, 누구에게나 열린 복음이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마르키온(Marcion): 구약을 잘라낸 사람
또 한 명의 결정적 인물은 마르키온이다. 흑해 연안 시노페 출신으로 부유한 선주(船主)였던 그는 약 144년경 로마에서 교회와 결별했다. 마르키온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구약성서의 신, 곧 율법과 심판의 신은 신약의 예수가 계시한 사랑의 아버지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창조주는 변덕스럽고 잔혹한 열등한 신이었고, 예수는 그 신이 만든 세계를 구원하러 온 전혀 다른 ‘낯선 신’의 사자(使者)였다.
이 논리에 따라 마르키온은 구약 전체를 폐기했고, 신약 가운데서도 자신이 보기에 유대적 색채가 짙은 부분을 잘라내어, 누가복음의 축약본과 바울 서신 열 편만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성서’를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작업이 정통 교회를 자극했다. 마르키온이 ‘축소된 정경’을 제시하자, 교회는 비로소 ‘무엇이 우리의 정경인가’를 명시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네 복음서를 모두 보존하고 구약을 신약과 함께 끌어안기로 한 결정은, 상당 부분 마르키온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가현설·에비온파: 신과 인간 사이의 진자
초기 교회가 씨름한 또 다른 축은 ‘예수는 얼마나 신이고 얼마나 인간인가’였다. 이 물음에서 두 극단이 나타났다. 한쪽 끝에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있었다. 그리스어 ‘도케오(보이다)’에서 온 이 이름처럼, 가현설은 예수의 육체와 고난이 실재가 아니라 겉보기일 뿐이라고 보았다. 참된 신이 더러운 물질의 몸을 입고 실제로 죽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정반대 끝에는 에비온파(Ebionites)가 있었다. 유대 기독교의 한 갈래였던 이들은 율법 준수를 고수하면서, 예수를 신이 아니라 메시아로 선택받은 의로운 ‘인간’으로 보았다. 한쪽이 예수의 인성을 지웠다면, 다른 한쪽은 그의 신성을 부정한 셈이다. 정통은 이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길, 곧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이라는 역설을 지키려 했고, 이 긴장은 다음 장에서 보듯 4세기와 5세기의 거대한 공의회 논쟁으로 폭발한다.
몬타누스주의·양태론·양자론
2세기 중엽(대략 156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서 몬타누스(Montanus)가 ‘새 예언(New Prophecy)’ 운동을 일으켰다. 그와 두 여예언자는 성령이 자신들을 통해 직접 말한다고 주장하며 임박한 종말과 엄격한 금욕을 설파했다. 흥미롭게도, 영지주의가 교회로 하여금 정경의 ‘범위’를 고민하게 했다면, 몬타누스주의는 ‘계시는 이미 사도들로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교회는 사도 시대의 기록에 최종 권위를 두는 쪽으로 기울었다. 한때 정통 변증가였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가 말년에 몬타누스주의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정통과 이단의 경계가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도 움직일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의 일치를 강조하다 삼위(三位)의 구별을 지워 버린 흐름도 있었다. 양태론(樣態論, Modalism), 특히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이름을 딴 사벨리우스주의는, 아버지·아들·성령이 별개의 위격이 아니라 한 신이 상황에 따라 쓰는 세 가지 ‘가면’ 혹은 양태(樣態)일 뿐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은 예수가 본래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세례나 부활의 순간에 신의 ‘양자’로 들어 올려졌다고 보았다. 이 모든 시도는 결국 같은 난제, 곧 ‘하나의 신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의 역설을 어떻게 말로 옮길 것인가를 둘러싼 분투였다.
초대교회의 이단들은 교회가 풀어야 할 시험지였다. 그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의 정경과 신경, 그리고 권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2부 · 4–7세기대공의회의 시대: 신과 그리스도를 정의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무렵 기독교가 사실상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교리 논쟁은 이제 박해받는 소수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통일을 좌우하는 정치 사안이 되었다. 황제는 교회의 분열을 통치의 위협으로 보았고, 그래서 직접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를 ‘정리’하려 했다. 이른바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열린 이 시기에, 기독교는 신과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 교리를 오늘날의 형태로 확정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쪽은 정통이 되고 다른 쪽은 이단이 되었다.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공의회(325): ‘한 글자’의 전쟁
4세기 최대의 폭풍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지키려는 동기에서, 성자(아들)는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성부(아버지)에 의해 ‘창조된’ 최고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유명한 표어였다. 이 견해에서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 존재였지, 성부와 동등한 참 하느님은 아니었다.
이 논쟁이 제국을 갈라놓자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 주교들을 불러 모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교회를 대표하려 한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성자가 성부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곧 ‘동일 본질’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반대 진영은 ‘동일 본질’ 대신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곧 ‘유사 본질’을 제안했다. 두 단어의 차이는 그리스 문자 이오타(ι), 즉 단 한 글자였다.
‘동일(homo-ousios)’이냐 ‘유사(homoi-ousios)’냐의 다툼은, 알파벳 한 글자가 문장의 뜻을 통째로 바꾸는 상황과 같다. ‘그는 신과 같다(같은 부류다)’와 ‘그는 신과 동일하다(같은 존재다)’ 사이에는, 글자 하나의 거리지만 신학적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 논쟁을 두고 후대 사람들은 “단 한 글자(이오타) 때문에 제국이 흔들렸다”고 말한다.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니케아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역사는 정반대였다. 니케아 이후 수십 년 동안 아리우스 계열은 오히려 동방 제국의 다수파로서 사실상의 ‘정통’ 행세를 했다. 니케아 신앙을 끝까지 옹호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여러 황제에 의해 다섯 차례나 유배되었다. 그가 죽을 무렵까지도 자신의 견해가 최종 승리할지는 불확실했다. 정통은 단번의 선포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길고 굴곡진 권력 다툼의 끝에서야 굳어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성령과 삼위일체의 완성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한 제2차 세계 공의회는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하는 한편, 두 가지 문제를 더 정리했다. 하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였다.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로고스가 인간의 ‘이성적 영혼’ 자리를 대신했다고 보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을 훼손했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신성 문제였다. 성령마저 피조물로 보려던 흐름(마케도니우스주의)을 물리치면서, 공의회는 성령 역시 성부·성자와 함께 예배받는 참 하느님임을 확정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골격이 이때 완성되었다.
네스토리우스 논쟁과 에베소 공의회(431): 마리아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삼위일체 문제가 가라앉자, 이번에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라는 그리스도론(기독론) 문제가 떠올랐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신성과 인성을 너무 또렷이 갈라 놓아,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두 위격(인격)’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쟁은 뜻밖에도 마리아의 호칭에서 터졌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신을 ‘낳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테오토코스’ 논쟁의 핵심은 다음 물음으로 옮겨 볼 수 있다. 어머니는 ‘몸’을 낳는가, 아니면 ‘한 사람’을 낳는가? 우리는 보통 “저 사람은 자기 어머니의 두뇌가 아니라 어머니가 낳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낳은 것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한 인격 전체다.
정통 진영(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의 논리도 이와 같았다. 마리아가 낳은 것이 ‘인간 예수라는 부분’이 아니라 ‘신이자 인간인 한 인격’이라면, 그를 낳은 어머니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일관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논쟁은 마리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가 ‘하나의 인격’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가 주도한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테오토코스’를 정통으로 확정했다. 네스토리우스는 폐위되어 동방으로 밀려났고, 그의 신학을 따른 교회는 페르시아를 거쳐 동쪽으로 뻗어 나가, 훗날 중국 당나라에까지 이른 ‘동방 교회(경교)’의 뿌리가 되었다. 이단으로 단죄된 흐름이, 정통 세계의 바깥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 전통을 이룬 것이다.
단성론과 칼케돈 공의회(451): 두 본성, 한 위격
네스토리우스가 ‘너무 갈랐다’면, 그 반작용으로 ‘너무 합치는’ 흐름이 나타났다.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에우티케스(Eutyches)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결국 ‘하나의 본성(physis)’만 남는다고 가르쳤다. 이를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이라 한다. 449년 에베소에서 열린 회의는 에우티케스를 옹호했으나, 로마 주교 레오 1세(Leo I)는 이를 무효라며 ‘강도들의 회의(라트로키니움)’라 불렀다.
그래서 451년, 더 큰 규모로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레오 1세가 보낸 신학 문서(‘레오의 교서’)를 바탕으로,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이며,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변하지도, 나뉘지도, 분리되지도 않은 채’ ‘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네스토리우스(둘로 나눔)와 에우티케스(하나로 합침)라는 두 극단 사이의 좁은 균형점을 못 박은 것이다.
그러나 칼케돈의 결정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낳기도 했다. 이집트(콥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의 상당수 교회는 칼케돈의 ‘두 본성’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된 본성’을 이룬다고 보는 길을 택했다. 이들은 오늘날 ‘오리엔트 정교회’로 불리며 1,500년이 넘도록 별도의 전통을 이어 왔다. 과거에는 이들을 ‘단성론’이라 낮춰 불렀지만, 오늘날 학계는 ‘하나로 흡수’가 아니라 ‘하나로 결합’을 강조하는 그들의 입장을 더 정확히 가리키기 위해 ‘합성론(미아피지티즘, Miaphysitism)’이라는 중립적 용어를 선호한다.
단의론과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
분열을 봉합하려는 정치적 타협에서 마지막 논쟁이 불거졌다. 칼케돈을 거부한 동방 교회들을 끌어안기 위해, 7세기 일부 신학자와 황제는 ‘그리스도에게 본성은 둘이지만 의지(意志)는 하나’라는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을 제안했다. 그러나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를 비롯한 이들은, 온전한 인성에는 온전한 ‘인간의 의지’가 따라야 한다고 맞섰다. 680–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리스도에게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라는 ‘두 의지’가 있으되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에 온전히 순종한다고 확정함으로써, 칼케돈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3부 · 4–6세기은총과 인간: 서방 라틴 교회의 논쟁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두고 다투는 동안, 라틴어를 쓰는 서방 교회는 다른 종류의 물음에 사로잡혔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매여 있는가. 이 논쟁의 중심에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있었고, 그가 남긴 답은 이후 천 년의 서방 신학을, 나아가 16세기 종교개혁의 논쟁까지 규정했다.
도나투스 분쟁: 거룩하지 못한 손이 베푼 성례는 유효한가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 일부 성직자는 목숨을 부지하려 성서를 관헌에 넘겨주었다(이들을 ‘배반자(traditores)’라 불렀다). 박해가 끝나자 북아프리카에서 격렬한 물음이 일었다. 한때 신앙을 ‘배반한’ 성직자가 집전한 세례나 성찬 같은 성례(聖禮, sacrament)는 과연 유효한가? 도나투스파(Donatists)는 단호히 ‘무효’라고 답했다. 더럽혀진 손에서 거룩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은 훗날 서방 성례론의 초석이 되었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의 도덕적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즉 성례는 집전자가 거룩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유효하다. 이 논쟁은 교리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순수성’을 둘러싼 분열에 가까웠고, 그래서 도나투스 문제는 흔히 ‘이단’이라기보다 ‘분열(스키즘)’의 대표 사례로 다루어진다. 정통과 이단, 그리고 분열의 경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미끄러운지를 잘 보여 주는 장면이다.
펠라기우스 논쟁: 익사자는 스스로 헤엄칠 수 있는가
더 깊은 파장을 남긴 것은 펠라기우스(Pelagius) 논쟁이다. 영국 출신의 금욕적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신이 무언가를 ‘명령’한다면 인간에게는 그것을 ‘행할 능력’도 있어야 했다. 이 논리에서 그는 아담의 죄가 후손 모두에게 유전된다는 원죄(原罪, original sin) 개념을 약화시켰고, 인간은 본성상 선을 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반대 지점에 섰다. 인간은 아담 이래 죄에 깊이 물들어 자기 힘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두 입장의 차이는 ‘물에 빠진 사람’의 비유로 가장 선명해진다. 펠라기우스에게 인간은 헤엄을 잘 못 칠 뿐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 “이쪽으로 헤엄쳐 오라”고 길을 가리켜 주기만 하면(은총은 도움이자 안내일 뿐), 그는 스스로 팔다리를 저어 해변에 닿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은 이미 물에 가라앉아 숨이 끊긴 사람이다. 길을 가리켜 주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끌어내 다시 살려 내야 한다(은총은 도움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 구원에서 인간이 ‘먼저 한 걸음’을 뗄 수 있느냐 — 바로 이 한 걸음의 유무가 두 신학을 갈랐다.
펠라기우스주의는 416년과 418년 북아프리카 공의회들과 카르타고 공의회(418)에서 단죄되었고, 교황 조시무스도 같은 해 이를 정죄했다. 이 단죄는 431년 에베소 세계 공의회에서 다시 추인되었다. 다만 후대 연구는, 펠라기우스 본인의 실제 입장이 반대자들의 묘사보다 온건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단죄된 ‘펠라기우스주의’는 상당 부분 그의 적들이 그려 낸 초상이었을 수 있다.
논쟁은 곧 더 미묘한 형태로 이어졌다. 갈리아(오늘날 남프랑스) 지역의 일부 수도사들은 원죄와 은총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향한 ‘첫 마음(믿음의 시작)’만큼은 인간이 먼저 낼 수 있다고 보았다. 후대에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 불린 이 입장은 529년 오랑주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다만 오랑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엄격한 주장(이중 예정 등)까지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은, 일종의 ‘완화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 정리되었다.
4부 · 8–11세기형상과 분열: 동방의 논쟁과 동서 교회의 갈라짐
성상 파괴 논쟁: 이미지는 우상인가 통로인가
8세기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툼이 벌어졌다. 그리스도와 성인의 모습을 그린 ‘성상(이콘, icon)’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성상 파괴(이코노클래즘, Iconoclasm) 논쟁이다. 레오 3세 황제는 730년 무렵부터 성상 파괴 정책을 폈고, 성상을 옹호하는 이들과 파괴하는 이들 사이에 한 세기에 걸친 충돌이 이어졌다.
성상 옹호자들은, 이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할 뿐이며, 보이지 않는 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몸’을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형상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세계 공의회)는 성상 공경을 정통으로 복원했다. 짧은 재발 끝에, 843년 비잔티움 교회는 성상 공경의 최종 승리를 ‘정통의 승리(Triumph of Orthodoxy)’로 기념했다.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이 오늘날까지 신앙의 중심에 놓이게 된 배경이다.
필리오케와 1054년의 분열: 이단인가, 분열인가
한편 라틴 서방과 그리스 동방은 수 세기에 걸쳐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신학적 쟁점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이 ‘필리오케(Filioque)’ 문제였다. 서방 교회는 니케아 신경의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구절에 “그리고 성자에게서도(필리오케)”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동방은 신경을 일방적으로 고친 것 자체를 월권으로, 그 내용을 신학적 오류로 보았다. 여기에 교황의 보편적 권위, 성찬에 쓰는 빵의 종류 같은 쟁점이 겹쳤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교황의 특사가 서로를 파문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흔히 이 해를 동서 교회 분열(대분열, Great Schism)의 상징적 기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1054년의 파문은 갑작스러운 단절이라기보다, 오래 진행된 소원함이 표면으로 드러난 한 장면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교회가 서로를 ‘이단’이라 부를지 ‘분열한 형제’라 부를지를 두고 오늘날까지 미묘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같은 차이를 누구는 교리의 오류(이단)로, 누구는 조직과 관할의 분리(분열)로 규정한다 — 이단의 역사가 끊임없이 마주치는 바로 그 경계의 문제다.
5부 · 12–15세기중세의 이단: 가난, 이원론, 그리고 종교재판
고대의 거대한 교리 논쟁이 가라앉은 뒤, 서유럽에서는 약 500년 동안 굵직한 이단이 비교적 드물었다. 그러다 12세기, 도시가 성장하고 상업이 살아나며 글을 읽는 평신도가 늘어나자, 부유하고 권세 있는 교회를 향한 불만이 새로운 운동들로 분출했다. 중세의 이단은 추상적 교리보다, 흔히 ‘가난’과 ‘성서’, 그리고 ‘교회의 부패’를 둘러싼 것이었다.
보고밀파와 카타리파: 되살아난 이원론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보고밀(Bogomil)이라는 사제의 이름을 딴 보고밀파가 일어났다. 이들은 선한 영의 신과 악한 물질의 세계가 대립한다는 이원론을 가르쳤는데, 이는 멀리 고대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메아리였다. 이 사상은 발칸을 거쳐 서유럽으로 전해졌고, 12세기 남프랑스에서 카타리파(Cathars)로 꽃피었다. ‘카타리’는 그리스어로 ‘정결한 자들’을 뜻하며, 이들의 강력한 거점이었던 도시 알비(Albi)의 이름을 따 ‘알비파(Albigensians)’로도 불린다.
카타리파는 물질 세계를 악한 신(혹은 타락한 천사)의 작품으로 보았고, 따라서 육식·결혼·재산 같은 물질적 얽힘에서 벗어나는 엄격한 금욕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완전자(Perfecti)’라 불린 금욕적 지도자 집단과, 평범한 ‘신자(credentes)’를 구분했다. 검소하고 청빈하게 살며 남녀를 대등하게 대한 완전자들의 모습은, 부유하고 권위적인 가톨릭 성직자에게 환멸을 느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끌었다.
카타리파의 이원론은 ‘두 왕국이 벌이는 전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빛과 영의 왕국, 그리고 어둠과 물질의 왕국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인간은 적국(물질의 몸)에 사로잡힌 포로다. 신앙생활이란 적국의 보급(육신의 욕망)을 끊고, 포로가 본래 어느 나라 백성인지를 되새기며 본국(영의 왕국)으로 탈출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구도는 정통 기독교의 핵심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통은 물질 세계를 ‘선한 신의 선한 창조’로 보고, 신이 그 물질의 몸을 직접 입었다(성육신)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가 남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에서 귀족의 비호 아래 번성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09년 이들을 겨냥한 십자군을 일으켰다. 1209년부터 1229년까지 이어진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은 같은 기독교 세계 안의 ‘이단’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대규모 십자군이었다. 전쟁은 처참했다. 1209년 베지에 함락 때 가톨릭 신자와 이단을 가리지 않고 도시민이 학살당했고, 그 잔혹함을 두고 “모두 죽여라, 누가 그분의 백성인지는 신이 가려내실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이 발언의 진위는 논란이 있다). 일부 역사가는 이 십자군을 사실상의 집단 학살로 규정한다.
군사적 진압만으로 이단을 뿌리 뽑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교회는 13세기에 들어 이단을 색출·심문하기 위한 상설 기구, 곧 중세 종교재판(인퀴지션, Inquisition)을 제도화했다. 새로 생긴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설교와 심문의 주역을 맡았다. 십자군과 종교재판이 맞물리면서 카타리파는 14세기 중엽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재판은 이렇게 이단 진압의 ‘상시 행정’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수백 년간 유럽 곳곳에서 이어진다.
발도파: 살아남은 이단
비슷한 시기, 1170년대 리옹의 부유한 상인 피에르 발도(Peter Waldo)는 전 재산을 버리고 청빈한 설교자의 삶을 택했다. 그를 따른 ‘리옹의 가난한 자들’, 곧 발도파(Waldensians)는 평신도가 성서를 일상어로 읽고 직접 설교할 권리를 주장했다. 교리상의 급진성보다는, ‘평신도 설교’라는 권한 침해와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이 문제였다. 이들은 곧 이단으로 단죄되어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발도파는 알프스 산악 골짜기로 숨어들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개신교 진영과 손을 잡았다. 발도파 교회는 박해받은 중세 이단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는 사례다. 단죄된 모든 흐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위클리프와 후스: 종교개혁의 새벽
14세기 후반, 옥스퍼드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교황의 권위와 화체설(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실체’가 바뀐다는 교리), 그리고 교회의 막대한 부를 비판하며 성서를 영어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롤라드(Lollards)’라 불렸다. 위클리프는 1384년 자연사했지만,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를 사후에 이단으로 단죄하고 저작을 금했으며, 1428년에는 그의 유골을 파내어 불태워 강물에 뿌리게 했다.
위클리프의 글에 깊이 감화된 인물이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얀 후스(Jan Hus)였다. 프라하 대학 총장이자 설교자였던 후스는 성직자의 부패와 면벌(면죄)을 비판했다. 그는 황제의 ‘신변 안전 보장’을 약속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했으나, 도착하자마자 투옥되었고 끝내 견해 철회를 거부한 채 1415년 7월 6일 화형당했다. 안전 보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공의회 자체가 정통/이단의 권력 문제를 압축한 무대였다. 당시 교회에는 로마·아비뇽·피사 계열로 갈린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이 분열을 수습하고 새 교황을 세우는 한편, 위클리프와 후스를 단죄했다. 후스의 처형은 보헤미아에서 거센 반란(후스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100년 뒤 루터가 등장할 길을 닦았다. 한 시대의 ‘이단’이 다음 시대의 ‘개혁의 선구자’로 기억이 뒤바뀌는, 익숙한 역전이 여기서도 일어난다.
6부 · 16–17세기종교개혁: 누가 이단인가
1517년 이후 루터와 칼뱅이 일으킨 종교개혁은 ‘이단’이라는 개념 자체를 뒤흔들었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루터(1521년 파문)와 칼뱅은 명백한 이단이었다. 그러나 개혁 진영은 자신들이야말로 부패한 교회가 잃어버린 ‘본래의 정통’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유럽에는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복수의 교회가 공존하게 되었다. 무엇이 정통인가라는 물음에, 더 이상 단 하나의 권위가 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단’은 어떤 사상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이름이었다. 같은 신념이 한 도시에서는 정통이고 이웃 도시에서는 사형감이었다.
급진 종교개혁: 개혁의 왼쪽
그러나 루터·칼뱅 같은 ‘주류 개혁가’들조차 이단으로 단죄한 더 급진적인 흐름이 있었다. 이른바 급진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이다. 그 대표가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 Anabaptists)였다. 이들은 갓난아기에게 베푸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신앙을 스스로 고백한 성인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래서 이미 유아세례를 받은 이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고, ‘재세례’라는 이름이 붙었다). 많은 재세례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비폭력을 내세웠다. 1534–1535년 뮌스터에서 일부 과격파가 무력으로 도시를 장악한 사건은 예외적 일탈이었지만,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주류 개신교 양쪽 모두에게서 가혹하게 박해받았다.
세르베투스: 개신교도, 이단을 불태우다
종교개혁이 이단 처형의 ‘독점’을 끝내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건이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죽음이다. 에스파냐 출신의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그는(폐의 혈액 순환을 처음 기술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가톨릭 종교재판에서 단죄되어 처형을 피해 달아난 그는 칼뱅의 도시 제네바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재판 끝에 1553년 10월 27일 화형당했다. 처형을 명령한 것은 제네바 시 당국이었으나, 칼뱅이 그를 고발하고 처형에 동의한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칼뱅이 직접 죽였는가’를 둘러싼 책임의 정도는 오늘날까지 논쟁거리다.
세르베투스의 죽음은 개신교 내부에서 양심의 자유를 둘러싼 최초의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일 뿐”이라며 신념을 이유로 한 처형에 항의했다. 이단 처형의 한복판에서, 훗날의 관용과 종교 자유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소키누스파: 이단에서 근대 사상으로
반(反)삼위일체의 가장 체계적인 흐름은 폴란드에서 자랐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렐리오 소치니(Lelio Sozzini)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Fausto Sozzini, 라틴명 소키누스)의 사상을 따른 이들은, 폴란드 형제단(소교회, Ecclesia Minor)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들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대속(代贖) 교리를 부정하고, 성서를 이성으로 해석할 것을 강조했다. 1605년 출간된 『라코비안 교리문답(Racovian Catechism)』이 이들의 신앙을 집대성했고, 라쿠프의 아카데미가 그 거점이 되었다.
소키누스파(Socinianism)는 1658년 폴란드 의회에 의해 금지되어 흩어졌지만, 그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 같은 사상가들이 이 흐름에서 자극을 받았고, 소키누스주의는 훗날 유니테리언(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파)과 계몽주의적 이성 종교의 한 뿌리가 되었다. 한 시대에 단죄된 ‘이단’이, 다음 시대에는 근대 사상과 종교 자유의 물줄기로 흘러든 또 하나의 사례다.
7부 · 19–21세기현대의 재해석: 누가 역사를 쓰는가
오늘날 우리가 ‘정통’이라 부르는 것이 정말 처음부터 정통이었는지를 두고, 20세기의 역사학은 1,600년 동안 이어져 온 그림을 근본에서 다시 그렸다. 이 마지막 장은 이단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역사를 다룬다.
전통적 그림: 정통이 먼저, 이단은 타락
4세기의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Eusebius of Caesarea)가 정리한 구도가 오랫동안 표준이었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사도적 가르침, 곧 정통이 맨 처음에 있었고, 이단이란 그 뒤에 끼어든 타락이자 일탈이었다. 진리가 먼저이고 오류는 나중이라는 이 그림은 단순하고 강력했으며, 이후 천 년이 넘도록 거의 의심받지 않았다.
발터 바우어의 전복
1934년 독일의 신학자 발터 바우어(Walter Bauer)가 『초기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Orthodoxy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을 펴내며 이 구도를 뒤집었다(영어 번역본은 1971년에 나왔다). 바우어는 초기 기독교의 여러 지역에서, 훗날 ‘이단’으로 규정된 형태가 오히려 그 지역의 원래 다수파였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정통’이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 분파의 입장이었고, 그 분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뒤 자신의 승리를 시간을 거슬러 ‘처음부터의 정통’으로 투사했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먼저였고 획일성은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에우세비오스의 그림을 정확히 뒤집은 가설이었다.
나그함마디: 패자의 목소리
바우어의 가설에 강력한 자료를 더한 것은 한 우연한 발견이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한 농부가 봉인된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콥트어로 쓰인 13권의 고문서 묶음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을 비롯한 영지주의 계열 문헌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영지주의는 거의 전적으로, 그것을 공격한 이레나이우스 같은 정통 교부들의 반박서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피고의 말을 검사의 요약으로만 들어 온 셈이었다. 나그함마디 문헌은 처음으로 그 ‘패자들’이 자기 입으로 남긴 글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았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하자.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를 단죄한 검사의 최종 논고뿐이었다. 피고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피고는 이렇게 주장했다”라는 검사의 요약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인된 상자 하나가 발견된다. 그 안에는 피고가 직접 쓴 편지가 들어 있다. 이 발견은 피고가 옳았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 우리는 그를 그 자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나그함마디 문헌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료들을 토대로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s)』, 바트 어만(Bart Ehrman)의 『잃어버린 기독교들(Lost Christianities)』 같은 책이 ‘초기 기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는 그림을 일반 독자에게까지 널리 퍼뜨렸다.
반론: 정통은 정말 후대의 발명인가
그러나 바우어의 가설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그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지역만 선택했고, 자료가 없는 곳에서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에 기댔다고 지적한다.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Andreas Köstenberger)와 마이클 크루거(Michael Kruger)는 『정통이라는 이단(The Heresy of Orthodoxy)』(2010)에서, 초기 교회에도 사도적 가르침의 식별 가능한 핵심이 존재했으며 바우어가 다양성의 정도를 과장했다고 반박했다. 다양성이 먼저였는가, 아니면 핵심은 처음부터 있었는가. 이 물음은 지금도 열려 있는 논쟁이다.
‘이단’이라는 말의 오늘
‘이단’이라는 말의 무게는 오늘날에도 가볍지 않다. 특히 한국의 종교 지형에서 이 단어는 흔히 기성 교단이 특정 신흥 종교 운동을 가리킬 때 쓰이며, 무엇을 이단으로 규정할 것인가는 그 자체로 교단과 시대에 따라 갈리는 문제다. 어떤 집단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는 일은 이 글의 몫이 아니다. 다만 2천 년의 역사가 일관되게 보여 주는 한 가지는, ‘이단’이라는 선이 언제나 그 선을 그을 권위를 누가 쥐고 있는가의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가며기독교가 자기 정신을 알아 온 역사
이단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정통이라는 것이 어느 날 하늘에서 완성된 형태로 내려온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삼위일체도, 그리스도의 두 본성도,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도, 우리가 정통 교리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격렬한 논쟁의 산물이었다. 대공의회는 이미 존재하던 정통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도전에 맞서 그것을 벼려 냈다. 아리우스가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 아니다”라고 묻지 않았다면, 니케아는 ‘동일본질’이라는 답을 그토록 날카롭게 벼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과 이단은 쌍둥이다. 한쪽은 다른 쪽이 그어 주는 경계선 없이는 자기 모습을 가질 수 없다. 이단을 규정하는 행위가 곧 정통을 규정하는 행위였다.
역사는 승자가 쓴다. 정통은 승리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언어로 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패자들이 던진 물음 — 신은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인가, 그리스도는 어떻게 신이면서 인간인가 — 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이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역설은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자신을 위협한 물음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 정신을 또렷이 알게 되었다. 맞서야 할 상대가 없었다면, 정통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조차 그토록 정밀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단의 역사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알아 온 역사다.